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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3장13-14절(살고 보자)170117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3장13-14절(살고 보자)170117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3-14절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3-14)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한마디로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렵다 하면 어떻게 하지? 걱정되는데, ‘대칭성’이라 하는데,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계시겠지요. 하나님 아버지. 이 관계, 이 관계를 그대로 물에 비친 듯이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과 관계. 이것이 그대로 확장 됩니다. 이 관계가,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가.

그러면, 아까 그 간증해 주신 그것을 연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지요?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다 이루었지요. 그러면 대칭성에다 집어넣어보면,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니까 아버지가 영광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그 관계를 그대로 예수님과 제자들한테 장착해 버리면, 제자들이 영광을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받지요?

뭐 율법은 뭐에요? 이야기 할 것 없는데, 이거 하나로 끝나버렸네. 다 이루었다. 무엇을 통해서? 십자가 피로서. 영광이 되잖아요. 뭐 지킬게 뭐가 있어? 없는데. 오늘 강의 이렇게 끝날까요? 이것을 대칭성이라 해요. 물이 비쳤을 때에, 내 얼굴을 이렇게 비취면 흔적이 나오듯이, 주님이, 주님의 관계.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신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그대로 연속 시킨 겁니다.

제자들과 관계에서 연속 시킨 거예요. 그리고 아직 멀었어요. 제자들과 그 다음에 세상이 있잖아요, 세상. 세상이 있잖아요. 세상의 이 관계를,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 ➀ 그다음에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 ➁ 제자들과 세상관계에서 ➂ ➀, ➁, ➂이 모두 다 동일한 관계 속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러한 이것이 대칭성인데, 물에 얼굴이 비치듯이, 수면에 비치듯이. 그렇게 되게 되면, 그러면 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그 자리에 집어넣었느냐 하면은, 이게 뭐냐 하면, 유일한 질서가 돼요.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유일한 질서가 됩니다. 천국을,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천국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천국을 이렇게 표현 했어요. 천국 = 아들의 나라

이것은 아시죠? 아들의 나라. 천국을 아들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천국 안에 내용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내용이 그 본질이 천국이 된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아들의 나라가 되는데, 아들의 나라의 그 절차가 있어요. 아들의 나라가 되는 그 알고리즘 algorithm이라 하는데,

알고리즘이라 하는 것은, 컴퓨터에서 명령어들의 순서. 명령어의 순서도를 알고리즘이라 합니다. 이렇게 명령하고, 그 다음에 이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명령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을, 아들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 명령이 필요하겠죠? 컴퓨터에다 “뭘 하세요” 하면 딱 나오듯이. 그 순서가 있잖아요, 순서가.

그 순서 중에 필히 거쳐야 할 순서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살아계신다고 주가 아니에요. 주가 되려면 반드시 순서가 있어요. 그 순서가 바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가 뭐다? 유일한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라 했지요.

그러면 세상은 뭐가 돼야? 자동적으로 질서겠어요? 무질서겠어요? 자동적으로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세상은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무질서에는 무질서를 유발하는 그 힘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한테는 아버지의 성령의 힘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 무질서를 무질서라 하는 그 힘을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밝히는 그게 뭐냐? 악마가 통치하는,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 통치하는 세계겠지요.

보통 악마라 하면, 뭐 녹색 얼굴을 하고, 뭐 이렇게 날개를 퍼덕거리잖아요. 그런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악마가 뭐냐를 궁구하려면, 악마를 단독적으로 해서는 악마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과 이렇게 같이 놓여 져야 악마를 알아요. 그러면 악마의 정체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인간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이게 바로 악마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다.”

보통 우리가 “악마가 흉측하게 생겼다. 인상 더럽다.” 이렇게 하니까 인상 안 더럽고 착한 사람, 동안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점수를 자꾸 좋게 주려고 해요. “세상에, 성품도 착해라. 이거 뭐 교양도 있어.” 이렇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보고 뭐라고 했느냐?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라 했지요. 악마. 악마라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과격한 말을 우리가 동의를 해야 돼요. 왜 동의를 해야 되는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그 관계가 1번이라면, 예수님과 제자들 관계가 2번이고, 2번은 뭐냐 하면은 바로 열두 사도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포함되고, 성경책을 썼던 사도들이에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1번이고 2번이고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3번 있죠? 3번이 뭐냐? 사도들이 편지할 때, 제일 앞에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제일 앞에 뭐가 나옵니까?

