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b-이 근호 목사 피사의 사탑에 대해서, 기울어져야 되거든요. 모든 탑은 그 정도 무너지면 다 무너지거든요. 근데 수 백 년째 계속 서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기울어져야 돼요. 인간은 바로 서면 의미가 없어요. 죄인이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예수님이 빛이 돼요. 예수님만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어두움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두움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스스로 어둡다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신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되지, ‘아휴, 조금만 잘 할 수 있으면 빛 가까이 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빛은 예수님으로만 충분해요. 예수님으로만 충분하지 우리까지 빛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빛을 받으면 되지, 우리가 별이 되면 안 돼요. 자칫 자기가 보혜사가 되면 안 돼요. 보혜사는 성령으로 충분하지, 지가 또 보혜사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그것을 구약 전체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 말은, 여기서 난해하기 시작하는데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완성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 말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으로 예수님의 존재가 주님의 우편에 있은 다음부터는 여기서 뭐가 내려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내려와요. 전에는 율법이 내려왔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려온다고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이 말씀이 내려오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예수님처럼 되면 안 되고 말씀처럼 돼야 돼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의 주가 되시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켜버리면 이 우리가 제 2의 예수가 돼버려요. 그것은 주가 두 명, 세 명, 네 명이 될 수가 있어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안 되고, 말씀이 우리를 삼켜서, 삼켜져버려야 돼요. 삼켜져버리면 우리는 삼킴을 당하기 때문에, 내 자랑을 하지 못하고 삼켜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위력만, 완성의 위력만 잘 증거 하게 되고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외에는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외에요. 십자가 외에는. 그러면 십자가 외에 하고 예수님하고 차이점이 뭐냐, 예수님은 존재지만, 십자가는 예수님의 존재가 벌인 최종적인 기능이잖아요. 십자가 기능. 그럼 우리가 제 2의 주가 될 필요가 없고, 주님의 말씀의 완성이 되는 그 능력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고, 완성된 그 능력이 우리를 삼켜줘야 우리는 완성 안에 합류가 되고 포함이 돼버리는 겁니다.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포함이 돼버리죠. 그러면 예수를 믿으라고 할 때 믿으면 안 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 자체가 우리한테 덮쳐버리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믿어지는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말씀이 우리가 안 지켜도 주님 쪽에서 지켜서 우리에게 완성된 체로 만들어내는 그 업적을 이룬 거예요. 우리는 그 결과물이 돼버리고. 그래서 “예수 믿은 것도 주께서 하셨잖아요. 제가 믿은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일을 벌여가지고 예수 믿어라! 요한복음 12장 44절, 그 말씀을 던진 예수님이, 본인이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실현시켰잖아요.”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면류관을 반납하는 거예요. 이건 제가 쓸게 아니고, 제가 쓴 면류관조차도 주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이 흰옷을 입게 현실적으로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적용된 열매가 우리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들.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그럼 성도는 뭐예요? 그 가지에 맺힌 열매가 되잖아요. 열매가. 열매를 맺읍시다. 열매를 맺자고 한다고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에요. 맺긴 뭘 맺어요? 열매가 되게 해요. 열매가 되게. 그래서 가지에 붙어있지 않는 자는 열매가 되지 못하고 주께서 잘라버린다 이 말입니다. 하라는 말이 아니고 반드시, 필히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요? 주께서 잘라버린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라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를 치고 거기에 동의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이, 내가 일의 주체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시간부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 이전에 구약이 있었다고 했죠.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한테는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입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뭐가 됩니까? 