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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61209a (세상사랑)-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서울 의존교회 161209a (세상사랑)-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다 아시죠? 설교할 때, 누구한테 증거 할 때 모든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장, 또는 2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1장에서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복음이라면, 그리고 성경 전체가 복음에 집중되어 있다면, 성경은 사람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믿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성경을 준 겁니다. 믿고 천국가라고 준 것이 아니고, 천국에 막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죠. 성경을 보면서 일단은 ‘아, 이래서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구나!’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제파악을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일이 그 사람에게 도달된 거예요. 그렇게 도달이 되었으면, 그 사람은 본인의 기대나 의사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도달한 복음의 능력으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민다고 해서 인간이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잡는 것이 아니고 뿌리치게 되어 있습니다. 뿌리치게 되어 있는데 끝까지 주님께서는 손을 잡죠. 그 손이 어떤 손이 되느냐 하면 피 묻은 손이 되는 겁니다. 피 묻은 손이 도달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원인제공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럼 그때부터는 어떻게 내가 하는 행동들이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점잖고 예의바르고 교양 있는 행동인데 그게 어떻게 예수님의 피 묻은 행동일 수밖에 없는가? 이미 관계가 설정되어 있죠. 예수님의 피로써 나타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고, 그리고 피 묻은 손이 능력이니까 우리가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냥 찾아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된 그런 근거로써 작용하게 되죠. 이 관계가 이미 연결이 되었습니다. 형성이 되었어요. 그 형성된 그 안에다가 모든 성경을 다 집어넣어야 해요. 그래야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이 되는 것이 윤곽이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었다, 근데 피 묻은 손이다, 우리가 여기 있다, 예수님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에게 오게 된 이것만이 십자가 복음이거든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자진해서 미련하고 어리석게 행동할 인간은 없죠. 나는 뭘 해도 미련하고 어리석기를 원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지 않기를 원하죠. 어리석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가는 길은 없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그 피의 내용이 우리한테 도달될 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도달되는 거예요. 미련하고 어리석게 도달되면 우리는 주님 쪽을 보는 것이 아니고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딴 곳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이러한 모든 마음과 행위가 피를 흘리게 했다면, 그리고 이 관계가 유일하게 구원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성경내용은 전부 다 어떤 경로를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피로써만 구원하는 것에다가 다 투입하고 투입해야 됩니다.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피에다 다 집어넣어야 해요.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집어넣는다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춰볼 때에,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똑똑함이죠. 현명함. 다른 말로 하면 경건함, 착함, 순수함, 우수함, 뭐 이런 것들이에요. 그리고 보니까 오늘 애가 없네. 뭔가 다르다 싶었는데. 이런 관점에서 자기를 똑똑하게 만들고, 현명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들고, 착하게 만들고, 순수하게 만들고, 우수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들고, 값어치 있게 만드는 이런 모든 것들로 성경이 여기에 쏠리도록 되어 있어요. 성경을 인간에게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배격하고 반발하고 반항하는 그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준 겁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이젠 성경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겠죠?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눈이 두 개의 눈이 있어요. 하나는 인간이 보는 눈, 또 하나는 예수님이 보는 눈. 인간이 보는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자꾸 확대시키고 그걸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이렇게 보게 되면 굉장히 단순화되고 간편하고 간단해요. 어떻게 간단하느냐 하면, 자기가 성경을 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해석을 해나가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굉장히 편하죠? 이미 이런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면 구호가 이렇게 돼야 돼요. 보다 어리석게! 보다 미련하게! 표어를 그렇게 해야 돼요. 보다 어리석게! 보다 미련하게! 더 위대하게가 아니라 보다 미련하게! 그렇게 하는 거예요. 