“그리스도의 종, 나 사도 바울” 이렇게 돼있죠? 그리스도의 종. 그게 뭐냐? 1번이 연속 되어 있는 2번. 2번이 이제는 편지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누구한테? 오늘날 자기 백성이 될 사람에게 3번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1번, 2번을 전할 때 그냥 전하면 안 되죠? 여기에 아까 알고리즘이라 했지요?

명령어, 절차, 순서. 필히 나오지요? 그 순서, 절차가 필히 나올 때, 그 순서, 절차를 어디서 공급합니까? 이쯤 되면 딱딱 나와야 되는데, 아까 처음에 1번 예수님께서 아들의 나라를 만들 때, 예수님을 그렇게 주가 되게 하시는 그 반대의 힘이 어디서 나왔어요? 이 세상에서 나왔고, 악마에게서 나왔지요. 그러면 1번이 나올 때, 악마가 관여했고 세상이 관여했다면, 2번은 말할 것도 없지요?

여기 16절 한번 보세요. 16절. 13장 16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13장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요13:16)

예, 됐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너희들이 아무리 고생, 고생한다 할지라도, 너희들을 노리고 세상이 너희를 핍박한 게 아니고, 나를 노리고 세상이 핍박한다는 겁니다. 나를 노리고. 이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요. 15장 18절 한번 볼까요? 이번에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복음 15장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15:18)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그 다음에 뭡니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라는 이 자리, 위치, 위상. 이것을 우리가 확정할 수 있습니까?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라 할 때, “아! 나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내가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그것을 주께서 인정해줍니까?

아니에요. 이게 왜냐하면 1번이 와야 돼요 이게. 결과적으로 1번이 와야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이 나오는 거예요. 내 쪽에서 “이러한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제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에서, 지구에서 마음껏 떠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 했어요. 나는 그냥 무심코 이야기 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예수님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슈퍼맨이라 했거든요. 슈퍼맨이 지구를 왔다 갔다 했잖아요. 그렇지요? 슈퍼맨. 슈퍼맨은 능력이 많아서, 슈퍼맨은 어느 별에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왔다 갔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니까, “나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 참 멋있겠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우리가 요청한다고, 우리가 기대한다고 되어지는 게 아니에요.

항상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은 1번이 쥐고 있어요. 1번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파생되는 현상이 요한복음 13장 16절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애초부터 성경에서는 이런 요구는 안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시작이 내가 하나님하고 출발 하는 게 이것이 1번이 아니기 때문에. 1번은 따로 있잖아요, 1번이 아까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하고 아버지의 관계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관계를, 더욱 더 빛내기 위해서. 빛낸다는 말을 이것을 성경대로 하면, 성경용어로 하면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뭐 쉽게 말해서 그 관계를 빛내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돋보이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주가 주 되게 하기 위해서.

1번은 물론 성령께서 실시하지만, 성령께서 1번 관계를 이렇게 실시를 하는 그 여파로, 그 결과로, 그 열매로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발생되는 겁니다.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철거해야 돼요? 뭐를 철수해야 됩니까? 포기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는 그 요구사항은 아끼지 말고, 그것을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회수해야, 거두어 들여야 돼요.

“아!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구나.” 이 세상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이 말이에요. 그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고자 하려고 한지 알아요? 그것은 바로 본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아야 되겠고 눈앞에 있는 것은 모세 율법밖에 없으니까, 모세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나는 구원 받아야 되겠고 신약 성경이 앞에 있으니까, 사도 바울의 명령도 많고 사도행전도 있고 요한계시록도 있으니까, 요한 계시록을 될 수 있는 대로 완벽하게끔 지켜서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환난을 좀 수월하게 좀 통과해서 십 사만 사천 명에 골인해 보겠다.” 이것을 아까 것과 매치하면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뭐가 잘못 되었나? 이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그게 왜 잘못 되었을까요?

