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질구조(삼상 5:1-3) 대전 20강 이근호
대질 구조 (삼상 5:1-3)대전-20강
이근호
2016년 11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5장 1-3절
(삼상 5: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라
(삼상 5: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삼상 5: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삼상 5: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사무엘 상 5장 3절부터 4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대목은 신과 신의 충돌을 보여 줍니다. 신의 충돌이라는 것은 근원의 충돌이에요. 인간들은 개별적 사고방식 외에는 못해요. 자기 일 밖에 모른다고요. 자기 인생 밖에 모르고 그래서 넓은 대해(大海)는 볼 줄 모르고 그냥 물에 동동 떠가는 인생이고 떠가다가 늙어 죽으면, 물속에 뽀로록 빠져 죽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그냥 살다 죽었다고 되지요.
그럴 때 방금 죽은 사람은 근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이 아니에요. 핵심에서 파편화된, 핵심에 의해서 파생된 거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인생을 살면서 진리가 어떠니 이렇게 이야기들 하지만 진리는 신이 나타나야 되지 인간이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니까 무엇을 진리라고 주장하냐 하면 자신의 지심을 진리 대용으로 사용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것이 진리입니까? 진심은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 할 테니 봐달라?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봐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할테니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죄가 있을 때만 용서가 되요. 솔직한 것은 용서가 안됩니다. “솔직하게 하나님!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용서가 안되요. 용서란 죄가 성립되는 곳에만 용서가 되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를 말려면 죄로 다가가야 되요.
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하면 근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 지었다 죄지었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작은 파편을 죄라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기는 거에요. 나는 죄지었다. 그 말은 이건 죄 지었고 다른 건 아닐꺼야라는 것을 전제로 하거든요.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고것만 미안하고 나머지는 미안 안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죄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면 그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까? 그것이 진심이고 솔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은 진리를 경유하지 않았잖아요. 죄의 문제는 진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진리를 통해 죄가 안 나오고 자기의 진심에서 죄가 나와 버리면 이건 뭐가 되냐하면 ‘반성’이 되어 버립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반성이라는 것은 뭐를 노리는 것이야 하면 반성 그 이후에 깨끗해진 자아상을 노리고 하는 겁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상당히 나쁜 심보에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되지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이에요. 어릴 때 엄마가 때리려 하면 무조건 이유도 없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잖아요. 네가 뭐를 잘못했는데 물으면 모르지요. 그냥 매만 피해 보겠다는 거에요.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그저 아픈 건 싫다는 거에요. 그게 진심이거든요. 진심은 뭐로 통하냐 하면 본심과 통하고 본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아담에게서 나오는데
어떤 아담인가 하면 망가진 아담에서 나오는 거에요. 문제 있는 아담. 죽어 마땅한 아담. 죽어 마땅한 아담의 반복이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그 용서를 구하는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 이 논리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그냥 일괄된 논리입니다. 죽어 마땅한 것이 용서를 구하고 있어요. 살고 싶어서 그러면 죽어 마땅한 인간의 용서인데 최후에 노리는 것이 뭐냐하면 용서 받아 어디를 가려 한다? 천국에 가려한다.
그래서 인간이 천국 가겠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짓이에요. 이건 지옥가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천국 다 버려 놓을 일 있어요? 얘들이 진흙탕에서 놀다가 더럽혀진 시커먼 옷하고 손에 다 묻히고 집에 와서 고구마 있다고 덥석 집으려 하면 어느 부모가 안 말리겠어요? 떼찌! 떼찌! 하고 어디를 먼저 가게 합니까? 화장실에 가서 손 씻게 하지요. 그런 상태로 못 먹는 다는 거에요.
용서라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값이 되려면 먼저 내가 죄인이다라는 쪽을 먼저 들려야 되겠지요. 어느 정도 죄인이야 하면 용서를 구할 권리도 없는 죄인이다는 곳을 들려야 되요. 만약에 용서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인 것과 상관없고 중간에 가다가 만 거에요. 가다가 자기 이기주의 때문에 만 거에요. 이것을 종교(심)라 하고 이렇게 종교를 언급한 이유가 있어요.
