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2. 23) 1강
광주 강의(2016. 12. 23) 34-1
마가복음 9장 30-31절 봅시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죽었다가 살아나야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죠. 주님이 이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만을 학수고대 했는데 그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희망 자체가 좌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망을 좌절시키는 메시아에 대해 언급해 봐야 그들이 믿지 못할 것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만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실효성이 있을 리가 없지요. 괜히 개한테 진주를 던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남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제대로 된 메시아 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너희들은 내가 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너희들만큼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도가 강하지요.
‘너희들만큼은 내가 안 버릴 게.’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과 달리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주님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것은 오늘 본문과 배치되는 거예요. 오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면 ‘내가 어떤 수를 써도 예수 믿을 수 없구나.’ 이렇게 정리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을 알고 믿을 능력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기 때문에 주님이 날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나 나나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나는 다른 사람 생각과는 달리 ‘주님이 날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결코 주님께 갈 수 없다.’는 희한한 마음이 드는지 이상할 뿐입니다.
이건 성질이 착해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원초적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없는 자다.’는 사실이 어떻게 수긍이 될까요? 이것을 수긍한다는 자체가 정말 특이한 일입니다. 기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이 맛에 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고, 할 줄도 모르고, 해도 소용없는데 그래도 즐겁고 감사하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세상 사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지요. 그러나 가끔 주님을 생각하면 힘들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져요. 내 주제파악을 못해 나온 교만과 불평일 뿐인데, 이런 교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인해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지요. ‘교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한다.’ 이 말을 누가 이해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숨기셨다면 제자들에게도 숨겨야 하는데 알려주십니다. 그 다음 문제가 뭔가 하면, 예수님이 왜 돌아가시려 하는가? 자신의 죽음은 이미 예언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사람들에게 죽임 당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어요. 왜 꼭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까? 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까?
현재 사람들이 사는 것을 ‘세상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현실 외의 1’이 됩니다. 그래야 아까 이야기가 맞잖아요.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겁니다. ‘세상 현실 외’라고 했을 때는 ‘세상 현실’을 그냥 두고 이것 배경(빗금 부분)에 무엇인가 나타나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 현실이란 테두리에서 예수님이 새로 만든 세상 현실 외의 범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일체 없습니다. 최근에 체스터턴의 책을 서평 해 놓았는데 읽어보셨나요? 지잭이 이 사람 글을 인용해서 제가 그 사람 책[체스터턴의 정통]을 읽어보고 서평 했습니다.
이 사람의 책을 보면 어떤 주장을 하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를 안 믿을까?’ 자신은 변증이 아니라고 했지만 변증에 관한 글이에요.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이 사람의 책을 읽고 불만스러운 점은, 이 세상 철학과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보자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 실망하시면 새로운 세상이 눈에 보일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변증하는 것은 변증이 아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 이미지에 의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하다하다 안 되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살다 살다 못 살면 ‘죽으면 다른 세계가 있겠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이건 연결성입니다. 이생이 있으면 저생이 있다는 것. 이건 모든 종교가 그렇지요. 특히 이집트의 종교, 태양신. 태양신은 성질이 급해서 이 세상 자체를 죽음을 대배하는 세상으로 여깁니다. 바로왕 시스템이죠. 바로왕은 태양의 아들, 신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 끝나고 저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잭이 체스터턴의 주장을 수용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는 내용이 뭔가 하면, 이 세상 바깥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안에 천국이 있다는, 배격당하는 식으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 부분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지잭이.
이 세상 안에 천국이 있다고 했는데, 이 세상 안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지요. 그럼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왔다는 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이 영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현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처럼, 그 성질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라캉이 이야기하는 소문자 a를 말합니다. 뭔가 모르는데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비켜 나가는 것. 우리가 알았다 싶으면 벌써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유발하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날 잡아봐라!’는 식이 됩니다. 마치 달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고 쳐다보면 역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요.
아무리 따라잡아도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데, 도달 못하면 포기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절대 진리에 대해서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따라잡는데, 그것이 뭔가? 미지의 X. 소문자 a가 우리에게 욕망을 불같이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지잭이 이런 주장을 하면서 로마서 7장을 언급해요.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2개의 내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2개의 내가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족했다가 불만족으로, 계속해서 2개의 이질적인 세력이 내 안에서 다투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냄비 속의 물이 온도가 올라가면 끓지요. 물이 끓으면 냄비 뚜껑은 들썩들썩할지 모르겠지만 냄비가 들썩들썩하지는 않아요. 우리의 겉모습은 냄비인데 우리 속은 내가 통제가 안 돼요. 이게 좋다가 저것이 좋고,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짜증나는 일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우리 삶은 우당탕탕 요란하게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은 한 시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늘 요동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요를 찾기 위해서 혼자 생각에 몰입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고민하는 나도 없다.’ 생각 없는 현장을 ‘침묵’이라고 합니다. 침묵 속에 있으면 고민할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산 속에서 침묵하고 있어도 산 밑에서 전기세 받으러 올라오면 침묵은 깨지고 맙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사람들을 a가 괴롭히니까 여기에 대한 대처로 ‘~인 척’ 하는 것으로 그때그때 때운다는 겁니다. 고요한 척, 침묵에 몰입한 척, 과거의 일을 잊은 척, 지금 죽으면 천국 가는 척하면서 사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고생해도 죽어서는 저세상 가면 되지.’ 라는 생각은 본인의 선택이고, 선택은 본인의 생각에서 나와요.