십자가 사건 근처에서 유발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을 남의 일로 여긴 거예요. 이게 우리들의 평소의 마음가짐이, 십자가 밑에 이렇게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안하고, 나는 십자가 그 알고리즘, 그 과정 말고 그냥 십자가와 예수님만 달랑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달랑 믿는 그것도 뭐가 되냐 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은, 뭐가 되겠어요? 행함이 되겠지요? 누가 그랬어요? 이 좋은 말. 다른 사람 정답하고, 정답이 아주 수상한, 수상해요. 그게 행함이 되는 거예요. 행함이. 모든 행함을 왜 하나님이 거부하느냐 하면은, 이런 행함이 유발된 그 동기, 동인이 본인의 구원론, 구원관이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원 욕구에, 구원 의지로부터 이게 스타트가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게 출발점이 되었어요.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출발점을 했습니까? 대칭성 할 때, 출발점이 뭐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그 관계. 1번 관계가 이렇게 확대되고 파생되고 유동성이 퍼진다. 분명히 이야기 했건만. 우리는, 나는 있고, 구원을 받아야 되겠고. “아! 1번 이거 아이디어 괜찮네! 1번을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되면 그 믿음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바로 행함이 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그건 지 마음대로 믿음이죠. 성경에서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조건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것을 안에 내용이 들어 있어야 돼요. 나의 어떤 행위도, 나는 내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이 이미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 안에 내가, 나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아울러 거기에 담아 놨어요.

이 보자기 속에, 십자가라는 보자기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 믿고 천당 가려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헌금해서 복 받으려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다 집어 넣는 거예요. “왜 헌금 하고, 왜 선교사 되려고 하고, 왜 기도 열심히 철야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 나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라는 것을 거기다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다 집어넣고, “바로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희생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렇게 실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어떤 인간도 “구원 해주세요!” 라고 내밀 수 있는 자격자가 이 땅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왜? 구원은 예수님과 아버지로부터 새로 출발하기 때문에, 이 밑에는 “입 다물어! 군소리 하지 마!” 군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례 요한도 왔을 때 뭐냐 하면은, 심판을 이야기 했지요. 회개하라. 심판을 이야기 했지, 구원을 이야기 한 게 아니에요.

그래, 구원을 평소에 가르쳤던 바리새인들이 나오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있어요. “이게 어디?” 이렇게 했지요. “니들이, 니들이 뭐? 왜 왔는데? 니들이 여기 왜 왔는데? 어이구 잘났어요. 어이구 잘났어요. 그럼 이 돌멩이, 돌멩이. 너희들이 구원 받을 거면, 이 돌멩이도 구원 받겠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모든 것은 다 찍혀 버리는 거예요. 이사야처럼 다 찍혀버려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라. 자, 13장 계속 들여다봅시다. 자, 처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대칭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수면에 자기 얼굴이 비치듯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 세상이라는 그 어두운 수면에 비취게 되게 되면 거기에서 1번 관계가 2번 관계와 3번 관계로 계속 이어진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는 죽으니까, 늙어 죽으니까. 그들이 그냥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성경책을 남기고 죽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3번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안 잊어버리겠지만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하자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모든 율법을 누구한테 다 주지요? 모든 율법을 예수님이 다 가지고 오지요?

다 가지고 혼자 그것을 쥐고, 마치 진주의 논개처럼 일본 장수 끌어안고. 모든 인간에게 정죄할 자기 백성들을 정죄할, 저주할 율법을 혼자 쥐고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고,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장렬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장렬하게.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 누가 있었습니까? 사전에 알았던 사람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지요.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갔으니까. 아무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사실을, 이 놀라운 폭발적인, 놀라운 하나의 폭죽 같은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눈치 못 챘는데, 어떤 경우에만 눈치 채게 되겠어요? 예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아! 이게 율법을 행함으로 의가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뭔가 꼼지락 거려야 될 문제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의 하신 일의 그 혜택을 무상으로 받아서 구원 받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처음에 대칭성이고.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첫 번째는 ‘대칭성’ 두 번째는 뭐냐? ‘패널’ 패널이라는 것은, 제가 패널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 키워드를 쓴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경계선’ 구실 때문에, 역할 때문에 그래요. 패널 집을 지으려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철판, 약간 얇은 게 있고, 그 안에 스티로폼 집어넣잖아요. (판넬~ 판넬~) 내가 너무 영어를 썼나? 영어로는 패널 이라고 하지요? 판넬이 영어로 뭡니까? 보통 패널이라고 하잖아요. 패널.

