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2. 24) 2강
광주 강의(2017. 2. 24) 36-2
사랑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가 되는 것, 그대 안에 나를 장착 시키는 것입니다. 아가(雅歌)에 보면 사랑에 필요한 절차가 있어요. 그것이 뭔가? 죽음입니다.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상대방에게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이 말장난처럼 들리지요? 내가 죽었다면 없어졌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에게 들어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있어요. 죽도록 충성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면류관을 누구한테 준단 말입니까? 그럼 죽기 직전까지 충성하라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아가 8장 6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결국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내 목숨 빼앗을 때 “목숨 주세요.”라고 하겠어요? ‘진즉에 너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거야.” 이렇게 말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근거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죽은 존재가 되지요. 그럼 죽은 존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어요. 죽었기에 살려고 합니다. 교회 왜 나옵니까? 살려고 나오지요. 주님은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를 향해서 ‘살려는 그 모습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살려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도 살려는 종교적 욕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을 때,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분하게 실험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시험했고, 전쟁하면서 시험했고, 안식일을 지키며 시험했는데 그들이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리스도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숨은 악마적 동기가 유발됩니다. 이런 작용에 대해 예수님은 숙주의 원리를 사용하십니다. 기생체가 자신을 계속 번성시켜 존속하기 위해서 숙주(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물)를 이용해요.
예를 들면, 기생충이나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 혹은 짐승의 몸에 들어가서 사는데(이 때 몸이 숙주입니다), 기생충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숙주를 죽일 수도 있고, 약하게 만들 수도 있고, 태평스럽게 만들 수가 있어요.
아담이 악마와 만나서 선악과만 따먹었겠습니까, 아니면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화 되었겠습니까? 악마의 품성이 이미 아담에게 들어와 버렸어요. 그 들어온 것이 뭔가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혜, 또는 지식입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선악적 지식이 인간 내부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가를 따진다는 자체가 이미 악마의 숙주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가 숙주를 계속해서 번성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가인을 낳고 아벨은 낳는 거예요. 그 후손의 특징은 어떤 경우라도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내가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농부가 비가 많이 오면 ‘이 비로 농사를 망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결국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가서 은혜를 받아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숙주의 마음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번 주는 복을 받으며 살겠지?’ 이런 생각을 해요. 이런 염려를 없애기 위해 신께 기도를 드립니다.
목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처를 제공하고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교인들이 기도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매일 새벽기도 하고, 수요기도 하고, 금요일 철야기도, 주일도 기도하고. 목사는 기도하는 것에 대해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면 그에 대한 대가로 커미션 받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구조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 받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선을 행해서 복을 받겠다고 나서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마음입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여 기도하지 말라(마6:31)’고 하셨지요. 제가 지난 수요일 기도 제목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보조자’라고 했지요.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주인이 계시는데 보조자가 왜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잡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보조자가 주인 앞에 얼쩡거리니까 주님이 만든 우리 인생을 우리 자신이 훼방하고 있어요. 우리는 악마의 숙주이기 때문에 악마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 ‘죄의 왕노릇’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왕을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죠. 이것은 인간 자체가 누구에게 통치 받고 있는지를 주님이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고 해요. 그러면 주님은 ‘입 다물어라.’고 하십니다. 왜?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귀신이 나갔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병 고쳤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병에서 나은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오해하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병 고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어요. 주기도문에서는 ‘죄’를 ‘빚’으로 봤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렇게 해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입니다. ‘빚’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책무가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악마의 권세에게 못 벗어나는 이유는 선악체계에 의해서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감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10장 4절을 봅시다.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자기 책무에서 벗어났습니까? ‘모세가 시킨 대로 이혼증서를 써줬으니까 이혼한 것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책임을 벗어난 것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더 큰 빚을 지게 하겠지요.
그것이 뭐냐? 9절 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인간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혼이 나눠진 것입니까, 안 나눠 진 것입니까? 안 나눠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하세요. 이혼해도 이혼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혼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마귀가 계속 추궁하는 것이 뭔가 하면, “너는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천국에는 못가. 천국 가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선한 일을 하고,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이렇게 해야 복도 받고 자녀도 성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이런 식으로 마귀가 지금 ‘책임과 그에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뭡니까?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남을 미워했고, 마음속으로 살인했고, 이혼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할까요? “그게 원래 네 모습이야.”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이 살인했어요.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귤 바구니에서 끄집어낸 하나의 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의 궁극적 의미는 복음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로 삼아요. 당신은 신랑이 되고. 인간 사회에서는 신부가 있고 신랑이 있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신랑도 신부도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의해서 신랑도 아닌데 신랑이 돼요. 신랑이 되면서 병행해서 없었던 신부가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느껴요. 그런데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목사가 ‘죄가 있는 사람을 복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억지로 죄를 기억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나는 죄들은 이미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없는 죄도 만들어서 회개를 또 해야 합니까? 이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식은 동행입니다. 주님이 신랑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신랑의 되면서 신부도 만들어져요. 혼자 신랑이 될 수는 없잖아요. 신부가 있어야 신랑이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부를 만드는 작업을 하시는데, 작업을 하면서 죄책을 해결하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에게 죄를 유발시켜요. 그리고 죄를 회개하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처음에는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죄를 지으면 반성문을 설 수가 없어요. 전쟁이 없는 시절은 평화롭습니다. 그 때는 남에게 배려할 수도 있고 이웃을 살펴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건빵 한 봉지를 발견했어요. 내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옆집 아이 생각해서 건빵을 나눠 줄 수 있습니까?
