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
201704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1-지젝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슬로보예 지젝인데 교재에 나와 있습니다. 1949년생입니다. 저보다 네 살 많아요. 한국에 여러 차례 다녀갔지요. 지젝이란 분이 왜 그렇게 유명해졌느냐 하면, 기존에 나온 모든 철학에 대해서 거부했기 때문에. 거부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조차 거부했어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지난 시간에 레비나스 했지요. 레비나스 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철학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철학이 인류에게 희망을 주려하는 겁니다. 돈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좌절하지 마시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희망을 주잖아요. 그런 희망을 만약에 누가 꺾어버린다면 이건 너무 잔인한 일이죠. 그 잔인한 일을 지젝이 한 겁니다.
인간은 일체 이웃사랑이니 그런 것들이 성립될 수 없다 존재란 거죠. 이 말은 곧 무엇이 날아가느냐 하면, 결국 철학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힘든 지경에서도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윤리,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상을 뒷받침 하는데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마저 만약에 없애버린다면 철학이 설 자리 자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사라질 때 기존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지젝의 이론에 대해서 자기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니까 상당히 공격하겠지요. 공격하다보니까 이 사람이 유명해진 거예요.
유명해지는 방법은 간단해요. 기존 동료에게서 욕 얻어먹으면 유명해집니다. 그냥 욕한다고 유명해지는 건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되니까 근거가 뭐냐 하면, 이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체 문제인데요. 최근의 철학은 인간이 윤리적이어야 한다. 윤리적이란 말은 동물과 달라야 된다. 동물은 충동적이고 욕구적이죠. 자연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샌델이란 사람 들어봤습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 대학교수 마이클 샌델, 인문학에서 거론되는, 이 땅에서 정의, 세월호 사건, IS문제, 난민 문제,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결책을 내야 돼요. 그런데 해결책이 얼마나 잘 사느냐 문제라면 경제에서 하는 문제고, 철학에서 해야 될 문제는 얼마나 잘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는 문제입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렵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갖고, 나이지리아에서 물 없어서 고생하는 것, 애들 전염병 때문에 고생하는데 한 달에 삼만 원만 내면 30명을 살릴 수 있다는 그런 것 많이 봤지요. 그런 걸 행할 때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까지 내려온 철학의 마지막은 철학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인간은 윤리적이고, 윤리적일 때 아직도 인류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슬로보예 지젝 합니다. 인물로서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다음 달에는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에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냐 하는 걸 마지막으로 다루고, 그 다음부터는 시편 강해로 성경 공부하겠습니다.
인류애가 있어야 된다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줄곧 이야기했단 말이죠. 지젝은 이걸 반대해요. 쉽게 말해서 인류애 같은 소리하고 있네. 왜 인류애를 붙드느냐 하면, 사람 사는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의미는 돈에 빼앗겼잖아요. 돈에 빼앗겨서 이 세상이 너무 냉혹하고 냉정해요. 비정하고 삭막합니다. 돈으로 모든 문제가 결정되니까. 철학은 삭막한 가운데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의미를 가져야 된다. 이게 지금까지 나온 철학인데 그걸 지젝은 박살냅니다.
인간은 의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의미와 이미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의미는 내가 여기 살아갈 이유를 내 안에 장착하는 것, 가져오는 게 의미에요. 난 역시 이렇게 삭막한 세상에서도 나는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어. 자기 안에 집어넣을 수 있어요. 의미를.
이미지는 사진을 찍는 거예요. 벚꽃이 좋다. 갑자기 벚꽃이 필 때는 사진 찍고 싶지요. 이미지를 찍는 겁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나무가 나한테 들어옵니까? 옛날에 아프리카 탐험가들이 사진을 찍으니까 토인들이 놀랬어요. 사진을 못 찍게 했어요. 왜냐하면 사진 찍히면 자기 영혼이 사진 찍는 사람한테 빼앗긴다고 생각한 겁니다. 빼앗기는 것 아니죠. 사진 찍는다는 것은 복제 또는 복사를 의미하는 겁니다. 사진을 찍을 때 한 방에 찍어버리죠. 전체를 그냥 가져오잖아요.
