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414a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
안양20170414a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
성경말씀은 오늘 히브리서13장16절부터 보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16절에 보게 되면, 거기 제사라는 말이 나오지요. 히브리서가 1장부터 해서 13장이 끝입니다. 줄곧 신나게 달려왔지요. 엑셀을 밟으면서 죽 달려왔는데 13장 마지막까지 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느낌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성도는 떠나야 될 세계에서 온갖 것을 다 겪는다.
다시 할게요. 히브리서를1장부터 죽 오면서 느낌이 뭐냐 하면, 떠나야 될 세계, 우리 동네가 아닌 거예요. 우리 동네 아니면서 떠나면서 회고하면서 ‘아! 나 이런 동네 살았어.’ 하는 그 느낌으로 히브리서를 보시면 됩니다. 놔두고 떠나야 될 곳이에요. 이걸 가지고 김광섭은 말하기를 점점 더 멀어져간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성도가 그렇게 가야 될 이유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래요. 예수님이 자기 땅이 아닌 어두움의 땅에 와가지고 온갖 수모는 수모대로 다 당하면서 떨쳐버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떠났잖아요. 고 떠나는 코스를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이 어떤 코스를 밟아서 어떤 경로를 밟아서 떠났느냐, 그 경로가 성도 본인의 하루, 하루 인생의 가고 있는 고 길이에요. 그 하나의 코스다 말이죠. 코스.
그러니까 히브리서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봅니까? 느긋하고 편안하게 보는 겁니다. 꽃구경하듯이. 꽃이 참 예쁘구나! 하지만, 꽃을 꺾고 가지고 올 필요는 없지요. 이게 경로인데, 이 예수님의 경로에 특징은 뭐냐 하면, 세상 것에 대해서 소유는 안 됩니다. 소유는 안 돼요. 몸만 떠나야 되요. 몸만 떠나야 됩니다.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신앙인의 특징을 보면, 가족 위주가 아니에요. 가족 위주가 아니고.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 가족이 원래 누구입니까? 애굽의 바로의 가족이지요. 바로의 공주 아들 됨을 거절하고 새로운 구성인들이 모입니다. 구성인들이. 어떤 뮤지컬 같은 데 보게 되면 뮤지컬 무대가 있는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런 영화도 보면 뉴욕 후진데서 놀던 청바지 입고 놀던 청년들, 아가씨들 이야기입니다. 애 하나가 공터에서 놀고 있으면 시간 좀 지나면 약속한 듯이 저녁 무렵에 이쪽에 비슷한 같은 또래의 남자 친구들 나오고 이쪽에는 또 청치마 입은 아가씨들 또 나오지요. 한바탕 노래 부르고 춤추잖아요.
처음에 무대에 보면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래가 진행되게 되면 이쪽 구석에서 무대 세트 뒤에서 한두 명 나오고 또 노래 지나고 나면 이쪽에서 한 서너 명 나오고 나오다보면 무대가 출연진으로 한가득 되지요. 강물이 흘러가는데 시냇물들이 끼어들잖아요. 처음에는 작은 강물인데 가면 갈수록 강물이 점점 더 불어나가지고 한 모듬이 되지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에서 그걸 이야기한다 말이죠. 외로워요. 상당히 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족은 살자! 가 안돼요. 히브리서도 마찬가지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가족과 가족끼리 구성되어 있는 그 관계성, 그 관계성과 하나님의 백성끼리 모아지는 그 관계성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다릅니다. 달라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부부라 생각합시다. 옛날 60년대나 우리보다 연세 많은 70이나 80된 할머니들에게 묻습니다. “시집와서 가족들에게 왜 그렇게 잘해줬어요?” 라고 물으면 그 질문 자체가 이상해요. 시집왔으면 그 시집 귀신 돼야지. 이렇거든요. 무조건이지. 내가 잘해줄까? 말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무조건 시집 왔으면 그 집 귀신 되어야 돼요. 제사는 기본적으로 다 드리고. 옛날 우리나라의 가정의 관계는 제사 중심입니다. 아들을 왜 좋아해야 되느냐, 아들이 제사를 연속할 수 있어요. 딸은 저쪽으로 시집 가버리면 이쪽 대가 끊어져버리면 제사 지낼 사람이 없어요.
