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113b히13장1절(말씀으로 짠 현실)-이 근호 목사
안양20170113b히13장1절(말씀으로 짠 현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교재를 나눠드렸죠? 두 번째 시간은 녹취하기 아주 좋을 겁니다. 교재 나눠드렸으니까, 교재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할 테니까요. 이 글은 이강진 성도님이 우리교회에 올린 글인데, 글을 이렇게 읽어보게 되면 이 사람이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글을 공개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을 공개하고 온갖 욕설을 다 들을 각오를 하고 내놓기 때문에, 특히 십자가마을 같은 경우에는 그렇거든요. “나는 욕 얻어먹어도 좋습니다.”하는 그러한 기쁨으로 글을 썼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제목을 이 사람 글 중에 뽑아내서 <착한 오지랖>으로, 이 글 속에 있는 단어가 있어서 그걸 끄집어내었어요. 그리고 이미아씨가 쓴 글도 우리교회에 제목을 달아서 올렸어요. <지옥의 아랫목>이라고. 그것도 이미아씨 글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지옥의 아랫목>이라고 아주 잘 썼어요. 저는 존재의 틈, 우리고모들이 담요 덮은 이야기, 남자들은 왜 안 덮어주고 딱 자기들끼리만 덮어요. 자, 일명 착한 오지랖, 이해인의 수녀가 쓴 <종이에 손을 베고>라는 제목인데, 이해인이라는 유명한 수녀죠.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종이에 손을 베었다. 종이가 나의 손을 살짝 스쳐간 것뿐인데도 피가 난다.” 이 가벼운 종이를 내가 함부로 대했다는 그 말인데, 베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2016년을 보내면서, 얼마나 사람들을 종이처럼 우습게보고 함부로 대했던가, 이제는 내가 그 사람들한테 베일 차례다. 따라서 나는 베이더라도 오히려 베이는 그것을 통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나로 인하여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이런 취지입니다. 이강진 성도님한테 어떤 분이 이해인의 시 한편을 카톡으로 보내왔는데, 교재를 보면 “이 시 한편을 감사의 글Text message로 읽어야 하나? 아님 이해인의 시poem로 읽어야 하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영어로 Text message로 읽어야 하나, 아니면 poem으로 읽어야 하나, 라고 자기가 이렇게 정해놓고, 그 다음에 보면 뭘 또 정했느냐 하면 감사의 글로 읽으면 그냥 ‘읽기’고 이해인의 시로 읽으면 ‘읽어내기’다. 이렇게 구분을 했어요. 이게 좀 난해하죠. 제가 쉽게 구분을 해드리면, 읽기라고 하는 것은 이 글은 나한테 필요한 구절만 뽑아서 내가 교훈 얻을 것만 얻어내면 읽기가 되고, 읽어내기란 이해인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 긁어내는 것, 내 생각을 잠시 버리고 그 사람이 하는 생각으로, 그 사람 속으로 잠시 이전하는 것, 이게 읽어내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이 둘을 구분했어요. 뭐 이건 이영춘 권사님은 전문이고 잘 알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자기가 읽기와 읽어내기, 만약에 읽기라고 했을 때는 그냥 내 삶을 돌아보자고 이렇게 되지만, 읽어내기라고 한다면 과연 내가 이해인 수녀의 그 주장에 동의 할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면서 그 다음의 글을 길게 쭉 쓴 거예요. 이제 이해인을 분석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넘어갑시다. 2페이지에 보면 “그래서 나의 무심한 말에 상처 받은 자가 없었는지 먼저 반성하면서 또 반성을 한다. 그리고 자기로 인해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 여기서 모순이 있다는 거예요. 반성을, 그냥 순수하게 반성한다?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었을까? 나는 미처 몰랐는데...반성한다.” 이러고 있는데, 반성을 좀 깊이 해보려고 하는데, 분명하게,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더 깊이 있게 반성해보려고 하니까 여기서 갑자기 모순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모순 부분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2페이지 위에서 열네 번째 줄에 “나로 인하여 마음을 베인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고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 한다. 용서를 구하는데 무슨 반성을 조건으로 하느냐 말이다. 정확히는 반성이란 용서를 받은 후에 나오는 회개의 한 현상일 뿐이다. 현상은 주체가 아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깊이 있게 들어가면 우리가 공부할거리가 나오죠. 공부할거리가. 조건보고 반성을 하게 되면, 그 조건이 채워지게 되면 반성을 안 하게 되죠.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잘못한 것이 있을 때만 나쁜 사람이 되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나는 중립이 되든지 착한 사람이 되든지 그렇게 된다는 이 말이죠. 그러면 만약에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따먹으면 죄인이 아니죠. 창세기 3장 말고 창세기 2장에서. 2장에서 안 따먹으면 죄인이 아니고 따먹어서 죄인 되었으니까, 안 따먹고 있으면 뭐 의인은 아니잖아요. 그냥 무죄. 여러분 무죄하고 의인하고 다르다고 했죠? 죄가 없는 것 하고 적극적으로 “아이고, 착하다.”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착하다고 못하잖아요. 그냥 무죄, 중립상태잖아요. 아담은 의인이 아니고 무죄상태죠. 근데 요게 창세기 2장입니다. 근데 이강진씨가 보기에 우리는 창세기 2장이 아니고 3장을 넘어왔잖아요. 