의미는 따져야 되죠. 나는 저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며 저 사람보다 우월할까, 열등할까?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들이 예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 난 착함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나 어려울 때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해. 여러 가지로 요모조모로 따진다는 겁니다. 특히 요새 교사들 이야기 들어보면 힘들다는 겁니다. 교사 입장에서 학생들이 잘 되기 위해서 학업에도 충실하고 기본적인 인간성, 선과 악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학부모가, “나도 안 나무라는 애를 네가 뭔데 나무라는 데?” 이럴 때 교사가, “내가 이러려고 교사했나?” 갑자기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학원에 있는 교사는 어떻습니까? 의미 챙길 필요 없지요. 저 학생이 돈이 될지 어떨지 찍으면 되는 거예요. 제 예가 어떻습니까? 그냥 지식을 나눠주고 파는 기능인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젝은 의미 시대는 끝났고 이미지 시대라는 겁니다. 이미지가 왜 이 시대에 있느냐 하면,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인간은 자신을 실체로 봅니다. 실체란 흔히 우리 자신을 육신으로 봐요. 거울 보면 내가 거기 물체로 있지요. 이게 기본입니다. 인간은 물체에다 의미를 추가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젝은 말하기를 자기를 실체로 보는 이건 언제냐 하면, 6~18개월 동안에 어릴 때 있던 잔상이라는 겁니다. 어릴 때는 자기의 주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냥 막 움직이는 동물 정도로 보면 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체로 보는 이유가 뭐냐? 나중에 주체가 되고 난 뒤에 회고적으로 자신의 과거는 이랬고, 지금은 이런 의미가 있다는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현재 자기 주체의 의미로 집어넣기 때문에 인간은 실체에서 벗어나 주체라고 우길 수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존에 나는 어릴 때 있었고, 청소년기 있었고, 지금은 어른이다, 라는 시간의식을 다 깨버리는 겁니다. 그건 하나에 착각, 환상이라는 거예요. 지금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구태여 억지로 이걸 구성하기 위해서 어릴 적과 지금의 차이 남을 추궁하는 식으로 회고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나는 성장했다.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야. 이렇게 보는 거예요.
방금 제가 억지라고 했지요. 억지란 말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뭔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실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실제가 아니라면 허구, 환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젝,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느냐고 나오겠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은 이유도 모르는 욕망, 돈에 대한 욕망에 휘말려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5억 가졌다고 만족하는 사람 없어요. 5억 돼야 비로소 10억이란 욕망이 새롭게 생기거든요. 이런 입장에서 어떤 허구, 환상 속에 헤매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이건 억지를 써서라도 나는 이렇다고 우기는 작업을 해야 될 힘든 존재가 된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욕망에 휩쓸러 가면서. 예를 들어서 일체 나는 세상에 있는 사치스런 물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자마자 백화점 가방 있는데 가져갈 사람? 여기요, 하고 손들게 돼있단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른 체 계속 자기이어야 함을 강요받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처음에 인간은 의미부터 하는 게 아니고 이미지부터 출발해서 의미로 갔는데 여기서 자기가 의미 있다, 살 만한 가치 있다고 하지만 이게 새로운 욕망을 자아내는 이미지에 휘둘려요. 인간은 이건 끊어버려요. 자꾸 자기를 괴롭히니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만족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만족이 새로운 욕망이 들어오게 되면, 나는 이걸로 족해, 하면서도 자꾸 곁눈질하는 거예요. 혹시 내가? 이건 본인이 실체가 그런 거고 주체는 나를 가만두지 않고 새로운 욕망으로 이끌고 가는 거예요. 실체와 주체가 내부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겁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근거가 뭐냐? 이렇게 봅니다.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 자본주의는 정신 병리적 현상이에요. 자본주의는 백 퍼센트 미친 인간들이에요. 의미가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나 이걸로 살래, 로 종결되지 않아요. 자꾸 두리번거려요. 신상 나왔는지. 마트에서 광고하는 것 보에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려면 집에 라면 두 개 있고, 물 나온다. 난 이걸로 족해. 그런데 마트전단지에 나오죠. 계란 한 판 특가! 8000원 --> 2500원, 냉장고 열어보면 계란 있어요. 또 사야 돼요. 병리적 현상입니다.