제사를 지내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제사를 드립니까. 음식을 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면 여자의 할 일은 그 중점이 뭐냐, 제사 지낼 때 그 제사음식을 거기에 참여하고 주도적으로 함으로서 영원히 그 시집집안에 며느리가 되는 겁니다. 맞지요? 제사를 중요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리 잘해줬어요? 하면 생뚱맞은 질문이에요. 그 질문 자체가. 흔히 말하는 말이야? 막걸리야? 하는 것처럼. 그리 이야기해요. 어떤 사람은. 무슨 뜻이냐, 이렇게 생뚱맞게 이야기하는데. 만약에 어떤 문제가 있어가지고 한 번 이혼했다 칩시다. 이혼까지는 안가고 이혼직전까지 갔는데 다시 남편을 받아들여가지고 같이 합친다고 시도를 해본다고 합시다. 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헤어지기로 작심했는데 자식이 말리고 장가갈 때 엄마 없으면 안 되잖아. 이리 달래고 해서 헤어지기 직전에, 냉각기간 4주 조정기간 지나서 다시 합쳤다고 칩시다. 칠 때, 그 때 뭘 발견하느냐 하면, ‘내가 저 남자와 왜 살아야 되지?’ 가 발견되지요.
처음에는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시집에서 하면 다 해야 돼요. 그것은 어떤 내가 저 남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지? 라는 게 없어요. 그건 뭐냐 하면 주체가 없어요. 독자적인 주체가 감각이 없다니까요. 주체 감각이. 그러니까 나는 시집사람 됐는데 다만 내가 약간의 희망이 있다면 시집에서 마구 칭찬이 날아오는 것. 우리 집 며느리 참 잘 들어왔어. 저 며느리가 들어와서 우리 집이 너무 잘 됐어. 우리 집 보물 같아. 그 칭찬과 그 시집의 사랑에 고마워가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더 더 더 봉사 충성하겠습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죠. 이리.
그런데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어가지고 헤어지기 직전에 다시 합쳐버리면 전에 안 나오던 질문이 나와요. “내가 저 남자한테 아침식사를 왜 마련해 줘야 되지?” “자기가 옷 벗어놓은 거 내가 왜 빨래를 해줘야 되는가?” 없던 뭐가 생겼습니까? 주체가 생긴 거예요. 주체가.
전에는 주체가 없었어요. 주체가 생겨버리면 뭐가 생기는가 하면, 주체가 발생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소유가 생깁니다. 전에는 주체가 없을 때는 그냥 소유 당함으로서 만족스러웠어요. “니 시집 안 갔지?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 이렇게 만족스러웠는데 만족의 이유도 모르면서 만족스러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주체가 생기면 내가 내 것을 챙겨요. 가만히 있어봐라.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몇 개나 되지? 저 차는 남편 차고. 집은 누구 이름으로 돼있지? 그 다음부터는 소유 감각이 생겨요.
소유 감각이 생김으로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주체에서 이게 발생돼요. 자유가 발생돼요. 자유라는 것은 자율적 선택권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결정할 때 누가 뭐라고 이야기해도 일단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내 결정 앞에서 나란히 그냥 후보감으로만 있을 뿐이지 어떤 명령이나 강요도 내 자유의 영역까지 침투하지는 못해요. 개한테 “가만히 있어!” 누가 명령해도 “가만히 있어.” 이리 되는 거예요. 주체가 있을 때는.
그런데 옛날에 주체가 없이 그냥 시집에 살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키만 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때 주체는 뭐냐 하면, 살아계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제사 지내는 그 어른이 모든 주체를 혼자 다 독점하고 있어요. 니 주체 다 가지고 와! 내가 너를 사랑받는 우리 식구로 만들 테니까. 다 가지고 와! 그러면 우리는 온 식구 앞에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줄도 모르고 희생당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상태가 더는 원한이 없이 그러면 대단한 만족 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돼버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길들여지기 시작해요. 제가 수요일 날 기도할 때 기도제목을 이걸로 한 겁니다. 인간은 주위로부터 길들여진 존재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다움의 내용을 절대로 우리가 내가 골라서 자율성을 발휘해서 내가 알아서 채우질 않고 주위에서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것만 쓰레기통에 담듯이 다 담아서 “저 어때요?”라고 남한테 숙제 맞듯이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게 길들여진 거예요.
