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1209b히12장25절(발치)-이 근호 목사
안양20161209b히12장25절(발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시내산이 화산처럼 진동한다. 나중에 여기에 채워집니다. 채움. 또는 채워짐. 예수님이 오셔서 채워지거든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불가능하지요. 화산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뜨거운데서 사느냐 하지만, 이게 전부 다 예수님과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화산도. 나중에 성전도. 나중에 예수님 몸으로 오심도. 전부다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계약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뭐든지 필요해서 사용하게 되면 다 계약적으로 쓸 수가 있어요. 가능해요. 풍랑이 움직인다.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예수님은 꾸짖어 버리지요. 꾸짖어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개보고 가만히 있어! 하니까 개가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것처럼 모든 게 예수님께서 못하실 게 없고 그리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또 이용하려하는 거예요. 야~ 저런 솜씨 있으면 빨리 지하에서 위로 햇빛 비치는 곳으로 또 올라올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는데 주님의 기적은 하나의 기적밖에 없어요. 피 흘리는 기적밖에 없어요. 이건 뭐냐 하면 느그는 망하는 동네에서 망하게 될 때 그냥 망하면 기적이 아니고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하면 그게 계약관계 속에 놓여있는 채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온 바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별다르게 할 게 없고 그냥 사시면서 주님의 계약, 그 아벨의 피, 예수님의 피와 연관된 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서 산다는 것을 늘 증거 하는 용도로 지금 우리가 이 세월, 이 나이를 먹기까지 계속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특별한 게 없어요.
자, 그럼 채워지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화산이 나중에 성전 되거든요. 나중에 제사로 변화고 성전의 장소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는데 이건 예수님 노선이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노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노선은 파헤쳐져야 되지요. 사마귀나 티눈 같은데 약 바르면 나중에 딱딱한 게 빠져나오면 옴폭 뚫리지요. 주님께서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뭔가 우리 안에 딱딱한 게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악마가 우리에게 심지를 박아났다. 이리 보면 돼요. 심지. 핵추진 원자로 같은 거. 그냥 우리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게 하나의 권력으로 집어넣었어요. 힘으로 집어넣었어요. 우리는 그 권력이 히브리서2장에 의하면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거예요. 악마가 우리 속에 뭘 집어넣는가 하면 히브리서2장 말씀대로 하면, 우리 안에 뭐가 박혀 있느냐 하면 죽음의 힘이 박혀있어요.
죽음의 힘이 박혀있는데, 이 죽음의 힘 때문에 우리가 벌벌 떠는 거예요. 우리가 자꾸. 뭘 하면 눈물 나고 뭘 하면 무섭고 두렵고 하는 게 결국 마지막에 왜 무서워하지? 왜 떨지? 끝까지 논리를 까보면 죽으니까. 그럼 죽으면, 죽으면 되지. 왜 무서워하지? 내가 사라지니까. 그럼 사라지면, 사라지면 되지. 사라지는 게 왜 무섭지? 여기에 대해서 철학자나 많은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은 이게 모르겠다는 거예요. 철학에는 해답이 없어요. 신학도 마찬가지고. 해답이 없어요.
사람이 죽으면 죽는 건 좋은데, 왜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왜 사는데 아등바등 집착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란 뭘까요? 행복이란 죽음에서 내빼는 게 행복이고요, 죽음은 멀리하고 보다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져요. 그걸 심리학자나 철학자들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행복을 생각 안할 때는 행복한데 행복을 찾아다니면서 점점 더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행연아 이 행복을 남이 뺏어갈까 봐,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겨우 장만한 행복이 순간적으로 와해될 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엄마, 우리가 이리 행복해도 돼?” 드라마 보면 그런 대사 나오지요. “이렇게 너무 행복해도 돼?” 너무 행복해서 불안한 거예요. 이게 언제까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약은 뭐냐 하면, 고 악마가 집어넣은 무서움을 이걸 뽑아내버리는 거예요. 마치 이빨 뽑듯이. 발치하듯이. 이걸 뽑아내버리면 어떻습니까? 퉁하고 빈곳이 되지요. 허하지요. 비워있는 느낌. 구멍 난 것처럼. 총알 맞은 것처럼. 백지영의 노래처럼 구멍이 나버렸어요. 뻥하고 뚫려 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뚫려서 뽑힌 발치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행함의 자리가 돼요. 행함의 자리.
