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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87강 20170425 마태복음 23장10절(봉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87강 20170425 마태복음 23장10절(봉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0절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 있을 진저”가 반복해서 계속 나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누구한테 저주를 하는지, 그 사람들의 성향이 어떠냐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죠. 이 예수님께 저주받는 성향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아,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심판의 기준이 따로 있는, 이런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전체가요. 여기 9절에 보면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절,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이래되어 있죠. 이걸 통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우주적 연쇄’를 생각합니다. 연쇄. 연결되어 있다.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죠. 여기 지도자, 그리스도인데, 지도자는 땅에 계시죠. 그리스도는 땅에 계시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면 우주적 연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고 땅이고 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잖아요.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된 방식이,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지도자라고 하지 마라. 오직 누가 지도자다? 그리스도만 지도자라고 해서 하늘의 뜻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유일한 분은, 우주적 연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오시는 그 분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를 인간들이 알아보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이 그리스도가 왔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요인이, 그 이유가 인간 내부에 장착되어 있어요. 타고난 인간 내부 속에 이게 담겨있어요. 그리스도가 코앞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 속에는. 그게 뭐냐 하면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자기로부터 하는 거예요. 자기. 자기인데, 자기의 특징은 뭐냐 하면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리스도의 특징은 반대가 되어 낮아지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높아지려고 하는데 어디까지 높아지려고 하느냐 하며 바로 신의 영역까지 높아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을, 23장 2절에 한 번 봅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디 자리에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모세의 자리 앉았죠. 모세는 두 사람, 세 사람이 아니에요. 모세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오면서 모세는 그야말로 유일한 통로로 작용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모세한테 물어야 돼요. 하나님은 모세 이외의 다른 사람하고는 대화를 안 합니다. 그걸 좀 설명해야 되는데, 방금 제가 한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줬잖아요. 십계명을 줬다는 말은 모세 빼놓고 십계명을 다 지키면 되게 되어 있는데, 그들이 십계명을 받을 자격도 안 돼요. 도중에 모세가 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언약을 깨버렸어요. 모세가 알아요. 모세는 저런 마음가짐으로서는 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깨버려요. 깨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동행을 하는데, 율법이 없어졌다는 말은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다시 하나님께서 부르죠. “너를 봐서 이스라엘과 동행할게.” 조건이 바뀌어요. “너를 봐서.” 조건도 그 조건이라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단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 가운데 모세가 있기 때문에,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의 복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행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진격이 가능하다. 그걸 가지고 모세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민수기 같은 데서 보면 그 모세가 갖고 있던 하나님의 성신이 조금씩 퍼지게 됩니다. 70인 장로들한테 준다든지, 여호수아한테 준다든지,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모세한테 아주 충성심이 많아가지고, “저 사람들도 모세처럼 성신으로 예언을 하더이다. 