엄마는 자식 챙기기 바빠서 이웃 아이를 챙길 여유가 없어요. 여기에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그래서 굶주림이 심해지니까 여인들이 서로 약속했습니다.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왕하6:28).”고 해서 내 아이를 먼저 삶아 먹었는데, 그 후에 네 아이를 먹자고 하니까 여인이 그 아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어요.
여기에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우선 살고 보자는 식입니다. 모든 인간의 저변에는 우선 살고 보자는 마음입니다.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교사를 하든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이런 마음은 이성적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우리 몸의 본성입니다. 이걸 외면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일으키는 모든 일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를 꾸준히 생산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동행하시는 모습입니다. 회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손 놓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사는 것과 다른 삶의 경계선이 없습니다. 만약 경계선이 있다면 그건 선악적 사고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것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우깁니다. 이런 모습은 사단이 인간을 숙주로 만들어서 기생충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생충을 제거할 수가 없어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DNA는 살고 보자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어요.
과학적 관점에서는 DNA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마입니다. 예수님과 충돌할 때 비로소 귀신은 나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원래 연약한 자이니까 ‘죄를 범해도 봐주세요.’ 이것이 가능한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봐주세요.’가 성립이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죄인으로 끌고 갑니다.
그럼 주님은 말씀을 지킵니까? 지킵니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신부가 되지요. 신부될 사람은 지금 엉망진창입니다. 왜? 악마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은 상대방 속에 내 것을 장착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는가 하면, 장착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숙주는 계속 살아야 돼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본성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악마의 적이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다른 것은 용납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음이거든요. 이미 악마가 온 천하에 ‘네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승자다.’라는 것을 심어놓았어요. 아무리 좋은 명분이 있어도 ‘죽으면 소용없다.’ 이것을 우리에게 심었습니다.
죄가 가인에게 덮쳤어요. 그러면 가인은 죄가 시키는 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악마의 숙주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동생입니까, 하나님과 관련 된 동생입니까? 하나님과 관련 된 동생이지요. 평소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 하심으로 하나님과 관련 된 거예요.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원수가 아닙니다. 가인을 덮친 악마의 원수가 아벨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럼 아벨을 죽이면 누가 살아남지요? 가인이지요. 죽을 자는 죽고 살아남은 자의 세계가 악마의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그 원리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너, 죽기 싫지?” “그래. 살고 싶다.” 이것입니다.
북한에서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김정은을 절대적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정말 김정은이 훌륭하고 위대한 존재라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죠.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내 사랑의 결실인 자식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자식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치사하고 더러워도 참고 있는 것입니다. 김정은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살아야 해!” 이것이 마치 심장이 뛰듯이 계속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숙주가 된 모습입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김정은을 탓해요?
예수님이 오신 후 나타난 사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된다든지, 아이가 아프다든지, 취직이 안 된다든지 할 때 그것 해결하려고 교회 나와요. 그런데 누구도 하나님께 이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이라야 메시아답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하면 교회 몇 명 남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교회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또 죽이라고 세워놓은 곳입니다.
교회 다녀야 해요. 다니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폭로당해야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심으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함으로 구원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더 깊이 알아가야 해요. 예수님이 오셔서 부딪힐 때 예수님 말씀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모델 삼아서 어느 정도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보다 더 쌘 게 들어와요. 내가 돈도 좀 있고 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때는 이웃에게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상황인데 친척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 친척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몸이 건강할 때와 몸이 아플 때 어느 쪽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나올 가능성이 높겠어요?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인데 온유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명령과 권유는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오히려 반대가 되지요. ‘내가 행했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죄였구나.’ 이렇게 죄를 깨닫게 됩니다.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궁핍하다가 채워지면 이 말씀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풍족하게 되면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눌 수 없다고 할 때 인간은 악마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가능하면 이혼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말씀을 잘 못 해석한 바리새인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이제 지쳤다. 헤어지자.” 젊은 사람들 이런 소리 자주 하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같이 살게 하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고전7:8).’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결혼한 자들에게는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네가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네 한 몸도 간수 못하는 것이 건방지게 다른 몸까지 챙긴다고?’ 이런 느낌으로 말했어요.