행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그게 주님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의 발견해야 될 진리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주님, 뭘 행할까요? 주의 형상 본받을까요?” 이리 나오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것을 행한다 할지라도 십자가 피를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는 원인제공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원인제공자. 십자가 앞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채워진 거예요. 전에는 시내산 이야기하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채워진 거예요. 꽉 찬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마로 꽉 차있어요. 악마로. 자, 십자가에서 능력이 오게 됩니다. 그럼 발치하지요. 우리를 이걸 뽑아내어버립니다. 뽑아내면서 뽑아내서 가져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눈으로 봐요. 이렇게. 나한테 뽑혀서 주님 쪽으로 날아가서 십자가 피안에 흡수될 때, 뽑힐 때는 행함으로 뽑혀서 날아갈 때는 무엇으로 변화는가 하면, 죄로 변합니다. 이 죄가 십자가 앞에 가까이 가게 되면 무슨 죄가 되는가 하면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죄가 됩니다. 이걸 로마서10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
보통 발치하게 되면 퉁퉁 붓기도 하고 홀쭉해질 수도 있는데, 퉁퉁 붓기보다는 그냥 웃지요. 그걸 다른 음성으로 이야기하면 허허. 필요하면 여러분, 호호로 가져가세요. 그냥 웃는 거예요. 뽑혀나가면서.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이 주님의 그 원 펀치 한방에 맞고 난 뒤에 내 인생이 완전히 찢어지고 내가 뭔가 내 인생을 내가 소설을 쓰고, 그림 그리고, 만화 그리던 그것이 나는 저 뒤 쪽으로 가야 돼요.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해 오셨던 것이고 나는 자아의 자리에서 주께서 프로세스, 주체되게 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서 맨날 오해하는 자아 붙들고 그것 가지고 뭐 해보려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계약관계라는 것을 뚜렷이 만들어버리니까 이게 내 몸이 주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함부로 다루시는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날마다 뭘 뽑아내는가 하면, 우리한테 행함을 뽑아서 그냥 뽑아서 자기 의라고 지목하면서 그걸 십자가 앞에서 죄로 전환시켜 버려요. 그럼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 하면 날마다 발치 당하면 돼요. 행함을 만드는 생산 발전소. 맨날 여기서 행함을 만들어내면 되는 겁니다. 행동을 만들어내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행동을 만들게 되면 그냥 행동하면 돼요.
그런데 행동하고 행함하고 다른 게, 행동은 행동한 것에다가 자기 자아가 의미를 갖다 붙이는 거예요. 나는 오늘 이런 행동을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함이었다. 또는 건전함이었다. 나의 순수함의 발로고 나의 신앙의 경건함의 증거물이다. 계속 그것을 내가 자꾸 마일리지 쌓듯이 그걸 계속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것을 셀카 찰칵! 찰칵! 웃으면서 찍어가지고 늘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쳐다보면서 스스로 행복해하고 자만에 빠지고 자아만족에 빠지는 겁니다.
그럴 때 집게가 와요. 십자가로부터. 성령으로부터 집게가 와 가지고 고걸 들고 갑니다. 오! 오! 이거 내가 공들여서 잘한 착한 일인데. 가져가게 되면 우리는 이 자리가 완전히 북~하고 허하게 파여 버리지요. 그러면 우리가 남는 게 뭐냐 하면 아무 쓸데없는 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하잖아요. 매일 순간마다 쓸데없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 쓸데없는 자.
쓸데없는 자가 허하게 파였지요. 그것에 무엇이 담기는가. 쓸데없는 것에다가 주님의 귀한 것이 와버리면 합체되어버리면 귀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귀한 성도. 귀한 성도의 받을 보너스가 뭐냐, 받을 혜택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소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간주해야 돼요. 나를 건드리면.