스티로폼을 집어 놓고 취합 하는 거 있지요. 자, 이렇게 했을 때, 아이스크림도 이런 게 있지요? 과자 사이에 아이스크림 집어 놓고 파는 거 있잖아요. 그것처럼 그런 게 있을 때,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 세계와 이 어두운 세상 사이에, 멀리서 보면 이게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게 되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패널처럼, 판넬처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있어서, 예수님 쪽에서 주신 것은 의고, 인간 쪽에서 제자들이 받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죄고,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 의 앞에서 항상 뭐가 되냐 하면은, 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이제는 죄를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구원 받아서 착하게 사는 게 아니고, 착하게 사는 것은 조폭들의 표어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죄를 이제 드러내게 됩니다. 죄를, 계속해서. 죄를 왜 드러내는가? 본인 구원 받으려고? 아니,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럼 왜 드러내나? 이게, 이 세상과 이세상이, 주님의 세상에 무슨 역할을 해야 하면은 패널, 경계선 역할을 해야 돼요. 경계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의 세계와 이 어두운 세계 사이에 예수님이 유일하게 뭐가 되냐 하면은 이게 맴브레인 membrane ‘막’이 되요 ‘막’ 세포막 같이 ‘막’ 있죠? 세포막. 막을 형성한다고요. 예수님의 증거는 딴 게 아니에요. 본인이 ‘막’이에요. 그럼 ‘막’인데 그 ‘막’을 통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전화 통화) 아, 문이 잠겨있다고요. 네, 문열어주세요. 안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렇게 또 늦게 오시는 분이 있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계속해서 자기한테 관심을 둬요. “나 어떻게 됩니까? 나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 천당 갈 겁니까? 지옥 갑니까?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이게, 성경에는 사적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개인구원이 없어요. 어서 오세요. 좀 일찍 오셨으면,

네, 늦게 오셨어도 다행입니다. 한분 늦게 왔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야죠.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 14절. 다시 하는 이유가 있어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줬어요. 발을 씻어 주니까 “너희들이 내가 스승이라서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어 줘라” 라고 이야기한 그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있었던 그 관계가 점점 더 세상 쪽에서 세상 쪽으로 침범해 들어가는 겁니다. 확대되어, 확산되어 들어가지요. 들어가는데 이 세상은 혼돈이고 무질서에요. 어두움이라 했으니까. 그러면 어두우면 뭐가 있어야 되냐 하면 어두움은 뭐가 있어야 돼요? 질서가 있어야 되겠죠. 질서가. 그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가 있기 위해서 뭔가 칸막이가 쳐져야 돼요. 칸막이가.

하나의 예를 들면, 북 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 거기 유명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부들이 골치 아픈 게 남풍이 계속 부는 거예요. 남풍이. 옛날 고대 수천 년부터 어떤 수백 년, 수천 년부터 어떤 신화가 있느냐 하면은, 가자미하고 그리고 홍어하고 오징어하고 옛날 신화에 세 종류의 고기가 있는데, 남풍이라는 괴물이 오니까 이것들이 물고 뜯고 이렇게 해서, 지기는 졌지만 힘들게 남풍이 함부로 가자미하고 홍어하고 오징어에 대해서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는 그런 전설 아닌 전설 같은 게 있어요. 신화가 있단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냐면 남풍이 계속, 폭풍이 불게 되면 고기를 못 잡잖아요. 그런데 이 대 자연은, 이 신은, 못 잡는데 그나마도 오징어하고 가자미하고 홍어를 잡을 그때만큼은 좀 파도가 잔잔해 지도록 이렇게 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신화가 생기는데 신화가 뭔가 하느냐면 무질서 가운데서 무엇을 하느냐?

질서를 유발하고 이 질서의 틈을 통해서 자기의 먹고 살 길을 여기서 찾는 겁니다. 옛날 고대인들이. 그러면 이 무질서 가운데 질서가 있는데, 질서의 특징이 뭐냐? 항상 대칭성이에요. 대칭성. “어디서 어디까지 마디. 그 다음부터 여기서는 고기 잡는 것. 그 다음은 고기 잡으면 안 돼! 이것은 신이 노해서, 자연이 노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아메리카 인디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도 이렇게 무질서와 질서 가운데서 질서는 누구 좋아하는 질서다?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한 질서. 숨 좀 트는, 나도 숨 좀 쉬자 하는 그 틈을 통해서 밥 먹고 살듯이, 이 혼돈의 세계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겁니다. 한번 정리해봅시다. 무질서에서 뭐가 된다 했습니까? 질서가 주어지지요?

그런데 이 생각을 두 종류가, 첫째는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고?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인간들도. 그러니까 인간들부터 먼저 이야기 합시다. 인간들이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 잡기 위해서 인간들이 한 게 뭡니까? 이 질서를 잡기 위해서 근거를 준 것이 바로 모세 율법이고,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메시야의 나라다. 장차 메시야가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다.” 라고 나름대로의 무질서 가운데서 질서를 유발 했지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에 투하 됐습니까? 낙하산 타고 어디에 투하됐습니까? 무질서에 투하 된 거예요? 질서에 투하 된 거예요? 무질서에 오셔서 어두움에 속한, 갈릴리에 오셔서 어디로 진격했습니까? 네? 예루살렘 유다 지역으로 진격했지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진격할 때 예수님이 그냥 왔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왔습니까? 성령 받았지요? 성령이 무슨 관계냐 하면 아버지와 누구의 관계? 아들의 관계죠.