이것이 신과 신의 충돌입니다. 신=전체성 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테두리를 신이라 해요. 그러니까 저쪽 다곤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만났다는 것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거에요. 옛날 고대의 전쟁이 그랬잖아요. 그 쪽 대빵 나와! 이 쪽 대빵 나와서 대빵 끼리 붙어서 이긴 쪽이 다 먹기! 도박 할 때 마지막엔 몰빵 한다 하지요. 마누라까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다 갖다 바친다 하지요.
그런데 도박도 그렇고 로또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무엇과 연관되어 있냐 하면 나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과시해요. 이렇게 싸운다는 것은, 경쟁 한다는 것은 밑바닥까지 나는 아직 안 죽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에겐 진심이 되고 본심이 되지요. 인간의 본심은 어디와 연관된다고 했습니까? 망가진 아담과 되어 있지요.
망가진 아담에서 뭐가 나온다? 종교(심)이 된다는 거에요. 우상이라는 것은 나를 대신하는 전체성이거든요. 나는 그런 신이라면 내가 기꺼이 그 신에게 내가 하나의 개별자로 포함 되겠다. 그리고 내가 싸울 것을 신이 대신 싸워서 이겨 준다면 그 결과로 얻어진 운명이라면 수용 하겠다. 수용할 용의가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예수님이란 분이 우리의 자존심입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존심과 연관된 예수가 되어 버리면 그건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다곤 신이 되지요. 우상이 되지요. 제 말이 어렵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동교라는 것이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나 성당이 뭐냐하면 다니는 종교를 내가 선택 했다는 말이죠. 내가 선택해서 다닌다는 말은 그 교회의 문제는 내 자존심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요.
다른 교회가 다 망했는데 우리 교회가 부흥된다면 괜히 기분 좋은 거 있지요. 이게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내가 밀었던 당이 잘고 내가 반대 했던 당이 안되면 살맛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단이아고 하는 것은 뭐라고 규정하나 하면 이단이란 자기의 문제 있음에 기준이 없는 것을 이단이라고 했어요. 한번 적어 볼께요.
이단이란 내가 문제 있음을 지적할 그 어떤 기준도 갖고 있지 않는 것. 내가 문제 잇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최종적인 기준을 본인이 안 갖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이단이라면 복음은 딱 이 반대에요. 복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항상 예수님 앞에서 나는 문제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존재와 존재로 만난 것 같으면 문제없어요. 잘해보자 둘이서 악수하면 되는 데, 예수님이 피를 흘렸잖아요.
그래서 이단 교회의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의 피를 항상 피해서 설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피해서 설교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 이 교회에서 자존감이 높아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왔을 것 아닙니까? 역시 이 교회를 선택하길 잘했어! 이 교회 다니고 사업이 잘 되었어! 이렇게 교회를 선택하든 종교를 선택하든 선택할 떼 이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 덕분에 내가 잘 됐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나를 대체할 수 있는 나를 대신해 줘서 내 자존심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큰 덩어리, 큰 덩치에 나는 당신에게 복종 할 용의가 준비되어 있습 니다. 일종의 거래이지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에요. 그동안 종교나 교회에 왜 갔지요? 주여!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을 알려고 간 거에요? 아니면 지금 보다 더 하이, 지금 보다 더 업!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고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더 잘 되길 원해서 갔지요.
십자가는 충돌입니다. 바로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할 신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게 잘 해주고 나에게 잘해 준다는 희망을 제공한다면 그런 비전, 마지막은 천국 구원이겠지요. 나를 잘 살게 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종교를 선택하겠습니다. 오직 나 하나 밖에 없기에 내가 마지막 궁극적으로 나를 포함시킬 전체성도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가 망가지기 위해서, 제가 망가지는 옳습니다는 것을 확인 하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 밖에 없는 데 둘이 나타났습니다. 둘이 뭐냐? 예수? 아니고 하나님? 아니고 그럼 삼위일체? 아닙니다. 그냥 둘이라는 것은 신이 있고 또 다른 신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아는 신이 있고 우리는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 온갖 좋은 이름 다 붙이는데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하고 삼위일체라고 하고 있지요.