우리도 연속이라고, 율법 줬으니까 지키겠다고 그렇게 했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착각했는데, 그 율법한테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었으니까, 아, 애초부터, 지금 못 지켜서 불연속이 아니고, 처음부터 율법을 우리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존재였음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우리는 십계명을 못 지키는 거예요. 심지어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으라는 것도 못 지켜요. 나를 믿으라는 것도 못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설교 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예수 믿어서 의인 된 사람은 없다고 했죠. 예수 믿어서 의인 된 사람은 없어요.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자리가 바뀌어졌어요. 의인은 뭐로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예수 믿어서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의인이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이미 의인이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온 것이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 앞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쉽게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실제로 그 효과를 이제부터 어두움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발휘했는데, 그 발휘한 결과가 뭐라고요? 의인이 생산되었다 이 말입니다. 의인이 되고 난 뒤에 보니까 자기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고. 믿음으로 믿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에서 나온,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믿음이 나를 삼켜서, 나를 덮쳐서, 그래서 나는 졸지에 그 믿음 노선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으니까, 그게 로마서 1장이거든요. 근데 로마서 4장에 가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 은혜라는 말을 할 때에 은혜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은혜와 극히 대비되는 말을 썼는데, 그게 뭐냐 하면 행함이라는 말을 쓴 거예요. 이거는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된 것이다. 따라서 은혜에 속한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어떤 현상? 이거는 내가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행했어요? 그건 주께서 남긴 그 말씀이 실효성 있게 적용이 된 거예요. 어떻게 그게 실효성이 있느냐, 그거는 구약을 보면 알죠.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움직였잖아요. 그들 속에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주의 이름이 함께 동행 했죠? 그들은 날마다 실패해요.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계속 존속한 것은 누구 때문에 그랬습니까? 주의 이름의 약속 때문에, 주의 이름이 남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신약까지, 예수님까지 계속 이어지게 하잖아요. 그렇죠? 이걸 그대로 신약의 성도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성도가 성도 된 것이 누구 덕입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정신차려가지고, 본인이 성령 받았으니까 자기 행함으로 행해서 계속해서 신앙인을 유지하는 겁니까? 아니죠. 구약하고 똑같았잖아요. 주의 이름이 계속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받은 솜씨가 주의 이름의 성과인 것을 성도는 그냥 확인할 뿐이죠. 그럼 성도가 해야 할 것은 구약의 실패한 그것을 답습하면 되죠. 왜 실패를 답습해야 되는가? 그 실패가 실패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뭐가 주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언약이 주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에게는 실패가 되겠죠. 로마서 3장 19절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래서 21절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제물이라는 겁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에요.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그것이 십자가와 연결이 되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고백이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떤 행동, 귤을 까먹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과 관련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와 귤 까먹는 것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를 한 번 보여드릴까요? 귤을 까먹으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 귤을 까먹고 힘내서 주님께 영광 돌릴게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합시다. 지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귤을 까먹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주님께서 귤을 다 까먹게 해놓고 “아까, 니 귤을 까먹으면서 무슨 소리했느냐?” “주께서 은혜로 주셨으니까 감사히 먹고 힘내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면 니가 귤 까먹기 전에 영광 돌리는 것하고, 귤 까먹고 난 뒤에 영광 돌리는 것하고 그게 차이가 있어야 할 텐데? 방금 기도를 그렇게 했으니까 그 차이가 뭐가 있는지 보여줘 봐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별 차이가 없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에게 이미 뭐가 각인되어 있느냐 하면 식사기도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귤 까먹을 때는 이렇게 해야 영광 돌린다 하는 것이 이미 각인되어있으니까, 귤 먹는 순간에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고 미안스럽고 하니까 뭔가 한 마디 해야 미안한 감이 약간 줄어진다는 느낌이 들죠. 