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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73강-창 17장 15-19절(사래와 사라)170201-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73강-창 17장 15-19절(사래와 사라)170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7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20페이지입니다. 창 17:15-1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언약이라는 것은 누구 한 사람에게 언약을 세워놓게 되면 그 세워진 언약은 줄곧 그대로 가는 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분명히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약속을 했어요. 그 약속을 톡 깨보니까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언약이 또 들어 있어요. 러시아 인형 같아요.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또 더 작은 것이 들어 있는 인형. 처음 러시아인형을 구입할 때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집에 가서 뱅뱅 돌려보니까 그 안에 또 언약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 언약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언약의 껍질역할을 하겠지요. 껍질 역할이라 하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니고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창세기 17장을 보고 있는데 창세기 17장에서 성경이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요한계시록에서 다 끝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17장 이후에 또 뭐가 나오는가? 러시아인형 같이 큰 언약 다음에 작은 언약, 그 보다 더 작은 언약이 또 나오는데 사실은 그 껍데기언약의 본내용에 점점 더 접근해 나가는 실속이 있는 새로운 언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하고 세우는 언약은 이것이 마감언약이 되어서 더는 없습니다. 종착점이지요. 예수님 오시기 이 전에 무수한 사람들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그 모든 언약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한시적이라는 겁니다. 임시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오시고서 된 그 언약, 새언약으로 앞에 있었던 덩치 큰 러시아 인형처럼 그 주어진 언약을 다시 소급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 다음에 나오는 언약은 야곱이겠지요. 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꼭 필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것이 꼭 필요한 언약이에요. 처음부터 알맹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주어진 언약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필요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오늘 본문에 그 징후,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출발점이 있어요.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이름을 사라라고 했다면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는 번거로움 같은 것은 생략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사래라고 인정해놓고 그 다음에 사래를 바탕으로 그것을 사라로 바꾸는 작업이 나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미 어떤 세력 속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사래의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래가 지금 본인을 사래라고 느끼고, 인정하고, 그것을 굳건히 한 채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래는 사래 본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거나 거절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왜냐? 나는 옛날부터 사래기 때문에. 내가 아는 나의 시초, 내가 아는 나의 토대, 나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사래입니다. 사라가 아니고 사래에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시작점을, 자기본질의 토대를 부셔버릴 용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생 살면서 모든 인생은 과거를 기초로 해서 과거가 자꾸 기억나면서 알고 있는 것은 과거밖에 없어요. 과거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과거 없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과거부터 줄곧 나는 나다웠고 지금도 나는 어제의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동질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이러면 정신병자지요. 누구하고 집 계약했는데 “당신 오늘 집 비워준다고 했잖아.” “어제의 나가 아닌데 뭐. 오늘 나와 계약해야지.” 이것은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요.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입니다. 이걸 어떻게 부정하고 부인합니까? 세상은 다 변해도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된다는 사실은 절대로 달라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래가 아는 하나님은 나의 동질성에 기초한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이에요. 그것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의는 믿음이라는 것과 만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의가 거기서 생성되지 않습니다. 생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은 그걸로 종결되어야 돼요. “너 나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의인이다.” 깔끔하게 마지막 계약이 성사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 볼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뭐냐 하면, 이게 러시아인형이에요. 분명히 여호와를 믿으니 의롭다고 판결났으면 아브라함한테는 첫 번째 러시아인형 껍데기까지 도달한 거지요. 왜? 본인이 믿는다고 했고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어제를 알고 1년 전을 알고, 10년 전에는 약간 희미하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지금의 나가 있기까지 꾸준하게 똑같은 나가 지금까지 왔고 지금까지 온 내가 아는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렇게 아브라함과 사래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게 러시아인형의 제일 끝에 있는 껍질이라는 사실을 본인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사래는 날 때부터 사래였고 지금껏 사래였고 사래의 현재 나이가 90이라고 했어요. 