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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32강-고후 6장 3-6절(사도의 직책)170416-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고린도후서

232강-고후 6장 3-6절(사도의 직책)1704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 3-6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3-6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일군, 그것을 사도의 직책이라 하는데, 사도의 그 직책이 훼방 받지 않게 하려고, 그 순수한 본질을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는 자천하여서 마치 스스로 원한 것처럼 많이 힘든 인생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도움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협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내 편은 없습니다.” 그런 거거든요. 그게 무슨 직책이냐 하면, 사도의 직책인 겁니다. 사도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자기 믿음 좋다고 자랑질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라는 것, 사도라는 것은, 이 세상에 오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이미 오셨다는 사실을 사도직책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그 시대마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게 되면 이 세상의 수상함, 위험스러움, 이것을 전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줬다면 이제는 사도를 통해서 또다시 되풀이해서 우리 시대에 알려주는 겁니다. 네가 버티고 있는 이 세상이 무지무지 위험한 곳이고 너를 망치는 세상이라는 것, 그것을 사도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할 때 열 두 제자 다 내뺐고 그 중에 한 제자는 배신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예수님은 되게 외로웠어요. 자기패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자기를 호응해주는 사람이 다 도망갔다는 말은 실패자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실패의 끝은, 그냥 실패자로 해서 귀향한 정도가 아니고 실패의 끝은 살해당함,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은 자의 특징이 뭐냐? 이 땅에서 타의에 의하든 자의에 의하든 죽은 자는 이 땅에서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동성로에서 무덤 봤습니까? 대구시내에 무덤 없지요. 무덤은 저 먼데 가 있고 무덤 하나 새로 만들려고 하면 시에 민원 넣고 난리입니다. 포항 가는 거기에 현충원 그거 하나 만드는데 애를 그렇게 많이 썼답니다. 한 집사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죽은 귀신들이 왜 우리 마을에 모시냐고 민원이 들어와서. 죽은 자는 거부의 대상이 되지요. 그 말은, 예수님이 오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예수님에 잠재된 그 운명 자체가 사람을 자기편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밉상 받으려는 것이 담겨있고 배제당할 운명이 담겨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겁날 것이 없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미 죽은 자를 누가 이깁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거든요. 이 그리스도의 몸이 죽었잖아요. 진짜 교회는, 다시 말해서 진짜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 죽은 몸이에요. 죽은 몸을 누가 갋습니까? 그래서 이미 죽어 무너진 교회만이 성립해요. 이 교회를 채우려고 하면 안돼요. 영구 없다, 하듯이 교회 없다! 이래야 됩니다. 교회가 없는 교회가 유일하게 살아남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에요. 교회가 있음이 감지된다면 그 교회를 지키려고 하고 키우려고 할 거예요. 백 프로 가짜입니다. 간판을 대한예수교 하고 뭘 갖다 붙여도 백 프로 가짜에요. 진짜 교회는 그리스도 몸뿐이고 이 그리스도 몸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자의 몸입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고 이미 실패로 규정받았기에 더는 실패할 것이 남아있지 않은 그 모임,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시면 안 됩니다. 실패의 끝을 맛보자.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실패 없는 그 실패의 막장지점, 끝 지점으로 달려가야 돼요. 빌립보서 3장에 사도바울은 인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한테 목표가 있는데 나의 목표는 예수님이 망한 그 지점으로 달려가는 것이고 그 망하는 길을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 망한 그 길로 달려가는 이유는 부활에 이르려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자기는 예수님이 갔던 그 망하는 길을 기쁨으로 나는 간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4절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실패의 리스트가 좍 나오잖아요. 이 리스트만 보게 되면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었구나. 