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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702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9-알랭 바디우자유게시판-

201702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9-알랭 바디우
(강의:이근호 목사)

알랭 바디우 이 분이 철학 자체에 시비를 겁니다. 그동안 줄곧 수천 년 철학역사에서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철학이 존재, 있음부터 출발했다는 거예요. 있다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뭐가 배제가 되느냐 하면, 없음이 추방을 당하겠지요. 없음이 추방을 당하게 되면 있는 것부터 명칭을 붙입니다. 언어를 사용해서 명칭을 붙이게 되면 여기서 고정된 의미가 부여되겠지요. 이것은 질서가 되는 거예요. 질서는 권력으로 작용하고, 권력은 폭력을 낳고, 폭력을 낳은 권력이 과학에 와서는 지식이 되고, 이 지식들을 모아서 오늘날 현대사회를 이룬 겁니다.

이 전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특히 질서니까 안정성을 갖는 거예요. 편안한 거예요. 편안하다는 것은 아무 문제없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는데 애 다리는 부러졌는지. 뭔가 많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안 그런 척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중세에는 철학이 없으니까 신학을 집어넣으면, 철학의 이 절차를 그대로 밟는 거예요. 이걸 도그마, 교리라고 하죠. 교리는 권력을 낳고 폭력을 낳죠. 이것이 지식을 낳고. 지식에 둘러싸인 그 안에 있는 사회는 안정성을 취하게 됩니다. 안정성을 취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없음이에요. 과연 아무 문제없을까? 일방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우기는 게 아닌지 반성해봐야 된다는 거죠.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이 반대하겠지요. 철학이 그렇게 곱게 온 게 아니고 늘 반성하고 늘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자체적으로 수정하고, 그렇게 해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반대하면 알랭 바디우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한들 있음에 불과한 거예요. 있음에서 나온 제일 먼저 명칭이 뭐냐 하면,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개념에 대한 내용을 바꾸는 것. 전에는 이만큼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해서 이만큼 알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느냐, 지구가 태양을 도느냐? 이걸 수정했잖아요. 아무리 수정해고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주위를 돈다고 해봤자 태양의 있음이고 지구의 있음에서 출발했단 말이죠. 과학이라는 게.

제가 말하는 취지를 알아야 돼요. 예를 들어서 해남 시골에 80 넘은 할머니가 있다고 합시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그 지식으로 그 할머니가 행복해요? 손자가 학교에서 배웠다고 알려주면 갑자기 할머니가 행복합니까? 전혀 상관없지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는데? 이렇게 되겠지요. 지동설, 천동설이란 언어사용,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그렇구나. 역시 과학이 발달했구나, 하겠지만 언어에 관심 없는 사람은 그것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그 자체적으로 철학에 반응하는 것을 알랭 바디우는 이걸 재편한다고 해요. 백날 재편해봐야 비품 옮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있음의 끝에 나온 지식이 문제인데 이 지식에 충격을 가해야 된다. 지식에 충격을 가하는 요소가 진리라는 거예요. 그동안 지식이 진리를 가려왔다는 거예요. 지식에 충격을 가하는 수단이 있어야 되거든요. 여기에 주체가 등장해야 돼요.

알랭 바디우의 철학에 목적은, 이 세상에 안정성을 구하는 모든 지식에 대해서 주체의 새로운 작용으로, 그걸 forcing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촉성이에요. 촉구하는 것, 강하게 재촉하는 것. 주체의 촉성에 의해서 지식의 안정성을 깨는 것. 깨줘야 진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진리가 등장하려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꿔야 돼요.

사건이란 특징이 있는데 우발성입니다. 사건은 미리 예상하는 게 아니에요. 사건은 그냥 우발적으로 터지게 마련입니다. 존재의 바다에서 사건으로 되게 되면 그동안 있음에 의해서 핍박받던 없음의 것들이 새롭게 솟아나서 헛된 안정성, 가식적인, 위선적인 안정성으로 권력과 폭력 행사했던 모든 것이 충격 받고 진리로 드러나게 된다. 이게 알랭 바디우 철학의 전체적인 개략, 내용입니다.

