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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겨울수련회-골로새서(복음의생산)(총9강)(강의정리)-재정리자유게시판골로새서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 1강 [장소 없는 장소]
강의 : 이근호 목사, 정리 : 한윤범 목사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어디에서나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늘 주의 품안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습니다. 다시 흩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얼굴보다 주님의 얼굴을 더 사모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말씀으로 주셨기에, 의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기에, 이 말씀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있고 영생을 받고 있는가를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 수련회 강의는 골로새서인데, 이 골로새서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상당히 난감한 대목이 있어요. 여기서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죽었고 !!
1절과 2절을 보면 상당히 간단한데, 위를 쳐다보고 살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다음 3절이 문제가 됩니다. 쳐다보면 되는데 그게 어떤 상태라는 겁니까? 살아있는 상태로 쳐다보면 일반적인 종교와 별반 차별이 없어요. 그런데 3절은 이렇게 돼있어요.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합니다. 아니 죽은 자가 무엇을 쳐다봅니까? 살아있는 상태가 되어야 쳐다본다는 것이 성립되는데 말이죠.
그냥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을 빼고 1절과 2절, 즉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뒤의 말씀은, "우리는 살았어. 그러니 산 사람답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자. 이게 신앙생활이구나" 라고, 그렇게 간편하게 모든 게 정리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네의 상식은 죽은 자는 쳐다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바짝 마른 뼈다귀가 무엇을 쳐다봅니까? 흙이 된 상태에서 말이죠. 여기에 분명히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라고 돼있거든요. 그렇지요?
여기서 난처한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죽었다면,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생명이 있는 곳에서 다시 지상을 내려다보든지 해야합니다. 그런데 생명이 있는 곳은 이 땅에는 없잖아요? 하늘에 생명이 있다니까, 하늘에서 다시 이 땅에 내려다봐야 될 입장이죠. 그리고 "우리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1절과 2절은 쉽게 넘어가다가,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에 그만 덜커덕 걸리는 거예요. "너희는 살았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에 있으니까 위를 쳐다봐라" 라고 해야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그런데 왜 여기에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을 구태여 집어넣느냐는 겁니다. 살았다고 해도 앞뒤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죽었다는 것을 반드시 넣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가 그냥 편하게 생각하게 될 때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죠.
'단일현실'이 아닌, '다중현실' !!
첫 번째 강의제목은 이렇게 정했는데, '장소 없는 장소' 라고 말이죠. 말이 좀 어렵습니까? 장소 없는 장소라는 것은 현실이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골로새서를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는 말이죠.
단일현실에 있으면서 자기 딴에 신앙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다른 현실에서 "너는 신자가 아냐" 라고 해버린다면, 단일현실에서 자기가 신앙인인 척을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중현실 속에서도, 즉 어디에서나 신앙인으로, 또는 성도로서 확인돼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동안 우리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그래서 죽으면 나는 저 하늘에 간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죠.
'외재성'이 아닌, 바깥 !!
그러면 우리는 단일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하늘을 쳐다보니까 하나님은 여기 하늘에 계시죠.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 있는데, 그것을 '외재성' 이라 합니다. 외재성이란 말은, 자기가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봤을 때 바깥에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외재성' 이라는 것과 '바깥' 이란 말과는 차이가 나요. 바깥은 연결이 되지 않은,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기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껏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연결돼있는 외재성밖에 없는데, 그런데 바깥이란 것은 끊어진 상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바깥이 있기에, 현실적으론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니까 말이죠. 만약에 살았다고 하면 "내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가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즉 "나는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내가 생각한다. 이 세계 말고 다른 바깥 세계가 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한다면 이미 여기 죽은 입장에서는 바깥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다중현실이 되게 되면, 여기에 살고, 그리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었다" 라는 것이 새로운 현실로서 새롭게 성립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아토포스(a-topos) !!
