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20절(서사적 구조)170307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3장20절(서사적 구조)170307a-이 근호 목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현대사회에서 도덕적인 개혁과 건강, 윤리 또는 교육의 확대, 특히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하는 것은 구빈법이라는 것, 18~19세기부터 서양에서 본격화 되었는데, 교육의 확대, 기본적으로 국민교육이죠.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의 확대를 통해서 도덕적으로 개혁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기본질서에 대해서 순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 특히 구빈법, 빈민을 구하는 이런 것, 이게 현재 국가가 세금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이걸 해줘야 다음 차기에 선거해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고요. 그리고 요새 TV에서 음식프로그램, 건강문제, 건강을 책임지죠. 이것에 온통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죽음을 이깁니까? 이것은 살아있는 것을 연장시킬 뿐이죠.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영생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구빈법, 교육의 확대, 도덕적 개혁, 건강문제)가위표를 쳐도 상관없다고 할 때 성도죠. 내가 가난한데 국가에서 기본적인 보조금도 안 주더라고 할지라도, 나라가 나를 실망시킬지라도 상관없다고 할 때 성도라 이 말이죠. 근데 실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뭐하시노?” 이렇게 하거든요. 하나님이 살아계실 것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고 또는 교육을 못 받아서 어려울 때는 국민들에게 기본교육을 해줘야 하고 건강하지 못할 때는 국가에서 건강의료제도해서, 세금을 이렇게 부한 사람은 많이 거두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거두어서 국민의료보험체제를 하게 되면 얼마나 우리가 참, 하나님께 감사할 거냐? 이렇게 나오죠. 이제 관심사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 요한 뒤에 복음이죠. 복음이 뭐냐 하면 이게 복음이라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맛이 안 나고요. 위에서 말한 이 딴 것 없어도 괜찮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얼마나 기쁜지, 이게 되지 않는 북한 같은 나라에 가도 괜찮아요. 이게 복음이라 말이죠. 그래서 복음은 목숨보다 더 귀중하다. 근데 이 사실을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어요. 주님께서 한 말씀을 툭 던지면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러니까 내 말이, 니가 현재 관심 갖고 있고 추구하고 있고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내 목숨을 이어가는데 관심 있는 반면에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기다리고 있어요. “죽어도 상관없잖아?”라는 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기다리고 있으면 단선, 선이 하나같으면 우리는 여기에 있고 주님이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데, 주님과 만난다는 이 영생의 자리가 이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내 관심사의 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중간에 노선을 바꿔야 되겠죠. 바꿔야 된다 이 말이죠. 바꿔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바꿀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가 사는데 급급해요. 가장 기본적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막상 내 목숨이 위태로우면, ‘그래 기본적인 것은 내 생명 붙잡는 거야.’라고, 그 순간만은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툭 튀어나와요. 뭐, 교회고 하나님이고 간에 살고보자가 툭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는, 노선 바꾸는 것은 우리 식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살고보자보다 더 노골적인 것은 나만 살고보자. 단어하나 추가하면 나만 잘 살아보자. 강남에서 잘 사는 것하고, 저 못 사는 나라에서 잘 사는 것하고는 그게 수준이 달라요. 촌에서 잘 살면 그냥 이사 안 가도 되는데, 괜히 강남으로 이사 가서는 갑자기 자기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새로운 잘 살아보자가 또 새롭게 시작된다 이 말이죠. 나만 잘 살아보자가 평소에는 안 그런 것처럼 생각돼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도 챙기고, 예수님도 챙기고, 말씀대로 이웃도 챙기고 어려운 이웃도 돌볼 줄 알고, 내 양심은 괜찮은 양심이다. 이렇게 있는데, 근원적인 것이 딱 왔을 때는 일단은 나부터 살아야 남을 돕든지, 교회 가던지 할 게 아니냐?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이걸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이라고 합니다. 육, 육신이라고 이렇게 하죠. 그래서 육신을 연구하는 학문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연구하는 학문. 그리고 과학은 영생을 줍니까? 못 줍니까? 못 주죠. 아까 공부한 것을 복습해봅시다. 과학은 영생을 못 줄 뿐 아니라, 복음을 안다면 “과학 그까짓 것!” 이렇게 된다 말이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벌써 잊어버렸습니까? 나는 복음을 원해요가 아니고 복음을 안다면 “이까짓 것!”라고 포기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또 할까요? 