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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81강-창 19장 23-29절(소돔의 멸망)170329-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81강-창 19장 23-29절(소돔의 멸망)1703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9장 23-29절입니다. 구약성경 24페이지입니다. 창 19:23-29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야기인데요. 두 가지 입장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는, 살아남은 롯의 입장에서 ‘혼났다. 큰일 날 뻔 했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버리면 주의할 것이 있어요. 롯이 이렇게 살아났다고 과연 구원된 것인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났다고 해서 구원된 것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것이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그 관점은 우리가 버려야 돼요. ‘식겁했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잘 되었네. 이제 나는 구원받았다. 기분 좋다.’ 그런 관점 말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을 내릴 때 어디를 주목했는가? 경험하지도 못할, 가지도 못할 지옥불을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언제? 밤에. 밤은 인간이 잠자는 시간이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매,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 강제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요. 의식이 강제로 묶이고 그 밤의 활동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옥가지도 않으면서 지옥이 어떤 동네인가를 이렇게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땡잡은 거예요. 천국부터 보여준 것이 아니고 지옥부터 보여준 거예요. 지옥부터 보여줬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양상이 어떤 양상이냐? 롯의 처가 뒤돌아 본고로 소금기둥이 되었어요. 26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롯의 처의 그 본바탕은 천국이었는가, 지옥이었는가를 구분시키는데 그는 지옥이었던 거예요. 롯의 처가 소금기둥 된 것과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소돔과 고모라가 지옥을 보여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롯의 아내가 살아 있었을 때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형 같은 존재가 롯의 아내였습니다. 롯이 아내와 함께 살면서도 지옥과 가깝게 살았던 거예요. 지옥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세끼 먹으면서 부부생활하고 아주 친하게 살고 딸 둘까지 낳았던 거예요. 이 사실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23절에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해가 돋았다는 이 말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해가 돋았다는 말은 일은 저녁에, 밤에 벌이고 그 결과가 낮에 나타나고. 낮에는 멀쩡하지요. 마치 정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롯은 지난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롯은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소금, 물질의 일부, 그렇게 규정을 짓게 됩니다. 마지막에 지옥이 되게 되면 인간은 물질의 일부처럼 대우받는 것이 합당한 거예요. 롯의 처가 살아 있을 때 사람대우 해달라고 동네방네 떠들었겠지만 그것은 자기생각이고 하나님생각은 전혀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될 때 여기서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는데 나와서 어디 갈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나왔다는 데만 관심을 둬요. 롯이 나왔다. 소돔과 고모라가 작살났다면 나와서 어디로 갔겠는가, 하는 겁니다. 어디에 갔느냐? 밤에 말고 낮에. 이 낮이 수상한 거예요. 밤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와서 낮에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지옥 아니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지옥과 연결되어 있고 관련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 낮은 곧 저녁이 되기에. 멸망당할 그 지역과 낮이 되어서 빠져나온 지역이나 항상 언제든지 지옥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에요. 그러면 낮에 소돔과 고모라 말고 다른데 왔다고 해서 ‘휴, 살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옥이 아닌 곳으로 가야 돼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옥이 아닌 곳, 이 세상에서 밤중에 유황불 받을 그 지역과 끊어진 곳은 어디냐? 없습니다. 스위스 좋으니, 스웨덴이 좋으니, 경치가 그리스가 어떻고, 스페인이 좋다느니, 캐나다도 괜찮고, 뉴질랜드의 원시림도 괜찮고, 백날 해도 거기 지옥입니다. 그러면 롯은 어느 곳을 갔느냐? 궁금해요? 이 말은 꼭 알려드린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냈더라.” 땅에 산다고 다 지옥백성은 아니니라, 라는 그 증거를 롯에게 주신 겁니다. 땅에 산다고 해서 다 지옥 갈 사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과 관련성이 있는 사람 같으면 땅에 살아도 이 땅이 네가 살 곳이 아니고 너는 다른데 거주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 안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약속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 대전강의에서도 언급했는데 다시 한 번 하게 되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있을 때는 가나안 땅이 멀쩡했어요. 그리고 모세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도 양 치던 그 가나안 땅은 역시 멀쩡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에 내려갔다가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나라 만들어서 가나안땅에 오는 그 순간부터 가나안 땅은 옛날 중립지역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이 덮쳤기 때문에. 약속이 덮쳤기 때문에 약속대로 되지 아니하면 저주의 땅이 된 거예요. 졸지에 중립적인 땅에서 저주의 땅으로 변했고 그리고 거기를 점령한 이스라엘만은 약속 속에 존재하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약속이 땅거미처럼 지금 어디를 점령하고 있느냐, 어디까지 도달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약속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에요. 복음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님, 어디로 이민 갈까요?” 하면 복음 안으로 쏙 들어가면 돼요. 복음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제가 지금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 놀리는 이야기가 아니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지금 사도바울은 어느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어요. 