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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70414b (감당하는 타인)-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 170414b (감당하는 타인)-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다 속해져 있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 자본주의 사회에 속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왕을 쳐다보고 안 산다 이 말입니다. 왕을 쳐다보지 않고 산다는 말은 누굴 쳐다본다는 말입니까? 내 인생은 내가 쳐다보죠. 이게 민주주의에요. 다른 사람이 표 두 장 안 가져가죠? 한 표 찍잖아요. 한 표 찍는다는 말은 임금님이 나를 책임지지 않아요. 정치 잘 할 뿐이지, 정치 잘 한다고 모든 것을 바치지 않습니다. 대통령 지 월급이 있으니까 그것만 받아가라 이 말이죠. 미움 사면 다른 사람이 나오면 되고. 우리가 투표해서, 집단적 표상에 의해서 나오면 되거든요.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는데 토지를 위해서 일 안 하죠. 토지를 위해서 일 안 한다는 말은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분업화가 된다는 거예요. 자기 전문분야가 있어요. 전문분야. 전문분야는 경제에 있어서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효율성을. 한 분야를 수 십 년 해보세요. 장인(匠人, 기술자) 됩니다. 장인 되죠.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하는 것과, 한 사람이 전문분야에 매진하고 각자 분야에 매진할 때 나중에 생산량 개수를 한 번 비교해보세요. 이거는 비교도 안 되죠. 그렇게 생산된 전문분야의 효율성은 어디서 평가를 받아야 돼요. 야, 효율 좋다, 안 좋다는 것을 어디서 평가를 받는가? 평가 받을 때에 어떤 사람은 전문분야에서 3시간 일했다. 그러면 3시간만큼의 월급을 줘야 해요. 어떤 사람은 4시간 일했다. 4시간만큼의 임금을 줘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공평해보이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시간을 더했다고 해서 양질의 똑같은 효율성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효율성은 어디서 측정이 되는가? 시장에서죠. 시장에서. 시장에서 만든 제품이 인기 있게 잘 팔리면 3시간 일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월급을 더 받고, 4시간 일했더라도 내가 만든 상품이 잘 안 팔리면 10분 일 한 것보다 단가가 더 떨어지고, 시장에서 결정해요. 이 자율적인 시장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번다, 이게 맞는 거예요? 이게 틀린 거예요. 옛날에는 성실하게 일한 사람은 말 그대로 성실한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물건을 성실하게 만든 사람은 바보에요. 이미 패션이, 스타일이 지난 거예요. 폐기처분해야 해요. 어느 시장에서? 국내시장에서? 아니요. 전 세계 통합시장에서. 전 세계 통합시장에서 하기 때문에 이게 개인별 분업화정도가 아니고 국가별로 분업화되어 있어요. 따라서 국가별로 분업화된 것을 몰아주고, 특화된 산업에 몰아넣었는데, 그게 세계시장에서 인기가 없으면 한꺼번에 나라가 통째로 부도가 나요. 나라가 거지꼴을 못 면하죠. 통째로 나라가 못 살게 돼요. 집단으로. 그런데 그 나라에 농땡이도 있고 열심히 한 사람도 있어요. 백날 소용없어요. 농땡이나 열심히 한 사람이나 다 같이 못 살아요. 이 말은 개인의 운명은 개인에게 달려있지 않는 세상. “하나님이여, 저 열심히 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돈 더 벌 수 없는 세상. 더 이상 기도한다고 해서 더 재산이 늘어나지 않는 세상. 기도한다고 해서 부자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도해야 될 이유조차 이미 상실해버린 세상이죠. 아까 인간의 양심은 이 시대에 뭐로 변했다? 돈으로 바뀌었잖아요. 옛날에는 뭐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임금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왜? 임금은 신의 아들이니까. 임금이 잘 되면 내가 잘되고, 임금이 못 되면 신에게 벌을 받아서 못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해와 달과 바람과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께서 이 농토에다가 비를 안 내린다든지 태풍이 불어버리면 끝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신이 좋든 싫든 간에 신의 그 전능하심에 예속된 상태가 옛날 임금제도였어요. 왕 제도였어요. 그래서 그 임금 옆에는 제사장이 있어가지고 하나님을 다룰 수 있는 방법, 신을 다룰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사무엘상 같은 것을 보면 굉장히 쉬워요. 뭐냐 하면 우상을 버리고 사무엘이 금식하고 기도했더니만 응답을 누가 합니까? 하늘에서 응답을 했잖아요. 이런 현상이 그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을 때 금식하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응답이 안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수완에 놀아나시는 분이 아니에요. 홍해 갈라졌을 때에 갈라지고 건넜잖아요. 그럼 그 다음에 요단강입니다. 어떻게 건널까요? 엘리베이터 5층 눌러놓고 한참 있으면 물 갈라집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정상입니까? 안 갈라지는 것이 정상입니까? 안 갈라지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근데 과거에 한 번 갈라졌다는 것은 이게 정상이에요?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닌 거예요.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라는 말은 인간자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분하는 방법도 정상이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인처럼. 정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정상인 인간이 정성만 드리면, 우리 양심은 착하니까, 우리 양심가지고, “하나님 은혭니다.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추수가 잘 됐습니다.”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그러니까 선한양심가지고 총동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이에요. 