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3강 [우리는]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3강 [우리는]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강의 제목을 어젯밤에 바꾸었습니다. [죽음의 범람]에서 [사라지는 유령]으로 바꿨어요. 왜 바꿨느냐 하면, 욥의 멀쩡한 피부를 종기 덩어리로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책임도지지 않고 사라져버렸어요. 욥의 입장에선 멀쩡한 피부가 종기 덩어리 되었으니까 무슨 이유를 밝혀야 되는데 잡을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악마가 인간을 유혹해서 선악 구렁텅이 빠지게 해놓고는 본인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누굴 붙들고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악마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렸어요.
대책은 뭐냐? 인간 쪽에서 따지기 위해서 신에게 나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물체화 된 매개물로 신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건 실패로 끝납니다. 자연숭배라 해서 애니미즘, 토테미즘, 모든 민족이 그것으로 시작하잖아요. 단군의 신화도 마찬가지고 모든 민족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일본의 신화들을 연구해보면 숲속에 신들이 있어요. 그들을 정기적으로 잘 달래줘야 마음에 안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거예요. 그리고 천재지변에 대해서 대책이 없다는 거예요. 이처럼 인간은 자연한테 늘 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20,21세기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인공지능이나 원자력발전소, 여러 가지 혁혁한 기술의 발명품들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자연을 정복했다고 학교에서 그렇게 잘못되게 가르치거든요. 그런데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만든 원자력발전소, 수력발전소도 이게 바로 자연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바보 같아. 자기가 폭을 넓혀놓고 자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팔이 아프다. 로봇 팔로 갈아치우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인공팔로 범위가 늘어난 확장난 거예요. 자연에서 벗어난 게 아닙니다. 해결책이 없어요. 지금은 냉동인간이 나옵니다. 죽기 전에 세포 살아있을 때 얼려놓고 나중에 수십 년 후에 깨우면 더 살게 되겠지. 더 살아봤자 단일현실 속에 그대로 갇혀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딜레마에 빠지게 된 자체가 뭐냐 하면, 뭔가 빠진 게 있어요. 사라진 유령 같은 게 있어요. 자연에 속하지 않는데 뭔가 빠져버린 게 있어요. 도망쳤거든요. 악마가 비겁하게 도망쳤단 말이죠. 해결책도 못 내놓고. 어디로 도망치는가? 하나님 보좌 앞으로 도망가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다시 마귀를 귀신을 보내지요.
그래서 인간이 자연 속에 갇혀 있고 그것에 대해서 마귀가 지배를 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종교로부터 시작한 소위 제도종교라 하고 법률종교라 하는데 기독교, 이슬람교 등 경전에 의해서 한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만들어내야 그 자체가 법으로 돼있어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골로새서 2장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여기서 어려운 것은 월삭이나 안식이나 시간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몸이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세계에서 참 터무니없는 논리에요. 시간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끝나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간단 말이죠. 말을 해도 이해되는지 모르겠어. 너희 안식일 지키지 마,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 안 지키는 우리가 나와요. 십일조는 신약에 없다고 하면, 십일조 안 하는 내가 나와요. 이러면 구원과 관계없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 몸이 들어가야 되는데 안식일 안 지켜도 되는 몸, 십일조 안 해도 되는 몸, 교회 안 가도 되는 몸이 되면 이건 뭐예요? 결국 어려울 때 교회 찾게 돼있고, 기도하게 돼있고, 헌금 내게 돼있고, 절기, 크리스마스 때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몸으로 자연에 속한 유령이 떠나고 난 멍청하게 닭 쫓던 개처럼 내 인생 조져놓고 가버렸단 말이죠.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얄~미~운~ 사람.
원래 하나님의 창조는 선악을 모르게 돼있어요. 어린아이처럼 돼요. 선악을 몰라야 되는데 선악을 알아놓고 얄밉게 떠나간 사람. 가끔은 들어와서 네가 법대로 지켰느냐, 십계명 지켰느냐고 들쑤시는 악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얼마나 들쑤셨으면 로마서 8장에서 그런 이야기해요. 널 위해서 어떤 몸이 가미됐는데 왜 자꾸 옛날 몸을 견지하려고 하느냐? 지금 있는 몸을 괜찮은 몸으로 전환시키려고 수단을 부리느냐 그래봐야 선과 악의 딜레마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 말씀처럼 어떤 법이나 지키지 마세요. 그 대신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법을 지킬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거예요.
