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5강 [팽창과 수축]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강해 제 5강 [팽창과 수축](강의 : 이 근호목사) 지난 시간에 이 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우선 나라도 살아야 되니까 수축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했습니다. 수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와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서 나만이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괜히 남을 잘못 만났다가 상처 입으면 안 되잖아요. 발을 하나 빼놓고 상처 입었다 싶으면 얼른 거두는 요령 있는 방식이 현대인의 삶의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수축이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어요. 현대인이 수축을 하게 되면, 자기한테로 모든 것을 모으게 되면, 흘리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남기고, 배제하고, 제켜야 될 그런 요소들이 굉장히 많아요. 여자들이 신는 스타킹이 있지요. 이 스타킹이 땅바닥에 누워 있으면 이것이 구멍이 났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이 스타킹을 발에 신겨보면 군데군데 올이 나가서 구멍이 뚫렸으면 이것은 전체를 커버하지 못하지요. 구멍난 것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개인이 살기 위해서 이것은 제키고, 이것은 배제하고, 이것은 삭제하고, 난 너하고 안 놀아, 하고 단독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데 이렇게 되면 뭘 놓치는가 하면, 전체성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물었잖아요. 주부로서 살아가는데 남편은 직장생활 잘하고, 그리고 그들이 행복을 느낄 때 문제점은 뭐냐? 본인이 단편적으로 보면 행복한데 전체성을 놓치지요. 전체성을 놓치고 얻는 대가가 뭐냐 하면, 바로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돌아갈 때 제가 염려하는 것은 뭐냐? 수련회 마쳤는데 집에 가도 여전히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이 주도권을 고수해 버려요. 그러면 역시 전체성은 귀담아 듣지도 않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지, 하고 그대로 돌아간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왜 하겠습니까? 이 수축을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수축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모든 것이 퍼져 나온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 하는데 그것을 팽창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팽창하지요. 팽창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한곳에 다 집어넣습니다. 이게 수축인데 어디에 집어넣는가 하면, 성육신과 십자가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8절에 나옵니다. 이 골로새서가 정말 어려워요. 신학자들도 손을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잖아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그 다음에 뭐냐? 다 같이 읽어볼까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지요. ‘죽은 자들’이거든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본인이 소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의미가 뭐냐? 소위 신학교엣 제대로 공부했다면 죽은 나에서 내가 부활하는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죽은 자들,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심도 있게 연구했던 신학자가 있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사람이에요.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한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에서 부활한 것과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고 이 전체에,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예수님의 창조를 회수를 해요. 회수를 하고 그것을 새로운 질서체제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산자가 아무도 없게 만드는 것. 저는 이것을 한라산 분화구로 보는 겁니다. 백록담이 있지요. 여기에 한라산이 있고 제주도가 있고 이 산 밑에 민가가 있어요. 그 민가에 질문했습니다. “지금 살림 잘하시고 남편 직장 잘 다니고,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행복합니다.” 여기에 민가가 있는데 이 민가는 사실은 백록담에서 흘러나온 마그마와 화산재위에 민가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토대가 뭡니까? 이 마그마의 토대위에, 화산재의 토대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전체성입니다. 전체성인데 개인은 자기만 행복하면 다 된다고 생각해요. 이게 구멍 난 스타킹이 돼요. 자기는 덮을 수가 있는데 전체를 덮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팽창된 전체를 누가 가져가서 수축한다면, 예수님이 이 전체, 백록담, 한라산을 다 가져가서 수축해 버렸다는 말이지요. 성육신으로 수축해서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수축해 버리면 이 민가는 죽음의 바탕위에 일시적 행복을 구가하는 헛되고 헛된 인생을 보내는 것이 되는 겁니다.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기가 힘들어요. 