아벨은, 아벨 제사의 제일 마지막은 뭐냐 하면 아벨 본인이 죽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가인은 나쁘고, 아벨은 착하고, 이런 게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벨도 착하지를 않아요. 다만 아벨의 배역, 역할이 뭐냐 하면 억울하게 죽어야 해요. 누구의 개입으로? 본인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안 죽을 죽음을, 하나님이 아벨의 손을 들어줬다는 식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가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되면 아벨의 죽음이 아니고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 바로 가인의 배후에 있던 악마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극을 이미 창세기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는 벌써부터 증거가 나온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자진해서 아벨 될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거는 없는 거예요. 베들레헴의 어떤 아주머니가 애 키우면서 ‘이쯤해서 우리 아기가 죽을 때가 됐는데..’이러면서 애를 키우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이렇게 키우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울지를 않죠.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여기 베들레헴 엄마들이 울었다는 말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혀 예상 못한 울음을 운 것처럼 오늘날 성도의 구원도, 성령의 찾아오심도 전혀 예상을 못한 거예요. 예상해서 온 성령 같으면 그거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난로 옆에서 뜨거운 기도하면서 “지금 새벽 2시 45분쯤이면 성령이 오실 때쯤 됐는데..왔다! 왔다!” 이거 백퍼센트 가짜에요. 랄랄랄랄~하는 것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은 우리가 할 말을 잊어버려요. “뭐야? 왜 내가 예상한대로 나를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면 안 돼요. 조금도 섞이면 안 돼요. 그래서 전도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도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그 전도의 내용을 습득을 하려고 해요. 습득하게 되면 거짓된 양심에다가 지식이 더 추가되어서 자꾸 뭐가 되느냐 하면 가짜 구원을, 그걸 계속 유지시키려고 행함으로 노력을 하게 돼요. 근데 사도바울이 복음 전할 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노력을 했죠. 사도바울이 예상해서 ‘내가 이쯤 죽였으면 예수님이 찾아오실 텐데..’이런 생각 했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사도바울이 한 게 뭐였는가 하면 “나는 정당하다.” 율법에 흠이 없는 거예요. 나는 정당한 거예요. 정당하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정당한 사도바울과 한 대화내용을 한 번 보세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하니까 “나는 누구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이 자기 정체를 밝히는데 엮어버리죠. “니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럼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 “내가 핍박하는 주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겠죠.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앞세우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저 멀리 뉴질랜드에 계신 분이에요.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죕니까?” 요새 기억력이 떨어져가지고 한 번 봐야 돼요. 강의 중에 또 카톡 보기는 처음이네요. 좀만 기다려보세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스가랴 12장 10절을 보면서 이것조차도 죄입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들이 통곡하는 것, 그게 죄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했습니다. 그게 죄가 되는 이유는 반드시 십자가와 연관성을 맺으려면 죄가 아니면 연관성이 맺어지질 않아요. 내가 이거는 죄라고 예상한 죄는 온전한 죄가 아니에요. 다윗처럼 진짜 죄는 십자가로 엮여져 있음을 통째로 받아들이면서 구조상 거기에 같이 엮어져 있는 죄. 그 죄를 성도만이 아는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는 죄에요. 그러니 죄, 죄, 한다는 것은 곧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나는 그 구원의 구조에서 죄인으로 관여하게 되고 주님은 그 죄 때문에 희생으로 관여하는 것. 그래야 짝이 맞죠. 배역이 맞는 거예요. 그때 죄. 다윗이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만 죄 지었다고 그때 나오는 그 죄.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죄가 나로 하여금 죄 짓게 한 거예요. 따라서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나는 죄인이냐, 아니냐, 라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죠.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독자적으로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질문 자체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에요. 거기에 나는 독자적으로 나는 어때요? 하고 내가 끼어들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이미 엮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보고 “만약에 당신이 아버지라면 나는 어떻게 하면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라고 한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아들이 되는 것이지, “아버지십니까? 그럼 이제 나는 슬슬 아들 해야 되겠네요.” 라는 이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십자가가 나타날 때는 뭐도 동반해서 나타난다? 구원받는 자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서 십자가가 이미 완료가 된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걸 아는 자한테는 이게 어렵지 않아요. 