모든 일점일획 모든 율법을 다 짊어지시고, 유다의 질서라고 우기는 그곳에 가셨잖아요. 동방박사가 처음에 들린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에 들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베들레헴에 갔잖아요. 이게 의도가 있어요. 바로 예루살렘으로 별이 인도하면 되는데, 한번 ‘통~’ 띄고 갔다 이 말이죠. 한번 거친 곳이 어디에요?

만약에 한번 거치지 않았으면, 예수님하고 동방박사와 아주 조용히 만났어요. 분위기 좋았지요. 조용히 만나고 드릴 것 드리고 조용히 갔는데, 한번 별이 갑자기 끊어지고 예루살렘에 멈추고 베들레헴에 감으로 말미암아 누가 발작을 일으켰습니까? 예루살렘 총 비상계엄이 일어났지요?

예루살렘은 나름대로의 질서에 잡힌 국가에요. 거기 왕이 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기에서 메시야가 태어난 장소를 누가 이야기 합니까? 그때 율법박사들이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유다 나라는 어떻게 실세를 잡았다? 하나님의 모세의 율법, 성경 말씀 가지고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메시야로 올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거지요?

마치 요한계시록 보고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그 단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면 요한 계시록의 14만 됩니다. 하는 그 단체와 똑같은 거예요. 성경 말씀으로 완전히 포진을 한 거예요. 그런데 한번 ‘팡~’ 띄고 가버렸다. 가버렸으니 어떻게 됩니까? 베들레헴 애들 “두 살 아래로 다 죽여라.”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 죽었던 애들을 대변해서 그것을 라헬, 라헬. 라헬은 누구의 본처냐 하면은, 야곱의 본처고 야곱은 이름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에는 직접 못 다가가요. 한번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붕~’ 띄고 난 뒤, 이스라엘을 가야 돼요. 그리고 그 가는 과정 속에서 두 살 아래의 애들은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선취에서, 미리 취해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될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욥기에 보면 욥이 고난 받았었지만 나중에 욥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놓치면 안돼요. 욥의 아들 10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욥은 죽을 뻔 했지만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욥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를 완전히 불쏘시개로 사용을 합니까? 자식 열 명. 자식 열 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벌려요. 중요한 포인트 하나 주기 위해서, 다른 것은 목숨도 파리 목숨도 아니라니까. 그냥 죽여요. 그냥 죽여요. 자식이 열 명 다 죽어버려요. 자식 열 명이 죽고 지는 복 받고, 보통 아버지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복하겠어요? 행복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가 이렇게 복 받기 위해서 니들 열 명이 죽었구나.” 아마 매일 추석날 매일 찾아가서 음복 할걸? 술 뿌리고 음복 할걸? 반 총장처럼 고향에 가서 엎드려가지고 ‘아이고, 아이고’ 할걸요?

성경 전체가 개인의 이익이라든지 개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책이 아니에요. 어떤 연극을 벌리는 거예요. 어떤 연극을 벌리는데, 그 연극이 뭐냐?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역할을 부여, 역할 부여 하는 거예요. 역할을.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개인구원은 없다는 거예요.

개인 구원이라는 것은 아예 없어요. 개인 구원이 없는데 거기다가 “구원 받으시겠습니까? 실례지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몇 년도에?” 개인 구원 자체가 없는데? 또 조직신학에서는 구원론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구원 자체가 없는데 무슨 구원론이 있어요? 성경은 하나만 이야기해요.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물론 창조론도 없고요. 성경은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이지, 그 외에는 없어요. 심판론도 없고. “당신은 이렇게 하면 심판 받습니다.” 하는 것 자체가 뭐가 빠졌어요? 그 이야기가 뭐 빠진 게 있는데? “당신은 이렇게 했으니까 지옥 갑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복음의 내용이 빠진 채 겁주고 있는 거예요.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럼 어떡해?”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심판주다.” 이거하고 “당신은 이렇게 하니까 지옥 갑니다.” 하고 이게 뉘앙스가 달라요. 뉘앙스가. “예수님은 이런 심판하실 분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할 때는, 지금 겁주는 게 아니고, 협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아, 예수님이 그만한 권한이 있구나!” 이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럼, 나는요?”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창세 전에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십니다.” 이렇게 아주 담백하게, 덤덤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듣고 교인이 “목사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돼요? 저는 만약에 창세 전에 사랑 못 받으면 저는 어떻게 돼요?” 목사는 지금 예수님을 증거 했는데 본인은 지금 본인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마귀가 주는 질서 속에는 개인적인 어떤 여망이나 희망 같은 게 집결화 되어서 유대인이 “질서를,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습니다. 지키려면 내가 롤 모델입니다.” 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자기가 지도자급으로 등장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어디에 투하했습니까? 결국 어디로 진격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 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게? 예수님이 죽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뭐냐? 성전 부정이었어요.

