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0-레비나스
201703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40-레비나스
(강의:이근호 목사)
레비나스(1906~1995), 오래 사신 사람인데 이 레비나스가 상당히 우리나라 천주교, 천주교 중에서도 좌파에 무지무지하게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현재 천주교, 기독교 좌파에 영향을 남긴 이유가, 교인들이 지적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까 기존에 신부나 목사들 설교가 먹히질 않는 거예요. 뭔가 참신 것 없나, 설교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내용을 일괄적으로 설명한 것이 없나, 하는 중에 레비나스가 등장했습니다.
레비나스가 유대교 출신이거든요. 유대교는 유일신이죠. 신이 단수에요. 하나밖에 없는 유일신입니다. 유일신에서 레비나스는 윤리를 끄집어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잘 설명이 안 될 거예요. 신은 윤리를 행할 수 있는 당사자가 아니에요. 윤리는 중간에 인간을 거쳐야 됩니다.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레비나스가 지금도 호응을 받을 뿐더러 아마 요즘 기독교윤리에 정설로 들어오게 된 이유가, 유일신인데 그동안 유대교에서 말하는 윤리란 신의 말씀에 복종하란 말입니다.
계시가 있고 계시에 순종하게 되면 구원도 받고 이 땅에서 복도 받고, 이런 쪽이었단 말이에요. 순종하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순종을 해보는 거예요.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복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순종했는데 복이 안 오잖아요. 올 리가 있습니까?
경쟁사회에서 성당을 안 가고 교회를 될 수 있는 대로 안 가야 남보다 한 발짝 앞설 수 있는 거예요. 일요일에 셔터내리면 경쟁사회에서 그만큼 단골이 떨어져나가거든요. 요즘 단골이 어디 있어요. 왔다 갔다 하는 입장에서. 그러면 수입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축복의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저주의 증거가 될 수 있지요. 수입이 늘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복은 계속 돈이 들어와야 돼요. 건강, 가정화목하고. 그것을 실습해보니까 안 먹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당이나 교회를 안 다니는 겁니다. 대충 살다가 예수 믿고 죽을 때 천당 가는 그것만 노리고 평소에는 일요일에 빈둥거리며 놀기는 뭐하고 재미있는 것 없으면 교회 나가주고. 혹시 벌 받으면 안 되니까. 아홉시 1부 예배 후다닥 드리고 놀 계획 잡고 여기활동하고 그렇게 나오니까 천주교, 기독교에서는 비상 걸린 거죠. 왜냐하면 여자들은 돈이 안 되니까 남자들 잡아야 되는데 텔레비전 시사가 더 재미있지. 신부들 설교가 그런 것 다 베끼기 때문에 도저히 못 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특히 서구유럽에서 여름에 성당 하나도 안 다녀요. 이걸 어떻게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느냐? 붙잡는 방법은 이겁니다. 당신이 성숙하려면 축복이나 저주, 돈 버는 축복, 세상적인 축복만 기대하지 말고 인간이 윤리적인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쪽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요. 얼추 열심히 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버는 방법을 아니까 교회에서 순복하면 복 받는다는 그 사기술에는 안 넘어가거든요. 돈은 시간을 투자해야 돈 벌고, 요령 있고, 경쟁에서 이겨야 돈 벌고, 새로운 기술 개발해야 돈 번다는 것 정도는 다 아니까.
그러면 복 받기 위해서 성당 다니고 교회 다녔는데 복은 딴 데서 오니까 구태여 갈 필요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신부나 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만 챙기는 세속적인 짐승 같은 생활하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지요.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라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교회나 성당에선 해줄 말이 없어요. 교회 키우고 성당 키우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등장했어요. 얼마나 기쁜지. 지금 성당이나 교회가 레비나스를 좋아하고 신부들 공부하는 논리적 구조를 따라가 봅시다. 어떻게 레비나스 이론이 그렇게 환영을 받는지.
강의를 끝내고 난 뒤에 레비나스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어요. 왜 질문하느냐 하면, 딱 들어보면 세상에 성경진리 그대로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완전히 십자가를 본받자는 것과 똑같네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요. 그러니 천주교에서 이 철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요.
