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2강 [사라지는 유령]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2강 [사라지는 유령]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을 정리 겸 진도 나가기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해선 안 되고,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생성하는 가운데 있다. 그렇게 되면 어른이 되었다는 게 주가 아니라 생성하는 그 변화가 그게 주안점, 중요한 점이 돼요. 그게 왜 중요한 점이 돼야 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과학 이야기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과학은 항상 존재의 있음을 이야기해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입자로 있다. 과학자들은 입자로 있는 거예요.

입자로 있으면 문제는 여기서 이렇게 달라지는데 달라지는 이걸 찾아낼 수 없어요. 푸른 잎이 나중에 붉게 물들었다. 나오는 것은 푸른 잎이라는 그 조각은 있고, 나중에 빨갛게 되었다. 그 두 개는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푸른 잎이 붉게 되었는지 아무리 해도 그걸 다 찾아낼 수 없어요. 물론 중간 과정에서 푸르고, 붉고 반반 되는 것 하죠. 그래봐야 반 되기까지 뭐가 있는지 찾아낼 수 없어요.

뭐든지 입자가 있을 때 입자가 열여섯 개 있다고 하는데 입자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생성하는지는 인간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달라졌다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이야기하지 그 과정까지 찾아낼 능력은 없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렇게 관찰하는 본인도 입자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자체를 입자로 보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났다, 출생했다고 하잖아요. 출생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출현한 것으로 봐요. 저도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했는데 요 근래 외손녀가 나타난 뒤에는 출생이 아니고 출현으로 봐요. 어디서 이런 게 나왔노?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어요. dna 논리해도 안 맞아요. 그냥 출현했는데 출현한 그것이 크면 클수록 자기 고집을 내세워요. 그 고집은 부모가 강요하고 지시한 게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말 잘 들기를 원하지 고집부리기를 원하지 않거든요. 이것은 부모가 가르친 게 아니고 뭔가 귀신이 씌웠어.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게 덧씌웠어요.

이유식 못 먹겠다는 거예요. 이유식을 먹어야 젖을 뗄 때가 됐는데 젖을 먹겠다는 겁니다. 이유식 먹는 입으로 달라져야 되는데 이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강력하게 반항이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생성으로 설명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구원을 구원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한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생성을 낚아채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 주님은 사건을 일으키려 왔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나라는 입자, 이 덩어리가 천국에 가 있는 덩어리 되길 원해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생성하는 방법도 모르고 변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되도 않는 고집을 내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의 천국 가는 입자가 되려면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자는 그것을 공격하게 돼요. 입자가 공격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힘이 반항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에 반항하는 것, 그게 누굽니까? 적그리스도, 악마 외에는 없어요.

악마가 자율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요.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체제 속에 입자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슬그머니 빠져나가요. 그래서 제가 낮 설교에서 그랬지요. 욥은 악마를 놓쳤다. 고난은 받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근거로 해서 매개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왜 이렇게 내가 아파야 되는지 모른단 말이죠. 결국 우리는 제삼자 입장에서 악마를 전혀 생각 못하고 있어요. 직접 주님과 상대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데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일을 저질러놓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그것을 사라지는 매개자. 매질, 촉매, 매개라고 말하는 이유가, 구약의 제사에서는 양이 되고 짐승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또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떤 물질성(물성화) 외에는 그걸 매개로 하지 않고는 만나질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 이후로부터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물이 아니면 하나님을 표시할 수 없어요. 그게 출32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으로 가고 난 뒤에 아까 배웠던 일반성, 보편성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여호와를 묘사한 것은 금가락지 던졌더니만 금송아지 나왔다. 금송아지가 바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라는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 1장에 보면, 모든 자연물을 신의 은유로 사용했어요. 신을 신이라고 한 게 아니고 신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자연물을 매개로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은 이걸 사건으로 보고 인간은 자연물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별을 섬기고,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그렇지요. “alba lux, diva mea, diva es silentissima” 방언하는 것 아닙니다. [팬텀싱어]에 나온 <Luna>라는 노래 가사에요. “새벽의 빛이여, 나의 여신이시여 고요하시도다” 누굴 보고? 달을 보고. 사랑의 은유로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교회는 앞자리에 은혜 받는다. 이게 뭐예요? 물성화, 물질화. 기도할 때 두 손을 꼭 잡고 옥색 원피스 입고 하늘을 보면서 오늘도 무사히.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완전히 물성화로 포위됐어요. 사건 아니에요. 입자를. 은혜 받았던 사건이라고 그걸 입자화 시킬 때 우리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언제 구원받았어요? 날짜까지 동원합니다. 몇 년 전에 구원받았어요? 구원파들. 또는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이것도 마찬가지고.