못된 짓을 하더니 살아계신 하나님이 벌을 톡톡히 내려주는구먼. 벌 받을 짓을 했으니까 이 땅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못 사는거야.”라고 비아냥거릴 겁니다. 그럴 때 뭐가 준비되어 있는? 6절이 준비되어 있어요.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아무도 갈 수 없는 이 길을 기쁨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옳은 길로 가는데 옳은 길로 가면서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런 것들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사도를 만드는 방법은 어떤 거창한 유니폼으로 입혀주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 천주교하고 감리교하고 통합을 시도합니다. 유니폼도 똑같이 입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교단에 다 넘기고, 목사월급이 교단에서 제공되고, 예배당은 천주교와 똑같이 치장하고, 감리교 목사를 목사라고 부르지 않고 신부라고 부르고. 천주교에 보면 문자 같은 것이 있지요. 감리교 목사가 자기교회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장로에게 알리지도 않고 천주교와 똑같은 장식을 하고. 왜 감리교가 천주교와 통합을 하느냐? 이게 문화거든요. 문화의 일종으로 보는 거예요. 문화는 뭐냐? 취미생활을 말합니다. 오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양선택 과목처럼 교회 다니는 것을 하나의 선택과목으로 여기는 겁니다. 딱 필요한 것은 아닌데 시간 있으면 가면 괜찮은 그것, 그게 교회 다니기에요. 그다지 진지할 필요 없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고, 시간남아서 몸부림치거든 교회 나오는 식으로. 필요한 인문학교양을 우리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거든요. 제사라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죽은 분에게 제사지내면 돼요. 오늘도 사실은 제사지내는 날이에요. 부활절이니까.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살아 있는데 제사하는 것이 아주 기분 나빠요. 그렇게 해서 “감리교나 천주교회에는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진보를 이루는데 있어서 보탬이 되는, 빛과 소금이 되는 유명한 집단입니다. 그러니까 돈 내세요.” 결국 마지막에는 돈 내라는 거예요. “헌금 가져오세요. 돈 가져오세요.” 이래서 “빛과 소금의 정의가 확장되고 하늘나라를 확장시켜 드릴 테니 돈 내세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교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인간이냐? 내가 다 영생 줄게.’” 이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교회가나 절에 가나 진리의 길을 가기만 하면 되니까 까짓 거 통합 못할 거 뭐가 있어요? 천주교와 감리교가 통합하고 그 다음에 불교하고 통합하면 돼요. 통합도 덜컹덜컹 거려요. 여러분이 헌금한 것을 다 교단에 다 보내고 그 대신 모든 목사에게 월급을 주는 방식이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목사에게 최저생계비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통합 측 150만원 받습니다. 교인 5명만 되어도 괜찮아요. 150만원 꼬박꼬박 챙깁니다. 연금제도 도입되지요. 80퍼센트 보장되게 되면 설교준비 할 필요 없어요. 은퇴해도 80퍼센트 얻는데요 뭐. 평소에 목사 월급이 5백만 원을 받다가 은퇴해도 4백만 원 받으면 진즉에 은퇴하지요. 노는 재미도 쏠쏠 하잖아요. 등산 다니고 돌아다니면 되는 거예요. 월급이 나오니까. 이게 뭐냐 하면, 천국과 영생은 내가 결정한다는 겁니다. 자기결정권이라 하는데 자기의사결정권,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사도라는 직책은 사도본인이 결정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자기사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권세가 너희를 둘러치고 있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너희가 알지 못하는 권세로부터 이미 장악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통치 받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악마에 의해서 통치 받고 있어요. 그게 골로새서 1장 13절에 나옵니다. 감리교나 천주교사람들은 이런 것이 안보이지요. 안보이지만 골로새서 1장 13절에 분명히 나온다고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분명히 나오잖아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구원은 무엇이냐? 구원이라는 것은 흑암의 권세에 꼼짝 마라, 하고 흑암의 권세에 잡혀있다는 자에게만 구원이라는 것이 효과 있게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절에 가다가 교회로 오는 것이 구원이 아니에요. 흑암의 권세를 느껴야 돼요. 흑암의 권세라 하는 것은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천주교회로 갈까, 교회로 갈까, 나는 교회로 가기로 결정했어.” 이런 결정권은 전부 다 마귀가 하는 짓들이에요. “나는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이런 결정권은 마귀가 뒤에서 사주해서 하는 짓이에요. “나는 옥수수 연구만 했는데 이제 대선 나올래.” 이게 마귀가 하는 짓이라니까요. 3년 내에 일자리 3백만 개 만든다고 다 적어놨어요. 아래층에 수정교회 하다가 대선사무실로 바뀌었어요. 아내에서 남편으로 바뀐 거예요. 자기결정권 발휘해서 자기 대통령하게 해달라는 그 말이 아닙니까? 인간은 자기결정권이 없어요. 없는데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한다고 하는가? 이게 흑암의 권세아래 놓여 있다는 증거가 그런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악마의 사람이에요. 