나이가 90이 되어도 그 사래는 그 사래에요. 그런데 90살 된 그 사래, 그리고 백 살 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네가 약속을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의롭다.” 이러면 이야기가 거기서 완성이 되어야 되고 종결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갑자기 꾸준하게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래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사래하고 맺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맺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러시아인형의 맨 바깥층의 모양을 하고 있는 껍질입니다. 진짜 언약은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맺는 것이 진짜 언약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 내 속에 딴 사람이 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다, 라는 것을 인간이 추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내 속에 누가 있는지를 우리는 짐작조차 못합니다. 내 속에 끝까지 파고 들어가 봐야 내 안에 있는 것은 내 안에 있어요. 어디까지나 내 안에, 나라는 그 범주 안에 있어요. 끝까지 가는 그것마저 내거예요. 나에요. 나의 동질성의 일부입니다. 절대로 지금 알고 있는 내가 아닌 바깥의 나는 없어요. 그 나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사래와 아브라함은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그게 파토 나고 그게 엉터리라는 것, 아브라함과 사래한테는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래를 사라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사래는 ‘나의 공주’ 사라는 그냥 ‘공주’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었습니다. 사라라는 이 사람은 사래 안에는 없습니다. 본인이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 저 하나님 믿습니다.” “그래, 널 구원해줄게.” 우리가 사래라면 “하나님, 저 사래 알지요?” “안다.” “하나님이 저하고 계약했잖아요.” “그렇지.” “제가 사래에요. 제가 하나님을 믿으니 저를 의롭다고 해줄 거지요?” “오케이.” 우리는 그러기를 원했어요. 그렇게 계약 당사자가 나이기를 원했다는 말이지요. 내 안에 다른 사람하고 계약한다는 것은 사래나 아브라함, 어느 누구한테도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렬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사래가 아니고 사라를 이야기했습니다. 사라는 사래에게 없는 존재에요. 왜냐하면, 시작을 사래부터 했기 때문에 내 안에 나의 시작이 안 된 다른 인물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지요. 사래라는 것은 시작을 모르는 존재에요. 사래가 사라의 시작, 출발점을 모른다는 것은 사래한테는 사라가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하고 계약하다가 갑자기 각도를 바꿔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계약을 체결해 버린 겁니다. 나는 붕 떴다는 말이지요. 붕 떴을 때 우리의 반응은 뭡니까? 피식 웃는 거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나중에는 사래도 웃어요. 아브라함이나 사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여기 우리밖에 없어요. 저하고 계약해서 우리 믿음으로 의롭다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하고 계약하세요.”라고 하는 이 부부에게 어떤 이야기가 나왔기에……, 그러니까 사래와 아브라함에게 한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 잠시 한 눈 팔아서 못 들었다고 칩시다. 지금 사래나 아브라함에게 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못 들었다고 칩시다. 쉽게 말해서 화장실에 갔다 왔다고 칩시다.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좋다고 했는데, 화장실을 갔다 오니까 사래와 아브라함 두 부부가 싱글싱글 웃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가만 보니 좋아서 웃는 웃음이 아니에요. 흥, 치, 뽕, 이런 식의 웃음이라는 말이지요. 이상해요. 그러면 물을 것 아닙니까? “내가 화장실 갔다 오는 동안 하나님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느냐?” 아브라함이 이야기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래한테 자식이 있어요. 18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계약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과 사래부부에요. 그들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습니다. 요건이 다 갖춰졌어요. 본인이 러시아인형 그 자체이기를 원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농담하시는 거지요?’라는 식으로 피식 웃었다는 말은 아브라함 속에 사래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비웃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아브라함과 사래가 몰랐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현재 있는 내가 자기가 아는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아는 전부하고 하나님하고 계약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인간 속에 뭔가 둘둘 감겨져 있어요. 깁스 하면 뭐가 감기지요. 다리 부러지면 둘둘 감잖아요. 인간은 본인이 모르는 것으로 감겨 있어요. 감겨 있는 그 무엇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피식, 웃으면서 내가 아는 바로는 그것은 뭔가 이상합니다, 라고 언약에 대해서 낯선 반응을 보이면서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권력 안에 담겨져 있는데 그 권력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 약속에 대해서 비웃고 반대하고 배제하고 배척하고 거부하는 속성을 지닌 권력에 둘둘 감겨 있는 거예요.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이스마엘은 왜 안 됩니까?” 같은 뜻으로 “안 될 것 같으면 왜 허락하셨습니까?” 같은 뜻이에요.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면 왜 사전에 이스마엘이 태어나지도 못하게 만들든지 해야 하는데 허락은 왜 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하고 언약하지를 않습니다.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인간은 악마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은 깜빡 잊어버리고 직접 자기하고 일대일로 계약을 맺는지 알고 착각해 버려요. 하나님께서는 방향을 탁 틀어버립니다. 방향을 트는 순간 그 인간은 본색이 드러나요. 그게 인간이 아니고 육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모든 인간은 육이 되고 그 다음에 육에서 영을 끄집어내는 그 솜씨와 취지의 달성은 오직 최종적인 언약의 마감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계약 맺은 본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보고 이야기했으니까. 