그래서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목사가 자기 말이 잘 먹힌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정신과 영혼에 함부로 건네고 건방지게 말을 함부로 하고 부하 직원처럼 다룰 때, 그 소자를 다른 게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사람의 말씀을 복음을 믿게 되게 되면 깜놀, 깜짝 놀라야 돼요. 배후에 누가 계시는가. 주님이 자기 스웨터 품에 안는 거예요. “얘는 내거야” 품어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건드리면 그 품고 있는 예수님의 팔을 건드리는 셈이 되어가지고 지지직 전기가 와가지고 진동이 와버려요. 안돼요. 그래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복음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목사인 제 입장에서는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마귀보다 더 무서워. 행여나 함부로 했을까. 행여나 이용해보려고 했을까. 행여나 내 사람처럼 생각한 적이 없을까. 조심스럽고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제일 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복음도 개뿔도 모르면서 복음이란 정보 하나를 추가해서 하나 언진 사람들. 사정없이 이단입니다. 저는. 볼 것도 없이 이단이에요. 목사가 됐든, 장로가 됐든, 그건 이단이에요. 그거 뭐 막 욕해도 괜찮아요. 예수님도 욕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온전하라 해놓고 예수님 본인은 독사의 새끼들아, 했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 해놓고는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이야기했다고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방금 설명한 것을 시내산 성전이라 하면 이걸 침묵하는 권력에서 이러한 모든 언약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말하는 권력으로 와요. 침묵하는 권력에서 말하는 권력으로 와요. 왜 이걸 이렇게 했느냐 하면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갖고 있던 힘이 말로서 나오거든요. 이 말속에 침묵했던 그 권력이 말로 섞여버리면 두 종류의 말이 생겨요. 한 쪽은 다 같은 사람이 쓰는 말이고 헬라말이고 아랍어고 그렇게 히브리말을 써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권력의 층이 서로 두 개로 구분되었고 그냥 구분된 게 아니고 충돌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모든 것 자체도 언약 때문에 이렇게 권력이 말하는 권력으로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권력이니까 권력을 지금 지워봅시다. 그럼 뭐만 남지요? 말만 남지요. 그러니 복음을 전할 때, 말로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시하게 본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말을 해요. 나한테 잘 보이면 너 풀려날 수 있어. 나한테 말을 잘해. 내가 납득이 되도록 말을 해주면 내 권한에 내 권력에 당신을 풀어줄 수 있다.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이라도 천사가 와서 십자가에서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아람군대가 엘리사 있는 곳을 포위했거든요. 포위했을 때에 그 게하시가 벌벌 떨었습니다. 아까 공포이야기 나왔지요. 백날 엘리사 종 되어 섬기면 뭐합니까? 안에 공포심을 발치를 못 했으니까. 뽑아내지를 못했는데. 벌벌 떠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기도를 해서 눈을 열어 보이니까 우리와 함께 있는 쪽이 우리를 둘러선 쪽 보다 더 많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이런 생각이 안 들던 가요? 그 게하시한테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좋았지 않았으냐 하는 거죠. 처음부터. 처음부터 왜 그렇게 이야기 안했느냐 하면 게하시가 프로세스를 거쳐야 돼요. 인간이 엘리사 말의 정보를 더 알게 되면 믿어지는 것 같은데 절대로 믿는 게 아니고 발치하는 그런 과정이 없어버리면 치아를 빼어버리는 과정이 없어버리면 그것은 그냥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되지 아예 그 비어있는 자리에 주님의 언약이 채워지지를 않아요.
이 빵을 보세요. 빵이 분명히 바깥이 노란색 카스테라잖아요. 이걸 자라보니까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달콤한 앙꼬 들었지요. 앙꼬는 바깥에서 안 보여요. 주님의 언약은 바깥에서 안 보입니다. 성도가 걸어 다녀도 예수님이 걸어 다닌 것으로 안 보여요. 심지어 예수님이 걸어 다녀도 목수의 아들로 걸어 다니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안에는 뭐가 들었느냐, 이해 못할 권력이 들어있고 그 권력은 그냥 권력이 아니고 이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킬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체포해도 천사의 동원령을 내릴만한 권력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냥 곱게, 연약한 모습으로 그냥 돌아가시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그야말로 거지입니다. 부자가 와서 얼마나 무시했는지 심지어 지옥가도 무시했어요. 그 나사로보고 물 좀 보내라 하세요. 지옥가도 무시했어요. 무시했는데, 나사로 안에 나사로가 들어있던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예요.
현재 우리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가 사실은 우리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겉의 카스테라 밖에 안돼요. 모습이. 그래서 모양은 달라도 존재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모양은 각자 다 달라도 그 성격은 동일하다는 게 있어요. 그걸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보편성. 상당히 말 붙이기가 상당히 힘들어요. 인간 말이 서로 대비되는 다른 내용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려하면 인간 말인데 그 같은 내용이라도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정도가 아니고 차이나는 정도가 아니고 대치가 돼요. 서로 충돌을 일으켜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대치되는 그것을 찾아내고 발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고 십자가 피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피가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행위 또는 행함으로 이걸 성경에 있는 용어로 바꾸어서 그걸 십자가한테 가게 하면 그게 자기 의가 되고, “주님이여, 그 기도하는데 사실은 얼마나 애를 썼다고요. 저거 아까운데. 저게 있어야 내가 보너스 받는데.” 그것마저 죄로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십자가 용광로 앞에 풍덩 잠기면 그게 죄로 빠지는 겁니다.
