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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704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자유게시판-

201704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해보겠습니다.

지젝의 이러한 사상이 두 가지에서 영향을 주게 돼요. 하나는 정치적 문제,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치는 어떻게 하느냐? 이걸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보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다 허구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도 환상이란 말이고 사회주의고 공산주의가 다 환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념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의 병리적 현상, 돈 때문에 시달린 영혼이 너무 괴로워서 그걸 어디로 해소하느냐 하면, 완벽한 이념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실제 생활에서 오는 척박한 어려운 상황을 그런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때우려고 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취직 안 되니까 이념 전쟁에 뛰어드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간사들 선교 하러 가는 것. 지지난 번 설교에서 그랬잖아요. 교회에서 앵벌이 시킨다고.

옛날처럼 젊은이들이 고생하며 살고 방 한 칸에 비키니 옷장 놓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60대 이상 노인들 우리도 고생 다 했다. 지금 대구에 중소기업들 사람이 없어서 못 구한다. 그런 데 3D 업종 안 가고 전부 대기업에 가려고 하니까 취직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젊은 사람들이 이미 상상계, 자아이상이 이 꽂혔어요. 꽂힌 이상 자아이상은 수정할 생각 없고 그들의 아는 현실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아이상을 구현할 현실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가 해줘야 된다는 거예요. 거기서 정신병 생기고 술, 담배로 정신병을 해소하려는 겁니다. 자진해서 미치고 싶은 겁니다. 술, 담배 없으면 도대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계속 사업이나 할까, 취직했다가 더럽다고 때려치우고 자기 사업한다고 털어먹고 하잖아요. 자기만 털어먹으면 괜찮은데 온 가족이 털어먹으니까.

그들이 이념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념이 허구화된 이유를 밝힙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이 뭘 보느냐 하면, 욕망을 충족 못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충족을 방해한다는 이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자꾸 젊은이들은 어릴 때 상상계의 욕망을 충족 못하느냐고 하지만 욕망이 욕망을 낳는 거예요. 그럼 이념이라는 것은 뭐냐? 중간에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빠지는 겁니다. 현실은 다양성, 다수지요. 다수에서 보편적을 뽑아냅니다. 이게 바로 이데올로기에요. 이념이라니까요. 다수에서 보편성을 만든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세상이 되면 참 좋겠다. 어떤 세상인데? 그런데 다수의 생각이 너무 많아.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은 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합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걸 기독교적으로 하면 온 세상이 기독교 세상 되는 것, 이걸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념 자체가 허구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을 기대하는 오야봉이 있어요. 오야봉이 본인이에요. 그런데 본인은 누구한테 있느냐? 알 수 없는 정신적 지주가 있어요. 정신적 지주는 어릴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커서는 이상 자아, 내가 꼭 되고 싶은 것, 김 과장이라면 김 이사, 나아가 김 회장 되고 싶은 것. 그것이 날 지시해서 나를 중심으로 보편성을 이루는 겁니다.

지젝에 의하면 도넛에는 중심이 없잖아요. 중심을 허구적인 것이 감히 중심을 비워야 돌아가는 욕망의 세계에 이걸 채우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이걸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도 없이 어떤 욕망과 희열과 즐거움, 쾌락을 추구한다면 마저 채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습니까? 설명 못합니다. 언어적 설명은 안 되고 나라는 인간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더 기쁨을 추구한다면 이 괴리만큼 정신적 병리적 증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사회에서 정신병환자가 되는 겁니다.

교회 가면 착하라 하지요. 또 착해, 또 착해. 어떻습니까? 정신병환자 되는 거예요. 기도하라 하지요. 성경에 보면 무시로 기도해야 되지요. 기도 시간을 늘린다고요. 또 늘여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기대치에 부합되는 어떤 기쁨 같은 걸 노리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 했는데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쾌락이 있다면 그게 잉여 쾌락이에요. 우수리, 나머지 쾌락이 있다면 그것이 현재 나를 힘들게 만듭니다.