유대인들도 침작해서 어지간하면 봐주려고 했다니까요. 어지간하면.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도저히 안 되겠다 하는 게 언제냐 하면은, 성전에서 횡포부릴 때. 그때 더는 못 참는다 해서 죽여 버린 겁니다. 예수님은 결국은 누구 손에 죽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 했습니까? 그들의 아비가? 악마잖아요. 악마.

그러면 악마는, 악마의 일은 딱 나오잖아요. 악마의 일은 뭐하는 것이다? 뭐하는 것이다? 질서 잡는 모든 조직이, 질서 잡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모든 조직에, 가정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조용히 해! 손님 앞에서 떠들면 안 돼!” 이거 뭐하는 겁니까? 우리 가정에 폐쇄적 자기 조직을 엄마가 와서 사로잡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을 용납 안 해 이런 거.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교단에서는 용납 안 해. 이런 게 다 뭐에요?

무질서 가운데 질서 잡는 행위에요. 그러면 무질서라고 그냥 방치할까요? 애들 그냥 신발 아무데나 던지고,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집구석인지 이건 뭐 지옥인지 분간 안 되고, 쓰레기 가만히 놔두고 어떻게 할까요? 그것을 치워야 되지 않습니까? 정리정돈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파리 날라오고 이러면 되겠어요? 정리 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마귀한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안하고 싶어도, 이것이(종이컵) 엎어져있다. 엎어져있다. 나는 성질이 바로 세워야 돼요. 이게 보기 좋으니까. 이게 좋아요? 이게 좋습니까? 이게 좋단 말이죠. 좋으니까, 이 성질이 어디 가겠어요? 이 성질이 예수 믿고, 교회가고 어디 가서도 이 성질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보고 뭐하려고 합니까? 자기 마음을 질서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딱 정돈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답게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이게 타고난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타고난 본성인데. 이것을 누가 말려요? 말릴 수가 없는데. 예수님 믿고 갈수록 더, 더 착하고 지금보다 더 착하고 5년 믿었으면 6년째 되면 더 착하고, 신년 설교에서 “여러분, 작년에도 착해서 복 받았으면, 이번에는 더욱 착해서, 착한 그만큼 보너스를 받아야죠.” 뭐 이런 식으로, 계속 쿠폰 이런 거, 쿠폰도 모아야죠.

계속 착해지라고 하는 게, 이게 목사가 누구든지 그렇게 하잖아요. 올해는 뭐 개판으로 삽시다. 뭐 이런 설교는 뭐, 대구에 있는 어느 교회만 하지.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착해야 복을 달라고 해도 염치가 없지요. 기도 한번 해야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도 은근히 노릴 수가 있지. 개뿔 기도도 안 해놓고 응답 달라고 하는, 세상에 이런 낯 짝 두꺼운 게 어디 있어요. 헌금이라도 몇 프로 해놔야 “우리 애가 이번에 고3인데, 어떻게 점수 좋게..” 뭔가 요구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제 예수님께서 1번 성부와 성자의 관계 1번 그 관계로만, 이 세상을 찾아오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이 악마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악마의 통치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왜? 스스로 의인이 되고 싶은 속성은, 이미 인간이 망가졌기 때문에 다른 속성은 우리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착하고, 그 다음에는 더 착하고 더 착해져서, 착한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더 본받는다는 의식을 우리가 지울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구절들을 끄집어내라면 수두룩하게 끄집어내죠. “너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빛과 소금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라” 디도서에 나오지요? “참 백성이 되게 함이라. 선한 일을 하는 참 백성이 되게 하심이라(딛2:14)” 거기 있잖아요.