들어가 있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헤헤거리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뭐만 자랑하느냐?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왔지롱, 하고 자랑하는 거예요. 자랑할 게 십자가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교회? 목사? 그런 것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안을 자랑하는 거예요. 들어오려면 들어와 봐라, 이런 식이에요. 네가 들어올 재주 있거든 한번 들어와 봐라,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십자가 안을 자랑하는 이유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세상을 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고 백날 연구하고 탐구해도, 성경을 천 독, 만 독해도, 기도 백날해도 십자가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기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땅에 살고 있는 거예요. 롯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는 것은 이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에 살았던가. 황폐한 곳에 나는 살았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겁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것이 있습니다. 네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죄 하겠다고 할 때 롯은 철이 없이 에덴동산같이 좋게 보이는 땅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지요. 그 때까지는 그것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언약의 백성은 절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땅인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남이 좋은 것은 자기도 좋은 법이니까 그저 밥 먹고 살기 좋으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곳이 하나님이 지옥을 보여주는 무대라는 사실, 그것을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 난 뒤에는 ‘야, 무시무시한 곳에서 살았었구나. 어떻게 내가 지옥을 선택했을까?’ 그러면 지옥 아닌 곳은 어디인데? 지옥에 살아봤기에 지옥 아닌 곳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지옥이냐 안 그러면 그 바깥쪽이냐가 아니라 세상은 몽땅 다 지옥인데 그걸 다 어떻게 아는가?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들어오면 천국이고 그 외에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느니라, 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어디에 살아도 지옥 사람이고 그것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그것은 소금기둥끼리 사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어느 정육점에서 파느냐? 예수님의 목숨 얼마치 달라는 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살과 피가 나올 수 있는 구조 안에 들어가면 돼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올 수 있는 구조라는 말은 예수님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면 주께서 십자가 피를 흘릴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계시는 천국은 어디냐? 내가 바로 주님을 죽였던 원인제공자입니다, 라고 자기를 원천적으로 죄인으로 간주하는 그 사람이 이미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고,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마존 백날 가니 뭡니까? 일본은 백날 가니 뭐합니까? 아프리카 가면 뭐합니까? 아프리카 간다고 해서 인간되는 것 아니에요.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디서 살더라도 나는 조금도 달라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지금껏 죄인이에요. 엄마의 죄에서 태어난 죄의 혹 덩어리에요. 롯의 처와 롯의 차이점은 뭐냐? 롯의 처는 전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를 못합니다.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행복했던 그 시절, 그게 쾌락인데 행복했던 그 쾌락, 향유, 불어로 주이상스라고 하는데 평생을 보람과 희망을 걸고 매진했던 그것, 그것에 미련이 남아서 뒤돌아봤습니다. 뒤돌아 볼 때 하나님께서 롯의 처를 향해서 “네가 바로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땅에서 살았어야 될 존재였느니라.”라고 하지요. 병행이라 하지요.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유황불이 내리고 그 바깥에서는 사람이 아니고 소금이 되어버리고. 소금이 되는 그 조치와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내리는 조치는 하나님의 같은 질의 조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롯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인간들 측면에서 의인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죄를 더 깊이 아는 사람이에요. 어느 정도로 알았느냐 하면, 내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 정도로. 자기는 거기에 살았으니까 자기는 뭐냐? 살아있다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구태여 윤리와 도덕으로 회개한다는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반성하고 회개한다는 것이 소용이 없어요. 반성하고 회개해서 인간이 나아질 희망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달라진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알기 전이나 후나. 인식적인 면에서는 달라졌어요. 전에는 잘난 체 하다가 지금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달라진 것은 없어요. 본인이 성격이 달라진다든지 성질이 달라진다는 이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도 죄인이었고 알게 된 후에도 죄인이었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공식이, 막사세요,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막 안 살겠다고 버티는 것은 어떤 희망을 주느냐 하면, 내가 정신 차리면 나로 인해서 내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직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막사세요, 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당신이 당신에 대해서 아는지, 아니면 당신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라는 말이지요. “막사세요, 라는 그 말은 듣기 싫습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잘 하고 있는데 왜 막살라고 합니까?” 그것은 당신이, 당신이 사는 자리가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자리에 아직도 희망과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점에서 창세기 18장 끝부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한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한테 자꾸 내기를 한 거예요. 