길들여지기 때문에 본인이 화가 난다든지 슬프다. 기쁘다. 하는 그 내용도 본인 본래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슬퍼야 되고 눈치 볼 때 기뻐해야 되고 이래야 돼요. 바로 그것이 도저히 인간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육성입니다. 육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걸 끊어냅니다. 처음에 제가 히브리서를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남의 동네라고 했어요. 남의 동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길들여졌어요. 우리는 남의 동네라는 생각은 안 갖고 사나 죽으나 이 동네 귀신 되어야 돼요. 이 동네 사람으로서 이미 길들여져 있어요.
우리는 나그네고 객이라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이 우리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집니다. 낯설게. 성경에 있는 것은 알겠는데 별로 뭐 현실감이 뚝 떨어지네요.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나그네로서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 안 들고 성경에는 나그네라고 했는데 나는 오늘도 우리 집안의 우리 식구들 좋아하는 무슨 오뎅탕을 끓일까? 이런 식으로. 떠날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더 이렇게 보쌈으려고 하는 그것이 길들여진 속성에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길들여진 내가 울고불고 하는 그 우는 이유도 웃는 이유도 떠나는 게 좋아서 웃고, 머물러 있는 게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 정반대입니다. 행여나 이 땅에서 떠밀까봐 울고 떠나지 마라하니까 그게 좋아서 웃고.
히브리서 전체 내용은 예수님 가신 길로 가게 된다고 분명히 언지를 했지만, 막상 우리의 정서, 우리의 이상적인 감정은 스폰지에 물을 담그면 어떤 게 스폰지인지 물인지 구분도 안돼요. 얼른 보면 스폰지 안보여요. 뭐 집혀서 던져보면 두둑 두둑 물 떨어지는 거 건져내듯이 이미 우리는 스폰지 전체가 구멍이 숭숭숭 나있어요. 세속아 들어오너라. 세속을 담는 그 구멍들로 다 튀어져있어요.
지난 주일 오후설교인가 젖 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걸 가지고 젖을 한 번 짜보란 말이죠. 짜보면 뭐가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죄가 두두두둑 떨어지지요. 길들여졌으니까. 스폰지니까. 안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주님을 의식하는 것보다도 현재 나에게 행복을 준다는 그 공동체, 가족 공동체가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 사는 이유, 목표 전부다 여기서 다 공유된 거예요. 공통적으로.
뭔가 주체가 있어야 내 개인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데 이미 그 집의 며느리 되고 시집 와버리면 내 목적은 없고 시집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니까 “시집이여, 내 몸 하나 바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몸 바치고 자식을 위해서 몸 바치겠다는 거예요. 엄마의 삶은, 내 삶이 뭐 필요한데? 아, 여자의 일생이 그런 거지 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그런 거잖아요. 여자는 자기가 어디 있어요? 여자는. 누구 누구의 여자고, 누구 누구의 어머니고. 나중에 좀 되면 외손자 본다고. 외손자, 외손녀 봐야 돼요.
저임금에 시달리는 삶인데. 애 본다고 허리고 뭐고 다 뭉개지면서도 자식은 그걸 모른다고요. 우리 어머니는 손녀를 너무 좋아해. 이래 놓고는 돈 한 푼도 안주고. 매일 병원 가는 것도 모르고. 엄마가 자기 애 때문에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평소에 건강관리 왜 안 해?” 건강 관리하는 시간을 줬습니까? 엄마가 못한다고 하면 엄마는 너무 냉정해! 엄마는 너무 차가와! 나 엄마 보면 밥맛 떨어져! 실컷 키워놓으면 나중에 그런 소리나오게. 다른 엄마는 뭐 해주고, 다른 엄마는 희생하는데 우리 엄마는 왜 희생을 몰라. 너무 얍삽해! 이런 식으로 마구 나온다 말이죠.
도대체 내가 이 땅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으로는 자기 인생 꾸리고 싶지만 이 세상은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발목을 잡아버리지요. 발목만 잡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강제로 잡아당깁니다. 물속에 있는 스폰지처럼. 내가 물속에 있더라도 지금 내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이 전체 세상에서 자기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성도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오늘 히브리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 세상이 동그라미라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 있는가, 우리의 위치는 없어요. 없다는 말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없다고 그래요. 히브리서는 여기 없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있기는 있는데 히브리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데 이 세상에 따로 나와 있지요.