그냥 쉬워요. 그런데 독자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구원되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걸 사적구원, 개인적구원이라고 하는데, 개인적 구원한테는 이러한 복음적인 구조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또 그래야 되고. 요단강 앞에서 홍해처럼 백날 기다려봐야 안 열려요. 왜? 열리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내가 나중에 구원받고 난 뒤에, 죄인 되고 난 뒤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게 성립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우째 이런 일이?” 같은 말이에요. “어떻게 제가 구원됩니까? 어떻게 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 됩니까?” 같은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걸 안다면 “어떻게 살면 바르게 삽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아, 어떻게 살아도 막 사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 이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 받는가?” 라는 것은 성경에 없고 예수님의 자기 스토리입니다. 성경 전체는 내가 이런 식으로 일 해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역할이 있을 뿐이고.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베들레헴 두 살 아래로 다 죽은 애가 결국 무슨 역할을 한다 말입니까? 난데없는 울음을 울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애 키우고 잘 살아보겠다고, 애 키운다고 동사무소에서 돈 20만원 받고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 살만하네, 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애가 죽어보세요. 정나미가 떨어지죠. 그런 이유가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성한테는 뭐가 있다? 타인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이미 신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타인과.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는 자기를 위해 살다가 자식을 놓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애 앞에서는 죄 짓는 일로 느껴지겠죠. 자연스럽게. 애 때문에 골치 아프고 잠도 못자지만 그것 때문에 부모가 짜증내지는 않습니다. 이미 짜증낼 주체는 애 쪽으로 넘어가 있기 때문에. 지가 짜증나서 괴로운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더욱더 우는 애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애 심정하고 하나가 되어서 그게 더 아파요. “울지 마라 내 아이야!”하고. 그게 더 아픈 거예요. 남자는 뭐하고 있는데? 남자는 애가 운다고 옆방에 가서 따로 자고 있고.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잠 못 잔다고 옆방에서 자고 있고. 밤새도록 엄마는 애를 달래고 있고. 아빠는 애 놓으면 도망치기 바쁩니다. “아이구 우리 애 똥 봐라. 얼마나 이쁜지.”하는 거예요. 똥도 이쁜 거예요. 나보다 더 사랑스러워요. 자기 똥은 안 이쁘거든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이쁜 것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 어린아이가 예수님 때문에 죽어나갔으니까, 헤롯을 원망하겠어요? 예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하죠. 전통적으로, 이 전통 속에 있기 때문에. 자아라는 것은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인데 당신이 괜히 설쳐가지고, 우리 착하신 임금님이 화를 내서 우리가 당했다. 임금님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는 일, 하늘의 일이에요. 따라서 그 하늘의 일을 화내게 했던 누가 나쁜 사람이에요? 예수라는 사람이 나빠요. 예수라는 사람이. 북한에다가 뭔가 밀가루라든지 의약품이라든지 구호품을 주잖아요. 구호품 받으면서 우리 김정은 지도자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핵실험 때문에 구호를 잠시 중단하겠다고 이러면, 니가 우리 김정은 지도자를 모독하면 안 돼! 라고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도와주면 도와주는 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모든 영광을 지도자 동지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게 전통이라니까요. 전통. 왜 그러면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르느냐? 인간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보다도 어느 것이 편해요? 왕제도가 편해요. 왜? 민주주의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본인이 잘 사고 못 살고는 누구 책임이에요? 본인 탓으로 돌려야 되는데, 신적인 영웅이 있으면 잘 살아도 은혜고 못 살아도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신이에요. 종교라니까요. 종교. 그래서 종교가 아편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가. 잘 살아도 주의 은혜, 못 살아도 주의 은혜, 이것보다 큰 종교, 그런 아편이 어디에 있어요? 종교가 도파민 팍팍 올라가죠. 북한에서나 중국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유가 신 때문에 그래요. 신은 집단적 표상으로 있는데, 그것에서 달리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에 다른 신을 믿는다고 해석하잖아요. 또 그 말이 맞고.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우리나라가 이래야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거는 어떻습니까? 그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죠. 복음 아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 말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복음도 모르니까. 복음 아는 사람에게 왕이 누굽니까? 주가 누구에요? 그리스도가 왕이잖아요. 이미 왕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왕의 백성이죠. 