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모받는 믿음(마 22:13-22) 대전 82강
수모받는 복음 (마 22:13-21)대전-82강
이근호
2016년 11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13-21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들어 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마태목음 22장 13절입니다. 시작이 원래 이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가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고 혼인 잔치는 일방적으로 임금이 만들었어요. 초대받은 본인들이 가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길에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참석하라고 했는데 길에서 데려오는데 처음에 예복 입으라는 조건이 없었어요. 그래서 참석해서 밥이나 먹을까하고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냐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니까, 그러면 다시 길로 내 보내면 되잖아요.
“나가! 나가! 다시 길거리로 나가! 너 초대한 것 무효.” 그러면 될 것을 새로운 조건을 내세워서 이 사람들을 작살내 놨어요. 결박해서 어두운 데로 내던진 겁니다, 차라리 길에서 놀 때가 좋았어요. 그냥 놀면 결박당할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괜히 불러서 호강 시켜 주는 척 하면서 사전에 없던 약속을 들이대서 결박해버리면 도대체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하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는 말은 우리가 모르는 조건들이 따로 주님에게 있는데 그 조건을 언제 아느냐? 너희가 혼나봐야 안다는 거에요. 아니면 최종점에서 안다. 그러나 안 경우에는 이미 모든 것이 판정이 끝난 상태겠지요. 안 다음에 후닥닥 살 궁리를 찾을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에서 천국의 내막이 밝혀 진 거에요.
그러면 최종적으로 결판이 난 이것이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의’라면 여기 오기까지 모든 과정은 뭐가 되겠습니까? 악이 되겠지요. 바로 죄가 되는 거에요. 이번 강의에서 이것을 설명하려고 해요. 뭐냐하면 왜 하나님은 악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가? 어거스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이 묻기를 왜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세상은 악한 자들이 활개를 치고 나쁜 군주가 설치게 하냐고 하니까
어거스트가 말하기를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이 된다. 그러면 악은 뭐냐? 악은 있는 게 아니고 (마이너스)선이 악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선, (+)선 이 선이고 (-)선이 악이다라는 말은 악은 선이 미흡한 것, 선이 모자라는 것이 악이다. 이렇게 말한 거에요. 선이 모자라는 것이 악이 된다면 여기에 뭐가 생기냐 하면 연속성 또는 영속성이 마련되어 버립니다.
악한데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 변화가 일어나면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거에요. 악을 떨어내게 되면, 일종의 표백 작용이라는 거에요. 세탁기로 한번 돌리는 것보다 두 번 돌리는 것이 더 하에 지듯이 조금씩, 조금씩 표백작용 한다는 거에요. 그러려면 내 안에 선이 있어서 선이 악에게 둘려 쌓여서 숨이 막혀 있는데 악을 조금씩 끌어내게 되면 선의 범주가 악이 차지하던 영토를 넓혀 버리면 그 사람은 갈수록 성인군자가 되지요.
성자가 될 수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이것은 도덕人 또는 착한 사람, 이런 식으로 여러 분들이 성경을 보고 있어요. 이렇게 보려면 내 속의 악이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가를 내가 구분해야 되고 악은 멀리 해야 되고 선은 가까이 해야 되겠지요. 거기에 성경 말씀을 다 동원시켜야 되요. 예를 들어 누가 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오지요. 너도 가서이와같이 하라해서 자비를 베풀어라 할 때 자비를 베풀어야 되요.
자비를 베푸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루에 몇 시간을 베푸느냐? 그리고 그 대상이 이웃인데 이웃이 자기 주변에서 몇 미터까지를 이웃이라 보느냐? 바리새인이 질문한 것처럼 똑같이 해야 되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을 또 다시 해야 되요. 이웃이 있으면 그 다음엔 사랑하면 되니까. 자비를 베풀면 되니까.
그런데 자비를 베풀고 난 뒤엔 자기 반성에 들어가요. 그게 자비일까? 70% 자비일까? 80% 자비일까? 자기가 베푼 자비를 측정에 나섰습니다. 이런 것이 다 양적 개념을 동원 할 수밖에 없어요. 이만큼? 이만큼? 더 많이? 이렇게 양적 개념이니까 나중엔 악한 일을 하게 되면 돈의 액수로 자기의 미흡한 것을 채우려는 유혹을 받게 되지요. 나쁜 짓 한 만큼 돈으로 때우려 한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헌금을 갑자기 헌금을 많이 하는 이유는 자기 양심에 걸리는 것이, 처리 못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거에요. 미납금이 많은 거에요. 그것을 한꺼번에 밀려 놨다가 외상 처리 했다가 한꺼번에 돈 많이 벌어서 “주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하면 만족 하시겠어요? 내가 이 정도에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청년이 천원 내면서 나 이 정도에요라고 안 하지요.