3장을 넘어왔으면 이 무죄상태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무죄상태가. 그러면 이해인이라는 이 수녀가, 본인이라는 존재위치의 그 상황은 창세기 3장 이후도 아니고 엉뚱하게 창세기 2장을 염두 해두고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이 말이죠. “반성은 지적받는 내용뿐이다.” 지적 안 받으면 반성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전히 나는 지적만 안 받으면 나는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반성은 내가 행하는 게 아니라 주께 지적당하면서 거저 주어지는 용서라는 하나의 현상이다. 주님의 사랑(십자가 피)이 이런 현상을 만드시고 있는 것이다.” 자, 한 번 봅시다.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 피로 먼저 사랑을 했잖아요. 주님이 사랑을 먼저 십자가 피로 했습니다. 주께서 피를 흘렸다면 나는 뭘 해도 죄인이 맞지요. 왜냐하면 그걸 알고 십자가 피를 흘렸으니까. 십자가를 앞에 본다는 말은 앞으로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해도 피 없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들의 다양성이라고 이래 보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거는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렇게 안 되죠. “반성 안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우리 집 강아지도 반성을 한다. 멀찍이 서성대거나 숨거나 하면 분명 말썽을 부려 놓은 게 있다.” 여기 개 키운 사람은 알죠? “다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용서를 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규율, 규칙, 윤리도덕, 양심 등을 법으로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강진 성도님이 볼 때 이해인 수녀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율법을 계속해서 본인이 착안하고 만들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한 개인이, 이해인 수녀가 잘했다는 문제만이 아니고, 이것을 계속 퍼 날라서 온 사람에게 전파한다는 말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인의 주장에 지금 동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납득이 되고 설득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문제 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강진씨가 참 잘 쓴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웃동네 총각을 혼자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나서 죽은 아랫동네 처녀가 있다.” 저 같으면 이래 안 해요. 이웃동네 처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아랫동네 총각이 있다고 할 텐데, 이 사람은 바꿔서 했어요. 총각이 있는데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가 있다. 이럴 때 이 총각이 반성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처녀는 총각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죽었으니 말이다. 나로 인해 상사병이 난 뭇 처녀들에게 총각은 반성과 함께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나?” 그 죽은 처녀가 혼자였다면 “아이고, 나 때문에 죽었구나.”라고 반성을 하겠는데, 그런 여자들이 그 후에 25명, 그 다음에 50명, 이거 뭐 이병헌도 아니고 장동건도 아니고, 계속 생기게 되면 “신이시여, 저는 왜 이렇게 잘생겼습니까?” 이게 자랑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마다 반성을 어떻게 해요? 주신 이 꽃미남을 어떻게 해요? 일부러 성형수술해서 추남으로 만들까요? “이 시poem에서 반성을 살펴보면 ‘반성하는 나’와 ‘반성한 나’ 그리고 ‘계속 반성할 나’가 설정되고 있다.” 이걸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평을 이렇게 했어요. 자, 4페이지 한 번 봅시다. 만약 내가 A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나는 A라고 생각 한다" 여기 반성이라는 것은 나쁜 짓 한 것 말고 스스로 논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A라고 생각 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는 다음과 같이 반성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반성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하는 그 나를 생각하고 검토 한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나를 A라고 생각하는 그런 나를 또 생각하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면 무한히 이어지겠죠. 그렇잖아요? 보통 사람은 뭐냐 하면, 이해인 같으면 두 번 가겠고, 수녀 아닌 사람은 수녀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휴! 작년 16년에는 나 때문에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 내가 반성할게.” 그러면서 한 번으로 끝나버리죠. “나는 너한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줬는데 내가 그 소식을 뒤늦게 알고 내가 반성합니다. 됐제?” 이걸로 끝나버려요. 되기는 뭐가 돼요? 보통 한 번인데, 왜 한 번이냐, 살기 바빠서 더는 생각 못하지만, 이게 해인사 중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계속 생각하겠죠. “그런 반성하는 나를 무한으로 없애야 돼.” 