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1절(예수님의 관점)170103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3장1절(예수님의 관점)170103b-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누가 부추겼죠? 악마가 부추겼죠. 여기서 신비로운 것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은 그 본질이 충돌이 되게 되어 있어요. 충돌이 되는데, 이게 선악과에요. 선 과일이 따로 있고 악 과일이 따로 있는데, 두 개다 먹으라고 한 게 아니고. 그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안에서 이미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죠. 근데 인간들은 이게 통합이 안 돼요. 선을 하면 선을 하든지, 선인 동시에 악도 하는 아이디어는 인간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악이면 악이고, 악이 저질러졌다는 말은 인간은 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에요.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그런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마귀의 세계에서는 그게 성립이 돼요. 마귀에게서는 그게 성립이 되기 때문에 선악과 세계를 가지고 계속 인간들을 요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끊임없이.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선 같은 인간인데도, 내가 원하는 바는 선을 원하는데, 내 안에 원치 않는 악이 있다 이 말입니다. 원치 않는 악이 있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이게 한 주머니에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게 통합이 안 돼요. 통합이 안 되니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서로 싸운다고 되어 있어요. 서로 싸운다. 또는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투쟁한다. 안 지려고 한다. 근데 결국 누가 이깁니까? 악이 이기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간단합니다. 선, 악, 그게 통합되어 있는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악. 그러면 악에서 벗어나려면 어디서 벗어나야 하느냐 하면 이 선에서 벗어나야 해요. 선하지 않아야 악이 되는데, 우리가 선을 요구하는 이상 계속 악마한테 시달리는 거예요. 악마의 덫에 완전히 포착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에는 너무나 선해요. 우리가 구원받기에는 너무나 선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선하기 때문에. 계속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선악과의 질곡에 잡혀있는 인간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선악체제 자체를 악으로 밟아버려야 되겠죠. “니가 선을 행해? 에잇! 이 나쁜 놈아!” 이래 돼야 돼요. 근데 그것이 말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고 있는데 그걸 악이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선이 있는데 왜 악이냐 이 말이죠. 그러면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뭐라고 해요? 예수님을 찾아올 때 명칭이 뭡니까?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리고 선한 선생이여, 하면서 본인을 어느 쪽에다 몰아세웠습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선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했죠. 그러면 선이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악마에 사로잡혀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빼내려면 그 선마저도 악이 됨을 알려줘야 되잖아요. 처음부터 선은 일체 없어야 돼요. 그게 되려면 선악 말고 다른 관점이 있어야 돼요. 다른 관점의 선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완전히 빼돌렸습니다. 빼돌리고, 선악을 알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나무하고 선악과 아는 것 하고 이게 어떻게 돼요? 인간 선에서는 이게 대립이 되는 겁니다. 그 대립에, 하나님께서 폐쇄회로 사이에 개입을 해버리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 충돌이 십자가라는 충돌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리석다고 했죠. 왜 십자가가 어리석으냐 하면 전혀 선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거예요. 왜? 십자가 믿고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것을 본인이 악한 행동으로 보지 않고 무슨 행동으로 봅니까? 선한 행동으로 보고 십자가로 달려드니까, 진짜 십자가하고 선한 행동으로 위장된 가짜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 앞에 어른거리면서 그걸 배척해버립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이천년 교회가 그걸 계속 해오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 믿는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당신은 영생이 주어졌고, 당신의 가정은 복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짜를 계속 등장시킨 거예요. 그러면 그걸 피하는 방법은, 내가 예수 십자가 믿는 것까지도 악하다는 것에 포함이 되어야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은 옳고 우리 인간은 나쁘다면,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 충돌 지점에서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제자들까지 몽땅 다 예수님의 대해서 대척관계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줘야 되죠.