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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70210a (인생브리핑)-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디도서

서울 의존교회 170210a (인생브리핑)-이 근호 목사 자, 해봅시다. 디도서 1장 3절부터 해봅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의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죠. 이 편지는요, 지중해에 그레데라는 섬이 있잖아요. 그 섬에 목회하는 디도에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누가 봐도 사람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 거예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나한테 편지를 쓴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네가 편지 쓰면 나도 편지 쓸 수가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디도서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붙이는 이유가 “니 눈에 이게 사람 글로 보이냐?”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분명히 사람이 썼는데, 이게 사람의 글이 아니고 하나님의 글이라는 도약을 해야 돼요. 편지를 받았으면, 보통 편지는 그냥 사람이 사람에게 보낸 편지로 봐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가지고 썼다고 한다면, 그 편지 가운데서 뭘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요소를 찾아내야 해요. 누구 쪽에서? 편지를 받는 쪽에서. 만약에 찾는데 실패하면 어떻게 하느냐? 실패를 한다는 것은, 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썼는데 받는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한다면 이건 애초부터 편지를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그러한 결정이 나버리죠.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편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편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이 편지를 쓴 사람과 하나님의 글이라는 느낌과 동일하게 같이 공감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공감을 하는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을 지금 제가 여기다가 쓸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이 쓰는 원칙이 어떤 원칙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 대할 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요. 하나는 성도의 반응은 뭐냐 하면 1.설명,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근데 불신자의 반응은 뭐냐 하면 2.여기에 합당한 행위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가운데서 어느 쪽이 신자 쪽이냐 하면 설명하는 1번이 성도 쪽이고, 행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2번은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대로 바뀐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데,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하시잖아요. 그러면 보탤 일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인간이,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나도 한 번 보태볼까?” 이렇게 자기가 일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에 보태버리면,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일만 있는 세상이 아니고, “저도 좀 보탰습니다.”라고 자기가 개입이 되겠죠. 그게 불신자다, 이 말입니다. 그게 불신자에요. 그럼 신자는 뭐냐 하면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게 없어요. 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머리카락 자라는 것, 시장에 가서 장보고 온 것, 목욕탕에 갔다 온 것,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럼 남는 것은 뭐만 남아요? 설명만 남아요. 설명만. 참 쉽죠잉~ 성도로 살기 참 쉽죠. 설명만 하면 돼요. 자기 일에 대해서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내가 내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어제는 주님께서 누굴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게 설명하는 거잖아요. “어제 동창생을 커피숍에서 만나도록 주께서는 꾸몄습니다.” 이래 하는 거예요. “내가 전화해서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이게 아니고. 내가 만약 동창생에게 전화해서 카페에서 만났다면 이거는 내가 원하는 행위를 내가 만들어내는 셈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지요? 그럼 같은 예를 들어봅시다. “어제는 집에 지붕에서 비가 새서 세 식구 껴안고 울었습니다. 근데 주께서 지붕이 새도록 했죠?” 이거하고, “아, 지붕이 새가지고 우리는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냥 울기만 했습니다.” 뭐 상당히 울기만 했다는 그 말의 느낌이 불만이 그득한 느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럼 제대로 하려면 “어제는 비가 왔는데 지붕이 새서 하도 사는 게 힘들어 세 식구 껴안고 엉엉 울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이게 인간 쪽에서 앞뒤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엉엉 울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감사하면 울지를 말아야지. 우는데 무슨 감사에요? 이건 억지라도 그런 억지가 없어 보이지만, 행함이 들어가면 안 되고 설명만 할 뿐이에요. “주께서 지붕이 새도록 해서 물이 떨어질 때 우리는 욱하는 마음,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생겼어?’하고 엉엉 울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금 울게 만드신 주께 감사!” 지금 말을 만들다보니까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만, “어제는 비가 왔어요. 