또 이렇게 나오겠죠. 어쨌든 저쨌든 간에 제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무한으로 끝없이 간다는 겁니다. 끝없이. 만약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잘못을 했다, 그럼 보통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잊어버리세요.” 그럼 우리는 “예. 잊어버리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후에, 한 5일 뒤에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러면 대번에 뭡니까? 잊어버렸다는 그것과 안 좋은 일과, 원인과 결과로 엮는데 도사에요. 우리가 엮는데 도사에요. ‘이거 분명히 내가 반성을 했는데? 내가 반성을 덜 했나? 내가 맨입으로 반성했나? 꿇어앉아서 기도할 것을 가지고 그냥 반성한다고 했나? 그냥 대충 때웠나? 참, 주님 그것까지 다 과외하시네. 참 힘들다. 힘들어서 못살겠다. 주님께서 그것까지 다 갈궈서 반성 제대로 안 했다고 이런 보복을 하시나?’ 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그때 내가 잘못했는데 말로만 미안하고 잘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3년 전 일이라면, 지금 1월에 일 생기면 “3년 전에 일 생겼을 때, 그때 제대로 안 했나?” 또 이래 한다니까요. (질문)“목사님.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죽였잖아요? 그 후에 나서 반성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그게 좀 헷갈리거든요?” 예, 그 이야기 해줄게요. 그거는 반성할 필요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강도짓을 할 때 강도짓 하는 것 외에는 달리 구원 할 길이 없는 거예요. 강도짓 한 것도 주의 뜻인데요. 그래서 제가 아까 평을 쓴 것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더 이상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질문)“그럼 바뀐 거네요?” 그렇죠. 주체, 객체가 꼭 나와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질문)“이해인의 주체를 안 받겠다는 말이네요?” 인간의 회개를 왜 받습니까? 하나님이 안 받죠. (질문)“아니, 이해인의 주체가 바뀌지 않고...” 이해인은 쓰레기인데 왜 거기다 신경을 써요. 쓰레기에다가? 이해인만 쓰레기가 아니고 어떤 원인을 자꾸 찾는 것이 쓰레기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A형 O형 찾지 말고, 자꾸 뭔가 지금 결과에 대해서 원인을 찾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수습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좀 더 봅시다. 3페이지 한 번 봅시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견뎌봅시다. “반성하는 나가 반성한 나로 또 앞으로도 반성해야 할 나로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런 반성을 치워버리면 나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부처의 연기법과 똑같다.” 부처의 무슨 법이다? 연기법, 모든 것은 인연으로 되어 있다. 인연이다 이 말이죠. 불교죠. “그럼 이해인 수녀는 무슨 마음으로 이 시를 쓰는 걸까? 자기 의로움이다. 즉 착한 사람 되기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늘 나를 돌아보고 내가 알지는 못했지만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까지 나는 반성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잘난 자기를 증거 한 거예요. 십자가를 가리는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착한 오지랖이다.” 착한 오지랖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 이쁜 존재를 자기행복의 바탕으로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봐! 예수 믿고 이렇게 거룩할 수 있잖아?” 그걸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되면 너희도 된다는 거예요. 그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전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착하고 싶죠? 착해서 행복 하고 싶죠? 나처럼 하면 됩니다.” 이게 과연 천주교만 그럴까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또 봅시다. “이런 자기의 착한 존재를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성은 그냥 변신하는 자아일 뿐이다. 이렇게 반성하는데도 용서를 안 해주네? 우씨~하는 나도 만들어 낸다. 나의 행위를 앞장세운 내 의가 항상 먼저 나온다. 이 순간 반성하는 나는 착한 나로 변신한다. 이게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죽어서도 못 벗어나는 존재의 구조이다. 그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떤가? 이해인 수녀나 나나 똑같다는 거다. 평생 이런 자기 존재 자랑만 하며 사는 자이다.” 이래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넘어갑시다.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이 나와요. “본래 너는 잘못된 존재임(죄인)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이 지적은 둘째 아담이 첫 아담에게서 일으키시는 사건이다.” 상당히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둘째 아담이 첫 아담에게서 일으키시는 사건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해인 이 사람은 자기를 모르는 거예요. 근데 이강진 이 분은 뭘 압니까? 