여기에 새로운 신이 등장 할 때 여기는 경계선으로 등장해요. 어떤 경계선이냐? 바로 충돌의 경계로 나타나는 이것이 내가 믿던 예수, 삼위일체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이것을 지적해 주는 기준으로 내 안에 이미 들어 온 게 돼야 되요. “야! 열심히 믿자!” 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나와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자! 왜 그게 내 죄의 본심이기 때문에.
잘 한 만큼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실 줄 아는 하나님, 기특한 하나님, 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을 미쓉니다. 그냥 보통으로 믿습니다하면 태도 불량하다고 해서 복을 안 줄 수가 있어요. 미쓉니다! 미쓉~니다 스스로에게 교육이 가능하지요. 가짜 신은 되풀이 하면 그렇게 되는 느낌을 줘요. 기도 잘 안 되는 사람도 새벽 기도 나가서 자꾸 연습하면 어느 날 대표 기도도 두렵지 않습니다.
연습 얼마나 했겠어요. 안 되는 게 어딨어요. 뭐든지 열심히 하다 보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목사가 할 일은 다른 게 아니에요. 새로 온 교인이 기존 교인을 모방하게 시키면 되요. 닮아라! 기도 잘하는 봐라! 할 수 있다! 헌금도 아낌없이 할 수 있지 봐라! 나중엔 내다보면 안 아깝지! 자꾸 이렇게 양육을 시키는 거에요. 최고의 교육자가 누굽니까? 최고의 교육자는 목사가 되고 결국 모델이, 멘토가 누가 되겠어요? 목사 본인이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목사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 하면서 여러분! 저도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고난 주일 날 티 낸다고 나처럼 고난 받으세요. 모델로 내세우기 위해 하는 수도 있겠지만 신부들이 그런 소리 잘해요. 부족합니다~ 이렇게 하지만 그 부족하다는 사람에게 욕 해보세요. 성질 팍 내지요. 부족하다는 교양을 보여 주는 거지요.
이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스킬, 종교적 기술을 보여주는 겁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똑 같아요. 천주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보면 하는 행세가 똑 같아요.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는 거에요. 교육을 제대로 받으려면 교회라는 것은 단절이겠어요? 연속성이겠어요. 이러져 있겠습니까? 끊어져 있겠습니까? 교육이 되려면 이어져 있어야 되겠지요.
이러진다는 것은 끊어짐이 없습니다. “뭐 해봐도 소용없는 것을” 이게 아니고 악바리 근성을 유도 해 낼 수가 있어요.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7번 넘어져도 의인은 8번 째 일어난다. 내가 오기가 있지! 여기서 좌절하면 안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지가 되요.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신앙생활 했습니까? 더 높은 곳을 향하였습니까? 제 주제를 알게 하옵소서! 였습니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어진 주제조차 다 감당이 안되는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것을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데 그것을 알게 해달라는 거에요. 그것을 해서 믿음이 더 증가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놓여져 있는 상태에 있는 미진한 더 주께 감사를 드리게 해 달라는 거에요. 찬양하면 하나 더 주고 찬양하면 하나 더 주고 개에게 먹이 주듯이 더 주는 게 아니고 이미 넘치도록 있어야 될 감사와 감격과 고마움에 대해서 보다 많이 그 깊이와 높이와 사랑의 넓이를 만끽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누구의 사랑 말입니까? 자기가 주님을 섬기는 사랑 말고 자기가 좋아서 찬양하는 거 말고 섬기던 안 섬기던 이미 와 버린 이미 그 안에 놓여 있는 주의 거저 주시는 용서에 대해서 감사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죄라는 것은 근원과 매치가 돼야 되겠지요? 근원은 용서거든요. 죄를 알려면 죄를 알고 용서를 받는 게 아니고 뭐부터 알아야 되요? 근원인 용서부터 알아야 되지요.