평생을 어리석고 미련하게 사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산다는 것은, 이거는 행복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어요. 어리석고 미련하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남보다 더 똑똑하게 보이려는 쓸데없는 오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니는 똑똑해라. 나는 어리석을란다. 니는 현명해라. 나는 바보처럼 살 거야.” 그런 식으로 사는데, 그냥 바보처럼 사는 사람도 있죠. 노래에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기준이 없고.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보가 되고,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영구 없다~는 식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부터 우리가 본문을 가지고 계속해서 질문을 해대면 되죠. 질문을 하게 되면, 이게 질문 자체도 어리석고 나오는 답변도 어리석은 답변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한 편안감과 안정감과 즐거움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첫 번째 질문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디모데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을 버릴 위인을 왜 처음부터 마치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붙여줬느냐 하는 거죠. 근데 이 질문이 어떤 질문이죠? 어리석은 질문이죠. 근데 우리의 질문은 어리석은 것 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아니 처음부터 천국 못 갈 사람을 왜 붙여줬느냐 이 말입니다. 헷갈리게. 마음 쓰게 만들었느냐 이 말입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통역자에요. 오늘 본문에는 데마라는 사람이 사도바울을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도바울은 누가 의사와 데마가 내편에 속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라고 하는 그 우리 속에 누가도 들어있고 데마도 들어있는데, 이렇게 우리가 골로새서 너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있느냐고,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을 볼 때 사도바울만 보지 말고 데마와 누가도 사도바울과 함께 복음을 아는 사람으로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골로새서 4장 14절에, 하나님의 계시 책에서, 성령이 임한 계시 책에서 나와요. 그럼 이 당시에는, 골로새서가 언제 썼냐 하면 로마에서 옥에 갇혔을 때거든요. 옥에 두 번 갇혔습니다. 처음에 옥에 갇혔을 때 썼다 이 말이죠. 그걸 옥중서신이라고 하죠. 그렇게 했으면 누가 들어도 이 데마는 사도바울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고, 사도바울과 끝까지 가서 천국에 합류할 사람이고, 동역자고, 통역하는 사람이고, 이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이거든요. 사도바울의 사역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게 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 했죠. 왜 떠났냐 이 말입니다. 떠날 필요가 없는데 왜 떠났느냐 이 말입니다. 나중에 떠날 사람 같으면 처음부터 함께 안 해서, 헷갈리지 않도록, 혼동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아무래도 우리 편이야.” 이렇게 안심 푹 시켜놓고 왜 뒤통수치느냐 이 말입니다. 이 질문 자체가 무슨 질문이라고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어리석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 똑똑함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구원 받을 사람은, 복음 전하는 사람은 사도바울과 함께 있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세상으로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워낙 위력이 있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이기 때문에, 사도바울과 함께 협력했는데 나중에 세상을 사랑해서 사도바울을 배신 때리고 세상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데마가 사도바울을 떠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왜 처음부터 붙여 줘가지고, 이 골로새서 4장 14절 같은 경우에는 문안하라고 해가지고 누가 뭐래도 데마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골로새서 온 교인들로 오해하게 하는 그런 혼선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물을 수 있죠. 근데 그 질문이 무슨 질문이라고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어리석든 말든 간에 그 질문밖에 할 게 없어요. 왜, 그 질문밖에 할 게 없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 안지 10년 되었다고 하면 내년에 세상을 사랑해서 떠날 수도 있잖아요? 왜? 데마도 이랬으니까. 우리는 그냥 복음 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설교 듣는 사람이지만, 데마는 사도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이에요. 전파하는 사람이 이렇게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하차한다면, 그러면 사도바울 본인은 천국이야기 했는데, 본인은 천국 갔느냐 이 말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잖아요.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사도바울 본인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발언을 데마도 평소에 했을 것인데, 데마는 왜 탈락했느냐? 다시 한 번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요약하게 되면, “목사님, 어떤 경우에 탈락합니까?” 결국은 이 이야기에요. “어떤 경우에 복음을 알고도 탈락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거든요. 그럼 그 질문을 왜 하십니까? 행여 나도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럼 제가 묻죠. “왜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요?” “내가 곤란하잖아요.” 본인이 곤란한 것과 성경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본인이 왜 안 곤란해야 되죠? 