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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1강 [장소 없는 장소]자유게시판골로새서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1강 [장소 없는 장소]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에서나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늘 주의 품안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습니다. 다시 흩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람 얼굴보다 주님의 얼굴을 더 사모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말씀으로 주셨기에 의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하셨기에 이 말씀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있고 영생을 받고 있는가를 저희들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 수련회 강의는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상당히 난감한 대목이 있어요. 그게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가지 말라”

상당히 간단해요. 위 쳐다보고 살면 되니까. 그 다음 3절이 문제가 됩니다. 쳐다보면 되는데 어떤 상태로? 살아있는 상태로 쳐다보면 일반적인 종교와 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3절은 이렇게 돼있어요. “너희는 죽었고” 죽은 자가 뭘 쳐다봅니까? 살아있는 상태가 되어야 쳐다본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그냥 “너희는 죽었고”라는 말을 빼고 1절과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뒤의 말씀은, “우리는 살았어. 그러니까 산 사람답게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자.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구나.”라고 굉장히 간편하게 모든 것이 정리정돈이 되는데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라고 돼있어요. 우리네 상식은 죽은 자는 쳐다보고 할 것도 없어요. 바짝 마른 뼈다귀가 뭘 쳐다봅니까? 흙이 된 상태에서.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돼있거든요.

그럼 여기서 난처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었다면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생명이 있는 곳에서 다시 지상을 내려다보든지 이렇게 되거든요. 생명이 있는 곳은 이 땅엔 없잖아요. 하늘에 생명이 있다니까 하늘에서 다시 이 땅에 내려다봐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라고 돼있어요.

그래서 여기 1절, 2절은 쉽게 넘어가다가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 여기에 그만 덜커덕 걸리고 마는 거예요. 너희는 살았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에 있으니까 위를 쳐다보라고 해야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왜 여기에 “죽었고”란 말을 구태여 집어넣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살았다고 해도 앞뒤가 맞는 것 같은데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가 편하게 생각할 때 중요한 걸 놓친 게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 강의 제목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장소 없는 장소] 장소 없는 장소라는 것은 현실이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걸 골로새서를 3장에서 언급하고 있어요.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면, 단일현실에 있으면서 자기 딴에 신앙 좋다고 하다고 만약에 다른 현실에서 너는 신자 아니라고 한다면, 단일현실에서 신앙인척하는 게 전부 다 소용없게 되는 거예요. 다중현실 속에서 어디에서나 그것이 신앙인으로 또는 성도로써 확인돼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 한다면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래서 죽으면 하늘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단일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하늘을 쳐다보니까 하나님은 여기 계시죠.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것을 ‘외재성’이라 합니다. 외재성이란 말은 이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바깥 있다는 거죠.

그런데 외재성과 ‘바깥’이란 말과 차이가 나요. 바깥은 연결이 안 된, 그러니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바깥이란 우리가 기껏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연결돼있는 외재성밖에 없는데, 바깥이란 것은 끊어진 상태에서 바깥을 언급하면 말씀에서는 바깥이 있는데 현실적으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너희는 죽었고” 하니까. 살았고 하면 내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나는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내가 생각한다. 이 세계 말고 다른 바깥 세계가 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죽었고”라고 한다면 이미 여기서 죽은 입장에서 바깥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이게 다중현실이 되게 되면 여기 살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가 새로운 현실로 새롭게 성립이 돼버려요.

예를 이렇습니다. 아토포스란 말이 있습니다. a-topos라는 말이 있어요. topos는 ‘장소’고, a는 ‘아니요’란 뜻이에요.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장소가 됩니다. 요 근래 이 말이 유명해졌어요. 정유라가 이화여대 시험문제에 이게 나와 버렸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포토스, 그런 말 없어요. 아토포스에요. 헬라철학에서. 장소 없는 장소가 있다. 이 말은 형식은 단일현실에서 통하는 형식을 가져오되 동반해서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등장한다는 것. 형식은 똑같아요. 형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단어를 쓰는데 그걸 붙잡으려면 그 뜻 아니거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재림 같은 경우에 재림이 된다 할 때 “재림은 어디에 옵니까?”라고 묻지요. 재림은 하는데 어디에 옵니까가 안 돼요. 왜냐하면 재림하는 이유가, 단일현실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재림 해버려요. 그러면 재림의 공간개념을 날아가고 기다림만 있어요. 만약에 재림을 어떤 장소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현실에 있느냐 하면, 예수 믿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딴 데 가서 살고 싶다. 성경에서는 다른 곳에 가서 살 곳이 없어요. 힘들다하는 그곳이 천국이에요. 다중이거든요. 포개져있거든요.