철학의 역사가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없음을 배제시켰다. 있음은 반드시 언어로 대응되게 돼있어요. 있으니까 뭔가 이름을 붙일 게 아닙니까. 그 언어가 고정된 의미가 되어 여기서 사람들은 질서를 찾으려하는 거예요. 질서가 되면 안전성을 얻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안정성이 구체적인 권력을 유지하게 되고, 이 권력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단 말이죠.

예를 들면 북한 같은 경우가 그런 거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니면 진리가 아니에요.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수익이 나지 않으면 회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회사가 결국 뭐냐? 그들이 알고 있는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지식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식에 의해서 선과 악을 규정하게 되는 겁니다. 회사의 선은 뭡니까? 잘 되는 것. 회사의 악은 뭡니까? 망하는 것. 선과 악은 이미 지식체계로, 안정성을 깨는 게 악이고, 안정성을 유지하면 선이 되는 거예요. 조폭 세계도 마찬가지에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개인에게 손해되면 악이 되는 거죠.

이게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식이 한 개에요, 두 개에요? 사람마다 지식이 다 다르겠지요. 자기 안정성을 취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선과 악이 또 나오겠지요. 이쪽 선과 저쪽 선과의 싸움이 전쟁이라는 겁니다. 전쟁하려고 나선 사람이, 악한 일한다고 하지 않겠지요. 너희 땅을 점령해야 되는데 우리 조상이 그 땅에 있었는데 너희들이 무단 점유하고 있으니까 빨리 비켜다오. 이게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전쟁이에요.

우리나라 삼국시대나 계속 이어지는 마한, 삼한 시대도 삼국시대지만 발해나 신라, 백제, 고구려도 삼국시대거든요. 여진족 들어올 때 전쟁하는 명분이 뭐예요? 이 땅은 우리 땅이니까 여진족은 나가라, 거란족은 나라라. 이러면서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하면서 자기가 악하다고 하면서 하는 전쟁은 없습니다. 심지어 징기스칸이 전쟁할 때도 악한 전쟁이 아니에요. 목초지를 찾아서 농사를 짓는 국가는 토지가 있어야 되지만 유목민 입장에서는 계속 목초지를 찾아서 나가는 것이 선이 되는 거예요.

철학을 아무리 발달시켜도 사람들은 점점 각박해지고 자기 잘났다고 하니까 뭐가 문제인지, 철학이 발달하고 사람들 인권은 신장했는데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해답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는 입장, 뭐가 문제인지도 몰라요. 이걸 알랭 바디우가 나서서 문제는 여기 있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지식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 그래서 밤에 자기 집에 도둑이 올 때 문을 잠그지요. 도둑이 와서 집주인을 강탈하는 것도 폭력이지만 집주인이 문을 잠그는 것도 폭력이지요. 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알아서 적당히 가져가라고 해야 되는데 밤이고 낮이고 철통 같이 사수하겠다는 말은, 나는 네가 배고파 죽든 말든 내 것 조금도 줄 마음 없거든, 이 말거든요. 소극적 폭력이죠. 도둑은 적극적 폭력이라면.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발달하고 아무리 발달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지요. 특히 지식이란 아까도 언급했지요. 전쟁할 때 지식이 제일 발달하죠. 전쟁할 때 과학이 발달하잖아요. 컴퓨터부터 해서 모든 것은 전쟁용이었어요. 전쟁용이란 자기만 살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기술발달이에요.

그렇다면 철학에 이런 문제가 있다면 철학이 알아서 점검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철학은 존재에 대한 언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해결점이 없어요. 특히 지식은 계속 새로운 대상들을 만들어내니까. 갑자기 없는 데서 선풍기 만들죠. 없는 데서 자동차 만들죠. 자동차라고, 빌이라고 명칭을 붙이잖아요. 아이스크림이라고 명칭을 붙이잖아요.

명칭을 붙인다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자와 먹어보지 못한 자가 지식적으로 구분되겠지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먹어본 자들끼리는 대화가 되겠지요. 그럼 자체적으로 질서가 되고 거기서 안정성을 얻고 아이스크림 먹었다는 게 자랑 질하면 그게 권력이 되고 그걸 못 먹어본 자들은 정신적 폭력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식은 대상, 그러니까 생산된 있음인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나무, 해, 달, 별 그냥 있고 자연적 있음에다 인위적 있음을 포괄하면서 언어가 있다고 했지요. 언어는 계속해서 대상들이 플러스 되는 거예요.

