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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a-이 근호 목사 오늘 강의는 요한복음 12장 44절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있죠. 이게 지금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요한복음이라는 신약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구약이 있죠.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그 상태가, 우리 같으면 구약의 말씀을 우리가 이룬다, 라고 뭐 이렇게 할 텐데, 나를 믿는 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이 그렇게 잔소리가 많고, 율법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께서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라고 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구약의 완성은 뭡니까?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가 되잖아요. 지켜라, 지켜라, 지켜라, 이스라엘 백성은 못 지켜서 망했으니까 너희들은 지킬 수 있다. 이게 정답인데.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완성하려고 왔다고 했죠. 그 말씀을 들어보면 구약에 있는 구약 사람들은 제대로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백성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패한 그 실패를 딛고, 이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됐다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렬하잖아요. 그러면 너희들은 이제는 지키게 됐으니까 지켜라. 이게 우리가 기대하는 최종적인 완성태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나를 믿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죠. 나를 믿으라. 그러면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다이렉트로, 직접 못 지켰는데 우리보고 너는 지키라고 하지 않고 경유를 하죠. 한 곳을 이렇게 다녀가죠.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러면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어디를 경유하겠습니까? 구약의 모든 말씀이 어디로,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어디로 다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행하심 속으로 구약이 전부 다 빨려 들어가겠죠. 마치 새떼나 벌떼에서 여왕벌 하나 움직이면 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세계명작동화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를 부니까 그 동네에 있던 쥐떼가 피리소리 듣고 따라가서 그 많던 쥐떼가 다 없어지는 것처럼. 주께서 던져준 그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이 피리 부니까 피리소리에 전부 다 그리로 가는 거예요. 다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믿으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약에 있는 그 모든 말씀이 어느 것 하나도 직접 성도에게, 신약에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에게 직접 오는 법은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뭘 지켜야 되는데, 지키라는 요구사항이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33절에 보면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했어요. 일체 맹세하지 말라.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인간들이 맹세하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어요. 맹세하고 싶어서. 다시 말해서 이것 지킬게요. 저것 지킬게요. 이렇게 장담하고 싶은 생각이 출렁이는 거예요. 그리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금식하고 싶어 하고. 구제하고 싶어 하고. 구제도 중독입니다. 남 도와주는 쾌감이요, 마약하는 그 쾌감 이상으로 강력해요. 있으면 남 퍼주고, 있으면 나 도와주고, 헌금하는 재미에 빠져버리면 정말 마약 같은 쾌감을 줍니다. 적당하게 끊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 선교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기도도 마찬가지고. 흔히 방언도 마찬가지고. 선행도 마찬가지고. 인간 자체가 뭘 행하게 되면 거기에 욕망이 받쳐주기 때문에, 이 욕망은 무한의 욕망이에요. 조절이 가능한 욕망이 아닙니다.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욕망이 아니에요. 마약만 마약이 아닙니다. 종교적 욕망도 마약의 일종입니다. 엔도르핀이 팍팍 나오죠. 그 종교적 기도의 열망은 바로 인도의 수 십 만개 종교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아픔이 많은 기도. 더 낮아지는 기도. 더 충격적인 고통을 보여주는 기도. 왜 층격을 가해야 하느냐 하면, 기도를 함으로써 나한테 스스로 가하는 그 고통이 기도의 응답으로써 이게 어떻게 희열로 바뀌는지를 본인이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로 아픔마저 능가하는 대단한 신앙인가를 늘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그 테스트해서 역시 나는 대단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그러한 효과를, 고걸 얻고 싶은 소망을 손에 쥘 때의 그 희열, 카타르시스, 이거는 정말 로또 맞은 것처럼 큰 쾌감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요? 남이 해내지 못하는 그것을 본인이 해내는 거예요. 엄홍길 그 사람이 왜 자꾸 높은 산에 올라갑니까? 그것도 한 개만 올라가면 되지, 세계 15개의 꼭대기는 다 올라갔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주는 즐거움은 대단한 거거든요. 종교도, 정신적인 세계도, 그러한 에베레스트 산이 여러 군데 있어요. 니가 그 산에 올라가봤나? 