본인은? 본인은 왜 안 곤란해야 돼요? 본인은 왜 탈락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까? 그 질문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리고 그 답변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시할 수 없죠. 탈락입니다. 탈락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하나의 정보로 아는 거예요. 세상의 여러 가지 정보 중에서, 아니 이것도 천국 가는데 도움이 되네! 하고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내 것 만들어놓는 거예요. 내 것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뭐냐, 내가 만든 내 것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 결속을 더하는 겁니다. 나는 복음을 안다, 나는 복음을 안다, 맨날 애들이 시험 칠 때, 시험 직전에 막 외우는 것처럼. 훈민정음 누가 만들었고 하면서 외우는 것처럼. 나는 복음을 안다, 십자가복음이다, 이러다 치매 걸리면? 그러면 탈락해버려요? 어떻게 돼요? 복음이 전에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복음을 알아서 내 것 만들어버리면, 내 소유 만들어버리면, 내가 소유한 복음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그 아이디어, 탈락입니다. 그게 바로 탈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천국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정보를 알 때, 성경에 나오는 정보를 획득해서, 괜찮다는 것은 다 주섬주섬 모아서 끌어안고 있으면, 이게 구원이라는 것이 될까? 그게 가당치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느냐, 복음은 인간들이 선호하고 나한테 유익하라고, 나한테 도움 되라고 끌어 모으는 그런 식이 바로 주님께서는 복음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아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그런 사람들이에요.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이 되리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고 할 때에 열두제자들은 주께서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탈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했죠. 근데 그 생각이 자기 구원에 아무런 연관이 안 돼요. 관련이 없는 생각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예수님의 피 묻은 손이니까,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열두제자가 있다고 합시다. 열두제자나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을, 멘트거든요. 문장 또는 언어가 나왔을 때, 이 사람들은 여기에 마중을 나왔어요. 그 단어가 인간들의 단어기 때문에. 마중을 나가면 이미 여기에 공용되고, 소통되는 무슨 의미군意味群이 있어요. 그룹. 형성된 의미의 그룹이, 의미의 장場, 의미의 필드field가 형성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의미를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의미를 가지고 마중을 나온다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피에서 나오는데, 예수님의 희생, 피에서 사랑이라는 멘트를 날렸는데, 이 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릴 정도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이 의미군, 언어의 단어 내용에 이게 전혀 들어있지를 않아요. 이쪽, 인간 쪽에 없는 의미를 주께서는 단어를 사용한 거예요. 근데 같은 단어니까 인간들은 납득이 되고 이해된다고 생각해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의미를 가지고 이걸 덥석 물은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주님은 인간을 버립니다.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구원은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축출하고 딱 한명만 남아야 돼요. 한명만 구원이 돼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은 인간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인간의 숫자를 단 한 명의 본질로서 다루거든요. 모든 인간이 많더라도 그게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라 말이죠. 아담 한 사람이 담고 있던 그 질, 성질을 가지고 모든 인간에게 전부 다 골고루 차별 없이 분배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차별 없이 분배하는 그 안목은 오직 한 사람의 안목에서만 이게 출발을 해야 돼요. 그런데 아담과 예수님 사이에는 이미 단절되어 있단 말이죠. 하나는 죄고 하나는 의니까. 이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끊어졌잖아요. 그런 입장에서는 인간세계에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해도 거기에서는 진리가 안 나옵니다. 진리가 나올 수 없어요. 나올 수 없고 나름대로의 진리라는 것을 형성시킨 겁니다. 나름대로의 진리를. 그걸 가지고 일자라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一者. 모든 의미를 하나로 궁극적으로 모으는 것. 신이죠. 일자一者. 이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종류를 가지고 개념들을 모으고 또 모으고, 추리고 또 추려서 제일 끝에 보면 모든 일어나는 존재와 사건과 사항을 하나의 머리에 담아놓고 거기서부터 쏟아져 나옵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쏟아지는 관계 속에서 인간들이, 나는 신을 버려도 신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한 합당한 이유를 인간들 본인이 가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왜? 일자와 자기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구상하고, 구상하고, 구상하고, 마지막은 논리적으로 신이 나온다면, 신과 나는 연결된 상태에요. 끊어진 상태가 아니라 연결된 상태라고요. 다만 내가 무식해서, 공부를 못해서, 성경을 제대로 몰라서, 신을 못 찾아갈 뿐이지, 내가 이 땅 밑에서 저 위에 있는 하나님께 차근차근히 밟으면 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거는 누굴 탓하지 마세요. 모든 아담의 족속은 다 그래요. 