그 줄어든 만큼 뭐가 쌓이느냐 하면 내가 그만큼 하나님과 괜찮은 관계라는 자기 의가 형성이 돼요. 그걸 돌아서면 고게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추가가 돼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그 다음부터 귤 까먹을 때 중얼거립니까? 가만히 있습니까? 가만히 있겠죠. 그럼 왜 가만히 있습니까? 안 중얼거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죄를 줄인다고 생각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짓을 해도 어두움이고 죄 되게 하시는 그 작용이 있는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것을 해도. 주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항상 그게 십자가와 관련되도록 만들어요. 이걸 하면 했다고 죄고, 안 하면 안 했다고 죄고. 해도 했다고 죄고, 안 해도 죄고, 그냥 했다고 해도 죄고, 그걸 안다고 해도 죄고. 내가 이걸 하나 저걸 하나 죄라는 것을 알았다는 그것도 죄가 되고. 그럼 어쩌라고? 그냥 죄 지으라 이 말이죠. 편하게. 항상 삐딱한 나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아주 사악해요. 사악한 슈퍼맨이에요. 항상 뭔가 덜 죄짓고, 덜 죄지은 그 폭만큼 내가 미처 몰랐던 영광이 된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만큼.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하늘에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라는 것이 얼마나 깊이 인간 속에 들어왔으면, 바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당한 폭력사건입니다. 그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왔어요.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왜?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그때는 실존적으로 기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럼 태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죄 없습니까?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죄 없습니까? 우리는 내가 행하지 않은 일엔 죄가 없어요. 그럼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일어난 상황을 우리 일생을 통해서 그대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십자가가 가신 아픔이 계속 나오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현상이. 그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는 십자가 구경도 못했고, 선악과 구경도 못했다. 아담이 따먹었지 내가 따먹었나, 하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 일종의 뭐로 비치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 보기에 이게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작용할 때, 항상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뭐로 생각한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의로울 수 있다는 본성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하느냐,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인척 하는 이 죄를 계속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한평생 성도의 남은 인생 속에서 십자가 믿고 죄인인데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이 고백을 하더라도, 돌아서면 또 다시 우리는 의인인 척하는 거예요. ‘십자가까지 믿었으니까 이 정도면 의인이 아니야?’ 하고 의인인척 하는 행동을 계속 하는 이유가 십자가가 밑에서 밑받침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 십자가를 단독적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데 뭔가 드러나지 않는 게 모든 것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그것이 뭔가, 예를 들면 방귀 뀌면 누가 방귀 뀌는지는 대번에 알잖아요. 근데 아무도 안 뀌었는데 방귀냄새가 나도록 만들듯이. 뭔가 사람들은 각자 개인의 소질을 발휘했을 뿐인데, 의인이라는 공통점은 한결같아요. 모이면 지 잘났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누구하고 할 것 없어요. 서로가 다 이런 행동했으니까, 이런 계획했으니까, 의인이라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내는 배후에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함께 우리와 어울려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계1:7). 근데 그 분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찾을 수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쪽에서는 연결돼야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그 분께 다가가는 것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분을 찾을 수가 없지만, 우리가 알기로는 그 분이 계속해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고백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그럼 그 속에서 우리가 죄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전체가 같이 오게 되죠. 47절에 봅시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인데, 이걸 여러분한테 한 번 물어볼까요? 물어보겠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심판을 안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너희들은 심판 당해도 싸다는 말씀입니까? 심판당해도 싸다는 거예요. 심판당해도. 이 말은 뭐냐 하면 믿고, 안 믿고 간에 이미 너희들은 심판 대상이라는 겁니다. 