예를 들면, '아토포스(a-topos)' 라는 말이 있어요. 여기서 'topos'는 '장소' 라는 의미이고, 'a'는 '아니요' 라는 부정의 의미인데, 이것을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非)-장소'가 됩니다. 최근 들어서 이 말이 유명해졌는데, 정유라가 들어갔다는 이화여대의 시험문제에 이게 나왔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게 헬라철학에서 사용하던 말인데, 장소 없는 장소가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형식은 단일현실에서 통하는 형식을 가져오되 동반해서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형식은 똑같아요. 형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나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붙잡으려면 "그런 뜻이 아니거든"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라고 할 때, "재림은 어디에 옵니까?" 라고 묻는다고 하면,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재림은 하지만, "어디에 옵니까?" 라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이유가, 단일현실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재림을 해버리니 말이죠. 그러면 재림의 공간개념은 날아가고, 기다림만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재림을 어떤 장소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현실에 있는고 하면, "예수를 믿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정말로 살기 싫다.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싶다" 라고 하게 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다른 곳에 살 데가 없다. 너희가 힘들다고 하는 그곳이 천국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다중인데, 즉 포개져있다는 말이죠.
다중현실에서는 단어를 공유하기에 !!
그렇게 A와 B라는 층이 포개져있다면, A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단어가 따로 있고, B라는 것이 따로 있어야 될 텐데, 그런데 다중현실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현실이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를 공유해서 함께 사용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편하게 주고받는 그 단어가 주님한테는 왜곡되어서 전혀 맞지 않은 단어가 돼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거룩' 이라는 것인데, 구약에서 거룩은 흠도 티도 오염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중현실에서 거룩은 분리된 것인데, 그러니 이게 서로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단일현실이에요. 이스라엘에서 구원은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인데,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다윗의 왕국을 이루면, 그게 복을 받는 거예요. 야곱이 아버지한테 빌미를 바쳤더니만 양이 늘어나는 것이 축복인데, 이게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박국서에 가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AI조류독감으로 닭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따라서 복을 받아놓고도 복을 받았다고 하는, 즉 양이 늘어난다든지 소가 늘어난다든지 하는, 그런 증거물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하박국서에 들어가면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넘어가는 입장에 있기에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단일현실에 살면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손에 쥐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대로, "골로새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골로새서에 대해서 손을 뗀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감히 보고 살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왜 몰랐느냐 하면, 구약에서 용어가 나오는 그 환경과, 신약에 나오는 용어의 환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구약은 단일현실이고 신약은 다중현실인데, 그것을 미처 간파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십자가와 보혜사 !!
그러면 그 다중현실이 우리가 사는 현실 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즉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라고 중첩이 되면, 뭔가 들어왔던 구멍이 있을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 구멍이 바로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빠져나가고, 그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서만 보혜사가 들어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길은 없는데, 다른 계약서가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계약상대자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더러워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 계약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예수님만을, 즉 자기 아들만을 계약상대자로 인정해서 계약을 체결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구원받는 모든 언약은 어디를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갔다가 성령이 들어오신 그 구멍만 주목하는데, 그 내용만 계약이지 다른 것은 계약으로 성립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구멍을 통해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바깥세상이 이 구멍을 통해서 이미 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중현실이 되면 우리는 헷갈리잖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재림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에 불 심판이 되면 전부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의 눈에 익었던 것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라고 하는 것들이 모두 다 날아가 버려요. 지구가 왕창 불에 다 타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두 다 타버리면 주님의 영광된 나라가 그제야 드러나죠.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바뀌다가,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게 되면 온전한 단일현실로 드러나고 마는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는 힘이 들더라도 좀 참으세요. 