나의 진수. 나의 진짜 내가 정말 요건 놓치기 싫은 것. 정말 이것은 주님이든, 누구 앞에서든 착하다고 인정받을 증거물 있잖아요. 그걸 자석으로 쏙 뽑아내십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요렇게 파인 자리에 십자가가 더 많이 와버리면 요 자리가 더 많이 파이겠지요. 요 파인 자리에 항상 자기 의가 새롭게 생산된 창고입니다. 점점 파이겠지요. 점점 더 파이는 거예요. 남들은 모르는 자기만이 꼬깃 꼬깃 갖고 있던, 나 이거 죽으면 나 자살할거야. 그 무엇. 자살하는 사람이 결국 뭐가 없어서 자살해요? 이렇게 십자가 능력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요기에 있는데 이게 남한테 들켜버리니까 남이 보는 데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한테 죽음을 당했으면 자살 안 할 건데 주님한테 자살 안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했는가 거기에 자꾸 생각해보니까 결국 이 안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이 안에 행복이 담겨있고 그 행복은 누구를 위한 행복이냐 하면 바로 only you~~ 오직 나만을 위한 행복이에요. 나만을 위한 행복. 나이 많으면 자식도 귀찮고 다 귀찮은 거예요. 오직 나만을 위한 행복을 끝까지 쥐고 있어요. 끝까지. 우리가 이렇게 할 권리자가 없어요.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계약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님이 방치할 수가 없지요. 앞에 뭔가 굴 파는 로봇처럼 기어이 파고 들어갑니다. 앉아서 주님께서 조종하고 있어요.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파 보아라....
그럼 마지막에 자아가 있어가지고, 자아가 신으로 있거든요. 왜냐 하면 산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아가 신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여 살았기 때문에 이만한 자아가 어디 있느냐, 나정도 되는 자아가 어디 있어. 이렇게 하다가 벌써 끝까지 쳐들어와요. 여기 있네. 죄인 괴수 여기 있다! 쳐들어와가지고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뻥하고 뚫리지요. 뚫리게 되면 허! 허! 그냥 웃지요. 또 다 강탈하였구나!
도적같이 온다는 말 알지요? 주께서 내가 귀하게 여기는 걸 다 털어가 버립니다. 귀한 자식 죽고. 귀한 남편 죽을 때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 목사라도 정신이 나가버려요. 나는 못 산다. 같이 죽자. 죽자. 죽자. 죽여라! 차라리 날 죽이지. 세월호 네월호 간에 젊은 날에 자식 죽고 난 뒤에는 더는 못 산다. 다른 가족이 엄마 우리 있잖아요. 필요 없다. 필요 없다. 죽은 자식 말고 우리가 있잖아요. 나는 가 없이는 못 산다. 가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데. 엄마, 권사님이잖아. 목사가 위로할 말이 없네. 목사 입에서 하나님 소리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래. 그렇게 나한테 그래. 내가 십일조 다 바쳤는데. 십일조 대가가 30배, 60배, 100배 이게 대가냐?” 손가락질 해대가지고 옆에 권사가 목사님 오늘 안되겠습니다. 다음에 나하고 가실까요. 완전히 뒤집어지지요.