그 찾아가는 단계는 선악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서 다가가는 거예요. 단테의 신곡이라든지, 그리고 천로역정 같은 그런 것들이 대표적인 소설 아닙니까? 밑바닥에서부터 노력하고 역경을 딛고 어떤 유혹도 이겨버리면 결국은 신과 하나로 만날 수 있다는 것. 천로역정의 이야기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나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합니다. ‘아, 참, 지혜롭다. 똑똑하다. 현명하네.’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죠? 복음은 지혜롭고 현명한 것이 없어요.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고유의 우리끼리 납득이 되고, 수용이 되는 논리구조가, 논리단계가 이미 딱 형성되어 있고 우리는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따라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채택한 거예요.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뭐 병도 고치고, 예수님 능력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말씀도 듣고 3년 동안 합숙훈련도 했다고 하잖아요. 합숙훈련 하면서 온갖 기적은 다 구경 했어요. 오병이어부터 물 위를 걷는 것, 심지어 베드로는 본인이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고기 아가리 벌리니까 거기에서 동전 나오고, 귀신 쫓아내는 것은 기본이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했을 때, 철석같이 이만한 분 같으면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일자一者, 최후의 구세주,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나름대로 그렇게 의미를 형성시켜왔습니다. 자기가 탈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탈락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먼저 선행되는 과정이 필요해요. 탈락자 속으로 우리가 되돌아가줘야 돼요. 거기서 벗어나서 주님을 만나기 백 미터 전, 백 미터 전 하니까 뭐가 생각나네요. 200미터 앞, 100미터 앞, 50미터 앞...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 자리를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사랑을 마중 나오라는 말이 아니고, 너의 원래 자리로 가 있으라는 뜻이에요. 원래 자리. 너밖에 모르는, 나만 구원받으면 오케이 하는 그런 사고방식.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한 하나님. 그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되돌아간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4장 14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갔잖아요? 이게 정상이잖아요? 아까 우리가 질문 할 때는 왜 데마는 버렸습니까? 라고 물은 취지가 잘못된 거예요. 데마가 세상 따라 갔잖아요. 우리하고 똑같잖아요. 뭐 이상합니까? 어느 게 정상이냐를 잘 봐요. 어느 게 정상인지를. 지금 사도바울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어느 게 비정상입니까? 어느 게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바로 사도바울이잖아요. 주께서 나를 천국에 넣어준다. 이게 비정상이에요. 이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저주스러운 세상이 아니고,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것이 서로 통용되고 이게 정상적인 생각이라면, 이 좋은 세상을 버리고,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이제는 대통령도 바뀌고 얼마나 좋은 세상이에요? 우리 뜻대로 주님 뜻대로 됐으니까. 이 좋은 세상을 버리고, ‘더러운 세상! 나는 천국이나 갈란다’ 이게 비정상이잖아요. 박근혜가 만약에 하야 안 하고, 만약에 김정은이가 쳐들어와서 공산주의가 된다면, 그때는 ‘에이, 더러운 세상! 주여 저는 어서 천국 갈랍니다.’ 그때는 그러죠. 그게 비정상인 거예요. 뭐냐 하면 이 세상이 고생스럽고 지 뜻대로 안 됐다는 것에 삐져가지고, ‘에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네. 그러면 죽는 것이 낫지.’ 그런다고, 뭐 천국이 지 속 편하라고 가는 곳입니까? 속 편한 내과에요? 속 편하자고 가는 천국입니까? 천국은 못 가요. 갈 수가 없어요.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좀 해보다가 안 되면 천국이나 간다고 해요. 해보다가. 재미있게 살다가 재미없으면 그때는 천국 가야지. 뭐 누구한테 맡겨 놓았어요? 천국을? 누가 보내준대요? 성경을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으면, 이 데마의 심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래야 돼요. “아이고, 데마 정신 차렸네. 데마 인간 됐네. 이제 똑바로 지 정신 돌아왔네.”라고. 사도바울의 말이 전부 다 헛된 말이고, 참 이상한 말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열두제자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마귀 들렸다고 했어요. 마귀.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것, 병 고치는 것은 마귀대장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정상이 아니에요. 율법을 모르는 자고, 율법을 위반한 자고, 요한복음에 다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모세의 법을 다 거슬리는 자에요. 모세의 법이 있는데 지가 뭐라고 모세보다 더 세게 나오는 거예요. “모세는 이혼증서를 쓰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니가 뭔데 말해? 니가 뭔데?” 사람들에게 체포되어가지고 맥없이 죽을 인간이 지가 무슨 권세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럴 수 없거든요. 열두제자가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그건 당연한 겁니다. 열두제자가 정상인이에요. 그 중에 미친 사람은 가룟 유다밖에 없고. 그것도 가룟 유다가 얼마나 양심적인지, 스승의 날 스승 버렸다고 자살하는 그런 착한 제자가 어디에 있어요? 학원 다니면서 선생님이 비밀과외 하는 것을 교육청에 찔러가지고, 선생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받은 보상금 학원 유리창에 던지고 지는 자살하고, 그런 착한 제자가 어디에 있어요? 그야말로 의리 아닙니까? 의리.