우리는 그렇게 참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보려면, 계약 안에 들어가야 볼 수가 있는데, 계약 바깥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는데, 그러면 성령이 무엇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일현실 속에 다중현실로 살았던 그 안목, 그 관점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관점' 인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 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점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 수입이 더 늘어나는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세상을 보되 다중현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죠. 그렇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고, 거기에 대해서 열두 제자 중에서 들을 귀가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죠. 그렇게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장소 없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게 되면, 다중현실, 즉 내부와 연결된 외재성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뚱맞은 거예요. 바깥을 그냥 알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성립되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상상하는 세계가 아닌, 우리는 상상할 자격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단일현실과 같이 죽어야 될 그 몸과 마음과 생각들 속에서,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던 천국이라는 상상의 세계, 그런 유토피아는 헛방이고 거짓말이라는 말이죠. 그런 세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것은 연결된 외재성이니까, 그러니 살아있는 우리가 그냥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면, 그 이불 속에서 상상의 천국이 보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소주를 마시든지 해서, 그렇게 힘들 때 자기가 상상하는 세계, 별자리처럼 말씀들이 끼어있는 세계, 요한계시록 21장이 마구 연상이 되는 세계, 하지만 그것이 모두 다 헛방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상상할 때, 자기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은 골로새서 3장 3절과 다르단 말이죠. 우리는 살아있다는 말을 자신한테 적용시킬 수 없어요. 물론 죽었다는 말도 적용시킬 수 없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죽었음과 살았음을 예수님의 다중현실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종교가 되어버린 현대 물리학 !!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다중현실 안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외재성이 아니고 바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지는고 하니, 이것을 숫자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1은 2지요. 1+0+1, 이것도 역시 2지요. 이것을 보통 우리는 같다고 생각하데, 그렇지요? 그런데 같지가 않다는 말이죠.
그 안에는 '0'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물리학자들이 간파를 했어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밑이 있는데, 그 밑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 라는 것을, 창세기에서 나와야할 그 이야기가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언급한다는 말이죠.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는 겁니다.
하여튼 과학자들은 고민인데, 분명히 뭔가 있거든요. 컵이 있는데, 이것을 잘라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잘라봤어요. 분자, 원자, 다 잘라봤어요. 잘라보고 잘라봐도, 그래도 끝까지 남아있는 입자가 있어요. 그러면 이것을 또 잘라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젠 자를 칼이 없는데, 너무 작아서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멈출 인간들이 아닌데, "입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라고 하면서 비전문가들이 마구 물어대는 겁니다.
그러면 답변을 해야될 텐데, 어디서 나왔다고 이야기해야 될 텐데,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때부터 과학이 아니고 완전히 종교가 돼버립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구 뿜어내기를 시작합니다. 끈이 있어서 그 끈이 진동을 하는데, 1초 10의 42승으로 빠르게 진동하면 뭔가 나온다고, 그렇게 온갖 짓들을 다 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이야기는 뭐냐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1 밑에 0이 깔려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을 것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현대과학이라는 종교가 내세우는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겁니다.
"그냥 살대로 살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두 다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인생에 실패했다고 해서 애닮아 할 필요가 뭐가 있어?" 라고 하면서, 상당히 종교적인 냄새를 많이 풍기지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죠.
현대는, 과학만이 유일한 종교 !!
요새 유행하는 종교는 과학밖에 없는데, 과학만이 유일한 종교예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모든 학문은 과학이 밑바탕 돼서 나오는 겁니다. 과학적이 아니면 미신이라고 유포되는 입장에서 과학만이 최종진리인데, 그 과학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생겨났다" 라고 하는데, 그 생겨나는 과정을 교재에 써놨는데, 그 교재는 여러분의 선택사항입니다. 보면 보고 말면 말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디에서 나왔느냐?" 라는 것을 언급하거든요. 그 언급이 우리가 하는 질문과는 달라요. "그것이 여기 있다" 라는 것과,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이 서로 같지 않아요. "그것이 여기 있다" 라고 하면 지명할 수 있지만,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 라는 말은, 여기에 '내가' 라는 것이 들어가면 답변이 안 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먼저 있고, 자기가 어디서 나왔는가는 묻혀서 들어가는데, 그러면 해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보는지, 그것은 욥기에 해답이 나오는데, 10장 5절입니다.