좀 말리소서.”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나중에는 모든 이스라엘이 저들처럼, 나처럼 예언을 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합니다. 성신에 의해서 예언을 하게 된다. 그게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종교하고 복음하고 차이점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상태로 계속 기다리는 것이지만 복음은 이미 완료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완료된 겁니다.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기다림,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소망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복음은 이미 온 것에 의해서 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해줘야 돼요. “나는 아니고 주님입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복음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하늘나라에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이 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움직이고 쌈밥 집에 가고 그런 거예요. 모든 게. 강아지 돌보고.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투표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나쁜 짓해서 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등장한 동시에 저쪽에는 저주스러울 수밖에 없다. 화가 있다. 그들 중에서 한 명도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이 하는 행세 자체가 저주받을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세는 그 뒤에 이어지는 우리에게도 계속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 나쁜 사람! 왜 예수님을 힘들게 하냐?”라고 바리새인 욕하지 마세요.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마찬가지인데,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13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취지로 일을 합니까? 안 합니까? 그런 취지로 일을 안 해요. “어서옵쇼!”하고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들이 인도해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하면 천국 갑니다.”라고 친절에 친절을, 배려에 배려를, 희생에 희생을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이거는 예수님의 일방적 견해라니까요. 일방적 견해. 본인들 본심은 그게 아니에요. 한 사람이라도 건지려고 애를 쓴다고요.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건 뭐냐 하면 탈출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탈출 할 수가 없어요. 근데 바리새인들은 문이 있고 그 문을 통해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의 생각은 문이 없다는 거고. 바리새인들은 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천국 보내주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그렇게 애를 써야 돈이 나오니까. 소개비 나오잖아요. 소개비. 커미션commission나오잖아요. 커미션. “천국 가놓고 돈 그것만 내나? 그만큼 더 내야지?” 뭐 이런 것. “염치도 없지. 생명을 줬는데 돈 그 정도 내서 되겠어?” 이런 것. 돈을 내든, 전도를 하든, 무슨 짓을 해도 갇혀있는 겁니다. 탈출구가 없습니다. 그냥 해보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희망 없이는 못사니까. 가장 잔인한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희망을 꺾는 사람이에요. 그 아파트 전기공사하는 사람이 그 사장과 전에도 일했는데 돈을 안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하면 전에 안 주던 돈까지 준다고 했어요. 이 사람을 두 번 배신해버렸어요. 전기공사 하는 사람한테. 그래서 그 사람을 인터뷰하는데,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바로 “화 있을진저”하는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떤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다들 갇혀 있고, 갇혀있으면서, 원래 솥뚜껑 덮고 콩이나 죽이나 뭘 끓이면 솥뚜껑 겉은 멀쩡한데 그 안은 난리가 났죠. 그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솥뚜껑으로 꽉 닫아놨어요. 마귀보고 솥뚜껑 놀이하라고 마귀를 보내가지고 꽉 누르게 해놨어요. 그 안에서 인간들끼리, 마귀한테 눌린 상태에서 니가 죄인이니, 니가 의인이니,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처지인데. 뭐, 니가 죄인이고 내가 의인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전부 다 주님 보시기에 다 뭐냐?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낮추고 있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근데 또 불교신자는 또 낮춘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누가 더 잘 낮추나, 시합하고 있어요. “그 정도로는 안 돼! 