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예수님 빼놓고 몽땅 다 저쪽 편에 가 있어야 돼요. 그냥 저쪽 편에 전부 다 가 있어야줘 됩니다. 가 있는데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느냐, 사탄이 그 역할을 해줘야 해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는 다 예수님의 대척관계에 있다는 그 작업을 인간들은 하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은 개별적 존재거든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보는 거지, 옆 사람하고 전체성을 인간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성을. 우리가 친하게 지내면 친구라고 하죠. 친구라 하잖아요. 근데 친구가 돈 문제 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원수 되죠.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부부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업 망하면 가짜 이혼이라도 해야 돼요. 절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인간 쪽을 이렇게 담아두는 바구니 역할, 통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등장을 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사탄이 제자들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작업이에요. 가룟 유다가 됐든, 누가 됐든 사탄이 들어가서, 11대 1이잖아요. 사탄이 들어간 사람 몇 명? 1명. 나머지기는 몇 명? 11명. 11대 1로 싸우면 11명이 이기게 되잖아요.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다들 싸워봤죠? 11대 1에서 누가 이기게 됩니까? “그래, 가룟 유다 니는 예수님 배신해라. 우리는 따라 갈래.” 이래야 되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나가 전체를 이기게 된 겁니다. 사탄이 전체를 이끌어요. 그거는 평소에 이미 제자들도 사탄이 형성된 결합력에 의해서, 그걸 권력이라고 하는데, 악한 어둠의 권력에서 어느 누구도, 열 두 제자라도 한 명도 빠져나온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뭐냐, 현재 있는 상황을 그냥 직무로써 보여준 거예요. 뾰루지 난 겁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세상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게 하나의 뾰루지 난 것처럼 튀어나와, “어? 그거 문제 있네?”가 된 거예요. 그 문제 있다는 직무는 정상적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 팔아먹는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성경이 굉장히 쉽죠. 관점이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간단하죠. 간단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전부 다 인간을 하나로 묶기 때문에 간단한 거예요. 묶지 않고 그냥 성경을 보게 되면, “가룟 유다 나쁘네? 우리는 정신 차리자. 가룟 유다처럼 되지 말고.” 각자 개개인으로 돌아가 버려요. 개개인으로 돌아가 버리면, “베드로는 배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면 전체를 다 씻어줬다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알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머지도 씻겨 달라고 하다니? 이런 철딱서니 없는, 3년 동안 뭘 배웠어? 학원에서 졸았나? 뭘 배웠어?” 이렇게 개별적으로 또 나와요. 개별적으로. “우리는 이러지 맙시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나가버리면 우리는 뭐가 돼요? 악인이 되지 않고, 통합된 악인 속에 포함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뭐가 됩니까? 선인이 되죠. 선한 이것이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마귀로 하여금 계속 예수 믿는 선한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지금도 부추기는, 그러한 부지런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귀 없이는 구원이 안 돼요. 마귀 없이는 구원이 안 돼요. 어쨌든 간에 교회 와서 지금보다 더 향상된,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각개 전투(병사 개개인이 총검술 따위로 벌이는 전투),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라고 하는 이것.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열 두 제자가 다 실패했습니다. “가룟 유다 제치고 우리는 구원받자.” 이런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를 통해서, 가룟 유다가 대표적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다 드러낸 거예요. 잡혔다는 소리를 듣고 다 도망쳤잖아요. 별 혐의 없이. 혐의는 몽땅 다 가룟 유다한테 덮어씌우고. “니가 팔았잖아? 니가 귀띔해줬잖아? 우리는 어쩔 수 없었어. 그때 너무 무서웠어. 예수를 아느냐 할 때 나는 모른다 했어.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혼났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근데 처음부터 어쩔 수 없었어요. 처음부터. 예수님 따라다닐 때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근데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겁니다. 이런 겁니다. 이 이야기를 진작 할 걸. 