니가 이 산에 올라가봤나? 등산가들은 최고봉에 올라간 것이 끝이 아닙니다. 난코스도 올라가봤나? 산소통 안 메고 올라가봤나? 추운겨울에 가봤어? 이래요. 누가, 누가 더 잔혹한 체험을 극복했느냐를 묻는 겁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그렇게 깔려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주님이 걷어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것이 오늘 본문 46절에 나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 자체가 뭐냐 하면 어두움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왔으되 누가 깨닫지 못해요?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죠. 그 어두움을 뒤에는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구약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줬는데, 그 실패한 이유가, 예수님이 오니까 그 실패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왜 실패했느냐, 어두움이기 때문에. 어두움이 말씀 지키겠다고 나선 그 자체가 어두움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로마서 3장 19절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죠.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입을 막는다고 하니까 일종의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그 다음에 흰옷까지 입어버리면, AI 조류인플루엔자 소독하는 사람이 되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이, 바로 시내산에서 십계명, 율법받기 전에 율법을 준 대상자가 누굽니까? 바로 홍해를 건너온 그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 홍해 건너오기 전에 어떤 하나의 의식을 치렀죠. 문설주에 뭘 발랐어요? 바로 피를 발랐죠. 이게 개인이 한 이벤트나 해프닝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뭔가 지켜보는 자, 이 피에 대해서 주목하는 어떤 실체가 있죠. 이 실체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심판하는 천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발랐다는 말은, 어떤 주목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상정해야 돼요. 피 바르고 싶어서 피 바른 것이 아닙니다. 남아돌아서 피 바른 것이 아니고, 누구 보란 듯이 하는데, 누구 보란 듯이 피를 발랐는데, 이 피는 지켜보고 있는, 심판을 행사하는 그 분과 유일하게 매치가 될 수 있는 관계가 되겠죠. 매치가 될 수 있는 관계. 피 바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줬죠. 이 대상자를 누가 정했습니까? 이거 중요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논해서 반상회에서 정한 것이 아니죠. 이장들이 모여서 한 것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이게 왔다면, 이거 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시내산에 올라가가지고 십계명 받습니다. 율법 받습니다. 이 피 바른 백성에게 율법을 줬다는 말은 도대체 이 관계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관계가 서서히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전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전개. 양탄자 깔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칸 영화제에 일반인이 올 때는 말고 스타들이 올 때는 뭘 깝니까? 레드카펫을 깔죠. 이 레드카펫을 영화배우가 들고 자기 쪽에서 깝니까? 아니죠. 영화 주최 측에서 깔죠. 그걸 이병헌이가 밟고 지나가면 그 레드카펫이 처음에 출발했던 장소에 집결하게 되죠. 그러면 율법을 준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모든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은, 모든 사건은, 모든 계획은, 창세 천지창조는 예수님의 자기 전개에요. 자기 전개. 그런데 구약에는 예수님이 안 나타나잖아요. 구약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납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마태복음 1장 23절에 처음 나타나잖아요. 이름을 예수라 하라. 구약에는 그게 없어요. 그냥 여호와, 주의 이름,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렇게 기능적으로 나타났잖아요. 그럼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면, 그때도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활동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이미 예수님께서 활동을 했죠. 활동을 했는데, 양탄자처럼 깔아준 것이 율법이라고 했고, 그럼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율법을 못 지킨 쪽으로, 그들은 어디로 솔솔 끌려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끌려와야 되는 겁니다. 율법에 실패하면서, 율법을 못 지키면서 그리스도 쪽으로 오는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약에는 율법을 줬고, 지키라, 지키라, 지키라, 이거 하지 아니하면 저주 받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조항까지 다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율법에 그렇게 법이 많으면,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는 못 지켰는데 이제는 지켜라, 이게 우리의 상식인데, 이게 아니고 오늘 본문 12장 44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동안 뭐가 있었다? 구약전체, 천치창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그 말씀에서 나를 믿으라는 것까지, 고게 점프하는데, 도약하는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이 점프가 무난히 성사가 되느냐, 그 점을 추적 하면 될 거예요. 