현재 이 세상이 하나의 접시이고 쟁반이라면 우리는 여기에 없어요. 우리가 신자가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의 중심이 서구니까 미국이 중심이죠. 미국 서구, 뉴질랜드, 캐나다, 유럽 이런 걸 중심으로 느끼는 이유가 돈만 좀 되고 여유만 있다면 어디에 여행가고 싶어요? 나이지리아 가고 싶어요? 아니면 케냐가고 싶습니까? 캐나다 가고 싶습니까? 여행 간다면. 뉴질랜드 가고 싶어요? 아니면 캄보디아 가고 싶습니까? 어디 가고 싶습니까? 돈 좀 있다면. 좋은데 가고 싶지요. 그게 서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현재 중심은 어디입니까? 서구 미국. 돈 많고 잘사는 나라가고 싶어요. 이걸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 아가씨들이 잘 표현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시집가는 걸 무서워해요. 지금 여러분 연대하고 달라요. 20대는 시집가는 게 무서워요. 왜냐 하면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자기를 뭐로 만드는가 하면 자기를 집안을 일구어 세울 주체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나이 때는 여자는 고등학교만 나오면 돼요. 아니 중학교 나와 가지고 그냥 여상 나와 가지고 뭐하다가 나이 돼가지고 부모가 정해준 총각하고 그냥 선바가지고 시집가서 숟가락 하나 바꾸는 거예요. 여기서 밥 먹다가 식솔하나 떼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네가 얻어맞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것은 니가 타고난 니 팔자 여자의 팔자기 때문에 니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말이 뭐냐 하면 하여튼 화장실하고 친정은 멀리 할수록 좋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그 전에 이야기지만, 명태하고 여자는 사흘마다 패야 인간된다 하는 거예요. 그래야 딴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여자가 딴 생각 안한다는 말은 옛날의 윤리, 삼강오륜인가 나오잖아요. 여자는 항상 주체가 된 적이 없어요. 어릴 때는 부모한테 양육 받고 시집가서 남편한테 양육 받고 늙어서는 자식한테 양육 받고. 항상 여자는 양육 받는 입장이란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여자가 교육을 받아요. 교육을 받으니까 현재 젊은 딸들을 교육시키는 엄마의 뜻과 교육받는 딸의 뜻이 너무 다른 거예요. 엄마의 뜻은 뭐냐 하면 내가 못 배워서 시집에서 무시당했는데 결혼을 별로 안 좋은 남자하고 억지로 막 번개에 콩 구워먹듯이 해서 한 평생 인생을 조저났는데 니는 괜찮은 남자 만나라고 교육을 시켜놨더니만 20대가 지금 괜찮은 남자 만나기는커녕 아예 남자 자체를, 남자가 왜 필요한데. 자기 자체로 주체인데 남자가 왜 필요해요.
그리고 남자하고 결혼한다 하면 남자가 잘못되면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는 이런 느낌이 든다니까요. 60대쯤 되면 책임져도 남자가 책임지지 여자가 책임 안 져요. 여자가 찔찔짜고 울기만 하면 된다 말이죠. 바람피워 누가 첩이 오게 되면 좋게 잘 지내면 되지 찔찔 몇 달 울다가 ‘아이고, 형님’ 인사하고 끝나는 거예요. 지금은 왜 내가 남자가 잘못한 것까지 내가 챙겨야 되냐, 이게 논리적으로 지금 자기한테 정리를 잘한 거예요.
그러면 뭐냐, 돈 벌어가지고 현재 세상의 중심은 어디라고 했습니까? 서구지요. 유럽에 배낭여행가요. 미국, 캐나다. 영어연수라는 핑계대고 영국으로. 이거 안가면 효녀입니다. 혹시 이 바람 안 들리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지금 돈이 없어 못가요. 형편 되면 다 갑니다. 가서 셀카 막 찍고요. 유럽이 마치 자기 세상인양. 지중해서 막 찍고. 그러면 나이 31, 32 넘어갑니다.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지가 주체니까 자기를 무조건 이뻐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절대자유’라 해요.