주체 안에 남는 구멍, 그것이 바로 쁘띠아(petit a), 가짜 욕망이라 할 수 있고 소규모 욕망, 미지의 X가 우리에게 항상 상상계 속에 이미 침투해 있는 겁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할 때 적폐라 하고 적대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정치란 없는 적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본인의 상징계를 형성하는 게 정치입니다. 박근혜 탄핵할 때 안철수와 문재인이 마음이 얼추 맞지요. 적은 저쪽 박근혜기 때문에. 탄핵되고 난 뒤에는 문재인 쪽에서 안철수 딸이 어떠니저떠니 나오는 겁니다. 당선확률이 안철수가 높아지니까 적을 만들어야 돼요.

사람이 적이 없으면 어떤 활동도 안 하게 돼있습니다. 적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사실은 본인의 욕망을 계속 바짝 메마르게 하는 그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거든요. 너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건 본인이 계속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적이 다 물러가고 적이 완전히 내 발 밑에 밟히면 행복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또 새로운 적폐, 적대를 만들어야 돼요. 적폐는 정치적 용어에요. 이데올로기는 왜 있는가? 적폐, 적대를 만들기 위해서 기준 세우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겁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했다, 어느 당에 속했다고 하는 겁니다. 정치가 없는 곳이 없어요. 이건 심지어 가정에서도 있어요. 아버지 패와 엄마 패, 에서와 야곱 이야기 아닙니까.

야곱이 훌륭하다면 안 되고 야곱이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적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고, 에서는 그게 없어요. 야곱은 자기 안에 적폐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해소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해소가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받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구원하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지요. 얍복 강가에. 그동안 한 편이라고 생각한 하나님이 자기와 싸워야 될 적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지요. 하나님이 적이 된 결말은 죽음으로 저주로 처리해야 돼요. 야곱이 저주받은 현장에서 태어난 게 누굽니까?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름이, 존재가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지젝은 이렇게 합니다. 내 존재가 없는 곳에는 내가 없고 내가 없는 곳에 내 존재가 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면 할수록 가짜임을 폭로하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 말이 우리나라에 있지요. ‘솔직히’란 말. 선보면서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이것 백 프로 가짜입니다.

‘솔직히’란 말 듣지 마시고 밥 먹을 때 어떻게 먹는가? 나는 주체고, 밥 먹는 것은 실체거든요. 그 실체가 주체되기 전의 실체기 때문에 그게 그 사람이에요. “밥 먹을 때 좀 흘리네요?” 하니까 “제가요?” 할 때 이게 가짜라. 실체에 나를 붙이면 가짜가 돼버려요. 주체는 항상 실체를 감추는 데 급급합니다.

그래서 지젝이 유명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가 가짜라 이야기해서 그래요. 그런데 지젝이 기존의 정치를 공격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교재 234페이지에 이게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나가요. 그 대목을 봐야 돼요. [지젝은 그의 저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 세상에 어느 종교가 신이 자기 신도를 보고 나를 배반하라고 이야기하는 신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게 바로 지젝이 말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에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누가 택했어요? 예수님 본인이 선택한 거예요. 가룟 유다의 운명 속에 예수님의 자기 선택이 들어있어요. 그럼 가룟 유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본인이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배신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배신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거예요. 신을 배신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신이 아니라고 나타난 유일한 신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그걸 몰랐다는 겁니다.

그 대목을 읽어볼게요.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지젝은 거기서 더 나갑니다. 지젝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신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있다고 나오지요. 지젝은 그럴 줄 알고 이야기합니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에요. 숨어있는 하나님. 이 말은 아무도 신의 존재를 안다, 모른다? 몰라요. 신의 존재를 모른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묘사는 것은 전부 거짓이 되는 겁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층은 어디 있기 때문에? 언어는 실체에서 나온 게 아니고 주체에서 나왔어요. 주체는 중심이 없어요. 그냥 도넛 같아요. 그때마다 자기 합리화뿐입니다.

