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6. 12. 23) 2강
광주 강의(2016. 12. 23) 34-2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꼭 죽어야 하셨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력 구원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가려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영이면서 육이 되셨죠. 영에서 육이 되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을 지난 가락교회 강의에서는 ‘피리 부는 소년’이라고 했어요.
피리를 불면 모든 쥐가 다 피리 소리를 듣고 모입니다. 쥐 퇴치하는 데는 최고입니다. 만약 피리 부는 소년이 이 동네에 있다면 이곳에는 쥐가 한 마리도 없을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 모든 말씀이 십자가 중심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지킬 말씀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간다.” 방향이 다르지요. 원치 않는 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방향을 반대로 바꿔주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물세례 다음에 성령세계가 옵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란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성령세례가 주어집니다. 그럼 물세례 안 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세례가 안 오는가?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그 안에 물세례가 이미 함유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우리에게 반복시키는 겁니다. ‘네가 무엇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죠.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뭐라고 했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회개하라는 것은 방향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는 방향은 어떤 방향입니까? 천국이 오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회개할 때 자신을 죄인 되게 만드시는 천국을 봐야지요.
내가 착한사람 되는 천국 말고, 나를 죄인의 괴수로 만드는 천국을 봐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도끼로 찍어버린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어요? 찍혀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면 저 돌들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는 왜 했어요? 내가 돌멩이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면 그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돌멩이는 때려도, 욕해도 신경 쓸 권리가 없어요. 돌멩이기 때문에. 요즘 돌멩이 같은 사람들이 청문회에 많이 나오지요.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안 했습니다.” 제가 만약 질문하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런 증인들을 칭찬하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깊은 도를 닦았습니까?”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진리라고 했어요. “아는 바 없습니다.” 진작 그렇게 살지! 자기보다 수준도 낮고 공부도 못한 것들이 공격해 올 때 “죄송합니다.”라고 하잖아요. 만약 청문회 자리가 아니라면 “너, 어느 대학 나왔어!” 이렇게 했을 텐데 청문에 자리에 나와 있으니까 저자세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평소에 그렇게 살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지를 못해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원인이 되고, 내 수고와 희생의 결과를 노리면서 악착같이 살기 때문에 천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사두개인,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욕을 얻어먹는 겁니다.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물에 잠겨서 기다렸지요. 죄도 없는 분이 죄인만 들어가는 물에 잠겨 계시면서 ‘나 여기 있다. 하늘나라는 이곳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개구리처럼 퐁당 뛰어든 사람은 주님과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물에 잠겼다.’ 이것을 표본으로 성령세례를 줄 때 그대로 하십니다. 성령세례 안에 물세례가 들어 있어요. 예수님이 떠나시고 보혜사가 오시는 이유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에 마무리로 성령이 오신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시면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기준 정하기가 이미 끝난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지키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죠. 박카스나 건강음료에 보면 ‘의약 외 품목’이란 표시가 되어 있이요. 의약품이 아니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복음 외 품목’들이예요. 이런 것을 주님이 지킬 의무가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께 찡찡대며 짜증을 부리는 이유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주님이 안 지켜줬다는 것입니다. ‘복음 외 품목’인데.
정작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뿐인데 우리는 십자가 자랑할 생각은 않고 다른 것 안 지켜 주신다고 십자가 지신 분께 대드니까 얼마나 우리가 육적인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9장 31절에서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 받는데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으로 구원이 되지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 말씀을 들으면서 오해한 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는 죽는다(마16:21)’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결코 주님께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남자들이 결혼할 상대에게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이죠.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습니다.’ 지가 뭔데 상대를 지킵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왜 이런 장담을 합니까? 그냥 겸손하게 “지금은 내가 지켜줄 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33절을 봅시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의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이 평소에는 사람들과 말을 잘 했는데, 청문회에서는 왜 말을 안 합니까? 제자들끼리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예수님이 질문하시니까 왜 잠잠하지요? 할 수 없이 국회의원이 다 이야기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증인에게 묻습니다. 천국 가면 누가 더 높으냐는 이야기를 했지요? 맞습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 보고 기쁜 게, 다 알아요.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지.’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정신 차리면 더 큰 탈이 납니다. ~척이 됩니다. 정신 차리나 안 차리나 인간은 별 차이가 없어요. 주님이 귀하게 생각지 않는 것을 나는 귀하게 여기고,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는 전혀 귀하게 생각지 않고 이런 행세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정작 귀한 것은 갔다버리잖아요. 오죽했으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는가 하면, 사람에게 냉정하게 버림받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주님이 중요한 줄도 모르고 버렸습니다.’라면서 자기 행세를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늘 확인하면서 바라보는 거예요.
‘내가 참 철없는 짓을 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바라보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아직도 원인이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한 번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주님이 착한 인간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회개해도 내일되면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나에게 왜 이런 낭패를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문제까지 출제해 주십니다. 출제하시면서 정답과 연결시키면서 십자가를 투입합니다. 우리는 문제 내줘도 못 풀어요. 답을 알려줘도 문제가 뭔지도 몰라요.