그런데 삼성이나 재벌 정도 되는 사람이 1억 내 놓으면서 나 이 정도에요 하며 낼 수 있겠지요. 이것은 천국과 관계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천국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저 멀리의 먹구름을 내가 Come on, Come on 한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시커멓게 몰려오잖아요. 그렇게 천국은 몰려와요. UFO가 떼로 오는 것같이 비행접시 한 편대가 오듯이 그냥 와서 폭격을 해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때, 우산도 없는데 소나기가 오면 하늘 탓을 합니까? 자기 탓을 합니까? 자기 탓을 해요. “아휴! 오늘 일기예보 보고 나올 껄! 우산 챙기는 걸 잊어 바보같이 아이고!” 자기 탓을 하잖아요. 이것은 천재지면에 관여를 못함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천국은 그와 같은 거에요. 내가 천국 잔치에 왔다가 쫓겨 나갈 때도 임금을 탓해선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천국을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제가 먹구름 이야기 했지요. 먹구름처럼 몰려온다면 만약에 먹구름이 오듯 50대에 위암이나 갑상선 암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받아 들여야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위암 걸리고 천국가는 거에요. 신이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면 지옥가는 거에요. 왜 천국은 이렇게 악을 용납 하느냐 하면 선악 구조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있어요. 끊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선악구조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산악 구조의 모양새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하고는 전혀 모양새가 다른, 구조가 완전히 달라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이 따로 있어요. 섞이질 않습니다. 선한 쪽으로 서면 점점 선해지고 악한 쪽으로 가면 점점 악해집니다. 그런데 천국의 생명나무는 선악 구조에서 악의 모습으로 등장해 버려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미 그 전제를 인간이 아는 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선의 모습으로 나와 버립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럴 수 없느니라’는 반발을 유도하는 식으로 천국이 와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들은 “그건 아니지요!” 어떻게 용서가 무차별이냐는 말이죠? 하늘에서 눈이 내릴 때 눈이 막 내려오다가 “저 인간 더러워서 안 되겠다. 피해 가아지!” 이렇게 하는 것 봤어요? 이 땅에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함박눈이 내리잖아요. 그렇게 용서란 무차별이에요. 인간을 보고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용서 받은 자를 잡고 아무리 따져 봐도 둘 사이에 차이는 없습니다. 용서 받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요. 그것을 오늘 천국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함박눈 맞았느냐?”하면 그런 조건 없었잖아요? “눈 안 맞았구나! 그럼 지옥 보내야 돼!” 이런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무차별로 준 것에 대해서 우리 같았으면 “아휴! 그 때 예복 입을 껄!”
그런데 예복 입을 껄이라는 조건이 성립이 안되요. “그 때 예수 믿을 껄!” 이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왜? 믿을 만한 것 같았으면 왜 안 믿었겠습니까? 입을 만 했으면 왜 안 입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입을 이유가 하나님 쪽에선 있겠지만 인간 쪽에선 이유가 없어요. 민수기 21장에 보면 놋 뱀을 들었다고 했잖아요. 하필 왜 뱀 지팡이냐는 말이죠.
놋으로 뱀을 만든 이유가 뭐냐하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들리는 모습이 인간들이 전부 싫어하는 멸시하는 그 모습인거에요. 놋뱀의 모습이, 불평하던 사람들을 물었던 불 뱀은 사실은 하나님의 전령들이었습니다. “쉬익! 물어라!” 주님이 키운 새퍼트였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놋뱀을 쳐다 본 사람도 있고 안 쳐다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안 쳐다 본 사람들에게 “ 넌 왜 안 쳐다보냐?”고 시비 걸지 마시고
쳐다본 사람에게 왜 쳐다보냐고 물어봐야 되요. “저는 뱀에 물려도 마땅합니다.” 이런 자만 챠다 보는데 이런 마음이 기적이잖아요.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면 쳐다볼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 흘렸다. 예수님 믿어라! 믿는 사람이 이상하죠. 왜 십자가 피 앞에서 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이 돼버리거든요.