로마서 7장에서 인간은 2개가 서로 싸운다고 했지요. 2개의 이질적 요소가 싸우는데 사람들이 이 싸움이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여기서 생각을 선택해요. 마치 깔끔하게 양복입고 외출하는 것처럼. 사실은 방금 부부싸움을 해서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대문 밖에서 이웃을 만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을 다른 나로 포장 또는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선택을 하면서 자신을 감추려고 하니까 이 선택이 과도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과도한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그러면 당이 떨어지지요. 이 상태에서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거예요.
폭발을 못 시키면 온 몸이 다 아파요. 이 분노를 풀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외로워요. 그래서 자식 혹은 아내, 친구라도 붙들고 쏟아내야 됩니다. 그래야 숨통이 트이는 겁니다. 지잭이나 라캉이 잘 이야기했어요. 인간세계는 미지의 a가 우리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해결책이 있는가? 해결책은 없어요.
지잭이 말하는 성령은 뭔가? 성령이 오면 사랑의 공동체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분석한 현재 인간은 뭔가 자기 내부에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잡으려고 하면 자꾸 도망치니까. 안 잡으면 찾아오고, 잡으려 하면 도망치고. 이것이 자신이 분석한 것인데, 그러면 성령의 사랑 공동체가 왜 난데없이 튀어나왔는가? 사랑의 공동체를 체험은 못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갖다 붙인 거예요.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새로운 배경을 일으키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31절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듭니까?’ 사람은 사람이 만들어요. 왜냐?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오죠. 이건 성경에서도 이야기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라고.
모든 인간은 부모가 낳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태어나게 해요. 심지어 예수님도 사람에 의해 태어났어요. 마리아 없는 예수님은 없어요.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게 해놓고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로는 도무지 알지 못할 현실 밖이 등장했지요? 성경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나았지요. 그러니 생각이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감히 영적 세계, 천국에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요.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이 나았잖아요. 이미 영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육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예수님은 영에서 육이 되었고, 인간은 육에서 영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봐도 못 믿는 이유가 예수님은 육의 한계까지 가요. 육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영에서 육으로 태어났고, 그 육은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의 요소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못 믿는 이유는 방향이 달라서 그래요.
인간들은 지금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하면 영생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를 계속 궁리하고 있습니다. 아까 ‘~외’라고 했지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 방향성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려고 해요.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없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뭡니까? 신자는 예수님이 가는 방향으로 같이 따라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주님 따라 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주님 가신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면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원인은 영이고, 결과는 죽음입니다. 인간들의 원인은 육이고 기대하는 결과는 영생입니다. 원인부터 이렇게 다른 거예요.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한다. 이건 맞는 말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율법입니까? 율법이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의인이라고 여길 텐데 율법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
이처럼 율법이 나로 저주 받게 한다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은 내가 원인으로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원인이고 우리는 율법이 원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결과로써 원인에 대해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이 될 때 성도입니다. 이 말은, 이미 구원 받은 상태에서 성경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인이 되어 얻는 구원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원인이잖아요. 내가 여기 있고, 사람이 사람을 나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태어나도 사람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겁니다. 사람 전체가 예수님을 죽게 한 악마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할 소리지 인간이 할 말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기다렸는데 마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예수님만 구원자가 되어야 비로소 인간은 닭 쫓던 개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때 예수님이 떠나가셨다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예수님이 떠나가신 것이 맞아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되어 있어요. 어느 것이 맞습니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중심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자신에게 어떤 조치를 해 달라는 겁니다. 자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여, 저는 저의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하니까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굉장히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는데, 에스더가 금식해서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다.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것 외의 행동을 했어요.
법에 의하면 왕후는 왕의 초청 외에는 왕에게 올 수 없습니다. 만약 왕이 초청하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타나면 왕이 왕후를 죽여도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그래서 왕이 요청할 경우에만 왕비는 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합리적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나라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이 법을 에스더가 깹니다. 그런데 그 전에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선언을 했어요. 에스더가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법을 무시하고 나선 행동입니다. 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너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앞에 지극히 미약한 인간이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왜? 복음은 하나님의 모든 정성과 취지와 목적이 거기에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외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개보다 못한 자입니다. 사람 취급 안 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작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복음뿐인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정성 담았다고 ‘받으서소.’라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의 반이 아닌 전부를 드렸다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그래도 죽었어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몰랐어요. 복음만 중요하다는 점을 모르고 자꾸 복음 외의 것을 가지고 ‘이것 바치면 기뻐하시겠지?’ 이러고 있어요.