행복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회를 찾아왔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이미 죽음 안에서 날라 가버렸습니다.”라는 말을 설교자가 함부로 못해요. 교회에 살려고 왔는지 죽으려고 왔는지 분간도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났다, 이 대목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사기 16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이 두 번째 여자인 기생을 보고 들어갔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성 밖에서 포위에서 성 밖으로 나오면 체포해서 죽이기로 작정하고 새벽까지 기다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문이라는 자체가 블레셋이라는 적과 삼손자체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을 삼손이 어떻게 했다? 경계선, 그 문짝을 어깨에 메고 와 버렸어요. 그러면 삼손 자체가 움직이는 경계선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삼손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이 쳐놓은 경계선, 기준자체가 삼손에 의해서 날아가 버렸어요. 경계선 자체가 없는 거예요. “나는 소박하게 민가에 살아야지.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의 구역이고 이것은 행복의 보금자리야.”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삼손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죽음에 수축해 버리니까 나와 내 바깥을 경계지우는……, 나는 나, 내 바깥에 있는 모든 타자, 거기에는 하나님도 예수도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경계선 자체도 이미 수축 속에 다 집어넣어 버리면 벌거벗은 채로 나와 버린 거예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울타리 날라 간 것과 똑같은 겁니다. 삼손이 문설주를 뜯어내서 메고 가버린 것은 성을 철거하는 수준이에요. ‘경계를 중심으로 해서 나를 체포하려고? 그렇다면 너희들의 체포자체를 무산시켜야지.’ 하고 그 지키는 성 자체를 날라 가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말은 이 백록담의 모든 것을 어깨에 메고 그냥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만 그냥 부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서 모든 인간은 일괄적으로 이미 죽은 자가 확정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팽창과 수축으로 예수님이 증명해 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다음 구절은 뭐냐? 그 바깥에서 일어난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보는 겁니다.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화평이라고 한다면,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좋게 지내자는 식으로 그동안 교회에서 이해를 해 왔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화평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화평을 내밀어도 인간 쪽에서 화평을 거부합니다. 이유가 뭐냐? 화평을 하게 되면 주도권을 빼앗겨요.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몰랐지요? “하나님,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너와 화해할게.” “감사합니다. 이제 집으로 가자.” 아니에요. 집으로 못가요. 여러분, 나사로 같은 거지하고 화해했습니까? 동정은 하고 도와줄 수는 있어도 화해를 안 합니다. 화해의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상대를 보고 화해를 해야지요. 화해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돈이나 빌려달라고 할 건데. 내 살림살이를 책임지라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겠어요? 갑질을 해야 돼요. 사람은 갑질이 소망이지 화해하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내가 남들을 도와줌으로서 내가 도와준 상대 앞에 나는 갑이 되고 도움 받은 그 사람은 나에게 을이 될 때 우리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재미로,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분이 우리와 화해한다면 누가 갑이 되는가? 주님이 갑이 되어버리면 소박하게 나만의 인생,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던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앞에 강탈당합니다. 그래서 화해했다고 할 때, 하나님과 화해했으니 찬양합시다, 할 때 아무 뜻도 없이 찬양하고 그러지 마세요. 정말 화해에 들어가려면 이제는 나의 주도권은 이미 주님 앞에 등기이전이 다 되었어요. 집이고 부동산이고 간에 자식이고 간에 주님 앞에 다 넘어갔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될 때 그게 화해관계입니다. 이 화해관계는 전쟁관계인데 이긴 자가 몽땅 다 갖는 관계지요. 그렇게 화해가 된다면 ‘주님의 화목제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또 오해가 있어요. 틀린 곳이 한두 군데 여야지요. 우리가 화목제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은 화목제물 되셔서 그 화목제물을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오늘 강의 중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화목제물이 돼요. 화목제물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이 시대에,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화목제물로 기능하도록 주도권을 주께서 쥐고 있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2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어떻게 한다? “채우노라.” 