인간은 자존감 때문에 사는데 십자가 앞에서 자존감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그것은 나는 고유의 가치가 있다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너보다 못하지 않다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됩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고백 밖에 안 나온다는 말이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하는 것이 신기한 것이지 “너는 왜 나처럼 말 안해”라고 옆 사람을 다그칠 문제가 아니잖아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이런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족발 먹을래? 있지도 안는 것을 왜 시킵니까? “안 먹을래! 난 죽어 마땅해!” 이건 중국집에서 할 소리가 아니지요. “손님! 뭐 드시렵니까?” 하면 “난 죽어 마땅해요. 저는 죄인입니다.” 이건 주방장에게 할 소리가 아니잖아요.
남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십자가 앞에서의 태도가 달라야 되요. 남은 비교 대상이 안돼요. 싸울 필요도 없어요. 왜 지옥 갈 사람들하고 비교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영적이지 싸울 필요 없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에 오늘도 죄인을 이렇게 살려 주셔서 감사 하지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 구조 속에 의인 되시는 예수님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들어오시니까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선악과를 범하므로 생명 마무를 못 따벅게 되버렸지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문제없는데 어디에 문제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문제 있지요. 문제 있는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들어 왔을 때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단절되야 되는 단절성이 선악 속에서 선악 구조의 모습으로 단절돼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아는 선악 주조에서 예수님의 선악은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이미 들어온 생명나무로 그 모습 도 생명나무의 모습으로 선악 구조의 체제 속에 주님 자신을 맡겨 버렸습니다. 너희들이 아는 선악 구조로 나를 한번 다루어 봐라! 그러면 뭐가 나오냐 너희의 선악 구조가 왜 천국에 갈 수 없는 악마적 사고방식인지를 나를 통해서 그것이 노출 될 것이다. 발각 될 것이다. 알려 질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선악 구조 자체가 악이 되는 데 오토 파지( autophagy :자가 포식)현상(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인체가 스스로 죽은 세포는 없애고 살아있는 세포는 에너지를 내도록 하는 현상 즉, 세포 내 소기관의 하나인 리소좀이 다른 단백질을 분해해 영양분으로 재이용 하는 현상 이 연구 덕분에 파킨슨이나 알츠하이머와 같은 신경 난치병과 암, 당뇨 치료에 향후 상당한 도움과 성과과 있을 것이라 예상함)라는 말을 여러분은 못 들어 보셨을 거에요.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일본의 교수(오스미 요시노리)가 주장했던 것인데 효모의 세포 안에 액포라고 있는데 액포 말고 리소좀이라고 있어요. 리소좀은 세포내의 불순물을 처리하는 청소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쓰레기(세포)를 분해하는 효소가 있는데 예전에는 리소좀이 어떻게 청소하는 지 메커니즘을 밝히지 못했어요.
그런데 오토파지(자기소화작용)는 세포 구성 요소의 파괴와 재활용에 질서를 제공합니다. 이 과정동안, 대상 세포질 구성 성분은 세포내이 다른 성분들과 격리되어 이중 막에 둘러싸이는데 이를 오토파고솜(자가소화포)라 한다합니다. 자가 소화포는 그 이후 라이소좀과 융합하고 내용물들은 분해되어 재활용됩니다. 이렇게 밝혀진 것이 왜 노벨 상 감이 되느냐? 이것을 그동안 왜 몰랐냐 하면,
외부에서 영양분이 공급되는데 세포는 영양분이 차단된 후에는 안에 있는 쓰레기(죽은 세포)를 자기가 스스로 자가 소화, 스스로 소화시켜서 영양분으로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필요한 유전자 DNA 정보에서 치매 환자에게 조정해서 쓰레기 활동을 활발히 시키면 치매 환자나 암 환자가 자체적으로 세포 내에서 청소를 한다 던지 아니면 암 세포내에 청소 기능이 없으면 청소를 해야 세포가 확장을 하는데 청소 기능을 없애 버리면 암 세포가 죽어 버리죠.