이 원칙을 그대로 골로새서 1장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1장 2절 우리가 나와요. 3절에 우리가 나와요. 또 3절에 “우리 주”라고 해서 우리가 나오죠. 4절에 너희란 말, 역시 우리란 개념인데 그 다음에 5절에 너희 두 번 나오고, 6월에 한 번 더 나오죠. “너희 중에서와 같이” 나오고, 7절 끝에 보면 너희 나옵니다. 8절에 너희 나오고 우리 나와요.
우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현재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지칭하는 거고, 1인칭 복수. 현재는 시간에 관한 개념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설명돼야 돼요. 우리는 예수님이 현재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우리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는 관심 끊으시고 예수님은 현재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자기 일을 증거하느냐? 현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우리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교회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거 문제 크지요. 제가 갸우뚱할 때는 문제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과연 현재 보이는 교회와 관련성이 있는지를 지금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앞에 계신 분에게 질문해보겠습니다. 어떤 주부가 살림 잘하고 애 키우고 남편은 직장생활 잘하고 월급 꼬박꼬박 잘 갖다 주고 행복하게 삽니다. 이 가정의 문제점이 뭡니까? 여자는 주부생활하고 남편은 직장생활 하는데 그 가정의 문제점은?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데 문제점은 뭐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그걸 소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단편적이에요. 그것으로 자족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단편적이 아니고 전체적이에요.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사적인 만족감과 전혀 관계없지요. 그런데 나는 애 키우고 남편은 월급 갖다 주고 둘이 사는 게 굉장히 행복하다. 이건 단편적인 거예요. 단편적인 것이 문제 있다는 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했을 때 문제 있느냐 하면,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든 전체성에 비교해볼 때 이건 문제점이 아주 큰 겁니다. 문제점이 크다는 그것을 증명해 드릴게요. 어떻게 증명되느냐?
단편적으로 산다. 그런데 주변에 여러 가정이 있고 점점 더 거대사회가 되잖아요. 서울에 고급 아파트에 살수록 외로워집니다. 촌에 살면 사람들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는데 점점 더 단편적으로 되게 돼있어요. 그러면 넓은 세상이 감당이 안 되니까 개인적 의미로 모으게 됩니다. 이걸 수축이라 합니다. 점점 갈수록 단단해져요. 이 말은 이 세상에 흐르고 있는 모든 변화를 나만을 위한 개념과 의미로 수집해요. 다 수집하면 이렇게 단단해져야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퍼주고 이래선 안 돼.
캘거리 강의하면서 아주 의미 있게 전한 게 있어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꼭 쥐고 있을 거예요. 절대로 빼앗기지 말고.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티고 살 수 있습니다. 무딘 면은 힘들어 못 살아요. 그러나 연필심처럼 뾰족하게 되면 어디라도 뚫을 수 있습니다. 뾰족하다는 것은 모든 중량이 같은 단면적에 집중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집중하게 되면 힘이 생겨요. 힘이 생기면 어딜 가도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수축에 수축을 가미해야 됩니다. 그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끝나지 나는 살아남아야 돼. 그래서 나온 게 “엄마, 나 시집 안 갈래.”
뾰족하게 모든 에너지를 거기다 집중했는데 이걸 남한테 나눠준다는 것이 자기로서는 할 수 없고 할 능력이 안 돼요.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쳐도 믿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걸 나눠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 성채가 허물어진다는 위기감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냥 내가 일해서 돈 벌어서 유럽 배낭여행하고 그렇게 살래. 시집이고 뭐고 다 귀찮고 나는 나대로 수축된 채 살래. 나의 의미로. 나만 행복하면 되지. 아프지 말고.