더 낮아야 돼!” 어떤 드라마 연속극 주제가에 이런 게 있어요. 얼마나 아파야 되는가, 얼마나 더 아파야 이 사랑이 덜 고통스러운가, 라는 노래가 있어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천국이라는 것을 보상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프고, 아프고, 얼마나 고생을 해야 이 고생 끝이 나겠습니까? 앞을 보고 달린다고 이게 끝날 시합일까요? 탈출구가 없고 솥뚜껑에 갇힌 입장에서는, 어떤 목적을 향하여 앞서간다고 해서 과연 앞서갈까요? 먼저 코 박을 뿐입니다. 아니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해서 탈출이 가능할까요? 내일모레 곧 죽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모세가 없는 이상은 이스라엘이 죽어도 지옥 갑니다. 돌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단절되었다는 거예요.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처음부터 인간은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곳에서 천국이 저기 있다, 무지개 뜰 때 저 뒤편에 천국이 있고, 라고 아무리 백날 손가락질해도, 밤중에 달이 나와서 “날 가리켰나?” 하면 소용없어요. 해와 달과 별이, 그것들이 창공을 꽉 지키고 있는데, 어떤 누구도 이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말합니다. 천국은 없다고. 천국은 없다. 다만 하늘이라는 공간의 연속이고 공간과 공간의 무한한 연속이다. 결국 과학에서 말하는 이 말은, 무한에 갇힌 유한자. 이게 과학이라는 종교입니다. 다만 솥뚜껑 속에 갇혀있으면서 이용해먹을 거만 이용해먹으면 되죠. 물이 떨어진다, 거기다가 물레방아 돌려가지고 밤에도 환하게 할 수 있는 전기를 빼내면 되는데, 전기를 빼내는 목적으로 살았다고 해서 이 세상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화로다 망하게 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전기세 내고, 밤에 tv이 많이 보고, 죽고, 그 다음 날에 지옥가고. 노인 되어 못 걸었는데 휠체어로 잘 걷고, 걷다가 죽으면 그날 지옥가고. 그런 거죠. 이미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언약으로 인하여 저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언약이 없으면 죽어서도 언약이 없는 거예요. 죽어서 저주받아야 돼요. 저 강아지만 비참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불쌍해요. 나 니보고 이야기 안 했다. 인간이 불쌍한 거예요. 인간이. 개는 그냥 사물체에요. 사물체. 언약과 약속과 관계가 떨어져있으면 그거는 이미 죽은 자에요. 개는 뭐가 되느냐 하면 흙이 됩니다. 인간도 흙이 돼요.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개도 마찬가지고. 6일째 만든 것은 다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 창조가 다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형태가 뭉개지면 무형체로 되는 것하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설교 때 했잖아요. 코 성형하고 뭐 해도 뭉개지면 동일한 흙이라는 겁니다. 인물이 이쁜 건 좋지만, 다들 이쁘시지만, 흙이 약간 남과 다르다는 것뿐이죠. 여기서 좀 더 설명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이런 일방적인 평가를 하시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럼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러면 천국 문이 어떻다고 소개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게 좀 더 23절까지 나와요. 16절에 한 번 봅시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현대인 같으면 이게 무슨 말이지 잘 모를 거예요. 사람 자체가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잖아요. 이미 목적은 정해져있어요. 솥뚜껑에 갇혀있는 이 캄캄한 세계에서 자기가 높아지려고 한다 말이죠. 높아지려고 이성으로 상상하겠죠. 솥뚜껑 바로 밑에다 뭘 그리겠어요? 하늘나라를 구상해가지고 환상으로 깔아놓겠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다고 사람들이 상상하겠죠. 이게 오늘날 교회 있으면 저 하늘나라에 예수님의 나라가 있고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셔가지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지키면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형태라는 말입니다. 종교니까. 인간은 이 하나의 법을 따라가게 되면 천국 문에 이른다는 거예요. 천국 문에.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을 이야기하거든요. 천국 문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따라가면 되는데, 이 율법은 어디로 되어 있느냐 하면 성전중심으로 되어 있어요. 성전중심으로.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전부 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 시온 성, 거기서 하나님하고 인간의 만남이 성사된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 하나님께서 법을 앞장세워서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습니다. 