그러면 암 치료가 되는 거에요. 그것에 관한 이론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거에요. 이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면 쉬워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언약은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운 하나님이 언약이 완성 될 때 의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의는 언약이 완성 될 때 생긴다 했는데 누이 생각에 의 만 생기는 줄 알았더니 언약 입장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악도 같이 생겨요. 죄도 같이 발생 됩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해야 거기에서 우상 다시 말해서 악마의 뱀의 정체가 드러나요. 뱀이 악마가 아니고 뱀의 후손이 악마입니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인 것처럼 이브의 후손이 메시야인 것처럼 이브를 유혹했던 뱀의 후손이 바로 악마입니다. 따라서 악마를 만들어 내는 드러내는 작업이 악마도 피조물이니까 악을 만들어서 언약에서 발생되는 악을 언약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함으로써 완성이 되고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이렇게 의가 되면 성도는 뭐가 되냐 하면 자체적인 의가 필요치 않아요. 내가 행위로 얻을 의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게 해도 죄가 되고 왜냐하면 이미 언약 안에서 발생된 새로운 의가 두 번 다시 천국에서 쫓겨 날 일이 전혀 없는 영원토록 의에 합당한 축복을 받는 주님의 의의 혜택 자가 되는 의의 생산자가 되는 겁니다. 의를 생산 하시는 분의 생산물. 생산물이 뭐냐하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 내는 죄가 있고 악마에 의해서 된,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밝혀지고 언약에 의해서 생산되게 되어 있어요. 그 쓰레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을 따라 뒤 따라 와서 그것을 스스로 파괴 시키는 작업을 해서 승리 하지요. 승리를 하게 되면 그 결과로 의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주동자인 예수님을 주체자를 영원토록 찬미하는 영역을 천국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천국은 뭐 없이 안된다? 언약 없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와의 뜻이 뭐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6장을 한번 봅시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1234숫자 써놓고 하던 놀이 있지요? 사방치기. 먼저 뒤돌아서서 돌을 던지잖아요. 그렇듯이 언약을 먼저 던져 놓고 언약을 주우려 가는 거에요.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언약을 던진 분과 줍는 분이 이미 창세전에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어요. 성부와 성자끼리 ‘주께서 내 주에게’ 그래서 던지는데 악마도 필요하고 선악과도 필요하고 아담도 필요하고 해와 달도 필요하고, 그런데 과학자들이 어떤 면에 무시 하냐하면 해와 달을 연구하고 달을 연구하지요. 그런데 달이 왜 있어야 되는가? 해가 왜 있는가를 몰라요. 철학자들도 몰라요.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을 놀립니다. “너희가 해를 연구하고 별을 연구하는데 달과 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대봐라!” 모르지요. 철학자들은 놀립니다. “너희가 별을 연구하면서 별이 왜 있는가를 모르는 이유는 바로 네가 왜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너는 네가 왜 있는지 아냐?” 몰라요.
그래서 과학자와 철학자가 합의를 봤습니다. 이것을 학문의 통습이라고 해요. 인문계와 자연계를 합해서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지혜를 찾아내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된다. 통습의 원리에 의한 결론이 이렇습니다. 인간이 왜 있느냐? 이 세상이 저절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고백하라고 진화의 마지막 시점에 인간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되요.
인간은 세상의 밀도가 강렬해져서 하나의 작은 원 세포가 되는데 그것이 수억 년 동안 진화된 결과가 인간이고 인간은 먼별을 쳐다보면서 내가 있기까지 오랜 시간 이런 과정이 있었구나!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주는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진화해 왔다. 이것이 오늘날 학문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답이 만족스럽습니까? 이것이 불교 사상이지요.
왜 이렇게 억지스러운 논리로 결론을 내리냐 하면 창조를 비껴 가려고해요. 반드시 창조가 성립되려면 여기에 누가 있어야 되냐하면 창조주가 있어야 되요. 그러면 옛날에는 창조주가 종교와 관계없이, 예전 사람들은 조물주라 했잖아요. 그 조물주가 있다는 게 왜 그리 신경 쓰이냐는 말이죠. 그냥 있다 하면 될텐데, 문제는 창조주가 창조를 했다 해버리면 근대인과 현대인의 의식에 안 맞아요.