여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나오는데 주님이 고난 왜 받았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고난을 제가 채우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은 고난을 채우겠습니다.”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하니까 이런 노래가 생각이 나요. “스치는 바람결에 사랑 노래 들려요 내 곁에서 떠나버렸던 .” 이 노래 아시지요? 특히 노래방 하는 사람은 아십니다. 그 노래 끄트머리 가사에 보면 “이제는 울지 않을래 이별은 너무 아파요 다시 떠난다 해도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이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누가 주고 누가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해서 세상에 쓰이게 되면,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구경 못했지요? 저를 보세요. 제가 여러분의 죄 때문에 당하고 있는 이 모습이 지금 주님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걸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함부로 도장 찍지 마세요. 주께서 화해 했기에 우리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마세요. 사인이나 도장 찍을 때는 볼 것 다 보고 해야 돼요. 주도권은 양도해주시고, 양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도바울처럼 화목제물 자체로 걸어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문제가, 이렇게 모든 것을 수축하고 그리스도 몸에서 화목제물이 되어버리면 뭐가 상실되는가 하면, 시간 속에서 시간이 정지되어 버려요. 시간이 정지되면 성질만 남습니다. 이것이 천국과 지옥이에요. 천국과 지옥은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성질만 계속해서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무한반복을 사자성어로 하면 무한리필이 되지요. 끊임없는 저주, 시지프스의 신화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산위에 돌을 굴려 올리는데 산 정상이 뾰족해요. 올려놓고 1초라도 머물러 있으면 쉬는 시간이 있는데 올라가자마자 돌이 밑으로 주르륵 내려가요. 저쪽으로 내려가면 또 올립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또 올려요. 시지프스 신화가 왜 생겼느냐 하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질 때 인간의 일생은 이렇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때, 내 새끼는 내가 알아서 키웁니다, 우리 가정은 내가 관리합니다, 라고 할 때 문제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고, 또 하나 문제 지나가면 또 하나 생기고. 자식이 둘 같으면 하나가 애 먹이면 다른 하나는 착하고. “엄마,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 먼저 들을래?” 이런 식으로 사람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어버려요. 시지프스의 그 고된 노고는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지프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 고된 노역과 기준은 도대체 누가 집어넣어 줬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마귀가 그걸 해놓고 자기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쏙 도망쳐서 갔다는 것을. 마귀가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자연세계 속에 동결되었어요. 우리의 성격, 우리의 성질, 이것은 자연과 함께 연동해서 움직이기에 비가 좀 불어도, 바람이 좀 불어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요. 죽을까 싶어서.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모든 시간은 예수님 죽음 속에서 사라지고 거기에서 시간이 아닌 성질, 축복의 성질과 저주의 성질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다면 저주의 무한리필은 참 곤란하지만 축복이 무한리필은 감사할 일 아닙니까? 그게 화목제물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내 가정, 내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 앞에 화해하면서 넘겨주세요. 어차피 이 한라산 전체가 주님의 어깨위에서 해체당하고 철거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듯이 사람의 저주는 딴 게 아니고 불멸이에요. 사람이 안 죽으니까 저주가 되는 거예요. 이게 저하고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의 주도권이라 하는 것은 무한반복을 스톱할 수 있지만 마지막 죽고 난 뒤에는 이 무한반복을 정지시킬 수 있는 주도권이 없어요. 시지프스처럼 그냥 저주받고 있는 겁니다. 혹은 계속 복 받고 있고. 복 받고 있는 것이 천국이고 저주받고 있는 것이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요, 라는 이 복음의 소식에 의해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팽창입니다. 팽창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그 비밀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셔서 그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고, 그 뒤에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골로새서 전반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골로새서가 뭐냐? 