왜 그걸 추적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키겠습니다.” 하다가 이제는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말이죠. “믿나이다.” 라고 바뀌어줘야 이 사람이 바로 성도다 이 말이죠.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 예, 믿을 수밖에 없죠. 믿는 것이 완성입니다. 말씀지킴의 완성입니다.” 라는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와야 돼요. 아직 강의 시작 3분전인데, 일찍 시작해서 지금 오시는 분한테는 제가 미안하지만, 시간 지나서 오시면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없겠죠. 자, 이 대목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 논리가 굉장히 어려워요. 상당히 어려운데 여러분이 감내해주셔야 합니다. 자, 그럼 어떤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여기 46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아까 유튜브 동영상 두 번째에서 한 것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그냥 테이블입니다. 그런데 귤이 있는 순간 갑자기 이 테이블의 위치가 귤이 있는 지점과 그 외의 지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럼 귤이 없을 때는, 너는 거기 앉았네, 너는 여기 앉았네, 가 되는데, 그런데 귤이 와서 있는 순간 너는 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라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는 겁니다. 귤에 대해서. 이 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귤 안 좋아해, 나는 귤 좋아해, 라는 달랑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귤이 없는 순간에는 테이블을 나눌 수가 없죠. 전기톱 가지고 나눌까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동일성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동질성, 또는 동일성. 질이 같다. 뭐가? 이 세상이. 달리 말하면 이 현실이. 현실은 누가 초월적으로 나서서 옳다, 그르다 할 입장이 못 되고, 각자 자기 팔자대로, 자기 사는 대로 그냥 살면 돼요.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한, 처벌받을 이유는 없어요. 귤 먹는다고 처벌받습니까? 내가 귤 먹는데, 목사님이 아이고 가슴 아파! 이러지 않죠. 근데 뺏으면 안 되죠. 제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민주주의 법은 뺏으면 안 되지만 내가 귤 먹는 것은 되죠. 그래서 민주주의 법에는 도둑질하지 말라가 있겠죠. 근데 십계명에도 보면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나와 있죠. 그럼 우리가 십계명을 해석할 때, 우리가 민주주의로 해석해야 될까요? 아니면 복음으로 해석해야 될까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깔아놓은 카펫이라고. 카펫, 그것의 의미는 최종 때, 마지막 때에 등장하죠. 카펫이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이동하니까. 어디로? 결국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 쪽으로 이동하거든요. 그러면 율법에 대한 해석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것은 반칙이에요. 그래서 해석한 결과가 뭐냐 결국 말씀을 곡해해서 못 지키는 것이 돼요. 그 당시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못 지킨 것이 아니에요. 무엇과 연관성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안 되니까 못 지킨 거예요. 그럼 우리는? 성령, 주의 영이 와 버리면 주의 사람이잖아요. 주의 사람이 되면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율법의 의가 되도록 지키겠죠. 그럼 율법을 행해서 의가 됩니까? 지금 이 문제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다루었어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느냐, 아니면 성령으로 의롭게 되느냐,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만약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헛되이 죽으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고, 그게 2장에 나오죠. 1장에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벌써 복음과 저주가 관련성 있게 등장했잖아요. 복음만 등장한 게 아니에요. 복음은 뭘 유발시킨다? 가만히 있는, 테이블에 귤 하나 놓듯이, 가만히 있는 이 세상을 저주 판으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니가 전한 복음이 그렇게 대단하면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고 다그칠 게 아닙니까? 그게 2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복음이야기하면서 복음이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부터 먼저 언급을 해요. 이거는 구약을 언급한 다음에 제가 신약을 언급한 것 하고 똑같은 취지입니다. 율법으로서는 뭐가 안 된다? 의가 생산될 수 없다는 거예요. 율법으로서는. 그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은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인간을, 이 세상을,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럼 가만히 있는 사람 저주하면 안 되잖아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율법이 없을 때는 굉장히 점잖아요. 근데 율법이 오게 되면 가만히 있는 탐심도 자극을 받아서, 갑자기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오게 되면 탐내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들쑤셔놓는다, 라는 말이 적당해요. 들쑤셔놓는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셔놓는 거예요. 