나이 많은 부모 돌아가시면 흐흐헤헤 좋아라 웃고. 부조금 세고 좋아하지만. 젊은 아 죽어버리면 이건 혼절합니다. 혼절. 정신이 나가버려요. 서서히 우울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우울증이 뭐라고 했던가요? 외로움. 외로움이 뭐했습니까? 너무 그동안 얽히고설킨 관계성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끄집어낼 때는 칡뿌리 끄집어내면 칡뿌리만 달랑 하는 게 아니고 칡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가는 뿌리가 두두두두 다 떨어지지요. 그게 얼마나 아파요. 얼마나 아픕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이 정말 우리로 하여금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외로움을 우리한테 허락해줍니다. 외로움. “그러면 목사님,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가짜 색출작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정보로 알았는지 아니면 진짜 발치한 곳에다가 주님이 뽑아내고, 뽑아내고 뽑아낸 주님께서 자기 피를 거기다가 쏟아 부어서 하나의 피로 만든 새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환란과 곤고와 핍박, 기근과 적신과 위험이나 칼이 이게 와야 돼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야 된다고요.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복음 이야기하게 되면 너무 부정적이다. “너무 부정적이고, 다 말은 맞는데 사람이 그래가지고 힘들어 못 살지. 그리 살면 사람이 행복하냐?” 행복론이 나와요.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러면 선교사로 갈까? 파키스탄에. 또 나름대로 제일 낮은 거. 선교사 가고 그러면 북한에 들어갈까?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북한에 들어가야 됩니다.” 가르치는 동네가 있어요. 4자입니다. 복음학교. 김용희 선교사. 아주 주의해야 될 동네에요. 이 동네가. 아주 주의해야 될 단체에요. 신천지만 나쁜 게 아니에요. 이 복음학교. 한국교회 썩었다. 복음만 전해야 되는데 복음은 안전하고 교회만 전하더라. 그러니까 기존교회가 야! 여기 복음 있구나! 다가요. 한 번씩 안 갔다 왔습니까? 복음학교에. 처음 들어요? 복음학교하고 비슷한 데가 김성수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보기에 바뀔 가능성은 없고 최고의 복음을 듣는 거예요. 최고의 복음. 정말 낮아지고 더 낮아지고. 가장 복음다운 복음을 내가 정보를 소지함으로서 죽을 때 담박 끄집어내놓으면 주님, 나 이거 믿습니다. 하고 내놓으면 패스가 되겠다는 거예요.
내놓으면 그게 죄가 돼요. 왜? 내놓는다는 그 행동이 행함이 되고 내가 이 정도로 나를 유지하려고 경건하게 유지하려고 이 정도까지 제가 낮추고 낮춥니다. 하는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뽑아내어야 되는데 주님이 뽑아내는 게 아니고 진짜 안 뽑힐 것은 따로 챙겨요. 그건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존재를 위해서 고거 놔두고. 자기가 뽑아낼 것은 미리 주님 손에 담아주는 거예요. 요거 가져가시고. 이것까지 낮춥니다. 이것 가져가라는 거예요. 주님의 집게가 그걸 받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보자. 더 나가지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의 특징은 우발성이에요. 우발성의 특징은 뭐냐, 예측 못합니다. 예측 못하고 우발성할 때 사람들은 이리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망가지고 부서지고 불나고 사업 망하고 부도나고 애 죽고 이런 것만 생각하는데 성도는요, 하루, 하루 사는 게 예측 못함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로또 될 수도 있고, 땅을 사놨는데 갑자기 10배 오를 수도 있고, 그것도 하나의 예측 못함이에요.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건과 우발성, 예측 못함은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처음에 제가 인간은 주님한테 계약되었다 했지요. 그럼 내 몸이 아니고 계약을 보여줘야 될 그런 몸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계약 때문에 주께서는 있는 사람을 흔들어버렸어요. 왜냐 하면 계약은 니가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다가갈게. 내가 찾아갈게. 이리 되거든요. 찾아올 때 우리는 내 인생은 내 인생.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는데 뒤에서 모든 것이 땅도 흔들리고 내 인생도 흔들리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한테는 뭐냐, 사건으로 우발성으로 예측 못함으로 오는 거예요.
그럼 예측 못함으로 온다면 이 사건이 오기를 우리가 예측해야 됩니까? 예측하지 말아야 됩니까? 예측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냥 막사는 거예요. 그냥 막. 그냥 살다보면 살다가 뒤돌아보면 전부 다 주께서 주신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은혜의 사건. 고마움. 감사함. 그겁니다. 청바지를 찾을 때 단박에 찾을 수 있는데 온 천지를 다 휘 집어 뒤집고 아 붙들고 둘 다 울게 만들고 고 가까운데 있었던 걸 청바지가. 왜 그런 사건을 유발합니까?
우리의 토할 것, 발치할 것 다 발취하고 평소에 안 무서워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뒤돌아보니 화딱지 나고 뒤돌아보니 쓰레기통 같고 인간이 인간사는 것 같지도 않고 지겨워 죽겠고. 이걸 다 폭로시키고 그 때 여기 있네! 뭐예요? 돌아보니까 나라는 것은 없고 그냥 주님이 유발한 사건에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생 자체가 껍데기로.
