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0-레비나스
201703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0-레비나스
(강의:이근호 목사)
지평선 넘어서 타인이 다가온다 할 때에 레비나스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 일방적 주장 아니에요?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전화 하나 안 걸려오는데? 내 거주지에 오기는 누가 와. 아무도 안 왔어, 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요. 당신 주장에 의하면 누가 찾아와야 되는데 아무도 안 찾아왔다는 거예요.
레비나스는 타인이라 할 때 내가 아는 타인이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을 때 타인이냐, 타인이 아니냐? 타인도 아는 타인이냐, 낯선 타인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잖아요.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는 요소에 둘러싸여 있지요. 이 요소가 유발한 거예요.
배고프다. 밥 먹어야 되잖아요. 배고프면 저항할 수 없어요. 밥 먹어야 돼요. 그런데 요소 속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봤어요. 나중에 죽는다고 봤는데 레비나스는 나중에 죽는 죽음이 벌써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와 같아요. 죽음의 흔적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죽음의 흔적으로 인하여 나 자신의 요소가 더 깊이를 더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즐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요소들의 계속 밀려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뭔가 향유하는 것도 어느 정도 즐기게 되면 식상해요. 재미가 없어. 그러면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겠지요. 여기서 주의해서 보세요. 내가 지금까지 장난감 가지고 놀았는데 시시해, 하는 순간 새로운 장난감을 찾는 것 자체가 분명히 긍정적인데 나를 다시 수동적으로 불러내는 거예요. 내 욕망, 레비나스는 결핍이라 하는데 날마다 나는 결핍을 찾아내고 그 결핍에 휘둘리면서 그것이 내 생의 목적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목표로 시작하게 만들어요. 이러한 질병을 내가 어떻게 고칠 수가 없어요. 재미가 없는데 어떻게 해.
빨리 진도가 나가다 보니 진지한 취지의 깊이를 놓친 감이 있는데, 향유는 즐김이죠. 요소를 즐김에 따라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밀리지요. 만약에 즐길 거리가 바닥을 드러내고 식상하다면 나는 가만있는 존재가 아니고 새로운 향유 거리를 찾아나서야 되겠죠. 이게 남자들 바람피우는 것 아닙니까. 어떤 마을에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밖에 없으면 마음껏 남편을 향유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여자는 달랑 하나밖에 없는 남자들만 50명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여자는 옷차림에 달라져요. 그 남자의 시선에 맞추어서 그 남자가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랑해주는 향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봄인데 옷 하나 바꿔 봐? 이런 생각이 들면서 삶의 지루함을 잊어버려요. 사는 의욕이 나온다니까요. 사는 재미가 나타나요.
인간은 결국에 향유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향유가 결핍에서 온다고요. 나중에 죽음은 뭐냐 하면, 도저히 즐길 수 있게 해주면서도 결핍을 매울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결국 불가능성으로 끝나는 걸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 해서 레비나스는 죽음으로 본 겁니다. 비나스가 왜 이런 표현을 했느냐 하면, 하이데거가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했기 때문에 바꿔야 돼요.
하이데거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자체가 지금 나의 삶의 용기를 북돋아준다고 본 거예요. 사람이 죽음을 모르면 교만해지니까 언젠가 죽을 건데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보람 있게 살아야지, 해서 지금 지가 존재 의를 더 높인다는 게 하이데거라면 레비나스는 반대로 했어요. 지금은 결핍을 매울 것 같아. 왜? 뭔가 재미가 없으면 딸 결혼시키는 것으로 재미 삼고, 그 다음엔 아기 보는 것으로 기대하고, 계속 결핍을 채우는 것 같지만 죽게 되면 그 모든 결핍 채운 것이 다 날아가 버리죠. 결국 손을 놔야 된단 말이죠.