구빈법, 교육의 확대, 도덕적 개혁, 선진 조국, 건강의료보험, 한국일보나 조선일보에 이런 것이 나오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가 여기에 있죠. 여기에. 그래서 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여기에 지혜를 모아보자는 식으로 데모도 하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노선이 이 노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선이 이 노선이 아니고 지금 다른 노선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면 될 게 아니냐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아까 이걸 육으로 본다고 했죠. 육을 공부하는 것은 과학이고요. 과학을 주님은 오류로 봅니다. 오류라고 봐요. 그럼 오류면 바로 잡아서 바른 과학을 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는데, 주님의 뜻은 오류를 통해서 영생을 이 지상에 흔적으로 남깁니다. 오류를 통해서 영생은 남기는 방식이에요. 그럼 오류를 안 통하고 제대로 진리를 전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진리 전하는 방법 자체가 없어요. 아까 언급했던 것을 다시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잖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뭘 주었느냐 하면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고 천사와 같이 된다고 했다 이 말이죠. 우리 성도를.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만들 때 천사 만들 듯이 그렇게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남성, 여성을 그렇게 주셨느냐? 과학으로서는 설명이 되지를 않아요. 남자와 여자는 염색체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전달되고, 이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식 생산에 있어서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세포 난자와 정자는 어떻게 결합해서 염색체는, 염색체는 단백질과 DNA로 되어 있어요. DNA에서 나오는 그것을 mRNA (메신저-전령알엔에이), DNA에서 이거 이거 만들어라! 한 명령을 전달해주는 알엔에이! tRNA (트랜스-운반 알엔에이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알엔에이), rRNA(리보솜알엔에이)을 통해서 거기서 아미노산과 결합하는 정보를 통해서 아미노산이 오게 되면 거기에 붙어있는 단백질이 형성이 돼서,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핵산, 이 네 가지가 모든 인간을 포함한 구성요소입니다. 단백질(프로틴), 지질, 탄수화물, 핵산.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고 연결되느냐, 그것을 따지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육이라는 겁니다. 근데 과학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육에서 뭘 내느냐 하면, 육에서 그냥 과학을 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여기서 행복을 얻고자하거든요. 이것을 과학의 유용성, 또는 공리주의 인식인데, 과학을 하는 이유가, 과학, 철학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왜 과학을 하느냐 하면 편리하기 위해서, 유용하기 위해서, 그럼 유용이 뭔데? 유용한 게 뭐냐 하면 행복한 거예요. 행복을 벤담의 공리주의에서는 유용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존 듀이, 라는 사람인데, 모든 학문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데 봉사하는 경우에만 이것이 계속해서 발전될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달에 왜 갑니까? 달에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달에 가서 지구에 문제가 있을 때 달에 이주해서, 그것도 돈이 되는 부자들만 가지만, 달에 이주할 수 있는 그 기술이 개발되면 그 다음에는 달뿐만 아니고 화성이나 목성이나 토성까지 이주할 수 있는 테크닉을 축적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축적하죠? 오늘날 왜 그 기술을 축적하죠? 번개가 쳤다, 신의 진노라고 동양과 서양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뭘 발견했습니까?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이 함께 피뢰침을 발견해서 이것은 음전기, 양전기, 구름 속에 있는 전기류의 충돌이라고 이래 보잖아요. 왜 그걸 이야기해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우박 치는 것, 뇌성 치는 것은 신의 진노다. 이게 왜 안 됩니까? 어느 쪽이 행복합니까? 아는 만큼 행복해진다는 그 생각이 주님보시기에 오류다. 이 말입니다. 오류. 그게 잘못이다. 이 말입니다. 잘못. 알겠다고 계속 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이게 모든 것이 오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과학, 기술이 오늘날 우리에게 뭘 주느냐? 돈을 가져다주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거예요. 기술이 발달되지 않으면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습니다. 기술발전이 바로 사업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거든요. 그럼 오류가 아닌 것이 뭐냐, 오류 아닌 것이 없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인 이상 “나 행복 안 할래.”라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뭘 모르느냐 하면 “니가 왜 행복해야 돼?”라는 이유는 없어요. “제가 왜 불행하면 안 되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내가 왜 지옥가면 안 됩니까? 내가 왜 지옥가면 안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를 대보세요. 