악마의 사람은 악마의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권세는 반드시 자기 권세에 속한 자기의 조수들을 보호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꼬붕들을 보호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보호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너희 행복을 원해라, 이겁니다. 행복이에요, 행복. 전 세계 모든 철학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책들은,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내 인생은 내가 지키고 나는 내가 만들어간다. 거기에 관한 책들입니다. 시중에 나오는 세상 모든 책들이요. 교보문고, 영풍문고, 모든 책들의 내용이 다 그런 거예요. 도서관에 있는 책들. 어떤 분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눈이 막 아프다고 해요. 공부하시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야, 공부 참 많이 하는구나.’ 도서관의 어떤 책을 보느냐가 문제겠지요. 열심히 눈 아프도록 공부하시는데 그 책들이 추구하는 것이 뭐냐? 나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내가 내 결정권을 그 때 그 때 사용하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데 이 의지는 동물과 다른 점이다. 자기의 미래는 자기가 미리 생각해서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악마가 그동안 우리를 사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예수님이 이런 소리 하니까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봐야 알지.”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을지 안 믿을지는 내가 죽을 때쯤 되든지, 안 그러면 정말 확인하는 것은 죽어봐서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으면 그 때 후다닥 천국 쪽으로 내 맘을 틀어버리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왜?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나오는 그 후의 미래의 세계이기 때문에 미리 당겨서 그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눈으로 확인해서 내가 믿을 만 해서, 내가 결정할 만해서 결정하거든요. 내가 나를 만들어가는 그 방식 그대로, 예수 믿는 것, 천국 가는 것, 영생 얻는 것, 구원 얻는 것, 그 방식을 사용할 때 그 방식 외에는 우리는 악마로부터 배운 적이 없어요. 악마는 그걸로 계속 가는 거예요. 너는 이미 신이야. 너는 이미 선택할 때부터 신으로 선택하는 거지요. 유명한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 보면 그 부락민들이 구원자를 기다려요. 쉽게 말하면 자기 마을을 부흥시킬 그런 영웅, 신을 기다리는데 그 단편의 마지막대목에 보면 그 온다는 신이 본인이에요. 부락민 자기 자신이었어요. 인간의 종교에 대해서 정말 명백하게, 명확하게 집은 겁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이미 악마가 우리 속에 집어넣어준 신이에요. 신이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스럽고 전능하고 대단한 분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정작 그 신과 나 사이에 연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결정권입니다. 신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내가 결정하게 될 경우에만 신과 나는 관계가 맺어진다. 따라서 종교란 뭐냐? 천주교고 감리교고 기독교고, 이 모든 종교가 뭐냐? 좋은 상품을 제시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신 어때요? 여러분 보기에 이런 신 놓치면 아깝다고 생각하시거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Knockin' On Heaven's Door”라는 말이 있어요. 천국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두드리라. 그런 노래 있잖아요. 천국 문을 두드리라. 열립니까? 누가 두드리는데? 두드리는 그 마음결정을 누가 했는데? 내가 했다는 말이지요. 누구 좋으라고? 나의이익을 위해서, 나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현재의 모든 결정은 나의 선택에 의해서 지금 현재를 잘 가꾸어 온 것처럼 이런 식으로 나의 건전한 결정권이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게 바로 종교고 그게 바로 문화고 그게 평소에 우리가 하는 행세거든요. 그런데 이 사도가 등장했다는 말은 그것에 시비 거는 겁니다. 그것이 어두움의 권세에요. 어둡다는 것은 통째로 다 어둡다는 거예요. 어둡다는 말은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에요. 여러분이 밤중에 전기가 나가서 어둡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전기가 나가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낮에 있었던 그 해가 서산 너머에 잠자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거예요.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돼요. 손전등이 나가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가로등이 나가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정전이 되어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낮을 밝히던 해가 사라져서 어두운 거예요. 이 말은 우리 잘못 아니라 그 말입니다. 밤이 어두운 것은 내 잘못 아니에요. 