또 요한복음 5장에 하나님께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5:28-29).” 성경 구절을 뽑으라면 수두룩하게 뽑혀 나옵니다. 디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준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심이라” 나오지요? 그러면 그 대목을 딱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 예수 믿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선한 일을 하게 해서, 온 어두운 세상에다가 빛과 소금의 백성으로 살면 된다.’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누가요? 누가 그렇게 합니까? 누가? 내가? 내가 하는 순간 1번 2번 3번 다 날라 가버립니다. 그 순간. 선한 것의 구절을 어디서 뽑아 내냐 하면은 패널 속에서 패널. 아까 패널 이야기까지는 했습니까? 제가? 들었어요? 패널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패널 이야기. 못 들었지요. 다시 해야 돼.

자, 1번이 뭐냐 하면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1번이죠. 1번이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1번 관계를 그대로 집어넣는다 했지요. 이게 2번이고, 그 다음에 제자들이 늙어 죽고 성경책만 썼으니까 나머지는 뭡니까? 성경보고 구원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3번은 제자 이후에 제자들과 백성들 사이에 3번. 1번의 관계를 그대로 세 번째 과정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1번 2번 3번

1번 2번 3번 관계가, 수면에 자기 얼굴이 보이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대칭성’ 오늘 몇 번하는지 모르겠네. 댓 번 하는 것 같네. ‘대칭성’ 두 번째, 대칭성 말고 그 다음에 이야기 한 것이 패널 이야기에요. 패널. 패널은 뭐냐 하면은, 얇은 양철판에다가 안에 스티로폼 넣어서 집 짓는 것을 패널이죠? 패널. 패널이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주 되시니까 예수님의 세계와 그리고 이 세상. 이 세상 사이에, 제자들은 멀리서 보면 선(line)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 패널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은 ‘의’고 자기는 무엇이고? ‘죄’고. 죄와 의 사이에서 예수님의 희생의 관계, 희생의 의미, 율법의 완성만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본격적으로, 이제 죄가 무엇이냐를 점점 더 알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에 도움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 바울의 또는 사도들의 명령과 지시. 이런 것들이죠.

“아내가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네?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잘 들어 놓으세요. “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그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이유가, 어느 레벨에서 십자가를 졌나? 어느 레벨에서?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정도 되지 않으면 전부다 뭐다?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가 된다.

그리고 어떤 누구한테 도와 줬는데, 마침 그 도와준 그 거처지에 오게 되면 사람들이 뭘 생각합니까? 내가 뭘 도와 줬다는 게 생각나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주일날 설교 했는데 무슨 순간이라 했던가요? 바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버리는 순간이 온 거에요. 그러면 도와줘놓고 뭐가 돼요? 도와 준 것 을 통해서 ‘내가 아, 죄인이구나!’를 깨닫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알아버렸어!’ 알아버렸단 말이죠.

그리고 교인 한 10명 한 댓 명되는데, 어느 교회처럼 댓 명되는데, 그 중에 새로운 교인이 여기에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이명직 목사님 이야기한, 제가 소개한 이명직 목사 네, 네 나중에 인사 땡기세요. 새로운 교회에 들어왔다 이 말이죠. 들어왔는데 딱 보자마자 기준에 ‘아~ 굉장히 아무 준 것도 없는데 굉장히 밉다. 아니, 인상 보니 미워. 인상 보니 밉다.’

그러면 이것은 산상설교 어디에 어긋납니까? 그건 살인죄에 해당되는 살인죄에요. 그리고 어떤 할머니가 교회 왔는데, 할머니가 와서 “내가 소원이 있는데, 이것만 해주면 내 자녀를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이렇게 무심코 냈는데 그것은 산상설교에 “맹세하지 말라”의 “맹세하지 말라”에 걸려들었어. “맹세하지 말라”에. 그리고 TV보다가 최순실 말 들어보니까 “남을 비판하지 말라”에 걸려들었어.