지금껏 제가 공부한 어느 책에서도 거기에 대해서 정답을 말한 책은 어느 한 줄도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책 보세요. “이렇게 하시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 것은 나와요. 내가 왜 영생을 얻지 않고 지옥 불에 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한 책을 본적이 없고, 그걸 언급한 목사나 신학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신학도 오류라니까요. 진리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진리는 이야기 안 하고 진리와 나의 이익과 연관시켜서 자꾸 말을 내뱉는 거예요. 우리 좋은 게 좋죠? 좋은 게 좋으니까 이 성경에서 좋은 것 찾읍시다. 이런 쪽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출발 자체가 진리가 아니고, 나만 살고보자의 연장선이에요. 나만 살고보자의 연장선이라는 말이죠. 그럼 이것이 오류인지 아닌지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처음부터, 이미 시작부터가 너무나 우리 일방적이에요. 육을 싸고돌아요. 육을 보호하려고 한다 말이죠. 주님께서 육이라고 한다면 이거는 나쁜 의미라는 말이죠. 육으로서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해요? 육에서 영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육을 싸고도니까 주님께서는 두 개의 다른 노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게 예수를 믿든 뭐를 믿는 끝까지 육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이 노선에서 못 벗어나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그 다음에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난다는 말은 영에서 육이 나올 수가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육은 뭐로 되어있다고 했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천사로 만들면 될 텐데 뭐로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를 왜 만들었어요? 이거는 과학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여자 있습니까? 왜, 남자 있습니까? 왜, 그렇게 했는데요? 세상에! 그걸 왜 질문해요? 남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저 여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렇게 나오지, 남자로 여자로 하는 이유가 뭐냐, 천사가 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천사로 만들지, 왜 남자, 여자가 있느냐, 주께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오류, 남자, 여자를 거쳐서 우리를 천사로 만드는 겁니다. 남자, 여자 없이, 육 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천사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 여자를 거쳐서 천사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 여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그 메커니즘, 그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남성과 여성 속에,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역할이 되는 거예요. 남자로서 역할, 여자로서의 역할이 둘이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는 그 원칙을 우리는 여기에 장착하는 겁니다. 남성, 여성의 관계 속에서 그 흔적이 같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 흔적이. 남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여잔데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말 자체가 이 성경 자체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저는 남잔데 여자가 되어서 구원받을래요.”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없다?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부터 어떻게 해야 해요? “주님! 왜 저를 남자로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부터 해야 해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왜 꼭 제가 남자이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뭐냐, 육은 육 자체가 오류지만, 영되신 주님께서 그 육의 오류를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걸 사용하셔서 이 육속에서 영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오류니까 저는 탈락이죠.”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오류 안 한 사람이 없고 잘난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있어야 거기서 의가 나오지, 죄가 없는데서 의가, 의가 되는 법은 없어요. 의는 죄 안에서 핍박을 받는 방식으로, 거기서 의가 나오는 겁니다. 핍박 없는 의는 없어요. 아브라함이 여기서 오해한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할 때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고 했어요.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자기 보고 심판을 한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언약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심판하는 거예요. 이거는 마치 신약의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앞당겨서 이렇게 소돔 고모라에 가져다가 두는 겁니다. 두는데, 그 심판하는 방식이 특이해요. 