도서관에 앉아서 착하게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인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이 없어요. 근데 복음 아나? 복음 아나? 복음 아나? 십자가 알아? 라고 쑤시니까, 공부하는데 피해 받잖아요. 민주주의에서는 피해보면 안 되잖아요. 와락 화내죠. 거봐! 화내는 것 보니까 복음 모르네. 당한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잘했어요? 바리새인이 잘했어요? 누가 잘했어요? 누가 잘못했어요?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어요? 지금 예수님이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가만히 지키려고 있는 거예요.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누굴 의식해서? 막 돼먹은 사람들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서. 제일 밑바닥에 있는 막 돼먹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늘 살고 있는데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저와 같이 되지 말자.”라고 이렇게 한 거예요. 그 제일 밑바닥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세리와 창기가 있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죠.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이 누굴 비교했습니까?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것하고, 세리가 기도하는 것하고, 둘 다 모범답안으로 끄집어내서 비교하잖아요.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뭐가 들어갔습니까?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바리새인의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고, 그 전체의 분위기입니다. 그 전체의 분위기에요. 도서관이야기 다시 할게요. 도서관에서 책보면서, 그것도 성경 보면서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되도 않는 인간이 와가지고 가만히 점잖이 앉아있는 사람을 쑤시는 거예요. 가만히 말 안 하고 있으니까 더 쑤시는 거예요. “니가 십자가 알아? 복음 알아?” 처음에는 참았죠. 나중에 그 분이 성전을 뒤집어놓아요. 성전을.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성전에서 완전히 깽판 친 거예요. 이건 뭐 강도의 굴혈이다, 강도의 아지트다, 라고 하니까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자꾸 건드리면 못 참잖아요. 그래서 확 일어나니까 “거봐, 어두움이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거는 도대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제가 아까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십계명을 설명한 것과 복음적 관점에서 십계명을 설명한 것과 결과가 제가 다르다고 이야기했죠. 민주주의는 피해 입히지 아니하면 사람이 항상 점잖은 사람이 돼요. 점잖은 사람을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의인이라고 해요. 그 의인 중의 의인이 누구냐,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이거는 자타공인, 자기도 그렇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해줘요. 얼마나 용감했던지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예수 믿는 이단들을, 괜히 괜찮은 민족을 흔들어버리는 그 예수 믿는다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자기의 청춘을 불사르는 소탕작전에 나서잖아요. 그것도 선봉자에 서서. 그리고 예수 믿는 그 당시의 이단중의 괴수인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죽일 때, 행정적인 처리가 잘 되는지 그것을 자기가 지켜보고 있었어요. 보고하고 위해서. “돌 던지는데 피곤하지? 땀나지? 힘들지? 옷 벗어서 나한테 가져 와.” 사도행전 7장 58절에 보면 옷을 벗어서 가져오라는 거예요. 옷 벗는다는 것이 힘들어서 옷 벗는 경우도 있고, 그 당시에 율법으로 처형할 때 “나는 죄가 없습니다. 주의 뜻입니다.” 라는 의식 때문에 옷을 벗든 간에, 하여튼 관계없이 주동인물이에요. 주동인물. 스데반 집사가 사울이 주동자라는 것을 알잖아요. 다 알죠. 누가 주동했다는 것을.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니가 얼마 안 가서, 몇 개월 안 돼서 구원받을 걸?” 하고 예언했습니까? 안했죠.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스데반 집사님이 아는 것은 어떠한 인간도 구원될 수 없다는 그거는 알아요. 어떠한 인간도. 저 사람은 구원되고, 저 사람은 구원이 안 되고, 그게 아니라. 어떠한 인간도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스데반 집사 본인은 구원 받았잖아요? 본인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죠. 스데반 집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스데반 집사로 구원받았죠. 그럼 여기서 헌 스데반 집사고 새 스데반 집사고 간에,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예수 믿어서 새로운 스데반 집사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다고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 될 수 있는 여지가 헌사람 한 테는 일체 없습니다. 만약에 옛날 지옥 갈 내가 예수 믿어서 새사람 돼버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새로운 율법이 돼버려요. 옛날 율법 방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율법, 예수 믿으라는 율법, 그 율법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예수 믿는 행함에 의해서 자기가 의인이 돼버려요. 그 의를 가지고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내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성경적, 하나님 쪽에서 오는 반응이 칭의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칭의가 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 칭의 이론에 의하면, 믿음을 조건으로 걸 때 칭의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칭의가 돼버리면, 신자인지 아닌지가 이게 확인이 안 됩니다. 