성령 앞에서 내 의를 내세울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일을 했다면 성령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낯선 빗금을 드러냅니다. 내가 오늘 새롭게 복음을 알았다고 좋아하면 그것도 비켜가요. 새로운 빗금을 내놓아요. ‘이만큼 알았으니까 이제 천국 갈 수 있겠지요?’라고 하면, 이것으로 구원 받겠다고 시도하는 복음 외에 속해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조차 복음 외에 속합니다.
주께서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는 짜증을 내겠지요? 그 짜증 내는 요소가 아까 얘기했지요. 소문자 a로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 있을 불평과 불만의 요소를 끄집어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우리가 ‘~인 척’하는 줄도 몰랐어요. 성령이 임하니까 이것을 알았어요.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주께서 늘 우리를 들쑤시는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이 되시는데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여기에 말씀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육에서 영이 되는데다 말씀을 동원합니다. 말씀을 예수님이 좀 뜯어가고, 나머지는 인간이 뜯어가고 이렇게 됩니까? 아니죠.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 다 가버렸어요.
성령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께 간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내가 이것만큼은 지켰습니다.’라는 말이 나올까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누구도 합류할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예수님 십자가로만 구원 받지 ‘나도 십자가 졌습니다.’라고 해서 구원 받을 자는 없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십자가지, 내가 십자가를 알고 실천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주님이 발로 차버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말씀을 주께서 남겨준 적이 없어요. 비빔밥을 2인분 시켰는데 전화가 와서 잠시 통화를 하고 왔는데 상대가 다 먹고 빈 그릇만 남았어요. 그 빈 공백이 바로 성도라는 그릇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만 담겨 있어요.
내가 할 일을 다 가져 가셨어요. 그럴 때 우리는 이 공백에서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육을 알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는 육 자체가 바로 나인 것을. 이것을 사도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어요. 우리가 의롭게 될 여지를 성경 어느 구절도 남겨놓지 않았어요.
‘나 이것 지켜서 의인 되어야지.’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숟가락 들고 먹으려고 보니 그릇은 비어있고, 이미 십자가 앞에 가 있어요. 온유하려고 했는데 온유가 사라졌어요. 남은 것은 온유한 척 하고자 하는 내 육적인 시도, 마귀적 그림자만 보이지요.
빈 그릇에 예수님의 십자가만 담긴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매일 나와 싸웁니다. 이것이 들어가야 해요. 나는 늘 주님 십자가에 저항하고 반발합니다. 철부지 아이처럼 찡찡거리죠. 엄마와 1살 된 아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롱을 부리니까 아기는 웃어요. 5분 쯤 지나면 잠도 오고 웃음도 나고 하니까 엄마한테 짜증을 부려요.
자려면 곱게 자지 왜 엄마에게 칭얼대지요? 엄마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기에는 아기의 본능인 것처럼 보이지만, 잠들기 전에 엄마한테 칭얼대는 것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뭔가 하면, 엄마가 나쁜 것이 아니고 아이가 나쁜 거예요. 잠이 오면 그냥 자면 되지 왜 엄마를 괴롭히느냔 말이죠. 십자가가 우리 그릇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우리가 나쁘다는 거예요. 인간들의 불평은 잠투정하는 아이와 똑같아요. 불평하는 자들은 전부 다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운전할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지켜 주옵소서.’ 기도하는데 오늘은 아내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기도도 못하고 차를 출발시켰어요. 그런데 과속을 해서 경찰에 잡혔어요. 이 순간 정말 기분 나쁜 것은 다른 차는 내 차보다 더 빨리 지나갔는데 그 차는 잡지 않고 내 차가 잡힌 거예요.
사람들이 언제 기분이 좋은가 하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자기보다 훨씬 늙어 보였을 때 얼마나 고소한지 몰라요. 이렇게 인간은 이기주의입니다. 생각을 바꿔보세요. 늘 걸려야 했는데 그동안 봐줘서 안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기도만 했더라면 안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뭡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봐요. 이 시간 강의 마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결과인데, 복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나온 결과를 우리는 평소의 버릇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고 그 귀함에 흠이 나는 것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릇에 담겼다. 이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냥 담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투정을 부립니다. 경찰한테 잡혔다고 짜증을 내고, 잠이 온다고 투정을 부리고. 그럴 때 내 속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괴물이 나의 길들여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12. 30. 15:5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