첫 번째 레비나스 이론에서 처음부터 출발하는 게 뭐냐 하면, 전체성에 휘말리지 마세요.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잘 먹히는지 몰라요. 개성대로 사세요. 남 간다고 따라가지 말고 너는 너뿐이라는 겁니다. 레비나스는 이걸 개별성, 다른 말로 개체성이라 하거든요. 이번에 골로새서에서 물리적 개념 상 입자라고 했지요. 레비나스가 개별성, 개체성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왜 남들의 눈을 의식하십니까? 여러분 인생은 여러분이 사시는 겁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처럼 기쁜 복음이 어디 있어요? 심지어 레비나스는 종족과 민족과 가족과도 결별하세요. 가족과도 결별하라고 이야기하니까 옛날 같으면 이혼하면 동네에서 고개도 못 들고 사는데 이건 이혼한 게 더 당당해. 모든 견해와 모든 평가는 바로 전체성에서 온다. 전체성의 폭력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국가는 전체를 하나로 아울러서 통치하는 그것으로 국가가 유지된 거예요. 그러면 교회나 성당에서 유럽이나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장로들 기도하는 첫 번째가 나라 잘 되게 해달라는 것, 나라가 전체성이잖아요. 전체성에서 개별성이 나아가게 되면 나라가 어렵다, 북한이 쳐들어온다, 중국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면 우린 어떻게 하면 돼요? 간단해요. 이민 가면 되지. 내빼면 되는 거예요. 나라와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가족끼리 뉴질랜드 이민 가서 편안하게 살면 되지. 호주는 많이 힘들게 만들어놨어요. 하도 많이 쳐들어와서.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얼마나 적절하게 대처하게 만들었어요. 전체성에 폭력에 그동안 서구철학이 동원됐다는 겁니다. 1차, 2차 대전 전쟁에는 힘을 모아야 되잖아요. 전쟁할 땐 무조건 애국해야 됩니다. 전쟁에서 도망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국수주의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이태리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이건 우리 민족은 특별하다. 현재 북한 같은 경우에. 그걸 전체주의라 합니다.
이건 정치에 관한 거예요. 젊은 사람들 정치에 관심 없잖아요. 왜? 전체주의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 대한민국, 88올림픽이나 월드컵 할 때 그때는 하나된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이게 전체주의에요.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미국이 주도권을 쥐면서 이 세상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특히 자본주의 가운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요.
신자유주의는 무한 경쟁시대에요. 될 놈은 되고 죽을 놈은 죽고. 이게 신자유주의인데 사실은 그건 잘못된 말이에요. 죽을 놈이 거름되지 않으면 될 놈이 되지 않는 원칙이에요. 붙어서 빠질 건 빠지고 나는 달리겠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빠질 놈이 빠지면 안 되고 나한테 밟혀야 내가 웃을 수 있어요. 몇 놈 울어야 내가 웃는다니까요. 주식도 마찬가지고 모든 바닥이. 치킨 집도 마찬가지고, 네일샵도 마찬가지고, 노래방도 마찬가지고. 항상 뒷북치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가게도 마찬가지고 임대업도 마찬가지고, 모든 부동산 주택경기 다 마찬가지에요.
제가 주일오후 강의할 때 투자에 대해서 설교했지요. 원유, 금, 주식, 펀드, 채권에서 어떤 그래프에 투자해야 되는지. 교인들이 아주 잘 들어요. 그걸 신자유주의라 합니다. 그럼 없는 사람은 못 살잖아, 라고 하잖아요. 국가 자체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없는 사람을 희생물의 타켓으로 삼을 수밖에 없어요. 이건 신자유주의 말고 사회주의로 바꾸자고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19세기 중반에 피히테란 사람이 처음부터 주장한 교육론에서 등장합니다. 결국 그 사회주의는 국수주의, 나치즘으로 갔어요.