지붕이 샜어요. 우리는 인생 서글퍼서 울게만 하는 일을 주께서 만들어주시니 오늘 얼마나 감사한지요!”이래 되는 겁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제가 이렇게 억지로 꼬이게 하겠습니까?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만드는 인생, 우리 인생은 없습니다. 주께서 만드신 인생을 우리는 남한테 소개하고 설명할 뿐이에요. 주께서 이렇게 감사할 일을 주셨고 저렇게 감사할 일을 주셨고, 설명한 뿐이고. 불신자는 뭐 어떻다, 믿습니다, 할렐루야! 백날 소리쳐 봐도,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우리가 찬양으로 응답해야지?” 이거 일 만든 거예요. “찬양으로 응답해야지, 기쁨으로 응답해야지, 이거는 주님 저 어때요? 저 괜찮은 존재죠? 괜찮은 놈이죠?”하고 아주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러면 디도서의 해석은 뭐냐, 다 나왔어요. 뭐냐 하면 설명만 해야 될 일을, 일을 만드는 사람이 있으니까, 일을 만드는 이 사람이 불신자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디도에게 편지를 보낸 편지.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그레데 섬에 교회 있지? 교회 있다는 말은 분명히 불신자가 있다는 뜻인데, 불신자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렇게 구분하라고 보낸 편지가 바로 디도서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디도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에서 다 해당이 돼요. 모든 성경에서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일단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 또는 성경을 대하는 그것이 이미 정착이 되었어요. 정착이 다 되었는데 늦게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정착해드리죠. 늦게 오신 벌로 다시 한 번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편지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담아내고 있다. 근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편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천지에, 지금, 지금 다 주어지고 있죠. 지금 주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람보고 편지를 납득하라, 설득하라, 이해하라가 아니라,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편지를 통해서 구분 짓는 겁니다. 구분 짓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 또는 다른 말로 거기에 대해서 동조하는 반응을 나타내듯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브리핑을 하는 거예요. 마치 내 인생이 아닌 것처럼. “내가 만들어낸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하는 것을 늘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뜻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만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 제 3자라고 여기고 그냥 설명하는 거예요. 키는 몇 센티미터고, 머리카락은 어떻고, 얼만 전에 염색했고, 이런 식으로 브리핑하듯이.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저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요렇게 하셨습니다.” 브리핑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고, 그게 아니고 불신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보답해야 되고 영광 돌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어떤 일을 추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건 불신자, 지옥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뭐, 하나님 모른다고 하는 이것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도 독자적인 자기영역을 따로 구축하는 사람은, 그거는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탈락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까지는 한 것이고요, 그 다음에 이제부터 문제가 굉장히 어려워져요. 어떻게 어려워지느냐 하면 용어 자체가 굉장히 그러한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진도를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1번. 모든 게 원인이 된다 하는 것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2번. 목적 있다는 것하고, 이렇게 둘로써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십니다. 근데 그 목적은 이러합니다.”라고 할 때 원인이 이러하니까 목적이 이렇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2번은 보류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원인이 된 목적은 이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이 목적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슬그머니 자기의 소망이 여기에 끼어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원인이 되시는데 목적은 이러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쉽게 말해서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그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정답이에요? 정답이 아니에요? 제가 묻는 것이 이제는 무섭죠? 혹시 틀릴까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드신 목적이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오잖아요. 분명히 맞는 이야기죠. 근데 거기에 뭔가 끼어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이 아니고 굉장히 모호한 거예요. 주되심이. 맞는 말인데 거기에 대해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봐라. 