믿으면 심판 안 받고, 안 믿으면 심판 받고 이게 아니라, 예수님의 심판 있기 이전에 이미 말씀 가운데서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실효성 있게 그렇게 만들잖아요. 그럼 현실 속에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늘도, ‘12월 20일도 나는 심판 받아야 되는데 오늘도 안 받았다.’ 내일 되면, ‘어? 나 심판 받아야 되는데 오늘도 안 받았다.’라고 느끼는 것은 주께서 계속해서 동행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너와 동행하고 있고 너를 덮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안 받는 이유가 뭐지? 아,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시는구나.’ 그 다음에 봅시다. 47절 후반 절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했죠. 그럼 진짜 성도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감사하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감사하죠. 왜? 심판함이 아니고 너를 구원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게 모든 솜씨와 행동의 주체가 여전히 우리한테 있지 않고 일방적으로 누구한데 있다?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있음을, 말씀으로 전체가 덮친 것을 보니까, 우리 행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게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에게서 뽑아낼 것을 다 뽑아내는 거예요. 우리는 냄비 안에 있는 뼈입니다. 우려낼 것을 다 우려내요. ‘내 안에 전에 주신 말씀에 이런 것도 들어있네!’ 하고.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내요. “지키지 마! 지키지 마! 내가 우려낼 거니까 그냥 살아. 니 잘난 체 하며 살아. 우려낼 건 내가 우려낼게.” 그래서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는 잘난 체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도 똑같아요. 잘난체하는데,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점이 뭐냐, 이 잘난체하는 것조차도 주님의 말씀의 계획된 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주의 말씀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성도 아닌 자가 뭐냐, 주의 뜻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는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게, 성도가 아닌 사람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께서, 잘난 체 하는 이유가 주께서 일방적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서 잘난 체 한다는 것을 믿게 된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성도에게 잘난 체 하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고 내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 그건 성도가 아니에요. 말의 주체와 말 행위의 주체가, 이게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쓸데없이 남한테 고백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한테 고백하면 뭐합니까? 지 잘난 체 하는 거예요. 주께서 아시면 되지, 왜 남한테 신자인 것을 확인받고 인정받으려고 해요. 주께서 아시면 되지. 주께 인정 못 받았으니까 남한테 확인 받으려고 하거든요. 목사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럼 그 사람은 자칫하면 목사한테 약점 잡힙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시켜줄게.”하고 스스로 지가 목사의 딸랑딸랑 거리는 마귀의 종이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구원 받았습니까?” “니나 잘하세요!”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니나 잘하세요. 주님하고 나하고 문제를 니가 왜 알아야 되는데?” “목사님. 저 구원받았습니까?” 무슨 제가 도사도 아니고, 제가 십자가지지도 않았는데, 십자가지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물어요? 다만 제가 이야기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항상 주의 말씀대로 실시된 것이 믿어진다는 것.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수동적으로 믿어진다는 것은, 이게 바로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이 적용된다면 성도입니다. 누구라고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성도입니다, 에요. 그냥. 그러니까 성도네요, 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이름 부를 때 그냥 누구누구 성도님이라고 불러주지만. 그거는 확실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부를 것이 없어가지고 “아무개 불신자님!”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요. 무슨 욕을 얻어먹을라고. 내가 뭔데 신자 아니라고 확정을 못하잖아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잖아요. 인간의 운명에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잖아요. 고린도 전서 1장 1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가이오 집 외에는 왜 세례를 안 줬을까요? 나는 세례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러 왔다는 말 대신, 왜 복음과 대치된 자리에다가 세례를 준 이유가 뭡니까? 성만찬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앞에는, 복음의 반대편에는 세례 있고, 성만찬이 있어요. 왜 그렇게 배치를 하는 겁니까? 사람이 뭔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원인을 자기의 행위에다가 결부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 받았다~! 그렇게 되면 세례 받은 것과 안 받은 것으로 자기가 구원받은 것과 안 받은 것으로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아버려요. 