S1, 이걸 주인기표라 하는데 흐르는 감정은 언어로 포진이 되고 스톱이 되고, 스톱이 되는 그게 주인인데, 주인은 실상은 모습이 없고 합당한 의미에 부합되려고 S2, S3 계속해서 나오는데 S2 됐다가 S3가 와서 그게 아니야, 그게 원 뜻이 아니거든요. S4가 또 그게 그런 뜻이 아니거든. 자꾸 언어가 미끄러지는 거예요. 주인기표는 없는데 없으면서도 S2, S3, S4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남자한테 참 좋은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떤 상황이 오면 표현도 바뀌는 거예요. 주인기표는 구멍 난 거예요. 실재계에 있어요. 이걸 남성형 세계라 합니다. 남성형 생식기처럼 돌출돼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인간은 돌출기가 제거가 됐어요. 제거됐다는 말은 그걸 사모한다는 겁니다. 주인을. 늘 미흡한 상태에서. 이걸 정신적인 거세라 해요. 거제 되지 않으면 정신병, 거세 되면 정상인. 거세 안 되면,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러고 돌아다니고. “나는 신데렐라 공주야.” 이러고.

일본 만화에 나오는 차림새를 자기 자신에게 다 입히는 코스프레라 하지요. 그걸 어른 되도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나이 오십 넘어서 간담로봇 갖고 노는 사람들, 요새 기혼자들도 많아요. 창고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 있어요. 김건모, 맨날 로봇 만들고 있어요. 그걸 퇴행이라 해요. 나이는 드는데 꿈은 어릴 때 자아이상에 꽂혀있는 거예요. 박혀있어요.

그래서 예수는 숨어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숨어있는 유일한 곳은 여러 군데 오는 게 아니고 그건 바로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한 그걸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외에는 복음이 없다고 지젝은 보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오직 한 가지 이야기했다. 십자가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뭐냐?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했다. 이 말은 니들이 알고 있는 이념적인 지주 같은 나의 아버지 같은 하나님은 다 허구적이다. 실제로는 그로 인하여 배신당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중요한 게 많은데 숨어있는 X가 나타날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야기합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 대목이에요. 그 예수님이 나타나서 가만있었습니까? 활동했지요. 활동의 완성이 뭡니까? 활동의 모든 집약은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한 것이다. 그 의미가 뭐냐? 지젝이 기존의 신학자들을 조사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대목을 해석을 못하고 있어요. 이게 연기하는 건가? 해석을 못하고 있는 이유가, 실재계를 모르니까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상징계에서 나온 주체가 해석이 되는 거죠. 그 해석은 잘못이에요.

그래서 지젝은 말합니다. 해석은 성경을 준 자만이 해석한다는 거예요. 그럼 해석은 누가 합니까?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해석이에요. 성경을 하나님이 줬고 해석은 누가 한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성경 준 자만이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해석 사이에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해석 사이를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 안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해석하는 책. 이렇게 해야 될 이유가, 성경해석은 인간은 못합니다.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령의 감동감화로 성경책이 지어졌으니까.

지제 앞에 이천 년 동안 공부했던 신학박사들이 꼼짝 못하고 있어요.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틀리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왜 그동안 신학자들의 지제처럼 해석 못하느냐? 성경해석 자체가 목적이 있어서 그래요. 그게 이상자아입니다. 본인이 목사다. 본인 교회를 어떻게 키워야 돼요? 남들이 뭘 좋아합니까? 목사님이 주의 종 되니까 수천 명 모였지요. 큰 교회 부흥과 유지를 원했지요. 그게 이상자아지요. 이상자아를 유지하는 것은 상징계의 주체잖아요. 어떤 성경해석을 해서라도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커지는 것을 진리로 본 거예요. 이게 안 되면 그 목사 자살하는 거예요.