A와 B라는 층이 포개져있다면 A에 해당하는 개념, 단어 따로 있고 B라는 것이 따로 있어야 될 텐데, 다중현실에서 바깥에 있는 현실이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사는 단어를 공유해서 함께 사용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편하게 주고받는 그 단어가 주님한테는 왜곡되어 전혀 안 맞는 단어가 돼버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룩’이거든요. 구약에서 거룩은 흠도 티도 오염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중현실에서 거룩은 분리된 것입니다. 전혀 맞질 않아요.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단일현실이에요. 이스라엘에서 구원은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다윗의 왕국을 이루면 그게 복 받는 거예요. 야곱이 아버지한테 빌미를 바쳤더니만 양이 늘어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게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박국에 가면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AI조류독감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리로다. 따라서 복을 받아놓고도 복 받았다는, 양이 늘어난다든지 소가 늘어난다든지 증거물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하박국에 들어가면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넘어가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일현실에 살면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대해서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대로 골로새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골로새서에 대해서 손 뗀다.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그 사람들이 그걸 왜 몰랐느냐 하면, 구약의 용어가 나오는 환경과 신약에 나오는 용어의 환경이, 구약은 단일현실이고 신약은 다중현실인데 그걸 몰라서 그래요.

그러면 다중현실이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들어와 버리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고 중첩이 되면 뭔가 들어왔던 구멍이 있을 것 아니냐? 그 구멍이 바로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그 구멍을 통해서만 보혜사가 들어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계약서가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계약상대자가 안 돼요. 더러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아들만 계약상대자로 하나님께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구원받는 모든 언약은 어디를 초점을 맞추느냐? 예수님이 나갔다가 성령이 오신 이 구멍만 주목하는 그 내용만 계약이지 다른 것은 계약으로 성립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구멍을 통해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바깥세상이 구멍을 통해서 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거예요.

다중현실이 되면 우리는 헷갈리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재림이 되고 마지막 불 심판 되면 전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 눈에 익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것들이 다 날아가 버려요. 지구가 불에 타버립니다. 다 타버리면 주님의 영광 된 나라가 그제야 드러나죠.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바뀌다가 재림이 되면 온전한 단일현실로 드러나고 마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좀 참으세요.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보려면 계약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습니다. 계약 밖에서는 볼 수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는데 성령이 뭘 가져오는데 예수님께서 단일현실 속에 다중현실로 살았던 그 안목, 관점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관점이에요. 세상 보는 관점, 세상 보는 기준점을 말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수입이 더 늘어나는 게 아니고 같은 세상을 보되 다중현실 속에서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겁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열두 제자 중에서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왜? 성령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장소 없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다중현실, 내부와 연결된 외재성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 생뚱맞은 거예요. 바깥을 그냥 알 수 없는 이유가,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죽었고”가 성립되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상상하는 세계 말고. 우리는 상상할 자격도 못 된다는 단일현실과 같이 죽어야 될 그 몸과 마음과 생각들 속에서 평소에 갖고 있던 천국이라는 상상의 세계, 유토피아는 그건 헛방이죠, 거짓말이죠. 그런 세계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건 연결된 외재성이니까. 살아있는 우리가 그냥 상상하는 거죠.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이불 뒤집어쓰면 그 이불 위에 상상의 천국이 보입니다. 그게 정 안 되면 마약하든지 소주 먹든지. 힘들 때 상상하는 세계, 별자리처럼 말씀들이 끼어있는 세계, 요한계시록 21장이 막 연상이 되는 세계, 다 헛방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상상할 때 나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은 골로새서 3장 3절과 달라요. 우리는 살아있다는 말을 자신한테 적용시킬 수 없어요. 죽었다는 말도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죽었다와 살았음을 예수님의 다중현실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다중현실 안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외재성이 아니고 바깥이라 했습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걸 숫자로 하겠습니다. 1+1은 2지요. 1+0+1, 이것도 2지요. 이걸 보통 우리는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같지 않아요. 안에 ‘0’이 들어있는 거예요. 물리학자들이 이걸 간파했어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밑이 있는데 밑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창세기에 나와야 될 그 이야기가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언급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하여튼 과학자들은 고민이에요. 분명히 뭔가 있거든요. 컵이 있는데 이걸 잘라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잘라봤어요. 분자, 원자 다 잘라봤어요. 잘라보고 잘라 봐도 끝까지 남아 있는 입자가 있어요. 이걸 또 잘라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젠 자를 칼이 없네. 너무 작아서. 그렇다면 거기서 멈출 인간들이 아니잖아요. 입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비전문가들이 막 물어대는 거예요. 답변을 해야 될 텐데 어디서 나왔다고 이야기해야 될 텐데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때부터 과학이 아니고 완전히 종교가 돼버립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구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끈이 있는데 끈이 진동을 하는데 1초 10의 42승으로 빠르게 진동하면 뭔가 나온다고 온갖 것 다 하고 있거든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1 밑에 0이 깔려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을 것도 없다. 이게 현대과학이라는 종교가 내세우는 윤리입니다. 그냥 살대로 살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야? 인생 실패했다고 애닮아 할 필요가 뭐 있어? 상당히 종교적 냄새를 많이 풍기지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사는 것이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비슷한 구석이 있지요.