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은 아무도 구원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도록 주께서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해놓고 성경을 보는 다른 눈이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예수님이 이 성경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 내가 성경을 정상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과 해석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하는 족족이 해석이 달라요. 우리의 출발점은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어떤 기여를 하고 어떤 모션motion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면 얻을 것인가를 잔뜩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1대지, 2대지(말이나 글에서 대강의 내용이나 뜻)해가면서, 무슨 돼지가 그렇게 많은지, 멧돼지가 나오는지, 그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이렇게 하시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빛과 소금이 됩니다.” 라는 요소를 마구 줘요. 그러면 우리는 납득이 돼요. 그게. “우와!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하네. 역시 우리 목사님은 성경 그대로 하시는 분이야.”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대로 하는데 이해된다는 말은 목사나 그 신자나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한통속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게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자, 백 명의 목사가 설교한다면, “여러분!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 고향 데살로니가로 갔고 사도를 버렸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왜 줬겠습니까? 적어도 성령 받은 우리는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맙시다.” 근데 촛불집회는 왜 참석해요? 뭐가 미련이 있어서. ‘그래,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까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지.’ 도대체 뭐예요? 그게 바로 마귀의 설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데마가 사도바울을 따라다녔죠. 통역 일을 했죠. 데마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간 게 아니고 한 번도 세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고무줄이 있어가지고 아무리 천국 문 앞에 갔어도 팅하고 다시 오게 되어 있어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어떤 경우도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성령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관리는, 성령의 지시는 누가 하느냐, 십자가의 능력에서 나오는 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데마는 끝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노릇을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함께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분류라고 해요. 떠날 사람은 떠나고 건질 사람은 건지는. 사도바울 가장 근처에서, 근접해서 분명하게 보여 준 사람이 데마입니다. 데마한테 박수 한 번 쳐야 해요. 자기 역할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에요. 자기 역할에. 이것은 사도바울이 데마의 정체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 본인이 데마의 영혼을 장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누굴 관리하는 입장에 있지를 않습니다. 본인이 본인의 가는 길도 주님이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낼 때 이게 성령세례에요. 성령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총합을 한꺼번에 여기에다가 담아서 자기백성에게 퍼붓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신 총합이 뭐냐 하면 두 개의 세례가 있죠. 하나는 무슨 세례입니까? 첫 번째는 물세례죠.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 속에 들어오신 것이 물세례입니다. 왜냐하면 물세례는 회개할 것이 있는 사람만 들어가요. 근데 회개할 것도 없는 분이 물세례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의 죄를 푹 적시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물세례가 성령세례의 총합이니까 이게 담겨있겠죠. 그러면 우리들이 한평생은 뭐가 돼요? 우리의 한 평생은 아직 경험하지 않아서 몰랐고, 아직 느끼지 못한 모든 죄를 이 땅에서 살면서 겪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겪게 만들도록 이미 지뢰밭을 깔아놓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무슨 죄다? 그게 간음죄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는 것도 이게 지옥 갈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거리라고 다 정해놓았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이게 살인죄가 되는 거예요. 이 말씀들은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처럼 푹 적시고 오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시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로 드러나요? 죄인이 되겠죠. 죄인은 절대로 죄를 믿어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죄를 죄 되게 하는 원인제공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는 죄는 선악과에서 비로소 아는 죄고. 주님의 성령세례를 통해서 아는 죄는 십자가와 니가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죄가 되는 거예요. 선악적인 죄는 뭐냐 하면 자기가 나쁜 짓 했다는 인식이 있을 때만 그게 죄가 되고. 문제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 짓을 안 했으면 선이 되어서 문제가 돼요. 