아래 인간이 있잖아요. 여기 위에 천국이 있죠. 그 사이에 띠가 있어요. 그게 무슨 띠냐 하면 악마의 띠. 무슨 띠? 이 세상의 신이 이런 띠를 형성한 겁니다. 성경책인가, 이런 띠를 형성한 거예요. 이 띠는 전체를 포획하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띠에요. 이게 관점주의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이 무지무지하게 쉬워요. 그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못 믿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내 구원은?”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지난 25일 설교할 때, 2017년도 교회의 목표를 제가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죠. 교만해서 구원받자!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2017년도에 교회 왔는데 이제는 박차를 가해가지고 더욱더 교만 합시다. 교만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자, 요한복음 13장 2절을 봅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자, 이렇게 보게 되면 마귀가 주님 시키는 대로 하는 얼마나 충실한 종인지. 마귀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요. 욥기도 마찬가지고. “니가 가서 욥에게 가서 모든 것을 뺏어라.” 악한 천사는 그야말로 시키는 대로 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이야기지, 거기서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은 그냥 뒤늦게 와서 폼이나 잡는 존재에요. 폼만 잡아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TV에 미국드라마가 있어요. 웨스트월드라는 드라마인데, 미래의 세계에 천재과학자가 뭘 만드느냐 하면 놀이동산을 만들었는데, 그 놀이동산이 어떤 동산이냐 하면 1박에 5만 불 받고 직접 옛날 서부시대에 넣어주는 거예요. 실감나게. 넣어줘서, 거기의 악당들, 보안관들을 전부 다 기계로 만들어서 시나리오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인공지능이에요. 근데 고객의 장점은 총 맞아도 안 죽는다는 겁니다. 그거 하나 집어넣고 거기서 실감나게 옛날 서부극을 즐기는 겁니다. 1박에 5만 불 이렇게 해가지고. 근데 그렇게 하면 드라마가 1회로 끝날 거잖아요. 근데 10회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나리오대로 안 하게 되고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작년에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던 그 드라마인데, 우리가 그걸 보면서 이거를 봐야 돼요. 뱀하고 벌써 다 폐쇄공간이니까, 폐쇄회로, 폐쇄 공간, 갇혀있는 공간이니까, “야! 마귀 실시!” “예.” 가가지고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만들어진 존재인줄 모르고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예수 믿고, 메시아 만나서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그 꼬락서니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꼬락서니를 보여주면서, 뭐냐 하면 그래서 너희들은 마귀에 속해있다는 것의 확정된, 그 면면들을 보여주는데, 그 다음 내용입니다. 발을 씻겨주는 대목입니다. 이거는 백석대학 CF가 아닙니다. YTN에서 하는 천안 백석대학 CF에 보면 우리는 서로 발 씻어줍니다. 그게 나와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세족식 하는 거 있잖아요. 청년회 수련회 때 많이 해봤죠. 발 씻겨주는 것, 스승이 먼저 제자한테 발 씻겨주고. 사실은 그거는 성추행이에요. 이게 재미있는 게, 인간의 법이 웃기는 게, 원래 성추행이 남자가 여자한테, 또는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소수자는 뭡니까? 남자가 남자, 여자가 여자죠.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이 성소수자인지 분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가 남자를 발 씻겨 줄 경우에는, 만약에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면 성추행으로 고발당합니다. 미국에서는 인간의 인권을 존중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 여자 없애버리고 Z라는 제 3의 성으로 하잖아요. 그리고 학교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가르치면 징계 받게 되어 있어요. 불교에 대해서는 괜찮은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미국에 대안학교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대안학교. 6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우리가 다 모시는 가운데 정립된 것이 관계입니다. 무슨 관계냐, 주군입니다. 주군이라고 하는 것은 사무라이에 나와요. 주군의 특징이 있어요. 주군이 죽으면 다 죽어야 돼요. 멀쩡하게 살아있는 부하도 주군 따라 다 죽어야 해요. 왜냐하면 주군과 사무라이의 관계는 충성의 관계에요. 운명을 같이 해요. 운명을. 그 조건이 전쟁터에서 주군이 죽을 때는 안 죽지만, 잠자다가 죽거나 등산가다 미끄러져 죽으면 같이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사무라이는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서 일체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주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해요. IS하고 똑같아요. 알라신을 위해서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는 겁니다. 알라신을 위해서.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주께서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하는 그 문제에요. 