나보고 닦달내지 마세요. 밤이 어두운 것을 가지고. 제가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한 것 잠깐 해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요즘과 비교해서 더 순수한 사람들이에요. 지금 과학 한다고 찧고 까불고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진짜 순수하게 뭘 알았느냐? 농경시대니까 농사를 지으면서도 무슨 권위를 인정했는가? 저 달과 해와 별은 내가 안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농사지어봐야 비가 제때 안 내리고 해와 달과 별이 없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해줬어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어떤 민족과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신을 인정했습니다. 까불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해와 달과 별의 기능이 뭔지조차 잊어버렸어요. 당연한 줄 알아요. 당연히 비오고 당연히 해가 저기 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건방을 떠는지. 신을 믿던 그 자리에 이제 신을 믿는 것도 짜증이 나서 이제는 신의 중심자리에다가 내가 얼마나 진보할 수 있느냐, 그걸 두자로 진화라고 합니다,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고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데 온 정력을 다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은 어두워요. 어두움의 권세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직책은 뭐냐? 무엇과 관련되어야 되느냐? 구약과 연관시켜야 됩니다. 구약에 사도의 직책과 동일한 직책이 있으니 그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천상회의에 참석했다는 겁니다. 열왕기상 22장 19절에 보면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미가야 선지자만큼은 그 많은 선지자 중에서 유일하게 천상회의를 봤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 못지않게 용감했던 이유가 있어요.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봤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용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 예수님이 찾아왔어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왔어요.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내가 기대하고 소망하고 요청한 것을 믿으면 안돼요. 그것은 종교가 돼요. 기독교가 된다니까요. 그것은 교회 다니기가 돼요. 그것은 문화 활동의 일종입니다. 제가 캐나나 캘거리에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우리가 정작 믿어야 될 것은 요청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쑥 밀고 들어온 그것, 천상회의, 부활하신 주님, 그것을 두자로 하면 성령, 성령께서 주신 그 내용. 이 미가야가 400명쯤 모인 그 노회……, 우리교회는 노회라는 것은 잘 모르시지요. 교단간부급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주식회사 이사급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사장단들, 회장은 총회장이고. 교회재산 다 가져가는 사람들, 감리교나 천주교에서 다 가져가는 사람들. 그래서 4백명이 모였는데 모든 사람이 이번 전쟁은 이긴다고 이야기했어요.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느냐 하면, 그들은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집단적 표상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모이게 되면 거기서 추상적인 단일표상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어요. 민주주의지요. 옛날 같으면 왕, 지금으로는 대통령. 추상적으로 뭔가 하나 걸어놓고 거기에 매진하는 겁니다. 김정은 지도자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겁니다. 왕에 대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주체의 목표점을 추상적으로 설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달려갈 인생의 목적도 그 추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거예요. 집단적 표상을 향하여. 그 집단적 표상이 구체화된 배후에는 신이 있어요. “신이시여, 우리 여왕을 보호하소서.” 영국국가처럼. 신이시여, 우리 왕을 보호하소서. 조찬기도회가 뭡니까? 신이시여, 우리 대통령을 보호하소서. 어느 조찬기도회에서 목사가 기도하기를 “신이시여, 우리 대통령이 탄핵되게 하소서.”이런 것은 없어요. 그랬다간 차비도 안 나옵니다. 이사야는 화로도 망하게 되었도다, 이미 하나님을 봤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만들어내고 지어내서 가르치는 거예요. 가르쳐야 월급이 나오니까.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과 여호와의 입에서 안 나온 것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만들어낸 그 말씀의 특징은 설교하고 강의하면서 자기팬클럽을 조성해야 돼요. 자기추종자가 있어줘야 되고. 그걸 목표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주어진 선지자나 사도의 특징은 뭐냐? “믿기 싫거든 말아라.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야.”이렇게 나와요. 