죽음은 결국 우리는 소극적이고 인생 자체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그 죽음이 흔적이 타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죽음의 가능성을 결핍으로 봤지요. 결핍을 내가 시도하지요. 나의 동일성의 확장을 위해 하는 겁니다. 재벌이 기업 늘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사업 이 정도 했으니 접자, 이런 것 없습니다. 회사 하나 더 세우고 계속 더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사업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낚시해서 고기 잡으면 그만둡니까? 더 큰 것, 더 큰 것, 나중엔 바다까지 가서 하다 풍랑에, 결국 죽음 앞에는 못 이기잖아요.
제가 주일 낮에 비트겐슈타인 이야기했잖아요. 그 사람이 인생은 게임이라 했잖아요. 죽으면 게임오버. 얼마나 적절하지 몰라요. 카레이서가 누가 속도를 더 많이 낼 수 있는가? 인생이란 목표가 있는 게 아니고 경쟁자가 있으면 그 순간 목표가 또 새로 생겨요. 기 안 죽으려고.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그것 자체가 요소가 돼요. 이런 동질성에 의해서 장차올 죽음이 현재 이미 왔는데 죽음이 흔적을 남기는데 나로 인하여 피해 입은 타인으로 오는 거예요.
그러면 피해 입은 타인의 예를 듭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예를 드는데 에로스, 뭐 대단한 것 나오는 건 아니에요. 레비나스가 남자잖아요. 여자의 마음을 몰라요. 남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데 남자가 여자를 볼 때 여자 어디를 봅니까? 키를 봅니다, 가슴을 봅니다, 머리카락을 봅니다, 성격을 봅니다, 부모한테 얼마나 잘 하는지 봅니다, 그러는데 다 되도 않은 소리하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촉감이에요. 피부촉감. 여기서 애무가 나온다는 거예요. 옷을 입은 상태에서는 이런 게 안 나와요. 옷을 벗은 상태에서 피부를 대게 되면 거기서 남자는 신비를 느껴요.
신비는 내가 말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신비가 되기 위해서는 낯섦이에요. 불을 끄고 여자의 피부를 만질 때 말할 수 없는 어떤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들, 늙은 여자들은 여자가 아니었다. 피부가 탱탱하지 않으니까. 홍상수 감독이 왜 젊은 여자 찾는지 알겠지요. 왜 남자 연예인들이 스무 살 연하의 여자를 찾는 이유를 알겠지요. 피부에 탱탱함에 있다는 거예요. 학식이 어떻고, 덕이 어떻고 해도 학식도 덕도 필요 없어요.
물론 나보다 돈을 더 벌어주면 감사는 하지만 감사하게 받은 돈으로 탱탱을 찾는다니까. 돈은 이쪽에서 받고 다른 쪽에선 젊은 여자를 찾는 거예요. 신비로우니까. 다시 자기의 능동으로 동일성으로 나가다가 수동적으로 빠지는 즐거움을 느껴요. 이 즐거움은 내가 뭔가 조종하고 장악하다가 놔버려도 되는, 신비 속에 놔버리는.
그러면 젊은 여자와 사귀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식상해요. 그러면 여성이 신비로운 거예요, 남성이 신비로운 거예요? 둘 다 신비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본인이 저 여자만큼은 사랑하리라 했는데 얼마 안 돼서 식상해. 그러면 본인이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 레비나스는 이걸 굉장히 강조합니다. 분명히 억지를 부려서 고체주체, 나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남성이니까 여성이 와서 아무 말도 않고 향수 날리며 지나갔는데 그날 밤에 그 여자가 날린 향수와 묘한 신비로움을 잊을 수가 없단 말이죠. 아내가 툭 치면, 치워라. 그러면 여자의 촉감이, 오늘 낮에 무슨 일 있었어? 알 수 없는 휙 지나감, 이건 결혼생활 10, 20, 30년 해도 소용없습니다. 나이 90 돼서 요양원에서 나와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90된 아버지한테 최고의 효도는 뭐다? 할머니는 안 돼요. 젊은 여자를 주면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세상에 니가 최고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여자가 돈 보고 오지. 꽃뱀 아닌 여자가 어디 있어요. 세상 전체가 다 그런데요.