(욥 10:5)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욥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데, 욥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여기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다중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여기에 태어났잖아요. 주님의 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장차 주님께서 나 욥처럼 이렇게 산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 욥을 먼저 이 땅에 보내서 인생을 살도록 했잖아요. 그렇게 주님을 증거하라고 살게 하셨으면,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저의 죄를 다 찾아내려고 저를 괴롭히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어 !!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집중해서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자연을 이기지를 못해요. 대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인간 쪽에서 자연을 헤쳐가면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면, 이것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이 자연을 못 이긴다는 말은, 배고플 때 밥을 먹어야 되고, 잠을 잘 때는 자야만 합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충동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이것은 진다는 뜻이죠.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돈을 밝히고, 남한테 욕하고 싶을 때는 그것을 참아낼 재주가 없어요. 그러니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자연한테 늘 굴복을 당하면서 말이죠. 자연도 이기지를 못하면서 무슨 거룩한 생활을 한다하느냐는 말이죠. 그런 일은 없다는 겁니다.
자연을 이기기 못한다는 말은, 그러면 자연한테 지면 되는데, 자연에게 복속이 되면 말이죠. 그런데 다중현실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이중자연, 즉 자연 속에 갇혀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자연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연과 자연 사이의 만남에 의해서 특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이 바로 '인간' 이라는 겁니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동물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묻는다는 거예요. 이게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특이한 점이라는 겁니다. 다같이 자연 속에 주눅이 들어서, 비가 안 오면 농사도 못 짓고 몸이 아프면 죽어야 하는데, 그러니 어떻게 자연을 이깁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느냐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아까 어떤 분이 저한테 "목사님, 오면서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라고 했는데, 달리 말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솔직히 주님이 우리 속에 있는 기쁨보다도, 날씨가 좋은 기쁨이 더욱 좋아요. 이게 인간이잖아요. 습도도 괜찮고 온도도 괜찮으면, 갑자기 성령을 안 받아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그냥 마구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 자신을 속입니까? 자연한테 못 이기는데 말이죠. 집안에 치매에 걸린 어른이 있으면 온유와 화평이 나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거기에다가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해대고, 서로가 일방적인 이야기를 해요. 마치 촛불집회와 반대집회의 모습 같은데, 서로가 무슨 말하는지도 몰라요. 이쪽은 이쪽 이야기를 하고, 저쪽은 저쪽 이야기를 하고 말이죠.
자연은, 즉 동물이나 짐승은 그냥 순응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도 같이 주눅이 들어서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인간은 말을 합니다. "나는 누구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천국은 어디에 있지? 지옥이 있기는 있겠어?" 라고,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특이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죠. 거기에 '우리' 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하지만 다중현실에서의 '우리' 라는 것은 그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한, 바로 그 새로운 '우리' 라는 겁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새로운 '우리' !!
'나' 라는 것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을 '나'를 살리는 우리가 아니고, '나'는 일단 죽음에서 끝나버려요. 단일현실 속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쪽 세계, 즉 예수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요. "저를 넣어주세요,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 자체가 원초적으로 박탈된 상태에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입 다물고 있어.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거야" 라고,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빽을 쓴다든지, 어떻게 할 수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 언약이란 것은, 모든 인간을 제쳐버리고, 그 언약 자리에 예수님이 단독으로 선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자기가 살며시 뒤로 가서 같이 서면 안 돼요. 살을 빼려고 75를 기대하고 저울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90까지 올라가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다른 사람이 발을 올려서 눈금이 확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자리에 우리가 슬쩍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죠(ㅋㅋ).