이걸 쉽게 말해서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이런 선지자나 목사를 해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교회 키워서 주의 종이라고 선전선동해서 “주의 종한테 오시면 구원 보장해 드릴게요.”라는 그것을 상품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걸 상품으로 해서 사고파는 거예요. 그런데 참된 선지자는 “교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교회가 어디 있어요. 주님의 성령이 임하면 여러분 자체가 교회인데 무슨 교회를 찾아요? 교회로서 움직이세요. 교회 오지 말고.” 교회 오지 말고 교회로서 움직이면 집에 가도 교회, 직장에 가도, 화장실에 가도 교회인데,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데. 문화 활동하고 에어로빅 가르치는 곳입니까? 여기가 꽃꽂이 강습하는 데에요? 회비모아가지고? 예레미야 23장 18절에 보면,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는가?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예레미야만이 참된 선지자고 나머지는 다 가짜입니다. 그런데 이 가짜는 권세를 갖고 있어요. 예레미야는 권세가 하나도 없어요. 아까 설교한 것 다시 해 볼게요. 이미 죽은 자를 누가 갋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에요. 사도바울도 사도될 때 이미 죽은 자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본인은 죽고 본인 안에 살아 있는 예수님도 이 땅에서는 죽은 분이에요.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세상은 우리에 대해서 죽었고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어 있고.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미가야부터 아까 이사야 이야기했지요? 예레미야 이야기했지요? 지금 제가 종교라는 취미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라는 취미활동의 클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노는 클럽이라니까요.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지금 우리는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힌 증거가 뭐냐? 어떤 인생을 산다 할 때 내가 결정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목적이 있는데 나의 행복을 목적으로 어떤 결정에 나서는 그런 버릇과 길들임, 이것이 어두움의 권세에서 나온 거예요. 오늘 본문 보세요. 어느 인간이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런 것을 취미로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런 것은 소용없는 짓이에요. 이걸 또 모여서 할 필요는 뭐가 있습니까? 각자 집에서 하면 되지. 모여서 하면 위로가 되고 성도인 것처럼 느껴져요? 고난 받음으로서, 학대를 받음으로서 오는 잉여적인 쾌감을 즐기는 겁니까? 세상이여 나를 때려다오. 왜? 나는 순교되면 더 기쁘게. is대원입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겠어요? 이왕이면 뷔페 먹어가면서 고난 받고 놀러가서 고난 받고 노래방에서 고난 받으면 되지 뭐 때문에 쓸데없이 자기가 예상한 것을 합니까? 이러한 이 권세에 대해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을 다시 보게 되면, 사랑의 아들이 오시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 말이지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가려면 흑암의 권세에서 사는 방식은 지적받아야 됩니다. 이거 고치지 아니하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못가요. 흑암의 권세에서 내가 생존하려고 시도했던 그 방식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자기결정권입니다. 자기결정권은 뭐냐, 자기소망을 낳거든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기다리면 안돼요.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자꾸 기다리게 되면 그 기다린 폭만큼 자기 행함이 거기에 추가가 되고 들어가야 돼요.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이렇게 착해지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헌금 드리면 천당 보내줘요?” 이렇게 추가가 되는데 함께 살아버리면 연발성 지적을 받게 돼요. 연발성으로 우리의 소망은 완전히 개떡 되는 겁니다. 연발적으로 까이는 거예요. 함께 있는 주님의 소망이 따로 있는데 왜 네가 따로 자기결정권에 의해서 소망을 만들어내느냐, 제작하느냐는 그 말이지요. 우리 애는 이래야 되고, 우리 교회는 이래야 되고, 우리 장로는 이래야 되고. 이 두 개의 권세를 한꺼번에 갖고 있는 분이 사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의 특징이 뭐냐?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사도의 직책이 등장한 거예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 사도의 직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끝나고 난 뒤에 누가 이 악한 세대에서 사도의 역할을 하게 되는가? 누가? 그것은 성령 받은 여러분! 누가 주님을 위해? 여러분들!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사도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처럼 많이 견디고, 환난과 궁핍과 매맞음, 우리도 이것을 원할까요? 하지 마세요. 그것은 또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겁니다. 환난, 매맞음, 갇힘, 요란함, 그것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주어지는 환난이 아니에요. 