아까 타인을 볼 때 그냥 다가가지 않고 나의 동일성에 필요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돈을 뽑아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뭐든 게 돈이에요. 심지어 자식이 부모 볼 때도 아버지가 부동산이 있다 하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형제간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절대로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하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걸 억지로 이러니까 나는 바르게 살아야 돼. 그 착함이 돈으로 이어지기 위한 수단에 전략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웃 봉사 많이 하니까 다른 교회 헌금 내지 말고 우리 교회에 헌금 많이 해서 이웃 사랑 펼칩시다. 이게 교회를 돈을 모으는 전략이에요. 선교사가 학교 세우고 사진 찍는 목적이 뭡니까? 선교비 많이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에요.
결국 목적은, 내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해다오. 그런 뜻입니다. 노래에 이런 가사 있잖아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님이시여>(김연숙) 세상에 얼마나 사랑했으면 내가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겠어요.
피부 촉감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가 결핍을 마저 채울 수 없는 불가능성을 신비를 만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촉감 좋은 휙 지나간 익명성, 이름 없는 그 여인을 잊지를 못해요. 레비나스는 남성을 예로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남성, 여성을 붙여준 이유는, 남성으로 하여금 자기 동일성이 거대한 신비라는 요소에 갇혀서 헤매게 만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여인에 대한 사모함에서 자력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없지요. 이게 덫인 거예요. 인간은 모든 덫에 빠진 거예요. 덫은 내 힘으로 벗길 입장이 못 됩니다.
레비나스의 이런 이론을 기독교나 교회를 새롭게 해보겠다는 신부나 목사한테 먹혀 들어가는 이유는,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는 소극적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걸 그대로 대변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힘으로 용감하게 나는 예수 믿겠다고 나설 수 없는 입장이란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왜냐하면 우린 신비의 덫에 갇혔으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진짜 촉감 좋은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칩시다. 그 맛이 아니라. 처음에는 여자의 신비에 갇혔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의 신비에 갇힌 게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여분의 자아에 대해서 내가 갇혀버린 거예요. 그래서 나와 타인의 분리에서 나와 나의 분리로 귀결되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몰라. 그전까지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신비가 다가오면서 그게 해소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냥 있으면 촉감이 식상해지면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찾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고맙게도 새로운 신비, 제3의 인물이 나와요. 자식이 나와요. 자식이 나오는 순간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대목에 대해서 그동안 레비나스 이전에는 어느 주석에도 설명이 안 됐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되는 것 아닙니까? 레비나스에 의하면 예수 믿는다는 게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예수를 내가 조작해서 내 소유로 만든 거예요. 그러나 향유 앞에서는 소유라는 게 성립 안 됩니다. 잉여성 앞에서는 잉여는 소유될 수 없고 여분의 것을 잉여라 하거든요.
해산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말은, 여자가 아기를 낳게 되면 그 아기는 자기가 예상 못한 낯선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낯선 타인에 기쁨으로 소환되는 거예요. 아기가 새벽 2시 45분에 울면, 결혼하기 전에는 혼자 살면서 새벽에는 잤고 아침 되면 활동하고. 이것이 계속 자기 정체성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아기 낳고 난 뒤에는 새벽 2시 45분에 자기를 소환하는 겁니다. 누가? 자기 몸에서 나온 아기가. 소환할 때 미치지요. 그래서 산후우울증 걸리는 겁니다.
나는 평소에 내가 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나다운데 니가 뭔데 나를 부려먹느냐 말이죠. 젖 달라고 울고 달래도 울고 때려도 울고 안 때려도 울고. 그리고 아기 낳는다고 아랫배 다 터지고 몸매, 스타일 다 망가지고. 다시 그걸 빼려고 하면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지 계산해보세요. 시도 때도 없이 잠 다 깨지 젖 달라고 하지 남편 애 본다고 하지만 전혀 마음에 안 들거든요. 남자들 애 안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어. 도대체 내가 원하지도 않은 낯선 요소가 나에게 찾아왔잖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애 낳으면 기쁜데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윤리인 거예요.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새벽이고 뭐고 젖 달라고 울 때 아기를 낳은 것에 대해서 감격스럽게 생각하는 엄마는, 자기 스타일 망가지든 자기 시간을 다 빼앗은 것과 상관없이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보겠지요. 왜냐하면 나의 이동이니까.