발 씻어주는 문제가. 어떻게 주군이 자기 부하의 발을 씻어주는가? 이래 나온 거예요. 스승이 어디 학원에서 피아노 레슨 하는 강사수준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3년 동안 따라다녔다는 말은 사무라이와 주군 같은 관계입니다. 이 관계, 스승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그런 관계에요. 그래서 스승님은 우리가 지켜주면 그냥 계시면 되는 겁니다. “스승님의 모든 명예와 가치는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니까 그 베드로가 가만히 있지 않죠.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폼으로 있습니까? 지켜드릴게요. 이게 주군관계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관계를 이미 아시고, 그 관계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이미 사탄에 속해있는 관계에요. 악마의 전략이죠. 스승을 위해서 죽는 것은 이게 악한 일이 아니고 선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선과 악이, 악마에 의해서 통합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이렇게 선과 악을 통합시킨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도 어려운데, 선을 행할 때 인간은 악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인간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거예요. 선을 행하면서 “더! 더! 더! 그래가지고 되겠어.”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악이 선을 행하는 현장에 새로운 악으로 더 등장합니다. “니가 성의 있게 했나?” 기도를 하게 되면 “주여, 제가 기도했습니다.” “제대로 꿇어 앉아 기도했어? 몇 분 기도했어? 작년 이 맘 때 25분 했는데, 니 또 25분이가? 5퍼센트 인상해라. 물가 다 오르는데? 30분 정도 해야 신앙이나 믿음의 향상이라고 할 수 있지. 25분가지고 뭐 하느냐? 작년에 성경 3장 읽었으면 이제는 4장 읽어야지. 이 싸가지 없는 이것 좀 봐!”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한테 이야기한다고요. 보다 더 선을 위해서, 그래야 악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악은 절대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동반해서 가기 때문에 달아나지 않습니다. 속도를 높이면 같이 따라와요. 영원한 굴레입니다. 그리고 항상 누가 이기는가? 항상 거북이보다 토끼가 이겨요. 자기 딴에 뻘뻘 흘리면서 선을 행했는데, 이미 이렇게 함으로써 등장한 새로운 악은 벌써 나에게서 달아나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이 정해졌네요. 금지. 새로운 금지 조항이 주어집니다. 제목, 금지. 이거로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새로운 금기, 금단, 금지가 나와요. 그걸 징크스라고 하죠. 새로운 징크스가 나와요. 뭔가 행하게 되면 새로운 징크스가 나와요.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 받으면 이 은혜 받은 것이 문제가 돼요. 그 다음부터는 뒷자리에 앉으면 죄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은혜 받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은혜 안 받으려고 한 짓거리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앞에 앉으려고 하는데 처음 온 어떤 사람이 먼저 내 자리에 앉았다. 그럼 거기서 갑자기 성질이 나죠. 그럼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봐! 니 성질냈잖아?” 그럼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주여, 잘못했나이다.”하고 회개하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인간은 회개의 대상이, 인간은 반성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했죠. 인간은 반성한다고 인간되는 법은 없어요. 회개는 회개의 기준이 등장해야 회개가 됩니다. 내가 내 기준보고 회개하는 것은, 이거는 장난치는 거예요. “5장 읽어야 되는데 3장밖에 못 읽었습니다.” 그 기준이 누구에요? 3장 읽었다는 자기가 기준이잖아요. 회개의 진짜 기준은 다 이루었다가 기준이 돼요. 십자가가 회개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또 내가 십자가 앞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했던 죄를 또 지었습니다.”하는 그거잖아요. 그거. 논리를 잘 들어야 돼요. 딴 생각하다가 놓쳤다고 하지 마시고 잘 들어야 돼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니는 안 돼!”라는 지시, 표시 아닙니까? 싸인 이거든요. 안 되는 싸인 앞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회개했잖아요?”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니까요. “회개했잖아요?”가. “회개 하나 했어요. 회개 했잖아요?” 이게 포함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착한, 의인되겠다는 시도는 영원히 나에게는 떠나지 않아요. 아예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왜? 마귀와 함께 날아가 버려야 되니까. 우리가 애쓰는 것을 마귀한테 넘겨줘야 해요. 이거 먹고 떨어져라! 주인이 바깥에 나가려고 하면 개가 신발 끈을 물죠. 고무신 같으면 물잖아요. 그럼 주인의 대처는 왜 이러냐고 하면 안 되고 신발짝 던져주면 돼요. 딴 거 신고 나가면 돼요. 그럼 걔는 주인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신발 물고 있다고요. 지금 우리가 착해지려고 하니까, 착해지는 고무신 쥐고 있으니까, 착함을 더불어서 마귀한테 던져주면 되는 거예요.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이게 욥에 나옵니다. 