뭡니까? 단편적이에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는데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도달하니까 나를 위한 수축이란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단단해진다는 이것은 갈수록 용납이 안 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자기 잘난 맛에 자기 거룩한 맛에 경건한 맛에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아, 네 아비가 바로 악마다. 선은 악의 실체화입니다. 선이란 악의 구체화에요. 악의 실존이 선이에요.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의 아비가 악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연결돼있는 그것에 대해서 따로 자기 룸, 홀을 챙기는 겁니다.
주님 행복하면 저는 행복해요. 이런 이야기는 정말 요즘 시대에 거의 없지요. 그러면 아까 1장에서 봤던 우리, 너희 이러한 집단 복수적인 개념은 뭐냐? 이걸 설명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여러분 계속 어려운 것 나와도 참으면 네 번째부턴 쉬울 겁니다. 골로새서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되기 때문에 제가 지루하지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1+0+1이란 공식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0이 들어감으로써 예수님이 주님이 되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입자, 쉽게 존재지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밖에 없어요. 물론 삼위일체니까 성령까지 붙어서 말할 수 있는 성령은 예수님의 보조적 역할하기 때문에 입자로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입자로 말할 수 없고 존재가 될 수 없어요. 내가 란 말을 붙이면 안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거예요. 이걸 지난 시간에 생성이라 했고 이걸 변화라 했습니다. A에서 B로 갈 때 하나님께서 찾는 것은 A라는 입자, B라는 완성을 찾는 게 아니고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것을 주께선 건져내시고 회수하시고 이것을 통해서 영광 받는 거예요. 구원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악마로부터 우리 인간 속에 서로 대비되는 선과 악이 우리 마음속에 뒤집어졌으니까 우리는 존재로 입자로 행세하다보니까 우린 자꾸 지금의 나보다 더 향상된 경건된 천국 갈만한 괜찮은 사람, 여기에 주목하는 겁니다. 예수님, 천국 가면 누가 더 높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왔어요. 너희들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어요. 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느냐 하면, 어릴 때는 철이 없어서 되는데 크면 너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 서로 입자 비교에 들어가니까 주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에 관심이 없어진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공식을 집어넣습니다.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면, 이렇게 집어넣어요. A에서 B로 달라지게 하면서 여기다가 0, 없음을 이 과정에 집어넣습니다. 그럼 A는 착각이죠. 내가 뭐가 된다는 착각이고 실제로는 주님께서 성도를 없는 존재를 집어넣으면서 사건을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또 오해합니다. 없음에서 내가 태어났으니까 있음이죠. 이게 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잠시 주님의 존재됨을 증거하다가(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됐으니까) 다시 죽어 버리면, 다시없음으로 내려가야 되거든요. 주님을 위해서 잠시 나타났다가 인생은 안개니까 쓰였다가 다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올라갈 때 들어가는 자리는 바로 위치의 자리에요. 어떤 위치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되는 게 아니고 할당받은 위치의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은 손이요, 어떤 사람은 발이요, 귀, 코란 말이죠. 전체에서 손이 개인적으로 나라 하면 반칙이에요. 귀가 나라고 하면 귀가 떨어져서 걸어갑니까? 이게 안 되거든요. 어디에 종속적이란 말은 단독적으론 존재란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나란 이야기해선 안 되고 붙여진 이걸 우리라 하고, 상대적으로 너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골로새서에 쭉 나와 있는 겁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교회 합시다. 미쳤어요? 그게 무슨 교회에요. 입자들 모여 봐야 그건 집단이 아니고 집합이에요. 집합이란 그냥 자기 일방적 생각으로 뭐 하기 위해서? 수축되기 위해서. 그래서 뭐하려고? 뾰족한 연필심이 되어 혼자서, 무소뿔로 홀로 가라는 식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수축이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이게 기호고 언어고 거기에 따르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날아다니는 인터넷에 있는 모든 단어는 다 내가 뾰족한 연필심 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 긁어모은 거예요. 알기는 인터넷 찾아보면 오만 것 다 알아요. 다 아는데 문제는 그걸 어디에 써 먹일 거냐는 거죠. 나만의 개성을 찾기 위해서가 돼버리면, 골로새서 1장 16절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돼요. 단독적으로 존재가 되고 입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심지어 물리학에서는 입자가 어디서 나오는가? 어떤 장(field)이 있어서 장이 파닥거리면 16개 입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물리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자를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입자를 입자되게 했던 그걸 힉스장이라 해요. 힉스장에서 에너지의 폭등이 생기면 거기서 중력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에너지가 결합되면서 제일 가벼운 산소, 헬륨 나오고 점점 더 나가면 수소, 탄소 나오고, 수소와 질소가 결합하면 유기체라 해요. 그럼 탄소유기체 여기서 dna 나오겠지요. 여기서 아미노산 나오고, 아미노산과 dna 결합하면 단백질 나오고, 단백질 모아놓으면 세포 되지요. 세포 60개조 덩어리하면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배엽을 통해서.