왜냐하면 근대인은 자기 밖에 모르거든요. 자기 밖에 모르는데 신이 창조했다 해버리면 굴종이 돼버리거든요. 운명아 비켜라! 이렇게 되어 버리는데 운명아 시키는 대로 할께! 이렇게 되면 역사를 부흥시키는, 역사를 더욱더 가속화시키는 에너지를 인간 내부에서 뽑아 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게 팔자인데 뭐! 이렇게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다시 구석기 시대로 퇴행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전거 패달을 밟아야 되잖아요. 앞으로 앞으로, 가 봐야 죽음인데. 어디로 갈지 모르고 계속 보이저호 날리고 목성 가보고 그 다음에 토성 가보고 그다음에 명왕성, 천왕성 가보고 또 은하계 밖에 또 가보고 가면 또 뭐할 건데요. 그 밖의 안드로메다까지 가보려면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백 날 가봐야 천국에도 못 가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진작 끝내 버리지 하나님께서 질질질 끄시느냐? 예수님께서 언약대로 와서 이놈! 하고 지옥 가거라하고 불바다 만들면 되는데 왜 질질 끄시는가? 이런 게 있어요. 수모 당한 자만이 고자질이 가능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고통에 합류한 자만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안다’라는 것을 어려운 말로 인식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인식은 백날 들어봐도 그것에 대해 선별 작업이 일어나 버립니다. 내 몸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선별 작업을 해서 불리한 것은 기억 안하려고 애쓰고 나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이 되냐 내가 우상이 되어 버려요. 내가 나에게 신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당하는 수모는 나로 인한 수모가 되어버리고 나는 주님의 나라에 가는 거ㅔ 아니고 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요. 죽고 난 뒤에 나의 나라, 내 스스로 찬미 받아야 될 그 세계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저 세상까지 연속성으로 고대하게 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 쯤 되면 나오는 것이 여자가 마지막 엔 원수를 다 갚아요. 원수를 다 갚고 난 뒤에 남편이 위장된 차 사고로 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이겁니다.
“여보! 이젠 내가 다 용서 했어!”라고 용서로 끝나요. “기다려요 내가 그 쪽으로 갈께!” 가로수 쫙 비추면서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저 세상은 내가 못 다 이룬 한이 다 이루어지는 세계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터 모든 목적과 삶의 보람이라는 게 그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이 억울함을 다 풀어줄 수 있는 이것은 자기 체계입니다. 연속성이요. 중간에 십자가는 없어요.
착하면서 억울함을 당했는데 신데렐라처럼 이제는 이 착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드디어 공개되면서 억울했던 감정을 다 풀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받아주는 그 세계를 추구하는 거에요. 이런 사람이 주로 새벽 기도에 나가요. “주께선 아시지요. 이 억울한 마음을” 해놓고 난로 가까이 가요. (웃음) 불 쬐고 또 억울합니다. 가만히 일어나며 보니 옆에 라이벌 집사는 아직도 기도해요. 그럼 또 앉아서 주여~
앞에 강단에 있던 목사는 속으로 “빨리들 가줘야 되는데 연료비 많이 나올 텐데!” 하지요. 벌써 두 시간이나 때서 벌써 5만원어치 날라 갔네 하고 있고, 왜 그런 드라마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냐 하면 언젠가 내게도 맺히고 맺힌 한이 있어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선 못 푼다면 하나님께선 풀어 주실거다라는 말이죠.
부모 나이가 90이 돼서 치매에 걸린 자기 엄마를 20년 동안이나 봉양 했는데 그 엄마는 치매 걸린 티를 내는지 마지막에 유산 남기면서 아들한테만 다 주고 딸이 다 섬겼는데, 딸이 사위 눈치 봐가며 돈 드려서 다 돌봤는데 아들에게 만 땅을 다 주니 그 맺힌 한이 새벽 기도로 이어지겠지요. “주여! 이 한은 주께서 갚아 주시옵소서!” 예! 천국 못갑니다. 아직까지 자기에게 맺힌 한이 있다면 한 번도 십자가 앞에 자기를 비춰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죄가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이용당한 인생을 그동안 내가 살아왔구나! 내가 이렇게 한이 맺혀야 될 이유는 십자가 때문에 이렇게 한이 맺혀야 된다는 사실, 죄가 있는 것이 오토 파지라니까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을 스스로 죄를 재료로 삼아서 용서라는 효소를 집어넣어서 하나님만이 악마를 이겼다라는 의를 생산해 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생산이에요. 수련회에서 할 것을 미리 다하네.
왜 죄가 있고 왜 인생을 이렇게 골골하게 사느냐 그것은 바로 악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생명나무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성도가 수모 당하는 모습은 누구 이름입니까? 오직 복음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수모이지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한 맺힘을 절대 들어 주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할 거에요.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수모가 어떤 수모입니까? 그것을 이제부터 말씀드릴께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이것을 큰 교회에서 얘기 했을 때 이 수모가 바로 복음의 수모입니다. 더 나가서 교회 없이도 복음만 있으면 구원 된다. 더 나가서 목사 없이도 구원 된다 해서 이럴 때 당하는 수모가 복음으로 당하는 수모에요.