절대 자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자는 무조건 나만 사랑하고 다른 데는 절대로 다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자유가 상대방에게 강요하게 되어있어요. 어떤 경우에? 주체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옛날 여자들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맞는 대로 얻어맞겠습니다. 왜? 이거 하라고 시집왔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래 잘 참느냐에 따라서 시집에서 그걸 테스트하기 때문에. 역시 니는 우리 집안에서 대단하다. 니가 우리 집안을 키운다. 이리 하지만.
지금은 본인이 시집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본인이 주체라니까요. 따라서 내가 내 말 잘 듣는 남자를 내가 내 자유로 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나만 사랑하는 그런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면, 이 말은 어떤 모순이 있느냐 하면, 내 자유가 상대방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게 되지요. 이걸 강제한다. 일종의 속박하는 게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고 기계가 되요. 컴퓨터는 뭐냐 하면, 명령을 시행한 대로 실행하게 되어있어요. 명령준 대로.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아니고 기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또 안 되잖아요. 내가 사람하고 살아야지 기계하고 살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하고 살게 되면 어떤 부담을 주느냐 하면 저 쪽은 나 같은 자유가 없잖아요. 또 저쪽 나름대로 절대 자유를 원하는 거예요. “니는 무조건 내 시키는대로 하면 내가 참 기쁘겠어. 그러면 내가 니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돈도 더 줄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주체가 있는 이상 결국은 기계하고 살든지 아니면 결혼을 안 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기계하고 살든지, 주체가 있는 사람하고 살든지.
그런데 이 세상의 주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왔지요. 이 세상 중심은 현재 어디라 했어요? 남자가 중국여자하고 결혼하는 환장한 사람 봤어요? 없지요. 그러나 서구 여자라면 집안에서도 그러면 그럴 수 있다. “덴마크 여자인데” “괜찮네.” 왜?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3배 넘으니까. “스위스 여자 사귀는데.” “아이구 니가 언제 영어를 공부했니?” 칭찬이 늘어져요. “엄마, 나이지리아 여자인데?” “아이구, 니가 미쳤다. 아 손녀를 시커먼 손녀 볼 일 있니?” 잘사는 소녀하고 흑인소녀하고 대우가 달라요.
인간이 무심적으로 서구를 선망하는 중심으로 되어있다 말이죠. 제가 주체를 설명하면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 주체는 그냥 주체가 아니고 주체 나름대로의 목적과 지향점이 있다는 걸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잘사는 그 세계 특히 복지국가. 복지가 잘 된 국가. 이 나라 김정은이 뭐 이리하면 여차하면 처갓집으로 튀면 되잖아요. 덴마크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러면 이중국적 할 수 있잖아요. 이 나라가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여보, 빨리 갑시다. 애들을 위해서.” 자꾸 핑계를 대요. 그럼 후닥닥 가요. 덴마크는 전쟁 일어날 일이 없잖아요. 복지 잘돼 있고, 실직해도 80%, 퇴직해도 연금으로 수입이 보장되니까. 퇴직해도 우리나라 사람보다 2배나 잘 사는데. “아이고, 잘 물었다. 야~ 야~ 잘 물었다. 우이 그런 재주가 있네.”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아이고, 키 크고 잘생겼다. 약간 외국 남자치곤 그런데. 독일 남자라고? 뭐하노? 독일남자.” “변호사” “아이고, 잘 물었다.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서구중심입니다. 그러면 이게 현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이런 사고방식 갖고 있다는 것. 자기 자유는 절대 양보할 생각 없습니다. 자율권을 양보해버리면 본인이 주체가 없어요. 기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요새 같은 연배들이 시어머니끼리 모여 뭐라고 합니까? 며느리 잘 들여야 된다는 말이 옛날하고 뉘앙스가 다른 거예요. 지금은 며느리 잘 들어와야 내 아들이 이혼을 안 당해요. 그러니까 딸은 걱정이 없는데 아들 있는 사람은 걱정인 거예요. 왜냐 하면 한마디로 “이럴 거면 헤어져.”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어요. 주체를 양보를 안 하니까. 요새 아가씨들이 결혼했다고 해서 주체를 양보합니까? 오빠 사랑해. 이건 결혼할 때고, 나중에는 엉뚱한 오빠가 된다니까요.