지젝은 말합니다. 네가 가룟 유다를 알아? 열두 제가 가운데 가룟 유다가 대표자에요. 가룟 유다 모르면 열한 제자 몰라요. 가룟 유다를 정신적으로 분석해야 되느냐 하면, 가룟 유다만 제대로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님과 맞닥뜨린 겁니다. 그게 성경적으로 맞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은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 원수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잖아요. 베드로는 도망쳤지 죽음에 몰아넣진 않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예수는 가룟 유다 눈에 자기의 적폐입니다. 자기의 자아이상을 공격하고 깨는 적이에요. 누가? 예수가. 쉽게 말해서 이러려고 제자 됐나?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하면, 그것을 가룟 유다가 한 게 아니고 가룟 유다 속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기쁨이, 뭔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쾌락이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할 때 잠시나마 구멍이 뚫리는 사이다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기독교뿐만 아니에요. 불교를 공격합니다. 불교의 논리는 고집멸도에요. 이 세상에 고생이 많다. 생로병사가 고생이잖아요. 고생은 욕심에서 나옵니다. 욕심은 집착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돈 십만 원을 기쁨으로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십만 원 잃어버렸을 때 그 십만 원이 집착의 원인이 돼요. 손에 있으면 느끼지 않는데 잃어버리면 집착이 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아예 집착을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모든 고생은 집착에서, 집착을 해결하려면 없애면 된다. 없애는 방법은 도, 팔정도,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 이렇게 여덟 가지를 하면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 와중에 불교는 말합니다. 그 집착과 욕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남들이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면 남들이 없으면 되는데 이미 나 자체가 남에게 포섭되면 나도 남이 되면 나를 죽여야 되겠지요. 유아론에서 무아론으로 나가야 돼요. 거기에 대해서 지젝은 제대로 공격합니다. 지난 시간에 한 레비나스와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차이 이론 철학가들과 불교의 문제점은 타자가 지루한 동일성이에요. 똑같은 타자성이라는. 내가 다룰 수 있는 그냥 나한테 쇼윈도에 있는 타인들이에요. 저 사람과 놀래, 안 놀래, 결정을 누가 한다? 내가 하는 타자에요. 그것은 현실세계를 몰라서 한 거다.

불교의 가장 약점을 공격하고 불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봐버리죠. 욕심을 짓는 나를 없애는 나, 그 욕심 많은 내가 만든 지루한 동일성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실재계의 침투가 아니고 같은 상징계에 있는 이웃에 침투지요. 상징계의 타인이 나를 공격하니까 도망치면 된다는 게 불교고, 사랑하자는 게 모든 윤리, 도덕이고 그런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진짜 현실, 실재계가 빠진 셈이에요. 그런다고 행복하냐? 그런다고 기쁨이 충족되느냐?

그럼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실재계에서 나타난 거예요.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우리한테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신이 여기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법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을 거론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법이 가만있으면 죄가 안 돼요. 법이 우리에게 작용하면 법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악이 생기고 악을 저지하기 위해 발악을 하면서 우리 안에서 선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정상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선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선은 없어요. 언제 선이 등장하느냐 하면, 악이 와서 우리를 통치할 때 약간이나마 반항기로 등장하는 게 선이에요. 로마서 7장에 그런 게 나오잖아요.

내가 선을 원하는데, 그걸로 끝났습니까? 그 뒤의 말이 뭡니까? 선과 악 중에서 악이 이기잖아요. 처음부터 악은 선한테 질 악이 아니고 이길 악이에요. 그런데 악이 등장해야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의인 행세하고 있는 얍삽한 짓이 악으로 말미암아 공개가 되고 노출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준 것은 선하라고 준 게 아니고 원래부터 악에 못 이긴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줬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온다고 지젝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 중에서 무슨 선이 교회에서 유포됐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게 선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죽어서 어디 갈지 몰라서 그래요.” “죽어서 어딜 가는지 네가 왜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고를 것 같으면 천국은 우리 세계잖아요. 천국 가기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는지. 없지요. 천국, 지옥을 왜 네가 결정하는데. 인간은 거짓말하는 거예요.