주께서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은 없어요. 오히려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냐!" 라고 하시는데,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 관계에는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신앙생활, 헌금, 이런 것은 다 헛방인데, 해도 소용이 없는 짓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동안 교회에 가서 헛짓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원초적으로 그런 것을 주님께서 받아준 적이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런 것이 없어도 왜 자꾸 하느냐 하면, 남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누가 말인가요? 자기 자신이 말이죠. 왜 그런가요? 그것은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단일현실로 생각해서, 바깥을 생각해야 되는데, 그런데 외재성을 자꾸 생각해요.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가는 나라가 여기서부터 연결이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끊어졌는데, 하지만 자기가 상상하는 그 세계, 즉 유토피아를 천국이라고 여기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
그 이유가 나중에 나오는데,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현재에 있는 단일자연과 새로운 자연이 오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그 충돌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은 단일현실에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으로 주어지는 기다림의 나라이지, 회개할 필요가 없어요. 하늘나라를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 물 속에 들어가서 죽을 필요는 없단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가서 죽는다고 하면,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요. 살아있어야 반갑게 얼싸 안으면서 "주님, 기다렸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고생을 많이 했다" 라고 하시면서 쓰다듬어줄 텐데, 그런데 주님이 오셨는데 왜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갑니까?
그러니 세례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 심판의 나라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자연이 있다. 단일현실이 있다. 이것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겠지"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심판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생각하는 그 심판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겠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심판하고 있어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그 심판으로 남들도 심판하고 평가하고 판단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심판하는 당사자는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 아냐, 믿음이 나빠"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 좋고 나쁜, 그런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자기는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는 조건아래에서 나쁘고 옳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네가 뭔데, 네가 뭘 알고 판단해?" 라고 하시면서 우리 자신을 없애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바르게 살아서 구원을 받겠다는 당사자가 그만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면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 속에서 기다리자 !!
이것을 세례요한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물 속에 모두 다 들어가!" 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단목욕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물 속에 들어가서 기다린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물 속에 '풍덩' 하고 같이 뛰어든 분이 계시기 때문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실 심판의 나라는, 물론 심판이란 용어를 같이 쓰지만 단일현실에서 쓰는 심판과 다중현실에서 쓰는 심판의 개념이 달라요. 다중현실의 심판은, 오직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아들만 알고 있는 심판 개념입니다. 열두 제자도 몰라요. 그래서 맨 날 그들이 오해를 한다는 말이죠.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럴 때마다 "인자는 죽어야 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살아서 구원을 받으면 누가 높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방향이 달라요. "나는 죽어야 하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자연과 자연의 충돌에서 낯선 특수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늘 이야기하기를,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는 것이 완성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인데, 그렇게 그분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살하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죽이는 주체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주체세력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 그 당시 자연세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우겼던 자들인데, 그들이 이스라엘인데 말이죠. 바로 그들이 특수한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일반성에 치고, 보편성에 치고 !!
이것을 두고 '일반성' 이라고 하는데, 이 일반성의 반대말은 개별성이고,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예수님은 특별한 개별자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인간은 어디에 속하게 됩니까? 일반적인 것에 속하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보편성은 서로 달랐는데 같은 것, 즉 촛불집회처럼 말이죠. 서로 직업이 다른데 박근혜 퇴진을 같이 요구하는 것은 보편성이고, 그런데 일반성은 반대죠. 서로 같은데 외양적인 모습은 모두 달라요. 일반성이라는 것은 모습은 달라도 생각은 하나이고, 보편성은 직업은 다른데 생각은 같다는 겁니다. 둘 다 똑같은데 "사건이냐? 사물이냐?" 라는 것을 설명할 때, 이렇게 바꿔서 설명을 한다는 말이죠.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성에 치고, 보편성에 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약자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일반성이나 보편성은 어떤 역할을 하냐 하면, 계약에 도움을 줘요. "죽여라. 우리는 살아 마땅하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은 살아 마땅하고, 반면에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계약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다중현실은 이렇게 형식을 기존 것에서 차용하여 동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바깥 현실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 현실을 포착할 언어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언어를 차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뜻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결하고 충돌한다는 말이죠.