그럼 인생을 누가 책임집니까?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잖아요. 그 책임지는 분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누가 되든 어차피 이 세상은 지옥인데. 그걸 뭐 하러 신경 씁니까? 또 이래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준 사람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거는 왕제도가 되죠. 그건 민주주의 아니죠. 왕 제도죠. 그런데 그래도 대통령은 하나님이 뽑아주셨다고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왜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심이 그런 세속적인 왕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에 보면 세속적인 임금을 뭐로 봅니까? 짐승이죠. 이 짐승의 성격은 이미 하나로 확정이 되었어요. 왜? 우상은 하나니까. 금은동. 세상역사가 끝날 때까지 바벨론 제국의 왕 제도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날 것이요, 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날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임금의 절대적인 성격을, 나는 당신 덕분에 산다는 그런 것을 하지 말란 말이죠. 다만 그들은 로마서 13장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그런 사자, 심부름꾼에 불과한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예수님과 고난을 함께 한다고 했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럼 예수님의 양심은 어떤 양심이냐, 그것을 열왕기상 17장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에요. 이번 여름수련회를 열왕기상을 합니다. 열왕기상에서 주목할 것은 뭐냐 하면 두 개의 노선을 주목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지상의 다윗의 혈통에 의한 왕들의 정치술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선지자들과 얼마나 생각이 다른가를 알아봐야 해요. 얼마나 생각이 다른가를.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의 세력 또는 권력, 이 세상의 권력은 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어요. 따라서 선지자에게 호응한다는 것은 기대하면 안 돼요. 이미 이들은 권력편이에요. 권력편이라는 말은 임금님의 여하에 따라서 이 토지가 흉년이 되고 풍년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유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풍년 주고 흉년 줬기 때문에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농경시대에 사람들이 이 풍년과 흉년은 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잘 활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이단, 이단, 하지만 이단은 하나님이 그렇게 일부러 조성한 거예요. 이단이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안 돼요. 이단 없는 선지자가 있습니까? 모조리 다 이단이기 때문에 누구의 가치가 빛나요? 선지자의 가치가 빛나는 겁니다. 빛나면 뭐합니까? 죽는데. 고난 받죠. 고난 받거나 말거나 선지자만이 천상회의를 알고, 하늘을 알고, 그 외에는 땅밖에 몰라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땅의 일만 알고 나는 하늘의 일만 이야기를 하니 어떻게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겠느냐, 따라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저주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앞뒤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자동적으로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땅에서 태어난 자체가 저주에요. 하늘의 일을 모르니까. 그만큼 요한복음에서는 이 땅이 어두움 자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신앙생활 자체가, 성도가 된 자체가 이게 좀 특이해요. 힘들다가 아니라 드물다고 이야기했죠. 이게 정말 드문 일입니다. 참 드물어요. 드물기 때문에 외롭다는 것은 그건 당연한 거고요. 목사님, 말이 안 통해요? 말이 안 통하도록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개나 소나 다 알면 다 말이 통하게요. 말이 안 통하게끔 구원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가족끼리는? 가족이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찢고 구원해줘요. 가족을 찢고. 처나 자식이나 가족이 뭔데요? 찢어버리고. 가족보험 든다고 다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가족 자체도 다 해체해버립니다.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라고 했는데요? 한 사람 믿는다고 동생도 오고 시누이, 올케도 오고 다 오는 줄 압니까? 안 와요. 올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어쨌든 간에 특이성이라니까요. 특이성. 이게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특이해요. 예수 믿는 것은 특이해요. 그 특이성이 또 나와요. 뭐냐,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갑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여호와께서 명령을 합니다. 파견합니다. 그 과부가 평소에 기도를 많이 했다든지 하나님을 섬겼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 과부는 그냥 나라가 통째로 하나님께 벌을 받아가지고 비가 안 와요. 참 골치 아프죠. 옛날에 비가 안 올 때는 그 통치자가 살해당했어요. 왜 구라 쳤느냐 말이죠. 왜 신의 아들이라고 구라 쳤느냐?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은 신의 아들이라고 구라 치기 전에 먼저 백성들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임금이 “예.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좋은 것을 못할 것이 뭐 있어요.” 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했는데 가뭄이 들어서 기도했는데 비가 왜 안 왔느냐고, 그래서 죽였습니다. 멕시코에서. 마야문명. 아스텍문명. 임금이 무서워요. 