내가 이해인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짓을 하면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해인보다 내가 머리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뭐냐, 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보고 지적질 하는 사건이다 이 말이죠. 성령의 역사죠. 이해인은 자기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지만, 자기 잘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겠다는 것이 천주교 이해인 쪽이고, 다른 쪽은 뭐냐 하면 절대로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하겠다는 거예요. 3페이지 맨 밑에 보면 “이 사건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다.” 이게 중요해요.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이래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이죠.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을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가 성령 받지 않아도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해인 수녀는 오늘도 반성했다고 하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는 반성하면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번 수련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성하면서 기어이 반성 잘하는 재주꾼으로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근데 이번 수련회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미 너는 죽었고”잖아요. 사람은 “죽었고”는 듣기 싫어하고 살아서 잘할게요. 계속 살아서 잘하겠다는 것으로 나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순종할게요. 말씀대로 거룩 할게요. 주의 형상 본받을게요. 자꾸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고”를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근데 이강진씨는 뭐냐 하면 이미 주님은 죽으심이라는 말이죠. 혼자 죽었어요? 우리를 껴안고 죽었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함께” 죽었어요. (질문)“그럼 목사님. 이해인 수녀가 거짓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럼 당연하죠. 그건 말할 것도 없죠. 쓰레기라니까요. 원래 지옥이라는 쓰레기통은 쓰레기를 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지옥이 있기 때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지옥에 들어갈 사람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앞잡이고 그런 거죠. (질문)“목사님. 소크라테스 지옥 갔고, 공자도 지옥 갔고...”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세요? 자꾸 그런 것에 미련 두는 것이 수상하네요? 미련두지 마세요. 기본 자체가 쓰레기인데,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기는 쓰레기 아니라고 하는데 쓰레기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서 그렇지요. 지옥은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이 왜 있어요? 쓰레기 담으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한 거예요. 쓰레기에다 이의를 달면 안 돼요. 다만 성도는 뭐냐, 왜 쓰레기인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차이점이에요. 우리 옛사람을 벗는 이유를 아는 거예요. 아, 이 땅을 빨리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겁니다. 얼쩡대지 말고. 제가 이번 수련회 하면서 노동자문제이야기 했죠? 저는 전부 다 비-계약직으로 하고 싶다고. 그럼 다른 사람은 잘 되고 우리는 죽잖아요? 그래 죽어라. 죽으면 되잖아요. 뭐 살 권리가 있습니까? 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하고 살 권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누가 권리를 줬습니까? 마귀가 준 거예요. 마귀가. 마귀가 권리를 준 거예요. 생명은 주님한테 달렸지만, 살겠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누가 준 겁니까? 마귀가 가르쳐 준 거예요. 살면서 주의 은혜인지를 모르고 지가 착해서 사는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오늘 밤에 데려가셔도, 도깨비가 와서 데려가든,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것이 주께서 힘주셔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질문)“그럼, 목사님. 만약에요 이해인한테 가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이런 사건을 주님이 일으켰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이해인 수녀가요? 그거는 개신교의 교리고, 착한 사람이니까 이단 소리 안 하고,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우리 천주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겠죠. 그 사람들은 천주교 역사를 믿기 때문에. 그리고 개신교는 이단들이에요.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가져오느냐고 하면서 돌아서서 화 낼 수도 있고 그렇죠. (질문)“근데 목사님. 만약에 안 먹히면요?” 당연히 안 먹히죠. 