그게 우리가 종교성에 납득이 되고 설득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성전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서 담배피우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성전에 담배피우면 주님께서 켁켁거리면 안 되니까 청년들이 담배피우면 안 된다. 성령이 연기를 피우는데 담배연기까지 피우면 얼마나 오염되겠어요.

이러한 매개문제가 상당히 중요하죠. 매개문제를 단편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보세요. 웃음 잃은 고양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고양이가 웃을 잃었구나. 이게 1번이라면, 2번은 고양이 잃은 웃음. 이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고양이는 없는데 여운 남기면서 웃고 있어요. 얼마나 기괴합니까? 이게 아토포스에요.

아토포스는 기괴함이에요. 분해하면 장소 없는 것이 되지만 그 전체 뜻은 문학에서 기괴한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기존에 모든 의미와 단어를 동원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그 무엇. 이게 이사야 53장에서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주께서 이사야 6장에 예언하기를 너희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고 눈으로 봐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그것이 바로 다중현실이 기존에 있는 현실의 단어와 용어를 사용하면서 같이 섞여서 들어오면서 입자를 옹호하고 존재를 옹호하고 주님은 그것을 사건화 시키는 겁니다.

사건이 뭐냐? 생성이에요. 예수님이라는 입자와 너라는 입자 사이에는 내 쪽에서 사건화 된 힘이 아니면 너는 새사람이 될 수 없어요. 그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는 성령이 바람 같이 임의로 분다. 임의란 우연성이 나와요. 우연성은 사람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시키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는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을 두 번째 시간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죽음의 범람] 죽음이 차고 넘치는 거예요.

죽음의 범람은 이사야 37장에 보면 나오는데 어떤 대목이냐 하면,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하루아침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어요. 37장 36절.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천사가 십팔만 오천 명을 다 죽였습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일반화, 보편성이란 말을 했지요. 입자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의 주체로 보는 거예요. 왜? 동일한 권력 안에서 다뤄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였기 때문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지만 하나가 죽은 거예요. 죽이는 사건입니다.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입자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나는 언약의 위반되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이나 가정교육 보지 않고 그냥 죽여 버려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이 묻지 않고. 꼭 세월호 같아. 빠져죽은 아이들 중에서 기독교도 있고 불교도 있을 건데 일체 묻지 않아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빼주는 것 없습니다. 혹시 살아났다면 기독교 때문에 살아난 게 아니에요. 살아나서 더 반항질 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난 걸 강조하면 사건을 강조한 게 아니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신자다, 라고 자기 입자를 강조해요. 입자는 물질화에요. 하나의 매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악마가,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했지만 선과 악은 서로 반대가 되는 거예요. 반대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선과 악을 인간의 몸에, 인간의 마음에 통일시켜 집어넣고 자기는 빠져버렸어요. 이게 사라져버린 매개자에요. 악마는 인간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갈등 속에 집어넣고 지는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해야 구원받는다. 그 선함 중에서 예수 믿는 선을 행해야 돼. 예수 믿는 착한 일이 나를 구원할 거다.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어요. 예수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예수 믿는 것은 어떻게 해야 잘 믿는 거냐? 이렇게 돼버려요.