첫강의부터 이야기한 것은, 단일현실에 다중현실이 쳐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단일현실에서 나답게 살고, 개성 있게 살다가 갑자기 뭔가 이 세상전체가 통째로 다중현실에 의해서 그 성격이라든지 모든 결정사항이 끝나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원래상태로 복귀되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탈영병하고 헌병대하고 화해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탈영병은 집에 가고 싶어서 탈영한 것이고 헌병대는 그 탈영병을 잡으러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화해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집으로 보낸다는 말입니까, 부대로 복귀한다는 말입니까? 부대로 복귀하지요. 이게 피조물의 위상이에요. 그동안 마귀 때문에 헛바람 들은 겁니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바람도 이런 헛바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 허용되는가 하면, 죽기 전까지 허용된 거예요. 그래서 그 죽음자체 위에는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남는 것은 성질만 남거든요. 성질만 남는다면 이게 불멸입니다. 그 때는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어도, 아무리 칼 가지고 자기를 찔러도 안 죽어요. 유령 같아요. 죽어서 고통을 없앴으면 좋겠는데 안 죽는다는 말이지요. 어떤 가정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기 식구들 자는데 목 졸라서 다 죽이고 마지막에 약 먹고 자기도 죽고. 그렇게 되면 고통이 없어집니까? 마지막에 본인이 행동한 것이 뭐예요? 가족들 다 죽고 자기도 약 먹고 죽었지요. 그러면 계속해서 어떤 성질은 남습니까? 내 인생은 내가 쥐고 마지막 자살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내가 결정한대로 행복했다는 그것이 그대로 남아서 지옥 가겠지요. 지옥에 가면 나는 내 개성대로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이 계속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영원무한리필로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다. 왜?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야 되기에. 그래서 자식 죽이고 아내 죽이고 자기 입에 약 털어넣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지요. 야, 참 그런 일이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자식 죽이고 아내 죽이고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그런 고백이, “이것이 주께서 시킨 일입니다.”라는 고백이 과연 진정성 있게 나올까요?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고 되어 있어요. 감추었으면 계속 감추고 있지 나타내기는 왜 나타내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에게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성도 외부에서는 이렇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세상 전체가 십자가 중심으로 심판된다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2장부터는 뭐냐?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바깥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지고 무슨 난리를 쳐도 내 마음은 멀쩡하게 “뭔데?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2장 8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하는데요. 이거 설명하는 논리가 좀 어려워요. 어렵더라도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이미 철학과 속임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공식. 위치 = 주체 + 권력. 세상권력에 헛된 속임수와 철학이 이미 있는 거예요. 그 철학과 한통속이 되게 되면, 이게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 우리의 위치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미셀푸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권력에 대해서 아주 잘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느냐 하면, 옛날 봉건시대의 권력은 왕이라는 군주가 쥐고 있었어요. 그래서 권력을 보려면 왕궁에 가면 되고, 수도인 한양에 가면 되고, 높은 자리에 가면 권력이 인격화되고 가시화 되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셀푸코의 책에 보게 되면, 일반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냥 교도소에나 보내서 처리하지만 왕의 몸을 죽이는 것은 능지처참, 말을 가지고 사지를 잡아당기고, 공개적으로 처형을 해요. 그 이유가 뭐냐? 왕의 몸과 너희들의 몸이 다르다는 겁니다. 같은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그 다르다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권력으로 계속해서 서열을 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봉건사회의 권력이에요. 저는 사극을 거의 안봅니다. 화가 나서 안봐요. 조폭도 아니고 말이지요. 네가 뭔데 명령을 하달하고 상당히 기분 나쁘거든요. 왕이라고 별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왕이라고 해서 특별대우해주는 그것, 그렇게 될 때 ‘정말 이 세상이 더러운 세상이 맞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셀 푸코는 이야기합니다. 군주 때는 이 권력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지금의 권력은 편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미셀푸코의 이 아이디어는 아주 탁월합니다. 권력을 누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서 기는 거예요. 