우리 기도합시다 !!
예를 들면, "우리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일반현실에서 기도하자는 것은, 기도하는 행위자가 원인자가 되어서 기도의 결과가 응답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은 누구죠? 기도하는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즉 기도하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결과물로서 응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반적인 기도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 우리 인간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는 그 기도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거예요. 마치 가룟 유다가 없이는 예수님이 팔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해줘야 주님은 계속 우리 손에 죽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공로자인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의 시작점을 우리로 꼽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렇게 예수님을 욕 되게 한다면 차라리 그런 기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일반성과 보편성에서 허락도 없이 빠질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갑자기 500미터 앞에서 교통경찰이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주여, 살려주옵소서" 라고 대번 기도하게 만들어 버려요(ㅋㅋ). 기도를 하지 않고 싶어도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일어난다든지, 발을 삔다든지, 하여튼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결혼식 주례를 맡았는데 차가 밀려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때, "주여, 빠른 길로 가게 하옵소서" 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통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고 싶어도, 기어이 간절하게 목숨을 거는 기도를 하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한 몫을 하도록, 그렇게 주께서 선하게 인도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말이죠.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 라는 것이 아닌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라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이상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도 못한 이상한 일들이 우리한테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벌어진 일이 주와 관련된 일임을 어떻게 아는고 하면, 그것은 그 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어떤 원인 제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뭔가 일이 벌어졌을 때, 이전에는 자기가 기도하고 헌금해서 얻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가면 갈수록 자기 행함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같이 있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분이 원인자가 되어서 자기는 그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게 욥기에 나온다는 말이죠.
두 개의 현실 !!
이것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단일현실, 다중현실, 이렇게 두 개의 현실, 또는 자연관이 두 개가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이기지 못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겼다고 자꾸 우기지 마세요. 우리는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호된 맛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자연 속에 갇혀 있는데, 우리는 그냥 자연이 시키는 대로 끌려갈 뿐이죠. 자기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는데, 날씨가 좋다든지 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같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자연, 즉 새로운 현실을 몰고 오게 되면, 그러면 몰고 왔다는 소문은 분명히 났는데, 그런데 막상 등장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달랑 예수님 몸 하나라는 겁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말이죠.
분명히 세례요한도 요란을 떨었는데, 하늘나라가 닥쳐서 불 세례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것이 허풍인지 몰라도 조용하다는 말이죠. 그게 얼마나 조용했으면,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물었어요. "오실 분이 당신이 맞기는 맞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이 기껏 알고 있는 현실이란 것은, 천국에서는, 성령 안에서는 어린아이보다 더 못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다중현실이 아니고 단일현실인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거든요. 세례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에서 불이 마구 떨어지게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러니 세례요한은 이 불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중현실과 기존의 현실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다는 말이죠. 물론 공통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우리도 불이 붙는다는 것을 아는데, 그러나 지옥 불은 주님만이 알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이죠.
외롭고, 힘없고, 연약하고 !!
방금 이야기한 것을 공식으로 만들어 볼게요. 여기에 예수님만 달랑 왔어요. 조용해요. 새로운 현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외롭고, 그리고 맥없이 힘없이, 욕을 하면 욕을 먹고, 귀싸대기를 때리면 그대로 다 얻어맞고, 그리고 옷을 빼앗겨도 가만히 있고 말이죠.
물론 큰소리를 치기는 하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천군 천사가 내려온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그러면 그렇게 해봐라" 라고 하면, 사실 우리는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고 싶은데, 그런데 천군 천사들이 내려오지 않아요. 고린도후서에서는(?) 이것을 "주님께서 연약해서 돌아가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들이 무엇을 놓쳤느냐 하면, 이것이 사건이 된다는 것, 즉 새로운 자연이 오면 예수님의 움직임 자체가 그만 사건이 돼버려요. 그렇게 사건이 되면 어떤 의미가 붙느냐 하면, 그게 요한계시록 11장에 있거든요.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모든 것이 '사건' 중심으로 !!