그래서 지젝은 말하기를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고 욕망이 기존의 욕망을 억눌러요. 내가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고 욕망이 기존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어요.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나라는 것은 항상 탈락해요. 그래서 앞의 이미지를 상상계라고 하고, 중간에 의미를 상징계라 하고, 뒤의 이미지를 실재계라 합니다. 지금 현실이 인간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작용하는 세 가지 경우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이야기해요. 이건 라캉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상상계가 뭔지, 그 다음에 상징계가 뭔지, 실재계가 뭔지 제가 간략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상상계는 그냥 이미지로 생각하면 참 쉬워요. 그냥 찰칵 찍어버려요. 저분이 아버지 될 만한 조건을 따져보자. 아이들이 그렇게 아버지로 부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빠라고 부르기 전에 저 아저씨 연봉이 얼마고, 이렇게 안 따지지요. 찰칵 찍어버리잖아요. 왜? 주체가 형성이 안 됐으니까. 그때 실체가 되는 거예요. 실체는 동물의 몸처럼 그런 겁니다.
상상계에서는 자아이상이라 하는데 내가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완벽 추구하는 거예요. 어릴 때 의미가 아니고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빗자루 타고 하늘을 날고 싶어. 아니 빗자루가 곧 나야. 완벽을 추구하는 거예요. 자아이상이에요. 누구나 시작은 상상하는 거예요. 물론 그걸 상상이라고 하면 화냅니다. 어린애는 이걸 현실로 봐요. 자기가 꿈꾸는 동화세계가 전부니까. 집안이 가난하다. 가난한 애가 도서관에서 신데렐라 동화를 봤다. 그의 꿈과 비전은 뭐겠어요? 가난한 집구석에서 뭘 사달라고 해도 맨날 돈 없다고 하니까 완벽한 자아는 신데렐라 동화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왕자가 있어야 거기서 탈출할 수 있겠죠.
그 애가 크면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우연히 길에서 재벌 3세와 부딪쳐서 커피 흘리고, 나중에 그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엔 개 무시당하지만 나중엔 아가씨 혼자 회사 다 일으키는 것 같아. 그리고 재벌 3세의 약혼자가 못 되게 굴고, 그걸 다 극복하고 결국 결혼하고, 계모와 딸을 마지막엔 용서하고 끝나는. 더 붙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점 하나 붙이고.
이게 현실의 전부에요. 완벽한 현실은 어릴 때 구축이 돼버려요. 이미지지요.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그래야 돼요. 신이 있다면 무조건 왕자가 와서 나를 건져야 돼. 그게 참된 신이야. 지젝은 말합니다. 신은 내가 만듭니다. 신이 나타났는데 보니까 나라. 큰 바위 얼굴로 똑같아. 나중에 신을 이야기하니까 그게 나였어요. 왜냐하면 성경해석을 누가 하는데? 본인이 상상계로서 완벽한 자아이상으로서 성경을 현실로 봐서 현실 속의 등장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해서 나중에 신을 공부해보니까 내가 되고자 하는 그 자아이상과 신이 어떻게 합치되는지 딱 맞아요.