그러면 용서가 뭐냐하면 유월절 어린 양,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를 알고 이젠 됐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알고 그 용서의 깊이와 넓이가 점점 더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를 더 알아가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몫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었으니 됐고 이젠 부활로 나아가자! 이게 아니고 알았으니까 앞으로 더 전진해서 한 코스 더 나아가야지! 이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만이 십자가의 깊이를 더욱 감격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밖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십자가 안에 안 들어 가봤기 때문에 십자가를 관람하고 구경하지요. 여행가서 “자! 여러분 여기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이고 빨라 빨리 봤으면 다음 장소로 가자! 여기는 부활하신 곳이고 빨리빨리 보고 점심 먹자! 점심에 잡채 나온 단다!” 이런 수학여행 가듯이 그냥 훑어가는 거에요. 인생을, 자기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내가 아는 범위에서만 감사하는 겁니다.
개별성은 녹아지지 않았어요.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같이 자기가 녹아져야 되는데, 심판에 녹아져야 되는데 십자가가 주는 심판에 녹아지는 것은 자존감, 자존심 이런 것들이 죄와 잘난 나에서 죄인으로 녹아져요. 내가 잘난 체 했을 때 죄와 의 그런 판단이 아닙니다. 내가 죄와 의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고 나는 잘났고를 전제로 하고 이건 악, 이건 선, 이렇게 선악 체제로 이야기를 하지만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나에게선 선이 있을래야 있을 수 가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용서 사건이 먼저 터져 버렸으니까, 용서 사전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죄인으로서 내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푹 쑤시면 누구만 자랑하겠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게 갈라디아 6장에 나옵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니 또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에요. 6장 14절에 십자가 ‘~외‘라는 말을 쓸까요? ‘외’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것도 자랑해야 되고 저것도 자랑해야 된다는 것은 십자가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하고 부활도 자랑하고 이게 안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승천도 자랑하고 예수님의 재림도 자랑할거야가 안되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의 존재도 자랑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는 십자가 말고 성부 하나님을 자랑할거야 이것도 안돼요. 성부 하나님마저 십자가 자랑하라고 언급하기 때문에 두 개를 놓으면 안돼요. 하나 뿐 이에요. 삼위일체는 세 개라서 문제가 되요. 성부를 존경하면 성자가 삐지고 이러면 안되고 인간의 생각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항상 의식이 하나에만 몰입하게 되어 있어요. 두 개를 자랑한다는 것은 사실은 본인 모르게 본인이 거짓말 하고 있는 거에요.
두 개를 자랑할 수 없어요. 얘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물을 때 그 말은 맞는 말이에요. “나는 아빠 엄마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애는 천잽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순서가 있어요. 먼저 좋은 것이 있어요. 나는 자식이 열이 있어도 다 이쁘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더 좋은 자식이 있고 미운 자식이 따로 있어요.
강의 다시 해 보겠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전체성이라고 했지요. 전부를 대표하는 겁니다. 신과 신이 충돌을 일으켰다. 신들의 전쟁이지요. 신들의 전쟁에선 누가 빠지겠어요? 애들은 가라!에요. 인간들은 빠져야 되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중요한 대목인데 네게 성령이 임하고 네가 구원을 받은 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것은 마귀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긴 효과가 바로 성령이 예수님에게 속한 자에게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가 그런 뜻이에요. 성령은 선물이거든요. 그것을 은사라고 해요.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선물을 주셨으니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것에 대해서 제가 해석을 해 드렸습니다. 믿음을 까보면 껍데기, 포장지는 믿음인데 속을 보면 사랑이 들었고 껍데기는 소망인데 꺼보면 사랑이 들었고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끌려가는 거에요. 어느 쪽으로 사랑 하나로 믿음 가진 사람도 “믿음 가졌다!” 가 아니고 믿음이 사랑 쪽에 통합되라고 끌고 가는 거에요.