여기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소 없는 장소가 돼버렸어요. 단일현실에 있는 모든 장소가 다중현실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그것도 예수님이 죽었던 사건 중심으로 재정비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새롭게 정렬이 되는데, 모든 사건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느 특정 장소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복음으로 욕을 얻어먹는 그 장소가 곧 소돔이고 애굽이고, 그리고 갈보리 언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갈보리 언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갈보리 언덕이 구원받는 장소인 동시에 소돔이 되는 장소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주의 복음으로 고난을 받으면, 성도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게 다중현실 속에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씀이 사건화가 되어서, 그게 예수님과 똑같은데 말이죠. 그렇게 새로운 성경적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너는 방금 갈보리를 건드렸어. 이게 대전이 아니고 애굽이야. 소돔과 고모라야"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위치의 연합 = 주체+권력 !!이것을 공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공식이라고 하면 여러분이 어려워하는데, 그래도 다들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해보겠습니다. 존재의 연합이 현실이 아니고, 이게 위치의 연합인데, 즉 "위치의 연합=주체+권력",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다중현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사건 안으로 들어가면 공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위치=주체+권력"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권력은 성령이고, 그리고 주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 이전 인간은 주체가 아닌 신체에서 나온 자아인데, 이 자아는 자연에 속한 것으로,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속하는 게 아니고 기존의 여기에 속한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공식, 즉 "위치=주체+권력" 라는 것에서, 여기에서 "나는 뭐냐?" 라고 하면, 권력에서 새로운 주체로 호명을 받을 때, 그것이 '위치'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공식은 심지어 멸망을 당할 이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의 위치는 누군가가 나를 김 과장님, 박 과장님이라고 주체로 불러줄 때 나의 새로운 주체로써, 위치로써, 내 나름대로 이 세상에 모습을 보여준다" 라는 겁니다.
저 사람은 유명한 등산가야 !!
예를 들어서, 엄홍길이 산에 올라갔는데,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나는 에베레스트에 갔다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엄홍길이 무려 8000미터가 넘는 산을 16개나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것을 '16좌'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나도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고 싶은데, 용감하게 갔다온 사람이 어디 없을까?" 라고 했을 때, "없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라고 하게 되면, 엄홍길은 그만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겁니다. 즉 "저 사람은 유명한 등산가야"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평소에 우리는 단일현실에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계속해서 받아왔고, 특히 부모로부터 그런 양육을 쉴 사이도 없이 받아왔다는 겁니다. "너, 공부를 못하면 나중에 커서 거지가 되고 마는 거야. 거지라도 좋아? 그러니 제발 공부를 좀 해라" 라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속했다는 겁니까? 현재 단일현실 속에 일부가 되는 거예요. 현실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자연이 움직이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냥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김 권사님이라고 교회에서 불러주잖아요. 그러면 '나' 라는 것은 교회에서 권사라는 주체를 확립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체니까 그것이 곧 '나' 라는 겁니다. 즉 "수상한 권력, 잘못된 권력이 나를 위치로 호명할 때 우리는 주체로 돼버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새로운 피조물로서 !!
그런데 바깥 현실은 새로운 개념이 없어요. 이것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그것은 주님도 마찬가지인데, 주님이 와서 성도로 불러주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이 땅에서 빠져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도 그냥 빠져 나오는 게 아니고, 미움을 받아서 죽임을 당한 권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주 안에서 새로 살았다" 라는 새로운 주체를 부여받게 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중현실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10분만 쉽시다.
2017,01,17 오전 11시에 재정리함 - 녹취 '구'2017,02,02 오후 6시에 재재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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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