전에는 나의 주체가 나한테 있었잖아요. 그런데 나가 자식=나가 되었어요. 아기가 우는 게 아니고 내가 우는 게 돼요. 걔가 아프면 내가 같이 아파요. 이건 낯선 타인이에요. 이건 내가 요구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호출하면 호출 당해야 돼요. 아낌없이 서슴없이 자발적으로 굴종하고, 자발적으로 예속되고,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윤리, 그게 바로 낯선 타인이 요청하는 윤리라는 거예요. 레비나스가.
왜 신부들이나 목사가 여기에 뿅 가느냐 하면, 현재 인간들의 애기 자라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집어넣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잖아요. 그리고 죽을 때 비참하게 돌아가셨잖아요. 피 흘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통당하는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찾아오지요. 오늘날 교회 키우기 위해서 돈을 미끼로 걸어서 돈이 곧 복이 되니까 이렇게 기도하시고, 이렇게 전도하시고 하면서 사기를 쳤단 말이죠. 교회 와서 그런 소리 듣느니 장사하면 돈 더 번다는 걸 이미 감 잡았잖아요.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니까.
그런데 만약에 이런 식으로 복음과 접목시키면, 여러분은 언제까지 속물처럼 돈만 밝히며 살렵니까? 그럼 그쪽에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 십자가는 이렇다고 고통 받는 이웃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내가 목마를 때 물을 주었고, 내가 굶을 때 밥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추워 벌벌 떨 때 옷을 입혔느니라 할 때 소자가 하는 말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소자를 레비나스는 낯선 이웃으로 바꿔치기한 거예요. 레비나스는 예수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이웃만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그걸 예수라고 자리 위치를 교체한 것은 성당의 신부, 그것도 공부께나 한다는 신부나 목사들이 멋지게 자리 교체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모습을 증거하는데 레비나스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그런데 그 이웃이 익명성이라. 익명성은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주체가 되기 전에 익명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타인은, 내가 원래 있던 그 자리, 지금은 내가 너무 잘나서 잊어버린 그 자리, 그 요소세계를 지금 나에게 되돌려주고 너는 처음부터 이런 자였다는 되돌려주는 사람으로서 익명성 가지고 낯선 타인이 오는 겁니다.
그럼 이것도 성경에 어떤 것과 접목될 수 있습니까? 우리 존재의 바탕과 근본을 피해 입고 헐벗고 괴로운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내가 옛날 저 사람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출애굽기 신학에 나오지요. 출애굽기 22장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보세요. 출애굽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우리는 살았다고 까불잖아요. 그때 율법이 따라오지요. 까불고 교만하고 약속의 땅에서 부자 되고 할 때 자기 힘과 지혜로 얻었다고 할 때 율법, 다른 말로 모세언약이 들어가면서 하는 말이, 출애굽을 누가 시켰는데?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서 뭐였었어? 고아였습니다. 과부였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건져주었습니다. 내가 일부러 죽음을 통과한 죽음의 흔적으로 주변에 고아와 과부를 깔아놨는데 왜 너희는 그에 대해서 무심하고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냐고 모세율법으로 닦달내고 있는 겁니다. 닦달낸다는 말은 제 말이 아니고 레비나스가 한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의 원형은 어디 있어요? 내가 나의 원형이 아니고 누가 나의 원형이다? 내가 익히 아는 이웃사람 말고 낯설게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그 이웃이 나의 원형이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닦달내고 나를 소환할 때 그 원형이 고독하고 서러워요. 그리고 죽음의 흔적을 얼굴에 보이고 있습니다.