잘 들어보세요. 그 사람은, 수녀의 자리는 주체+권력이죠. 이 권력은 천주교거거든요. 천주교에서 호명하면 수녀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이번 수련회 때 한 공식이잖아요. (질문)“근데 목사님. 이해인 수녀가 성령을 받으면 그 권력의 자리에 주님이 올 수가 있잖아요?” 성령 받으면 자기뿐만 아니고 모든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고백하겠죠. (질문)“그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가서 이야기해줄 수도 있죠?” 이야기해줄 수도 있죠. 이야기해주지 말라고 한 뜻은 아니고, 다만 그 사람만 지목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거 남한테 멀리까지 갈 것이 없이 본인부터 지목하세요. 자, 또 교재 봅시다. “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용서(살리심)가 이루어지고” 이강진씨의 뜻이 뭐냐, 용서가 미리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회개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미리 이루어졌고, 왜 이 용서가 죽음을 통해서만 용서가 주어지는 이유를, 죄 지어가면서,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아가면서 점점 더 주님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거만 된다는 이 말이죠.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대가 됐다 이 말입니다. “예수를 챙겼죠? 이제는 착하게 사세요.” 이게 이해인하고 다를 바가 뭐냐 이 말이죠. 이 쓰레기하고, 이 이단하고, 쓰레기인 줄 알면 다행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 이 말이죠. 제가 왜 이걸 복사를 했는지 알겠습니까? 이강진 이 분은 이 글을 쓰는데 수 십 년 걸린 것 같아요. 이 글을 우리교회에 올린다는 말은 심사받을 각오를 하고 올린 거예요. 지적받으면 지적받겠다는 뜻으로 올린 거예요. 자, 또 보면 “그래서 주님에게는 법(선악)이 사랑이 된다. 왜? 그 법으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 죽으심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율법으로, 말씀으로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니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 니가 손님을 대접할 때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느냐? 차 두 잔? 더 해야지? 근데 부부싸움 하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대접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다음에 오라고 하겠죠. 그럼 그 손님이 천사라면 어떻게 해요? 천사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평생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는 즐거움을 주신다니까요. 제가 서성덕씨가 쓴 수련회 소감에 댓글을 달았죠. 수련회 소감이 세 개나 올라왔잖아요. 그 중간에 서성덕씨가 쓴 글이 있어요. 거기에 댓글을 이렇게 달았어요. 누가누가 잘하나로만 통하는 이 지옥의 경쟁마당에서 원없이 패배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 말이죠. 지는 즐거움이. 안 그러면 마귀에게 놀아나요. 히스테리 발작 일으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4페이지 맨 위에 “그 분의 죽음만이 오직 선악의 완성이고 법의 완성이고 용서이고 사랑이다. 율법을 아는 것이 곧 주께 범한 죄를 알게 된다. 죄를 아는 것이 은혜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기부인이다.” 그 다음이 중요해요. 이걸 설명해봐야 되겠어요. “샘이 물을 내는가? 물이 나는가?” 샘이 물을 냅니까?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옵니까? 그렇죠.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죠. 그러면 주님의 용서가, 은혜가, 내가 믿어야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가 죄인인 나를 통해서 더욱더 은혜 되게 하시는 겁니까? 사랑되게 했죠. 우리는 갈수록 뭐가 되어야 해요? 쓰레기가 되어야 되죠. 이게 즐거운 사람은 성도고, 이게 즐겁지 않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물을 내는 존재이던 물이 나는 존재이던 주체의 존재가 아니라 물이 나오는 기능이 주어지면서 샘이라 이름 지어진다.” 그럼 샘은 뭐냐, 내가 성도라는 것은, 내가 의인이라는 것은 주께서 나에게 용서를 끄집어냈을 때 내가 나왔던 그 뒷자리를 보면서, 나는 분명히 죄인인데 주께서는 나를 뭐로 해준다? 의인으로 해주는 거예요. 의인으로 해주고 그것을 천국이라고, 니가 죄인으로 나왔던 그 뒷자리가 천국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애가 오줌을 싸거든요. 애만 오줌을 싸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싸지만. 애가 오줌 싼 기저귀를 갈면서 엄마가 화를 냅니까? 안 그러면 기쁩니까? “아이구, 요 예쁜 것!” 하면서 토닥토닥 엉덩이 한 번 쳐주고 분 한 번 발라주잖아요. 즐겁잖아요. 스스로 못하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참, 나올 때 너무나 부모 의존적이고,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이 선악을 몰라요. 꼭 창세기 2장 같아. 나중에 크면서 맴매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선악의 분별성이 있으면서 애의 자유분방함은 다 사라지죠. 그렇게 되면 애를 또 낳고 싶어요. 이 애가 싫어요. 새로운 애를 낳아서 천국을 잠시 맛보고 싶죠. 샘이라고 이름 지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도라고 이름 지어진다는 거예요. 성도라고. 