이걸 악마의 무한이라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a다. 그 다음에는 나는 내가 a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나는 내가 a라고 생각하는 그런 나다. 계속 무한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나는 반성한다. 반성한 나를 반성한다. 반성했던 나를 또 다시 반성한다. 언제까지 할까요?
계속 하게 만드는 거예요. 나는 40일 금식했다. 아니야. 모자라. 42일까지 했다. 안 돼. 나는 50일 한다. 안 돼. 60일 한다. 처음에 교회 올 때는 미안해서 점심값으로 천 원 냈다. 그 다음부터 감사헌금으로 오천 원 냈다. 아직까지 십일조는 안 되더라. 그러다 얼추 계산해보니까 점점 십일조에 가까워서 기뻤다. 드디어 십일조를 능가해서 십의 이조까지 했다. 어디까지 하렵니까? 십의 구조까지? 어디까지 할 건데요? 다 바쳐도 헌금 아닙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 반해서 죽었지요. 만약에 다 냈다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죽었지요. 왜냐하면 받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입자라는 내가 내고 입자라는 사도가 받는 방식으로는 생성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입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달라지게 했던 주님이 관여하신 그것을 주께서는 도로 가져가잖아요. 성취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웃사랑 하라는 게 아니고 이웃사랑을 건집니다. 우리가 이웃사랑 해버리면 필히 그 이웃은 나에게 종속되고 나는 갑이 되고 그는 을이 되게 돼있어요. 여러분, 누굴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가난한 집을 도와줬다 합시다. 그 집 앞에 갈 때마다 항상 발을 멈추게 돼요. 내가 15년 전 눈 오는 날 이 집에 떼거리 없어 울고 있을 때 쌀 한 부대를 몰래 가져다 줬다. 이걸 잊을 수가 없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어요. 그게 되겠어요? 절대로 안 돼요. 네가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네가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을 내가 아느니라. 이게 가능하겠어요? 기도 언제 합니까? 아쉬울 때 하잖아요. 그런 걸 기도하지 말라면 기도할 내용이 없는데.

사건이란 항상 예수님의 입자에서 나오는 속성, 그 내용만을 사건으로 계속 번져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한 입자, 존재가 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고 사건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1이고 예수님이 1이라면 그 사이에 0이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예수님을 주로 만들어요. 그래서 언약완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로 만들 때 있다가도 없고, 없어졌다가도 생겨버리는 이런 우연적인 요소, 이게 누구겠어요? 인간이죠, 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이 여기 끼어들어서 예수님을 주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이 공식, 1+0+1이 성경 전체 공식입니다. 성경은 우리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래서 아까 이사야 37장 36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인 자들 중에서 효자 있을 것이고 신혼인데 모병 되어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착하고 군에 제대하고 난 뒤에 취직하고 유학 갈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일체 그런 것 묻지 않고 한꺼번에 같은 질로 다 해버려요. 왜냐하면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겁니다. 단체로 대들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단체로 일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주지 않고,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에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상대하는 것은 양만 상대해요. 인간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가 살았습니까, 안 죽은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어느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어떤 입자, 덩어리, 아버지가 있고 내가 낳은 자식, 아들이 있다고 하는데 출생이라 하지만 사실은 출현으로 봐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했다. 문설주에 피를 발라라. 우리 같으면 아들의 피를 바르겠는데 아들의 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돼요. 나가 놀아라. 네 구원에 대해서 네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남의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인데도 불구하고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간여할 틈을 주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이 개입합니다. 이스라엘 장자 빼놓고 봅시다. 애굽은 권력이죠. ‘위치=주체+권력’에 의해서 애굽에 있는 장자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빠져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주의 위치죠. 어린양에 대해서 심판을 행사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일단 빠지고 애굽에 있는 사람은 하나 없이 다 죽은 거예요. 히브리인이 뭐고 간에. 다 죽은 이유가 뭐냐? 이들이 나중에 산 장자는 더 이상 집안의 장자가 아니고 여호와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기 13장에 나와요. 살아난 사람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장자가 돼요.

그러니까 육의 장자에서 하나님의 장자로 넘어갈 때 필히 죽음이 필요한데 그 죽음은 자살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언약적 입장에서 상대자의 죽음의 개입돼야 돼요. 그럼 우리는? 발로 차는 거죠. 너는 하나님 일에 건방지게 끼어들지 마. 나가 있는 거예요. 어린양이 대신해서 이 집안은 죽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하게 되죠.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 아들이 다 죽고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이 대신 죽고.

그래서 어린양은 택한 백성만 위해서 죽은 거예요. 언약이란 거기에 적이 있기 때문에. 적들의 죄도 위해서 주께서 죽었다고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원수에 속한 자들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에 의해서 구원할 사람의 죄를 대신합니다. 성경 여기저기에 나와요. 어쨌든 여기서 해결 봤습니다. 어린양의 약속에 의해서 여호와의 장자가 돼요.