“나 믿음 있으니까 됐습니다.” 하면 그 자리 아니고 믿음의 내용이 사랑이라는 중심으로 끌고가고 소망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서 잘되고 자식 잘되는 소망을 가졌다가도 십자가만 소망이지 다른 것들은 자랑거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쪽으로 성령의 선물로 이끌리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랑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거에요. 그 당사자는 부담이 되요. “너는 가문의 영광이다.”하면 자식들이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겠어요. 속으로 “그건 아버지 생각이고요.” 또는 자식이 “저는 결혼해도 엄마, 아빠만 섬길께요.”하면 어마, 아빠는 속으로 네가 아직 여자를 안 만나서 그렇지! 여자 생기면 경제권까지 다 줄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엄마, 아빠 모시는 것도 자기 아내 눈치 봐야 하는데 아직 철이 없어 모르는 거지!
사람을 믿지 말라 했거든요. 성경에 네가 군대를 믿지 말고 병거, 말을 믿지 말고 무기를 믿지 말고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여호와 이름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입되는 전쟁은 없어요. 이 세상은 감옥과 같아서 잘되든 못 되든 관계없이 철장 안에 있어요. 여기서는 잘하든 못 하든 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어차피 죄 밖으로 못 나가면 아무리 자기가 잘났다 으스대도 결국 그 자체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에서 동냥하고 국회의원 했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자랑하려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옥에서 벗어 난 입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어떻게 전쟁해도 이길 수 없었는데 주님께서 악마와 전쟁해서 승리한 덕분으로 내가 승자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랑을 하면 되는 겁니다.
아까 다곤 신과 여호와의 만남에서 제가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바로 경계선으로 나타난다는 것. 왜냐하면 사람들은 내가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 선택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처나 예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건 전부 다 부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 해도 예수님의 존재와 나 사이에 나의 선택성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했다는 거에요.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선택 했다는 거에요.
혹시 내가 잘될까 싶어서 믿어 믿기를 잘했다. 이렇게 되어 버려요. 자기 선택의 가치가 있어요. 그러면 마치 우리가 친구를 선택하는 것과 똑같이 되어 버려요. “나는 저 동창생 중에 저 친구를 사귀길 참 잘했어!” 정말 평생 친구야!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선택한 친구를 자랑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구 자랑하는 거에요?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오고 교회에서 학습 받고 물뿌리고 자꾸 성만찬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랑할 것을 더! 더! 더! 계속 모으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게 성립이 안되고 이것도 자랑하고 저것도 자랑하고 이렇게 되어 버려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곤 시과 여호와 신의 만남에서 충돌이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언약궤와 다곤 신이 만났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언약궤는 그냥 상자이고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도 무시하고 블레셋 사람도 무시했어요. 무시했는데 어? 상자 앞에서 다곤 신상이 무너졌잖아요. 다곤 신상은 마치 모습이 인어 공주 같아요. 상체는 인간이고 아래는 꼬리와 비늘이 있어요. 저 깊은 바다의 전설 속 인어 공주 드라마 있잖아요. 푸른 바다의 전설인지 있어요.
그런데 언약궤가 참 신기하네! 이러면 안된다니까요. 언약궤를 신성시 해버리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언약궤를 어떻게 하십니까? 자진해서 불태워 버려요. 언약궤를, 영화 레이더스에 보면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 해서 독일군들이 찾으려하는 주인공이 헤리슨 포드이고 1~4부까지인가 있어요. 성궤를 열 때 빛이 나와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해골이 되는 그래픽 처리된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나거든요. 무섭긴 무서워요. 죽은 웃사를 묘사했는데 상자는 그냥 상자일뿐입니다.
언약궤가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건 언약궤가 효과가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 효과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신비적인 것을 대입시키는 우상성을 아직도 대입시키고 있어요. 이건 블레셋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에 자꾸 신비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을 뜻하냐 하면 이건 어떤 물체거든요. 물체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 자신의 신체에 신기한 효험같은 것, 신기한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은 우상적 사고방식입니다.