알아서 적당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가 스스로 이 시대에 인정받는 사람으로, 스스로 법을 만드는 식으로 법의 네트워크로 퍼져 있다는 겁니다. 알아서 하는 거예요. 알아서 하니까 더 무서운 거예요. 왜냐하면 위에 권력이 있으면 몰래 딴 짓 하면 되는데 이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에 스며드니까 법이 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매일 같이 내가 뭘 만드는가? 규칙을 만들어요. 내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고요. 아침에 여섯시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고……, 내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고요. 규칙을 만드니까 이것은 편재되어 있는 권력망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미셀푸코가 이야기한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함축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적어 볼테니 혹시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주의 권력은 죽게 하고 살게 내어버려둔다. 그런데 현대자본자의 권력, 현대국가의 권력은 살게 하고 – 푸코는 이것을 생명권력이라고 해요 – 죽게 내버려 둔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군주는 걸리면 체포해서 처단해 버려요. 사족을 멸해버립니다. 군주 근처에는 항상 죽음이 있어요. 이게 감히 왕에게 대들어. 그것 때문에 백성들은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왜? 군주에게 걸리면 안 되니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현대는 복지국가정책을 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틈새복지를 해서 연로한 사람들이 굶지는 않는지 기초생활을 보장해줍니다. 동사무소공무원들 보내서 복지를 통해서 전부 다 살게 하는데 살게 함으로서 죽음이라는 것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살게 했기 때문에 죽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쉽게 풀이하겠습니다. “폭력은 인간을 살게 하고 칭찬은 인간을 자살하게 만든다.” 그 이야기에요. 잘한다, 훌륭하다, 내 새끼 최고다, 나중에 벌써 자살했어요. “엄마, 의미가 뭐야?” 밥 먹여줘도 밥은 먹으면서도 의미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뭐 하면 되지? 앞으로 내가 삼십대가 되면 어떻게 되지? 내 가는 길은 어디야?’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 라면을 끓어먹고 있으면서 ‘내 인생 어떻게 살지?’ 그러고 있어요. 지금 살고 있잖아요. 살고 있는데 자꾸 사는 그 힘이 나를 죽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뭐가 더 있을 거야. 난 이 직장 때려치워야지. 더 좋은 직장으로 가야지 여기는 나한테 안맞아.’ 뭐 열정페이?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지금까지 무시 안당하고 살았어.’ 직장에 사표 팍 던지고 나가는 거예요. 살려주기 때문에 점점 더 죽음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 군주 때는 뭡니까? 죽는 게 확실해요. 걸리면 죽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되는 거예요. 둘 중 어느 것이 행복합니까? 군주시대가 훨씬 행복해요. 그 때는 암 걸려도 암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행복하고, 당뇨병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행복해요. 암 걸리든, 당뇨병이 걸리든, 뭐가 걸리든 그것은 늙어죽는 것으로 일괄 처리하는 겁니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7세에요. 50넘으면 영감소리 듣고 60이 넘으면 웬 기적이냐, 해서 온 가족들 모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요새 환갑잔치 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부부가 제주도에나 갔다 와야지요. 자식들에게 알리지도 못해요. 한 때 65세는 뭘 주고 또 노인으로 쳐준다고요? 내가 65세에 다가가니까 이게 70으로 늘어나려고 해요. 나는 공짜표도 못타먹고 죽을 판이에요. 내가 70이 되면 다시 75로 늘어날 것 같아요. 소위 인간들의 꼼수가 인간들의 늪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런가? 주도권을 쥐고 본인 인생 문제를 본인이 해결하려고 하거든요. 이런 식으로 양육 받았고, 이런 식으로 훈계 받았고, 이런 식으로 남이 지시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런 규칙을 매일같이 개발해요. 자기의 권력을.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것이 헛된 속임, 여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의 유전’이라고 되어 있지요. 사람의 전통과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세상의 철학과 세상의 초등학문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냐? 8절에 보면 무엇을 좆음? “그리스도를 좇음”이 나오지요. 그리스도를 좆는 것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서 좆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을 양도하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팽창이……, 9절에 나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게 수축이지요. 그리스도 몸 안에서 창세전부터 있는 의미나 모든 개념이 그 안에 응축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몸 안에 그것이 응축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그것이 팽창이 되면 십자가의 의미로만 다시 분화구를 일으키면서 바깥으로 온천지에 마그마를 퍼부으면서 새로운 질서체제를 펼치게 되어 있어요. 