임금 되는 자체가 무서워요. 지금 우리나라는 서로 하려고 해서 문젠데. 이게 임금 자체가, 지도자 자체가 무서운 거예요. 잘 살게 해달라고 뽑아놓았는데 못 살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다 짊어지웁니다. 참 국민들이 나쁘죠. 그래서 사르밧 과부는 믿음 좋은 거, 이런 것이 없이 그냥 통째로 가난한데, 역시 과부였으니까 또 가난한 거예요. 가난한데 어느 정도 가난 하냐, 12절에 보니까 그들이 마지막 떡 조각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때 타이밍을 맞춰서 엘리야가 들어갑니다. 딱 들어가서 “떡 좀 도!” “떡 다오!” 이랬어요. 떡을 주면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죽을 수밖에 없죠. 그 떡이 마지막 떡이니까. 마지막 밀가루에다가 마지막 기름에 구웠으니까 그것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바탕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 바탕에는 하나님이 죽이는 겁니다.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대부분 서서히 죽여요. 그걸 늙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요. 점점 늙어가요. 우리의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하나님이 원합니다. 우리를 늙어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따라서 이걸 안다면 “왜 죽이십니까?” 라는 이 요소를 빠트리면 안 돼요. 근데 사람들은 늙어 죽어가면서 그 변화가 너무 미미하니까 아직 자기가 옛날의 한창 때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해가지고 천년만년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분명히 자기 주변에 나이 80, 90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하고 자기하고 다른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아이구, 나이도 많이 먹었다.” 나쁜 짓해서 나이 많이 먹은 것이 아니에요. “아이고, 머리가 하야시네.” 나쁜 짓해서 하얘지신 게 아닙니다. 염색을 안 했을 뿐이죠. 뭐.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 줄 몰라요.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줄을 모르고 지 아는 것만 알아요. 이게 분업화의 문제인데. 그러니까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여기서 해석을 잘 해야 됩니다. 동정해서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리라 했기에 죽을 뿐이에요. 죽어가기에 불쌍해서 살려준다, 이런 선지자가 아니에요. 두 살 먹은 애가 베들레헴에서 죽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기로 되어 있어요. 이걸 앞당겼을 뿐이지. 두 살 먹은 애가 나중에 90되면 또 죽어요. 죽는다고요.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약간 일찍 사용해서 보냈죠. 우리 인간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실질적인 진실은 뭐냐,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리고 더불어 진실은 뭐냐 죽으면서 죽는다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하나 더 보태면 죽는다는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죽어가는 것이 사실이면 받아들여야지, 무섭기는 왜 무서워요? 오랫동안 살 겁니까? 그렇지도 않으면서. 자, “먹고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로되 두려워 말라 죽든 말든 모르겠고 우선 나를 위해서 작은 떡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애를 위해서 만들라”해서 그 떡을 먹었습니다. 먹고 난 뒤에 열왕기상 17장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엘리야가 하는 일에 대해서 사르밧 과부가 예상했습니까? 예상 안 했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죠.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쪽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기존에 한통속이에요. 그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양식 떨어지면 죽는다, 이거 맞는 말이 아닙니까? 양식 떨어지면 아마 선지자가 올 걸? 이랬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이 타이밍을 우리한테 그대로 집어넣는 거예요. 살다보니 구원됐다가 아니고 오늘 죽어도 마땅한데, 어? 주께서 구원 주셨네! 이래 된다 말이죠. 이 사르밧 과부처럼.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난 사람은 더 이상 그때부터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는 이 공식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안 찾아도 되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이 구원이라는 것이 특이하니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왔어요. 이것은 과부를 잘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 본인의 스토리, 더 나아가서는 엘리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기 스토리를 그렇게 구성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삽니까? 예수님 자기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우리를 참한 인생 만들려고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누구 것이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죠.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아, 이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죽어 마땅하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토해내야 합니다. “엄마! 또 백점 맞았어.” 아,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구나. 저게. “엄마! 나 이번 법대 들어갔어.”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에요. 저게. “여보! 나 오늘 보너스 탔어.”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 되는 거예요. 