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강-YouTube강의(성경의 하나님)161220-이 근호 목사
175강-YouTube강의(성경의 하나님)161220-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175강, 제목은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제목이 상당히 수상한 끼가 있습니다. 그냥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맨 성경에 하나님과 같을 것이 아닌가, 이리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가짜임을 늘 들락달락하면서 수시로 그걸 알려주는 기록이 성경입니다.
만약에 진짜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같았다면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아무 충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아! 내가 아는 하나님하고 똑같네.’ 이렇게 되어버리면 십자가 살해한 사건이, 폭력사건이 일어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심지어 이사야53장에 보면 누가 믿겠느냐, 하는 거예요. 누가? 누가 믿겠느냐, 라는 말은 우리 중에 아무도 제대로 윤곽조차 잡을 위인이 아무도 없다가 돼요. 인간의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아시고 의도적으로 그걸 피해버린 겁니다.
무엇을 유도하기 위함이냐 하면, 의도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충돌, 그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충돌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내려 보내신 거예요. 알아서 믿었다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딱 보니 주님이네.’ 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대속의 피가 더는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의 죄 때문에 대신 죽은피가 없어버리면 그 사람은 피 없는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입성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 없는 사람은 언약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게 복음이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말씀을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고 원래 저주 받는데, 이 귤이 복음이라면, 귤이 없을 때는 책상만 있어요. 귤이 없을 때는. 책상 있네. 책상에 책이 놓여있네. 이리 하는데. 귤이 하나 등장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귤이 있는 장소와 그 외의 장소로 둘로 2분화됩니다.
복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 선에서 이해하는 저주와 축복이 따로 장착되어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주와 축복을 가름할 때는 필히 그 사람은 100% 자기는 무조건 축복 편에 서있다고 가장하고 그렇게 경계선을 정해버려요. 내게 속하지 않는 쪽이, 내게 반대하는 쪽이 바로 저주 쪽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만 그래요? 다른 사람 다 그래요. 그런데 그 자기가 일방적으로 선악체제를 가지고 정했던 그 축복과 저주를 어디와 연계시키는가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연계시켜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이미 내가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후원만 해주고 박수만 쳐주면, ‘이래서 완결을 본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겠지요.
그러나 출애굽기 3장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3장의 긴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벗어나서 시내산에서 그냥 양치고 있었던 거 아시지요? 모세가 이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좀 돼서 하나님이 올 때가 됐는데. 히브리 내 백성 건지기 위해서 나를 보낼 쯤 됐는데 왜 소식이 없지?’ 이리 기다렸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요청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모세가 깜짝 놀란 거예요. 그렇다면 모세가 하나님 만나자마자 ‘아, 내가 요청하지 않아도 오실분이 오셨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럽습니까?
당황스럽다는 것이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생각 속에는 내가 나가서 나이는 늙었지만, 내가 나서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야 한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생각하는 일 가운데서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일에 포함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모세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오셔가지고 모세에게 사명을 주면 모세는 추가된 사명을 곱게 받으면 될 게 아니냐, 문제는 이게 곱게 받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되면 누가 거절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거절해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이랬잖아요.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런 대목 나옵니다. 그게 요나에 나와요. 선지자면서도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지요. 이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잖아요. 왜 제가 이렇게 당합니까? 나는 자살할 거예요. 스스로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어요.
그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하물며 선지자도 그렇게 나왔다 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이 나올 때에 어느 누구도 기다렸습니다.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고대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접할 위인이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문을 열면, 영접하면,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간다는 그 요한계시록3장20절 말씀도 항상 그 앞에 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들어가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들어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의 뜻에 내가 숟가락 하나 놓을 의사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니가 계획해놓은 어떤 일도 나는 하나님의 일의 유사한 것으로 나는 그걸 평가를 하지 않겠다. 일체 내 일에 방해될 뿐이다. 그런 겁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떨어졌어요.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할 때,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갖고 있는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진짜 뜻이에요.
아무 관계없는, 현재 내가 꿈꾸고 있는 것과 아무 관계없는 일을 도발적으로, 우발적으로, 강제적으로, 밀어붙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답답했었던지 어떤 하나님이냐고 소개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나와요. 이 말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다 공통적으로 심령 속에 살아있는 그 하나님에서 끄집어낸 조립한 하나님으로서는 같은 공통점이 일체 없어요. 나타난 하나님이.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뭡니까? 최고의 선. 절대적 선. 절대적 미. 절대적 성스러움 이잖아요. 절대적 윤리, 도덕이고.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고 전혀 아름답지 않고, 전혀 선하지 않아요. 괜히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다가 오히려 퇴짜 당합니다. 이건 왜냐 하면, 내가 생각해서 생각한 상관있는 하나님은 아니고 내가 생각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그걸 피하는 식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사명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이 미쳐버려요. 본인이 안하고 싶은 거예요. 본인이 이 길로 안 가고 싶은 거예요. 이건 모세와 똑같은 거예요. “저는 못합니다. 저는 안합니다. 말 주변이 없어서 못합니다.” 아마 옆에 누구 있었으면 모세보고 “너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몰라도 돼.” 이리 했을 거예요.
전혀 본인이 예상 못한 난처한 상황에 접어든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처음 찾아올 때만 그런 게 아니고 계속 돼요. 모세가 죽을 때까지. 심지어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보기는 봤는가, 보기는 봤어요. 이건 약을 올려. 보기는 봐가지고 가지는 못하고.
그런 모세가 변화산에서 천국 가있습니다. 무엇을 뜻해요? 여러분들이 과연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남들이 묻기도 전에 따지기 전에 남한테 자랑질하기 전에 본인이 ‘시끄럽다. 안 그래도 내가 계속해서 나도 난처한 입장인데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 본인만이 알아요. 본인만이.
얼마나 자기가 하나님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있는지. 내가 아는 하나님 같으면 얼마든지 전도가 가능해요. 내가 아는 하나님 같으면. 왜냐 하면, 저 사람의 인간 요소와 내 인간 요소가 인간이기 때문에 공통요소가 있어요. 그걸 공략하게 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저 쪽으로 이전시킬 수가 돼가는 겁니다. 전도라는 이름으로. 선교라는 이름으로 되는데 진짜 하나님이 찾아와버리면 나한테 일방적으로 찾아오듯이 주님이 성령으로 일방적으로 찾아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말발해도 설득이 되지를 않아요.
이게 고린도전서2장에 나오는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하니 않는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성령으로 나타남으로 한다는 말은 전하는 본인이 전하면서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말해도 안 믿을 게 뻔하기 때문에. 전에 내게 누가 말했을 때 안 믿었거든요. 똑같은 상황이에요. 말한다고 믿을 사람 같으면 걱정을 안 하지요.
이게 바로 성도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당황스럽다는 것. 아까는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 강의는 졌다. 두 번째는 당황스럽다. 정말 당황스럽다. 그리고 남하고 의논하지 마세요. 이것은 본인이 주님한테 지금 당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증거 하게 되면 그게 바로 전도입니다.
왜? 자기가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부터 늘 주님한테 깨어지는 입장에서 내가 착하기 때문에 내가 전한다는 그런 소리를 못하지요. 왜? 주님이 매일같이 나를 군화발로 밟고 부수기 때문에 어디 뭐 남한테 내 믿음 좋다. 자랑할 그런 여지가 없어요. 늘 깨어지니까.
깨진 상태로 그대로 증거 하시면 진짜 하나님 증거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