사례를 제시해봐라, 라고 하면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그럴 때는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목적을 여기 2번 목적에다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번에 차를 하나 구입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께서 원인이 되셔서 차를 샀습니다.”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딩동댕~♬ 참 잘했어요. 이거는 송해가 와도 딩동댕동~♬ 합격할 만한 그런 내용인데, 이상하게 느낌이 이상해. 마치 차를 산 것을 정당화하는 것 같아요. 앞에 무슨 핑계를 대느냐 하면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차를 샀어.” 그렇게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갈등이 안 일어나고 같이 순하게 묻혀가는 셈이 됩니다. 고거 거짓말입니다. 주의 하는 일은, 진짜 주의 하는 일이 오게 되면 우리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죄인으로 만드는 거예요. 죄인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일하십니다. 목적이 뭐냐,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럼 너는 어떤 식으로 그 목적에 들어가느냐, 나는 그 목적에 반대자로서, 이게 빠진 거예요. 이게 빠졌어요. 나는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불만덩어리고, 입 툭 튀어나오고, 그런 식으로 참여하면서 “뭐 주님이 주 되심을 위해서 하겠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인간인데 할 수 없지. 뭐.” 투덜댐. 오늘 제목은 투덜댐입니다. 뭔가 투덜거리면서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이런 게 성경 여러 군데에 나와요. “예. 주님 잘하셨습니다.” 뭔가 찬동은 아니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억지로 찬동하는 척 하면서 “예. 잘했습니다. 뭐랬어요? 잘하셨네요.” 이런 식으로. 그걸 삐짐. 이런 식으로 투덜댐.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투덜대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죠.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 같은 경우인데, 회개하니까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고, 자알~ 하셨습니다. 예~예~예~ 자알~ 하셨습니다. 나 죽으러 갑니다. 잘하셨습니다. 고국에 있을 때 이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분명히 40일 지나면 망한다고 했는데? 아이고, 자비가 넘치시네요. 자비가? 그 넘치는 자비로써 용서해준다고 했다고요? 예~예~자알~하셨습니다. 나는 삐짐.” 요나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죽겠다고 했을 때에, 박넝쿨 치우라고 죽겠다고 해놓고 박넝쿨을 치워버리니까 또 덥다고 불만, 불만 하는 겁니다. 왜, 요나의 그렇게 삐진 이야기가 그대로 노출되었을까요? 그게 오늘날 소위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요나가 하는 경우처럼 계속해서 반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원인이 되셨다, 그럼 목적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잘 되겠네? 아니요.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목적은 목적대로 이루어지되, 거기서 뭐가 나온다? 반대자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편 89편 2절에 보면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여기 주의 성실하심이 나오죠. 성실하심. 이 성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나는 성실하게 일한다.”라고 그 말을 들은 그 민족이 망해요. 왜? 성실하심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평소에 아버지의 뜻을 따랐죠. 그러면 우리의 계산에 의하면 아버지 뜻을 따랐기 때문에 끝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줄곧 갈 것이라고 여기겠죠.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주춤하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는 뭘 생각합니까? 평소에는 아버지의 뜻을 안 따랐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어요? 평소에는 내 맘대로 하다가 위급하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했고,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줄곧 내 뜻대로 한 것이 한계가 드러났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내 뜻은 철회하고 아버지의 뜻에 일임할 테니까, 아버지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느껴지잖아요. 느껴지는데,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인자에요.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의 대표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에요. 시편 8편에 보면 다윗이 자기를 보고 인자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인자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부족함, 죄성, 그리고 육신됨,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했을 때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것, 이게 전부 다 인자 안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인자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고생 받는 인자, 고난 받는 인자라고 했단 말이죠. 아버지의 뜻과 인자됨, 이게 이꼴equal(=), 같이 되려면 뭘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인자가 되면서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죄, 반발, 반역, 반항.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죽어야 되고, 인간이 그동안 마귀한테 통치를 받았던 악마성. 이 악마성이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인자됨이 완성하는 그 가운데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이게 나와야 하는 거거든요. 그럼 오늘 강의의 핵심은 뭐냐, 디도서에서 말씀을 주셨잖아요. 그럼 디도서를 해석하면서 뭐가 나와야 돼요? 