레비나스 이야기할 게 굉장히 많아요. 특히 한 가지 꼭 안 놓치고 싶은데 시선 문제인데 이 문제는 라캉할 때 언급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 시선 문제를 어렵더라도 참으시고 들어보세요. 화상통화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점이 뭘까요? 달라요. 시선이 빠져요.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평소에 인간은 내가 구축돼있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시선을 던지지요. 시선 던지면 판단 나오고 비판이 되고 검증이 되고 나한테 돈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유리할지 불리할지 보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원형에서 나한테 시선을 보내요. 그러면 호출하는 거예요. 소환이죠. 오라는 거예요. 나에서 시선을 보내는 겁니다. 내가 보낸 시선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레비나스 윤리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이에요.
남을 도와줄 때 필리핀 사람 도와주자. 네팔 사람 도와주자. 학교 세워주자. 인도네시아 지진 나서 어렵다. 돈 모아 보내주자. 절대로 동정하면 안 돼요. 그건 동냥하는 것이지 내가 그 사람이 어렵다고 판정을 내가 했잖아요. 그러면 내 돈과 함께 나의 시선, 나의 판단이 동반하잖아요. 그건 이웃사랑이 아니에요. 레비나스의 윤리가 아니에요. 직접 만나야 돼요. 직접 만나게 되면 돈을 주는 게 아니고 네가 나를 위해서 살 수 있는지 요청받은 게 됩니다.
말을 쉽게 해야 될 텐데 어려운 사람, 이리 오세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부를 때 내가 그 사람 앞에 섭니까, 내가 그 사람 앞에 섭니까? 내가 불렀잖아요. 쌀 떨어졌지요? 쌀 한 부대 이번 주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호출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 앞에 서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껏 서양이 그런 잘못된 짓을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필리핀에 홍수 피해 입은 사람이 날 불러 세워야 되는 거예요. 돈 몇 푼 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 윤리가 아니에요. 그 근거를 레비나스는 이사야 6장에서 듭니다. 누가 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갈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대목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제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했죠. 바로 그게 윤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소환했고 이사야는 그냥 서 있을 뿐이에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새벽 2시 45분에 아기가 웁니다. 아기가 기어옵니까? 아기가 소환했고 엄마는 그 앞에 섰지요. 아기가 요구했고 나는 젖을 물려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윤리에요. 이게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의 윤리입니다. 타인의 윤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돼요. 의외로. 왜? 하고, 안 하고를 내가 결정하면 안 되니까. 안 하면 어떻게 되나? 누가 찾아오게 돼있어. 너를 호출하게 돼있어. 그때만 해. 오지랖 떨지 말고. 부모한테 효도한다고 나서지 말고. 부모가 요청한다면 그 앞에 서. 사실은 부모에 효도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예를 든 거고요.
아까 종족과 가족과 민족을 떠나라 했지요.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의 원형을 말하는 거지 왜 부모한테 효도해선 안 되느냐 하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을 익히 알잖아요. 익히 안다는 것은 이미 나의 동일성 속에 포함된 내가 행할 수 있는 윤리에 이미 합류된 것이기 때문에 낯선 타인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부부 사이에서 항상 낯선 것이 나와야 신비스럽습니다. 낯선 것이 안 나오면 식상해져요.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남편이 코를 판다. 어머나, 아름다워라. 아내가 방귀를 뀐다. 저렇게 방귀소리가 아름다운지. 이렇게 될 때 둘 다 요소 속에 있는 거예요. 권력싸움을 안 한 거예요.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게 계속 안 간다 했지요. 그러다 아기를 낳지요. 에로스의 결과물로 아기가 나오면 남편과 아내가 전부 아기한테 몰빵 해버리죠. 부모도 좋지만 내 자식보다 못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걸 내 자식이 알까요? 모르기 때문에 윤리가 되는 거예요. 알면 갚음이 돼버려요. 갚음이 되면 부모가 노후대책 전략이 돼버린다고. 너 공부시킬 때 2억 들어갔고, 유학할 때 1억 들어갔고, 총 3억 내놔. 나도 밥 먹고 살자. 알아서 생활비 주겠지, 라고 기다렸는데 더는 못 참는다. 아빠답지 못하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된다. 내 놔. 둘이 벌잖아. 백오십 내놔.