방금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아들었는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양이 죽었는데 왜 사람이 살지요?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은 산 적이 없어요. 역시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내 자식은 죽고 주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집 아버지는 내 자식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럼 헤어질까요? 헤어지지 않아요. 그걸 매개자라 해요.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장자를 통해서 그 집안에 약속이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무려 천 대까지 복을 받게 되죠. 장자 안에 어린양의 요소가 살아있는 한 어린양으로 인한 혜택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 혜택을 받을 입자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건화 된 상태에서 그 사람은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걸 다 아시죠. 안 믿는 사람들도 알고 있어요. 그럼 질문 해봅시다. 왜 하필이면 다윗이 형들 도시락 가져갈 때 골리앗이 있었습니까? 따로 학교 화장실 뒤에서 둘이 한 판 붙으면 안 됩니까? 왜 다윗이 세냐, 골리앗이 세냐는 식으로 붙었어요? 이것은 결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닌 겁니다. 다윗이란 입자와 골리앗이란 입자의 싸움이 아니고 골리앗을 골리앗 되게 한 위치와 다윗을 다윗 되게 한 위치와의 다툼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전쟁의 일환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싸움은 사람에 속한 싸움이 아니고 여호와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여호와의 싸움이라면 여호와가 나타나야 돼요. 허연 도포입고 “alba lux, diva mea” 사제처럼 등장해야 되는데 여호와는 콧등도 안 보여요. 기껏 나타난 게 다윗, 그것도 소년 다윗. 이게 바로 시편 8편처럼 젖먹이로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벌인 그 사건은 기존에 악마의 권력에 있는 입장에서 볼 때는 충분히 무시할 만한 밟으면 밟힐 정도로 그런 모습으로 여호와의 속성을 드러낸 겁니다. 그 여호와가 이 땅에 왔을 때는 아무도 그분이 메시아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실력이 없고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은 악한 권력, 또는 수상한 권력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해대는 권력에 의해서 주체자로 이미 사용되고 있어요.

선악이야기를 잠시해보겠습니다. 선과 악은, 선+악은 하나로 통합이 안 돼요. 그 성격이 서로 대치되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로 묶어놨어요. 악마가 따먹어라. 따먹고 인간은 감당을 못했어요.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나는 선을 원하나 더 센 다른 나가 악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통합될 수 없는 여기서 어떻게 건져낼 것이냐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의 고백 대신에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바로 선을 행한 자리에 더 큰 악이 나타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 또는 악마가 거기에 동원되는 방식을 몰라서 그래요.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위선자가 되는 거죠. 온통 교회가 사람을 위선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선으로 악이 돼버리면 사건이 아니고 입자가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건져내랴. 건져낸 그 몸이 성령이 임한 몸이 되면 졸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건화 된 몸이 돼버려요. 사건화 된 몸은 물질화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죽어도 좋아요. 흙이 돼도 괜찮아요. 하루하루 주님의 도움 받고 살기 때문에. 내 것이란 어떤 특정한 입자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돼야 되고 몸무게는 70으로 빼야 되고. 70으로 뺀다고 영광됩니까? 그럼 75는 지옥 갑니까? 공부는 몇 등까지 해야 되고.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되고. 이건 인간으로 하여금 간증집회고 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고 계속해서 너는 입자다, 너는 단단해야 돼, 너는 확고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입자 자체로 구원 못 받는 거야.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방식은 그게 아니고 입자된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이 땅에서는 입자 자체를 주님한테 양도하고 주님에서 나온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날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반복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문장을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 뭔 뜻인지 알아보세요. “10미터 쯤 볼 때 그녀는 귀티가 흘러보였다. 3미터 쯤 떨어졌을 때 10미터에서 볼 때처럼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다가오는 그 여자를 보면서 누가 착각을 일으킨 거예요? 다가오는 여자가 착각을 유발하도록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10미터에서 볼 때처럼 미인으로 계속 유지하도록 점점 신경을 많이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눈치 챘어요? 보는 사람이 눈치 챈 거예요. 10미터에서는 진짜 예뻤는데 3미터에서는 예뻐지려고 노력했단 말이죠. 그럼 3미터까지 오지 말고 다시 10미터로 가보세요. 그 상태 계속 유지되고 있지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성도는 절대로 변화를 위해서 본인이 손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10미터에서 보던, 3미터에서 보던 그 관계있잖아요. 그 관계를 주께서 의롭다하는 관계기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본인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절대로 해서는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위선자가 돼버려요.