요 악마성, 죄, 반발, 반역, 반항이 필히 나와 주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와 주는 해석이 돼야 돼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알지. 목적을 이룬다. 알지. 뭐? 그래서? 그건 우리가 아는 건데? 끝. 이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주께서 목적을 이루는데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내가 은근히 노렸던 목적이 거기서 실체가 들통이 나야 해요. “나는 주님을 높입니다. 나는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했을 때, 남들 보기에는 굉장히 순수해보이죠. 그러나 주님 같으면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소리를 니가 왜 하는데? 니가 뭘 노리고 뭘 얻고자 하는데? 갑자기 신앙생활이 쉬웠다고 하는 것처럼 그게 취미야? 반드시 노리는 것이 있어? 니 뭐 아쉬운 것이 있지? 8월에 집 계약하는데 집값 좀 내렸으면 하고 노리는 것이 있잖아?” 그러니까 말씀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말씀이 안 올 때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말씀이 딱 오면서 주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지만 동반해서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내 뜻을 고집하고 있는가가 수반해서 그게 들통 나고 말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즐거움이어야 해요. 그게 분통이 아니고 즐거움이어야 돼요. 그래야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을 알 게 아닙니까? 우리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죄, 반발, 반역, 반항, 악마성이 있죠.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아, 이건 어려운 질문이지만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물어보는데요. 욥이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이 믿음을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고난 받기 전에, 욥이 마귀로부터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했죠. 그럼 욥기의 그 긴긴 이야기 속에서 욥이 한결같이 믿음의 고백을 했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 긴긴 이야기 속에서. 구체적으로 불만이 없었어요? 따짐이 없었습니까? 투덜댐이 없었습니까? 막 나왔죠. 그러니까 욥기가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들어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욥이 합당한 믿음이라고 아주 규정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뭘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규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규정에, 주님께 합한 것이 자동적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착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주님은 욥이 믿음 있다고 규정해버리면, 욥이 믿음이 좋게 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돼요. 목적이 된다고 해서 이미 완성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그 목적에 부합되기 위해서 반대로 욥의 어설픔과 반발과 반항과 투덜댐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게 하는 거예요. 저는 개고기 안 좋아하거든요. 옛날 촌에서 개 잡는 것도 본 적이 있어요. 닭 잡는 것도 본 적이 있는데, 닭 내장 이런 것은 잘 안 먹잖아요. 그런데 집에서 오늘은 백숙 해먹자. 오늘은 닭 잡자. 옛날에는 닭을 잡았어요. 집에서 닭을 다 잡았거든요.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닭을 잘 잡습니다. 모가지 딱 잡아서 단칼에 치지, 누구처럼 어설프게 닭이 불쌍해서 서서히 치다가는 닭도 골병들고 고통을 당하죠. 분명히 닭 잡는 날이에요. 그럼 닭 잡는다는 원인이 있고 나중에 집에 가보면 분명히 백숙이 나와 있단 말이죠. 뭐가 생략이 되었습니까? 우리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식입장에서는? 내장을 버리는 그것이 다 생략이 되었죠. 그러면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엄마! 닭 잡는다고 해놓고 내장 없네? 온전한 백퍼센트 닭을 잡아야지? 내장은 어디 갔어? 내장까지 있어야 닭이잖아?”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은 닭고기 먹는 날이라고 하면 내장 빼고 먹는 날이에요. 주님께서 욥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팔을 걷은 거예요. “자, 함 잡아보자! 욥을 함 잡아볼까? 내가 욥이 믿음 좋다는 확신을 온 우주에다가 욥의 믿음은 대끼리다! 최고다!” 이미 성취를 했기 때문에, 그 말씀한 성취, 그걸 가지고 아까 시편 89편에 하나님의 성실함, 하나님께서 성실함으로 이루어낸다 이 말이죠. 쉽게 생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이루신다는 이 말은, 그 다음부터는 우리 속에 있는 악마성을 노출시키는 작업이 개시됐다는 이 말입니다. 개시된 겁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악마성과 반발심과 반항심이 막 나오는 겁니다. 대듦도 나오고, 삐짐도 나오고, 투덜댐도 나오고, 나 신앙생활 안 해! 이것도 나오고, 왜? 이미 성도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을, 닭은 칼로 잡지만 우리한테는 지금 뭐냐, 디도서가 있잖아요. 디도서를 가지고 주께서는 신자를 신자 되게 하고 불신자는 절대로 신자 되지 못하고 하고 불신자 되게 만듭니다. 왜? 목적이 불신자 되어야 되니까. 자, 여기서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언약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 갈래가 이게 두 갈래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뭘 받고? 복을 받고. 내 말씀을 안 지키는 자는 뭘 받고? 저주를 받고. 반드시 축복과 저주, 절대로 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노선으로 이게 갈라지는 겁니다. 디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도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잖아요. 복음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 복음. 