그러면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성을 찾으려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그동안 전체주의 하에서 국민들이 꼼짝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순응하던 정신구조를 개조해야 되죠. 그리고 그 당시 서구에서 성당이나 교회는 뭘 위해서 복무하고 봉사했느냐 하면, 우리나라 복 받으면 전체가 복 받으면 소속된 구성원도 복 받거든요. 우리나라가 잘 살면 덩달아 잘 살고 국민소득이 높아진다. 여기에 기도제목이 성당과 교회가 국수주의로 나갔던 거예요. 대통령이 신년 초에 신년기도회 하죠. 그게 서구에서 다 했던 거예요.
정신구조를 어떻게 개조해야 되느냐? 레비나스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 ‘있음’ 이걸 거저 있음, 이것을 ‘익명성’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전체 속에 개인은 그냥 묻혀버려요. 이름은 있되 전체주의를 위한 호명이지 나를 위한 호명은 될 수 없는 거예요. “거기, 누구 있나?” 어떤 경찰이 “어이!” 부르면 돌아보듯이 누가 호명한다는 것은 비로소 주체가 되는데 그 주체는 국가라는 전체에 봉사하고 순종하고 복종하기 위해서.
서구에서 국가 위에 신이 있거든요. 이 신이 유일신.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 영국 국가 아닙니까. 국가에 신이 있고 백성은 다 유아세례 받으니까 전 국민이 신자가 되는 겁니다. 신에게 잘 보이면 우리나라 잘 되고, 못 보이면 어려우니까 일심단결해서 신에게 잘 보이죠. 인간은 나로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있음이 돼요. 이걸 익명성이라 하죠. 이름은 있으되 있으나마나한 익명성. 익명성은 결국 기술과학시대에 하나에 숫자화 되죠. “어이, 3636 호출!” 숫자로 부르는 거예요.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 내가 누구란 걸 내세울 수가 없어요.
이런 입장에서 윤리란 눈치 보는 윤리에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할 때 얼마나 국가에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를 눈치 보면서 윤리를 행하기 때문에 나로서 내가 책임질 윤리를 지금까지 해준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국가가 전체가 잘 사는데 내가 아무 소리 못하고 희생하게 되면, 나라만 잘 된다면 그것이 남한테 칭찬받는 윤리로 살아온 겁니다.
국가 단위가 너무 크면 이걸 종족, 민족, 또는 마을 특히 가족. 가족단위로 보면 자식 잘 키우면 훌륭한 엄마가 되겠지요. 이제는 그런 시절을 지나간 거예요. 나중에 나이 50, 60 되고 자식 다 키웠다. 그러면 자식이 부모한테 고마워합니까? 주둥이만 한 다발 나오지요. 자식의 주특기는 부모 등쳐는 일을 해요.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지요. 빼먹고 또 빼먹고 계속 빼먹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한테 좋은 소리 듣지 못합니다. 하나면 그나마 다행이에요. 둘이나 셋이면 나중에 유산싸움 벌어질 거예요. 키운다고 애먹고.
익명성에 있으니까 국가에 봉사하지 말고 주체를 다시 정리하자는 겁니다. 익명성에서 다시 정리하자는 것. 레비나스는 현대인들에게 딱 맞는 도덕과 철학을 제시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새롭게 정립되는 일종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나 할까. 새롭게 정립된 나는 뭘까? 그걸 요소세계라 합니다. 레비나스가 든 예인데 금붕어는 물이 있어야 살지요. 물이 요소가 되고 물 때문에 금붕어가 합치되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소세계에서 주체를 다시 정립한다는 말은, 요소세계에 있는 대자연에 주어진 모든 것을 인간은 향유하는 것, 향유는 즐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첫 번째 턱이 되는 거예요. 보통 생각하기를 내가 여기 있고, 즐긴다. 세상에 있는 것, 따뜻한 봄날, 물과 헤엄치는 것, 특히 기본적으로 먹는 것, 맛있는 것 골라 먹는 것, 이런 것을 즐긴다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어진 환경에서 향유, 주어진 요소를 증거하가 위해서 우리는 향유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에요.