이게 돈이 많아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 건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잘 믿는다, 이렇게 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뭡니까? 마귀한테 던져줘라. 강아지한테 물게 줘버려라. 아들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도,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인간은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들러리에 불과해요. 그 들러리를 주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계속 철저하게 활용하는데, 그 파트너가 누구냐 하면 마귀를 파트너로 하는 거예요. 악마는 하나님께 대들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대드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대들어요. 예수님께 대든다고요. 악마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누구한테 대든다? 예수님에게 대든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 적하나님이 아니에요. 적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마귀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 빼고 하나님 믿는 것이 바로 마귀의 소망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적그리스도에 굴복되지 않는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어요.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만이 회고적으로 보면 바로 적그리스도 속에 내가 지배당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살아온 그 뒤에 회고적으로. 근데 자력으로 하겠다고 하면 그건 이미 악마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내 힘으로 어떻게 해서, 시키는 대로 구원받겠다는 것. 그 중의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주군이 발을 씻겨주죠. 그러니까 6절에 봅시다.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이 말은 뭐냐 우리 관계가 주님께서 씻겨줄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씻어주게 되면 무슨 관계가 뒤죽박죽이 돼요? 이 주군관계, 자기가 평소에 설정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아는 그 관계가, 이게 틀어져버리잖아요. 이 틀어지는 것이 왜 문제가 되죠? 결국 베드로는 뭐냐 하면 베드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지금 예수 믿겠다는 거예요. 자기 가치를 안 놓치고, 자기가 죄인 안 된 상태에서 예수님마저 믿는 사람이 돼보겠다는 거예요. 이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베드로가 지금 겁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세상 살면서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이유가 뭡니까? ‘나 괜찮은 존재인데,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괜찮은 존재에서 안 괜찮은 존재가 되어, 진짜로 내가 예상하기 싫은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비윤리적인 것이 나올 때.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나온 것이, 제발 비윤리적인 것을 견뎌야 되고 참아야 된다고요. 처음부터 우리는 윤리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는데, 베드로처럼 너무 자기 자신을 너무 좋게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과대평가를 왜 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노력 덕분에, 내 착함 덕분에, 이만큼 한다는 자기 자존감 때문에,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착했으면 주께서는 나를 살려주느냐? 이런 식이에요. 얼마나 착했으면? 교회 다니죠. 헌금도 하죠. 밤늦은 시간에 성경공부에도 참석하잖아요. 저 같으면 강의도 하잖아요. 얼마나 착해요? 착하기 때문에 당뇨도 안 걸렸잖아요. 얼마나 자기 관리가 잘 되어 있어요. 뱃살도 뺏다고요.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말아야죠?” 그렇게 살지 말아야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그럼 그렇게 안 살아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지금 보다 더 배 볼록하게 누릴 권리는 다 누리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이런 못된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지금은 은혜로 삽니다.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근데 내가 지금보다 더 착해버리면 당당하게 내가 받아 챙길 것은 받아 챙긴다는 식으로 살겠다는 거죠. 이게 마귀적이죠. 이런 소리 한다는 것이. 주께서는 방법을 반대로 갑니다.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그게 실패로 끝나버려요. 내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세상에! 이 성경말씀대로 이 자손이 잘되는구나.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 천대가 복을 받는다고 했다. 어떤 분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박근혜 때문에 4대가 지금, 그동안의 대를 완전히 배려놨다는 거예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출애굽기 20장에서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죠. 만약에 안 지키면 4대까지 저주를 받죠.