따라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내주신 문제가 무엇이며, 정답이 무엇이며, 그 문제를 푸는 것까지 100% 주님이 혼자 다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못 알아듣고 ‘정신 똑바로 차려.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말고.’ 하면서 잔소리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하는 이유가 뭔가? 본인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본인에 의해서 자신이 기대한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내가 잘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 받겠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제 주장에 의하면 이 말씀을 누가 다 지킵니까? 예수님 홀로 새 언약 용도로 다 소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 폐기론은 아닙니다. 율법은 있어요. 주님이 가져갔지. 폐기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져 가셔서 주님이 완성한 상태로 우리에게 주시니까 완성 속에 율법은 살아 있어요. 복음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요. 이 강의가 다 끝났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 됩니까? 죄 지으면 되지요. 어떻게 죄 짓습니까?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9장 35절에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복음 알았다고 한 것이 불과 5초 전이에요. 그런데 5초 후에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대하면서 ‘미쳤어요?’ 이런 반응이 나와요. 내가 뭐가 못나서 끝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차만 몰면 앞차를 추월 못해서 환장하는데 왜 끝이 되어야 해요? 양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시간 때우려고 하는 것이지 바쁜데 양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광주에서 서울 가는데 ‘가마 탈래, 비행기 탈래?’ 물으면 가마 탄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본성의 관리 주체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리 주체이고 싶어요. 여기에서 가증함이 나오고 위선이 나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 가운데 이런 꼼수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주님, 저는 첫째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설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증인석에 앉아 있거든요. 주님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지요. “너희들이 길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니?” 이 물음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면서 물은 거예요.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서열이 높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요즘 노인들은 좋은 세상을 만났습니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TV가 케이블 방송까지 가세해서 하루 종일 나와요. 채널 바꿔가면서 TV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요즘 박근혜, 최순실 사태 때문에 계속 시끄럽지요. 첫째가 된 대통령과 그 일당의 허물이 폭로되면서 마음껏 욕하고 비난하면서 나도 첫째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즐거움과 희열을 맛봅니다.
36-37절을 봅시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영접’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주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어린아이 영접이 아닌 예수님 영접으로 보는 거예요. 이 말은 ‘그동안 나(예수님)의 모습을 띤 사람들을 너희(제자)들이 첫째가 되겠다는 심보 때문에 무수히 짓밟았다는 것을 이제 알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분명히 주님을 대비하는 마음을 줬건만 제자들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정신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린아이’를 왜 거론하십니까? 어린아이는 관계성을 말하기 위해 거론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어린아이다울 때는 스스로 선택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본인의 선택과 생각이 불필요하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 앞에서 성도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제일 큰 자리에 앉게 해주세요.’ 이건 선택이죠. ‘나는 기도해서 두 번째 자리를 얻고야 말리라.’ 이건 맹세죠. 선택과 맹세는 본인의 의지에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린아이는 본인 생각은 무시당하고 뒤에 계신 예수님이 주는 대로 받으니까, 예수님이 원인이고, 나(어린아이)는 결과가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원인이고 나는 예수님의 결과물이다.’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무시당합니다. 왜냐? 그들은 방향성이 첫째가 되는 것, 남에게 안 지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성으로가 아닌 독자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최고가 되려고 나서는데 그것이 안 되면 다른 것을 선택해서 거기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지요. 이것은 방향이 잘못 된 거예요.
예수님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저주 받는 자리, 자진해서 버림받는 길로 가셨어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체스터턴 이란 사람이 주장하기를 ‘세상의 어느 종교가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버림받기 위해 믿으라고 하는가? 그런 종교는 없다. 그래서 너희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포기할 때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 대단하지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왜 전지전능하고 위대한가 하면,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루지 못한 한을 내가 믿는 신이 해소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겨 그 신을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신이든 전지전능하지 않은 신은 없어요. 힌두교의 브라만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라만 아트만. 아트만은 ‘자아’란 뜻인데, 힌두교의 특징은 아트만이 나도 되고 신도 돼요. 내가 곧 신이에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큰소리 쳤는데 자기 꼴을 보니 신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도를 닦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신이다.’ 라고 출발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이 불교는 아담의 마음에서 나왔어요. 이 세상의 모든 아담의 마음을 가진 자가 불교 신자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곧 신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한 말이잖아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요.
성경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것을 온 몸으로 뿜어내며 삽니다. 150만이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고 외쳤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50명이 청와대 근처에서 하야하라고 외쳤는데 대통령이 하야를 했다. 촛불 들었던 사람이 정말 기분 나쁠 거예요.