그 다음에 현실이 사회에 들어갑니다. 처음에 사회에 들어갈 때 내부적으로 강력하게 반발하죠. 그래서 회사 들어가고 난 뒤에 3개월 만에, 6개월 만에 때려치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강력한 저항이 있습니다. 실제 현실은 자아이상이 깨져버립니다. 여기에 법이 있지요. 규칙이 있지요. 야근 있지요. 그리고 그냥 무시가 아닙니다. 개 무시당하지요. 업무 못한다고. “이것도 작업한 거야? 그런 식으로 하려면 그만 둬.” 초자가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초자가 회사업무가 적용하기 힘들지만 인간은 의미로 사는 게 아니고 이미지로 살기 때문에 언젠가는 왕자를 만나든지 재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꾹 참는 거예요.
뭐 때문에 참습니까? 지금 현실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현실은 이미 구축해놨어요. 하지만 지금 주어진 현실은 완벽한 현실로 가기 위한 고난의 길, 역경의 길, 이걸 영웅처럼 이겨내게 되면, 나중에 꿈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월드컵 4강이 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꿈이 기존의 현실과 부딪치죠. 이게 자본주의사회에서 병리적 현상, 그걸 징후, 증상이라는 겁니다. 그 징후, 증상은 히스테리라든지 정신분열증으로 이어져요. 강박증, 조울증, 우울증 이런 현상. 결국 그 꿈을 향하여 완벽한 현실을 위하여 이 한 몸 없어지면 그만이지. 자살이죠.
지젝은 자본주의 자체는 몇 명이 아니라 몇 십 명이 죽어도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자본주의는 질주할 수 있습니다. 실패자, 인생낙오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아요. 자본주의 자체가 밟아줄 놈은 밟아줘야 돼요. 밟아주지 않으면 정체가 돼요. 안 밟아주는 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안 밟기 때문에 다 같이 그 자리에 스톱해서 전부 다 거짓꼴을 못 면해요.
만약에 마라톤에서 선수들이 똑같이 달리면 이거는 굉장히 평화로운 마라톤이지만 기록이 안 나와요. 기록이 나오려면 아프리카 케냐 선수가 몇 명 뛰어야 돼요. 그때 한국선수 코치가 뒤에서 닦달해야 한국 신기록 겨우 낼까말까 해요. 이 방법을 강남에 있는 수험생 엄마들이 해요. 꼭 공부 잘하는 놈과 친구해야 되고, 맹모삼천지교처럼 억지로 갖다 붙여야 돼요. 학군이 중요한 거예요. 해운대 학군 괜찮아요? 대구 수성구 괜찮아요. 꼴지라도 괜찮아요. 억지로라도 선두에 붙어야 강제라도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미지가, 이미지 자체가 현실이니까, 현실은 실제로 완벽하게 추구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아이상이 깨어집니다. 깨어지고 이상적 자아로 바뀌어요. 이건 라캉 이론을 지젝이 그대로 받아온 거예요. 이상적 자아는 일단 상상계에서 현실로 오니까 주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야근하려면 힘이 붙이잖아요. “엄마, 힘들어서 도저히 못 살겠어. 멋진 아이템 하나 있는데 친구와 동업해서 대박날 수 있어. 엄마, 도와줘.” 이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대박나면 어떻게 되는데?” “성공한 중소기업이 되는 거야.”라고 할 때 그 중소기업이 이상자아가 됩니다.
이걸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게 뭐냐? 자아이상과 이상적 자아를 굉장히 혼동해요. 우린 혼동하지 맙시다. 자아이상은 이미지 시대에 무조건 되고 싶다고 베낀 거고, 이상 자아는 요모조모 따져서 새로운 자기 모델이 생긴 거예요. 상징계에서. 상징계는 법과 규칙이 통하지요. 법과 규칙에 대해서 자기 착각하던 사람이 여기서 주체가 생깁니다. 주체가 생기려면 반드시 어릴 때 아버지의 흔적이 있어야 돼요. 정신적 지주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사회에 나가면 사장님, 부장님이 하고 그리고 경찰이 하고 군에서 고참이 하고 교회 오면 목사 내지 하나님이 그걸 하는 겁니다.