껍데기로 사니까 앙꼬가 되지 마세요. 제발 부탁하오니 껍데기는 껍데기로. 어떤 유튜브 보니까 동영상보니까 4살 먹은 아가 초코렛이 좋으냐, 껍데기가 좋으냐, 했더니 껍데기 그래요. 돼지 껍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요. 이유가 뭔가 하니 할머니가 애를 키우면서 돼지 껍데기를 좋아하니까 애가 껍데기를 먹고 살았어요. 우리는 돼지 껍데기에요. 그것도 비싸겠지만 어떻든 간에.
그 다음에 이제 무엇을 채웠지? 우리는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하게 되면 그게 대비가 돼서 문제라. 사건은 예상 못하게 와야 되는데 자꾸 예상해버리면 그래서 제가 늘 평소에 하는 게 목적을 만들지 마세요. 하는 거예요. 목적을. 열심히는 살되 목적은 만들지 마세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한 적 있는데. 사람들은 참 헷갈릴 거예요. 목적이 없으면 그러면 그냥 놀까요? 이리 되거든요. 목적이 없으니까, 목표가 없으니까 그냥 놀면 되겠네. 하는 것이 평소에 얼마나 우리의 모든 행동이 목적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완전히 티가 나는 겁니다.
목적은 주께서 우리를 하게 만들어요. 계약이 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루, 하루일이 주어져요. 우발적으로. 엄마 청바지 어디 있어? 이렇게. 뭔가 자꾸 할 일이 주어진다고요. 가만히 있는데도. 오늘도 뭐 별 다 무탈하게. 무탈 같은 소리하고 있네. 차가 막혀서 골목에 못 들어온다던지. 전혀 예측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5분이나 지체하고. 그 때 할아버지 오토바이 타고 안 갔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그러니까 돌아보면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말이 맞아요. 우리는 목적을 만들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잘 들어야 돼요.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는 목적 만들고 대비합니다. 이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너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알아서하니까 너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 때 그 때마다 일감을 줄 거야. 니는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이게 사도바울의 가는 길이었거든요. 주께서는 니는 염려하지 마. 너는 로마에 가야된다. 모든 흔적들이 그야말로 사도행전이잖아요. 사도들이 갔던 행적이 시킨 대로 한 거예요.
그렇지만 사도바울 본인도 항상 행동할 때는 본인의 목적이 우선됩니다. 이리하면 안 되지, 저리하면 안 되지, 이건 조심해야 되지, 이건 이렇게 해야 되지, 이건 보통인데, 특이할 경우에 빌립집사의 네 딸인가 와가지고 허리끈 풀어가지고 “당신이 가면 이렇게 잡힙니다. 성령께서 알려줬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는데 갈게.” 나도 아는데 잡혀야 되겠다. 잡힌다는 걸 가지말라, 고 해석했는데 잡히니까 가야된다고 사도바울은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상황이 동일한 상황이에요. 해석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살아서 행복한 쪽으로 가느냐, 그쪽은 그쪽 해석이고 우리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왕 이리 사나, 저리 사나, 늙어 죽어 사나, 그냥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니까. 늘 어떤 우발적인 사건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소멸되고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보이게 하는 쪽으로 주의 일을 그렇게 처리합니다.