그래서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죠. 교재를 보면,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자기의 선악간 판단이 왜 잘못인지, 또 그 잘못이 왜 밝혀지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주가 주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로 이런 일을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도권이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이미 주님한테 넘어갔죠. “주님이 스스로 언약하시고 스스로 일하시고 스스로 언약을 이루시고 스스로 영광 받으신다. 거기에 우리 인간이 한자리 할 주체는 없다.” 뭐가 없다? 주체가 없어요. 주인공 역할은 없고, 주체에서 뭐로 바뀝니까? 우리는 지체로 바뀌죠. 지체지 주체가 아니에요. 이번 수련회에서는 뭐가 되느냐, 우리는 한 담요를 같이 덮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거기서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련회에서 기능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은유니, 비유니, 갈라디아서 4장에서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은유에요. “결국 이 시poem에서 반성하는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능이 아니라 반성하는 나 즉 착한 나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썼어요. 자기 그동안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한 문장에 담아서 심사해달라는 식으로 이렇게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또 덕담을 해야죠. 수련회 소감 하나씩 쓸 때마다 덕담을 쓰듯이 해야죠. 이미아 욕하지 말고, 나만 욕하지 말고 여러분들도 쓰려면 쓰시던지요. 댓글 쓴다고 누가 말릴 사람 있습니까? 목사님만 덕담하듯이 댓글 쓰십니까? 자기만 어른입니까? 이런 생각 하시는데, 어른이고 뭐고 본인이 다 쓰세요. 그렇게 모함하지 말고. 제 댓글을 보면, 샘이 물을 내나? 아니면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는가? 라는 의문은 기존의 현실 세상에서 발을 뺄만한 중요한 계기가 될 만한 명제입니다. 기존의 현실이라는 단일현실에서 발을 뺀 사람이냐, 아니면 계속 거기에 눌러 앉고 있는 사람이냐, 그걸 결정적하는 질문이 뭐냐, 샘이 물을 내나? 아니면 물이 샘을 통해서 나오는가? 그 질문입니다. 내가 남편하고 사느냐? 아니면 주께서 남편을 보내서 나를 살게 하시느냐? 뭐 이런 거죠. 항상 주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상담을 해왔어요. 멀리 미국에서 상담을 해왔는데, 남편이 10년 동안 돈을 안 번다는 거예요. 10년 동안. 그래서 계속해서 교회도 안 나가고 목사님 설교만 보고 있는데, 그저 이혼할까요? 이렇게 해요. 거기에 답변하는데 한 2초 걸렸어요. 2초. 남편보고 이혼하자고 말하세요. 차이가 있어요. 1.이혼할까요? 2.이혼하자고 말하세요. 2번, 이거는 사랑이 돼요. 1번은 미움이 되는 겁니다. 남편에게 대화를 한다는 것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혼하자고 말한다고 해가지고 이게 이혼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근데 이 분은 10년 동안 돈을 안 벌었으니까, 여자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곧 폭발할 지경이에요. 폭발할 지경일 때는 사랑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미움이 돼버려요. 이혼할까요? 말까요? 라는 말 그 전에 어떤 생각이 있었겠어요? ‘저거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보상금이나 많이 타게.’ 십년 동안 돈을 안 벌었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돈을 챙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깡패한테 맞아 죽으면 보상금도 안 나오는데, 재벌 3세한테 맞아 죽으면 보상금도 많이 나오기나 할 텐데.’ 온갖 생각을 안 하겠어요? 그 사람이 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덧붙이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할까요? 라는 말은 제발 좀 죽어줬으면 하는 다른 면이에요. 근데 이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면 이거는 죄 짓는 거죠. 죄 짓는 사람이 하나님한테 기도하면서, 나한테 상담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앞뒤가. 미워하면서도 내가 얻을 것은 얻어야 하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굉장히 나쁜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되잖아요. 그 사랑방법이 뭐냐 하면 우리 이혼하자고 말을 건네는 거예요. 왜? 말을 안 건네면 계속 미워하니까. 말을 안 건네면, ‘내가 인간성 있어서 참아주지, 다른 사람 같으면 니는 벌써 헤어졌어.’ 십년 동안 돈 한 푼 안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혼하자고 말하세요. 따라서 이혼하자고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자신이 주님 앞에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혼하는 이유가 뭐냐? 이혼하는 이유가? 첫째, 생활이 어렵다.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남편은 안 벌었지만 자기는 돈 잘 벌었거든요. 돈 잘 법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누가 이야기하기를. 돈 잘 버는 거예요. 근데 남편이 돈을 안 버니까 미운 거예요. 자기만 앵벌이 노릇했으니까. 