하나님의 조치가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한명도 없을 때는 심판이 합당한데 만약에 의인이 있다면 그것은 악인을 심판한다는 그 명분이 전혀 현실하고 안 맞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멸망을 당한다면 전적으로 다 죄인이어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 안에는 내 조카 롯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지금 하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쳐버리면 조카 롯도 같이 악인과 멸망당하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악인만 친다는 그 언약원리에 위배됩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심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모르던 언약을 더 새롭게 알게 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몰랐던 겁니다. 심판은 나중에 두고, 네가 내 지시대로 잘 살아, 이게 아닙니다. 심판을 나중에 두고 지시대로 살라고 한다면 내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내가 언약을 지키면 구원받고 내가 언약을 안 지키면 구원 안 받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언약수행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 본인이 잘나서 언약대로 살아서 자기 노력으로, 행함으로 심판에서 면제되는 그런 식이 되는데 처음부터 이런 언약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오해하고 롯도 오해했지요. 하나님은 언약대로 하되 인간의 협조가 필요 없어요. 다만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모르고 오해만 할 뿐입니다. 잘하고 있는데 왜 심판합니까, 이런 식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롯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따라서 나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아무 잘못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이 있어요. 아브라함언약을 성립하고 유지를 해야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관련된, 아브라함이 기도한 사람은……,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아요. 그걸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 아브라함언약에서 롯은 롯 본인이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냥 덤으로 롯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롯을 생각하사 롯을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롯아, 네가 참 고생 많이 했다. 괴롭지. 그래 너만은 빼내줄게.” 이러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롯을 빼내주는 것이 아니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 계속 살게 하시되 소돔과 고모라는 롯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롯 때문에 유보시키는 그 방식을 사용하겠지요. 때려주고 싶은데 의인이 하나 있기 때문에. 의인은 멸하면 안 되거든요. 롯을 의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도 의인은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롯의 소돔과 고모라는 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겁니다. 의인이 있어야 유보를 하는데 의인이 없으니까 치는 거예요. 치면 롯도 멸망시켜야지 롯은 왜 빼내주는가? 이게 아브라함언약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언약은 누굴 구원하고 누굴 구원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자체의 구조에서 롯은 어떤 기능을 보여주고, 롯의 처는 어떤 기능을 보여주고,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깡패들은 어떤 기능들을 보여주는가, 그 기능들, 요소들이 모일 때 전체 언약의 구조가 정립이 돼요. 누군 구원되었다, 누군 구원 안 되었다는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구조를 왜 알아야 되는가?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는 십자가구조가 이 롯의 구조의 반복입니다. 어렵게 되어서 설명하는 저도 약간 초조한 마음이 듭니다만 쉽게 하겠습니다. 멸망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롯을 건져주는 이유가 심판을 행사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언약의 효과가 빛이 납니다. 죄를 진행시키고 심판을 진행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없던 구원이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발생되는 증거물이 뭐냐? 분명히 죽어 마땅한 롯이 건져냄을 통해서 심판이 없었더라면 롯이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실, 관련된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롯도 느끼지를 못하고 체험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죽음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살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 심판이 없다면 자기가 사는 것은 자기가 잘나서 살아요. 그러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애썼다,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갈라디아서 6장 14절,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게 돼요. 잘난 내가 남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았는데 자랑하려면 나를 자랑해야지 십자가를 왜 자랑하는가.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주님의 언약 없이는, 주님의 살과 피 없이는 구원이라는 것은 성립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면서 비로소, 심판 안에서 비로소 의가 나온다는 것, 심판 속에서 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어요. 2011년도 3월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내려앉고 난리가 났지요. 2011년도에 일어난 일이니까 벌써 6년이 지났어요.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동네에서 사람이 못삽니다. 이것은 무슨 소리냐? 롯이 이미 완료를 알았어요. 세상의 끝을 다 경험했습니다. 인간이 사는 이 동네가 다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완료가 되고 끝났으면 할 것이 없네, 이게 아니고 그 종말이 완료가 되고 난 뒤에는 그 종말의 원칙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후쿠시마에 지진은 그 때 딱 한 번 일어났어요. 하지만 그 지진의 효과는 7년째 되어도 여전히 되풀이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단 한번 이었지만 그 십자가가 주는 최종적 심판의 효과는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되면서 우리는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롯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나는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아브라함언약의 증거자라고 바뀐 겁니다. 