그럼 네가 잘나서 구원 받는가? 내가 잘났어도 구원은 안 된다. 오로지 주님의 언약 때문에, 십자가의 효과 때문에, 그래서 내가 십자가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면 안되요. 십자가만 자랑해야지 십자가 믿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건 자기 자랑이 되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면서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를 벌었는데 혼인잔치의 결과나 구조의 진행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에요. 임금의 독단적인 조치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스런데 이런 이야기를 누가 했다? 예수님 본인이 이야기 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핍박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협박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 영역이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영역이에요. 이는 제자들조차 성령 받지 않으면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 못했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되돌아 봤을 때 마태복음을 썼지 그 전에 예수님을 이해했으면 배신하고 도망치지 않지요. 아무도 이해 못 할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아담에 속한 자는 어떤 누구도 아무도 이해 못한다. 그것을 우리가 하고 있으니 감사 하지요. 22장 14절을 봅시다. 다 같이 읽어봅시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 숫자 = 택함 이 아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어디까지 안다? 청함까지는 알아요. 택함은 누구 소관입니까? 우리는 몰라요. 알고 싶은 우리를 택함의 자리에서 청함을 늘 죽여 버립니다. 나는 청함이 아니다 그 소리까지 진짜 택함이 와 버리면 청함까지는 안다는 것도 택함에 함몰되어 버려요. 선택되었기 때문에 청함 받은 것이라고 청함과 동시에 택함도 바로 직결되도록 안 끊어지는 그러한 의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청함인 동시에 택함이 되는 것입니다. 청해 놓고 예복입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청함과 동시에 택함이 되지요. 그 다음 15절을 봅시다. 납세의 논쟁이 나오지요. 이 대목을 제가 좀 말씀을 드려야 되겠어요. 바리새인들의 무기가 말입니다. (말 +언어, 문자)언어인데 언어라 하면 뭐까지 포함되어 있냐 하면 문자까지 포함이 되는 거에요.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그런데 문자라고 하는 것은 문자가 먼저겠어요? 말이 먼저겠어요? 말이 먼저에요. 처음에는 상형 문자 밖에 없었습니다. 돌에 새긴 다든지 하는 그림 문자 밖에 없었지요. 인간은 말을 하게 되어 있고 말을 남기기 위해서 문자화 하는데 남긴다는 말은 결국 역사에 나타날 소지가 있고 역사가 되어 버리면 여기서 권력이 생겨요. 오래된 권력에 뒷사람이 종속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화가 되요.
우리가 왜 모였지? 아! 처음에 계주가 대전에서 모이다가 서울로 이사 갔지! 아하! 그때 우리가 살았던 대전에 계주가 있었지! 옛날의 계주 때문에 그 모임을 계속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얘들이 써클 만들 때 고상한 이름으로 하잖아요. 코스모스파, 불광동의 공주파. 거기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든 오야봉이 있어요. 오야봉은 이미 선배라 졸업했어요. 그 뒤 전통을 이어 계속 하잖아요. 그 정신을 이어 보겠다고,
그처럼 말이 있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집단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말이 뭐가 되냐하면 법이 되어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법은 싫어하면서 법 없인 못 살아요. 반드시 약속 같은 것, 규정 같은 것을 마들어 놓고 해야 내 마음이 편해져요. 생활이 안정이 되고 규칙 같은 그런 게 있잖아요.
그래서 말로 예수를 얽어맨다는 것은 “네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을래! 안 그러면 쫓겨 나갈래!”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소통하고 있는 문법과 논조와 사고방식에 대해서 너는 동의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냐, 그럼 동의 안하면 어떻게 되요. 아까 말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법이 된다고 했지요.
법은 어떤 목적이 있어요. 뭐냐하면 공동체에 안정된 질서 체제를 유지해야 되요. 여러분! 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 입니까?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고 하는데 감정이에요. 박근혜는 법으로 나가겠다는데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은 뭡니까? 지금 당장 내려와라! 지금 당장 내려와라에요. 너 때문에 못살겠다. 법 가져오면 내가 알아서 나갈께! 아니 지금 당장 내려가라! 지금 당장 내려가! 박근혜는 뭐냐하면 헌법대로 하자는 거에요.
