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3. 24) 1강
광주 강의(2017. 3. 24) 37-1
마가복음 10장 13-14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의식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12제자를 예수님이 뽑았어요. 12제자를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신구조가 예수님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심으로 경계선을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 역시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면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활동하실 때 경계선이 확연하게 생깁니다. 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동이 났어요. 그 사실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리면서 은근히 문제를 해결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에 말려들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립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지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제공하도록 했지요. 이 때 손님들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좋은 포도주를 잘 간직해 놓았군요.’라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취한 후에는 질 낮은 포도주를 내놓는데, 이 가정은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손님들이 생각하기에는 먼저 마신 포도주나 나중에 맛본 포도주나 같은 포도주입니다. 나중에 마신 포도주가 더 질 좋은 것은 사실이나 결국은 다 포도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경계선은 없어요. 그런데 누가 여기에서 놀라는가 하면, 하인들이 놀라요. 이들은 포도주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고 물을 퍼다 주었어요.
물을 퍼다 주었는데 손님들이 하는 말은 ‘야, 이 집은 좋은 포도주를 나중에 주네.’ 하면서 즐거워해요. 하인들은 분명히 알아요. 자신들이 가져다 준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도 알지요. 그런데 어떻게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요.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증인을 낳아요. 증인은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위세나 강압에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산된 것입니다.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증인을 생산합니다. 증인(하인)들은 포도주를 가져 간 것이 아니고 물을 가져갔어요. 그런데 손님들은 포도주가 맛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증인들에게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가?’ 물으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증인은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증거만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이 질문에 성도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에서 하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난처하게 되었어요. 사도 바울, 스데반도 난처한 증인이 되었어요.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은 졸지에 바보가 됩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아는 것이 많았는데 성령 받은 후에는 할 말이 없어요. 그동안 자신이 알았던 모든 것은 배설물이에요. 아무 쓸데없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글쎄요?”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어제까지는 안 믿었는데 오늘은 믿고 있잖아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변화가 생겼습니까?” “글쎄요?”
왜 이런 대답밖에 못하지요? 예수 믿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인들은 평소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인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죠. 하인은 그냥 물을 채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퍼서 사람들이게 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인이 뭔가를 노린 것이 없어요. 그냥 주님의 뜻이 자신에게 덮쳤습니다. 이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 하인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사건의 증인이 되고 말았어요. 이처럼 주님이 하신 일을 내가 무슨 수로 설명을 합니까? 내가 계획하고 내가 한 일이라면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주님이 와서 덮쳐서 된 일을 내가 설명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왜 예수 믿습니까?” “글쎄요?” “우리 집안은 불교를 믿는데 너는 왜 예수를 믿어?” “그러게요. 내가 미친 모양입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돌아와야지.” “내가 예수를 믿으려고 했으면 알아서 철회를 하겠는데 내가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믿어졌어요.” 자신은 예수를 믿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이 믿어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증인이 되는데, 이 증인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이 땅에서 경계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경계선이 뭔가 하면, 양쪽을 다 아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고 말하는 바울은 지금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이 말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는데 이제는 육체로 아는 것이 아니다(고후5:16).’고 말한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면 육과 영의 차이를 몰라요. 다만 성령을 안 받아도 육과 혼과 영을 자기 나름대로 구분합니다. 이게 헬라철학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삼분설’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에서 이것을 주장합니다. 지방교회는 이것이 무기입니다. ‘세상교회는 육과 혼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육과 혼, 그리고 영까지 다 안다.’
이렇게 주장하면 경계선이 없어요. 왜냐? 이런 주장을 하려면 자신이 혼의 상태에 있는지 영의 상태에 있는지 본인이 감시를 해야 돼요. ‘혼에서 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혹시 혼에서 육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또 영에 왔다면 더 깊은 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할까?’ 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이 본인의 유혹자가 됩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헐떡이면서 달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자신은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본인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워치만 리는 기존 교회의 극단입니다. 기존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워치만 리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왜냐? 모든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서 훈련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요. “복음 전하는 목사의 오류가 뭡니까?” 제 답변은 “복음전해서 교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냥 복음으로 살면 되는데, 복음으로 복음적인 교회를 만들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본인의 증인이 돼요.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모든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이들이 선점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왜 다른 교회는 지방교회처럼 못하는가? 다른 교회는 따라가다가 돈으로 흘러요. 그런데 워치만 리는 돈이 아닌 말씀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거론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교회 만들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그대로의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돈은 부정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기존교회에서 실망한 사람들이 한 단계 더 올라가고 싶어 설치다가 지방교회로 갑니다.
그럼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와 김홍전 계열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김홍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상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워치만 리의 지방교회와는 달라요. 지방교회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따라 살면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존교회는 워치만 리를 비판할 수가 없어요. 교회를 만들려고 돈을 요구한다면 비판을 하겠는데, 그들은 오직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비판을 합니까? 이런 워치만 리의 사상으로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제자 위트니스 리입니다. 이게 오늘날 지방교회입니다.