심판주가 누굽니까? 주님이라 하잖아요. 심판주가 주님이라면 심판을 주님한테 일임해야 앞뒤 논리가 맞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예수를 믿으면 나를 심판하지 말라고 갑자기, 예수 믿는 걸 누가 악한 일로 봅니까? 선한 일로 보잖아요. 심판주 앞에서 예수 믿는 선을 행해버리면 심판행위에 대해서 내가 방해하는 게 돼요. 그걸 공무집행방해라 합니다.

최순실 조카 장시호가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고 있거든요. 정유라는 이화여대 실제로 입학했었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줄 수 있는 공정한 법집행을 훼방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 공정한 심판이 훼손돼버려요. 이건 나만 생각하는 욕망이에요. 천국은 개인이 구원되는 곳이 아닙니다. 이건 구원파나 하는 짓이고 한국교회가 하는 짓이에요.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경해석은 주님이 하는데 여기서 지젝이 모르는 게 있어요. 성경해석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언약의 상대자기 때문에. 모든 언약 상대자는 한 분을 위해서 가요. 한 분이 누구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나타났잖아요. 왜 모세, 엘리야 본인의 착함으로 구원 못받느냐? 두 분은 이걸 알아요. 아브라함이 누굴 기대했어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쳤다고 구원 못 받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누가 와야 돼요. 자기 죄를 대신할 누가 와야 돼요. 모세와 엘리야가 자신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그게 언약 안에서 그걸 안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성경해석 안에 그들의 초청받은 겁니다.

야곱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야곱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죽었어요. 죽고 그게 재료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으니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을 믿어야 되느냐?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벌인 넘치는 결과물이에요. 왜 넘친다는 말을 하느냐 하면, 바로 지젝이 그걸 이야기했거든요. 지젝에서 실재계는 넘치는 여분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 말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것. 따라서 경계선 넘어는 어떤 언어를 내뱉고 행위를 해도 우리가 추가 될 수 없어요. 거기에 보탤 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게 안 돼요. 예수 믿는 것도 주의 심판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 믿게 하는 그것이 결과로 주어져야 돼요.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예수 믿는 착한 일했다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이것마저 어떻게 실재계 중심에서 이런 고백마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어서 선물로 나한테 안겨주게 되었느냐?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지젝은 그리스도가 빠지는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젝이 복음에 대해서 얼추 따라왔어요. 그런데 지젝은 지금 모든 신학자들이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었다, 불교와 똑같은 것이라고 하면서도 진짜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포기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이론에 의해서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실재계는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비워놔야 돼요. 성도도 비워놔야 되겠지요. 성령세례를 내가 요청해서 받으면 이건 가짜에요. 그렇지 않고 그냥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해요. 이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전한 말은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지젝은 왜 그 대목을 이야기 안 해요? “사람의 지혜로 아니하고”란 말을 왜 빼먹느냐 말이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면 누구의 지혜란 말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그걸 다른 말로 성령이라 하는 거예요.

지젝은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라 합니다. 하여튼 누가 비판해도 비판할 빌미를 주질 않아요. 민주주의 가짜라고 욕은 하는데 따지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반박할 건더기가 없어요. 사람이 민주주의를 원하고 세월호 어떻고 복지를 늘리고 평등을 부르짖자, 독재를 물리쳐라, 나치는 저리 가라, 파시즘은 가라, 이러한 배경에 지젝은 뭐로 봅니까?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돈에 환장한 정신적인 병리현상을 스스로 자가 치료한다니까요.