예를 들면 어떤 촌에 피자 집, 햄버거 집 하나도 없는데 있는 것이라곤 들판에 쑥갓밖에 없다. 그러면 그 부모가 쑥갓에 된장 풀어서 국 끊여주거든요. 애는 태어나서 햄버거, 초콜릿, 사탕도 먹어본 적도 없고 온통 쑥갓만 먹으면 열다섯 살까지 살았다고 칩시다. 텔레비전도 물론 없고, 햄버거 맛있게 먹는 광경을 본 적도 없고. 그럴 경우에 이 사람은 쑥갓이란 요소를 증거하는 수동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동안 사람들이 잉여적 존재다 보니까 서로서로 좋은 걸 봤다는 그걸 더 근원적으로 보면, 인간이란 어떤 능동적 요소도 없이 수동적 존재에요. 특히 잠이 온다. 레비나스에 이런 게 있어요. 빵을 줄 수는 있지만 내가 그 사람 대신 빵을 먹고 배부를 순 없다. 그 사람이 빵을 먹어야 배부르다는 그 기분을 내가 대신 해줄게, 하고 자기가 빵을 먹었다고 남이 배부른 순 없는 거예요. 이건 물론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도 나옵니다. 자기 몸이 더러운데 남이 대신 목욕한다고 깨끗할 리 없고, 남이 대신 머리 깎는다고 자기 머리 깎아지는 것 아니고. 모든 것이 실존, 내 문제라는 거예요. 사르트르도 그런 이야기했고.
수동적 존재로 향유되는 겁니다. 향유는 즐기는 거예요. 그 시대에. 만약에 쑥과 나물만 있는 동네에 어느 날 햄버거 집이 들어섰다. 그 사람은 이제는 나물 증거하다 햄버거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겠지요. 이게 요소세계에요. 물에 따라 물고기가 달라지듯이 자연환경에 의해서 인간은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서 레비나스가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남은 절대로 나를 알 수 없다. 타인은 나를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요소가 물든 세계기 때문에 바깥의 환경이 내 안에서 즐기도록 만들어낸 구성된 수동적인 결과물인데 남이 나에게 너는 이렇다고,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을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고 물어봤자 답변해봐야 그쪽이 이해 못하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계통 교회나 성당에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종교개혁 때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목사나 교단에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판정을 해야 했단 말이죠. 믿음 들고 오는 거예요. “구원받을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만히 보니 구원받을 믿음이 없네요. 이런 것 좀 하시고 더 하세요.” “가만 보니 구원받을 믿음이 있네요.” “난 합격이야.”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목사, 니가 뭔데 남의 마음을 알아요.
이것이 레비나스의 철학이 들어가면 장로나 목사 그 누구라도 내가 아는 예수나 하나님을 누구한테 검증받을 이유가 없어요. 검사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거예요. 요한일서 4장 13절에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무엇으로 안다 했느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사랑을 안다고 돼있어요. 성령 자리에 목사나 장로를 넣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 중직자를 넣으면 안 돼요. 내 믿음은 오직 나만이 알아요. 교회 가서도 남한테 눈치 보거나 지시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거예요.
“신앙인이 왜 그런 행동을 해?” “그런 잔소리하지 마라. 내 믿음으로 내가 하는데 니가 왜? 니가 뭔데.” “헌금 천 원이 뭐야?” “천원을 하던 만원을 하던 니가 왜? 너나 잘하세요. 나한테 일체 간섭하지 마.” 이게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레비나스가 너무 개인플레이 한다. 이게 무슨 윤리고. 지밖에 모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인데 어떻게 그게 성립되느냐고 나올 거예요. 여기서 레비나스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금까지 인간의 개별성 이야기했지요. 처음에 전체성, 그 다음에 익명서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요소세계 속에 있다고 했지요.
그 다음에 개별성에서 인간의 주체가 등장해요. 인간의 주체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등장하는데 이 존엄성이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신체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도 흠 잡을 게 없어요. 완벽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철학자지요. 유명한 철학자들의 특징은 논리와 논리 사이에 무리수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기발해요. 새로운 용어를 동원하면서 그전까지 몰랐던 부분을 정리해준다는 것.