곤란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칭의 이론이 뭐냐 하면 악마의 이론이에요. 왜, 악마의 이론이냐 하면 예수님의 시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작을 인정하지 않고, 칭의의 시작은 뭐냐 하면 구원 못 받아서 아쉬워하고 안달하는 내가 시작점이에요. ‘아휴, 나 구원받고 싶은데.....,’ 이게 시작점이에요. ‘그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옳지! 믿자.’ 그러니까 구원 못 받는 자에게는 아직도 무슨 능력이 남아 있다?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알미니안주의죠. 칼빈주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예수 안 믿는 나에게, 예수 안 믿는 나를, 안 믿는 나라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요거 칼빈주의입니다. 그럼 칼빈주의의 시작은 뭡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게 출발점이 되겠죠. 그래서 이단입니다. 그게. 출발점에, 알미니안, 감리교죠. 알미니안주의나 칼빈주의나 둘 다 지금 뭐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죠. 둘 다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둘 다 자기 구원받는 욕심에 환장해버렸어요. 그래서 칭의라는 것은 없어요. 그런 것 없어요. 칭의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칭의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받았다.” 그거거든요. “나는.” “나는”이라고 할 때 그게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죽어야 되지, 옛사람이 계속 유지되면 안 돼요. 그러면 구원받은 스데반 집사님은 어디에 있느냐? 구원받은 스데반 집사는 시작을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못 받아 안달하는 스데반 집사가 아니라, 예수님부터 출발한 거예요. 예수님부터. 뭘 재료로 해서? 옛날 스데반 집사를 재료로 해가지고. 죄인을 재료로 해서 새로운 스데반 집사로 바꾸는데 그 시작점이 주의 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주의 영으로부터 시작해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주의 영이 충만해서, 주님께서 자기가 만든 작품을 회수하기 위해서 서서 스데반 집사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정상이에요? 돌 던져 죽이려고 하는 그 유대인과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옛사람과 같이 지극히 정상인이죠. 스데반 집사에게는 누가 미친 자에요? 새사람 된 본인이 기이한 사람이 돼버렸어요. 저 사람들과 함께 얼마든지 정상인이 될 수 있는데, 주께서 조치를 해버리니까 그야말로 정상인의 범주가 안 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순간 그 테이블 위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그 테이블이라면, 누가 그 시대의 귤이 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귤이 되겠죠. 그리되면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됩니까?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아는 쪽과 그 외, 익셉트except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일단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였으니까, 스데반 집사가 어디에 속합니까? 스데반 집사와 함께 성령 충만한 쪽에 속하지 못하고 그 외에 속하는 거예요. 그 외에 속하는. 주께서 일을 이렇게 하셔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거죠. 그럼 여기 이 말씀을 할 때는 예수님께서 누구하고 관계를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예수님과 관계를 하고 있죠.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그 관계를,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 우편에 앉았으니까, 아버지 자리에 계신 예수님과, 그 전의 자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었던 자리에 누굴 아들의 이름으로 거기에다가 배치를 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 스데반 집사님 같은 분들을 거기다가 배치를 해버려요. 배치를 해버리면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나, 아버지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성공한 그 관계나 같은 관계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은 빛이시고 그들을 가지고 빛의 자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빛의 자녀. 그럼 빛의 자녀는 누가 만들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없었던 빛의 자녀를 어두움 속에서 새로 만들어낸 거예요.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만들기 전의 사람들은 뭡니까? 만들기 전에는 예수 오면 예수 믿으려고 율법을 행했을 것이고, 십계명 이야기하면 십계명 지키려고 했을 것이고, 성령이면 성령 믿으려고 했을 것이고, 삼위일체면 삼위일체 믿으려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할 것이라 말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그게 어두움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잘 드러내니까.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구약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약되는가, 넘어가는 포인트를 잡아내는 거죠. 잡아내는 것. 그 포인트를 잡아 낼 때, 제가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남들은 다 빠져라! 이 말입니다. 왜? 