지금 복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이 아니고 뭘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죠. 이사야 9장 6절에 나오잖아요.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그랬죠. 마태복음 17장에 “마지막 때 너희들은 아들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나타나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아들의 말을 들으라.” 그럼 엘리야와 모세가 법을 지키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서 죽기를 원했습니까? 죽기를 원했죠. 아들은 이 땅에서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죽음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법이 법으로 살려면 내가 죽으면 안 돼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말은 인간은 이미 법을 요청하기 전에 인간 나름대로 이미 법 감정이, 법의식이 갖추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 속에 법이 있어요. 이 법을 내가 지켜야 돼요.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도중에 실패하면 안 돼요. 이 법 지키는데 성공을 해야 돼요. 그 법 중에는 전도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법 지키는 것을 가지고 맹세라고 하는 겁니다. 맹세. 어떻게? “예. 지키겠나이다.” 맹세. 자, 보통 일반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 어디를 두고 맹세합니까? “내 목을 내놓을게.” 뭐 이런 거요. 그렇게 하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이런 거. 이렇게 한다는 말은 현재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맹세하잖아요. 지난 오후설교 할 때, 담보물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전당잡히듯이 가장 귀한 것을 내놓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귀한 것을 내놓는다는 말은, 내가 성전을 위해서 맹세한다는 말은, 내가 만약에 법을 제대로 지키게 되면 나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 성전에. 성전에 골인하게 되면, 구약에 의하면 예루살렘성의 일원이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 문에 이르게 되는 백성으로 확인이 되는 겁니다. 확인이. 인정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이렇게 한 번 설명해봅시다. “내 말이 틀리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근데 한 일주일 뒤에 보니까 손이 멀쩡해요. 그 말은 뭐냐, “손이 멀쩡한 거 보이지? 내 손 멀쩡한 거 눈에 보이지? 봐라! 내 약속대로 되잖아!”라고 자랑할 수 있는 증거물이 돼요. 손이 멀쩡한 게. 어떤 국회의원은 손 지진다고 해놓고 안 지졌는데. 청문회 할 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끓는 물에 손을 담근다는 말이에요. 내 말이 맞으면 끓는 물에 손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안 맞으면 진짜 손이 문드러져 상해를 입겠죠. 내가 성전으로 맹세한다는 말은, 나 괜찮다는 이 말이에요. 나.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정도로 믿음이 좋은데, 뭐 이야기를 해야 될 건데, 증거를 한 번 보여줘? 성전에게 맹세할게. 나 성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이런 뜻이에요. 그 다음에 한 번 봅시다. 16절 하반 절에,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성전 중에서도 뭐가 있으니까? 금이 있으니까. 최고로 자기가 만만한 거예요. 그 다음에 18절,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귀한 제물에 대해서, 제물을 가지고 팽개치고 짓밟고 하는 이런 사람은 없을 거 아닙니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것, 가장 거룩한 것, 이런 리스트가 나오는 겁니다. 성전, 성전의 금, 제단, 제단의 예물, 제단보다 더 우열한 게 제단의 제물. 하여튼 하나님께서 고상하다고 여기는 그 리스트, 항목들을 가지고 쭉 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수 있어? 갈 수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어?” “나 성당 다녀. 나 성당 다닌다고!” “나 교회 다녀. 교회 다닌다고!” 이게 뭡니까? “에이 참, 내 말 안 믿어주네? 나 성당 다니고 교회 다녀. 나는 안 믿어줘도 성당이 얼마나 수천 년 동안 고상하고 교회가 얼마나 착한 일 많이 하는지 니 알지? 너도 똑같이 인정하는 그것에다 내가 걸게.” 이래 하는 거예요. 결국 성전, 성전의 금, 제단, 제단 위의 예물, 이 모든 것은 갇혀있는 것들끼리 기껏 최고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의 항목들이에요. 주님은 말합니다. 그게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다는 겁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큰소리 많이 친다고 해서 믿음이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없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나는 믿음이 좋아.” “니가 왜 믿음이 좋아?” “이근호 목사님이 나보고 믿음이 좋다고 했어.”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소경된 자여! 