정말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환난으로 주십니다. 사업을 하는데 지난 달 수입이 50억이었는데 이번 달 갑자기 500억이 되었다. 갑자기 450억이 불어 난데서 오는 그 환난, 그게 바로 주께서 주시는 예상치 않은 환난입니다. 우리 애가 전교 2백 등 하다가 이번에 전교 3등으로 올라오면서 애가 까부는데 거기서 엄마가 느끼는 환난. 다른 대학으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표를 서울법대로 바꿔야 된다는 노선변경에서 오는 그 환난. 욕하고 다시는 안 오겠다던 그 단골이 두 명의 손님을 더 몰고 온 환난. 항상 주님이 주신 환난의 특징이 뭐냐? 예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내가 원치도 않는데 결혼해달라고 달려드는 남자의 발생 이런 것, 나의 소망을 그 때마다 짓밟는 이것이 연발성구원이라는 거예요. 매일같이 어두움의 권세의 버릇에서 길들여진 우리가 내세우는 그 소망을 우리 앞에서 찢어버리고 사랑의 나라에 필요한, 사랑의 나라에서 적용되는 새로운 소망으로 교체시켜주는 그 환난, 매맞음. 사람은 매 안 맞고 인간 안 되거든요. 아멘 하려면 하나 더 해야 돼요. 명태하고 여자는 사흘 만에 한 번씩 패야 인간된다는 옛날 말도 있지만. 이것을 출애굽기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왕으로 하여금 집단적 표상을 격상시켜요.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여호와의 자리까지, 신의 자리까지 구체적 인물로 격상시킵니다. 격상시키는 방법이 뭐냐? 강퍅케 하고, 강퍅하게 하는데 9번이나 강퍅하게 해요. 본인이 인간성 좋아도 하나님께서 인간성 좋게 안 만듭니다. 강퍅한 인간성으로 자꾸 만들어내서 바로의 아들의 죽음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같은 레벨에 놓는 작업을 출애굽기에 해요. 그 작업이 출애굽입니다. 거기에 동원된 분이 있었으니 여호와의 사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들의 그것도 밤에 이루어집니다. 천사는 일을 밤에 하거든요. 그것이 출애굽기 12장에 여호와의 밤이라고 나옵니다. 여호와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집집마다 모든 집에 여호와의 사자가 돌아다니면서 맏이는 다 죽이고 심지어 가축의 막 태어난 새끼도 다 죽여 버려요. 그 목표는 뭐냐? 모든 애굽의 가정마다 응집한 것이 있어요. 집단적표상인 바로의 왕자가 죽습니다. 이제는 여러 사람 붙을것이 없어요. 1대 1로 붙어요. 그 당시 이 지상의 권세의 대표자는 애굽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약속민, 히브리민,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야곱의 자손들이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것도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요.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도록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요. 죽음의 사자가 밤에 온 집에 돌아다니면서 맏이를 다 죽입니다. 저는 늘 이걸 생각해요. 그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복면을 한 일본 사무라이들이 뒤에 군대를 차고 꼭 지붕으로 돌아다니지요. 지붕마다 쉭쉭, 물론 영화에서는 피아노 줄에 매달린 채 연기하겠지만, 그것도 약간은 비도 와 줘야 돼요. 그래야 분위기가 축축해요. 습기 잔뜩 머금은 밤에 복면을 해서 얼굴 가리고 슥 지나가면 “아이고 내 자식 죽었다!” 하고 갑자기 통곡소리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연발로 그 다음 집 죽고, 그 다음 집 죽고,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천사를 두고 저는 이렇게 별명을 지어봅니다. 시체 처리반. 왜냐하면 어두움의 권세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이미 시체기 때문에. 금융통화위원회가 한국은행에서 금리인상 회의를 하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한국의 경제를 책임질 사람이지만 거기에 죽음의 사자가 오게 되면 시체 처리반으로 등장합니다. 네가 어느 경제학박사라도 천사가 보기에 전부 시체에요. 특검의 검사들 그거 시체들 모인 거예요. 목사들 노회 한다고 모이지요. 시체들입니다. 어두움의 권세자들이기에 그들은 거기에 모여서 자기결정권을 내놓고 집단적 이성을 발휘합니다. 다음 달 부산강의에서 ‘제 4차 산업혁명과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개인적 이성이 모여서 집단이성을 이룹니다. sns라고 하지요. 집단 이성을 이루면 지혜가 모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죽은 자의 어떤 목표와 목적과 어떤 지혜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놓였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에요. 죽어야 될 자고. 왜? 애굽이라는 집단적 표상 안에 놓여 있는, 이미 죽은 자의 지혜요 목표고 계획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두움의 권세를 더 키우려고 할 뿐이지 전혀 사랑의 아들과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요? 전도서 9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죽어서 주님 만나서 어떤 자기의견을 개진한다고요? 죽고 난 뒤에 죽은 것이 아니에요. 죽기 이전부터도 이미 죽은 자에요. 어두움의 권세에 이미 묶여 있다는 말은 사주를 받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악마의 사람이라니까요.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의존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인간은 뭐냐? 빗방울이 떨어질 때 각자 떨어지잖아요. 비가 각자 떨어지듯이 아무리 몇 십 몇 백 명이 모여도 각자 놀아요. 빗방울이 섞이는 법이 없다고요.