사람들이 바울에게 결혼에 대해 상담을 했겠지요.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해라.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자면 이혼해라.’고 했어요. 이 말 듣고 복음 잘 듣고 있는 남편에게 “당신 복음 싫어하지? 이혼하자.”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떤 정당성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방식은 뭔가? 대신 죽음입니다. 이것은 신비인데, 어떻게 남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 2,0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어요. 남이 어떻게 내 속에 들어옵니까?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몇 명입니까? 2명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이것을 ‘한 몸’이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 보세요? 두 사람이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오늘날 과학이 놀랍도록 발전을 했는데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없어요. 2가 어떻게 1이 되지요? 두 사람인데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이건 과학적으로 풀 수가 없어요. 과학적으로 안 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풀 수 없다는 말이지요. 신학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 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했다. 어떻게? 몰라. 그냥 믿자. 예수님 당신이 내 죄를 가져갔습니까? 그래. 정확히 언제 가져갔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누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설명해 줄 수 없어요.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 문제는 거꾸로 풀어야 돼요. 남자의 몸, 여자의 몸이 아무리 같이 살아도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창세기 2장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율법을 누가 만들었어요? 예수님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해답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만드신 분이 갖고 있지요. 출제한 분이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해답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갖고 있죠. 그렇다면 출발을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몸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여자가 나오고 남자가 나왔다면 이것은 각자 딴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늘어난 거예요. 이것이 바로 관계인데, 이 관계가 나중에 언약 관계가 됩니다.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 언약 이렇게 쭉 나오겠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방주가 있습니다. 방주에 몇 명이 들어갔지요? 8명이지요. 이 사람들은 왜 구원 받았지요? 사람들은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방주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나중에 방주가 없어지면 이 사람들은 구원이 안 되는 수가 있어요. 방주 때문이 아니라 동승한 정결한 짐승이 있어요. 각 7쌍이 들어갔지요. 정결한 짐승을 보여주기 위한 한 식구가 노아 가족 8명이 되지요. 이 관계가 노아언약입니다.
노아언약은 한 곳에 담겨있는 내용을 다양하게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8명의 식구가 굶고 있는데 미군이 와서 밀가루를 주었다면 8명이 먹는 밀가루가 다른 밀가루입니까, 같은 밀가루입니까? 한 사람의 미군이 와서 준 동일한 밀가루지요. 그러면 밀가루 1의 숫자부터 헤아려야지 8명의 숫자부터 헤아리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헤아림의 대상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나부터 헤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데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하려면 우리를 제거해야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작업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죽은 자에게는 헤아리는 숫자에 의해서 새로운 운명이 주어집니다. 죽은 자에게 미래를 이야기하면 안 돼요.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호칭하는 그분께 모든 것을 일임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예수 안과 예수 밖, 즉 사랑과 미움으로 나눠집니다. 사랑은 주님과 하나가 되고 미움은 주님과 떨어짐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하면, 두 사람이 하나 되는 원칙은 애초에 성립이 안 돼요. 처음부터 하나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악마가 설쳐대는 바람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신 후에 우리가 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 속성이 날아가고 묵시적 속성으로 우리가 주와 함께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가?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욥기 마지막을 보면 할 말을 잊어버려요. 앞부분에서는 욥이 많은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유구무언입니다. 욥이 앞부분에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이때는 자기로부터 출발을 했어요. 자기가 납득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지요. ‘내가 믿을 만하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나 복음을 믿는다,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오해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오해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어요. 주님이 주신 답변이 무엇입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2:9).’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일부러 내 몸에 가시를 넣었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가시를 빼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 가시를 빼달라고 했지요? 몸에 가시가 있으면 사는데 불편해요. 그러나 우리의 편함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이 이유가 아닙니다. 불편해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안 불편해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지옥에 가도 주님의 뜻으로 가는 것이기에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은 없어요.
천국 가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내가 원했는데 주님이 천국에 넣어주신 것이 아니고, 내 뜻과 상관없이 주님의 자기 뜻에 의해 천국으로 이끄셨기에 ‘아,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구나. 지금 이대로 천국 가고 있구나.’를 확인할 뿐이에요. 그런 바탕에서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됩니다. 그러면 ‘동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사랑’이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요일3:10)”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사랑 받은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말이란 점입니다. 사랑을 안 받으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이 캥거루라면 우리는 캥거루 주머니 속에 담겨 있는 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들과 내가 똑같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고, 우리를 죽였고,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성령이 오니까 이것이 확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캥거루 주머니 속에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이신 일에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벌써부터 시작된 천국 생활이 감사의 생활인데 우리는 거저 죽어서 천국 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천국을 감사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3. 24. 07:5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