뭐냐 하면 한 사람만 있어도 죄인을 그냥 다 용서하는 거예요. 이 대목을 좀 설명을 해야 돼요. 진짜 어려운 대목인데, 제가 지금 감기 걸려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목소리가 안 좋은데 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질게요. 두 가지의 질문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좀 보세요. 1. 이거는 아브라함이 이야기 한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의인 열 명이 죄인들과 함께 벌 받는 것, 이게 옳습니까?” 라고,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들었죠. 어떻게 의인 같으면 심판 안 받아야 의인인데, 의인이라고 하면서 나머지기 사람들이 벌 받는데 의인을 거기에다가 끼어들게 하면 이거는 하나님의 정당성, 하나님의 공의성, 하나님다움에 위배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그래, 열 명 빼놓고 나머지기만 심판할게. 됐냐? 이게 니 마음에 드는 공의성이냐?”라고 이래 나오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두 번째가 2. 하나님이이에요. 뭐냐 하면 “한 사람이라도 의인이면 나머지기 죄인을 용서해줄게. 나머지기를 용서해줄게.” 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어느 것이 비합리적이고, 안 그러면 둘 다 비합리적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우리 인간이 보기에 의인 열 명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놀랍게도 의인 한명이 있다고 마땅히 지옥가야 될 구천구백만 모든 죄인을 의인 한명보고 깔끔하게 용서해줘서 의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합리성이 인간에게서 뽑혀 나올 수 있을까요? 있습니까? 이게 육에서 나올 이야기입니까? 인간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요청하는데. 예수님이 나는 정당한데 쟤는 왜 나같이 천국에 갑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한을 사용 안 했어요. 오히려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어요. 이게 하늘의 생각과 땅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오류가 된 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나 살기에 급급합니까? “나 예수 믿었다. 구원받았다.” 너무 이기적이고 정말 못 돼먹었어요. 만날 예수를 자기 구원용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것은 생각도 못하고, “헤헤! 나는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신 것,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한 사람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죠. 예수님만 있어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이 원칙을, 영이거든요. 이 원칙을 어디다가 주느냐 하면 아브라함이라는 육, 아브라함 속에다가 이 원칙을 담아버립니다. 담아버리니까 나중에 아브라함이 그걸 알죠. 아! 여기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마땅히 심판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나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갖고 있는 이 두 번째 내용, 한 사람 때문에 산다는 그 내용을 위해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조카 롯을 소돔고모라에서 빼내줍니다. 빼내주고 나머지기 다 죽이잖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 중심으로써 새롭게 펼쳐지는 심판이 있게 돼요. 이 심판은 인간이 나쁜 짓해서 받는 심판이 아니고, 언약을 몰랐다는 것 때문에 심판받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언약 때문에 필히 일어나야 될 그 심판의 상대자들이 있어요. 지옥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천국만 있어서는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옥 갈 사람도 있어야 돼요. 그리고 그 지옥 갈 사람들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아주 친절한 안내자, 마귀를 붙여줘요. 그래서 절대로 이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오지 못하도록, 오게 되면 천국의 행정상에 오류가 생겨요. 오지 말아야 될 사람이 거기에 가면 안 돼요. 그래서 마귀를 붙여준 거예요. 30년 예수 믿어도 결국은 가게 만듭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1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방금 읽으신 것을 잘 들으셨죠.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죠. 이게 육의 노선이 아니고 영의 노선, 예수님 노선입니다. 예수님 노선 같으면, 방금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한 것을 그걸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취해야 될 새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한 겁니다. 가룟 유다를 선택했고, 선택한 그것은, 예수님의 작업은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협의가 된 상황이에요. 그걸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했듯이, 도덕적 개혁, 교육확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구빈법, 건강의료보험제도, 마음껏 하게 하는 거예요. 마음껏. 마음껏 거기에 관심 두고 정치고 경제고 다 관심 두게 되면, 자연적으로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을 소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참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교육도 잘 되고 건강보험 시스템도 잘 돌아가고, 어려운 사람까지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삽니다.”