몽땅 죄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가 판정하는 죄는 반드시 선을 전제로 한 죄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운전하면서 옆에 사람한테 욕을 안 하는 건데 욕을 했다. 욕을 안 했으면 선이 되거나 안 그러면 중간 상태가 돼요. 중간상태가 되는데, 욕을 했으면 죄가 되고. 그러니까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중간상태는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럼 평생 중간상태로 살지. 우리 인간들 보기에 중간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낙태했던 아기들. 자식들. 낙태한, 엄마 뱃속에서 낙태된 아이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자궁 안에서 엄마 배를 발로 찼는데, 이중옆차기로 차서, 엄마를 아프게 해서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태어난 적도 없는데? 칼빈은 복음을 몰라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죄를 새로 해요. 죄가 되는 것이 따로 있고 선이 되는 것 따로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지역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목사들은 좋은 거예요. 뭐냐 하면 중간지대 빼놓고,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지적해가지고 회개하고 그 죄를 상쇄하기 위해서 돈만 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동조하고 납득이 돼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티를 내기 위해서는 그 다음부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니까, 착한 일을 해서, 너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착한 일의 양을 늘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는 뭐냐 하면 나쁜 일을 줄이면 되겠죠.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되지만 나쁜 일을 줄이는 것도 되죠. 줄이다 보면 다른 사람하고 이게 뭐가 되게 돼있어요? 경쟁이 붙죠. 착한 일도. 다른 사람은 그냥 헌금 냈는데 옆에 사람은 다리미질을 해서 헌금을 냈다. 그 다음부터 다리미질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손가락을 모으고 꿇어앉아서 기도했다. 얼마나 아픔을 갖고 겸손하게 기도하겠어요. 그럼 나도 손가락에다가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을 때 쓰는 나무젓가락을 끼워서, 고통을 더 가중시켜서, 뼈가 두두둑 소리가 나도록 하면 되겠죠. 그것도 모자라면 기둥 위에 올라가서 도를 닦든지. 이게 바로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선악체제의 수준의 죄입니다. 근데 성령세례에서 오는 죄는 뭐냐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 구원의 능력을 주신 분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왔던가를, 거기에 합류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죄라고 느끼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이 가신 경로를 밟도록 구체적으로 실습을 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관련된 죄가 됩니다. 그럼 주님과 관련된 죄 같으면 어떤 죄냐 하면 모든 율법이 우리를 뭐로 만든다? 죄인 만들었죠. 그러면 주님과 관련된 죄인은 죄 아닌 게 없는 거예요. 죄 아닌 게.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걸 즐거운 죄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죄 아닌 게 없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하게 하신 주님 앞에 순종합시다. 모든 일을. “안 해요. 나는 성도기 때문에 이런 더러운 짓은 안 해요.” 라고 빼지마시고. 그거 뺀다고 더 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닥쳐진 상황에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받아주시면 그것이 주님이 인간 속에 들어왔고, 물세례 받고, 난 뒤에 성령세례 받았죠. 그럼 우리도 똑같이 뭘 해도 죄라고 알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죄에서 뭐를 발견하느냐 하면 그 죄를 씻어주는, 용서해주시는 십자가 피의 위력으로 모든 성경이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증명하기 위해서 뽑혀 나온, 채용된, 하나의 성경 말씀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채용된, 그런 역할극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서? 뭐든지 하면서. 왜? 그 모든지가 내가 추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친절하심으로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 구원 안에 들어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증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세례 받으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나의 구원이란 없습니다. 구원은 공동구원이에요. 그 공동의 대표자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구원받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전함이 있다고 합시다. 그 전함에는 식당도 있고 수병들이 잠자는 곳도 있고 대포도 있고, 평소에는 비 맞지 말라고 대포를 막아놓는 뚜껑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대포 뚜껑에 포함된다면, 그 전함이 구원받는다면 대포 뚜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뚜껑도 구원 되잖아요. “이 뚜껑이 어디서 구원받아?” 이러지 않죠. 대포 뚜껑도 구원받는다 말이죠. 근데 전체 뚜껑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하거든요. 예수님의 덩치. 그럼 예수님의 덩치는 주님이 이 땅에서 했던 기능을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녀가셨던 그 세상과 동일한 세상이기 때문에. 동일한 세상. 주님이 다녀가신 똑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똑같은 상황을 우리 성도에게 똑같이 반복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존재의 위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를 밝히 보여 주게 되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데마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냥 세상으로 갔죠. 