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세대에서 십계명을 지켜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4대까지 와야 되는데, 두 번째에서 천대가 끼어들게 되면 4대가 1대로 종결되어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천대까지 나가야 돼요. 계산이 그렇게 되죠. 그러면 윗대는 아무 의미 없어요. 윗대가 아무리 어떻게 해도 지금 내가 지키면 천대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천대까지 이어지죠. 그러면 아무리 후대에 저주받을 짓을 해도 천대는 일단 챙기고 보는 거예요. 복이라는 연금은 계속 받아 챙겨먹는 거예요. 연금을. 주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왜, 4대 저주받는 것을 챙겨요? 천대 복 받는 것을 챙기자 이 말이죠. 천대에 복 받으면 4대는 끼어들어가다가 못 끼어들어요. 천대가 픽픽 돌아가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줄넘기에서 금강산 찾아가자고 해도 찾아갈 수가 없어요. 지금 천대 복을 받는 중인데. 베드로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습을 그대로 회고하듯이, 엑스레이 찍듯이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성경을 봐야 보여요. 베드로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는데 왜 실시합니까? 구원받았으니까 회고적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왔는지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나는 뭐 4살 때 어떻게 했고, 7살 때 어떻게 했고... 그거 말고, 내가 7살 때, 20살 때, 내가 얼마나 베드로처럼 살았는가, 하는 계시적 의미를 담아야지, 뭐 열 몇 살 때 야구하고, 고등학교 어디에 나왔고 하는, 그런 것은 성경적 의미가 없어요. 그거는 내가 조립한 거고. 진짜 의미는 성경적으로 봤을 때, 언약적으로 봤을 때, 나는 베드로 거쳐서, 가룟 유다 거쳐서, 그렇게 왔다고 해야 언약적인 의미가, 이게 우리 안에 진짜 내 본질로서 차곡차곡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 말씀에 입각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이 말은 “내가 구축해놓은 이 관계를 주께서 틀어버리면, 그럼 내가 아는 주님은 어떻게 다시 확립이 됩니까? 다시 원상복귀 시켜주든지, 내가 아는 것이 틀렸다고 이렇게 다시 수정해주시든지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니까, 7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껏 두 시간 동안 강의한 것이 이거에요. 지금은 어떻다? 알지 못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지금 네가 모른 짓을 마음껏 해내라. 그럼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는? 회고적으로 보게 되면 이미 우리가 잘못 곡해한 것을 회고적으로 알게 만들죠. 내가 베드로고, ‘내가 이 짓을 또 했구나. 베드로 짓을 오늘 또 했구나. 오늘 착한 일 했으니까 내일 계약이 있는데 계약 잘 되겠지.’ 이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또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대구강의는 연세가 많은 분들이 오시니까. 내가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마일리지가 쌓여가지고 저 외국에 있는 내 자식한테, 자식은 기도를 안 하잖아요. 엄마가 열심히 해놓으면 그 마일리지가 쌓이고, 마일리지는 대한항공이면 언제든 탈 수 있어요. 그 기도한 복을, 기도 생전 안 한 자식한테 오게 해서 복 받으면 얼마나 좋으냐. 그것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는 거예요. 어머니 기도 못 잊어, 하는 찬송이 나오듯이. 그게 바로 베드로에요. 베드로라니까요. 왜, 내 것을 흔들어버립니까? 이런 뜻이에요. 왜, 내가 갖고 있는 구축된 관계를 흔들어버리십니까? 그럼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당황해야 된다. 후에 가면 그때 당황했어야 된다는 것을 니가 알리라. 그러면 베드로는 나중에 자기 잘남을 증거 하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겠죠. 나는 구원 될 자격도 없고 안 되도 그만인 존재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한다. 이같이 말도 안 되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써 구원했다는 것을, 그렇게 주님만 증거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아까 관계라고 이야기했는데, 거기에 나오네요. 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며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 관계없다, 에요. 관계없다. 그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니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는 애초에, 보면서도 그런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다. 지금 보면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면서도 니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발을 씻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수정해줄게. 수정도 그 당시에는 안 됩니다마는. 그리고 난 뒤에 9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 분석은 여러분들이 쉽게 할 수 있겠죠. 자, 베드로가 뭘 생각했느냐 하면 양적 개념을 생각한 거예요. 사람이 있는데 발을 씻겼습니다. 발이라고 하는 것은 양적으로 전체에서 일부가 되는 겁니다. 양적으로 일부가 되죠.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을, 양量이 아니고 질質을 이야기합니다. 발에 있는 피나 머리에 흐르고 있는 피나 다 같이 순회하는, 회전하는 피잖아요. 