어두움이니까. 그림으로 그려야지 이해가 되는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구약은 예수님이 깔아놓은 하나의 카펫이라고 이야기했죠. (예수━━━구약). 깔아놓은 카펫을 돌돌 감아버리면 예수님 쪽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과 구약 사이에는 어떤 단절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기에 대해서 증거 한 것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이렇게 되기 때문에 단절점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 3의 영역에 있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구약)↑(제 3의 영역에 있는 우리).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줄넘기 할 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노래 부르면서 들어갈 타이밍을 찾잖아요. 예수님의 줄넘기에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제3의 지역이 주님께서는 없다는 거예요. ‘야, 이거 괜찮네. 예수님께서 완성했으니까 나는 달랑 요거, 그 전에는 율법 지켰지만 나는 율법 폐기하고 예수 믿어야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나갈 제 3의 영역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독점한 이유가 우리의 영역이 어두움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두움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영역에 있는 자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두움의 죄성을 또 다른 죄성으로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돼요. 어두움은 누가 대표로 보여줬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구약이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점을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거든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누구냐 하면 도서관에서 점잖게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착실한 학생이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율법을 연구합니까? 왜 그렇게 착실하게 하려고 합니까? 그들이 맹탕이 아니에요.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다고요. 뭘? 우리 조상들은 율법을 못 지켰지만 우리들은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이사야 58장에 이런 말씀이 있죠. “너희들이 안식일에 먹고 마시는구나. 안식일에 차라리 금식하고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안식에 뭐 했느냐 하면 안식일에 금식하고 도와줬어요. 옛날 조상들은 안식일에 기쁘게 잔치하고 놀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70년 동안 포로 잡혀가게 했다면, 우리가 역사를 잊어버리면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그와 같은 역사를 다시는 반복은 하지 말자. 그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거든요.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바탕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빛이라고 했죠. 빛으로 온 자체가, 이 세상 전체가 어두움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이걸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귤로 봤죠. 귤로 봤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자기들이 어두움이라는 것을 몰라요. 자기들이 알아서 그냥 빛이고 어두움이라고 했는데, 막상 빛이 뜨니까 졸지에 빛이 없던 모든 것들이 뭐가 된다?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원래는 말이 안 되거든요.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약간 밝아야 되잖아요. 깜깜한 동굴에 플래시flash비치면 약간 밝아야 되잖아요. 빛은 그게 아니고 빛이 오게 되면 더 어두워져요. 안 어둡다고 자부하는 것도 어두워져요. 교회에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교회가 어두움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력을 다하여 십자가 복음을 못 전하게 하는 거예요. 근데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교회를 비난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극히 정상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비정상이지, 옷 지켜주는 사울은 극히 정상입니다. 왜? 어두움다우니까. 어두움답다 이 말이죠.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극히 정상이에요. 아까 유튜브 두 번째 강의했잖아요. 주님이 찾아오면 우리는 당황스럽다고요. 그동안 예수 믿으려고 얼마나 좋은 것들을 많이 끌어 모아 놓았습니까? 근데 막상 성령이 오니까 하등 그게 소용이 없어요. 그게. 출제문제가 달랐어요. 출제문제가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출제문제였어요. 그 출제문제를 누가 알았느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어느 목사도 몰랐어요. 누가 아느냐,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둘만 아는 출제문제를 던져주니까, 자기 내부는 엉망진창이에요. 예상문제해서 밤샘했는데 예상문제가 하나도 안 나왔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가? 이런 것이 하나도 안 나왔어요. 그냥 요나처럼 이러려고 선지자 됐습니까? 내가 이러려고 선지자 됐습니까? 우리 지금 이러기에요? 정말? 주님께서 40일 만에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 니느웨 백성들이 말을 듣습니까? 회개를 하면 제 체면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선지자 꼴이 말도 안 됩니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에요? 