그럼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될 게 아니냐? 자본주의를 못 벗어나요.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실체기 때문에. 실체란 말은 프로이트에서 나왔지요. 프로이트에서 인간은 아니고 짐승이죠. 짐승은 먹이를 먹어야 돼요. 먹이 먹고 하는 일은 자손 번식. 그러니까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 그 노선이에요. 지금 그러한 짐승과 동일함을 꾸준히 인간은 온갖 윤리, 도덕과 철학과 사상으로 이념화 시켜서 포장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사상과 이념이라 해도 지 새끼 건드리고 가족 건들면 어떻습니까? 정신병 걸려요. 사람이 아직 견딜 만 한 것은 지 가족과 새끼가 건전하기 때문에 그나마 견딜 수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가정에 있는 거예요. 영원히 내 쉴 곳은 가정밖에 없다 하잖아요. 동양철학은 가정에서 가정으로 끝인 거예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외부적인 삼강오륜을 마련한 거예요. 그러다가 서양에 먹힌 겁니다. 서양은 가정에서 더 큰 이념이 있었어요. 그건 신을 위해서. 그것이 IS, 이슬람이 그 짓하고 있잖아요.

인도에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슬람 교인이 트럭에 암소 열 마리 싣고 갔어요. 그 운전사 몽둥이로 맞아 죽었습니다. 왜 맞아죽었게요? 힌두교는 소를 숭상하죠. 자, 따져봅시다. 소를 숭상할 때 소는 S1이 되는 겁니다. 지젝은 이걸 알 수 없다 하는데 소를 숭상하고 싶어요. 그럴 때 지젝은 이걸 정신병자로 봐요. 정신병자니까 만약에 누가 소를 도살하려고 하면 소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죠. 왜냐하면 주체는 소와 더불어 있을 때 내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그대로 기독교에 적용시켜 봅시다. 천주교에서 마리아 동상한테 인사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기독교는 비어있는 십자가라면 천주교는 처참하게 망가진 십자가에요. 망가진 십자가는 물체지요. 하나에 인격체지요. 인격체는 어릴 때 자아이상, 커서는 이상적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는다면 어느 정도 믿어야 돼? 예수처럼 믿어야 돼. 예수님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자고 나오니까 그 대목이 자기한테 이입된 거예요.

성경이 언어로 돼있으니까 언어를 상징적 주체로 해석하는 겁니다. 지젝은 우리가 해석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성적 자아가 동원하기 때문에 제대로 해석이 안 돼요. 해석하는 것이 일반인들이 자기 정신병이 해소가 되잖아요. 텅텅 비어있는 실재계를 뭔가 상징으로 채우니까 다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심이 된다는 말은 숫자가 많다는 것, 천주교가 교회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커지게 되죠. 커지게 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 고객을 기쁘게 해야 돈이 많이 들어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에 치인 이 세상에서 이래서는 죽어서 지옥 갈까 싶어서 천국을 보내주거든요. 천국은 여러분 속에 들어 있잖아요. 착하게 살면, 정성껏 드리고 순종하면 구원받는다. 그게 천국이라고 목사가 부추기면 교회는 절로 부흥되는 겁니다. 가룟 유다 배신이야기를 왜 해요. 십자가 이야기를 왜 합니까? 십자가 끝나고 놀라운 부활의 살아있는 성령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바로 지젝이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공동체냐? 지젝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겁니다. 지젝이 아는 건 여기까지 에요. 사랑의 공동체가 마귀의 전당이고 죄악의 몸이란 말을 거기까진 지젝이 언질을 못해요. 그걸 언질하려면 진짜 성령 받아야 돼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될 때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접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것까지는 차마 이야기를 못해요. 성경에 나오는 대로 몰트만이 주장한 대로 유명한 신학자니까 인용해버립니다. 그래야 교회에 욕을 안 얻어먹으니까. 그래서 지젝은 해답은 없어요. 다 뜯어놨어요.