잊어버렸을까봐 걱정되는데, 여러분 이게 정상입니다. 세상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박수 한 번 쳐줍시다. 그 다음에 뭐냐, 또 뭐가 정상이냐 하면, 여기 14절 봅시다. 구리 장색,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내게 해를 많이 보였다. 정상인 게 또 나왔어요.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여기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마치 열두제자의 가룟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가룟 유다를 증인으로 세워가지고, 아이고, 증인하니까 지겹다. 증인을 세웠다 칩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이름도 안 들어봤다. 이래도?” 증거자료대면서. “처음 들어봤다.” 이 구리 장색 이 사람한테 얼마나 상처를 입었던지, 디모데전서 1장 19절을 보면 나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절,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이래 되어 있죠. 사단에게 내어 준다고 하니까 꼭 예수님이 누구보고 이야기한 것 같아요? 가룟 유다한테 한 이야기하고 똑같죠. 그러니까 첫 번째 데마는 세상으로 갔고, 이게 정상이고. 알렉산더가 사도바울에게 핍박 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정상입니까?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 핍박하겠어요? 뭔가 심기를 건드렸잖아요. 당신은 죄인이고,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 이게 건드렸다고요. 건드렸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달려드는 거죠. 왜? 니하고 있던 세월이 아까워서. 보복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알렉산더한테 보복을 받았잖아요. 세상 보세요. 얼마나 예수님 때 세상의 반복입니까?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어요. “목사님,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게 없습니까?” 본인이 지금 그런 게 없는 이유가 본인이 지금 데마고 본인이 지금 알렉산더인데 이런 일이 생기겠어요? “목사님, 그런 욕하지 말고 우리는 사도바울편입니다.” 아니, 데마는 그런 소리 안 했겠어요? 알렉산더는 그런 소리 안 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하고 한 패라고 하지 말고, 정말 답답하다. 나는 주님의 원수라고 이야기해야죠. 나는 맨날 주님 앞에 대들고 나는 주님을 피해서 세상으로 달아난 데마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면 지옥 갈래도 지옥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시니까.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 두 번 다시 가지 맙시다.” 목사 지가 세상으로 벌써 갔는데? 지는 성경 마치고 드라마 안 봅니까? 푸른 바다의 전설 안 보는 모양이라. 목사 본인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데마 할 때는 마치 자기는 깊은 기도원에 혼자서 tv끊고, 스마트 폰도 없고, 그냥 도 닦고 살아가는 것처럼. 여러분 tv끊고 스마트 폰 없애고 지리산으로 도 닦으러 가도 장날에는 내려와야 돼요. 왜? 약초 캔 것 팔아먹어야 되거든요. 내려 올 때 맨발로 내려오지 않고 나이키 신고 내려와요. 나이키가 얼만데? 신발 신고 내려오거든요. 신발 살 때 그냥 사지 않습니다. 요새 메이커, 유행이 뭔가 살펴요. 그것은 이미 세상을 살핀 겁니다. 여러분 세상없이는 외로워서 못삽니다. 외로우면 자살해요. 우리가 이만큼 세상 산 것도 세상과 짝했기 때문에, 세상과 더불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웃으면서 살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세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꼭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강제조치에 나서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알렉산더가 됩니다. “주여, 이러시면 주님 더 이상 못 믿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십일조 갖다 냈잖아요? 그거로 우리 퉁 칩시다. 왜 이러십니까? 이러면 저는 진짜 못 살아요. 이러면. 자식 키워야 되고, 아파트 부금내야 되고,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못삽니다. 내가 예수도 아니고 사도바울도 아니고, 신앙 없는 사람에게 더 무리하게 밀치면 자빠집니다. 더 무리하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변명하는데, 그거는 설교를 복음적이지 않는 목사가 설교를 하다보니까 강한 반발을 했는데, “그냥 막삽시다.” 라고 설교한 이런 목사한테 그렇게 강하게 반발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아니 막살라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그런 반발이 나와요. 너무 꼬아서 해석했는가? 그냥 꼬지 마세요. 그냥 막사시면 알아서 다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어렵지 않아요. 지금 내 두 발이 어디에 섰느냐가 문제에요. 데마에서 벗어나면 어려워지고, 알렉산더가 아니라고 하면 어려워져요. 사도바울은 미쳤어요. 마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미친 사람이라고 보는 것처럼. 사도바울 당시에 사도바울을 미친 자로 본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매일같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언제 성경만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눈만 뜨면 헥헥 거리면서 돈 벌기 바쁘지. 사도바울 언제 좋아라고 했습니까? 어쩔 수 없이 천당 간다고 하니까 성경 한 번 보러 왔지. 항상 사도바울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 마음 적으로, 사도바울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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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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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