복음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이것만 생각해요. 복음이 나한테 와서 구원받는다. 이것만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돼요. 그거는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반드시 저주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냐,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말씀을 대하면서 축복으로 가서 저주로 가면 안돼요. 저주 쪽으로 가서 축복으로 이렇게 가야 합니다. 왜? 우리 쪽에서 뭐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반항과 반발, 반역, 악마성, 죄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저주받을 짓이지 복 받을 짓이 아니에요. 천국 가서 데모할 일이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영원한 나라에 가기까지 내장 다 빼내는 거예요. 다 빼는 겁니다. 낱낱이 다 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저주성이 우리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자기한테서 이 저주성이 나온다고 해서 자기가 신자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신자 아닌 사람이에요. 이런 저주성, 반발, 반항이 나올 때, 제대로 주께서 나를 잡는구나! 잡아! 잡아요. 자, 지금까지 쭉 달려왔으니까 한 번 복습해봅시다. 하나님의 목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뭐가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내가 은근히 노리던, 슬그머니 눈치 안 채게 집어넣었던 나의 목적성이 반발이라는 이름으로, 삐짐으로, 투덜댐으로, 그것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뭐 성경보고 아무것도 생각 안 하면 될 거 아닙니까? 절대로 인간은 잠시도 자기의 꿈과 포부와 이상을 생각 안 해 본적이 없어요.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서도 항상 뜻이 있고, 심지어 남자들이 축구 게임을 보면서도 속으로 굉장히 기도를 합니다. “우리 손흥민 일본하고 붙을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골만 넣게 하옵소서.” 손흥민하고 예레미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디도서하고 관계없어요. 성경에 아무 내용도 없는데 우리는 그걸 소망하고 있다니까요. “그저 우리 애가 성적 좀 오르게 하옵소서.” 성적 오른다는 것이 어디 시편에 나옵니까? 안 나와요. 왜, 주의 뜻도 아닌데 그게 나옵니까? 나온다는 것은 그게 주께서 지금 다루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신자한테만 그래요. 신자한테만. 그렇게 다루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것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쓸데없는 것이.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로 30분 동안이나 상담을 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 분이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몸이 아플 때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다가 몸이 좀 편하니까 어디 괜찮은 남자가 없나? 하고 자꾸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몸이 아플 때는 남자고 여자고 뭐고 다 귀찮아요. 자식도 귀찮아요. 다 귀찮은데, 늘 몸이 아픈 것은 아니잖아요. 몸에 활기가 차잖아요. 그러면 뭔가 꽃놀이도 가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그렇게 해놓고 질문은 그거에요. “목사님. 제가 정상입니까? 정상 아닙니까?” 그럼 제 답변은 간단해요. 컨디션이 괜찮은 모양이죠? 일단 컨디션이 괜찮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괜찮으니까 자꾸 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플 때는 주님을 생각하다가 막상 건강하게 되면 “고맙습니다.”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은근히 노리는 것에다가 집중해서 “주여, 이 소망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 디도서가 그런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쉬워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디도서라는 내용이 뭡니까? 우리가 현재 감추고 있는 우리의 불만 요소라든지, 반항하는 요소를 디도서를 만남으로써 우리에게서 그게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굉장히 순수해 보이는 목적, 주께서 주셨잖아요? 라고 핑계대면서 주님의 목적으로 가야되는데 내 목적으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이제부터는 내 목적 안 챙기고 나는 주의 목적만 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 정말 바보에요. 왜? 주의 목적은 우리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점이에요. 주의 목적은 우리가 일을 저질러야 알아요. 한 네 살 먹은 애가 TV가 얼마나 비싼지를 몰라요. 그런데 TV를 깨봐야, 이놈의 자슥아! 이것 때문에 세달치 월급이 나가고 어떻고 엉엉 울고 하면, 아, 그게 굉장히 비싼 거였구나. 이제 알듯이. 우리가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은혜를 받으면 공짜로 무상으로 주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게 전부 다 비용처리가 되어 있어요. 전부 다 비용처리가 되어 있는 거예요. 공짜는 없어요. 다 비싼 돈 주고 산거예요. 우리는 내 인생 맘대로 산다고 하는데, 전부 다 비싼 돈 주고 산겁니다. 울산강의에서 속건제 할 때 제가 약간 언급을 했어요. 이래 봐도 우리 몸이 굉장히 비싸요. 주님의 피 하고 바꿀 정도로 굉장히 비쌉니다. 천사도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천사도 우리처럼 양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는 별로 시큰둥해요. 우리는 재벌이 더 좋지, 하나님나의 천국 가는 이런 몸이 되는 것은,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래가지고 별로 가치를 안 쳐줘요. 고물로 해봐야 얼마 받겠나? 이런 생각이 들죠. 우리 안에 귀한 피가 들어있습니다. 안에 언약이 들어있죠. 천국의 값어치만큼 귀한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온 천하를 주고도 어떻게 자기 목숨을 얻겠느냐? 우리가 주님 주신 이 생명이라는 것은 지구의 온 천하보다 값이 더 나갑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죠? 