남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보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자기보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자기가 지킨다고 하는 거예요. 모세와 이스라엘백성하고 똑같아요. 이 십계명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줬으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인이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모세언약이 끝이 아니에요. 모세언약은 또 하나의 껍질입니다. 모세언약 안에 러시아인형이 또 들어 있는데 그게 뭐냐?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언약에서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니까 자기가 지킨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아니에요. 다윗언약 안에 다윗의 자손이 또 있어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나 “제가 지키겠습니다.”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도 모를까 봐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을 내가 모를까 봐요? 내가 알아요. 아니까 우리끼리 계약하는 것 맞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인간자체가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죄라는 권력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논리가 어려운데 어려울 때는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좋거든요. 사람은 죄 지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요, 저주를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목사님, 축복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잖아요.” 이렇게 하는데 축복을 위해서 태어난다는 그것은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를 위해서 태어나는 거예요. 다시 해 봅시다. 사래는 본인을 안다고 생각해요. 사래가 본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사래와 아브라함이 둘 다 웃었다는 사실이이에요. 웃었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꾸준히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기의 사고방식과 체계가 있어요. 그게 약속하고 안 맞으니까 피식 웃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 체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사래 나하고 약속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사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라라고 언급을 하니까 사라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존재에요. 사라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사라가 누군데? 왜 갑자기 사라를 언급합니까? 아브람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람하고 계약을 했으면 아브람으로 계속 가야지 아브라함은 아브람하고는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사래는 사라를 모르고 상상도 못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상상도 못했다는 이 말은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식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산다. 출발점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오는 목적은 내가 꾸준하게 출발점을 나라고 규정하고 있는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오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출발점을 모르는 자를 출발점으로 삼은 거예요. 그 출발점이 어디 있는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나왔어요.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삭의 자손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약은 아브람하고 안합니다. 사래하고 계약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계약은 아브라함도 모르고 사래도 몰랐던 그 어떤 분, 그 어떤 분과 계약을 맺는 겁니다. 영원히, 창조 전에, 그리고 창조 후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성부는 성자와 계약을 맺어요. 주께서 내 주에게, 시편 110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브라함과 사래는 들러리입니다. 내가 모르는 그 분과의 계약이 마감되는 그 여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갔고, 모세를 찾아갔고, 다윗을 찾아간 거예요. 하나의 절차가운데서. 그러면 그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예수님으로 가면 되는데 왜 그 절차가 필요한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자, 하늘에서 두 분이 계약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계약의 절차를 위해서 이 세상의 저주라는 권력 안에 있는 피조물이 필요했기에 그렇습니다. 악마의 품에서 못 벗어나는 피조물 속에 주님께서 뛰어드는 그 과정이 언약을 유일하게 성취하는 필수코스이기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 하늘에서 계약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약을 이룰 그 주님은 죄 속에 들어와야 돼요. 설교하면서 굉장히 많이 느끼는 것이 이겁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목사님, 저는 어떻게 구원받아요?” 이게 계속 있어요. ‘저’라고 할 때 이미 우리가 시작을 알고 있는 거예요. 주민등록에 생년월일이 나와 있잖아요. 우리는 시작을 알아요. 몇 년 몇 월 며칠,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알고 있다는 그것이 화근이라니까요. 10년 전에 태어난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획에 없어요. 왜? 나의 구원이라는 것이 성경에 없고 저주 아래 있는 자, 그리고 복 안에 있는 자,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잘못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날 자, 그 다음에 영생, 축복,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메시아의 영광을 위해서 태어날 자, 주님의 출발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래처럼 똑같아요. 은근히 “나 구원받아요?” 라고 하는데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주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태어나서 그렇게 인도받아야 되고 영생 얻기로,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이고 그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자다.”