그러면 세례 받으면 구원된다고 이래 버리면 세례 받은 행위는 얼마든지 내 쪽에서 발휘할 수 있거든요. 머리 들이밀고 물 뿌려주세요. 안 그러면 옷 벗고 욕조에 들어 갈랍니다.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세례 받았네, 유아세례 받았네, 할 수 있단 말이죠. 할 수 있다는 것은 납득이 되잖아요. 설득이 된다고요. 설득이 돼버리면 행위가 구원을 유발시켜버려요. 인간의 행위는 구원을 보여주는 행위가 아니고, 나중에 행위는, 자기가 죄인임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되어야지, 이래서 구원 받았지롱~하고 나오는 구원과 연관시켜서 나오면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과 좋게, 좋게 이야기해서 구원받게 되죠. “내가 말씀했다. 지켰나?” “예. 지키겠습니다.” “아이고, 괜찮네.” 이래서 구원받은 것이 없어요. 피라는 것은 끝났고, 니는 할 수 없고, 결정됐고, 구원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남아있는 인생 전체를 걸쳐서 그걸 드러내는 작업을 계속해서 주의 이 말씀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내가 심판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매 들고 왔는데, 매 들고 온 것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매 들고 온 거다. 이 말은 니는 매 맞아도 싸다. 이 말입니다. 나 아니면 너는 구원이 안 됐었어.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얼마나 간단한 문제입니까? 그러면 주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 걸, 그렇게 하면 성도일 걸, 나는 구원받았지롱~ 노렸던 구원을 드디어 획득했네!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맞아도 더 맞아야 돼요. 왜 자꾸 기대했던 바를 성취한 성공자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계속 붙들려고 해요? 이 세상이 왜 어두우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검토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외곽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나라를 통해서 거기에 동의를 함으로써 우리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동의를 하면서. ‘아, 저거는 신앙과 관계없이 착한 일이네.’ 이렇게 순간 동의될 수가 있다고요.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복음으로 생각 안 하다 보면, 다들 그래요. 동의하다가도 돌아서면 아차! 복음으로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이 돼요. 제가 아까 식사시간에 도서관에를 갔다 왔어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다가 제가 하나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중국의 대학교 식당에 대학생들이 새겨야 될 16가지 내용을 새겨 놓았어요. 그걸 시간가는 것이 귀하기 때문에 빨리 읽겠습니다. 대학생들한테 밥 먹으면서 이걸 계속 새겨라 이 말입니다. 1. 원대한 포부. 2. 굳은 신념. 3. 조국사랑. 4. 인민을 위한 복무. 중국이니까. 5. 학습권면. 6. 자강불식. 스스로 강하게 하고 휴식 없이 계속하라. 7. 규정준수. 8. 바른 기풍. 기풍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9. 철저한 신용. 10. 엄격한 자기관리. 11. 예의범절. 12. 단결우애. 13. 근검절약. 14. 분투정신. 15. 건강한 신체. 16. 생활열애. 나는 생활을 열심히 사랑하겠다. 이 16가지를 하라는 겁니다. 뭐 빠진 것 있어요? 빠진 것이 있거든 아이디어 내보세요. 거의 완벽하죠? 이걸 대학생들에게 하도록 시킵니다. 그럼 결론은 뭡니까? 바른 대학생, 착한 대학생이겠죠. 근데 이것을 비판해보세요. 비판할 수 있습니까? 중국입니다. 공산세계에요. 비판해도 어떤 공통성을, 보편성을 느끼지 않습니까? 보편성. 근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복음을 전했다, 대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죠. 공산당이니까. 그렇죠?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동의하죠. 옳은 소리만 해놓았으니까 동의 안 할 수가 없죠. 우리가 중국사람 이라고 치면 “그것 맞네. 다 맞네.” 하겠죠. 같이 맞는다고 하는 어떤 공통성을 발견한 사람한테 주님이 틀리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같은 공통성에 동의하니까. 같은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이걸 우리는 어떻게 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중국 대학생들에게 준 교훈을 보면서 또 다시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녀교육 이렇게 시키잖아요. 이 16가지면 완벽한데. 그래서 오늘 제목을 제가 처음부터 정했어요. 겸손한 악마. 자기한테 희망을 거는 거예요. 착할 대로 한 번 착해보자. 어느 정도로? 겸손에 겸손을 더하면서. 이게 십자가 죽으심을, 내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그 연속성을, 나름대로 그 연속성을 거부하고,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온 그 연속성, 내가 심지어 예수까지 믿고 기어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그 연속성을 내가 유지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복음은 연속성이 아니고 계속해서 불연속성입니다. 동행해주니까 구원받는 거지, 5년 전에 예수 믿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뭐 한 번 믿었으면 성령이 임해서 계속 구원받는다고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 성령이 누구 영입니까? 주의 영이죠. 주의 영은,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십자가가 하신 일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을 미리 땡겨서 한 번 봅시다.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이유가 뭐죠? 같이 오시면 되는데? 같이 계시면 되잖아요? 왜 예수님이 계시면 안 됩니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그 이유가 뭐냐를 여러분한테 묻는 겁니다. 같이 계시잖아요? 삼위일체 이론이라면 같이 계시면 되는데? 