라고 육에 대한 자기사수, 자기보호, 지키려는 자기본능을 어떻게 합니까? 유감없이 드러내죠.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성경을 응하게 함인”거예요.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별나게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그냥 자연스럽게 주께서 성경이 응하도록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선택할 상황들이 와요.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몇 개 주고 알아서 선택하라고 하는 거예요. 천 만 개 중의 하나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요정도로 선택하게 만들어요. “그래 선택했어!” 이휘재가 만날 하는 것 있잖아요. “그래 결심했어!”라고 하는 것처럼. 이 내용 모르죠? 젊은 사람들은 모르죠. 그거 알면 진짜 오십대다. 몇 가지의 경우를 우리는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몇 가지의 경우. 어디를 보낼까? 저 점수 가지고 법대를 보낼까? 몇 가지지, 저 점수 가지고 북한으로 보낼까? 이러지는 않잖아요. 자기의 역량대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고정도로 이렇게 선택하는 겁니다. 근데 그것조차도 다 성경의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근데 이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이걸 자꾸 지키려고 해요. 이 지식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것은 좀 난해합니다. 난해하니까, 지금까지는 전혀 난해한 것이 없어요. 다 쉬운 거예요. 난해하다고 하고서 해보면 아무것도 난해한 것이 없는데 미리 난해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서사적이라는 말이 있어요. 서사 narrative, 이야기적이다. 주님의 성경은 이야기로 짜여 있습니다. 이야기의 특징은 뭐냐 마지막 이야기 끝에 가면 결론은 딱 하나로 귀착돼요. 하나로 딱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케냐에 있는 어떤 학교에서 방학을 했다는 것 하고 에스키모 인이 이번에 백곰 한 마리를 잡았다는 것 하고 전혀 상관없죠? 상관없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스토리로, 이게 전부 다 재료가 되어 모아져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다시 합시다. 서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결국에 하나로 귀결된다는 말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 하고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생이 죽을 때까지는 내 인생이 되죠. 나는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를 나왔고, 그렇게 되죠. 근데 죽었다. 끝나면 안 됩니다.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면 나를 위한 서사, 이야기가 되지, 최종적인 것은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도 있고, 또 목사님도 계시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서사가 두 개 되잖아요. 두 개 되면 최종적인 것이 아니죠. 이건호씨도 있고. 그럼 세 개 되잖아요. 반드시 최종적인 것은 몇 개? 하나죠. 하나. “성경은 창세기도 있고 출애굽기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이게 서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신학교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창세기에 두 개의 서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로힘 학파가 있고, 또 하나는 야훼 학파가 있는데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다릅니다.” 이거는 신학교마다 다 가르쳐요. 그게 가짜인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거는 서사적이라고 하지 않고 가산적이라고 합니다. 가산적. 셈하는 것. 셈하고 보태는 것. 이게 정보이론이에요. 정보이론은 계속 정보를 끌어 모으는 거예요. 끌어 모으면 뭔가 알겠지. 지금 이 사실을 가지고 제 4차 혁명시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정보시대에요. 정보. 정보의 특징은 서사적이지 않습니다. 서사적이지 않고 즉흥적이거든요. 즉흥적이기 때문에 의미라는 것이 없어요. 의미.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요. 즐기기만 하면. 가지면 되고, 즐기면 되고, 그때그때 때우면 되는 거예요. 사사적인 것과 가산적인 것의 또 하나의 예를 들게요. 딸이 한 서른이 됐다. 집에서 서서히 닦달을 하죠. 명절 때 되게 되면 “니가 나이 서른인데 나이 더 많아지면 애도 놓기 힘든데 시집가거라.” 그러면 “엄마. 내가 대학졸업하고 여태까지 회사 다니면서 죽도록 야근하고 했는데, 이번 서른 살부터는 서유럽으로 배낭여행이나 가렵니다.” 그래서 서유럽에 그렇게 많이 오는 거예요. “아니다. 시집가야 한다. 선봐라.” “안 봅니다.” “왜 안 보려고 하느냐?” “결혼 안 할 거예요.” “왜 안 해?” “결혼생활 하는 것 보면 남편 때문에 애 먹는데, 내가 왜 애를 먹어야 하는데요? 안 할 거예요.” “근데 다 그런 것이 아니다. 100개중에 1개는 그렇고 나머지 99개는 괜찮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99개가 좋으면 뭐 합니까? 1개에 척하니 걸려버리면 99개 좋은 것이 다 날아가는데요? 내가 그걸 알면서도 그걸 왜 합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정보에요. 아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의미를 미리 알고 하겠다는 거예요. 미리 알고. 근데 옛날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20대 초반 되게 되면, “야야! 