철학은 어디서 시작하느냐 하면, 자동차운전 윤리가 뭐예요? 우선 자동차가 있어야 되고, 운전할 때는 양보 운전합시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양보 운전이란 윤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이미 자동차란 대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합시다, 하다가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윤리자체가 폐기처분되죠. 나중에서는 자동차 안에서 조용히 주무십시다.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고. 왜? 운전할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러면 알랭 바디우의 아이디어는 뭐냐 하면, 언어적 대상을 철폐하잔 말이죠. 대상과 대상관계만 논하자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대상을 언어로 하지 말고 숫자로 해버리자. 1. 자동차든 귤이든 낙타든 아파트든 공통적으로 숫자로 하면 ‘1’이 되겠지요. 알랭 바디우가 어려운 것을 여러분에게 쉽게 하려고 하니 힘들지만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숫자 1로 해버린다. 수학이 좋은 점이, 수학은 대상이 어쨌든 간에 굉장히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말한 폭력을 유발하고 질서를 유발하고 권력을 유발하는 자체에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수학에서는. 굉장히 냉혹하고 냉정하죠. 그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그동안 찌끼처럼 돌아다닌 윤리와 도덕이 필요치 않지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하는 그것과 회사? 숫자로 치면 1인데 하는 순간, 회사 내의 윤리도덕은 어떻게 됩니까? 없는 거예요.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윤리도덕이 사라져버린다는 말은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그 근거조차 날아가 버리죠.

알랭 바디우는 윤리도덕이 있음이 악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도덕이 있다는 자체가 그 도덕법에 걸리면 악이 되니까. 그 근거가 없어지면 악도 없어져요. 이게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람이 착한 일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사회에서 유지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부산 해운대 아파트 내에서 나는 착하다, 사하라 사막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착합니다, 하고 그 착함의 주인공은 달라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착함의 효과는 완전히 달라지지요. 해운대에서 착함은 주목하게 되고, 나중에 시의원 나오려고 하나, 국회의원 나오려고 하나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자기밖에 없는데 착함을 알아주지 않지요. 알아주지 않는 착함은 필요 없잖아요. 결국 착함이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진정한 착함이 아니에요. 남을 의식해서 자기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윤리도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지식일까요, 진리일까요? 지식이죠, 자기 안정감을 도모하니까. 자기한테 이익을 도모하니까. 자기한테 선이 되는데 현대사회에서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는 말은 남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거예요. 나만 살고보자, 뭔 뜻이 돼요? 너한테 피해가더라도 우선 살고보자. 양보 운전 미안하다. 오늘 바쁘거든. 속도 좀 낼게. 이게 나만 살고보자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자기는 사는데 전체적인 질서는 깨지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수학은 그게 가능합니까? 수학은 언어로부터 탈출해요. 사물언어 아시죠. 칠판이고 피아노고 붙이는 것. 또 언어가 있어요. 그걸 시적 언어라 합니다. 비유로 등장하는 언어. 시적 언어는 사물언어보다는 정신적으로 고차원적이겠지요. 남한테 피해를 적게 주는 거예요. 자전거, 사물언어지요. 참 예쁘다, 자전거 스타일이 좋다. 이건 시적언어지요. 자전거라 할 경우에는 누구 것이냐는 다툼이 일어나지만, 아름답다 할 때는 남의 것이라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시적언어는 모호성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해요. 모호성은 권력이 안 돼요. 사단장이 중대장에게 명령할 때 시적언어로 날립니까? 우아하게 전쟁해라. 이게 말이 돼요? 너희 부하는 어디에 매복하고, 이렇게 구체적 언어를 대야지, 이번 전쟁은 우아하게 하자. 우아하게 불 낸 사람이 로마에 네로 아닙니까. 본인은 시적인데 로마 시는 불바다 되고 기독교인들은 죽어가게 됐죠.