그런 사람들도 영생을 얻을 수가 없어요. 영생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에 대해서 보답 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그 무한한 값어치에 대해서 얻어터질 일만 남았지, 그걸 어떻게 보상으로? 보상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얻어터지고 난 뒤에 그 값어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놀라면서 감사할 일만 남았지, 이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겠다는 그런 철없는 짓을 해서는 안돼요.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디도서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디도서의 현실이 덮쳐질 것이고, 이게 성경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21세기가 그대로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뭐만 하면 돼요? 반항과 반발하면서 우리의 닭 내장만 줄줄이 끄집어내어지면서 주님이 이미 확정한, 규정하신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한 번 봅시다. 이래놓고 5절을 봐야 해요.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무슨 안 좋은 소문이 들렸던 모양이죠.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우와!!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도 자기 맘대로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근데 아무리 아버지가 장로로서 합당하다 할지라도 자식이 불순종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장로 사표 내라는 그 이야기에요.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럼 장로는 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자녀를 둔 자고, 또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옵니까? 감독이 있어요. 보통 이렇게 해요. 장로는 유대교인들이 있을 때는 장로라 하고 헬라교인들이 있을 때는 감독이라고 하라. 그렇게 뭐 편하게 생각하세요. 나중에 그게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만 편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7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절,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절,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도대체 몇 가지에요? 제가 볼 때는 십계명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이어서 9절에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지금 이 말을 하시면서 뭐냐 하면, 아까 배운 것 또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왔을 때는, 반드시 그것이 현재화되면 우리에게서 뭐가 나온다? 우리의 쓰레기 같은 악마성과 반발이 반드시 유출되게 되어 있다고 했죠. 그게 안 나온다면 처음부터 편지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해주셔야 해요. 자, 그러면 편지를 받았다고 칩시다. 그럼 이 편지를 받은 그레데 교인들이 딱 보면서 제일 먼저 뭘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장로는, 또는 우리 감독은 이 편지에 부합되는가를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하죠. 제일 먼저 감독 된 자 라고 나오니까 우리 감독은? 하고, 장로 된 자 라고 나오니까 우리 장로는? 이 말씀에 합하냐? 라고 하겠죠.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감독, 장로한테 준 편지입니까? 아니면 장로, 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요? 감독, 장로를 포함해서 교회 전체에 준 편지입니까? 이거는 전체에 준 편지죠. 그러면 감독, 장로가 아닌 사람들도 자기는 아니니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죠. 왜? 감시를 해야 하니까. 자, 감독님 한 번 봅시다. 구타하지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는데, 어제 보니까 감독님 가정에 아내하고 싸워가지고 뭐 울고불고, 뭐 야구방망이 들고 하는 것이 실루엣으로 다 보이던데, 하려면 불 끄고 하지 불 켜고 해서 다 알게 하고, 또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비틀거리면서, 홍도야 울지마라~♬ 악을 쓰면서 돌아다니면서, 자, 그렇게 했을 때에 그 감독을 그만두어야 해요? 아니면 본인이 교회를 그만둬야 합니까? 그렇게 평가하는 일반교인들이 그 교회를 안 가야 합니까? 어떻습니까? 참, 제가 어려운 문제를 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문제를 쉽게 내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인이 간통했습니다. 근데 신명기나 십계명에 보면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오후설교에서 했죠. 신명기 22장에서 둘 다를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돌로 쳐죽이라고 하는 것을 왜 했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의 욕정도 이스라엘 내에서는 그게 사회성으로 장착이 되어야 하고, 장착이 되지 아니하면 사회성에서 비사회성으로, 동물적인 것을 보복하는 의미에서 한 거예요. 그들이 미워서 던진 것이 아니고, 우리 이스라엘 정도가 되면 인간의 타오르는 욕구마저 율법에 딱딱 맞도록 서랍에 착착 넣어가지고 그 충동이 남한테 유발되지 않도록, 그 정도는 돼야 된다.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간음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율법이 지시한 대로 안 했기 때문에 치는 거예요. 이런 말들이 굉장히 어려워요. 나쁜 짓이라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회개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거보다 더 어려워요. 율법을 어겼다, 안 어겼다는 판단을 누가 합니까? 이게 가장 어려운 문제라니까요. 요한복음 8장에서 누가 간음을 했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저 사람은 지금 간음중이라는 것을 알았잖아요. 그럼 그 순간 뭐가 됩니까? 