왜 본인의 믿음을 남들에게 설득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없고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냥 주님 주시하고 교제하면 되지, 꼭 남한테 그걸 과시해야 되는 겁니까? 어떤 목사가 자기는 박사학위를 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왜 받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석사로 말씀 전하는 것보다 박사로 말씀 전하는 것이 더 권위가 있어가지고 사람들을 천국 보내는데 더 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박사권위니까 믿어주자는 그 교인이나 박사권위로 밀어붙이자는 그 목사나 둘 다 쓰레기에요. 둘 따 쓰레기라고요. 인간들은 예수님이 와도, 그리스도가 와도 그리스도를 못 알아 봐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그 안목가지고, 그 시선가지고 뭘 만들어냈는가를 한번 쭉 보여주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것들을 걸고 서로서로 거기에 찬동하고, 생각들이 결집이 되어 있느냐는 말이죠. 딱 하나로 되어 있어요. 하나로 결집되는 거예요.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님 죽일 때 한 사람이 죽였습니까? 모두가 죽였습니까? 모두가 죽였어요. 모두가. 누구하나 예외 없이, 제자들은 지금 다 도망갔어요. 만약에 도망간 베드로를 경찰이 와서 딱 잡아가지고, “예수님 풀어줄래? 바나바 풀어줄래?”하고 투표현장에 딱 집어넣어버리면 베드로가 표를 어디에 던지겠습니까?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동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에 있는 죄는 우리에게 영향을 입혀가지고 내 스스로, 죽은 자는 내 스스로 자체의 변화를, 결과를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 밖에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왜 이 딸기를 먹었냐? 주께서 이 딸기를 먹게 하신 겁니다. 만약에 손 다 다쳐서 개처럼 입으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걸음, 두 걸음,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우주의 연쇄. 우주에서 돌아가는 모든 연쇄 고리, 고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어느 것 하나도. 하필 그때 미장원 갔다 오고, 하필 그때 목욕탕에 갔다 오고, 하필 그때 버스 놓치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딱딱 곽에 맞춰져 있어요.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딱딱 그 타이밍 맞춰서 우주적 연쇄에 의해서 주님이 다 관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살아있어서 일을 만드시는 분이에요.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어느 것 하나. 따라서 우리는 감사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범사에 감사할 뿐이죠. 그럼 감사의 목적은 뭐냐, 우리는 목적이 있어요. 마음을 낮추게 하고 우리를 죄인 되게 해서, 죄인이 내세울 게 없잖아요. 마음이 자동적으로 낮춰지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목적이고 뭐고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의해서 가두어진 세계에서는 목적이라는 것이 다 무의미한 겁니다. 무의미한 거예요. 공무원 시험 3년을 쳤다. 또 떨어졌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 청년이 자살을 했죠.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자살을 했죠. 그 청년 목적이 뭡니까? 공무원 시험이에요. 그럼 공무원 시험 떨어지면 인간 아닙니까? 자기는 인간 아니래. 왜? 자기는 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 자기 자신이래. 지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가 그렇게 하기 전에 다른 공무원이 있는 거예요. 한 번 물어봅시다. 교인 수 두 명 되면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교회죠. 근데 두 명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적어도 200명 돼야 된다고 합니까? 이미 남들이 200명 쯤 돼야, 그리고 자기 고정 건물이 있어야 교회라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자기의 목적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 자아를 거기에다 맞추어서, 자기 자아를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안 되면 죽고 싶은 거예요. “나 목사 아니야.” 그런 인간은 죽어버려라. 대전 역에서 택시타고 딱 나오면 네거리가 등장하거든요. 네거리에서 보이는 것이 있어요. 건물이 고딕으로 되어 있어가지고, 교회나 성당건물처럼 스탠드그라스 있고, 그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표시가 있어요. 만(卍). 그러니까 이 위에 있는 십자가(十)는 없애버리고 불교 만(卍)을 올려놨어요. 스탠드그라스는 못 고쳤어요. 이게 수리비가 많이 드는가 봐요. 고딕 스탠드그라스는. 대전 역에 나가거든 한 번 보세요. 거기에 있다고요. 못 봤죠? 교회 하나 있고 그 옆에 건물에 만(卍)표시가 딱 달려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十) 백날해도, 안에 내용은 세상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요. 십자가 믿어놓고, “이거 공무원 떨어지면 나 죽겠습니다.”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니, 자살은 왜 합니까? 