요새 유행하는 종교는 과학밖에 없어요. 과학만이 유일한 종교에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밖에 없으니까. 모든 학문은 과학이 밑바탕 돼서 나오는 거예요. 과학적이 아니면 미신이라고 유포되는 입장에서 과학만이 최종 진리인데 과학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생겨났다. 생겨나는 과정을 교재에 써놨는데 그건 선택사항입니다. 보면 보고 말면 말고.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디에서 나왔느냐? 이걸 언급하거든요. 그 언급이 우리가 하는 질문과는 달라요. “그것이 여기 있다.”와 “내가 여기 있다.” 이것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기 있다고 하면, 지명할 수 있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여기에 내가 들어가면 답변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어디서 나왔는가는 묻혀 들어갑니다. 해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보는지 욥기에서 해답이 나옵니다. 욥기 10장 5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희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이걸 설명하면 이래요.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에 인생을 사는 이유는, 주께서 다중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기 태어났잖아요. 주님의 날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장차 주님께서 나처럼 이렇게 산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욥이라는 저를 먼저 이 땅에서 인생을 살도록 했잖아요. 주님 증거하라고 살게 하셨으면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저의 죄를 다 찾아내려고 저를 괴롭히십니까?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자연을 못 이겨요. 대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인간 쪽에서 자연을 해쳐가면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진리를 찾는 게 결코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연을 못 이긴다는 말은, 배고플 때 밥 먹어야 되고, 잠잘 때 잠을 자야 돼요. 인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충동을 이길 수 없어요. 이것은 진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신앙생활 잘해도 돈 밝히고, 남한테 욕하고 싶을 때 참아낼 재주가 없어요. 신앙생활은 무슨 신앙생활을 해요. 자연한테 늘 굴복하면서. 자기 속의 자연도 이기 못하면서 뭘 거룩한 생활을 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자연을 이기기 못한다는 말은, 자연한테 지면 돼요. 자연에 복속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중현실이라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자연 속에 갇혀 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자연이 있어요. 자연과 자연 사이의 만남에 의해서 특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이 바로 인간이에요.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동물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내가 누군지를 묻는다는 거예요. 이게 다른 동물과 차이 나는 특이한 점이라는 거예요. 다 같이 자연 속에 주눅이 들어서 비 안 오면 농사 못 짓고 몸 아프면 죽어야 돼요. 어떻게 자연을 이깁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화가 나네. 왜 화가 나느냐 하면 신앙생활 잘할 수가 없어요.