제가 묻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새로운 질서체제의 성질이 십자가일까요, 부활일까요? 이게 십자가에요. 부활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원래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는 것을 믿어야 된다고 해서 골라잡아요. 예수님이 마굿간인지 외양간인지에서 태어났다. 탄생. 그 다음에 열두 살에 아버지보고 좀 대들었지요. “왜 저를 찾습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반발을 했고. 그 다음에 물에서 세례 받고. 그것이 30세인지 29세인지는 확실치가 않고요.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기적을 베푸시고, 산상설교 하시고, 열두 제자 뽑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잖아요. 사람들,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여기서 자기가 관찰자로 딱 서 있어요. 어느 것을 믿을까, 하고 보는 겁니다. ‘탄생? 병원에서 출생하지 왜 여기서 하지? 이건 나는 싫어. 물세례. 그것도 귀찮아. 기적? 이건 좋다마는 된다는 자신감이 별로 없고. 십자가?’ 후딱 지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부활? 아, 이걸 믿고 싶어 해요. 부활. 왜? 부활되기 전의 이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서 포함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을 믿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서 부활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이론이 부활의 새생명이론입니다. 부활의 새생명으로 성령 없으면 못 지키는 말씀을 지키자고 그렇게 나와요. 이단입니다, 그거. 이렇게 돼버리면 무엇을 용인하는가 하면, 관찰자 자리를 용인하게 돼요. 제 3의 따로 떨어져 있는 자리. 골라, 골라, 골라잡아라, 골라잡는 자리를 용인하게 돼요. 그러니 이미 십자가로 갈 때는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선택해서 골라서 믿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냥 행함의 일종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어떤 정보를 얻어서 그 정보 장착해서 구원받겠다는 종교적인 욕구에 불과한 거지요. 제 3의 자리는 없습니다. 3장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 다음에 뭡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너희가 죽었고. 이미 죽은 상태에서는 내 생명 구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요. 그 다음에 우리를 죽게 하는 생명이 무슨 생명이냐? 그리스도의 생명이거든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새로운 피조물을 이미 주께서 마련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팽창에서 수축되었다가 수축에서 다시 팽창으로 나가게 되면 새로운 마그마가 펼쳐지면서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는 새로운 백성들이 거기서 창조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의 주도권이라 하는 것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이러한 생명이 우리한테 있다고 치고,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만 있다고 치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대인관계나 교회관계나 어떻게 교제하고 나눌수가 있는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야 돼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면 반드시 그냥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한 것도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마저 채운다는 입장에서 결혼을 해야 되지요. 아주 비장한 결심을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그게 아닙니다. “주님이 받았던 고난을 내게 채우는 입장에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이상한 프러포즈는 없거든요. 흥, 치, 뽕, 하고 도망갈 것이 뻔하다는 말이지요. 케이크를 먹다가 아야, 해서 보니까 다이아 반지가 들어 있어야 되는데 “우리 주님의 고난을 함께 마저 채울까요?” 원 샷 하는 것도 아니고 고난의 잔을 우리가 왜 마십니까? 인생 편하려고 결혼하지 남은 고난을 마시고자 결혼하지는 않잖아요. “우리는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 되었습니다.” 이런 결혼은 아마 선교단체에서 강제로 짝지어줄 경우에나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교단체 안에서 서로 만나 결혼할 때에. 하여튼 형식과 폼은 온갖 좋은 것은 다 가져와요. 골로새서에서 다 가져오는데 마음은 영 딴판에 있었어요. ‘저 남자 때문에 팔자 펴 보자. 좀 편하게 살아보자.’ 이런 것이 있더라도 결국 우리는 뭐예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는 날마다 뭐 할 줄 안다? 날마다 조작해요. 10미터쯤에서 오해할 만한 것, 오해를 유발할 만한 그 일에 대한 작업을 3미터 앞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크다, 교회가 굉장히 아름답다, 청소도 잘 되어 있다, 50미터 앞에서 보면 너무 교회가 아름답거든요. 그런데 막상 교회 안에 들어가면 그 아름다운 교회를 유지하고 연명하기 위해서 그 많은 아줌마들을 권사, 집사, 구역장으로 만들어서 뺑뺑이 돌려요. 그것도 무임금으로, 열정페이로. 10미터 앞에서 아름다운데 3미터 앞에 가니까 땀 뻘뻘 흘리면서 청소하고 있어요. 그것도 강요에 의해서. 그것도 모자라서 좀 이상한 단체에서는 그렇게 해야 14만 4천에 포함된대요. 그게 뭐냐? 헛된 속임수에요. 자기 인생을 내가 꾸려간다는 주도권을 아직도 쥐고 있어요. 그놈의 주도권 화해하면서 넘겨주면 될 텐데 아직도 내가 되고 싶은 내가 갖고 있어요. 