지 목적이 있어서 그래요. 기대하는 그게 악이에요. 기대하는 게. 평생 인간은 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요. 이 목적과 은근히 기대하는 것. 목적이 이끄는 삶. 아침에 눈만 뜨면 기대해요. ‘오늘도 뭐 해야 되는데.’ 기대를 한다는 것은 윗대가리 십자가를 날려 보낸 거예요. “주님. 오늘도 따로 놉시다.” 우주적 연쇄를 잊어버리고 소박하게 나만의, 현재 내 자아를 기어이 사수하고 지키려는 그 여건을 따로 꽉 쥐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란 평생 이렇게 살아가요. 우리 집사님 지금 기대가 졸린 눈이 떠지는 거예요. 잠 오게 하신 것이 우주적 연쇄라니까요. 모든 걸 감사해야 해요. 잠 오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잠 오는 것도. 그 정도로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고, 고 순간, 순간 주께서 나를 새롭게 제작하는 겁니다. 주의 뜻에 합당하게. 화 낼 일이 없죠. 눈 뜬 나도 있지만, 눈 뜬 나만 고집하지 마시고, 눈 감은 나는 내가 아니라고 왜 우깁니까? 소화 잘 되는 나만 생각하지 마시고 소화 안 되는 나도 있잖아요. 왜 내 걸 내가 쥐려고 합니까? 그것은 기존의 내 것을 기어이 쥐려고 하게 되면 거기에 기대가 있고 그 기대는 주님을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도록 악마가 작용합니다.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씨!”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우이 씨!” 광주에 갔더니만 오목사님이 저한테 시비를 거는 게, 기도를 하면서 “에이 씨!” 했는데 이건 어디에 근거해서 나왔습니까? 그래서 근거를 보여줬죠. 우리 외손녀가 인형하고 놀다가 “에이 씨!” 했어요. 근데 그게 너무 빨리 지나가서 못 찾아내겠다는 거예요. 결론이 뭐냐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예를 들었다고 결론이 났어요.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잠 깨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21절에 보면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절,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니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나 아나? 니가 하나님이 뭘 맹세했는지 알기나 알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맹세로 끝났어요. 사람의 맹세를 안 듣습니다. 사람하고 상대를 안 해요.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있잖아요. 하나님은 모세하고 상대해요. 백성들하고 상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과 백성들하고 부딪치게 하죠. 니가 얼마나 죄인이고 법을 못 지키는지, 하지만 모세를 보고 내가 너희들을 떠나지 않고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우리 안에 누구 계셔. 분명히 그 분이 계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기대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만 잠기어버리고 그게 날아가 버려요. 윗대가리 십자가(十)를 모가지 쳐버리고 만(卍)자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꾸준하게, 순간순간, 하루를 살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십니다. 일하기 위해서 9시에 오라고 했는데 꼭 둘이 9시 넘어서 늦게 오고. 이런 것 있잖아요. 회의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꼭 엉뚱한 짓 해가지고 회의 분위기 다 망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회의 잘 되는 것은 내 뜻이었고 그 망치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짊어진 나의 기대가, 십자가에 감사해야 될 감사를 내가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네 자로, 사자성어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이고 신앙생활입니다. 내 마음을 낮추는 겁니다. 안 그러면 역시 내 맹세대로, 내 기대대로 응답이 돼서 까불락 돼서 그 꼴을 못 봐요. 뭔가 뜻대로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알아서 손드세요. 기도응답 받거든 알아서 손들고. “두 번 다시는 이런 기도 안 하겠습니다. 응답되는 기도 안 하겠습니다.”하고 손들고 있어야 돼요. 방금 읽었던 21절, 22절 그것이 내용으로 주어지는데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재미있는 것이 십일조도 하고 의와 인과 신도 갖추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십일조도 하면서 의와 인과 신을 병행해서 드릴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이미 인간의 마음은 낮춰진 게 아니고 높아져있기 때문에, 인간이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한 것을 본인이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포기가 안 돼요. 주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십일조를 했다는 말은 이미 인과 의와 신은 날아가 버렸다는 뜻이에요. 십일조 한 행위가 뭘 가리느냐 의와 인과 신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럼 십일조를 안 하면 의와 인과 신이 되겠습니까? 