10미터에서는 그녀가 귀티가 흘러보였다. 3미터 떨어졌을 때는 10미터 볼 때처럼 애써 꾸몄다고 했는데, 그녀 자리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를 넣어봅시다. 10미터에서 볼 때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3미터 떨어졌을 때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 다음에 “나는 목사다.” 10미터 전에는 나는 진짜 훌륭한 목사처럼 보였다. 3미터 쯤 오는데 그 남자는 목사 되려고 되게 애를 썼다. 그런데 그것이 남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강조하는 것은, 본인이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우리가 애를 쓴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자연을 이기지 못해서 입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바꾸는 것은 10미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더 애썼다가 돼버려요. 바꾸지 마세요. 왜 바꾸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입자가 갖고 있는 내용이 예수님의 형식이 됩니다. 이걸 액자효과라 합니다. 어떤 물체가 형이 없는 것을 액자를 치면 졸지에 훌륭한 그림이 돼버리죠. 우리는 자꾸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걸 액자화 시켜 거실에 걸어놓으려 해요. 내가 셀카 찍듯이 찍어서 매일같이 이것 어떠냐고 계속 찍어내요.

그런데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위선적인 것을 액자로 찍어버립니다. 죄가 재료가 되고 거기서 의를 생산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죄만 지으면 돼요. 우리가 짓는 죄는 죄로 인정하지 않고 저절로 지은 죄만 죄로 인정해요. 우리가 짓는 죄는 주님의 재료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지저분해서 안 돼. 무심코 나오는 죄 있잖아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여러분 감 안 잡히죠. 그걸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한 사랑과 미움. 이유도 없이 미워지는 것,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것, 이게 저절로에요.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저절로에 대해서는 제가 오후 설교 때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란 노래를 인용해서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들어보세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로 설명했습니다.

Take the ribbon from your hair
Shake it loose and let it fall
Laying soft upon my skin
Like the shadows on the wall

Come and lay down by my side
Till the early morning light
All I'm takin' is your tim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I don't care who's right or wrong
I don't try to understand
Let the devil take tomorrow
Lord tonight I need a friend

Yesterday is dead and gone
and tomorrow's out of sight
Oh, it's sad to be alon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Lord it's sad to be alon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이건 본인이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 무엇,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회개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내가 죄 짓고 싶어서 지었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액자화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액자화 시킨 내용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그 유명한 단어, 막 살기가 되는 겁니다. 인위적으로 자기가 죄를 짓는다든지 사람을 죽인다든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사시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감사하면 살면 되거든요. 그걸 액자화 시킵니다. 그게 주께서 일하시는 형식이 되는 겁니다. “그냥 살아? 너에 대한 죄는 내가 책임질게.” 이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막 살지 않고 조절해가면서 살아요. 악은 멀리하고 선은 행하고. 그래놓고 내가 죄 지었으니까 용서를 구한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런 용서를 주질 않아요. 그게 구약 레위기에도 보면, 제사법에서 일부러 한 죄는 용서가 안 됩니다. 모르고 한 뒤에 소급해서 나중에 새롭게 추가해서 주어진 율법에 보니까 그게 죄가 되구나, 할 때만 죄가 용서가 돼요.

그러면 또 구분해야 돼요. 저절로 지은 죄와 억지로 지은 죄로. 그러면 율법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게 골치 아프니까 막 사세요. 막 사시면 소급해서 죄 지은 것만 용서하는 게 아니고 무심코, 부지중에 한 그것조차 주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예상 밖의 감사가 나오는 거죠.