전도 한답시고 막 복음 전했는데, 이게 안 먹히는 거야. 약이 올랐어. 그래서 억지로 하니깐 그것은 어디에 걸려들었나 하면은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는 말에 걸려들었어.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그 대목이 뭐냐 하면은 “성령을 주겠다”에요 성령을. 성령을 주겠다하는데 마치 그때 글자가 안보여서 성령을 못보고, 그냥 구하면 주실 줄 알고 이렇게 착각해서, 뭐든지 열심히 구하면 소원대로 될 줄 알고 했는데,

나중에 누가복음 보니까,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했는데, 성령 안구하고 딴 거 다 구했어. 그러면 그것은 뭡니까? 자기 아쉬움을 통해서 드러난 새롭게, 새롭게 개발된, 오늘 제목 개발이라 해야겠다. ‘죄 개발’ 새롭게 개발된 죄를 발견하는 거죠. 이미, 그러면 그것은 뭡니까? 이미 개인 구원은 없어요. 왜? 구원이라 하는 것은 관계 속에 들어가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것을 무슨 관계냐? 언약의 관계라 합니다. 언약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관계를 예수님이 단독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뭘 주느냐?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뭘 주어야 됩니까?

성령을 줘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 같이 보혜사가 오게 되면 너희도 나와 뭐가된다?”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 둘만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고 났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구원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때 그들은 이미, 그때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여기에 이 관계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의 말씀.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들 속에 활동 했다 했습니다. 이미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이번에 수련회 했잖아요.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뭐만 남는다 했습니까?

이미아씨 와야 아는데,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뭐만 남는다 했습니까? 성질과 성깔만 남지요. 성질과 성깔은 시간과 환경이기 때문에 무한 반복이 되지요. 무한 반복. 스톱이 되요. 아브라함 같으면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아브라함이 한 그 죄가, 그 죄인으로 스톱이 되면서, 그 엘리야와 모세가 했던 그것이 스톱이 됩니다.

그러면 엘리야,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만약에 한자리에 만났다? 그러면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한테 부탁할건 딱 하나밖에 없죠. 뭘 부탁해야 합니까? 엘리야와 모세하고 예수님 변화산에서 만났을 때 엘리야, 모세하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 딱 하나밖에 없지요. 뭡니까? “예수님 언제 내 죄 때문에, 내 죄 해결해 주실 겁니까? 언제 나 때문에 별세하실 겁니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죽음에 대해서. 그게 구원이에요, 구원.

구원은 우리가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아예 구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이 확정되고 난 뒤에 예수님 중심으로 주가 되시는 구원이기 때문에, 확정되고 난 뒤에 거기에 성령을 보내줘 버리면, 내가 내 구원을 기대했던, 사적인 개인적인 구원을 기대했던 이 자체가 바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마저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왔기 때문에.

죄를 알고 착한 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죄를 안다는 자체가 1번 관계 안에 계속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패널 이에요. 죄. 예수님의 의 때문에 성령은 의를 계속 주게 되면, 우리는 계속 없던 죄까지 늘어나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역사할수록 우리는 점 점 더 뭐가 됩니까? 죄가 되가는 거예요. 죄.

죄가 더욱 더 많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죄가 많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자기에 대해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까요? 안질까요? 질 필요가 없으니까. 이게 성령 안에서 자유 아닙니까? 자기가 막 모든, 하는 행위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책임지고 나선다면, 구원 받은 것은 그것은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왜?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일단 구원 챙기고 플러스, 책임지면 천당 보내주고, 제대로 못 지면 너는 지옥 보낸다. 아직 계속해서 여지가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구원 못 받은 정도가 아니고 갑자기 개인 구원 문제로 와 닿아요. 개인 구원 문제로.

예수 믿었는데 또 착해야 되나? 어느 정도 착해야 되는데? 마태복음 5장까지는 너무 심하고, 그럼 다른 거 지킬 것 먼저 지키고, 그 다음에 나중에 나이 많아서 믿음이 좋다고 할 때, 그때 도전하느냐? 이런 문제에 해매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엉뚱한 나의 사적 구원의 그 영토 안에서 계속 헤매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있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 사고방식으로 모든 인간을 통제했고, 다스렸고 통치 한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하는 말이 “나처럼 돼봐라 나처럼!” 나처럼 되게 되면, 하나님이 잘 믿는 거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거꾸로 누구에게로 갔습니까? 세리와 창기한테 가버리지요. 하고 하신 말씀이 “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갈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유대인 방법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아예 개요,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한테 가서 또 이방인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갔지요. 가면서 꼭 이야기 했어요.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몰랐다.” 또 바리새인들은 뭐냐?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했지요.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이 “이 죄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순회 재판을 벌리는 겁니다. 순회 재판. 원래 재판장이 없을 때 돌아다니면서 판결 내리는 거 하면서 “이 세리가 의인이다. 이 세리가 의인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예수님은 1번 아버지와 아들의 자기 관계만 고집하고, 일체 이 땅에 있는 인간의 어떤 인간의 관계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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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