주님께서 발을 건드렸다는 말은 전체 다 건드렸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뭡니까? 양量에서 질質로 바뀌는 그 관계가 지금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관계라고 하는 거죠. 기도해서 부자 되고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양量이잖아요. 기도하면 우리 애가 성공하고, 다 양量이죠. 그것이 바로 잘못된 관계에요. 기도하면 우리교회 부흥되고, 다 잘못된 관계에요.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다 잘못된 관계에요. 확장, 부흥, 이게 다 무슨 개념이에요? 이게 다 양적 개념이거든요.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노아방주에서 몇 명 나왔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달랑 몇 명만 탔습니까? 8명이죠. 8명 나오죠. 그것도 나중에 보면 또 하나는 저주하고 난리가 났죠. 방주를 그렇게 크게 지어놓고, 배를 그렇게 크게 건조해놓고, 대우조선에 맡겼는지 하여튼, 달랑 8명이에요. 그것도 말이 8명이지, 한 식구만 구원이 됐어요. 이게 언약이라는 것이, 이게 양量이 아니고 질質입니다. 숫자가 왜 적느냐고 타박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이미 홍수 속에서 새롭게 예상 못한 새로운 질質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인간이 되었어? 양이 죽었는데 누가 산다? 내가 산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소리? 근데 내가 왜 달라졌지? 그게 왜 믿어지지? 미친 거야? 돌은 거야? 진짜 또라이야? 뭐야? 근데 그걸 알고 어떤 교회를 방문했더니만, 거기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어린양을 믿고 구원받으면 영생을 얻습니다.”이래 이야기하는 겁니다. 뒤에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영생을 얻습니다. 복을 받습니다.”이래하니까, 그 소리 하는 취지가 뭐지? 나는 지금 어떻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사는지, 그거에 초점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원해서 교회에 왔잖아요?” 마치 그걸 알듯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을까요? 복음을 믿으면 얻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 그 자체에요. 십자가 믿으면 얻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그 자체입니다. 부분적으로 손, 발을 해달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는 베드로에 대해서 우리는 칭찬하고 싶어요. 사람이 자기 솔직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표현했을까?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월급도 올려주셔야죠?” 이런 양적으로 꽉 억눌린,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우리는 못하지만 베드로는 우리 대신 용감하게 해줬습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월급도 올려주세요.” 이런 것. 노골적으로 “나는 평소에 양量에 매료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쫙 내놓죠.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결혼해야죠? “결혼하게 되면 고난이 있다.” 그러면 “아이고, 고난이 있어도 좋습니다. 고난 받더라도 결혼은 한 번 해보고 받겠습니다.” “니가 양적이니라.” 양적이라는 것은, 왜 양적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는 질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럼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는 선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 선이 곧 악이라는 것은 몰랐어요. 왜냐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까 했듯이 이 세상 신이 띠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안에 니나 내나 다 잠겨있는 상태에서, 우리 별 문제없지? 어. 별 문제없어. 교회가도 별 문제없어.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당연하지. 신명기에 나와 있잖아. 별미 바치니까 양이 잘 되고 두 배나 상속받고 잘 되잖아. 그러니까 별 문제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올 때는 마귀도 함께 등장해요. 근데 예수님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마귀가 어떻게 우리를 그동안 굴복시켰는가, 그 내막이 빛이 안 오니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빛이 옴으로써 어두움이 드러나 버렸어요. 모든 인간이 어두움에 속하니까,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빛이 오게 되면 온 만큼, 촛불만큼 이게 밝게 되어 있어요. 전기스탠드가 어두운 곳에 오면 그 만큼 밝게 되어 있다고요. 근데 성경은 빛이 오매 어두움이 더욱더 어두워져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면 더욱더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더 뭐가 돼요? 죄인 중의 괴수가 된다니까요. 이런 즐거움이!! 뭘 하기만 하면 죄가 돼요. 뭐든지 하면 죄가 된다 말이죠. 뭘 하기만 하면 죄가 되죠. 그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반대로 뭘 해도 거룩이 된다면, 착하게 된다면, 그걸 유지하려고 세 번, 네 번 스트레스를 더 받게 돼요. 그때 그 착함을 유지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 노인네가 무거운 짐 들고 내려올 때, 내가 어떻게 그걸 받쳐가지고 밀어 드렸는지. 어떻게 착한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은혜구나! 