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강-YouTube강의(인간의 마음)170418-이 근호 목사
186강-YouTube강의(인간의 마음)170418-이 근호 목사
제186강, 제목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변화지 않습니다. 인간은 변화지 않는데,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까 그 때 그때마다 적응하다 보니까 전에 자기 자신과 오늘의 자기 자신 그리고 내일되면 또 달라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처신하다 보니까 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만일에 동일한 환경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기 본성 그대로 남지요. 남녀 간에 연애할 때는 한 결 같이 잘해주겠다고 하지요. 막상 결혼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당히 당황스러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저럴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연애할 때 상대방을 자기 배우자로 얻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거지요. 적응했다가 이미 잡은 고기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법칙에 의해서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 용을 쓸 필요가 없어서 다시 자기 옛날 본성으로 되돌아가지요.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이 되는 것처럼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든가 또는 성령을 받아서 새사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새사람이 되었을 때 인간이 달라졌을까? 하는 겁니다.
새사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달라진 게 아니에요. 교회 나와서 그 교회의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자기 자신과 다른 행동을 억지로 뽑아내는 겁니다. 얼추 기도도 멋있어 보이고, 찬양도 경건해 보이는 쪽으로 찬양하고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 어려운 사람에 대한 동정, 아직까지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선교에 대한 의욕, 그런 걸로 중무장되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그런 환경에 나서게 되면 예수 믿기 전에 그 했던 본성이 그대로 나오게 돼있지요.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과 우애 있게 지내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쓴 그런 흔적에 불과한 겁니다. 일종에 교회 가서 묻은 훈장 또는 뿌려주는 꽃종이, 집에 가서 털어버리면 역시 자기 본색 그대로 드러나지요.
성경에 보게 되면 아담 자손들은 전부 다 죄인이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3장에서 그런 이야기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냈을까요? 사실은 이 생각은 사도바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 꾸준히 말씀해 오셨던 거고,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일을 구체적인, 사도바울이란 육체를 통해서 일을 진행시킨 겁니다.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인 것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고 달라진 게 없다는 거예요. 평생토록 살면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기 행함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된다는 이야기는 사도바울의 편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말은 한 때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자기 힘으로 예수 믿은 힘으로 내가 스스로 나의 구원을 달성하겠다. 그러한 생각하고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 서서 나는 죄로 말미암아 곤고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게 겸손인가?’ ‘온유한 척 하는가?’ ‘실제로 그게 아니지만, 대단히 자기 마음을 낮추는 모범적인 행동을 우리한테 과시하기 위해서 저런 멘트를 날리는가? 저거 과장된 이야기 아니야?’ 이렇게 오해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실제로 곤고한 사람인데, 안 그럴 거라고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오해한다는 것은 교회 자체가 자기 마음들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자기 마음들을 왜 속였는가. 설교자들이 마음의 심층을 꽂아주는 그런 말씀들을 준 게 아니고 위장한 방법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를 꾸미는 방법들을. 교묘하게 경건한 모습으로 거룩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그러한 모습으로 연기 연출하는 방법들을 알려준 거죠.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거죠. 교회 바깥에 있을 때도 지옥 갔지만, 교회 나와서 자기가 지옥 가는 것도 모르면서 지옥 가고 있는 그런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야 되는데, 부활의 새 생명에 신경 쓰다 보니까 새 생명에 맞춘 어떤 위장적인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기대하는 목표치의 제2의 자아상에다가 사람들이 몰두하게 만들었어요. 수많은 청교도적인 책들이 개혁주의 책들이 그것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던 겁니다. 참, 은혜 받았다고. 나를 더욱 새 사람 되게 만든 그런 훌륭한 경건의 책을 읽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역겨워했고 더 이상 상종할 사람 아니라고 제자들이 떠나버리는 그러한 말씀을 오늘도 설교자들이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자칭 새 사람 된 사람들의 동호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마음을 본인이 계속 감추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3장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율법을 지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 믿는 것이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율법에 자기를 맡기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위장해도 저주 받는 자의 합당한 인간이 되고, 그 저주 받는 자의 합당한 인간됨을 우리를 공격했던 그 율법이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자동적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결심한다던지, 우리가 믿는다던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율법 자체의 완성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의 효과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화목제물 속에 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그렇게 인식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내가 나에게 뭔가 작전을 꾸민다던지 작업을 한다는 그 자체가 율법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거룩한 모습은 아닙니다.
더욱 날이면 날이 갈수록 율법 앞에서, 말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이구나! 깨닫는 그것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유일한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