저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것이 있잖아요. 애들 공부 잘하고, 남편 돈 잘 벌어오고, 평소에 아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주고,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죽을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내가 죽을 이유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이유들이 그게 되는 겁니다. 프로야구를 응원하는데 삼성라이온스를 응원한다. 1승 10패. 꼴찌. 그런데 어제 이겼다 말이죠. 어제 한화한테 이겼다. 우와!! 그게 뭐냐 하면 죽을 이유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응원한 팀이 이겼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금 류현진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또 졌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그럼 어떻게 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류현진에게 힘을 보태줘서 1승을 하든지, 타자가 못 치든지 해가지고 내 소원대로 돼야 되는데, 안 들어줄 때 감사가 쑥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르밧 과부가 이거 먹고 나 우리아들하고 죽을란다, 라고 할 때 지금 기분 좋게 이야기합니까? 슬퍼서 이야기합니까? 슬퍼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 이 사르밧 과부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주께서 죽이신다고 하더니 정말 죽이시는구나. 이때를 기다렸나이다.”이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렇지. 내가 밀가루 남아 있을 때 얼마나 고민했다고. 언제 저거 다 먹고 죽나?”하고 있는데, 근데 마침 오늘이 그 D-day라. 마지막 남은 것을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왜 당신이 뭔데 우리 죽는데 찾아옵니까?” 막 화내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니나 내나 팔자 더러운 팔자. 지지리도 복이 없는 이 집구석. 남편도 죽고 나는 과부되어 니하고 같이 살면서..우리 같이 죽자 고만.” 이게 뭐 기쁜 날이 아니잖아요? Happy birthday to you~♬ 뭐 지금 그런 날이 아니죠? 즐거운 시간이 아니죠? 난데없이 와서 “비가 다시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언제까지입니까? 비가 다시 올 때까지. 다시 말해서 너희들처럼 비는 누구에게 속했다? 하늘의 노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맞다. 맞는데, 너희들은 하늘이 왜 노했는지 이유를 모른다. 이 사르밧 과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이유는 누가 아느냐, 이제 엘리야가 와서 알려줍니다. 어떻게 알려주느냐, 그 전에 오늘 강의와 관련해서 이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과 함께 있죠. 자, 그런데 엄마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사랑하겠죠. 키워볼라고 하는데 너무 가난해서 못 키웠죠. 그런데 17절에,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무슨 시추에이션이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습니까? 밀가루하고 기름이 안 떨어지게 해서 살려줄 때는 언제고? 멀쩡하니 이제는 불행 끝 행복 시작하려고 하는데, 세상에! 그 당사자인 아들을 죽여 버렸어요. 그럼 과부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아들아!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선지자 덕분에 살았다.”고 좋아하자마자 아들이 죽었어요. 이럴 것 같으면 그때 찾아오지를 말든지. 마지막 먹고 굶어죽을 때 놔두든지, 왜? 살려주고 죽이고. 이거는 인간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 두 번 죽이는 거. 그렇잖아요? 이게 무슨 스토리입니까? 이거는 과부스토리도 아니고, 이게 누구 스토리에요? 하나님의 스토리가 되는 거예요. 살고 죽고 다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스토리를 만드는 하나의 장면, 장면들이에요. 죽었으니까, 그 엄마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뿔따구 났어요. 18절에,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자는 아들이 죽은 것은 누구 때문에 죽었다? 내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회개하는 태도가 아니죠. 그래, 나 죄 지었다. 죄 많은 여자다. 그래. 그래서 죽이나 그래. 못 죽여가지고, 내가 알아서 죽일 때는 안 죽이고 기어이 기쁨 누릴 그때, 니가 이런 죄 지었잖아? 니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 이래서 죽이나?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르밧 과부의 사고방식은 뭡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착하면 살아있고, 죄 지으면 죽는다는 일방적인 그 양심. 자기는 문제 있다고 생각 안 하는 그런 양심을 유지하고 있죠. 그리고 애가 슬슬 아픈 게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끝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살아있는 사람하고 상대 안 해요. 죽여 놓고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자기가 죽었다고 알고, 죽은 자에게 주께서 십자가 피로 구원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 덕분에 살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죠. 19절,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여인의 아들인데 그 품이 어디로 옮겨집니까? 엘리야 쪽으로 옮겨지죠. 그 다음에 21절,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게 뭡니까? 아까 했죠. 타인의 몸인데 엘리야는 같이 엎어졌죠. 한 몸이 되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자기에게 덮어씌우는 그 장면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을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이렇게 기도할 때 아이의 혼이 아이 몸으로 돌아왔다. 그럼 엄마가 아이를 살렸습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살린 거예요? 