예수님계시고 영계시고 같이 있으면 될 것 아닙니까? 왜 임무 교대합니까? 왜 바통터치하십니까? “사역이 달라서.” 예, 사역이 다른데, 장춘옥 집사님이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하니까 제가 다 당황스러운데, 아직까지 칭찬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그 이유를 대야 합니다. 사역이 어떻게 다릅니까? 그걸 맞추면 제가 귤 줄게요. 사역이 어떻게 달라요? 예수님이 떠나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편이고 나는 예수님 편이라고. 서로 좋은 게 좋다고, 친구라고 했으니까. 함께 있음이 가능한줄 알고 있어요. 함께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어두움 속에 함께 있어도 한 통속이 아닌 거예요. 그게 뭐냐, 단독성이에요. 단독성. 아까 제목이 겸손한 악마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심해서 수정 들어갑니다. 보편적 단독성으로. 유식해보이고 하니까. 단독성이에요. 단독성. 그런데 예수님을 별개의 인간으로 안 보고, 너나 나나 똑같은 목수 아들로 본 거예요. 같은 인간으로 봤다는 말은 서로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방언)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한테 이래 기도하면 아이고, 알았다고, 착하다고 응답하고. 서로 사귈 수 있는 관계로 보는 거예요. 단절성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 빼버린 겁니다. 모든 성경해석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는 거예요. 이제 십자가 믿었으니까 같이 이제 맞담배 합시다. 맞담배 하든지 맞짱 뜨든지. 십자가 믿었는데 뭐.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의 영에 같이 있는데 뭐. 이제 십자가 잊어버리고 같이 막 나갑시다. 같이 친구고 사귑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묻죠. 어떻게 그게 예수님하고 막 사귈 수가 있습니까? 성령이임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성령이임해서.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을 어떻게 합니까? 책망하죠. 아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뭘 빠트렸습니까? 책망의 역사를 빼버린 거예요.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제 맞담배 하듯이 같이 맞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했던 질문에 답변해보세요. 성령의 기능이 뭡니까? 책망이죠. 그럼 예수님의 기능이 뭡니까? 불연속성, 단절이죠. 아, 끝까지 대답했으면 정말 귤 하나 주는데, 취소해야지. 그러나 잘 이야기했습니다. 칭찬합니다. 이게 사역이 달라서 그래요. 사역이 다른데, 다른 이 사역을 같은 시대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역과 그걸 근거로 해서 이리와! 이리와! 이래서 너는 지옥가야 해! 라고 꾸짖는 사역의 순서가 달라야 한다 이 말입니다. 주의 영이 그런 영입니다. 그 단절성을 더욱 단절화 시키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자기 이야기를 안 해요.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그렇다면 요한복음 12장 47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단절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너희들 손에 내가 죽어야 비로소 이 세상은 일체의 동정이나 인정을 베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일체의. 그래도 목사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잖아요?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사랑하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가 “그래도 인간 중에 사랑하는 자가 있잖아요?”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귤이 없는 가운데 축복과 저주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인간은 누구 편에 자기를 포함시킨다? 저주 축복을 가름할 때, 반드시 축복 편에 본인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그 다음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보편적 단독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는데, 꼭 인간은 보편적 단독자 옆에 누굴 세웁니까? “주님 저는 다르겠죠?”라고 꼭 세워요. 인간의 조직신학의 문제가 거기에 있어요. 신학을 배운 그걸로 인하여, 내가 신학이 요구하는 그 축복의 자리에,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자꾸 자기를 간주하는 거예요. 신학이 사람을 배립니다. 안 그래도 배린 인간인데, 신학이 인간을 더욱더 배려놨어요. 목사 되면 구원은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목사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단절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줬는데, 오히려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하고 같은 업자라고 본 거예요. 같은 업자라고. 그럼 성령이 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너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다고 이야기하겠죠. 귤을 까먹으면서 귤을 먹고 주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하는 이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죄니까 다음부터는 귤 까먹을 때 곱게 까먹겠다고 하는데, 또 곱게 까먹은 것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이래도 죽으시고 저래도 죽으신 거예요. 아까 정답이야기 한 것 때문에 죽으시고 정답 이야기 안 한 것 때문에 죽으시고. 뭘 해도 우리는 단절되어 있음을, 주님의 성령이 와서 지적을 하는 그 자체는 같은 성령 안에 있는 자에게만 그 지적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예.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죠.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죠. 