몇 일전에 있었던 예인데요. 교회 일이 있어서 갔다가 집에 오는데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몇 년간 했기 때문에 비밀번호 잊어버릴 일은 없고. 두 번째 했는데, 세 번째부터는 스마트키가 열리지를 않아요. 마침 나한테 대기만 하면 열리는 키가 있어서 열고 들어갔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요. 고장 났구나! 고장 났던지, 건전지 나갔던지 둘 중에 하나로 생각했는데. 아내가 일 나가고 저녁 늦게 올 때가 되었어요. 나는 기다렸지요. “여보, 열어줘”하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렸는데 띵띵띵띵 소리 해봐도 소용없다니까. 몇 번 해도 안 된다니까. 뜨리링띵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오! 이상하다. 이상한 거예요.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아내가 있으니까 내가 밖에 나가서 문 닫고 해보니 또 안 되는 거예요. 아~ 골치 아프다. 왜 안 되지? 왜 아내는 되는데 나는 안 되지? 불렀어요. 비상키 들고 나와서 아내가 해봤어요. 아내는 돼요. 나는 또 안돼요. 딱 보니까 밑에 번호가 이쪽 자리인데 다른 자리로 한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열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계속했던 그 번호라도 어떤 자리에 넣어주면 된다 하는 이것도 내가 잊어버린 거예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나는 나 홀로 살 수 있다. 가 안 되고 나 혼자는 집에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이걸 통해서. 내가 실수를 안했으면 나는 항상 나는 나 혼자 살아. 주께서 붙여주는 사람 없으면 일이 안되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다음부터는 번호도 잘 알게 되면 건전지약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앞으로 내가 번호를 적어가지고 다니면 열린다. 라는 보장은 없어요. 왜냐 하면 건전지 나갈 수 있고, 진짜 고장 날 수 있고 그럴 땐 그걸 또 벌벌 떨라는 말입니까? 공포심에 쌓이라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이미 공포를 지나오면서 내 주체가 달라졌다면 앞으로 무슨 사건도 주님께 의미를 담아서 나한테 이런 유발시킨 사건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형편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 형편대로 살면 돼요. 고장 나면 고치면 되고 약이 떨어지면 건전지 넣으면 되고 그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내가 하면 나의 의가 되지만, 주께서 하게 되면 나는 못났다. 나는 못났다가 계속 증명이 되지요. 내가 못난 자 라는 것. 혼자 일하면서도 절대로 혼자 일한 게 아닌 거예요. 내가. 주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신 것은 행복하게 살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라고 오늘도 하루, 하루를 살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진동해서 파이게 만들고 발치하게 만들고 뻥하고 뚫리지요. 그럼 우리는 그냥 웃지요. 웃으면서 나는 어떤 존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죽어도 아무 미련가질 이유가 없어요. 또 살게 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살게 해서 주께서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건 이론이고 실제로는 눈뜨면 허허가 아니라 헤헤. 허허가 헤헤로 바뀌어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보람찬 하루 일과를 열심히 살아야지. 애는 내가 키운다. 우리 가정은 내가 책임지고. 촛불 켜고 또 하야하라 들어가는 거예요. 이제. 또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나라는 내 나라. 나는 행복! 복음의 정보를 아니까. 또 다시 평범한 나는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하고. 벌써 히브리서12장 다 잊어버렸어요.
진동하고, 뽑아내고, 예수의 피 집어넣고 다 잊어버리고 “나는 그거 아는데요.” 이래가지고 또 헤헤거리며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는 안 죽어야 돼요. 왜?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흙에 속한 형상은 사라지고 내 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이 흙의 형상을 대신해서 새로운 형체로 몸이 될 때까지 주께서는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는 말은 어디서 합니까? 그 사람은 날로 후패하는 걸 짝을 이루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 하는 것은 잊으세요. 행복은 없습니다. 행복이란 말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져요. 행복은 찾지 마세요. 니나 잘하세요. 행복은 너희들 찾으세요. 우리는 행복 찾지 맙시다. 그러나 교회가면 전부 다 설교가 행복 쪽이에요.
“여러분이 불행한 것은 말씀 안 지키고 헌금 안하고 교회 봉사 안하고 목사 안 섬겨서 불행해지니까 이번 차에 깨달아서 여러분이 잘 섬기시면 여러분의 떨어져나간 소유를 금방 회복됩니다. 여러분이 행복 됩니다.” 그런 쪽으로 결론이거든요. 그런 걸 하면서 이제는 그게 왜 아닌지를 아셔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28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진동치 못할 나라를 언제 받았습니까? 받았은즉, 이라고 되어있는데. 받기는 언제 받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아벨의 피 시대에서는 구약이지만, 새 언약이 신약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속에 이미 진동치 않을 영원한 나라가 그 요소가 우리 안에 채우게 됩니다. 여기서 은혜로 주어지는 거죠.
은혜로 주어지게 되면, 은혜로 받았은즉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라. 여기에 두려움이라 하는 것은 대상이 달라요. 옛날에는 내 것 다칠까봐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주님의 하는 일에 엄청남. 그걸 지고함. 엄위함. 엄청난 규모. 엄청난 본질. 거기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에 하나님을 어떻게 한다? 기쁘시게 섬길지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엄청남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죠. 이걸 쉬운 말로 고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바꾸어버리면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된다는 거죠.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바꾸는 것을 다른 문장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껍데기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분이 질문할 겁니다. “목사님, 아무것도 아닌 것하고 내가 죄인인 것하고 차이 납니까?” 결국은 차이 안 나는데 사실은 과정적으로 논리적 과정이 차이 많이 나요. 두 문장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 되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가 나를 이미 점령해버렸어요. 아무것도 아니다가 점령해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속에 이미 포함이 된 상태에요.