아까 어떤 분이 저한테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오면서 날씨 참 좋았습니다.” 기분 좋지요. 주님이 내 마음에 있는 기쁨보다 날씨 좋은 기쁨이 더 좋지요. 이게 솔직한 인간이잖아요. 습도 괜찮고 온도 괜찮으면 갑자기 성령 안 받아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그냥 막 나온다니까요. 왜 자꾸 자신을 속입니까? 자연한테 못 이기는데. 집안에 치매 걸린 어른이 있으면 온유, 화평이 나오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거기다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해대고, 서로가 일방적인 이야기를 해요. 꼭 촛불집회 같아. 서로가 무슨 말하는지도 몰라. 지는 지 이야기고 저쪽은 저쪽대로 이야기하고.

자연은 그냥 동물, 짐승은 순응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같이 주눅 들어서 꼼짝 못하고 살아가면서 이상하게 인간은 말합니다. “나는 누구지? 죽으면 어디 가지? 천국은 어디 있지? 지옥이 있기는 있겠어?”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특이하다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나와요. 우리란 말이 계속 나옵니다.

다중현실에서 우리는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한 그 새로운 우리, 여기서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살리는 우리가 아니고 나는 일단 죽음에서 끝나버려요. 단일현실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그쪽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요. “저, 넣어주세요, 절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 자체가 원초적으로 박탈된 상태에 있습니다. “입 다물고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게 예수님 뜻이에요.

빽 쓴다든지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 언약이란 모든 인간을 제치고 언약 자리에 예수님 단독으로 서거든요.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살며시 가서 뒤에 같이 서면 안 돼요. 살을 빼려고 75인가 하고 저울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90까지 올라갔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같이 올라서서 눈금이 확 올라간 거예요. 그처럼 예수님 자리에 살며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예쁘다고 쓰담쓰담 쓰다듬어 주는 줄 알아요? 그런 것 없어요.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야.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 관계에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신앙생활, 헌금 이런 것 다 헛방이에요. 해도 소용없는 이야기라니까요. 교회 가서 헛짓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성경은 원초적으로 그런 것을 주께서 받아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게 없어도 왜 자꾸 하느냐?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죠. 누가? 내가. 왜? 안 죽으려고.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단일현실로 생각해서. 바깥을 생각해야 되는 외재성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가는 나라를 여기서부터 연결돼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끊어졌는데 상상의 세계, 유토피아를 천국이라고 오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나중에 나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현재 있는 단일자연과 새로운 자연이 오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충돌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게 사실은 단일현실에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으로 기다림의 나라이지 회개할 필요 없어요. 하늘나라를 그냥 기다리면 되지 물속에 들어가서 죽을 필요 없단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 죽는다면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요. 살아있어야 반갑게 얼싸안고 마주안고 주님 기다렸습니다. 고생 많이 했다. 쓰다듬어 주고 할 텐데, 주님이 오셨는데 왜 물속에 기어들어갑니까?

이것은 세례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 심판의 나라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연이 있다, 단일현실이 있다. 이걸 심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심판이 인간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생각하는 그 심판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에요. 우리가 날마다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겠다고 나름대로 심판하고 있거든요.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그 심판으로 남들도 심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그렇게 되면 심판하는 당사자는 안 죽고 계속해서 버티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믿음이 좋아. 아니야, 믿음이 나빠.” 믿음이 나쁘고 좋고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판단하는 나는 안 죽고 계속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이것은 나쁘고 옳다고 판단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네가 뭔데, 네가 뭘 알고 판단해? 우리 자신을 없애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당사자가 날아가 버리는데 천국은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이것을 세례요한은, “물속에 다 들어가!” 집단 목욕하는 게 아니에요. 물속에 들어가서 기다려요. 왜냐? 그 물속에 풍덩 같이 뛰어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실 심판의 나라는 아무리 심판이란 용어를 쓰지만 그 용어는 단일현실에서 쓰는 심판과 다중현실에서 쓰는 심판의 개념이 달라요. 다중현실의 심판은 오죽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아들만 알고 있는 심판 개념입니다. 열두 제자도 몰라요. 그래서 맨날 오해하잖아요.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은 그럴 때마다 인자는 죽어야 하느니라. 제자들은 살아서 구원받으면 누가 높으냐고 하는데 예수님은 방향이 달라요. 나는 죽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자연과 자연의 충돌에서 낯선 특수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이 늘 이야기하기를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는 것이 완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면 자살하는 건 아니고 분명히 죽이는 주체 세력이 있어야 돼요. 그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 그 당시 자연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로 택한 백성이라고 우겼던 그들이 특수한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됩니다.