그 질서에 따를 때 칭찬이 주어져요. 제2의 자아가 형성되면서 동반해서 그 자아가 계속 칭찬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이 구축되는데 그 현실을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는 자기를 지시하고 명령해서, 이걸 알튀세르는 ‘호명’이라 하는데, 타인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나’가 되는 동시에 나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불러주는 내가 처음부터 기대한 나였다고 회귀해서 자기한테 붙이는 거예요.
이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태초에 예수 안에서 성도로 택했다 했지요. 그래 그거였어.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상징계입니다. 지금 지젝은 교회를 상징계의 일부로 봐요.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 상식인데 갑자기 지젝, 라캉에 의해서 상식은 깨졌지요. 현실은 두 개 되는 거예요. 전에 동화적으로 살던, 맹목적, 낭만적으로 꿈을 이루던 그 꿈은 철이 없었다고 이미 상징계에 도달된 주체가 그 실체와 비교해서 회고해서 하는 거예요.
어릴 때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본인이 굉장히 어른스럽지요. 어른스러우면 행복하십니까? 인생 만족해요, 욕망 사라졌습니까? 난 어른스러워, 철났어. 이게 말도 안 되는 자기 위로라는 겁니다. 지젝은. 억지에요. 얼마나 돈과 자본에 시달렸으면 얼마나 돈 없이 사는 설움을 당했으면 고작 그런 식으로, 이것도 하나님 은혜라면 감사해야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 위로를 하겠느냐 말이죠. 그런 식으로 자기를 위로하게 되면 행복하다, 정신병 환자 된다? 정신병환자 되는 거예요.
자기 주택이 하나 있는데 갑자기 도시계획에 포함돼서 대단위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합시다. 옆집에서 자랑합니다. 현대건설에서 시세보다 다섯 배 준다고 해서 보상금 받고 한 달 뒤에 이사 갔습니다. 뒷집은 다른 건설회사에서 일곱 배 받고 새 아파트 사서 이사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운 없게도 자기만 달랑 남았어요. 이게 뭡니까? 새롭게 주어진 사건이죠. 그 사건 앞에서 나는 행복해, 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한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정신병환자입니까? 정신병환자죠. 그 괴로움을 자본주의사회가 우리에게 이미 심어준 돈에 대한 욕망을 마치 안 들은 것처럼 초연한 것처럼 위장을 해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가겠습니까? 신이시여, 이게 뭡니까?
그런데 다 같이 못 산다고 봅시다. 서로 정다운 이웃이에요. 그러데 하나둘 친구들 다 이사 가고 나중에 우연히 만났는데 보니까 강남 아줌마 다 되고 걸치고 난리 났어. 도시계획이 그렇게 돼서 내 땅은 삼십 년 전이나 똑같아. 이제는 쓸모없는 땅이 돼서 누가 찾아오지도 않아. 그러면 의미라는 것이 억지지요.
의미는 억지다. 내 존재 가치는 사실은 자기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서도 불쑥불쑥 불만이 나오지요. 알 수 없는 분노, 반항이 나와요. 그게 잊었다고 생각한 자아이상이 계속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상상계의 추억이 죽질 않았어요. 완벽한 세계란 더는 욕망이 없는 세계에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욕망이 없는 세계가 좋습니까, 계속 새로운 욕망이 나를 이끄는 세계가 좋습니까? 어느 것이 우리한테 기쁨을 줘요? 욕망이 충족되는 게 기쁨을 줍니까, 또 새로운 욕망이 나를 그쪽으로 이끄는 게 즐거워요? 새로운 게 있어야 즐거워요. 그 새로운 것을 상상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새로운 욕망이 나오는데 이건 실체에서 주체로 가면서 억지로 여기에 뭔가 마개를 한 게 있어요.