교재에 뭐라고 쓰였는지 봅시다. 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이렇게 돼있어요. [입도 없다. 이도 엇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간이 나온다.] 이 말이 맞잖아요. 수정해서 입도 코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뭐만 있는가? 정보만 있어요. 그 정보는 dna고 dna 쪼개보면 유기체에요. 그건 원소화합물이에요. 이게 오늘날 종교입니다. 여기에 이의 거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진리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남녀 성별을 없애고 Z로 통일하자는 겁니다. 남자, 여자를 구별하면 남성우월주의라 해서 인권에 저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 없애고 남녀 샤워 실도 없애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기를 남녀평등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공교육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 어차피 대안학교로 탈출할 수밖에 없어요.
성소수자가 우리도 부부로 인정해달라는 그 정도도 아니에요. 이건 브레이크 없이 그냥 내리막길로 가는 거예요. 인권이 최고에요. 세상이 미쳤어요. 왜냐하면 과학을 대적을 논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 쪼개보자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이상 서로 소통하면서 서로 존중해주면서 서로 의견을 존중해주면서 종교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서로서로 따져주자. 인권이 최고다. 참 인권이 .....
마귀가 얍삽하게 도망쳤잖아요. 그 해결책이 없으니까 과학에서는 악령이 없어요. 그러니까 분자로 만든 세포로 만든 인간이 모여서 의논할 수밖에 없어요. 의논해서 더 인권적이고 장애자를 위해서 기술개발해서 팔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인공 팔 만들어주고. 제가 이걸 뭐라 했습니까? 점점 더 확대해도 이게 자연이죠. 단일현실밖에 없는 사람에게 빈 무덤이 된 걸 설명할 수 있습니까? 홍해 갈라진 것 설명 안 되지요. 여리고성 무너진 것 설명 안 되지요. 다니엘이 계시 받은 것 설명 안 되죠. 과학에선 그건 옛날 신화라고 하면 끝나 버려요.
그러면 결국은 모든 인류가 인권이란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총결집해서 결국 대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너희 아비는 악마에요. 인권, 거룩, 여기에 종교, 과학 다 동원되지요. 진화론 나와서 하는데 그럼 잠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과학에 제가 도전장을 제시하겠습니다.
인간은 세포로 됐다고 하는 것 맞다 치고 인간의 키가 4미터입니까, 7미터입니까? 보통 2미터도 잘 안 되지요. 평균적으로 1미터 70이라 치고 왜 인간은 세포가 1미터 70에서 스톱되는 겁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해보세요. 50만 년 전에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 그러면 왜 15만 년에 현생인류가 태어났는가? 설명해보라. 설명 못합니다. 과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진화되기를 그것이 자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1미터 80도 해봤다가 1미터 30도 해봤는데 오랜 시간 동안 해보니까 역시 1미터 70이 적당하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자기 규제적인 변명이라 합니다. 자기 합리화에요. 지금 있는 존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긴긴 역사를 그렇게 깔아놓은 거예요.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내놓는 의논과 토론도 정당하다. 우린 그 재미로 산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과 같습니까? 바로 그 단일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다중현실에서 와서 그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맞아죽었던 말던 지금 없잖아. 있습니다. 현재에 있습니다. 현재 어떻게 있는데? 우리는. 우리에요. 내가 되고 싶은 우리가 아니고 입자가 죽었던 사건으로 개입된 새로운 우리에요. 우리는 그냥 사건이에요. 우리를 잡지 마세요. 우리를 단체로 만들지 마세요. 단체로 만들 그런 주인공도 없고 그런 회원도 없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삼천 명 모였잖아요. 주께서 깨뜨려버립니다. 다 흩어졌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총회라고 합니다. 아까 대구에서 차타고 오면서 워치만 니 교회를 지방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 거들었지요. 왜 이왕 할 것 지방교회라 하느냐? 총회라 하지. 지방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 에베소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기존 교회와는 뭔가 다른 면모를 보여서 저쪽 사람을 꾀려고 그 짓하거든요. 그렇다면 지점이라 하지 말고 아예 총회라고 하면 될 걸. 성경에 나오니까. 전부 얍삽하게 꼼수를 쓰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듣는 느낌 아니에요?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이라고 따로 삽으로 파오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현재 증거하기 위한 발생적 사건으로 들어간 겁니다. 언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목사님, 예수 믿을 때부터 아닙니까?” 아닙니다. 창세전부터에요. 창세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아도 태어나야 했어요.