본인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자기는 간음을 안 하고 있다고 우길만한 것이 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을 때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법이 되고 말아요. 그게 무슨 성경입니까? 그거는 마치 뭐와 똑같으냐하면 예수님이 보험회사하고 똑같은 거예요. “혹시 차사고 나거든 전화하세요.” 보람상조하고 똑같아요. “혹시 집에 어른 돌아가시거든 전화하세요.” 보험이 매일같이 전화하지 않잖아요. 병들었을 때, 070-0000-0000하는 전화번호. 보험 들어놓고 어려울 때만 상의하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용서해주는 보험회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전화 건 사람은 가입자가 판단해서 전화하는 거예요. 자기 죄 지었을 때 십자가 찾는 것. 그거는 보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보험을 보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찾아가는 보험, 진짜 보험이에요. 안 지어도 죄를 짓게 만들어버려요. 간음죄는 간통한 여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간통했다고 그 여자를 질질 끌고 온 그들에게 간음죄를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니가 간음을 알아?” 간음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간음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간음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이제 알아야 돼요. 돌 던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그걸 알아야 돼요. 간음죄가 간음한 그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간음죄는 간음하기 전부터 모든, 방금 태어난 애들까지 그게 다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망했죠? 인간들 보기에 다 나쁜 사람들입니까? 진짜 착한 사람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의인 열 명도 없는 거예요? 우리보기에는 열 명이 넘게 있어요. 적어도 한 백만 명 중에서 의인 열 명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열 명이 없게 만드는 새로운 율법을 줘버려요. 세상에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어제 수학숙제 냈죠? 숙제 한 사람?” “선생님! 쌤요! 어제 숙제 어려웠어요.” “시끄럽고! 됐고, 어제 수학숙제 한 사람?” 진짜 수학 천재가 있어서 손들었어요. “저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수학숙제 다시 낸다. 취소.” 결국 수학숙제를 언제까지 다시 냅니까? 단 한 명도 했다고 손을 안 들 때까지. 그게 나오는 것이 없도록 숙제를 다시 내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추가적인 기능이에요. 율법이 추가되어서 추가적인 기능도 되고, 있는 율법에, 그 내용에 무지하니까 아직까지 율법의 정신을 몰라. 그래서 점점 더 율법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후설교 했잖아요. 정죄함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정죄함이 없는 이상 사함이 없어요. 마귀를 보낸 이유가 정죄함을 받게 하고, 군소리 못하게 만들고, 그런데 그런 자리에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아, 복음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내 구원을 위해서 복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 장로이야기는 의외로 어려워요. 감독, 장로한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독, 장로는 빠져나가야 해요. 감독, 장로를 쳐다보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들고 내려치려고 하는 그런 자들에게, 어쩌면 그 간통한 여인은, “간통한 여자가 나타나기만 해봐. 돌로 쳐죽임으로써 나의 정의감을 노출시킬 거야.” 하고 마음 준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간음을 공개적으로 들통 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끼어들고. 쉽게 말해서 “니들이 나를 알아? 니들이 나를 알기는 알아? 이 잘난 인간들아! 니들이 얼마나 못난 인간들인지 모르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간음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 지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이미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반항이나 악마성을 노출시킬 수가 없어요. 항상 변명으로 일관해요. “최선을 다해 노력을 다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노력중입니다. 가상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간통한 저 사람보다 안 낫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와요. 율법이 나 빼놓고 저쪽에 적용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우리가, 이 교회는 한 적이 없지만, 금요철야기도나 예배시간에 기도할 때 기도내용을 보세요. 기도내용을 가만히 보게 되면 “나를 스타로 만들어서 저 사람을 기어코 죽게 만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 밑에 깔려 있어요. 내 기도의 응답대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얼마나 우쭐돼도, 우쭐될 만한 자격자가 된다는 것이, 그게 자기 은밀한 포부입니다. 그래서 오늘 장로, 감독이야기는 뭐냐 하면 장로, 감독에 대해서 반드시 판단할 수밖에 없죠. 그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반교인들까지 포섭해서 이 말씀을 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도 감독할 사람 없고, 아무도 장로 될 사람 없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교회 꼬라지하고는, 문 닫아야 해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레데 교회 교인들아! 너그들은 교회로 보이나? 나는 교회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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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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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