엘리야가 살렸죠. 하나님이 살렸잖아요. 그럼 아이의 그 원초적인 것은 엄마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 아들이죠. 그래서 성경은 육의 아들을 뭐로 바꾼다?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개입돼요? 바로 선지자 같은, 엘리야 같은 예수님이 개입되어야 돼요. 우리가 믿는다는 그 양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죠. 예수님의 몸에 뭐가 있다? 타인의 몸, 그것도 죄 된 몸을 자기가 한 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능력이, 그러한 약속이 누구한테만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혼자 훌륭하십니다.” 그런 뜻은 아니잖아요. 내 죄를 가져가서 나로 하여금 이 죄를 없애고 예수님과 한 몸 되게, 한 지체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믿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는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없다? 못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 거예요. 나의 어떤 행위도 나를 구원하는 데에 보탬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착한 양심이에요. 그러니까 이 마음은 성령 받은 마음이에요. 성령 받은 마음. 그게 바로 교인들이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왜? 서로가 용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머리죠. 우리는 몸의 지체죠. 그러면 우리가 따로 발이고 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어디를 경유합니까? 우리 마음속에 이미 성령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겁니다. 타인을.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누가 더 나쁜 짓 했는지, 이걸 묻는 것이 아니죠. 자기의 행위로 죄인 된 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 복음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이 디도서에서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편지를 하는 겁니까? 디도서 앞에 뭐라고 했어요? 4절에 한 번 보세요.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같은 뭘 따라? 같은 믿음을 따라. 선물로 받은 믿음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뜻이다 말이죠.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특이성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되는 거예요. 특이성을. 성경 천 독, 만 독을 해도 소용없어요. 성경책은 하나님이 쓴 겁니다. 하나님이 쓰신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게 해석이 돼야 되죠. 제가 지난 화요일에 부산강의에서 지젝을 했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책이고 해석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책이라고 했죠.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안에서 돌아다닌다. 주님의 해석 안에서.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해석하는 겁니다. 영의 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의 해석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미 결론지어졌어요.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확정된 상태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그 아들의 몸을 깔고 있으면서 기도했을 뿐이죠. 예수님은 기도 정도가 아니죠. 겟세마네 기도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기도 내용대로 아이가 죽어야 될 이유마저 예수님 자기의 책임으로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같이 엎어졌던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묻지 않는 거예요. 그에게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주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사. 이거는 교회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 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교회 다니든 안 다니든 이 사실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줘요. 다만 교회 가는 것은 혹시 나 같은 이런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가보죠. 물론 없지만. 사람들이 이런 사실도 모르고 교회 가는 이유는 교회 가서 복 받으려고 가는 거예요. 복 받으려고. 내가 안 죽으려고. 더 살라고. 더 여유 있게 살려고. 더 행복하게 살려고. 그러니 그게 절이에요. 절간이고. 그게 무당집이고 그런 겁니다. 십자가 빼놓고 대나무 있잖아요. 플라스틱 대나무 꽂아야 돼요.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있잖아요. 노골적으로 예배당 옥상에다 대나무를 꽂아야 돼요. 대나무를. “훠이~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흔드는 대나무 말이죠. “뭣이 중헌디!” 하는 것 있잖아요. 굿 풀이 하는 것. 그거라니까요. 굿 풀이를 그렇게 해요. 큰 무당 있고 새끼 무당이 있어가지고 찬송 인도 하면 거기서 주여! 하고 있고. 정성 다 내놓고. 성의 다 표하고. 이렇게 정성 다하는데 복을 안 주면 하나님 니가 나쁘다. 이런 식으로 깔고 들어가잖아요. 더 하다가는 차 시간 늦겠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한 양심은 아무도 없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양심이 들어와서 우리의 양심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늘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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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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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