이미 의인은 주께서 아시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보시면 되고, 그 다음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이게 누굽니까?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이 자가 누구죠? 아버지죠. 아버지. 아버지겠죠.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수님이 아버지 오른편에 있는 입장이 아니고, 본인도 아버지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자리고,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요.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한 자기 입장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나도 구원받아야 된다.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거다.” 언제?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뒤에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50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자, 이걸 설명하면 시간이 끝날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하면 잘 이해가 안 되죠.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있는데 예수님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면 죄인의 자리죠. 십자가 지기 전이잖아요. 십자가 진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죄인이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죄인의 자리에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 보편적 단독자니까. 보편적 대표자에요. 대표자가 십자가 지기 이전이니까, 십자가 지고 해결하기 이전이니까, 무슨 자리에요? 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요. 그럼 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누구를 지금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언급하죠. 대표자하고만 하니까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고 아버지하고 관계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심판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요소도 있다는 거예요. 아예 심판만 할 것 같으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지도 않았죠.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낸 것은 먼저 뭐부터 확실히 하고? 심판받아 마땅함을 확실히 해놓고, 그 다음에 그 안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본인이 너희들 속에 박혀있다는 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거예요. 영생 얻는 거예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뭐냐, 내가 아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너희는 이미 물 건너 간 거예요. 저주받아,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따라서 예수인 나를 빼놓고는, 내가 만약에 빠져나가면 “구원해주세요. 영생주세요.”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죠. 그거는 너희들의 합당한 권리가 아니고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심판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줬는데, 너희들이 백날 해봐야 아버지께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계모임해가지고 그래도 사랑해달라고 하는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소리를 정 하고 싶거든 아버지한테 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왜 왔느냐를 따지게 되면 ‘아,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되는구나.’라는 그 상태가 예수 믿는 상태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 믿는 상태의 전제가 뭡니까? “심판받아 마땅한데”이거죠. “나는 심판받아 마땅한데” 다시 말해서 “구원해주세요.”하는 것은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죠. 그러면 예수님 보고 “구원해주세요.”라는 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이미 단절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한다는 것은 예수님 생각이에요. 우리가 기대하거나 우리가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이고, 그 예수님 생각은 아버지 생각이에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너는 저 죄인을 위해서 대표자가 되어라.” 이거는 아버지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본문 말씀을 죽 보면 이거에요. 너희들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풍덩 잠겼다가 빠지면서, 풍덩 집어넣었다가 빼면, 그러니까 어떤 소시지를 막대기에 끼우고 밀가루반죽을 입혀서 기름에 풍덩 집어넣었다가 뺐는데, 그냥 그대로 있다면 이건 뭔가 변화가 없죠. 근데 풍덩 집어넣었다가 나오니까 밀가루가 바삭바삭하게 튀겨졌잖아요. 핫도그가 완성 됐잖아요. 지금 그 변화를 주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변화를. 근데 집어넣고 한다는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저주 받을 인간에게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여, 율법 주셨으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연속되어 있죠? 주께서 구원받으라고 율법 줬으니까 우린 잘 지키겠습니다.” 이래 생각한다니까요. 신약 때에 와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님 주셨죠? 예, 예, 예수 믿을 그 정도의 양심은 있습니다.” 연속성을 주장하죠. 