굉장히 상쾌해요.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두려움이 오느냐 하면 내일 그 장소에 그 자리에 가니까 이번에는 노인 열 두 명이 열 두 개의 리어카를 들고 내려오는데, 지금 기차시간은 되었지, 한 명도 기차시간 때문에 못 밀어줄 판인데, 열 두 명이 내려오는데, “아이고 안 됩니다.” 노인네는 “지금 혼자서 뭐라고 하는 거야?” 혼자서 지가 움츠려져가지고 자괴감을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이게 뭐냐, 두려움이에요. 두려움. 이게 두려움이라고요. 양이 죽어서 우리가 구원받지, 언제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았습니까? 사랑을 한다고요? 얼마나 해야 되는데요? 얼마나?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양적이잖아요. 사랑이 얼마면 되겠어? 양이 죽어서 구원받았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라요. 우리도 전혀 몰라요. 근데 구원받은 사람은 헥헥 거리고 뒤돌아보니까 그렇게들 살아왔어요. 2016년도 그렇게 살아왔고, 교만했고, 교만 아닌 줄 알았죠. 겸손을 띤 교만이었어요. 그러니까 올해도 더욱더 빛이 더 오게 되면 어두움은 더 짙어지거든요. 더욱더 교만해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교만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절,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개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열 두 제자 통째로 보는 거예요. 통째로 보는 거예요. 통째로 볼 때 다는 아니라는 말은,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얼른 보면 1대 11로 보는 것 같지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는 구원받고 이게 아니고, 예수님과 이 밧줄, 이 관계를 보는 겁니다. 관계를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면 반드시 뭐가 등장합니까? 이 관계 말고, 예수님이 옴으로써 뭐가 등장했다? 사탄의 전략이 등장하죠. 이걸 지목하는 겁니다. 이 힘에 너희들 전체는 이겨낼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지금 너희들은 내가 해도 무슨 말인 줄 모른다. 나중에 이 사탄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갔잖아요. 그 빠져 나온 힘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면, 베드로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빠져나온 입장에서 다시 예수님과 동일한 관점에서, 세상 전체를 악마의 지배아래 있는 관점으로 한꺼번에 보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생명의 신호라는 책, 요한계시록의 관점이에요. 요한계시록의 관점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미 성령 안에서 내가 어떤 세상을,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세상을 그동안 빠져나왔는가,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톰과 제리라는 만화에 보면 고층건물 짓고 있는데 쥐가 뭣도 모르고 도망가고 있는데, 떨어졌다 하면 크레인이 딱 와서 받치고, 또 끝에 가서 떨어지려고 하면 다른 크레인이 딱 와서 받치고, 쥐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뛰기만 해도 착착 받쳐줘서 1층까지 딱 내려와요. 그렇게 1층으로 내려온 것처럼, 지금도 젤리처럼 모든 게 갇혀서 같이 동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순실 문제라든지, 북한 핵문제라든지, 이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영생 줄자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누가 쥐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죠.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권세,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있어요. 이슬람의 테러도 다 연관되어 있어요. 모든 권세가 아들만을 목격하기 위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이런 젤리적인 요동침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죠. 마지막 끝에 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2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주군이에요. 옳습니다. 이때 선생은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고 목숨 받친 주군이에요. 너희 말이 옳은데, 아직도 옳다는 것은 예수님 측면에서 옳은 거예요. 그런데 반드시 이렇게 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진짜 스승님만은 주군이 맞구나! 진짜 주인님이 맞구나! 진짜 주가 맞구나! 근데 우리는 철도 없이, 개뿔도 모르면서 우리가 섬기면 그게 주인 되는 줄 알고, 섬기면 주인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자가 되도록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령만 오시면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보시는 안목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죽어있는 시체에 불과한 우리가 남들이 살아있다고 같이 살아있는 것으로 우깁니다. 하지만 사실은 주께서 필요해서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고 있고, 새로운 말씀을 통해서 말씀 덩어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 우리 잘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격자,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