히브리서는 바로 여기에서는 성도는 없습니다. 중심이 서구 중심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하느냐, 평면으로 보지 말고 옆으로 봐야 돼요. 옆으로 한 번 더 그려보겠습니다. 요걸 쟁반이라고 한다면 쟁반하나 더 그리겠습니다. 방금 그렸던 것이 시커먼 이 세상이고 여기다가 성도는 공중부양. 오늘 설교제목을 공중부양이라고 할까. 붕 떠나 있어요. 히브리서에서는. 붕 떠 있다고요.
그런데 위에서 보면 어떤가, 성도를 점으로 하지 않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무대에 처음 한 명 나왔지만, 복음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믿음 때문에 하나 둘 모이게 되면 그게 하나의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요. 요 밑에 시커먼 세속에서는 아까 무슨 중심이라 했습니까? 가족중심이지요. 가족이 내 주체를 대신한 거예요. 가정이 내 주체를 대신해요. 나는 누구, 누구 집안에 며느리지, 내가 따로 독자적으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독자적으로 나를 느낄 경우는 언제 어느 경우인가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갈라서고 다시 결합하면서 도대체 내가 이 집안하고 무슨 일이 있다고 내가 계속 이 집에서 살아야 되지? 이렇게 돼요. 예를 들면 실제로 있는 이야기인데요.
20대 초반에 어떤 아가씨가 결혼했어요. 친정이 어려워서 자기 집안 사는 게 지긋지긋해. 자기 살아온 집구석보니까 황을 느껴요. 시집가서 팔자 고쳐가지고 이런 동네에서 안 살고 정말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혼을 하거든요. 하는데 남편이 죽었어요. 20대인데 남자는 30대쯤 됐는데 차사고로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가해 쪽에서 보상금을 무척 많이 줬습니다. 3억 가까이 줬어요.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시어머니하고 세 식구 살았어요. 신랑, 자기, 시어머니 세 식구 살았는데 하나 죽었지요. 남은 건 며느리하고 시어머니뿐 안 남았지요. 꼭 룻기 같아. 나오미하고. 보상금이 3억6천 얼마 나왔어요. 시어머니도 탐을 내고 며느리도 탐을 내고. “우리 싸울 거 없이 같이 살자.” 이 며느리가 택 택 택도 없는 소리.
지금 이 나이에 또 시집가면 되지. 시집가면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뭐하려고 재미도 없는 시어머니하고. 나중에 시어머니 치매에 걸려서 뒷바라지 어떻게 하려고. 안 합니다. 조금 줘! 조금도 못 줍니다. 법으로 나왔어요. 시어머니는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왜냐, 이미 독립한 가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애도 1명 있어요.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 죽은 것뿐만 아니고 그렇게 대를 잇겠다고 우기는 그 자식까지도 남의 자식으로 떨어지고 그 새댁이 다른 남자하고 결혼해버리면 그 애도 그 집 사람 되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일인데 드라마 보면 그런 게 많이 나와요. 못 놓는다. 저 건 내 손자다! 행패부리는 거 있지요. 드라마 안 봤지만, 후딱 보니까 그런 게 있긴 있어요.
이게 뭐냐 주체문제입니다. 어디서? 이 시커먼 세상에서 나온 주체 문제에요. 니만 자율권 있나? 나도 자율권 있다! 내 자율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제 이야기 보면 당연하지만, 당연하다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살아왔던 젊었을 때 보세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왜 그 때는 문제가 안 됐던 게 뭐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시집갈 때 어떻게 갔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갔잖아요. 살려만 주이소. 밥만 먹여 주이소. 그러면 시집 쪽에서 아들만 낳아! 이러지요. 아들 낳으면 내 집사람 해줄게. 이런 묵계적인 조건하에 간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뭐를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아야 돼요. 그래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지를 모르고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의 주체에다가 성경을 억지로 맞지도 않는 걸 억지로 끼어 넣어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 다니는 것은 오락이 됩니다. 그냥 동우회가 돼요. 그걸 클럽이라 해요. 노는 친목단체.