그게 종말이어야, 종말이라는 것을 느껴야, 종말을 체험해야 비로소 그런 증인노릇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종말이기 때문에 일체 미련 없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세상을 볼 때 언약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살과 피의 안목을 가지고 미리 제자들에게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십자가의 영을 받아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은 모조리 끝났다는 관점을 가지고, 누구하고 이야기하거나, 상업적인 거래를 하거나, 계약을 맺거나, 이사를 하거나, 아니면 애들 교육을 시키나, 모든 것이 그런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거든요. 뒤돌아본다는 것은 저 세계와 나는 연장되어 있다는, 멸망 받는 저 세상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33절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걸 쉽게 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이미 지옥백성이고 죽고자 하는 자만이 이미 천국에 도착한 사람이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고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옛날 한 때 있었던 에피소드처럼 느껴져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후쿠시마 시민들, 거주민들의 인터뷰내용이 나와요. 후쿠시마거주민들에게 7년 전의 지진은 그날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요. 이게 실제상황이에요. 남들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 자기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미 종말이고 세상 끝이에요. 그 사람들은 고향이 없으니까 떠돌이생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자랑거리가 있어요. 우리는 십자가 포대기 안에 들어 있다고 자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랑하면서 다시 세상을 보아라. 그렇게 본다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에 대해서 무릎을 치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자기주제도 모르고, 죄인이면서도 살고자 하는 이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염치없는 짓이다.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되는데 그 죄라는 것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는 이 자체가 죄가 되는구나.’ 이 땅에서 에덴동산에 쫓겨나서 어디서 살든지 쫓겨난 채로 살아 있으면 그것은 무조건 죄를 발산하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마련해준 언약구조가 되는 겁니다. 설교를 안 들었다 치고 처음부터 들어가 봅시다. 인간은 왜 있는가? 성도는 왜 여기 태어났느냐?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언약구조로 주물럭거리고 있어요. 천국과 지옥은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감행해 버립니다. 온천지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려요. 지옥으로 만들어버리고, 지옥이네, 그걸로 끝나줄 알았더니만 그 지옥 속에서 같이 언약이라는 것이 피어나면서 언약이라는 튜브 속에서 롯이 살아나요. 그렇다면 이 전 우주는 예수그리스도가 진행하는 심판을 위해서 이 세상은 마련되어 있고 이 세상은 만들어진 동시에 멸망하도록 만들어진 거예요. 세상이 있음은 파괴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기본은 파괴로부터 시작해야 돼요. 이 세상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되는데 파괴된 이유는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파괴될 이유가 그 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된다. 먼저 있었던 것도 파괴되고 나중 있었던 것도 파괴되고. 파괴될 것을 왜 줬느냐 하는데 먼저 주고 파괴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구원, 천국이라는 것은 파괴를 이기고, 파괴마저도 억누를 수 없는 그 생명,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서 사흘 만에 생명으로 부활한 부활의 능력을 공유하게 된 사람만이 예수님과 사는 영원한 천국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전 우주를 지금 주무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함께 참여된 거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파도를 그리려거든 같이 파도를 타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해변가에 캔버스 펼쳐놓고 바로 그리지 말고, 보드타고, 물론 자세가 안 나오지만 보드를 타고, 파도 위에서 울렁거리면서, 같이 느끼면서 파도를 그리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체를 롯처럼 구원받은 자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심판 속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파도 타시기 바랍니다. 멀미 날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다가, 저렇게 하다가, 하여튼 특징이 있어요. 뒤돌아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하게 만들고 우리의 소원대로 기도가 안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희망대로 된다면 마치 우리는 기도응답이 될 수 있는 의인인양 착각을 하기 때문에, 전적인 죄인임을 잠시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주께서 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사 건져내는 것에 주님이 충실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뭐든지 십자가로만 살았다는, 십자가만 자랑케 하기 위해서 내 기도자랑 못하는 조로 기도케 하시는 거예요. 내 봉사나 내 충실함과 성실함, 착함, 윤리도덕적인 내 완벽함, 이런 것으로 절대로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파도를 타게 하십니다. 한 번 타는가? 아닙니다. 반복해서 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해도 예상한 응답이 오게 되면 반드시 원인을 내 쪽에서부터 연결시킵니다. ‘역시 이번에 기도 좀 괜찮게 했다 싶더니 응답이 되는구먼. 또 기도해야지.’ 자기의 기도 자랑하는 쪽으로. 바리새인이 하루아침이 되는 겁니까? 다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바리새인이 된 거에요. 누구나 그런 잠재성이 있잖아요.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뜻대로 하지 않고 파도를 타게 하시는 겁니다. 파도를 타게 하시는데 주의 할 점은, 중력에 자기의 몸을 맡겨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 할 일이 뭐냐? 놀지 말고 오늘 무엇을 주께서 맡기셨는가, 오늘 할 일에 충실하고 저녁에는 맡겨야 돼요. 밤은 천사의 것이거든요. 천사의 소돔과 고모라, 이 대구에 유황불 떨어져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밤은 맡기고 낮에는 주께서 맡긴 숙제를 하고 그날 저녁에 자게 되면 밤은 천사가 안 쉬고 열심히 일하고 매일같이 십자가만 자랑케 하시는 것,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그 구조가 바로 십자가로 확정된 새언약이 구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구원받을 자가 이 구조 안에서 구원된다는 사실을 저희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을 생각하사 롯을 건지듯이 저희를 건져주신 그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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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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