시적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한 거예요. <접시꽃 당신>이라고, 도정환, 시인이지만 국회의원 됐잖아요. 법적으로 다루는 국회에서 그 사람은 자기 입지가 온전하지 못합니다. 법을 다시 전공하든지 해야 돼요. 지역민들의 애로사항을 시적 언어로 법률화 시킬 수 없어요. 입법화할 수 없어요. 구체적인 법을 지정해야 돼요. 그 상황에 맞도록.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공리에요. 수학에서는 입 다물어. 무조건 맞잖아. 이게 공리에요.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것. 1+1은 결코 3이나 4가 아니에요. 이건 무조건 2가 되는 거죠. 점은 면적이 없어야 되고, 선은 단선이어야 되고, 면적은 2차원이고, 3차원은 공간적인 개념이다. 이건 수학 공리에요. 공리는 처음부터 선, 악 자체를 수용하지 않아요.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버립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이 땅에서 공리에 의거해서 살자, 이 말입니다. 공리에 의거한다는 것은, 전에는 있음이 없음을 배척했는데 수학에서는 이제는 없음이 있음을 주인공 자리에서 박탈해야 되겠지요. 공리로 살게 되면 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진리가 산출되기 때문에 그동안 지식에 우리가 휘둘린 거예요. 지식적으로 한 달 수입이 얼마야? 난 얼마야. 수입이 많아도 휘둘리는 거예요.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공리에 의해서 하라. 그렇게 하려면 나는 이렇다는 명칭과 호칭을 양보해야 됩니다. 그게 다수성입니다. 숫자 1로 치면 나는 1이 되는 거예요. 상대방도 1이 되고. 나는 대통령 되고 너는 국민이 되는 게 아니고, 나는 사장 되고 너는 과장이 아니고, 사장, 과장 빼고 1이 되는 겁니다. 복면가왕이에요. 복면 쓰고 다 떼고 그냥 노래로 승부하는 거예요.

그것이 수학만이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철학적 언어로는 안 되고 수학적 언어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게 수학이지 철학이냐고 할 때 알랭 바디우는 칸토어란 사람의 이야기부터 시작돼요. 이 사람이 최초로 집합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집합론을 끄집어낸 의미가 뭐냐? 그동안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볼 때 수로 세는 거예요. 1, 2, 3, 4 이게 셈하기거든요. 셈을 하다보면 전체가 하나의 셈이 되겠지요. 그러면 일자, 하나밖에 없는 존재, 하나로 궁극적인 정답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일자가 되면 나머진 그 밑에 서열상 굴복이 돼버립니다. 이 사회가.

그러면 일자를 없애면 어떻게 되느냐? 다수가 되죠. 동등한 똑같은 자격으로 다 들어가는 것, 다수가 될 때 이걸 기호로 표시하면 집합이 돼요. 이런 속성을 가진 것들끼리 모여. 그러면 그거는 다수가 되죠. 수학에서 다수가 되면서 칸토어란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1, 2, 3, 4, 5} 이렇게 6 이하의 자연수 집합이 되잖아요. 칸토어는 무한도 집합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무한을 생각하니까 어떤 딜레마에 빠졌어요. 무한보다 더 큰 게 뭘까, 하는. 발상이 희한하죠. 무한을 하나의 집합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무한은 +1, +1, 이런 식으로 계속 보태니까 이게 닫히질 않네.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무한을 집합으로 하니까 찝찝한 거예요. 끝이 없어, -The End-가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칸토어가 더 걱정한 것은, 1과 2 사이가 뭐가 있을까? 1.2 이런 게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도 안 돼요. 1.2와 1.3 사이에 또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칸토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한으로 설명이 될까? 이걸 연속체 가설이라 하는데, 자연수의 집합을 다뤘다칩시다. 하지만 자연수 1과 2 사이에 떠 뭐가 있는가? 실수의 집합이라 할 때 이 둘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지가 자기 생각을 못 이겨서 정신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뒤에 괴델이란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수학의 공리로써 모든 걸 증명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한 거예요. 수학은 수학 내의 공리로써 수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거예요. 이건 이성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정리한 거예요. 그걸 불확정성의 원리라 해요.

그러면 알랭 바디우는 수학으로 진리를 추구하는데 진리가 뭔지 안 나타나게 돼있어요. 왜? 진리를 모르니까. 과연 방법이 없는가? 여기서 알랭 바디우가 수학이 못한 것을 철학이 도울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미규정적인 것, 미확정적인 요소를 도입하면 되는데 이게 없음이에요. 이걸 수학에서는 공백이라 하고, 공백을 집합으로 만들면 공집합이라 합니다. { } ∅

이게 어떤 방법이냐 하면, 그동안 있음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 없음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거예요. 집어넣으면서 등장하는 게 바로 인간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없음이 있음에 들어올 때는 필히 여기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사건이 일어나면서 지식에 머무는 것에 충격을 줘서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거예요.