그 순간 윤리 다 깨졌고 그동안 자식 키운 걸 앵벌이 한 거예요. 자본주의사회가 그렇게 세요.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만만치 않습니다. 윤리보다 돈이 정점에 있어요. 교회 가도 돈이 전부고, 어딜 가도 돈밖에 없어요. 레비나스는 탄식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그것은 돈 되는 윤리, 돈 되는 도덕으로 했다는 겁니다.
레비나스가 뭘 공격하느냐? 공리주의라 했고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이성+의지’가 동원되어서 공리주의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이성 자체를 비판하는 거예요. 이성을 이성으로 비판할 순 없어요. 모순돼요. 이성을 이성으로 비판한 것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하버드 대학교수의 책에 나왔지요.
현대사회는 이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서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됩니다. 그런 건 윤리가 아니에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된다는 걸 누가 몰라요. 그런데 본인이 돈이 없는데. 본인부터 결핍과 본인이 향유할 게 있는데 남 도와줘요? 골프 치지 말고 도와주세요. 골프 치는 걸 그만두고 도와주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구제가 마약보다 더 쾌감을 줄 때만 해요. 가수 김장훈이 구제하는 정신병이에요. 그리고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 엔돌핀이 엄청나게 나와요. 집안에 있는 것 다 갖다 줍니다. 갖다 주는 쾌감이 더 크기 때문에. 이건 누가 말리든지 요양원에 집어넣든지 해야 돼요. 집안 거덜 납니다.
그렇지 않는 한 골프 그만두고 도와주지 않습니다. 골프가 주는 쾌감이 있기 때문에 항상 공리주의는 이성적으로 견줘요. 골프 그만두고 도와주는 게 쾌감을 주는지 계산하게 돼있다고. 따지는 이게 이성 아닙니까. 기존의 윤리도덕은 이렇게 하시면 당신한테 이익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결국 당신에게 업보로 돌아옵니다. 불교적 공리주의죠. 선을 행하면 그게 갚음이 됩니다. 전부 다 종교적 공리주의에요.
공리주의를 레비나스는 사실은 저주하고 있는 거예요. 공리주의를 비판한 사람이 있어요. 이성을 비판한 칸트입니다. 칸트의 윤리는 의무론인데 어떤 대가 없이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의무론입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게 아닙니다. 소환이에요. 저쪽에서 나를 소환해서 대화하는 거예요. 대화윤리에요. 대화윤리는 마르틴 부버가 이야기한 거예요. 이 사람은 유대교 신학자인데 하나님과 우리는 너와 나의 만남, 만남이 윤리다. 혼자서 순종하는 게 윤리가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윤리라고 한 그것을 감안해서 대화, 호출해서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필리핀이 어렵다고 돈 보내는 게 아니에요. 만나서 나는 갑이고 너는 도움 받는 을이 아니고 당신한테 유발된 사건이 나로 하여금 윤리적 존재로 서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와요. 당신이 그렇게 사고 나지 않았으면 나는 내 돈에 얽매였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으로 인하여 돈보다 더 귀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쪽으로 돈을 건네는 것, 이게 바로 윤리라는 겁니다.
이제 5분 남았는데요. 약속대로 질문을 해야 되겠지요. 레비나스의 윤리의 문제점은? 질문은 간단해요. 이런 문제점은 가장 공부 많이 한다는 신부나 목사들보다 여러분이 세상을 더 넓게 보는 사람입니다. 더 깊이 있게 보고. 레비나스는 우리가 다가가는 게 아니고 저쪽에서 다가온다 했습니다. 호출해서 끌려가는 거죠.