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는 질문자체가 “저는요?” 이렇게 자기출발점을 안다는 식으로 출발했는데 출발점을 모르는 이야기로 답변을 해버리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못 얻잖아요. “해답을 이야기해줘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내가 구원받은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라는 그 해답을 구하는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저주와 축복부터 시작해야 될 그 출발점을 두고 “저는 어떻습니까?”라고 나부터 출발하는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껍데기 메시아 인형이에요. “네가 아직도 껍질인 것을 더 알아야 해. 너 말고 다른 분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면 “저는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저를 내치렵니까?” 아니. 너를 통해서 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죄 속에서 한결같이 다 갇혀 있는 거예요. 사람이 죽음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죽게 되면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이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합니다. 차이가 없다는 것. 군에 갈 때 장병들 머리 홀랑 깎잖아요. 차이 없지요. 잘난 점, 못난 점, 차이가 없지요. 목욕탕에 가면 옷 다 벗잖아요. 차이 없지요. 아담이 저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의 복제물이거든요. 이 시대에 필요한 아담은 이 시대에 주께서 만들어놓았어요. 아담의 dna가 죄를 유전으로 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 때 그 때마다 주께서 죄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계속 창조하는 겁니다. 어떻게? 언약을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주께서 뭐든지 창조하거든요. 죄안에서 계속 창조하게 되면 나중에 로마서 5장을 보게 되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후보감이나, 대통령후보 하려다가 20일 만에 철회한 사람이나 어떤 인간이든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 그동안 나만의 개성을 위해서 살아왔던, 살아온 정도가 아니라 쌓아왔던 나의 개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분노를 유발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천당 가려고 교회에 얼마나 헌금을 퍼붓고, 십일조를 했는지 이거 복리로 계산하면 보통 금액이 아니라고요. 봉사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예배당 세우고, 온갖 것 다 했는데 그렇게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이나 똑같다면 미쳤다고 헌금하고, 미쳤다고 선교하고, 미쳤다고 고생하겠는가? 그게 네가 화근이 되는 거예요. 언약의 마감은 그리스도인데 자꾸 우리는 그 앞을 내가 막아요. “제 구원에 국한해서는 저를 마감재로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되어야 될 이유가 죄라는 모습으로, 다른 말로 하면 그게 바로 저주 아래 있는 그 모습이에요. 네가 저주 아래 있는 모습, 그 티가 그런 모양으로 나오는 거예요. 저 어때요, 라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켜버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이거든요, 약속에 대해서 뭔가 내 속에 약속을 배제하고, 거절하고, 거역하는 어떤 힘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어요. 동질성이라는 이름하에. “5년 전에 헌금한 그가 지금 나입니다.”라고 우기는 그 동질성에 연결된 그 속에는 끝까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싫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어떤 힘 같은 것이 나와요. 제가 힘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게 인력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둘둘 깁스처럼 감겼으니까. 그런데 우리만 이렇게 권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의 비약속, 약속 아닌 것 속에서 일어납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웃었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 생각이 있었다는 겁니다. 17절을 봅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가 아기 낳을 확률이 큽니다.” 하는 거예요. 이걸 오늘날의 말로 하면 두자로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신비에요. 불손한 신비, 음흉한 신비입니다.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이 신비를 네 가지로 봤어요. 이 세상의 진리에 이르는 절차를 네 가지로 봤는데 그 하나가 과학입니다. 과학은 논리적, 합리적 신비가 있어요. 그리고 감정적 신비를 가지고 예술이라 합니다. 문학, 음악가 미술, 건축, 조각, 이런 것이 예술이지요. 이런 것은 감정적이에요. 자기감정의 희열에 쌓여서 어떤 창조물을 만드는 거예요. 그 다음에 종교적 신비를 이야기해요. 인간이 지향하는 그것을 이상화시키는 것, 유토피아 화시키는 본성이 있어요. 종교적신비의 방법은 뭐냐? 사랑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종교(사랑)이라고 보면 돼요. 종교란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종교란 사랑의 위대성, 사랑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신의 사랑이지요. 누구를 향하여? 동질성 화된 나. 그 나는 어떤 나인데? 이미 시작을 알고 있는 나. 시작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알고 있는 나. 물론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아는 거예요. “세살 때 어땠어요?” “사진 보면 알 수 있잖아. 세 살 때 그랬어.” ‘아, 두 살 때도 지금의 나와 똑같은 인간이구나.’ 이미 시작을 알고 있어요. 주민등록에 1천 9백 몇 년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박 근혜 대통령의 생일이에요. 다 나와 있어요. 누구나 다 나와 있습니다. 개성이 있어요. 너와 나는 다른 날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겁니다. 나의 동질성은 저쪽과 내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이 저주받았잖아요. 다 악마의 품안에 들어 있으니까 똑같아요. 똑같은 아담의 복제물이니까. SF 영화에 보면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을 새로 만듭니다. 인간 공장이 있어요. 수천의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 인간이나 그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이걸 복제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계속 똑같은 아담을 복제를 한 거예요. 논리적 신비는 과학입니다. 