16절 다시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절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존재/입자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만 붙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와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나를 건드리는 것은 갈보리를 건드리는 것과 똑같다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11장에.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규제를 해요.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해요. 자기 규제를 하면 연필심이 되어 내 것 건드리면 와해가 생기기 때문에 여기에 방어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이렇게 대하면 이렇게 대처하고,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고소, 고발하고. 남들이 나를 공격할 때 나는 이렇게 방어하겠다고 갈수록 점점 더 수축이 되면서 나중에 응축, 완전히 돌멩이보다 더 단단하게 되는 겁니다. 독자적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고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어요.
찬송 부를 때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하다가 “집사님, 혹시 노는 돈 있으면 좀 ..... 이자 20퍼센트 쳐줄 테니까.” 큰 교회일수록 그런 일들이 많지요. 연필심들만. 필통 같아. 뾰족한 사람들만 다 모여서. 그래서 지난 낮에 인생을 들춰보면 거기는 방어기술만 누적돼있어요. 살아온 인생이. 이렇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런 것만 있어요.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이건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죠. 그러면 묻습니다.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 있지요. 그러니까 무교회주의 아니지요. 무교회주의란 말이 왜 나왔습니까? 자기 교회중심으로 세상만사 모든 의미와 모든 개념이 자기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끌어당긴 내 교회, 내 교단, 또는 내가 당회장으로 있는 이 교회, 내가 권사, 집사로 있는 이 교회 잘 되기 위해서 모든 개념을 다 끌어 모았는데 이 더러운 행세는, 본인이 혼자 살 때 한 행세를 어디 가도 못 버리거든요. 교회 가서 꼭 그 짓해서 그것을 자기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집단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 없고, 고린도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몸밖에 없어요. 따라서 골로새 교회 만들어놓고 이것도 교회라고 우기지 마세요. 골로새 교회도 나중에 사라지고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다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것 우려먹을 것 다 우려먹었으니까 이제는 네 역할을 끝났다고 일곱 교회를 다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었다고 그걸 쳐다보는 것은 그건 악마의 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면 악마의 집단에 계속 다녀야 됩니까? 다녀야 되지요. 주께서 보내줬는데. 그 외에도 악마의 집단이 많은데. 어디 혼자 산 속에 들어가도 지도 악마 될 건데. 이 세상 현실 속에서는 주님이 다녀간 곳이기 때문에 어디라도 마귀가 도사 같이 찾아옵니다. 복음 전하니까 손잡고 교회합시다. 그때 거부합니까? 거부할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주께서 보내신 악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것. 말끝까지 들어야 돼요. 이런 교회 안 갑니다? 안 가는 게 어디 있어요. 감사합니다.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께서 시킨 줄 알고, 당신이 시킨 게 아니야. 언제까지? 목숨 다할 때까지. 뒤에 붙는 게 있어요. (네가 준 목숨 아니거든) 저는 당회장 목사님을 섬기고. (너는 죽었어, 이제는)
어느 직장이고 괜찮은 직장 없어요. 모두가 연필심들입니다. 거기선 권력이 있고 김 과장, 박 과장 이렇게 위치를 주게 되면 거기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주체가 성립됩니다. 만약에 일을 못한다? 그러면 주체를 쫓아내면서 우리 위치, 자리도 책상 빼야 됩니다. 이런 세상 권력이 있어요. 권력이 뭐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우리에게 뭘 주느냐? 의미와 기호와 언어와 개념을 퍼붓습니다. 이게 명령법이에요. 어릴 때부터 지시받고 사는 명령법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 동안에 악마 없는 곳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나란 입자가 살 수 있는 적합한 세상은 아니고, 주께서 당하시고 빠져나간 세상에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서 이 땅에서 일부러 태어나야 하신 거예요. 야곱처럼. 창세전부터 사랑하사 일부러 태어나게 하시면 주께서 주신 임무가 있어요. 등 뒤에 밧줄이 있어요. 어디까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까지 연결돼있어요. 그 연결 끝에는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이 한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가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항상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십자가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항상 없는 존재로 살아야 돼요. 