신체성에서 존엄성이 오는데 요소에 대해서 인간은 수동적이죠. 레비나스는 이걸 잠으로 보는 거예요. 잠자다. 잠을 철학에 집어넣은 사람은 레비나스가 최초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예배시간이나 회의시간에 심지어 군인이 훈련받다 잠 오면 어떻게 됩니까? 잠자게 돼있지요. 내일 아무리 멋진 일이 있더라도 오늘밤에는 잠이 오지요. 만약에 잠자는 시간에 누가 목을 조른다면 내일 아름다운 계획은 무산됩니다. 잠잘 때 저항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잠의 특징은 저항이 안 된다는 것, 잠자고 있으니까. 왜 이런 중요한 요소를 빠트리느냐? 깨어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 어떻게 행동해야 되고, 남과 어떻게 관계해야 되고. 이것만 이천 년 동안 가르쳐 온 거예요.
레비나스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똑바로 보자. 인간은 신체에서 존엄성을 찾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잠잔다는 것. 잠을 잔다는 것은 철저한 수동성이다. 오는 잠을 누가 말립니까? 아무리 점잖 빼도 안 돼요. 애들 목욕시켜 보세요. 목욕탕 안에서 잠자는 데. 밥 먹으면서 자요. 잠자는 걸 교회에서 마태복음 13장에 말씀이 있는데 마귀가 와서 씨를 물어가고 하면서 깨우지만 소용없어요.
철저한 수동성에 대해서 인간은 여기서 자기만의 존엄성을 찾는데 신체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거주와 노동이에요. 잠을 통해서 극히 수동적인데 수동적 안에서 자기만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거주와 노동이다. 거주는 벽돌로 주택을 마련하는 걸 말합니다.
빈 터가 있을 때 측량하고 벽돌로 집을 짓는다면 바깥의 세계가 요소 세계고 안의 세계가 자기 존엄성 세계입니다. 자기 신체를 존엄하게 만드는 게 안에 다 들어있어요. 게임기 들어있고, 안마기도 들어있고, 여기에 가스레인지도 있고, 냉장고, 침대도 있고. 여기에 고라니 재우려고 침대가 있습니까? 들개 재우려고 침대 있어요? 침대에 누가 자기 위해서? 나잖아요. 아까 잠은 요소지요. 저항할 수 없는 요소지요. 저항할 수 없는 요소로 땅 측량하고 집 짓고 침대를 들여놓음으로써 그 다음은 내가 나를 위해서 편하게 잠을 자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인간은 극히 수동적이면서도 그 속에서 긍정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철학적 논리나 관념적인 것 필요 없다는 거예요. 몸이 자연스럽게 자기의 신체의 존엄성을 위해 만들어내는 겁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거주가 되고, 총도 마련해야 됩니다. 나무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에 밤 되면 무서워요. 겁나는 거예요. 여자들 함부로 바깥에 돌아다니면 괴기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별 개 다 나올 수 있어요.
거주가 되면 자기만의 세계고 그 다음에 노동을 하게 되면 주체가 성립됩니다. 수동에서 긍정이 되면서 개별성은 드디어 완성을 보는 거예요. 이것을 레비나스가 무슨 용어를 쓰느냐 하면, 집안에만 가만있는 게 아니죠. 세월 가죠. 일곱 살짜리가 나중에 열네 살 되고 스무 살 되고 독립할 때까지 커나가죠. 그렇게 커나갈 때 이걸 동일성. 동일성은 주체와 같은 거죠. 나는 이런 동일한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우리 집에서 열네 살까지 커왔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일곱 살의 나나 열네 살의 나나 똑같은 동일성이다. 레비나스가 동일성이란 단어를 이렇게 쓴 겁니다. 여러분이 제 강의를 따라 왔다면, 이 주체는 동일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럼 윤리는 언제 나오는 데? 윤리는 곧 나와요. 이게 기초가 돼있어야 그 다음에 윤리가 돼요.