해야 되는데 나는 복음 알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가 의와 인과 신을 가려버립니다. 해도 죄인이고 안 해도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머리를 잘 굴려야 돼요. 이왕 죄인 될 것 돈도 아끼고 교회도 안 나가고. 이왕 죄인 되는 것.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 귀한 것 누구한테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귀한 돈을 목사하고 교회한테 뺏기지 말라고. “하나님한테 뺏기라면서요?” 하나님한테 빼앗기라는 것은 마지막 죽으면 다 뺏기는 거예요. 죽을 때 다 빼앗기는 거예요. 어차피 재물은 우리의 구원을 대신하지 못하니까 다 빼앗기는 겁니다. 그러면 돈을 왜 주셨느냐? 더욱더 죄인 되라고 주신 거예요. 가지고 있으면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빼앗김의 아픔이 얼마나 독한 것인가를 알아라 이 말이죠. 아플 때 아프더라도 갖고 싶죠. 아프고 아프지 않고는 나중문제에요. 일단 엄청 갖고 있는 기쁨이라도 누리고 싶잖아요. 십자가(十)모가지 날아가든 말든.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삽니다. 불안한 이유가, 뭔가 기대한 것이 있어요. 지금 한 달 월급이 150만원이다. 십년 뒤에도 150만원이 아니라 기대한 것이 있잖아요. 기대한 것이 있는데 “아빠! 보증 좀 서줘.”라고 하면 이게 문제다 이 말이죠. “취직할 때인데 취직은 안 하고 왜?” “취직은 못하겠어. 사업하고 싶어.”라고 나오면 골치 아픈 거예요. 따박따박 한 달에 얼마 버는 것이 낫지, 딸이 와서 “아빠!” “왜?” “또 임신했어.” “애가 지금 둘인데 또?” 둘인데 또 하나 더 낳으면 나중을 누가 감당 할 건데? 한 명당 4억인데? 이거 누가 할 거예요? 손자 데려 와가지고 “할아버지한테 인사해라. 이번에 사립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이거 뭐 돈 돌라는 소리 아니에요? “공납금 700만원이라고 이야기해라.” 이거 뭐에요? 그런 소리 하지마라고 고등학교 때 용돈 한 10만원씩 줬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할아버지가 10만원으로 입 싹 닦고 싶어도, 이번에 설날에 와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여보! 한 학기만 당신이 해줘야지.” 또 약한 게 여자의 마음이라. “많이 해줬잖아?” “그러지 말고 눈감고 해줘라.” 근데 시집가서 하고 친정에 가서 하고. 한 두 번만 하면 2학기는 보장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애 놓지 말라고 하니까. 지금 대학 들어가는 이것은 문제도 아니에요. 애가 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응이 안 되가지고 미국 보낸대요. 미국. 그걸 왜 나발을 불어. 미국에 가든, 굶어죽든 니들이 알아서 하지. 더는 없다고 하고 싶은데, 유학 보낸대. 아이고, 참내, 온 관계된 사람들을 전부다 조져놓는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수술하라고 해가지고 둘로 끝나는. 지금 날짜 조절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게. 서로 벌벌 떨면서 니가 수술하라고 서로 미루고. 어떻게 여자보고 하라고 해요? 남자가? 겁난다고? 오늘 제목을 뭐로 할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기대 자체가 의와 인과 신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봉쇄라고 해야 되겠어요. 철저하게 복음을 봉쇄해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성령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는 주께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봉쇄하는 그것은 바로 처음 우리가 구원받을 때 여전히 봉쇄되어 있거든요. 봉쇄의 연발성, 봉쇄의 반복.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하는데, 안 돼요. 끝까지 주의 성령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철저하게 우리의 야심과 교만과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 왜 바리새인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이렇게 해가면서 교인을 데려오려고 합니까? 그게 자기의 의와 인과 신의 합당한 열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봐! 전도했잖아. 그러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 맞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1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봉쇄잖아요. 제목이 봉쇄 아닙니까? 십일조가 바로 봉쇄입니다. 십일조를 봉쇄라고 하는 교회를 제가 못 봤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이렇게 해요. 그럼 교회가 왜 십일조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논리를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구약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 안 보이죠. 그럼 이 땅에서 안 보이는 하나님에게 보이는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는가? 보이는 단체가 있잖아요. 성당과 교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갈 때는 등록을 해야 돼요. 그리고 성당에서는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립니다. 미사 할 때 들어가는 것이 뭐냐 하면 성만찬 들어가죠. 개신교는 일 년에 두 번하죠. 