완전히 이용당하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두 번째는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그리고 뭐가 있느냐 하면 지금도 좋다는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조건이 유부녀라는 이유 때문에 그 좋은 혼처가 막히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사람도 있고, 더 놀라운 사실은 젊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돈 되고 젊고. SES의 바다가 9살 연하하고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좋아서 입이 째져가지고. 젊은 한국 사람도 있고 외국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자, 제가 이렇게 했어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상황이네요.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받을 제 2의 행복의 시간을 주시기 위한 계기가 주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계획을 다 세우고 나니까 남편하고 이혼만 하면 돈 되고 젊고, 다 됐죠. 좋아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그 남자를 쥐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지고. 사실은 다 희망사항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갖추어놓고, 다 정리해놓고, 그 다음에 이혼하자고 이야기했어요.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잘났고, 니는 못났다가 아니라, 나도 너하고 같은 못난 입장에서 이혼하자고 하니까, 이게 주님이 주신 사랑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근데 꾹 참고 살면 누가 갑이 되고 을이 되느냐 하면, 내가 여전히 가정에서 갑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니 많이 봐줘서 산거야!” 그런데 만약에 이혼하게 되면 딸아이가 나중에 결혼할 때 결손가정이 될까봐 그게 또 아쉽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갖 것을 다 생각하는 거예요. 돈 걱정은 안 해요. 자기가 다 벌었으니까. 자기는 벌고 남편은 쓰기만 했으니까. 돈 걱정은 안하는데 다른 걱정을 하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많고, 물론 자기가 이혼하면 외롭게 살 텐데,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빨리 이혼하고 나에게로 오세요. 누나님!” 누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이 자꾸 생기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매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시간이 다 되가는데, 이것도 실생활 복음적용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다 정리해놓고, 결국은 나는 뭐 주의 뜻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이혼을 요구하는 그런 정립이 됐으면 이혼하자고 말을 하세요. “나도 별 볼 일 없는 여인입니다.”라는 정리를 해서 이혼하라고 말을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남편 쪽에서 진짜 이혼을 해주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생각이 들죠. 지금 나를 좋아하는 한국남자든, 외국남자든 오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내가 말을 잘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이혼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남편에게 이혼하게끔 이미 사전조치가 다 되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 이혼해.”라고 남편에게서 말이 나온다면, 그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끄집어낼만한 계기가 없어서 그렇지, 평소에도 자기가 남자기 때문에, 너무 미안하기 때문에, 내가 여자의 행복을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너무나 큰 자괴감으로, 짐으로 있었는데 아내가 그렇게 해주니까, 그렇게 해주자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처음부터, 진즉에 서로가 이혼하자는 말이 나왔으면 서로에게 좋을 뻔 했는데, 서로 체면 차리고,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래서는 되겠느냐? 이런 되도 않는 마귀가 쳐놓은 위신 때문에 깔끔하게 못 헤어진 거죠. 그래서 제가 말했죠. 진즉에 이혼해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래도 이혼하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딸을 생각해서 이혼은 뭐... 안 하죠.”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죠. 이건 평소에 사실은 자기 욕망이 따로 챙겨져 있는데, 그 죄를 교묘하게 감추는 방법으로 어떤 적을 만들어요. 박근혜라든지, 우병우라든지, 최순실이라든지...적을 만들어서 평소에 불만 있던 것을 전부 다 거기에다가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속을 확 풀어요. 속을 확 풀어서 “이 쳐죽일 인간들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갑이 되고 적들은 을이 돼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이유를 아시겠죠. 자, 또 그 다음 댓글을 봅시다. 이 복음이, 말씀이 하나의 사우나라니까요. 우리는 사우나실에 들어있어요. 