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천사의 씨름에 관한 어느 분의 질의
[질문]
안녕하세요
[야곱과 천사의 싸움] 전반적인 줄거리와 복음적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카인과 아벨]과 어떻게 연관되어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십자가마을 읽고 있는데 그 부분이 뚜렷이 와닿지 않아 질문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쁘실텐데… 답변을 메일로라도 간단하게나마 … 보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을 십자가마을에 올려주시면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으니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천사는 외래존재입니다. 인간하고는 다른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활동합니다. 따라서 두 이질적인 존재가 만났다는 것은 분명 야곱이 의도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에게 보낸 겁니다.
이 이질성으로 인해 천사와 야곱의 만남에서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이는 곧 야곱으로서 평소에 생각한 모든 것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야곱 혼자서 착각한 겁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방식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평소의 견해가 동생으로 인하여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곱이나 가인이나 모두 구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원받아야겠다든지’, ‘복을 받아야겠다든지’하는 모든 시도는 다 거짓되고 허망한 생각임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 허망한 생각을 가진 자에게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서 구원하십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따라서 구원된 자는 자신의 허망한 종교적 욕구가 십자가 피 앞에서 죄로 폭로 당했음을 알리면서 십자가의 피 공로만 증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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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아벨의 제사(히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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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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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눈 !!
지금 이 세상에 사람들끼리만 살고 있다면, 그러면 자기들이 편한 대로 사는 것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냥 그렇게 인간들끼리 잘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인간 세상에 대해서 감시를 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누구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싫어하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있어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심판이 실시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감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나오겠죠.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나 평소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은, "누가 감히 나를 감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심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도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불신자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이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런 실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역시 불신자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야말로 맹탕인 자들을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다움의 내용을 따로 가지지 못하고, 그냥 자기가 할 도리만 하면서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그렇게 하나님과 관련성이 없는 자들도 역시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신은 신대로, 나는 나대로 !!
물론 이 세상에서는 신 존재 자체를 극도로 부정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그게 되지를 않는데, 동일한 논리로 신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증명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을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그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요령이 되고 말았는데, 즉 "너는 있어라. 나는 나의 할 일을 한다"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되면 믿음이 없는 것이 되는데, 왜 지난 시간에 했지요. 무엇이 믿음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는데, 그러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차 올 어떤 실상에 대해서 그 증거가 없다는 말이죠. 즉 실상이 되시는 그분이 마음속에 없다는 겁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옛적부터 내려오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에 핵심이 있어요. 즉 짐승과 인간은 달라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되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윤리와 도덕이 시작된다는 말이죠. 즉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짐승과는 다른지, 거기에 대해서 지식층에서 대중들에게 굉장히 많이 가르쳤다는 겁니다. 또한 그것을 부모가 듣고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말이죠. 그러면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짐승과 같은 요소가 이미 있다는 것인데, 즉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천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그냥 내버려두면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식으로 억지로라도 통제를 하고 기준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격을 아무리 강조를 해도, 그것은 그 당시 그 조직에만 해당이 되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훌륭한 인격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에 도달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3절에 보니 그 기준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실상이여, 나타나라 !!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다듬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다" 라고 하는데, 그것 이외에 달리 없다는 겁니다. 정말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그분을 쳐다보고 마음껏 믿어주겠다는 말이죠. 즉 "실상이여, 나타나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달리 이야기하는데, 즉 "보이지 않는 믿는 증거가 있어야 돼" 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일상행동 사이에는 그야말로 건널 수 없는 질곡과도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는 없는데, 성경에는 신자와 불신자를 커다란 벽으로 가운데 놓고 잘라버리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와 부자의 경우인데, 부자가 사는 지옥과 거지가 사는 천국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놓여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한 번 정해진 구역은 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꿔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강도의 유격훈련을 받아도 전혀 건너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지옥에 간 자들의 절망뿐만 아니라, 천국에 간 자들의 변동되지 않는 신분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즉 천국에서 아무리 데모를 하고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영원함이 아니라는 점에서 충분히 견디고 이길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잠시 잠간인데, 꿈처럼 깨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죽어서 서로 영원히 갈라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살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 사도바울은 심판의 기준과 더불어서, 불신자와의 철저한 단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과연 누가 산 자인가?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각자 각자가 서로를 보고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나는 산 자이고, 너는 죽은 자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죽어야만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신자가 불신자는 철저하게 구분이 되는데, 그 기준이 곧 십자가라는 말이죠. 즉 "너희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가?" 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믿는다는 증거로 제공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왜 십자가라는 믿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십자가라는 것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실상으로 나타난 것이 전혀 아닌데, 오히려 반대로 죽음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저히 증거물로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는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증거물로서 주어진 희한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희한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없었을까요? 물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나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죽은 자'가 믿음으로 하는 이야기 !!
여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동생인 아벨이 자기 인생으로 보여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죠. 여기 끝에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죽은 자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일단 살아있어야 무엇을 하더라도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아벨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죽음으로, 즉 자기는 죽었지만 도리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에 가치를 두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있어야지 뭔가 일을 하더라도 한다는 겁니다.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지금의 이 나타난 세계에서 통용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은 이미 일을 다 끝냈다는 것인데, 즉 은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죽은 자에게서 더 이상 무엇이 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