교인들이 너무 귀찮아하니까, 아주 편리하게 고객들의 의사를 반영해서 두 번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안 그랬는데, 자주했는데, 점점 더 편리위주로 되어서 두 번 해요. 그러면 그 단체를 유지하려면, 여기가 구약이니까 누가 제사장 역할을 해야 돼요. 제사장 역할, 지도자 역할을 누가 해야 되잖아요. 아까 지도자 나왔죠. 땅에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지도자라고 자청을 해야, 교인들이 원하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떤 보이는 세계의 구체화 되게 되면 마음에 평정을 갖고 안심을 하게 돼요. 근데 교회는 가야지, 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아까 물었잖아요. 두 세 사람만 있는 것도 교회입니까? 라고 물었잖아요.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해요. 두 사람, 세 사람, 머리 숫자와 관계없어요. 두 사람이고 관계없어요. 근데 교회는 가야지, 라는 그 모델이 뭐냐, 이미 이 정도 안정권에 든 교회를 교회로 보고, 개척교회 홀로 있는 교회는 교회 될라고 하는, 교회는 아니라고 본 거예요. 가봐야 돈만 내라고 하고, 우리도 교회건물 짓자고 돈 내라고 하니까 귀찮아서 안 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이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단체를 유지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잖아요. 눈에 보이는 단체는 예배당이 있어야 되고, 예배당하려면 터 사야 되죠. 설계비 줘야 되죠. 자재비 줘야 되죠. 인건비 줘야 되죠. 그걸 운영하려면 감독비 줘야 되죠. 그리고 예배당 세워지면 그걸 늘 관리하는 사찰집사 세워야 되죠. 그리고 그걸 총 의견을 종합할 목사가 있어야 되죠. 구색은 다 갖춰놓았잖아요. 근데 이 교회마저 교단 만들어가지고 이 재산을 다 교단이름으로 해가지고, 법인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저쪽으로 다 가져간다니까요. 법인 만든 이유가 뭐냐, 자기 똘마니들 퇴직할 때 퇴직금 주고 월급주려고. 그래야 목사의 최저 생활비가 있어야 목사의 권위가 장로권위보다 교인권위보다 더 높아져야 교회를 전제주의, 독재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로 천주교에요. 천주교는 교황독재입니다. 독재자가 둘이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어요. 인품에 대해서 시비하면 “나는 내 자리가 상징적 자리지 인품에 대해서 논하지 마라.” 내 교회라는 자리가 주님 주시는 자리라고 해야지, 내가 교황 될 인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왕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왕이 될 만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에요. 그 자리가 왕을 말해주잖아요. 교황도 상징이라는 자리가 교황을 만들지. 교황이 뭐 그런 식이라고 비난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목사가 이걸 그대로 따왔어요. “목사를 탓하지 마! 목사는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중요한 거야. 까불지 마!” 목에다가 너희들이 나한테 만약에 토 달면 출교 당한다는 것을 아예 한자로 쓰고 싶을 거예요. 인사권처럼. 말은 안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목사한테 대들면 성만찬 못하게 만들어요. 지금 세상이 이 우주의 연쇄에요. 주께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니는 믿음 있는가를 우리보고 늘 묻기 위해서. 만약에 저걸 욕하면서도, 우리는 삼백 명 오백 명 모이는 교회라고 하면 얼마나 이걸 지키려고 부러워하겠습니까? 말씀 운동한다고 강남교회 만들어놨는데, 교회가 싸운다고 했죠. 말씀운동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말씀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막상 현실은 뭡니까? 말씀은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예배당 사투벌이는 거예요. 이거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이근호 목사 은퇴하고 난 뒤에 누가 차지할 것인가? 이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참내. 슬슬 70이 다 되가지는 않지만. 제가 117세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죠? 교회는 없는 거예요. 그때그때마다 생겨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의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서 비춰봤습니다. 매일같이 음흉하게 내 것 지킨다고 의와 인과 신을 봉쇄하는 이 죄인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해주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취지를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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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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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 ➜ 자유게시판 대전-87강 20170425 마태복음 23장10절(봉쇄)-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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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