매일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선과 악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듯이 갇힌 사태를 이해하는 길은,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조차도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 위에 보면 악마가 인간에게 다가와 선과 악 사이에 딜레마를 주고 도망쳐버렸죠. 도망친 그 자리에 인간은 선과 악의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악이 나를 사로잡아오는 거예요. 그렇죠? 모든 인간은 그걸 숨기고 있지만 그렇잖아요? 가면을 썼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과 악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그 순환에서 빼주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돼요. “즉 자기 인생에서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겁니다.” 이러한 사태에서 이해하는 길은, 빠져나오는 길은, 이런 딜레마조차도 자기 인생에서 책임지지 않는 거예요. 마치 성도님이 다음과 같은 예를 든 것처럼 말입니다. "이웃동네 총각을 혼자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나서 죽은 아랫동네 처녀가 있다. 이럴 때 이 시의 내용처럼 적용을 해 본다면 그 총각은 무슨 반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처녀는 총각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죽었으니 말이다. 나로 인해 상사병이 난 뭇 처녀들에게 총각은 반성과 함께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나?" 그렇다면 자살한 이웃처녀를 나라고 보자 이 말이죠. 그리고 자살한 이웃처녀가 흠모한 이웃총각을 나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가 붙잡고 있는 현재의 잘난 나 때문에 누가 괴로워요? 내가 스스로 바보같이, 등신같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그걸 못 지켜 줄까봐. 내가 생각하는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그 모습을 내가 못 지키고, 또 잘못해서 또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처럼 못해서 또 나를 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책임을 누가 져요? 본인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하니까, 이걸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마귀가?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요. 마세요가 아니라 마요. 왜냐하면 뒤돌아보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임의로 만든 주님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은유니까. 마치 구원받은 강도가 강도짓을 해야 하는 그것 외에는 달리 구원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육체에 속한 자가 있고, 성령에 속한 자가 있는데 한 번 찾아볼까요? 갈라디아서 4장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있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구의 자식이냐 성령의 자식이죠. 그럼 책임은 누가 집니까? 성령이 알아서 지겠죠. 성령으로 난 자식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는 것은, 이건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이 아니고 육체를 따라 난 자식이에요. 왜? 육체는 육체 외에 믿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본인의 어머니에요.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의 뭐다? 우리의 마덜Mother이죠. 우리의 어머니라. 자식은 어머니의 관리 하에 있고 책임 하에 있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았다, 강도짓 안 했으면? 안 했으면 구원 못 받죠. 그러면 내가 강도짓 한 것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이 한 둘입니까? 사도바울은 몇 명 죽였어요? 한두 명 죽인 줄 알아요? 스데반 집사님은 누가 죽였습니까? 사도바울이 죽인 것하고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책임자니까. 책임자가 깡패 시켜서 죽였잖아요. 돌 들고 선동해서. 그러면 사도바울이 매일같이 양심에 가책이 돼서 아무 일도 못했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거예요. 우리는 이걸 안다고 해서 앞으로 깨끗하고 괜찮은 미래를 생각하는데, 미래를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는 구원받았으면 이 말씀의 사우나탕, 이 제목 외에는 달리 적당한 것이 없는데, 이 말씀의 사우나탕에서 또 무슨 이웃집하고 다투고, 세금문제, 차문제, 부부싸움, 부딪치는 일들이 계속 생겨날 거예요. 그럴 때, 이해인 수녀가 안 되면 되는 겁니다. 반성 필요 없고, 아휴! 나라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어. 나는 내 체면을 위해서 살고, 위신과 체면을 양보할 생각이 없고, 나는 남한테 갑질하고 싶고, 그렇게 성질 떽떽 부리고, 그렇게 자기 딴에는 착하다고 하지만 그 착한 것 다 갉아먹고, 이것이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자신의 기능의 발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구조 안에서, 폐쇄된 구조 안에서, 갇힌 구조 안에서 성도를 통해서 언약의 피만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 지킬 때에 현실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주의 말씀으로 이렇게 장착, 구성해놓으시고, 마련해놓으신 것을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