항상 과학은 논리를 따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며칠 동안 창조했습니까? 6일 만에 창조했지요. 과학자들은 시비 겁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6일 만에 창조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너무 시간이 짧다는 겁니다. 속으로 그랬어요. ‘성경 새로 쓰지?’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라는 자들이, 과학자나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해요. 6일은 너무 짧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새로 쓰면 될 것이 아닙니까? 언제 지구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쓰지 왜? “나는 과학 외에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 솔직하게 그렇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도 믿고 과학도 믿습니다.” 이게 바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요. 불국사에 가면 두 개의 길이 있답니다. 한쪽은 부처를 바로 만나는 길이 있고 또 한길은 극락에 가는 길이 있는데 부처를 바로 만날 때는 현재 살아생전에 복을 받는 거예요. 복을 받는데 부처 이전에 보살이 있어요. 그 복을 주는 보살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해요. 그리고 저쪽 극락에 가도록 해주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에요. 두 개를 다 갖고 싶으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하면 돼요. 김대성이 지은 불국사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기독교와 불교가 차이점이 없지요? 그게 신의 사랑으로 주어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신의 사랑으로 주어졌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종교성이 들끓는데 그 종교성이 들끓는 대상이 이미 시작을 알고 있는 나, 사라가 아니고 사래에요. 이미 종교적 신비를 갖고 있고 과학적 신비를 갖고 있고, 예술적 신비를 갖고 있는 그런 나가 말씀 앞에서 뭘 한다? 피식 웃을 수밖에 없어요. 왜? 이미 나를 위한 감각이 둘둘 말려 있으니까. 정치적 감각이라는 것이 있어요. 정치적 요소는 뭐냐 하면 힘의 신비에요. 어떤 힘인가 하면 생존의 힘의 신비입니다. 생존의 힘은 권력의 신비에요. 그래서 정치가 제일 세요. 그래서 마귀는 정치적이에요. “너 까불면 죽여 버린다.” 이러면 “예” 이렇게 돼요. 굶어죽는다고 하면 “예” 이렇게 되는 거예요. 17절을 다시 봅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아브람이나 사래가 자기생존을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보호막은 자기가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껏 백세가 될 동안 살아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어요.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니까 그 약속이라는 것이 현재 내가 살아온 것과 결부가 안 되네요. 이게 매치가 안돼요, 매치가. 그러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것, 사래에서 사라가 되는 것, 이것은 주님의 몫이지, 언약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본인의 몫이지 거기에 대해서 사래나 아브람이 잘 호응한다고 언약이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이스마엘과 더불어서 왜 그것이 내 출발점이 되는 언약이, 내 구원이 되는 언약이 왜 언약이 아닌지를 가지고 주께서 깊숙하게 개입합니다. 개입하게 되면 나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 러시아인형의 껍질에 불과한데 어떤 기능? “나는 저주 아래 있었고 따라서 내가 죄짓는 것은 당연하고, 나는 죽어 마땅하고, 내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반응과 권력과 본능과 충동이 매일같이 터져 나오고, 그런데 주께서는 그 죄 안에서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만드는 작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언약, 새언약의 피로 다 마감했습니다.” 라는 주님의 증인되는 그것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일찌감치 시작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우리 태어나서부터 시작하신 것이고. 새언약과 관련된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언약입니다. 로마서 9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자녀를 먼저 주고 난 뒤에 이삭을 줍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사래라는 이름을 허락한 뒤에 사라로 바꿉니까? 이것은 언약의 모든 주도권은 구원받은 너에게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서 네가 너에게 장난질을 쳐서 네가 구원되는 법은 없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하고 태어나고 에서는 이미 미움 받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거예요. 따라서 사랑이 먼저고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요, 자기 힘으로 지옥 못가요. 지옥도 능력이 있어야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안 믿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것은 자기잘못 아니에요. 마귀가 그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기 때문에 아무리 복음 쪽으로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너무 그 사람 탓 하지 마세요. 지옥구경은 안내원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지옥 못가요. 마귀가 친절을 베풀어야 가듯이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인도해줘야 천국 갑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내 인생의 주도권은 ‘아, 나에게 없구나.’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해서 평생 동안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는, 그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착각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아직도 우리가 다 들통 나지 않은 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자기가 구원받는다고 착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언약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는 성령이 오셔서 주를 위해서 이러한 인생길 가게 된 것을, 이 신분과 위치를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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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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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