이 동일성이 주체로서 사회에 나가게 되면 가만있는 게 아니고 노동을 하죠. 타인에 대한 꼬시기에 나서는 거예요. 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거예요. 동일성의 폭력, 폭력보다는 강제성이 작용하겠죠. 설득해서 내 고객 만드는 것이고, 설득해서 내 교회 신자로 만드는 것. 흔히 그걸 교회에서 전도라 하지요. 보험회사 건수 하나 올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교회라는 동일성에서 폭력과 강제성이 나오는 겁니다. 주체가 강화되는 거죠.
결국 이 모습은 그렇게 욕했던 국수주의를 닮았죠. 지금 레비나스가 의도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국수주의, 전체주의를 욕할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나라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데 결코 시킨 대로 한 게 아니고 사실은 국가도 하나의 요소니까 시킨 대로 한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나도 은근히 작은 전체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윤리성이란 내가 윤리를 행하기 이전에 내가 과연 윤리를 행할 수 있는 자격자인지 점검부터 들어가야 되는 거죠. 나,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해봐야 그건 자신에겐 윤리지만 남한테 피해줄 땐 화내잖아요. 담배를 실내에서 피우지 마세요. 그래 지켜야지, 하고 담배를 길거리에서 피우면, 담배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시죠. 그게 윤리에요? 자기 딴엔 뭔가 순종했지만 그게 남한테 피해 안 주겠어요?
농약 치면 농작물이 우리 몸에 해로우니까 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짓겠다. 굉장히 윤리적으로 보이죠. 값도 더 받을 수 있고. 유기농법이 자연을 해칩니다. 자연은 유기농법이든 어떤 농법이든 농사를 짓는 그 순간부터 자연에 염분이 스며들어서 자연이 훼손되게 돼있어요. 환경운동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자연을 피폐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환경운동이 자연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후손들에게 유효한 토지를 약간이나마 지연시키는 의미지 절대로 환경운동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환경운동도 자본주의 원리를 따르게 돼있어요. 자기 자신이 과연 윤리를 행할 수 있는지 이것부터 점검에 들어간 거예요. 레비나스가.
이제부터 레비나스가 왜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환영받는지 보세요. 내가 요소세계에서 나만 살기 위해서 나의 동일성, 주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제성을 동원할 때 이것 때문에 그동안 모든 윤리와 도덕은 실패로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지 말고 달리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틀려먹었단 거예요. 우리는 나쁘게 살지 말고 착하게 삽시다,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이미 동일성이 확보됐는데 착하게 살자는 게 남을 유혹하는 교묘한 수단이 되는 거예요. 윤리도덕을 빙자해서 결국 감화, 감동의 대상이 되는 내 말발에 먹혀드는 먹잇감이 되는 거예요.
그건 타인의 주체성을 해체가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신사임당이죠. 얼마나 착한 사람이에요. 신사임당이 만든 강릉의 요소가 되지 않는 대구 요소에 있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거예요. 대구에 있는 어떤 엄만가 딸한테 너는 신사임당처럼 살아야 돼. 대군대, 강릉이 아닌데. 왜 강요해, 요소가 다른데? 요소란 말을 우리가 아니까 그 윤리도덕이 먹혀들지 않음을 알지요.
그런데 오만 원짜리에 신사임당이 있으니까 우리나라 여성들이 본받아야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이게 아닌데? 아니라고 이야기할 근거는 모르겠고. 시키는 대로 하면 용돈이나 오르겠지. 레비나스가 그걸 원천적으로 다 노출시킨 거예요. 그 원리가 아니란 말이죠. 요소가 다르면 거기에 대한 동일성도 다 다르게 나오고 개성도 다르게 돼있어요.