교회가 아무 중요하지 않고 예수도 안 중요해요. 우리 시집이 중요해요. 나보다 우리 시집이 더 중요해요. 왜? 거기다가 자기 모든 명예와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저기에 이미 인수인계 다 넘겼어요. 그러면 저 어른들 죽고 난 뒤에 누가 챙겨주느냐, 내 자식이 이 집의 여자인 어머니를 자식이 챙겨주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그렇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나의 독자성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 공중부양 속에 속할 때,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 오셨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이야기했습니까? 너는 내 백성이라고 했지요. 그럼 내 백성 할 때, 이 세상도 인정하고 했습니까? 이 세상 백성 아니고 내 백성이지요. 그럼 이 세상 백성으로 길들여짐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떨쳐버려야 되는데 우리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히브리서에 제사가 주입되는 거예요. 제사가.
오늘 본문 13장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적인 제사. 하나님의 모세 언약의 율법에 의한 제사 말이죠. 제사가 본문에 나오는데. 그전에 히브리서13장 오기 전에 처음부터 12장까지 제사 이야기 나왔잖아요. 그 제사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이냐를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그 제사 이야기는 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위해서 제사 드렸다. 지금 제가 그 말씀 드리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마치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우리가 지금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어떻게 공중 부양하느냐, 이거예요. 허 경영 같으면 돼요. 내 눈을 바라 봐! 내 눈을 보면 뜨는데. 어떻게 다른 속에 속할 수 있느냐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힌트 드렸습니다. 제사라고요. 더 힌트 드리면 제사에 합류하면 되는 거예요. 정답나왔습니다. 제사에 합류하면 돼요.
그런데 제사에 합류하는데 실패했던 그것부터 히브리서가 먼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구약 때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했던 제사는 성공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지요. 히브리서5장했잖아요. 매일같이 제사 드렸는데, 매일같이 드려봤자 그 구원 안 되지요. 왜냐 하면 그게 그림자고 그건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 할 때는 이런 취지인지를 몰랐지요. 지식 하나 더 아는 걸로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 문제지요. 하나님이 제사하게 했는데 실패했구나. 이게 아니고 현재 지금 우리 신분 문제에요.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 우리 위상을 묻는 겁니다. 우리 위상을.
여기 시커먼데 속했느냐, 아니면 여기(공중부양)에 속했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져 있느냐, 아니면 주님한테 길들여져 있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니가 어디에서 니 주체가 만들어졌느냐를 묻는 겁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체가 만들어지게 되면 그 중심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지금은 서구라고 했지요. 지금 안 믿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돈 좀 벌면 아담한 초가집 지으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뭐 짓습니까? 그저 유럽 여행가서 봤었던 노르웨이, 필란드에 있는 유럽식 주택,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미국에도 가보니까 좀 사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아요. 유럽식 주택을 갖고 있습니다. 저택을. 그만큼 돈이 많이 드는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는 돈 벌어서 집 지을 때 뭐로 짓습니까? 저택 짓거나 돈 좀 못하면 전원주택 짓지요. 식구 전원 산다고 전원주택 아니에요. 이건 개그입니다. 다 서구적이에요. 그만큼 중심이 돼있는 거예요. 몰라요. 국악에 미쳐서 옛것이 좋아요. 옛것이 좋다~ 하는 사람은 빼놓고는.
그런데 성경에서의 새로운 나라의 중심은 뭐냐 하면, 중심이 서구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나라에요. 히브리서11장14~16절 나오지요. “14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15절 봅니다. 그들이 시커먼 쟁반 요 쟁반 같으면 고향을 떠났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같은 평지기 때문에. 요 지점에서 태어났다면 만약에 돈 벌려고 도시 갔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요. 같은 지점이기 때문에. 같은 차원이기 때문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는 돌아갈 기회가 없다. 우리는 어디에 본향 한다?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는데 그 하늘에 성을 예비했잖아요. 하늘에 성을. 그럼 히브리서11장 오기 전까지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뭡니까? 모든 내용은 모든 말씀과 모든 제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시커먼 세상에서 나그네로 만들어서 객으로 만들어서 어디로 보낸다? 본향 예루살렘에 가게하기 위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인 거예요. 우리가 지금 공부해 왔던. 지금 몇 년 째에요? 여기에 가야 돼요. 여기에.