이것을 일반성이라 합니다. 일반성의 반대말은 개별성이고,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특별한 개별자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일반적인 것에 속해요. 보편성은 서로 달랐는데 같은 것, 촛불집회. 서로 직업이 다른데 박근혜 퇴진을 같이 요구하는 건 보편성이고, 일반성은 반대에요. 서로 같은데 외양 모습은 다 다른 것. 일반적이라 하는 것은 모습은 달라도 생각은 하나고, 보편성은 직업은 다른데 생각은 같은 거예요. 둘 다 똑같은데 사건이냐, 사물이냐, 설명할 때 이렇게 바꿔 설명하거든요.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성에 치고, 보편성에 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약자기 때문에. 일반성, 보편성은 어떤 역할을 하냐? 계약에 도움을 줘요. 죽여라. 우리는 살아 마땅하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은 살아 마땅하고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계약이 성립되는 겁니다.

다중현실은 바로 형식을 기존 것에서 차용하여 동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바깥 현실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 현실을 포착할 언어는 없어요.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언어를 차용하는 겁니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서로 뜻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결하고 충동해요. 예를 들면 기도하자. 일반현실에서 기도하자는 것은, 기도하는 행위자가 원인자가 되어서 기도의 결과가 응답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인은 누구라고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있어야 돼요. 기도하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결과물로 응답이 연결돼있다. 이게 일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하는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예수님이 하는 기도가 응답이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안 팔리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줘야 주님은 계속 우리 손에 죽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공로자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의 시작점을 우리로 꼽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렇게 예수님을 욕 되게 한다면 차라리 그런 기도 안 하겠습니다.” 하는데 일반성과 보편성에서 허락 없이 빠질 수 없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우리가 기도를 안 하잖아요. 갑자기 500미터 앞에서 교통경찰이 나타나서 “주여, 살려주옵소서.” 대번 기도하게 만들어 버려요. 기도를 안 하고 싶어도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일어난다든지 발을 삔다든지 하여튼 사소한 일 같은 것. 주례를 맡았는데 차가 밀려서 결혼식에 참석 못할 때 “주여, 빠른 길로 가게 하옵소서.” 저절로 나온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통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기도 안 하고 싶어도 기어이 간절한 기도 목숨 거는 기도를 하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한 몫 하도록 주께서 선하게 인도하셔요. 합력하여 선하게 인도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 아니에요. 내가 뭘 하고 있다. 그것도 아니에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이상한 일이 이뤄지고 있어요. 내가 생각도 못한 이상한 일이 나한테 벌어지고 있어요. 그 벌어진 일이 주와 관련된 일이라고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점점 더 이 땅에 어떤 원인제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겁니다. 뭔가 벌어졌을 때 전에는 내가 기도해서 헌금해서 얻었다고 됐는데 갈수록 내 행함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같이 있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분이 원인자가 되어서 나는 그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욥기에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단일현실, 다중현실 이렇게 현실 두 개, 또는 자연관 두 개 있다 했지요.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못 이긴다. 신앙생활 이겼다고 자꾸 우기지 마세요. 못 이깁니다. 아직 호된 맛을 보지 못해서 그래요. 인간은 자연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냥 자연이 시키는 대로 끌려갈 뿐이에요. 내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요. 날씨가 좋다든지.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같이 움직입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자연, 새로운 현실을 몰고 오게 되면 몰고 왔다는 소문은 났는데 막상 등장한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달랑 예수님 몸 하나입니다.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에요. 분명히 세례요한도 요란을 떨었는데 하늘나라가 닥쳐서 불세례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게 하나의 허풍인가? 조용해요. 얼마나 조용했으면, 세례요한이 물었어요. “오실 분이 당신이 맞기는 맞습니까?” 그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이 기껏 알고 있는 현실과 천국에서 성령 안에서 어린아이보다 더 못하다는 겁니다.