오십 년 된 포도주 담은 오크통에 마개가 있지요. 마개 역할 하는 걸 오브제 a라 해요. 소문자 a는 상상계에서 욕망의 대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징계에서 대문자 A는 내가 이 땅에 현실세계에 있으면서, 상징계란 말이 우습지요. 우리는 상징계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걸 현실이라고 하지요. 어떤 현실? 철이 난 다음에 본 현실.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어릴 때는 이 현실을 몰랐다. 철이 없어요. 지젝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현실은 자기 주체에 따라서 그때마다 달리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것 때문에 지젝이 어려운 거예요. 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걸 왜 상징계라 하지?
상징이 심볼이잖아요. 심볼의 뉘앙스가 뭡니까? 헛방이란 말이에요. 이게 진짜 현실이 아니란 뜻이에요. 상상계는 말할 것도 없고. 상상계는 이미지고, 상징계는 심볼이고. 그러면 실제 하는 현실이 어디야? 그게 실재계입니다. 그러면 실재계에 살면 되겠네, 라고 하잖아요. 그 실재계는 어디 있느냐? 실재계는 도넛이에요. 중간에 구멍이 없으면 도넛이 안 되겠지요. 도넛이 우리 상상계 또는 상징계 가운데서 구멍을 파면 이게 바로 실재계입니다. 구멍 난 실재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프로이트나, 라캉의 이론을 지젝이 받으면서 이 세상 현실은 언어가 먼저 있으면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현실을 구성하게 돼있거든요. 그런데 실재계는 언어가 침투 못해요. 이 말은 실재계는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언어로 표현이 안 되면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인데 있다고 주장하느냐? 실재계기 때문에 정신 병리적인 증상과 증후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아파? 마음이. 도대체 이유도 모르는데 우울증 걸렸어. 해결책이 없어요.
뭔가 놓친 게 있어요. 그래서 지젝의 철학은, 인간들이 현실에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놓친 것에 의해서 욕망으로 끌림을 받는다는 겁니다. 현실에, 자아에, 주체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렇게 안 하면 안 놓치는 데 바보처럼 살면 별로 정신병에 안 걸리는데 뭔가 욕망을 이루려고 목적을 달성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아프게 다가오는 미흡점, 결핍 그것은 바로 욕망 때문인데 욕망의 잉여, 우수리, 여분 그것이 바로 실재계를 이룹니다. 여기에는 주이상스, 여분의 희열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욕망은 욕망이 아니에요. 반드시 지금보다 더 기쁘고 즐거울 게 있을 것이라고 항상 내다보면서 인간은 의미에서 상상계로 계속 가요.
의미에서 상상계로 가면서 상상계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까? 실패하지요. 완벽이 어디 있어요. 완벽을 못하도록 가는 도중에 틈에서 모습을 보이는 데 그것도 실패의 모습으로. 인생 살아봤자 다 헛되고 헛된 거야. 이처럼 허무를 느끼는 것, 그게 실재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 실재계가 실제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남한테 착한 일한다고 행복한 게 아니죠. 착한 일하면 더 착하게, 심지어 더 희생해서 착하게, 더 가면 지금보다 더 심한 희생해서 남 도와주기, 마약 같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실팬데 기뻐요.
이것을 지젝은 프로이트에서 가져옵니다. 프로이트는 전반기철학과 후반기 철학이 있는데 전반기 철학은 리비도고, 리비도는 모든 것은 성욕에서 나왔다. 프로이트가 위대한 점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출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게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은 문제없다는 겁니다. 프로이트가 나오기까지 모든 철학은 우리 가족은 문제없고 건전하다는 겁니다.