다수가 외칠 때는 하야하지 않았는데 왜 소수가 해냈는가?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그러나 그 소수에 내가 포함되었다면 정말 기쁘지요. 이게 바로 내가 신이라는 증거입니다. 왜냐? 내 판단과 내 수고대로 성취되었으니까. 앞으로 또 내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행하면 성취될 것이니까 나는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실망한 것은 자신들이 신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합니까? 자신들의 꿈을 부숴버리기 때문이죠. 누가 희망을 가지라고 했던가요? 죄는 목적이 있어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복음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복음이 아닌 것은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깨닫게 돼요. 그런데 복음 외의 것에는 절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대신 마귀가 도와줍니다. 왜냐? 지옥은 마귀가 친절하게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갈 수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벽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못 보게 가립니다. 방수, 방음, 온도도 차단되는 완벽한 벽입니다. 하여튼 마귀는 복음이 일체 들리지 않도록 온갖 발악을 다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늘 벽으로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벽이 우리를 소경으로 만들어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가다보면 벽의 인도를 받고 있는 동창생들을 많이 만나요. 이야기도 서로 잘 통합니다.
말씀은 언어인데 죽음을 유발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함으로 관심을 나한테 끌고, 그렇게 될 때 상품을 팔 수 있는 겁니다. 국회의원들이 선거 유세를 할 때 온 우주를 다 살릴 것처럼 말을 하지요. 그런 말이 자신을 국회의원 되게 만들잖아요.
사실은 말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허위를 덮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덧붙이고 계속 이렇게 갑니다. 이것이 힘든 사람은 지리산에 가서 혼자 삽니다. 어떤 의미에게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무조건 자기 말을 들어줄 대상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20대에는 눈이 낮기에 그 때 결혼하면 좀 쉬운데, 30대에 가서 결혼을 하려고 하니 후보감이 점차 감소해요. 생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물들 중 암수가 결합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수컷 매미는 여름 밤 내내 울어도 암컷이 찾아와 교미하는 것은 4% 정도랍니다.
왜 인간에서 인간이 태어났습니까? 이건 상식이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이 인간을 낳아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인간 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만들듯이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만든 인간을 따로 상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 약속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은 어머니가 하늘에 있어요. 그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영접’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관계성 속의 결과물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9:37)”라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원인으로 해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에서 단계를 2단계로 말씀했어요. 폭포가 한 번 떨어지고, 거기에서 다시 한 번 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서 예수님, 예수님에서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 외 인물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어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영접하도록 하시면 그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니면 나는 구원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레벨에 들어가게 되어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세상에서 자기를 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뭡니까? 왕따 당하고 추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원했습니까? 아니죠. 우리의 본성은 남에게 인정받고, 낙오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이것이 막 사는 거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우리는 으뜸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주께서 구원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한 거예요.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을 주님이 몽땅 가져가서 우리는 못 지키는 사람으로 들통 나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럼 이 말씀 듣고 구원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구원 된 자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봐야 돼요. 책망 받는 제자들을 보면서 ‘꼭 내 모습이네.’ 이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가 성질을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내일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요. 아니 죽을 때까지 똑같이 살아가야 해요.
첫째가 되는 것을 포기 못하는 이유가 포기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남과의 경쟁에서 졌는데 기뻐하는 것은 바보지 정상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강제로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 개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이 책망하실 때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38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을 보면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우리를’의 자리에 ‘십자가마을’을 집어넣어 봅시다. “선생님, 십자가마을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어서 우리는 그를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못되어 환장한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은 버림받은 떨거지들의 모임이라서 본인이 원인이 되어서는 참여할 수 없고 주님이 보내셔서 참여했으면 참 좋겠어요.
수련회 참석여부에 대해 본인의 의지나 선택을 말할 필요도 없어요. ‘나는 참석을 결심했기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사람이 참석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본점이 여기 있는데, 대리점이 왜 본점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은 너희들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스스로 잘나서 본점 직원의 자격으로 귀신을 쫓아냈나? 내 능력 아니면 너희들도 귀신 쫓아내지 못했어.’
귀신이 나갔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은 숨겨놓은 지점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따르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훌륭해서가 아니라 죄인의 대표자로 있는 거예요. 따르지 않는 자가 착하다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상황을 오해해서 자신들이 약간이라도 훌륭한 점이 있어서 자신들을 제자로 부른 것으로 여겼어요. 십자가마을이나 우리교회가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십자가마을을 쳐다본다면 바보에요. 정말 귀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님 마음대로지 우리가 어떻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마을은 매일 결과물이어야지 10년 전은 어떠했고, 5년 전은 어땠고 지금까지 이렇게 이끌어 왔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음 주일에 모이면 있는 것이고 안 모이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모였다면 ‘아, 주님이 또 기적을 일으키셨구나.’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다음 주일 늘 나오시던 분이 안 나오면 ‘왜 안 나오셨지?’라는 궁금증이 생기고, 이게 바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심보이고,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은 주님의 은혜고, 이 은혜를 주신 주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김 집사님이 왜 안 오셨지? 왠지 허전하네.’ 그러면 주님이 “허전하면 안 되냐?”라고 하실 거예요.
어느새 우리가 복음을 막는 벽이 된 거예요.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하에 복음을 가리는 마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남은생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께서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 그게 바로 주님 앞에 선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은 전혀 하늘나라와는 무관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금 잘 못했다고 가슴을 치고, 좀 잘했다고 자화자찬하며 뿌듯해 하는 이 심보가 복음적인 것이 아닌 반복음인 것을 십자가 은혜로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1. 18. 08:54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