지젝이 믿는 게 있어요. 성령의 공동체를 믿어요. 교재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236쪽) 따라서 예수를 계속 속여야 된다는 겁니다. 속이기 때문에 안 속인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속이는 자는 더욱 더 속임을 당한다는 거죠.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이게 정말 맞는 이야기에요. 타락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타락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타락을 사람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죄인 중에 괴수가 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아담이 따먹은 게 아니고 죄가 하나님이 따먹게 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구원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에 주목하자는 말입니다. 지젝이.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왜? 그런 현장에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에. [타락으로 오인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돼있어요. 지금 [죽은 신을 위하여]란 책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을 제가 따온 겁니다. 타락으로 오인되는 구원, 다시 말해서 남들 보기에 타락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악은 뭐냐? 지젝은 말하기를 악은 생성적인 선이다. 선이 구체화 되면 악이 되니까 선이 구체화되면 악이 되니까 악이 있는 그것이 선이 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하죠.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릭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지젝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게 기존의 신학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할 만 하죠. 계속 지젝은 하나님 이야기 안 합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공격하는 게 아니고 드러내고 있어요. 실재계를 드러내서 기존에 있는 상징적인 교회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은 뭐냐? 하나님은 자기 정당성에 실패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이 말은 충분히 이해되지요. 얼마나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고 남에게 보여주고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반대로 자기 실패를 증명하는 것으로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이 땅에서 죽임을 당했느냐? 오히려 그런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다.

특히 이 책에서 지젝은 욥을 이야기하는데 욥은 자기 고통의 의미를 달라고 그렇게 요청했건만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서 만나보니까 욥의 고통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다는 거죠. 의미란 상징계에서 하는 거죠. 상상계에선 의미가 아니고 이미지죠. 지젝은 더 나가서 그 이미지는 하나님이 욥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자기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 욥에게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의미를 줬다는 겁니다.

지젝이 자신만만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했다. 욥이 발악했을 때도 하나님은 침묵했다. 이 침묵의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유능한 것이 아니고 무능한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 무에서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진해서 무, 타락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말하기를 이 타락한 세상에서 진정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밖에 없다. 실증적인 무신론자는 아니고 그냥 결과적으로 너희들이 다 하나님이면 난 하나님 안 믿을게, 라고 나온 무신론자만이 진정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 자신을 원인으로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신의 이론을 마감해요.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지요. 지젝의 복음적인 문제점. 잠언 29장 26절 보겠습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적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작정은 여호와께 있지요. 지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닙니다.

지젝은 어디에 초점을 맞췄습니까? 주체에 초점을 맞췄지요. 그런데 잠언 29장 26절에 보면, 모든 인간의 작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죠. 그러면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인 현상과 모든 환경은 하나님이 작심하고 주신 거죠. 이 말은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남자 되고, 여자 되고 싶어 된 게 아니고 그냥 가만있으면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밀면 밀리게 돼있어요.

어떤 점에선 동양철학적 발언일 수 있는데 서양에선 주체지만 동양에선 주체가 없지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거기에 따라서 나는 나란 말이죠. 여호와도 모르고 언약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게 옳다는 거예요. 바로 그 점을 지젝이 뭔가 누락시키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보려고 하는 것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은 거예요. 그런데 그 배역은 누군가는 맡을 배역인 거예요.

나는 부산인데 남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 동에 태어났다. 나는 대구에서 오래 살았고 뭘 했고 이건 내가 안 해도 되지만 작정하신 분은 나에게 그 배역을 맡긴 거예요. 배역은 언제 끝납니까? 모든 연극이 끝나면 배역인 줄 알지요. 무대에서 내려와야 되지요. 그러면 우리 인생이란 무대에서 배역으로 그 역할을 하다가 잠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면 되잖아요.

십자가에 대해서 지젝은 옳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십자가 나오기 전에 십자가를 주체로 다가서면 안 된단 말이죠. 하나의 배역으로 봐야. 우리가 믿게 된 것은 주께서 믿으라고 주신 것, 작정하신 분은 여호와니까 주께서 믿게 하셔서 믿게 된 거예요. 남은 부자 되고 나는 가난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고, 마침 주께서 작정해서 그 역할을 맡게 된 거예요. 머리 노랗게 된 것은, 내가 맡은 역할은 그뿐인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은 갈수록 그 배역의 강도가 느껴지면 점점 더 감사가 늘어나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지젝은 해답을 몰라요. 우리는 감사로 느끼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러 사람을 생각해보면서 주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면서 십자가만 증거 한다는 사실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의 원인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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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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