그런데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조 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옳지 않아요. 그렇게 하면 뭘 인정하는 셈이 되요? 헌법 1조는 그렇더라도 그 1조를 위해서는 세부 조칙에 따라 줘야 되요. 지금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헌)법은 뭐가 아니다? 진리가 아니지요. 왜 헌법을 믿습니까? 양쪽 다 잘못 된 거에요.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데로 살아야지 왜 헌법을 따라야 합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이 헌법을 만든 거에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 체제에 대해서 네가 동조하지 않으면 우린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죽이겠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헌법으로만 유지되고 의롭게 될 공동체에서 의를 부숴버리고 그 의를 혼란시키는 요소로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핀셋으로 뽑아내지 아니하면 기존의 법이 혼란스럽고 그렇게 되면 누가 피해를 보냐하면 법의 혜택을 입고 법의 보호를 받는 낮은 자들이 큰 피해를 봅니다.
없으니까 짓밟히지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거에요. 드라마 대사 보면 나와요. 돈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는데 그 말에 속는 건 너 밖에 없다. 그 말에 너만 속아 넘어가지 다른 어떤 사람도 안 속는다. 돈이 곧 신이다. 법을 깨버리면 결국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치이냐하면 가진 자가 치게 되어 있어요. TV에 집밥 프로그램하는 사람, 백 선생이 체인점을 만드니까 시장 통에서 장사하던 할매 집 김밥이고 뭐고 전부 문을 닫게 된다 말이죠.
방송에 나오는 유명 인사가 시장에 가게를 내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법이 없으니까 막대한 자본금으로 하는 가게가 기존의 가게를 하며 자식 공부시키려 했는데 손님이 없어서 망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법으로 관여하게 되면 여기까지는 침범하지 말고 어느 거리까지는 범위로 띠어라! 법으로 약한 자를 보호하는 거에요.
만약에 예수를 설치게 놔두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강도나 살인자나 창기들이 자기 잘났다고 하겠지요. 간통하고 “나도 구원 받았당!” 그럼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법대로 예수를 처단 해버려야 하는 거에요. 교회의 목사가 설교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비껴가서 바르게 사세요라는 법을 내리는 이유가 만약에 성경에 있는 아무 말씀십자가는 몇 마디 나오지도 않아요.
대부분 이야기 하는 것이 십계명 이야기, 착하게 살아라,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 이 말을 안 해줘버리면 교회가 개판이 된다는 거에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그것이 바로 꽁꽁 숨겨 놓은 악마의 얼굴이 바로 그겁니다. 교회가 개판되면 누가 손해냐? 누가 손해일까요? 교회에서 밥벌이 하는 목사 본인부터 노후 대책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 목사는 누구를 안 믿어요? 예수를 전혀 안 믿지요. 교회가 개판되면 아무도 주를 안 믿는 줄 알고 있어요, 얼마나 믿음이 없는 거에요. 교회 만들어서 부지런히 총 전도주일 해서 끌어 모아야 그 중에 하나라도 건질 건 건지고 탈락되더라도 알곡은 있을 게 아니냐는 건데 전부 다 가라지인데 교회 쳐다보는 알곡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쳐다봐야지! 그래도 숫자 한 5 백명 되면 80명 정도는 아니겠느냐인데 그건 니 생각이고,
목사가 복음만 전해 보세요. 천 명이면 다 싫어하지요. 그럼 다 가라지이지요. 가라지에요. 뭔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되느냐 하나님께 바치냐는 말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너 유리 질서에 편입할래? 아니면 나갈래?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나는 너희 동네에 안 살래! 이 멍은 그렇게 바치고 싶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바쳐라!
(마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 22: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마 22: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들의 논리로 쳐 버리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아! 하나님께 바쳐라! 이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바치고 싶으면 원대로 바쳐봐! 안 받으시죠. 지금 말장난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르는 것을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이 동전이 누구의 것이야? 가이사, 그럼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은 네가 하나님께 바칠 방법도 모르고 처음부터 가이사에게 네가 바치고 싶어 환장한 데로 해라!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받쳤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 밖에 안돼!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바치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 너 이 질문 잘못했어! 왜? 악마에게 갇혀있는데 나온 언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먹구름처럼 덮쳤는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가 날마다 경계선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차이점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