그런데 “나는 죄인이다.” 되어버리면 내가 응시하고 있어요. 누굴 바라보고 있어요. 시커멓게 된 나를 바라보게 되면 자칫하면 내가 죄인인 걸 알았으니까 나는 그만큼 똑똑하잖아.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똑똑한 나는 온전한 죄인은 아니지요. 똑똑하니까. 똑똑한 게 왜 죄가 되지요? 똑똑한 것은 총명한 거고 그것은 의로운 거죠. 선한 거니까.
선한 내 모습이 나를 죄인으로 본다면 죄인은 하나의 임시방편에 불과한 겁니다. 죄인인 척이 되어버려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헤헤~ 나는 뭐가 된다. 나는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나는 의인이 되는 수단이 되어버려요. 나는 어떻게 하면 의인될까? 아!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내가 의인되는구나! 수단이 되어버리면 나는 죄인을 경유해서 결국 의인되니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의 목적이 있어버려요. 나의 노림수가 성사되어 버린 거죠.
그런데 평소에 살다보면 나는 죄인이다. 이게 ①번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②번이라면 ①번 생각이 많이 들던가요? ②번 생각이 많이 들던가요? ①번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차, 이거 실수했구나! 목사님 설교에 의하면 나는 죄인인데 뭐~. 죄인이니까 죄 짓지 뭐~. 그냥 넘어가버려요. ①번 생각 드는 것은 충분하게 당연한 겁니다. ①번은 ②번을 들어오라고 일으켰는데 ①번에서 곧장 ①번으로 도로 돌아와 버리면 안 되지요. ①번에서 아하~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러면 ②번으로 가는 과정에서 뭐가 나오느냐, 여기서 생유! 감사가 나와요. 감사가. 주님 고맙습니다. 가 나와요.
이렇게 무거운 짐을 한방에 없이 만드니까 감사합니다! 자식이 만약에 수능치고 있다. 창살을 붙들고 엿 붙이면서 기도한다고 칩시다.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어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천주교 신자 같으면 묵주 이렇게 잡아당겨가지고 하고, 기독교 신자는 성경 펴놓고 QT하는 선행을 그 시간에 맞춰서 QT가 추가로 또 들어가요. 그걸 경상도 말로 단도리라고 합니다. 단도리. 단단히 더 결속을 더하기 위해서 하는데.
하다보면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 못난 걸 보지 마시고 자식이 어떻게든...” 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해버리면 ‘아하~ 요 지식 꼼수구나!’ 이게 꼼수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이 자식을 낳게 하셔서 19년 동안 키우게 하셔서 요런 꼼수가 내 마음 속에 깊이에다가 또 깊이, 깊이에다가 또 깊이 있게 담겨있다는 것을 수능 치는 날을 통해서 결국 내가 주님한테 발각당한 거예요. ‘아~ 꼼수구나!’
내가 이렇게 QT하게 되면 뭔가 애한테 성적이 더 오른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면 생각만큼 만의 정도는 나오지 않겠느냐 또 주님하고 협상을 해요. 타협을. 내가 더 달라하면 도둑놈이지요. 하지만 생각한 만큼만 하게 해주세요. 생각한 만큼만 하면 애들 다 100점 맞습니다. 그날 생각 안 나서 문제지. 그저 찝은 것만 몇 개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런 짓거리 하는 것이 여전하게 이게 나의 껍데기인데 껍데기가 나의 본질마저 커버 할 정도로 덮을 정도로 내 일생이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것도 하면 안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또 자기의 이런 멘트가 장점이 되고. 엉망진창이니까 이걸 하나, 안하나, 이걸 안한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또 애 수능 치면서 발각 당했습니다. 하면서 마지막에 나온 게 뭐다?
“주여, 자식 덕분에 내가 또 내 자신을 또 압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까 QT 한 번 더한 거 고려해주시고 가만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기이하게도 천국 가는 길은 없을 겁니다. 주께서 간섭해 주셔서 천국 간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매일 매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