그러니 지방교회는 워치만 리의 이론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오는 것이 나쁘지만 워치만 리의 교리 자체를 나쁘다고 지적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기존교회가 워치만 리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과 혼과 영을 거론하면서 인간의 구원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이 있다고 하는 것은 기존교회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나 표적은 예수님의 증인을 생산합니다. 이 증인은 자기 구원에 대해 할 말이 없고 ‘저분이 물을 갖다 주라고 해서 갖다 주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게 되지요. 증인은 예수님을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일하게 계심을 증거할 뿐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다닌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15절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어요.
이 대목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어린 어아처럼 될까를 궁리하겠지요. 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살부터 기억이 납니까? ‘나는 이런 아이야.’ 라고 처음 생각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제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여러분이 5세 때의 마음을 아신다면 그 때 ‘나는 이런 아이야.’라는 것을 규정했고, 그것이 부합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처음 확정한 때가 언제지요? 이런 회상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5세, 6세 끊어진 것이 아니고 연결되고 19세쯤 되면 자아가 형성됩니다. 자아의 특징은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아는 과거의 자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19세 때 자아가 형상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가 8세 때는 이런 일을 했고, 10세 때는 이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기억이 되는 그 시점이 자아입니다. 그러면 내가 8세 때 눈 가리고 소꿉놀이를 했는데 실제로 해 보세요. 그러면 5세라 생각하는 그 주체가 이미 19세입니다.
19세를 떼고 5세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미 무르익은 주체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빵이 있는데, 밀가루를 반죽하고 첨가물을 넣어 오븐에 구워서 빵이 되잖아요. 빵이 만들어지기 전에 밀가루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미 빵이 된 이상은, 내가 밀가루 반죽의 시절이 그립다고 해서 빵이 밀가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자.’고 하는데, 겸손해도 어른으로써의 겸손이에요.
만약 어른인 내가 5세 때의 나로 돌아가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된다. 반드시 이 자아는 대가를 바래요. ‘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되었으니까 천국에 넣어줄 거지요?’라고 하는데, 이 질문이 절대 어린 아이의 질문이 아니에요. 어른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기대와 목적을 갖고 있어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행동에 대해 어떤 기대나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다는 말은 그냥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본문에서는 ‘받든다’(막10:15)고 했어요. 그런데 어린 아이가 ‘내가 부모를 잘 받들어야 살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린 아이는 없어요.
겨우 돌 지난 내 외손녀가 혼자 장난을 치고 까불고 하는데, 하루는 화장대 의자의 뚜껑을 열다가 무거워서 내려놓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또 열다가 무거워서 내려놓고, 그러다가 손을 미처 못 뺀 상태에서 의자 뚜껑을 내려놓았어요. 심하게 아픈 정도는 아니었는지, 3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엄마한테 달려가는 거예요.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제가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문제만 생기면 엄마에게 달려가요. 가서 기대고 의지하고 자기를 맡겨요. 이건 깊이 생각해서 된 행동이 아니고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아서 그래요. 자아가 형성되지 않으면 자율성이 없어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도, 잠이 와도, 심심해도, 무슨 일이 생겨도 무조건 엄마에게 달려가는 거예요. 이건 본능적 행동입니다. 이 상황이 ‘아이는 엄마를 받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받든다는 것은 이미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에요. 아이의 정체성은 1년 6개월 정도가 되면 생긴다고 해요. 제 외손녀는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과 엄마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은, 하늘나라가 만든 성도는 다 어린 아이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나이가 70이든 80이든 관계없이 그는 주 안에서 어린 아이가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것은 워치만 리가 하는 짓이에요. 한국 교회가 다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 말씀 듣고 순종해서 천국 가는 자가 되세요.’ 교회에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천국은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위해 노력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했지요. 포도주 생산하는 일에 하인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물을 항아리에 부으라고 해서 부었고, 그 물을 갖다 주라고 해서 갖다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면서 맛있는 포도주라고 합니다. 그 본문은 보면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고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하인들은 압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만약 손님들에게 “여러분, 제가 갖다드린 것은 물인데 포도주로 바뀌었어요.”라고 한다면 욕만 얻어먹어요. 만약 우리가 남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 내가 증거를 잘 했을까, 못했을까를 두고 염두에 두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이 됩니다. 이건 누구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받들어 모시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를 생산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져요. 즉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후에는 예수님 나라로 괄호 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이란 인물이 어떻게 하늘나라라는 영토와 일치되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하늘나라는 언약개념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때에 언약은 누가 독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독점해요. 그 근거가 뭔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다윗 언약’ 관계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아들을 만들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자기 아들로 만들겠다는데, 그 아들은 혈육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생길 아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다윗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다윗 언약이 오게 되면 아들이 일을 마무리 지으면 하나님도 손 틀어요. 그러면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가 되고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국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언약적 나라인데,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봐요. 일반인들의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란 것을 알지 못하면 언약을 이해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상입니까? 우리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오류 있는 존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오류 있는 하나님이고, 그게 우상입니다. 우리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하지 않고 자기 아들과 일을 하십니다.