결국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어요. 강제성으로 타인의 주체를 내 주체 안에 합류시키는 것, 이걸 동일성 확보라고 해요. 인간의 모든 노동은 저 사람을 나처럼, 부모가 자식 낳으면 자식도 아빠처럼, 자식도 엄마처럼, 이게 동일성 확보에요. 이것이 가정이란 체계입니다. 가정이란 새로운 전체주의가 등장하는 거예요. 너는 부모한테 효도해야 돼. 너는 어디 가도 아버지 명예를 더럽히면 안 돼. 이게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자기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말하는 모든 사랑이란, 동일성에 의하면 사랑이란 영역 확보에 지나지 않아요. 손가락 걸고 하지만 저것을 내가 삼키고 싶은 거예요. 정복욕, 내 것 만들고 싶은 탐욕을 교묘하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투자해온 겁니다. 레비나스가 다 밝혀요. 제발 고상한 믿음, 소망, 사랑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그 믿음, 소망,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물어보란 거예요. 그런 자격이 됩니까? 안 돼요.
교회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하니까 사랑하는~ 하고 찬송 불러봐야 그건 우리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라는 교회 전체주의에 불과하고 그것을 목사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본 거예요. 돈 내라는 말이에요. 이것이 유지돼야 돼요. 이것을 고쳐야 된다? 고치지 말아야 돼요. 왜? 못 고쳐요. 요소가 다르면 못 고쳐요.
멀쩡한 남자들 군에 가면 희한하죠. 제대하게 되면 점잖은 체하지만. 예비군복 입으면 휘파람 불고 웃기지도 않아. 요소가 달라. 내가 우리 가정에서 반듯하게 살았다는 그 동일성도 전쟁이 일어났다든지 아프리카에 보냈다든지 갑자기 난데없이 인질로 잡혔을 때는, 이 세상의 인질범을 다 죽여야 돼, 했는데 막상 본인이 인질로 잡히니까 인질범을 사랑하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심리적 현상까지 일어나잖아요. 실제로 신문사 딸이 그런 짓했잖아요.
인간은 수동성이라니까요. 물컹물컹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체는 액체다. 문제는 이 액체를 고체라고 주장하니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환경 따라 다른 말 할 수밖에 없는데. 첫째 시간 끝나기 전에 윤리를 어떻게 말하는가? 이걸 고치지 마세요. 이대로 쭉 가세요. 쉽게 말해서 막 사세요.
그런데 이걸로 인하여 피해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나는 가해자가 되죠. 피해자가 나를 소환해요. 소환하는 장소가 있어요. 아까 거주란 말 했지요. 거주를 둥글게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지평이라 합니다. 지평선 바깥에 뭔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뭔가 있어요. 하지만 지평선 때문에 안 보이죠. 저쪽에서 다가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요. 그게 지평선이에요. 바다면 수평선이 되고.
지평선 너머로 이웃이 와요. 이웃 얼굴이 말짱한 게 아니고 엉망진창 피투성이 된 온 몸으로 아픔을 견디는 괴로워하는 피해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누가 가해자에요? 바로 우리가 강력한 고체주체, 강력한 동일성의 횡포로 인하여 발생되는 피해 입은 자들의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지평선 너머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러면 윤리란 누가 하는 겁니까? 내가 하는 겁니까, 저쪽에서 요구하는 겁니까? 지평선 너머로 요구하지요. 거주에서는 모든 것이 동일성 되기 때문에 내가 다 아는 사람이죠. 넘어온 사람은 낯선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쪽은 익히 아니까. 여러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 낯선 분이라고 안 하잖아요. 대통령이 만약에 우리 집에 오면 차를 뭘 준비하지? 사전에 예상 돼있어요. 이 말은 누가 내 거주지에 와도 그 사람은 이미 나의 동일성의 범위에서 못 벗어나요. 내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을 다룰 수 있단 말입니다. 전 대통령이든 누구든 움켜쥘 수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내 것으로 정치적 타협하면 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래서는 윤리가 되지 않아요.
너 나한테 이 정도로 받았으면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지. 은혜 받았으면 보답해야지. 이 자체가 윤리적 횡포에요. 순수하게 내주는 게 아니에요. 이 정도했으면 너도 그 정도는 해야 사람이 염치가 있지. 기존의 모든 윤리는 이처럼 내가 나의 전체주의의 발산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다룰 수 없는 낯선 존재로 다가오는 데 이 모습은 뭘 동반하느냐? 그건 둘째 시간에 해봅시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