우리 사이 이러기에요? 심지어 그 이야기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예언한 거예요.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어떤 마음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체휼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다. 내가 뭐 하나님이니까 모를지 싶어? 내가 죄 없으니까 고생 하나도 안 한지 싶지? 내가 너희들이 겪는 마음고생을 다 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고생 겪었다고 해서 그 근거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에요.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고생하고 이렇게 신앙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하나 더 배우기 위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월절에 피를 발랐다. 죽음의 천사가 안 오면요, 피를 바르는 이게 이상한 일이에요. 피를 바른다는 것은 피를 원하는 자가 없으면 이거는 미신 같아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이상한 짓을 원하고 있어요. 어떤 누구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기도 많이 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고, 헌금 많이 하면 기뻐하시고, 믿쑵니다, 하면서 열심히 하면 기뻐할 줄 아는데, 그런 것들은 인간들끼리는 이해가 되지 이상한 짓은 아니에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이 이상한 짓이에요. 비도 안 오는 데 왜 배를 만들어요. 사람들에게 설득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삽시다.” 이건 얼마든지 설득이 돼요. 그러나 “착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거는 사람들을 설득할 어떤 건더기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믿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 거라고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미움이 그대로 너희에게 주어졌다면 니 땡잡은 거야!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글쎄, 그런 횡재가 어디에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떤 범위 밖에서 일이 기적처럼 주어지니까, 이게 기적의 사나이도 아니고 뭡니까? 기적 받았으니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기적 말고, 정말 예상도 못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루어진다면, 우리가 보통 신분이 아니에요. 그걸 귀한 존재라고 제가 저번에 피라는 책에서 했는데. 정말 귀한 존재기 때문에 내가 봐도 내가 낯설 정도로 낯설다. 내가 봐도 내가 조절이 안 된다. 당황스럽다. 침착할 문제가 아니다. 침착하고 싶어도 침착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죠.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과 예수님과 연결성이 있어요. 끊어짐이 없습니다. 왜? 완성이니까.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니까. 근데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자기가 이해한 모세의 율법의 내용과 연결이 안 돼요. 여기 모세 이야기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7장에도 나오지만, 요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너희들이 그렇게 모세를 높이지만 모세가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너희들을 저주할 것이다. 너희들이 모세를 최고로 쳐주지만,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모세 율법이지만 너희들이 갖고 있는 모세 율법이 너희들을 손댈 것이다. 너희들은 편하게 있지만, 너희들이 모세율법을 다룬다는 그 모세 율법이 저주할 것이다. 모세율법으로 저주받아야 마땅한 인간들이 어디 함부로 예수님을 평합니까? 이 말은 모세율법과 그들의 관계가 애초부터 끊어져있다는 거예요. 모든 게 단절이에요. 모세율법과 끊어져있으니까, 결국은 이거는 빛과 빛의 노선과 끊어져 있으니까, 이 전체가 뭐가 돼요?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강의가 어려워져요.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면, 어두움 밖에 빛이 있고 밖에서 빛이 오니까 어두움이 됐다. 이래 되잖아요. 이거는 뭐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 그거는 당연하지. 이래 되는데, 문제는 이 빛이 어두움을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두움 내부에 들어가서, 내부적으로 장착이 되어서, 빛이 엔진처럼 가동되어서 어두움을 더욱더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박사처럼 별 따라 오면 참 좋겠는데, 밤하늘에 별이 요즘 스모그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빛이 어두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 안에 있는 거예요. 어두움 안에 빛이 있으니까 그 어두움 안에 빛의 여파로 인하여, 그 결과로 인하여,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서로를 보면서 빛이라고 간주하는 현상들이 일어나요. 그래야 그 다음 말이 이해가 돼요. 그 다음 말이 뭐냐 하면, 본문 요한복음 12장 47절에 “내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그 다음 48절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따로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지금 예수님이 하는 말이 심판이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을 지금 이 세상에다가 같이 섞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예수님이 현재 이 세상 안에 있잖아요. 