기도를 할 때 손을 이렇게 모아야 합니까? 아니면 손을 요렇게 모아야 합니까? 예전에 버스를 타게 되면 ‘오늘도 무사히’가 써 있는 옥색 드레스를 입은 서양 소녀가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 붙어 있는 거 봤지요? 만약에 그 드레스가 옥색이 아니고 자색이었으면 효과가 있겠습니까?
신체라는 (물질성)에다가 + 신기함(영혼성) =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체는 흙이 되고 영혼은 하늘로 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를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성령이 오면 성령에 포집되면 포함이 되어 버리는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왜 하늘나라를 자꾸 우주선 쏘아 올리듯 발사 된 로켓 부분 떨어지고 캡슐만 우주 궤도로 올려 지듯 생각하는 거에요. 신기한 기적을,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래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믿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 10년 다니면 남들은 기도하면 병 낫는다는데 왜 나는 안 되나? 매일 교육 받고 양육 받고 있는 거에요. 자기의 몸을 뭔가 강하게, 힘들게 하고 짜릿하게 만들면 뜨거움이 생긴다? 그건 심리적으로 가능하지요. 매 한번 맞아 보세요. 뜨겁지. 우리의 신경 조직은 정신적으로 집중하게 되면 거기서 열이 나게 되어 있어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河事不成)말이 있잖아요.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이종에 자기 최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거하고 성령하고는 관계없어요. 성령은 반드시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다시 말해서 언약의 내용을 고지하고 알려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는 것이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허경영이에게 배우고 있어요.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봐!~ 자기 눈을 바라보면 공중에 뜬다는 거에요. 허경영이 찍어 줄 걸 그랬나? (웃음) 최면술 거는, 대통령 후보 허경영(웃음). 이러한 언약에서는 뭐가 나오냐 하면 역사가 나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서사 구조라 해요. 서사( Story )가 나옵니다. 각 신마다 스토리가 나와요. 이것을 수요 예배에서 예를 들었는데 두루마리 화장지라고 했습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고양이나 아기가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줄줄 풀리지요. 신은 그 자체의 스토리를 뱉어 내게 되어 있어요. 실을 뽑아내듯이, 어떤 특정 물체를 만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아! 언약궤가 하나님이다!” 언약궤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궤 다음에 뭐가 나오냐? 연이어서 이스라엘 역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언약궤와 다돈 신이 만남으로 다곤 신이 부서졌다. 끝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사 구조가 이어 지듯이 십자가 사건이 끝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반복해서 몰아세우는 새로운 서사 구조가,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언약의 역사이지요. 거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잖아요.
십자가 현장에는 강도 둘만 있었어요.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종결 된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죽었고 그 옆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거 아니에요. 십자가는 십자가 사건이 살아 있는 거에요. 십자가 사건이 본체라면 거기서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사건이 풀려 나오는 데 그리고 난 후 몇 년 뒤에 예수님이 들이 닥치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이 새롭게 없는 데서 새로 생겨 버립니다.
새로운 시· 공간이 생기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도 생겨 버려요. 첫째 날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 여섯 째 날에 아담이 생기잖아요. 시·공간이 먼저 있고 나오듯이 예수님 십자가 중심의 새로운 시· 공간이, 성령 안이 있고 난 뒤에 그 공간을 채울 하나님의 백성들, 천국 백성들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성령은 창조에요. 옛날의 창조는 없는 데서 만들어 졌지만
지금 새 언약의 창조는 죽은 죄인을 의인으로 부활시키는 창조.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래서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애서 복음은 신이 만든 내가 되지만 종교는 신을 가진 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든 내가 누구의 것이 되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잖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인데 신을 가져 버리면 신과 동업자가 되어 버려요. 동업자가 되면서 신을 내 뜻대로 다루려고 해요. 그야말로 신을 시다바리로 여겨요.