그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구멍 난 뭐? 구멍 난 스타킹이에요. 어설픈 개념과 의미를 자기가 집어넣는데 그것은 단편적인 것은 되는지 모르지만 전체성을 커버할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4장을 봅시다. 7절에 누구 이름나옵니까? 두기고. 9절에 보면 오네시모. 그 다음 10절에,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11절에 유스도. 14절에 의원 누가, 데마. 17절에 보면 아킵보, 빌레몬의 아들이지요. 이렇게 죽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 골로새서를 보면서, ‘아, 여기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이 있네.’ 하는데 똑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주체가 아니고 위치에요, 위치. 주체가 아니고 위치라니까요. 위치는 뭐다? 주체 + 뭐가 나온다? 주님의 권력에 의해서 그들이 공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위치라고 하니까 잘 이해가 안될 것인데 예를 들면, 제 집안에 열 식구가 살았어요. 나하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고모나 삼촌들이 많이 살았어요. 할머니가 늦둥이를 많이 낳았어요. 형과 삼촌이 동갑인 집이 옛날에는 많았잖아요. 그렇게 살 때 여자들을 알아봤어요. 군불을 때는데 불 땐 아랫목은 뜨겁고 1미터만 거기서 올라가도 윗목은 싸늘하고 차갑거든요. 우리집이 로켓 달나라 가는 것 본다고 TV 샀어요. 1969년도인가에 샀는데요. 암스트롱이 달나라 가는 것 본다고 TV앞에 앉아 있는데 엉덩이가 차갑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은 여자들이 빠른데 얼른 담요를 가져다가 깔아요. 그래서 여자들끼리만 깔고 덮어요. ‘아, 이렇구나. 이것이 여자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구나.’ 담요가 있는데 고모 세 명과 할머니까지 네 명이 앉았다는 말이지요. 숫자는 네 명이지만 그 담요는 오직 한 장의 담요에요. 이게 위치입니다. 개개인의 역량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개개인의 믿음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어디에 걸터앉았는가? 어느 모포를 덮고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부부가 된다는 말은 같은 담요, 주님이 주신 담요, 용서의 담요, 화해의 담요를 같이 덮고 사는 것을 부부라고 합니다. 그것도 주 안에서 부부에요. 4장이 벌써 끝나버렸네요. 그런데 이걸 보고 “여러분, 이 두기고가 어떤 사람인데 여러분들도 본받아서 사도바울을 위해서 봉사합시다.” 봉사합시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김 집사님, 봉사 안했지요? 두기고가 되어야지. 안 그러면 탈락입니다.” 교회에서 사람 이름 거론하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하면 전부 교인들이 주눅이 들어요. 아킵보는 목숨을 바쳐서 봉사했고, 아리스다고는 감옥 까지 같이 따라갔고……, 하면서 자꾸 김 권사를 쳐다보네요. ‘목사 집 쌀 떨어진 것도 모르지 지금! 복음과 함께 고난을 안 받고 있지?’ 이런 식으로 은근히 협박 아닌 공갈을 우회적으로 ……. 본인은 정말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안 듣긴 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sns에 이런 소리를 했어요. 제발 예수 이야기만 좀 해라 하는 말을 왜 했겠어요. 예수 이야기만 하고 싶어도 골로새서 4장이 나오니까 실컷 앞에서 1장, 2장, 3장,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또 이런 분이고, 죽 해놓고 4장에 들어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봅시다. 교회 꼬라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볼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여기 기도하라고 했는데 요즘 새벽기도 영 안 나오던데요.” 이렇게 막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성경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로 출발했으면 사람에게 가서는 안돼요. 그리스도에게 되돌아 와야 됩니다. 모든 것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골로새서 4장에 이런 인사가 나온다는 것은 “사도바울과 같은 담요를 지금 덮고 있지요?”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것 맞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주어진 형편이 그리스도가 주신 위치, 그리스도의 권능과 함께 있는 것, 그렇지요?“라고 던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함께 옥에 갇히고, 어떤 사람은 도와주고, 그런 것은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서,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주께서 알아서, 사도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도바울에게 듣고 있는 그 복음을 위해서 내놓을 때는 내놓고 거둘 때는 거두고, 이것은 사도바울의 눈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믿는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왜 목사가 그 중간에 건방지게 겁 없이 거기에 차고 들어와요? 목사가 구원했습니까? 목사가 십자가 졌어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지지도 않았어요. 사도바울은 세례도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외에는 주지도 않았어요. 착각할까봐, 사도바울이 중간 매체라고 착각할까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이에요. 내가 나서기 때문에 복음이 오히려 가려질까봐 두려워한 겁니다. 왜?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지 우리들 몸이 뭉친 것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