저쪽에 이야기 다 돼있다. 가서 형식이니까 다방에 앉아가지고 쌍화차 시키고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니가 마음에 크게 나쁘지 않거든 날 잡자.” 그러면 “예. 어머니.” 그냥 어른이 시키는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뭐냐 그 집안의 서사에요. 그 집안의 역사고 전통이라니까요. 여자가 20대 되면 군말하지 않고 그냥 가는 거예요. 부모가 이렇게 밀어주는 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들은 그때는 정보가 누적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요새 60대들한테 시집 우에 갔습니까? 물어보면 멋도 모르고 갔다고 하죠. 멋도 모르고. 그 말이 맞아요. 정보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요. SNS도 없어요.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인터넷이 어디에 있어요? 휴대폰도 없는데? 누구 말 들어야 돼요. 이미 굵은 서사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났어요. 이제는 그 집안의 어른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조건 시집을 가야 돼요. 물론 아주 이상한 사람 같으면 안 되지만, 약간 튕기겠지만, 그래도 부모가 20대 중반 돼서 밀어주게 되면 얼추 맞으면 그냥 가야 되는 거예요. 왜? 내 뜻 30퍼센트, 부모 뜻 70퍼센트니까. 지금은 너무 정보가 범람했어요. 너무 많아졌어요. 이것저것 따지다가 서른다섯이에요. 아예 결혼 포기했다가 결혼하려고 하면 40대 후반. 나오는 것 재취자리나 이런 것. 그럼 남자는? 남자는 정보를 많이 알아서 혼자 살기는 편하다. 나이 한 40쯤 되어 심심해서 결혼할라치면 열다섯 살 연하. 그것도 돈 되는 사람만. 어떤 사람은 스물 몇 살도 있다마는. 이게 정보 가산적입니다. 서사적인 것하고 가산적인 것 하고 어느 것이 노골적이에요? 어느 것이 나 중심으로 노골적입니까? 가산적이죠. 이 정보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정보시대가. 그리고 정보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지금 20대하고 지금 10대하고 세대차이가 나요. 그들의 정보가 더하기 때문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교 2학년이 담배 피우고?” 그럼 중학교 2학년생이 뭐라고 합니까? “참, 세대차이 난다.” 요즘은 초등학생이 피우거든요. 정보가 점점 누적이 되니까, 정보로 이야기하잖아요. 얼마나 많은 정보의 지식을 가졌느냐로 대화를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약어와 새로운 용어와 단어, 언어를 막 만들어내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따지죠. 부모가 “니 그러면 안 돼.”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옛날부터 그랬어.” 이 부모는 서사를 이야기해요. “우리의 전통은 그랬고 한국 사람은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근거를 대라고 하죠. “왜 한국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근거를 대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죠. 어떤 아는 사람이 이슬람교, 파키스탄 사람하고 결혼을 했어요. 난리 났죠. 그것도 잘 사는 나라 미국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좀 좋아. 파키스탄이 뭐예요? 둘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용납이 안 됩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왜 용납이 안 됩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서사구조에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서사구조에. 정보가 아니고 서사구조에.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 나름대로의 서사가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 스토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와서 이 성경을 보면서 뭐 할라고 합니까? “뭘 하면 구원을 받지?” 자꾸 정보로, 지식으로 흡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지식으로 흡수해가지고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 믿으면 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 믿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봉사해야 돼요. 헌금도 좀 내고.” 그러면서 자꾸 잡는 거예요. 정보로 에헴! 하고 입 싹 닦으면서 구원 챙겨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정보로 또 잡는 거예요. “당신같이 그렇게 얌체처럼 믿다가는 나중에 다리 부러져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라고 이렇게 또 정보로 하는 거예요. 교회가 사업이니까 붙잡고 돈을 빼먹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어떻게 육에 속한 가산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주님만이 아는 서사적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수용하는 방식을 언급했어요. 어떻게 가산에서 서사로 넘어갈 수 있습니까? 가산, 이거는 나 중심인데, 어떻게 홀로 예수님 중심인 서사로 갈 수가 있습니까?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아까 언급을 했었어요. 그게 뭐냐, 죄를 이용하는 겁니다. 죄를 짓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 이 가산적인 것과, 가산적이라는 말은 나 구원이죠.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 구원을 확대시킵니다. 이걸 점점 더 키우는 거예요. 이걸 키우는데 동원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두제자들입니다. 열두제자. 열두제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해서 전부 다 배신했어요. 