신 앞에서 자기가 갑질 하려고 설쳐대는 것과 같은 겁니다. 자! 서사 구조를 이야기 했는데 언약궤 앞에 다곤 신상이 있지요. 여기서 각각 역사가 나오지요. 그러면 이 역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이 블레셋을 이겼다를 증명해줄, 확인 해줄 역사가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둘 사이에 역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둘 사이가 티격태격 충돌될 전쟁의 역사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다곤 신은 보이지만 상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보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우상성을 갖고 있는가를 오히려 들추어 내기위한 일종의 덫 같은 거에요.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착각하는 거에요. 언약궤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묻지 마시고 언약궤 앞에서 블레셋이 어떠한 식으로 태도를 보이는가 한번 보라는 거지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본인이 블레셋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본인이 나서서 알아서 챙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는 인간들이 왜 안 되는 지? 아담은 왜 안 되는지? 왜 인간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전쟁인 것을,
왜 천국이나 지옥 가는 것은 본인의 결정이나 결심에 의해서 운명이 확정되지 않는가를 계속해서 우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구조냐 하면 대질 구조라 합니다. 항상 성도가 성도다운 것은 내가 예수 믿습니다라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복음 안다고 까불어서 가만히 보면 이단이다. 십자가 만이라고 우기는데 가만히 보면 이단이다. 십자가를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노림수가 있어요.
십자가 덕분에 천당 가겠다는 노림수 그것은 이단입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강조 한 것이 있지요.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않는 것을 강조했지요. 나에게 영생 안 줍니다. 그런 성경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 줄 자는 주님이 따로 만들어요. 따로 만들어 놓고 그게 우리인데 독자적인 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 만들어요.
나에게 영생 주지 않고 영생 줄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 놓고 계속 영생을 주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전에는 “나 영생 얻어야지! 예수 믿고 영생 얻어야지!”라는 것은 발길로 차입니다. 그 발길질에 동원된 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누구인가 하면 악마, 마귀지요. 마귀는 항상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영생 얻을 놈이 그런 짓해서 되겠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게 하지요.
말씀을 가지고 “꼴좋다! 성도란 것이 이런 취급을 당하니, 이게 성도야?” 하면 “ 그래 정신 차리고 성화해야지!” 이럴 때 적당한 말씀이 있지요. 바로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 하리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되고 하는 것은 이것을 알아야 되요 언약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항상 과정을 거쳐요.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피. 이것을 거쳐야 해요.
우리가 단독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묻는 사람이 잘못된 거에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지 딱 집어서 나에게 너 뭐야? 하고 물으면 안되요. 우리는 내가 ~뭐야?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를 성도는 그렇게 물어야 되지요. 너는 앞으로 뭘 할거야? 그리스도를 증거할거야! 이렇게 되야지 “너 뭐야”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 박스야! 언약 박스야!
언약 박스면 효과 있겠네? 아니야 불태워 져야 돼! 주께서 날마다 나를 죽여 버려! 사람이 물체가 되어 버리면 나름대로 서사 주조가 나로부터 나와야 되요. 나는 일곱 살 때 유아 세례 받았고 10살 때 뭐했고 스무 살 때 뭘 결심했고 나의 스토리가 나와 버려요. 제가 문학가를 안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스토리를 남에게 왜 이야기 하냐 말이죠. 정신 상태가 싫은 거에요. 물론 술 담배 하는 것도 싫지만 담배 물어야 뭐야 작품이 되는 줄 알고 하는데
담배피면 몸에 해로와요. 소설가라고 해서 몸에 좋은 거 아니에요. 멋있어 보이는데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대질 구조가 형성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의 원수를 항상 마주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세요. 주의 원수가 뭐냐 하면 단독적으로 자기 가치와 자존감을 내세워서 찾아온다. 다곤 신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같이 어울리고 너무 마음에 들어 합니다.
하지만 짧은 어느 순간에 갈 길이 달랐다.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