이미 죽은 존재로,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란 말은 예수님이 하신 경험을 네가 누리란 뜻이에요.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땅에서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아니. 입자되신 주님께서 죽었고 우리는 그 입자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 사건으로서 이 땅에 온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지고, 란 말이 있지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문섭이 이것 설명해볼래? 머리가 완전히 축구 잔디밭이 됐는데 이게 나만의 개성이거든요. 나만의 개성이 있을 때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살거든요. 평소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내가 잘 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이게 전체적이 아니고 단편적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거든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뭐냐?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다녀갔는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한테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반복하는 것이 현재에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한다는 증거물로 우리를 대리자로 이 땅에 앞장세운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건으로서의 교회, 또는 생성하는 교회, 입자가 아닌 존재가 아닌, 특정 교회가 교회 아닌 전체가 오직 그리스도의 몸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죠. 이걸 또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 연합한다고. 그건 정치적 연합이에요.
다음 2월 부산강의에서 알랭 바디우란 철학자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강의할 거예요. 알랭 바디우란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미리 언급하게 되면,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셈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1이 된다는 거예요. 1이 되는 걸 일자, 신이 된다는 겁니다. 왜 사람이 헤아리는데 신이 나오지요? 이것은 인간의 염원이 파도처럼 나타난 게 신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신은 안 보이잖아요. 신을 대신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네 가지에요. 사랑, 예술, 과학, 정치.
알랭 바디우의 주장은 이겁니다. 사랑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뭐든 간에 출발하게 되면 마지막에 신에 도달될 수 있도록 인간들은 사랑하고 과학적으로 하고 정치적으로 한다. 이게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사람의 사상이 굉장히 중요한 사상이에요.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최종적으로는 신에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인간은 움직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함을 해야 내가 신과 연결된 천상천하유아독존, 최고의 궁극적인 존재가 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입자/존재라는 것은 결국 신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신을 찾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왜 그러냐 하면, 악마가 인간을 네가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되리라 해놓고 일은 저질러놓고 도망가 버렸어요. 남은 것은 악마처럼 살아야 될 그것만 남아있는 거예요. 경건하게 살려면 어떻게 합니까? 더더더. 기도 더 하고 헌금 더 하고 성경 더 읽고. 이젠 모든 것 집어치우고 산속에 가서 기도만 하고. 이게 자아실현이에요. 궁극적으로 자기가 신인 적을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란 말이죠.
그러면 엄홍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나이트클럽 춤추는 것. 자기가 춤 좀 춘다고 했는데 거기에 도사들 와있거든요. 그러면 저만큼 하면 돼? 더 해? 심지어 스피드광들. 더 빠른 차, 더 경쟁해서 이기는 것.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24살에 사법고시, 20살에 소년 급제, 우병우. 점점 더 빠르게 누가 빨리 검사장 되는가? 이게 마귀가 저질러놓은 것을 인간이 그대로 하는 겁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그게 모자라면 교회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힘을 차용하죠. 믿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러면 이 문제의 해결책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딱 10분 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