매개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고 두 번째 시간을 정리하겠습니다. 죽음의 범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나오게 되면 둘 중에 하나에요. 사실은 말을 조심해야 돼요. 둘 중에 하나가 하나밖에 없어요. 애굽의 모든 것을 심판해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고 심판에서 면제될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었고 마지막에는 새 언약, 예수님의 죽음이 오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다 죽은 자로 돼있지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여기서 죽음의 범람의 넘쳐흐르는 취지가 드러납니다. 죽게 함으로써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과 여기에 인간이 그동안 살아갔던 일에 대한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악마가 되겠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직접 마주치게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죄를 용서한다 할 때 죄가 있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그건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죄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 대드는 일을 계속해서 꾸준하게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바로 왕이 강퍅해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구원받은 성도가 보면 모든 일에 감사할 뿐이지요. 세상에 되어가는 모든 일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마마저 일을 시키는 겁니다. 감사가 된다는 말은 즐겁다는 말이고 웃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코미디가 뭐냐 하면, 지옥 가면서도 큰소리치는 거예요. 지옥 가면서는 아버지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 보면 나와요. 자기 아들은 갇혀 있고 아버지가 얼마나 대범한지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빠는 지금 게임하는 거야.” 제목이 인생은 아름다워에요. 끝은 죽어요.

악마에 속한 모든 건 지옥 갑니다. 지옥 가면서도 그 안에서 갖가지 일이 벌어지죠. 이미 심판에서 벗어난 성도의 눈으로 보면, 다중현실이란 안목에서 보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어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최순실이 복음을 알고 판사나 촛불 집회하는 사람이 복음을 모른다면 최순실은 코미디를 보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다고 치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을 하나에 주님을 위해서 벌어지는 코미디로 보잔 말이죠.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일이 감사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셰퍼드로 해서 “물어, 물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감사가 되지 않는 사람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겠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다중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일현실 속에서 본인이 입자로서 버티려는 그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돼요. 예수님의 일은 장소를 지운다. 예수님의 일은 모든 단일현실 속의 장소를 지우고 그걸 사건화 시킵니다. 따라서 입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물질화, 물성적인 매개자에게 현혹되지 마세요. 이건 재수 좋은 장소, 이건 효험이 있는 기법, 기도를 할 때 5분 이상 하면 효과가 온다는 그러한 악마적인 술책에 넘어가지 마세요. 어떤 분이 저한테 이랬어요. “목사님, 영육 간에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용어인지. 목사란 입자여, 입자로써 버텨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늘 사건으로 허물어져야 된다. 내일 죽을지 몰라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다만 주께서 액자화 시킨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주님 때문에 살아있다는 사건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942 강의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 - 구조의 조건 - 최고관리자 17-01-16
15,941 자유게시판 219강-고후 4장 10-11절(예수 죽인 것)170115-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7-01-16
15,940 자유게시판 116강-신 22장 6-8절(하나님의 보호)170115-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7-01-15
15,939 묻고답하기 한 통속 - 최고관리자 17-01-15
15,938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 - 최고관리자 17-01-14
15,937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17-01-14
15,936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17-01-14
15,935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 6강 [할례와 세례] - 최고관리자 17-01-14
15,934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5강 [팽창과 수축] - 최고관리자 17-01-14
15,933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4강 [언약의 자리] - 최고관리자 17-01-14
15,932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3강 [우리는] - 최고관리자 17-01-14
열람 ➜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2강 [사라지는 유령] - 최고관리자 17-01-14
15,930 자유게시판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1강 [장소 없는 장소]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17-01-14
15,929 묻고답하기 이명직 목사님의 수련회 소감문 - 최고관리자 17-01-14
15,928 묻고답하기 이미아 성도님의 수련회 소감 -지옥의 아랫목 - 최고관리자 17-01-13
15,927 자유게시판 수련회를 다녀와서.. - 최고관리자 17-01-13
15,926 묻고답하기 종이에 손을 베고 / 이혜인 수녀 - 최고관리자 17-01-12
15,925 자유게시판 70강-창 16장 6-10절(구원의 구조)170111-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7-01-12
15,924 묻고답하기 송민선 성도님의 수련회 참석 소감 - 최고관리자 17-01-12
15,923 자유게시판 218강-고후 4장 7-9절(보배와 질그릇)170108-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7-01-11
15,922 자유게시판 2017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정산 보고 - 최고관리자 17-01-11
15,921 자유게시판 115강-신 22장 5절(남녀 구분)170108-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7-01-10
15,920 강의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복음의 생산) 전체영상보기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17-01-08
15,919 묻고답하기 예수 죽인 것 - 최고관리자 17-01-08
15,918 자유게시판 177강-YouTube강의(사랑)170103-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7-01-0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