그 문제점에 대해서 한병철이라는 재독 사회학자가 있어요. [피로사회]라는 책을 지어서 히트 친 그 사람이 레비나스의 문제점을 지적했어요. 알랭 바디우도 같이 레비나스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그 문제점의 지적이 뭐냐 하면, 나와 너의 차이만 생각했지, 층의 차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와 나 사이에 수평적인 차이를 두고 저쪽에 당긴다고 봤는데 아래층과 위층의 차이는 생각을 안 했다는 겁니다.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이 말하기를 제가 요약했지만 현재 이런 윤리고 도덕이고 결국 하나로 지향하는데 깨끗한 사회, 더 나가서 긍정적 사회를 추구하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한병철은 말하기를 우리가 긍정해야 될 이유를 지금 감추고 있거나 거기에 대해서 정립이 안 돼 있는 상태다. 쉽게 말해서 왜 우리가 윤리적이어야 하는 그 근거를 대보라는 거예요. 윤리적이 좋은 것이라 하지 말고 그걸 분석해보자는 거예요.
왜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이 온다. 오면 왔지, 어째서? 그리고 그 이웃이 결정적으로 마귀라면 당신은 사랑하겠습니까? 마귀도 도와줄래? 레비나스한테는 마귀가 없습니다. 그냥 나 자체가 모호할 뿐이지. 레비나스가 신학자가 아니고 철학하는 사람이에요. 철학의 목적은 윤리에 있습니다. 건전한 사회에 있어요. 한병철은 말하기를 왜 건전해야 되느냐 말이죠.
왜 사람이 피곤한 줄 알아요? 성과주의. 성과주의가 물질적 재산적 성과뿐만 아니고 윤리적 성과까지 이 사회가 요구하고 있단 말이죠. 돈 벌었으면 부자답게 깨끗하게 남을 도와줘야지, 라는 윤리적 성과까지 요구하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한병철 씨나 알랭 바디우가 레비나스를 공격한 거고. 제가 레비나스의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낯선 사람이 옵니까, 낯선 사건이 옵니까? 사건이죠. 지금 레비나스는 하나님의 낮아지심,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 가지 인간으로, 윤리적 대상으로 온다는데 실제로 이 세상은 인간이 아니고 사건으로 와요. 길 가다가 엎어진다든지, 갑자기 발을 삔다든지 이런 사건이 있을 때 내가 나에 대해서 다 아는 게 아니라는 것.
뭔가 이 현실이 내가 구성한 현실 말고 하나님이 만든 현실에 담겨있는 원리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임시적으로 이 땅에서 활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일에 대처하지 못하고 어설픔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처한다고 나오지만 예상 못한 삐딱한 사건들이 터집니다. 지금 부동산 사서 오를 걸 생각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다 놓고 피난 가야 돼요. 이건 예상 밖의 요소입니다.
이건 레비나스의 말이 맞긴 맞는데 항상 예상 밖의 요소가 사람으로 오는 게 아니고 사건으로 온다는 사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사람으로 국한한 겁니다. 왜냐하면 윤리가 되려면 너와 나가 돼야 되니까. 그러니까 한병철한테 비판받는 거예요. 한병철은 층이 다르다 하고 저는 인간뿐만 아니고 사건으로 오는.
그러니까 깊은 산속에 혼자 살아도 인간은 죄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왜? 늘 가던 그곳에 송이버섯이 없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은 죄인인 겁니다. 니가 뭔데 송이버섯이 또 나와야 됩니까? 하나님도 아닌데. 이게 인간이 죄 짓고 마귀 속성을 갖고 있어서 한평생 살면서 분노를 유발하면서 신이 주신 것에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대들면서 하죠.
그런 것들의 바로 예수님이 짊어져야 될 죄로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터지는 모든 사건 속에서 주님께서 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보여주면서 그걸 배출해가면서 우리는 천국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지요. 그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 인정하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많이 생각했던 학자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시 조명해보았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 했는데 어떤 경우라도 자기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인 것을 또다시 깨닫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