심지어 그 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잖아요. “배신해! 배신하라는 말이야!” 가룟 유다가 제자들의 대표입니까? 베드로가 대표입니까? 제가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누가 배반했을 때 와장창 제사구조가 다 무너졌습니까? 가룟 유다가 배반할 때 무너졌습니까? 베드로가 배반할 때 무너졌습니까?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의 그 중요성, 열두제자를 구축하는 그 힘의 중요성에서 어느 힘이 더 강하다? 가룟 유다가 가장 근본적인 거예요. 가룟 유다가. 가장 근본적인 가룟 유다를 누가 택했다? 주님께서 택해가지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들었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조각을 받을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떡 조각을 줬죠. 떡 조각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13장 18절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이 여자의 후손, 예수님의 발꿈치를 무는 그것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죠. 그러면 떡을 줄 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예수님이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죠. 그러면 가룟 유다나 사탄도 어디에 봉사한 겁니까? 하나의 서사구조, 예수님 중심의 서사구조에 충실하죠. 아주 착하기 그지없어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근데 중요한 것은 그걸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 의를 만들고 영생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죄를 한껏 이용하는 거예요. “물어! 물어!” 강아지 키워놓고 나를 물라는 거예요. “물어! 물어!” 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게 되면, 그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머리를, 정수리를 쳐야 되잖아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서사구조의 초기입니다. 예수님의 서사구조의 초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내야 해요. 뭐냐 하면 속으로 “목사님. 우리가 할 게 없네요.” 이런 반응이 나타나면 참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하겠지만. 우리가 할 게 없어요. 우리가 할 게 없다고 하는 이것이 안 되면 우리는 마귀에 시험 듭니다. 우리는 적어도 열두제자보다 나아져야 해요. 이미 십자가 이후에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서사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과거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발달했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게 없어요. 할 게 없는데, 아까 제가 이 사회구조가 어떻게 돌아간다고 했죠? 도덕개혁, 교육의 확대, 내 몸이 있는 이 나라에, 육신이 살기 좋은 나라에 너무 관심을 두고, 거기다가 너무 신경을 쓰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기도응답과 주님의 도와주심과 연연하다보니까, 내 쪽에서 나쁜 짓 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차단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해주게 되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그 생각. 그 생각을 너무하다보니까 점점 더 이 진리와 멀어지는 거예요. 멀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주신 그 용서를 내가 앞장서서 가리게 되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게 기억이 나는데요. 점쟁이들이 점점 더 용하다고 하잖아요. 용한 이유가 있어요. 점 보러 온 고객들이 알아서 점쟁이한테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해버려요. “부적을 붙여놨더니만 신기하게 그렇게 됐습니다.” 점쟁이는 아무소리 안 했는데 알아서 이야기해요.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기도하라는 것도 그래요. “기도해보세요.” 많이 했는데 다 응답받았다고 알아서 고백을, 간증을 해대요. 왜, 그런 고백을 하느냐 하면 그래야 자기가 목사님 앞에서 믿음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자랑질을 왜 하고 싶습니까? 바로 이런 사실, 이 서사구조를 모르고, 나름대로의 자기 신앙의 서사구조를 따로 소설을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됐다. 자기의 서사구조를 따로 만들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서사구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라고 규정해야 되겠죠. 그래서 복음으로 성경을 설명한다는 말은 니가 신앙 좋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그야말로 낱낱이 다 쳐버리는 겁니다. 겨울철 되면 “해삼~!”하고 골목에 오죠. 여러분 해삼을 한 번 사먹어 본 적이 있어요? 겨울철에 골목에 팔러 오는? 해삼 할 때 그냥 아무렇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짧은 칼을 가지고 물컹물컹한 해삼을 치잖아요. 초장 이래 있고. 해삼 안 드셔봤어요? 해삼을 친단 말이죠. 이렇게 칠 때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가 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쳐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착해서 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는 우리 식대로 가요.