모든 문제는 가족 외에서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 철학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수모와 굴욕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내 새끼, 내 가족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걸 다할 수 있다는 게 인간의 기본적인 철학이고 사상입니다. 동서양 철학 다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제가 <사일런스> 영화 평한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당한 영화, 거기 보면 순교했다는데 순교가 아니고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그동안 철학자들이 왜 이걸 안 건드렸느냐 하면, 이걸 건드리면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 되고 괴물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를 괴물이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인간은 괴물 안 되기 위해 사는 거예요. 프로이트는 그게 바로 정신병을 유발했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괴물이면서도 괴물 아닌 척하기 때문에 얼마나 위장을 해야 되고 위선을 떨어야 되겠어요.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포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괴물이라도 자식만은 괴물이면 안 돼. 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본인이 괴물인데 본인의 dna을 받았는데 어떻게 자식이 괴물 아닐 수가 있어요? 모든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가족에 있다고 지적한 사람이 프로이트입니다. 인간의 성욕은 인간이 말릴 수 없다. 정욕=성욕+정복. 성욕은 인간이 못 다스린다고 나온 내용이 리비도란 겁니다.
리비도는 무의식이 그동안 의식에 덮여있지만 의식을 뜯어보자. 무의식은 성욕이에요. 무의식은 자손을 무조건 번식해야 된다는 짐승의 충동이 성욕입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에서 쫓겨난 마광수가 프로이트에 반해버렸어요. 왜 진작 이 진솔한 것을 누가 이야기하지 않느냐? 진솔하게 이야기하다가 쫓겨났어요. 그러면 연세대가 무너지니까. 기존의 상징계가 무너져요.
상징계는 아버지가 정신적 지주가 돼서 전부 그 말을 들어야 돼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거든요. 윤리, 도덕적. 질서가 잡힌다는 말은 이미지 세계가 아니고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의미, 윤리적 의미가 유지돼요. 그걸 프로이트가 깨버렸다고. 의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광수도. 인간이 자식이나 번식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그런데 프로이트는 우리가 짐승의 일부인데 아닌 척하니까 인간에게만 있는 정신병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게 치료가 되려면, 너는 원래 짐승이야. 짐승만도 못하다고 인정해버리면 그 순간 병이 나아요.
나는 이대 출신이고, 청와대와 놀았고. 빨리 그 병을 고쳐야 돼요. 맨날 열여섯 살 때 예쁘장한 그걸 자기 자아라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나이 팔십 되도 갖고 있으면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정신병환자에요.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잠재적 환자라니까요. 인간의 실체가 주인공이 아니면 전부 잠재적 환자에요. 주인공 아니면서도 주인공 놀이를 하기 위해서 나온 몸부림이 주체사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은 주체는 없고 실체의 차이 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그런다고 해결이 되냐? 차라리 주체 끄집어내고 조져야 된단 말이죠. 프로이트는 첫 번째 리비도에요. 성욕이에요. 남자는 나이 60이든, 70이 되든 역시 예쁜 것. 여자는 거기에 맞춰서 30대도 60대도 예쁜 것. 여러분 할머니가 생머리 해보세요. 못 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 생머리가 어울리는 나이가 있어요. 70되도 생머리로 있으면, 미인도 그린 사람, 천경자 씨 죽을 때까지 길렀거든요. 못 보겠어요. 파마해서 올리면 얼마나 좋아.
후반기 철학이 뭐냐 하면, 인간은 물질이 돼간다. 바로 죽음의 충동입니다. 동양의 해탈 차원이에요. 모든 게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래 욕해라. 나 하나 죽을게.” 죽음의 충동이 리비도 안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물질로 변하는 본능, 이것이 바로 인간은 주체 쪽에서 리비도가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서 충동이란 말은 그냥 충동이 아니고 그렇게 됐으면 참 즐겁겠습니다. 그게 내가 정말 꿈꾸는 행복일 거라는 거예요. 죽는 그 순간이 완벽한 상상계에서 완벽한 나의 이미지일 것이라는 충동, 이 충동이 도넛 구멍을 차지하고 있다. 소문자 a가 남아도는 잉여, 계속해서 일어나는 쾌락으로서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젝이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