여기에 가야 되는데,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이지를 모르겠다 할 때에는 중심을 보면 돼요. 이 세상에서는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서구화된 돈 벌면 유럽처럼, 미국처럼, 호주처럼 이렇게 하는데 이 세상(하늘)은 누구처럼? 중심이. 예수님처럼이에요. 예수님처럼.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13장에 나오는 겁니다. 히브리서13장 14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OK. 우리가 여기는 할 때, 여기가 어디입니까? 떠나야 될 곳이지요. 우리가 평생 길들여져 온 곳이잖아요. 길들여져 온 곳.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이미 길들여졌는데 어디에 길들여졌습니까? 이 세상 혈육이라는 곳에. 가족에 길들여졌어요. 가족에.
그리고 가족에 길들여졌다는 이 말을 여러분 말고 다른 안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게 되면 “아니, 당연히 길들여져야지. 가족을 벗어나다니? 니는 호로 자식인가?” 이리 나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뭐예요? 자기 새끼 건사하고 그 집안 일구는 게 사람 사는 게 아닙니까. 특히 남자는 몰라도 여자 같은 경우에. 시집와서 매일 지루박 밟고 나이트 다니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가정을 내팽개치고. 결혼하기 전에도 가족에 속했고, 결혼하고 난 뒤에 새로운 가족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거, 인생 뭐 있어? 이거지. 이게 인생이지.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떠나라는 거예요. 떠나라! 그러니 도대체 “떠날 방법은요?” 사람들 안 물어요. “떠나긴 미쳤다고 떠나니?” 이리 나오지. 떠날 마음조차도 없어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 가정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것뿐이지 떠나긴 왜 떠나요.
떠나려면 여기서 주체가 성립돼요. 주체가. 그 떠나는 주체를 누가 만들어줍니까? 제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주님이 중심이니까 새로운 식구로서 우리에게 주체가 주어지게 되면 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반항하느냐, 내가 반발해요. 내 자신이. 성경에 나와 있는 그 믿음의 사람 되기를 우리 자신이 늘 거부하지요.
강아지가 주무시네요. 저 강아지를 사람 만들겠다고 작심하고, 사람 만들려고 하면 우선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할 줄 알아야 돼요. 자고 있는 강아지를 깨워가지고 컴퓨터 키 판에 놓고 요것은 ㄱ이고 ㄴ이고 가르치면 멍! 멍! 멍! 뛰쳐나갈 거예요. 아무리 주인의 마음이 그 개를 위한다고 하지만 막상 개는 어디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개에 길들여져 있어요. “제발, 내가 개임을 좀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죠.
우리가 마찬가지에요. 주님은 억지로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려고 하지만, 제발 우리 형편 좀 감안해 달라는. 이 천국 사는 것보다도 오히려 길들여진 것이 어디에 편한가 하면 어떤 것이 자연스럽냐 하면 시어머니 잘 모시는 게 자연스러워요. 내가 시집에서 온 일가 친척으로부터 모여가지고 나를 칭찬해주는 그 재미로 길들여져 있어요. 그게 보람이에요. “아이고, 엄마 너무 훌륭해. 엄마는 장한 상 받아야 돼!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우리 애들 셋 키우고.”
진짜 주님한테 길들여지면, “치워라! 니는 니고 나는 나야! 엄마 너무 섭섭해! 엄마 너무 무서워! 엄마 어디서 그런 거 배웠어. 너는 몰라. 모른다 말야. 엄마 왜 그리 인간이 변했어. 너무 무서워. 나는 누구 의지하고 살아?” 찔찔 울고.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믿는 자에게는 환란이 온다는 뜻이에요. 고난 받는다. 히브리서12장, 13장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고난을 받으셨듯이. 12장4절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 말은 자꾸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떼어놓으려고 해요.
자,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떼어 놓을 때 없는 뭐가 생겼다? 주체가 생겼다. 주체가 생기면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 세상에 대한 자유.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오는 곳이 있지요. 그 사랑을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제사를 통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지옥 불에서 끄집어냈지요. 그러면 그게 사랑이지요.
그러면 그 사랑 어떤 사랑이냐, 절대 사랑입니다. 그럼 제가 아까 강의한 것처럼 절대 사랑에서의 정의는 나한테 자유권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사랑해주신 분의 절대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호응하고 반응할 뿐이고 거기에 예속될 뿐이에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니를 사랑한 그 사랑을 니가 절대사랑을 이해하느냐, 이럴 때 우리는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