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10년, 20년 성경공부해도 이거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공부한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주께서 직접 쳐줘야 되는 거예요. 그럼 친 것인지 안 친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치게 되면 생각 안 한 말씀이 생각난다니까요. 그럼 말씀만 생각납니까? 아니죠. 말씀 뒤에 뭐가 있죠? 하나밖에 없는 서사구조가 생각이 나죠. ‘아!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수동적으로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구나.’라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을 내야 한다면 뭡니까? 가룟 유다는 그냥 가룟 유다 자기 할 일을 해야 돼요. 그래서 가룟 유다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지옥 갔죠. 그게 오늘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거잖아요. 내가 지옥 안 갈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왜 천국 가야 됩니까? “목사님. 천국 가고 싶습니다.” “집사님은 왜 지옥 가서는 안 되는데요? 그 이유를 저한테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보세요.” 할 말이 있나! 이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할 말이. 그렇게 박사 받고, 신학박사라고 똑똑해도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죠.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고요. “구원받고 싶어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래 나오지. 쉽게 말해서 “당신이 뭔데 구원받아야 돼요?” 구원받고 싶어서 나온 사람 중에 한 명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먼저 주님께서 찾아오셔가지고 내가 구원받고 싶은 그 충동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거예요. 가득 차있다는 것을.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이 가득 차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을 통해서 이 번지르르한 껍데기 말고, 말씀을 통해서 해삼을 쪼개면 이 안에 시커먼 것이 들어있어요. 시커먼 게.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죠. 말씀이 나쁜 것은 아닌데, 우리가 여기 있고 말씀이 들어왔다 나가면 이게 전부 다 죄가 된다고. 선하고 의로운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전부 다 죄가 돼요.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 말고, 직접 주님이 말씀가지고 들어왔다 나가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말씀이 들어왔다 나가면 우리는 벌거벗은 사람으로 드러나면서 나오는 것은 감사가 나와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감사가 나오는 것은 이미 서사구조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감사가 안 되고 나 오늘 하나 알았다가 돼버리면 정보가 하나 추가되었기 때문에 가산적 사고방식이 되는 거예요. “오늘도 하나 알았다.” 그럼 내일치 모르면 지옥 갑니까? 그럼 내일 모레치 모르고 내일 죽어버리면 탈락하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이 성경공부 할 때 그렇게 하잖아요. “이거 알아야 돼요. 몇 단계입니까? 12단계인데, 지금 5단계 왔습니다.” 그럼 내일 죽으면? 6단계, 7단계 모르면 지옥가야 되는 거예요. 그럼 12단계 끝날 때까지 살아있어야 돼요. 근데 12단계가 됐다고 칩시다. 12단계가 되면 목사는 이제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 12단계 돼서 스승님 이제 하산하겠습니다. 해가지고 하산해서 중국집에서 한바탕 붙어가지고 아버지 원수 갚을 수가 있거든요. 하산하면 안 돼요. 하산하면 교인들 뺏기고 교인들 뺏기면 돈이 안 들어온다고요. 헌금이 안 나오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제 두 번째 라운드, 12단계. 복음학교 아닙니까? 그거 복음학교 아니에요? 성경을 알면 뭐합니까? 기도 열심히 하고 실적을 나타내야지. 파키스탄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파키스탄 몇 명 더 해야지. 목사가 그거만 던지면 거기 있는 사람이 알아서 파키스탄에 전화해서 “이런 실적을 얻었습니다.” 점쟁이하고 똑같아요. 이거 부적붙이면 잘된다고 하니까 자기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억지응답을 만들어내요. 이게 목사가 교인다루는 심리입니다.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안 되는데요?” “그거는 어린애 같은 믿음이 아니라서 그래요. 순수한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믿으면 되는데,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니까 그런 응답이 안 나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있는 신자들은 그거 하나 알아요. 기도하면 응답된다. 응답될 때 그냥 응답되면 안 되고 어린애처럼 해야 응답된다. 서사적이에요? 가산적이에요? 오늘 제목을 아예 서사적이라고 해야겠어요. 가산적이에요. 또 배워야 해요. 오늘 죽으면 안 돼요. 내일치가 또 있어야 돼요. 계속 정보가 누적될 때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양적개념이에요. 질적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개념이 되는 겁니다. 아까 우리 김중우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팔자다.” 이게 서사에요. 서사. 팔자에요. 팔자. 나, 이래 살아야 돼. 이렇게 살아야 돼요. 다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사는 것을 정당화하면 안 되고 말씀이 와서 해삼처럼 쪼개게 되면 죄인으로 알게 한 것을 감사해야 돼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