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그런데 우리는 그걸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당연함. 여러분이 인문학강좌를 들어보세요. 행복추구, 소통, 그것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복지사회.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익숙해졌고 그걸 당연함으로 여깁니다. 그 당연함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보낸 거예요. “언제까지 그게 당연할 줄 아느냐?” 너희들의 그 당연함이란 인식에서 뭐가 빠졌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지금 제외시키고 자기들끼리 당연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 받고 사도가 하는 기능을 할 때 우리는 사도처럼 자진해서 고생을 해야 되느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갑자기 슬퍼지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사람이 슬퍼진다는 것은 자아가 있고 그게 주님 앞에 위축되어서 그래요. 사도바울은 위축된 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위축의 반대말이 환희. 꼭 가수 이름 같다. 환희, 희열. “주여,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이렇게 성령을 선물로 줄 수가 있습니까? 어떤 생각이 있어서 저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까? 사랑의 아들을 이렇게 넣어주십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드물어서 그렇지요. 드문 것과 어려운 것을 구분하세요. 이게 희귀합니다. 성령 받은 것이 희귀한 거예요. 어렵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용쓰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아서 믿음이 없으니까 믿는 척을 하려고 용을 쓰는 거예요. 용쓰면 변비 걸려요. 관장해야 됩니다. 안됩니다. 큰일 나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뭘 보고 환희의 기쁨을 느끼느냐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꼭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는데 그게 사실 대다수 아닙니까? 왜? 당연함이니까. 오늘 설교 제목을 당연함으로 바꾸고 싶다. 정말 당연한 거예요. 그들이 그렇게 자기결정에 의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열심히 하는 것, 장하기 짝이 없지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기 혼자서 검정고시 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 칭찬하고 싶지요. 종교와 무관하게. “착하다. 네 어머니 장사하는데 이제 호강하겠구나.” 얼마나 착합니까? 하지만 그것은 시체처리반에 의해서 시체로 간주돼요. 열심히 신앙생활 하세요. 어디까지. 지옥까지 갈 때까지. 그게 제 이야기 같으면 제가 욕 얻어먹어도 되는데 이게 전도서 9장에 나와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2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결국은 똑같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악마의 사람들은 악마가 안보이니까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되니까 남 흉내 내는 거예요. 남이 하나의 모델이 되고 그게 매뉴얼이 되어가지고 거기서 길들여짐이 있고 그걸 생물학적으로 하면 적응이라고 하고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만이 남는 거예요. 살아남아야 낙을 본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살아남는데 힘이 모자라잖아요. 그러면 교회 가서 철야해야지요. 맨 앞자리가 은혜의 자리거든요. 써 놨어요. 은혜의 자리. 뒷자리는 안돼요. 앞자리로 가야지. 은혜 받아야 되고, 남 곁눈질 해가면서 ‘기도를 저렇게 하는 것이 맞구나.’ 하고, 찬송을 하는데 해병대박수를 하게 되면 ‘찬양은 저렇게 하는구나.’ 흉내 내기, 복제하기, 모방하기, 양육받기, 목사에게 교육받기, 권찰회하면서 성경공부하기, 이 모든 것이 집단으로 해서 시체를 더욱더 시체로 만드는 거예요. 그만큼 했기 때문에 미련이 있는 거예요. 이걸 버리는데 미련이 있는 거예요. 그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얼마인데. 이걸 못버리는 겁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고백을 못해요. 흉내낼 뿐이지요. 바로 천상회의, 하늘을 봤던, 저는 그걸 지난 수련회에서 다중현실이라 했습니다. 미래에 가서 한다고요. 아니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왔습니다. 성령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주와 함께 지금 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길들여진 것을 바꾸어서 사랑의 나라에 살도록 합당한 성격으로 바꾸어주시는 그것이 비록 매맞고 아픔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환희, 기쁨의 찬송을 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움직이는 사도인 것을 다시 한 번 환희의 기쁨 속에서 감사케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이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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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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