이 말씀을 하고 있을 때 이 세상 안에 있죠. 그러니까 이 세상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구원도 들어있고 심판도 들어있고 둘 다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 어두운 세상 안에 구원도 들어있고, 세상 안에 심판도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이 둘로 나누어져야 하잖아요? 둘로 나누어져야 되잖아요? 근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절대로 둘로 나누어질 건더기가 없어요. 그런 근거가 없어요. 전부 다 하나의 세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세상에서 둘로 구분하는 논리도 어려울뿐더러, 둘이 된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그 논리도 굉장히 어려워요. 그 논리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그 논리가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 논리를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 첫 번째 시간을 끝내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슈퍼맨시리즈 제 3탄에 보면 슈퍼맨이 약간 돌았어요. 돌아가지고 갑자기 착한 슈퍼맨이 악해졌어요. 악해져가지고 그 힘을 어디다 쓰느냐 하면 이탈리아 피사에 가면 탑이 하나 있죠. 피사의 사탑이라고 하는데, 그게 약 5.5도가 기울어져있거든요. 이 사악한 슈퍼맨이 그 탑을 바로 세워버려요. 여러분, 탑은 바로 세워 있는 것이 옳은 거예요? 아니면 기울어져있는 것이 옳은 거예요? 탑은 누워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세워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근데 사악한 슈퍼맨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탑을 반듯하게 세워버렸다는 이 말이죠. 근데 반드시 세워버린 탑은 그때부터 의미가 없어요. 하나의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을 지배하는 악마가 하는 일이 뭘까요? 죄인에게, 어두워진 이 세상에 평안을 줘버려요.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고, 인간이 행함으로 의인을 만들어버려요. 근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평안을 주러 온 겁니까? 아니면 불화를 주러 온 겁니까? 싸우러 왔죠. 인간에게 가장 강한 결속력이 뭐냐 가족결속력입니다. 가족결속력, 이게 가장 왜 강하느냐 하면 기투거든요. 사르트르의 기투.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에요. 그냥 던져진 존재.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어떤 집안에서 살 것인가는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었다는 겁니다. 그냥 던져진 존재입니다. 어디에다가 던져졌어요? 세상에다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나의 존재의미와 목적은 무심코 던져졌기 때문에, 그걸 우리한테 강요를 해서도 안 되고, 그걸 닦달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내가 살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내가 살고 싶어서 이 세상을 골랐어요? 고를 것 같았으면 차라리 미국 맨해튼을 골라야지. 있을 것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억지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사는 의미가 뭐냐? 목적이 뭐냐?” 그걸 묻는다는 것은 실례라는 겁니다. 그거는 논리상 반칙이 되고 억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의미를 이제부터 내가 만들어 가면 되죠. 만들어 가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한 역량만큼, 내가 수고한 노동만큼 열매를 얻으면 되죠. 근데 모순이 뭐냐, 내 의미가 뭐냐, 내 존재가 뭐냐고 그걸 묻는 것은 본질이라면 실존은 본질보다 앞서 있다는 겁니다. 내 실존이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실존의 입장에서 ‘나는 어느 정도까지 능력이 있는가?’ 그게 나의 본질이 되는 거죠. 그 본질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 들어있습니다. 결국은 나의 나 됨은 나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놀면 거지가 되고, 그것도 내 책임이고. 내가 부지런해서 돈 벌면 그 부자 되는 것도 다 내덕이고. 인간 뭐 있어? 그거죠.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그거죠. 뭐 있어요? 지가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게 진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우연히 살다가 죽으면 그거는 내 책임이 아닌 거죠. 뭐, 살만큼 살면 됐지. 그렇게 하다 살다 죽으면? 뭐, 죽으면 죽는 거지. 도대체 죽는 것 때문에 왜 두려워하고 종교를 찾고 신을 찾느냐 이 바보들아! 왜? 태어날 때부터 우리한테 “니는 꼭 하나님 믿고 살아야 된다.” 라고 그걸 우리한테 주문하고 태어났으면 하나님 믿지. 태어나고 보니까, 의무감 없이 태어났는데, 왜 예수 안 믿는다고, 하나님 안 믿는다고, 책임을 묻고 지옥천당에 보내버리면, 이건 나한테 억지로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 이 말입니다. 이의 있으면 이의 있다고 한 번 말해봐라.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토 달아봐라. 이게 노벨문학상까지 거부한 사르트르의 장담입니다. 그럼 피사의 사탑은 바로 세울 필요가 없죠. 기울어진 그 자체로 해야 관광객이 모이니까. 이걸 공사해서 바로 세우면 피사에 아무도 안 오려고 할 겁니다. 바로 있는 흔해빠진 탑을 왜 구경하려고 합니까? 이러한 예와 어두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거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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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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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