사건은 우발성이죠. 예를 들면 둘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지식적으로 알았는데 어떤 예상 못한 사건이 벌어지니까 남자/여자의 새로운 면이 등장했을 때 내가 알던 지식이 깨어지면서 이게 사랑인가, 하고 진리에 가깝지요. 진리는 반드시 그 절차가 사랑과 정치와 예술과 과학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중에 하나가 사랑(종교)지요. 어쨌든 진리가 등장할 때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체가 관여돼야 됩니다. 주체란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과정을 의미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는데 조금 있으면 나와요. 이것까지는 서론이에요.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으로 지식에서 진리로 옮겨갑니다. 지식은 폭력적이고 권력적이기 때문에 안 되지요. 진리로 살아야 되니까. T={1, 2} 집합에서 1과 2가 있다. 이렇게 되면 지식이 돼요. 그런데 지식을 진리로 바꾸지요. 진리로 바꿀 때 공집합, 공백, 없음이 개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없음을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겁니다.

집합에서 부분집합을 만드는 거예요. 부분집합을 만들면, 상식적으로 {1, 2} 이게 전체니까 일자가 되니까 폭력적이에요. 일자 폭력을 다수로 바꾸는 거죠. 지식을 진리로 바꾼다는 것은 일자를 다수로 바꾸어서 접근해 나가야 돼요. 그동안 철학은 모든 것이 일자 중심이고, 일자는 인간이 셈하기 때문에 생겼다. 하나하나 셈한다는 자체가 주인공 이익을 위해서, 자기 편리를 위해서, 자기 안정성을 위해서 셈하거든요. 우리 식구가 네 식구다. 강아지 두 마리. 그걸 왜 이야기해요? 이것까지는 나의 전체 집합, 총집합이 되니까. 내 것이 되고. 안정성이 되고, 질서가 되고, 권력이 되니까.

일자에서 다수가 된다면 우리 집은 두 식구다. {1}, {2}, { } 공집합이 나오고, {1, 2} 전체가 또 하나 나오고. 전체 집합에서 얼른 보면 두 개인데 막상 해보면 네 개가 나오는 거예요. 네 개가 나온다는 것은 일자, 지식으로 통하던 전체 집합이 있음에서 버티다가 갑자기 미규정적인 미정합적인 규정되지 못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 부분집합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두 개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네 개가 되니까 초과해서 이런 사실이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로 보이는 것이 어떻게 네 개로 보이느냐? 이것만 풀면 알랭 바디우 철학은 다 풀려요. 집합론 선택공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항상 언어가 아닌 공리로 이야기해요. 집합론의 선택공리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 함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 자체적으로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선택공리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일리가 있는 거예요.

대통령이 나쁘다. 대통령이 옳아. 탄핵할 만큼 나쁜 건 아니야. 탄핵해야 돼. 지금 옳다, 그름을 자체적으로 하지요. 대통령에 합당해, 합당하지 않아. 그런 가운데 그녀는 대통령임이 증명됐지요. 여기서 그녀가 대통령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대통령답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중 문제가 일단 비판할 대상이 대통령이라는 것을 누가 정했어요? 정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선택이라고 본 거예요. 선택한다는 것은 반드시 없음과 있음이란 둘을 전제로 한 거예요.

그래서 T={1, 2}에서 어떻게 네 개가 되느냐 하면, 이걸 선택공리를 집어넣어요. 선택공리를 집어넣으면 확률이 되는 겁니다. 1을 할 때는 0/1 둘 중에 1을 고른 거예요. 2를 할 때는 0/2 이 중에서 하나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0을 근거로 하니까 0은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고, 전체 {1, 2}도 여기 포함돼서 총 네 개가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한 이유가 뭐냐 하면, 뭘 선택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음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알랭 바디우의 진짜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에게 뭔가 있다, 없다 할 때 본인이 죽었으면 있다, 없다가 아무 의미 없지요. 내가 살아있으니까 선택하게 된다니까. 결국 수학의 집합론의 공리 중에 하나가 수학은 왜 존재하느냐? 뭔가 없음에서 선택해서 수학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왜 자기를 인간으로 봅니까? 나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간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라고 할 때는 be동사니까 인간이 뭘 전제로 해요? 인간이 없음을 맞은편에 설정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뭔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없음을 동반하니까 없음의 바다가 되는 거예요.