그러니까 이거는 아버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오직 예수님만 알아요.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나타난 변화의 결과에 대해서만 고백할 따름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핫도그라는 제 몸을 보니까, 심판받아야 되는데 구원의 튀김가루가 묻어있다, 이거는 제가 원한 바가 아닌데요? 아, 요한복음 12장에 보니까 이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네.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본인이 알아서 성취했네. 아이고, 주께 감사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 보는 태도에요. 본문 보는 태도입니다. 뭐 할 것도 없네. 우리는 그냥 놀았네. 그냥. 죄만 지었는데, 주께서 풍덩 잠기고 빼고 자시고 다 하셨네. 혼자 말씀 던져놓고 그 말씀을 혼자서 다 했어요. 그 와중에서 우리가 느낀 것은 우린 어두움이었다는 것. 어두움 되게 하셨다는 것. 어두움이고 어두움 되게 하셨는데, 그거는 예수님을 빛으로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이 빛이신 작업의 일환입니다. 이런 고백이 쏟아질 때 항상 그 고백을 들어보세요. 그 주체자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주님이 들어가 있죠. 그래놓고 “나는 구원받았네.” 이래 되어버리면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해져버려요. “지금껏 주께서 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께서 계속해서 나를 구원할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이래 되어야죠. 그 말을 누가 하겠어요? 그 말을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말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는 자 외에는. 은근히 자기 구원을 노리는 사람들은 그 괜찮은 문장, 센텐스sentence를 자기한테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까 나 구원받았다고 그 고백을 남한테 할 필요가 없어요. 남이 뭘 알아주겠어요? 뭐 이력서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 예수 믿는 회사에 취직되는데 유리할지는 모르지만. 끝으로 이 말씀하고, 총정리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강의할 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전개라고 했죠. 예수님의 자기 전개. 카펫.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 그거 믿을게요. 자기 전개 믿을게요.” 하잖아요. 근데 그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해야 될 고백이에요. 자기 전개라고 하니까 우리는 올라 탈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카펫을 깔아놓으면 우리는 제 3의 지역에서 홀라당 그 카펫을 밟으려고 뛰어들 시도를 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전개가 아니고, “나도 약간은 기여했습니다. 나도 구원받는데 약간은, 폴짝 뛰어든 것은 제가 했습니다.” 이렇게 하죠.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아까 사르트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걸 연결시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르트르가 뭐라고 했습니까? 본질보다 무엇이 앞선다? 실존이 앞서고, 실존이 실존되기 위해서 내용물로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본질을 채우고, 그 본질은 뭐냐, 자신이 노동한 것,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자기 실존은 자기 행함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가 사람 죽여 놓고 이건 주의 뜻이라고 하면 책임을 안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건 안 되고, 실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은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사르트르가 누구하고 결혼했어요? 보봐르 하고 결혼했죠. 계약 결혼했습니다. 계약을 자꾸 연장시켰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르트르는 먼저 죽고. 보봐르는 끝까지 살았어요. 나중에 무덤에 둘이 함께 묻어줬는데. 계약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책임지겠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자꾸 뭐가 올라와요? “예수 믿습니다. 성도 맞습니다. 성령세례 받았습니다.”하면서, 내가 그렇게 믿으면서도 또 몇 분 지나고 몇 시간 지나버리면 실존이 나와요. ‘주님 믿는 사람이 이래서 되겠는가?’ ‘내 행동이 이래야 되겠는가?’하고.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안 했으면 이게 성도의 바른 삶인 줄 알거에요. 그러나 이게 바로 악마의 겸손이에요. 오늘 강의 제목 또 수정 들어갑니다. 악마의 겸손으로. 근데 악마의 겸손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죽을 때까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나오죠. 이게 죽을 때까지 나와요. 이게 악마의 겸손인 것을 이해하면 이게 바로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가. 이 겸손이.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고 ‘아이고, 또 까불고 있고 또 예쁘장한 악마가 나오네.’ 그렇게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 까부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아이고, 엄마가 돼서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다니?’ 이게 주부가 매일같이 하는 소리 아닙니까? 또 돌아서서 ‘예쁘장한 악마가 또 까불고 있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주님의 자기 전개인데, 돌아서면 나의 전개, 나의 잘남의 전개로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또 다시 발견합니다. 이 자체가, 이러한 단계가 나온다는 자체가 주님의 자기 전개의 일부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