왜? 구약은 다중현실이 아닙니다. 단일현실이에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거든요. 세례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오셔서 하늘에서 불이 막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불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중현실과 기존의 현실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어요. 우리는 불이 붙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러나 지옥불은 주님만 알고 우리는 모르죠.

방금 이야기한 걸 공식 같은 걸 만들어 볼게요. 여기서 예수님만 달랑 왔어요. 조용해요. 새로운 현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외롭고 그리고 맥없이 힘없이 욕하면 욕먹고 귀싸대기 때리면 다 맞고 옷을 빼앗겨도 가만있고 잡혀있어도 큰소리치긴 해요. 지금이라도 천군천사가 내려온다. 그럼 해봐. 우린 그걸 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안 내려와요. 고린도후서에선 주님께서 연약했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들이 뭘 놓쳤느냐 하면, 이것이 사건이 된다는 것, 새로운 자연이 오면 예수님의 움직임 자체가 사건이 돼버려요. 사건이 되면 어떤 의미가 붙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에 있거든요. 8절을 읽어보세요.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장소 없는 장소가 돼버렸어요. 단일현실에 있는 모든 장소가 다중현실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그것도 예수님이 죽었던 사건 중심으로 재집합, 재정비가 되고 정렬이 되는 거예요. 모든 사건이. 어느 장소에 예수님이 오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복음으로 욕 얻어먹는 그 장소가 소돔이고 애굽이고 그리고 갈보리 언덕이에요. 갈보리 언덕을 긍정적으로 보지 마세요. 갈보리 언덕이 구원받는 장소인 동시에 소돔이 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주의 복음으로 고난을 받으면 성도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다중현실 속에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예수님과 똑같아요. 새로운 성경적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너는 방금 갈보리를 건드렸어. 이게 대전이 아니고 애굽이야. 소돔과 고모라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공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되느냐? 공식하면 어려워진다. 할 수 없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합니다. 존재의 연합이 현실이 아니고, 위치의 연합인데, ‘위치의 연합=주체+권력’이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다중현실이란 새로운 공간에서 사건 안에 들어가면 공식이 있는데 어떤 공식이냐? 위치=주체+권력. 권력은 성령이고, 주체는 예수님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전에 인간은 주체가 아니고 신체에서 나온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연에 속한 거예요.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속하는 게 아니고 기존에 여기에 속한 겁니다.

이런 공식, 우리가 쓰는 ‘위치=주체+권력’에서 위치가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뭐냐? 권력에서 새로운 주체로 호명 받을 때 위치가 된단 말이죠. 이 공식은 심지어 멸망할 세상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의 위치는 누가 나를 김 과장님, 박 과장님이라고 주체로 불러줄 때 나의 새로운 주체로써 위치로써 내 나름대로 이 세상에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엄홍길이 산에 갔지요.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나는 에베레스트에 갔다 왔다고 하죠.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8000미터가 넘는 산 열여섯 개나 올랐다. 그걸 16좌라 하는데 나도 가고 싶은데 용감하게 갔다 온 사람 없을까, 할 때 여기 있다고 하게 되면, 엄홍길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유명한 등산가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단일현실에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 받아왔고 특히 부모로부터 양육 받아왔어요. “너, 공부 못하면 나중에 거지 되는 거야. 거지 돼도 좋아? 공부 좀 해.” 우리는 어디 속했다? 현재 단일현실 속에 일부가 되는 거예요. 현실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거고, 자연이 움직이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신앙생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신앙생활 없어요. 그냥 자연에 적응해서 사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권사님이라고 교회에서 불러주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것은 교회에서 권사라는 주체를 확립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체니까 그것이 곧 나라는 겁니다. 수상한 권력, 잘못된 권력이 나를 위치로 호명할 때 우리는 주체로 돼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바깥 현실은 새로운 개념이 없어요. 이걸 그대로 모방합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와서 성도로 불러주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땅에서 빠져나와요. 그것도 그냥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미움 받아서 죽임을 당한 권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주 안에서 새로 살았다는 새로운 주체를 부여 받게 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중현실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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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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