없음의 바다, 이게 진리인데 그동안 지식에서는 없음을 배척하고 있음만 갖고 했지요. 그걸 알랭 바디우는 이걸 상황이라고 해요. 알랭 바디우가 쓰는 용어 하나하나가 함축적이라서 설명하기 힘들죠. 어쨌든 간에 현재 있음의 바다를 상황이라 하는 겁니다. 상황이라 하니까 좀 반칙성 같은 걸 느끼죠. 지금까지 설명을 들어보니까.

그런데 알랭 바디우 이론에 의하면 현재 있음의 세계가 상황이죠. 인간은 일자가 아니고 다수성이니까 배운 것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셈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다. 상황의 뜻이 이거에요. 속했다. belonging, 우리말로 속함. 이것과 차이 나는 게 포함, including. 포함은 지시에 관한 거예요. 속함은 지식에 관한 거예요. 수학에서 포함이 되면 부분집합이 네 개가 돼버려요. 속함은 달랑 두 개밖에 없어요. 1과 2에서 1과 2밖에 없어요. 속함의 세계가 상황의 세계에요. 그럼 나는 상황에 속해 있지요.

알랭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상황은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던져진 존재에요. 나는 키 얼마고, 나는 부잣집에 태어나고 이걸 우리가 선택했습니까? 아니지요. 포함이 아니고 그냥 속했지요. 속했다는 것은 상황 속에 있는 겁니다.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변할 수 없고 이 안에 예속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진리에 갈 수 없고 지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동안 철학과 신학 모든 것이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지식에 머무느냐 하면, 항상 어디에 속한 그것으로 현실의 전부로 보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속했다, 넌 어디에 속했다 이걸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없음이 작용하게 되면 상황에서 상태가 돼요. 원래 번역은 상황상태라 하는데 이러면 말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일부러 상황을 지우겠습니다. 상황에서 상태로 바뀌면, 상황은 어디에 속함인 반면에 상태는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이 말을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했어요, 아니면 포함됐습니까? 포함된 분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만 속한 게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해서 언제든지 다룰 수 있는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주가 되시는 거예요.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포함된 자를 건드리면 안 돼. 왜? 포함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이기 때문에. 없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있음이 된 겁니다.

없음을 알랭 바디우는 공백, 또는 집합으로 한다면 공집합. 공집합이 그냥 있으면 안 돼요. 집합이 되서 들어와야 이 세상이 부분집합이 되면서 상황을 상태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오해한 거예요. 우리가 바꾼다는 것은 이미 속한 자가 포함된 행세를 한다는 자체가 속함에는 있을 수 없어요. 그냥 현실에 예예 할 뿐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재편할 뿐이지, 재편해서 적당하게 자기 살기 좋은 것으로 바꿀 뿐이지 이 세상을 부정하면 본인의 선택도 본인의 존재도 부정한 게 돼서 죽도 밥도 아닌 게 돼요. 이해하시겠어요,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그러면 지식에서 진리로 나가는 방법이 없네, 이런 논리가 되죠. 없는데 부단히 상황 바깥에 공백이 있죠. 없음이 부단히 충격을 가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부단히 없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없음을 무시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집에 있는데 지나가는 과객이 한 소리합니다. 이 집에 액운이 끼었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럴 때 그 사람을 우리가 초청했습니까? 초청 안 했어요. 예상 안 했지요. 사건인 거예요. 부릅니다. 액운이 끼었네요. 뭐 하나 붙이면 되겠네요. 이렇게 되면 예상 못한 현재 상황에 없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새롭게 상황이 상태로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스님 있기를 고대했어요? 아니지요. 상황에 없는 요소잖아요. 우발적으로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건이 터져버렸잖아요. 터져버린 사건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속한 인생에서 포함된 인간으로 새롭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걸 재편이 아니고 재현이라고 합니다. 상황 속에 있는 걸 현실이라 하는데 알랭 바디우의 용어가 굉장히 난해해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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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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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