아들 외에 다른 사람과 일하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12제자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뽑은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 증인 되라고? 아닙니다. 예수님 증인이지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언약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아버지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 증인이 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 하나님의 증인 되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다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부터 먼저 챙기고 예수님은 일종의 옵션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분의 아들도 있다고 하니까 그분도 믿어야 할 것 같아서 믿기로 하고, 또 성령도 있다고 하니까 성령까지 믿어서 완벽한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뭡니까? 참 신입니까, 우상입니까? 우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몰라요. 하나님을 몰라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다가 우상인 것이 들통 났고,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고.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가면 거기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도 없어요. 자기 혼자 있어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오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못 오는 것인지, 안 오는 것인지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안 오는 겁니까, 못 오는 겁니까? 안 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니 안 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우상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 53장 1절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해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어린 아이는 누가 만들지요? 예수님이 만들어요.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이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면서 만듭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했지요. 이 말은 아무도 알고 천국에 들어갈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의 모든 일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죠. 많은 주석과 책들에서 이 말씀을 놓고 사람들을 닦달해요. 교회 왔으면 제발 어린아이같이 되라고. 그런데 목사 자신도 안 되는 걸.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람들이 행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만 못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처벌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법을 못 지킬 경우에만 처벌 받는 것이 아니고, 처벌 대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서 법을 지키려고 해요. 이렇게 되면 법을 지킨 자를 죽이면 됩니까? 수학능력 시험을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다섯 과목 정도 시험을 치는데 점수를 매기는 것은 시험이 끝난 후에 하는 일이지요. 만약 첫째 시간 후에 “너는 이번 시험에서 탈락이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되잖아요.
왜냐? 기회를 주고 난 후에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데 기회를 주기 전에 결정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시험 친 사람은 마지막 시간까지 시험을 친 후에 판단해 달라고 항변을 할 거예요. 그러나 판정관이 ‘탈락’이라고 말한 것은, 그 사람의 점수를 보고 판정한 것이 아니고 ‘시험을 쳤다는 자체가 불합격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네가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시려고 성경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을 왜 모르느냐?’ 그럼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지옥 갈 자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성경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은 죄는 있고, 천국은 가고 싶고. 그래서 천국 가기 위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성경 읽잖아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감춰진 완악함, 즉 마귀의 본성입니다.
내가 구원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잘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죄악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예수님이 대신 죽지요. 예수님은 말씀을 못 지켜서 죽었습니까, 말씀을 지켜서 죽었습니까? 지켰기 때문에 죽었어요. 이걸 인간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 신명기 28장에 보면,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어요.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저주 받는다는 그 공식,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 이런 이론이 있습니까? 아무 곳에도 없어요.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아무도 납득 못합니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가 참으로 희한합니다. 열심히 하면 천당 간다는 것을 교회가 상품으로 팔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하는데, ‘우리는 구원 얻을 자격이 안 됩니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끌어 모아야 돈이 나오는데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미국의 어떤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숙모가 자신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성장한 후에 숙모의 귀한 목걸이를 훔쳐서 집을 떠났어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배은망덕한 조카를 욕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조카가 숙모를 사랑하고 도와주기 위해 그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숙모가 가난해서 진짜 목걸이는 팔고 그 대신 가짜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조카만 알고 있었어요.
그 진짜 목걸이가 너무 비싼 것이기에 숙모와 동업하는 오빠가 사업이 어려우니까 목걸이를 팔아서 빚을 청산하고 사업을 새롭게 일으키자고 압박을 했어요. 숙모는 죽을 지경입니다. 자신이 가진 목걸이가 가짜인 것을 오빠는 모르는 거예요. 이 모든 상황을 조카가 알고 있었기에 그 목걸이를 훔쳐 도망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숙모의 난처함을 해결해 주었어요.
모든 죄를 조카가 짊어지고 지금 수배당하고 있고, 숙모는 살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희생을 당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것 때문에.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없어요. 그래서 이 가짜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이 가짜인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도 없는 분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가짜인 줄을.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생산하기 위해 택한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우리가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아시는 분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왜 갑니까? 현실을 포기하기 위해 갑니까, 현실에서 대우받고 잘 살기 위해 갑니까? 복 받아서 잘 살려고 교회 가지요. 그러니 그들은 십자가를 모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믿어 천국 갈 생각만 했지,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가짜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7. 4. 4. 08:2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