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61111b (제사구조)-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 161111b (제사구조)-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대상해체에 대해서 빛의 광채, 복음의 광채가 비춰버리면, 우리가 사리사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 문제조차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사리사욕을 우리가 뺄 수가 없어요. 뺄 수가 없는데 내가 사리사욕을 빼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것도 사리사욕입니다. 하여튼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내가 구원을 받고야 말리라는 그런 고집, 오기. 그런 오기는 그들이 예수님 당시에 있더라도 결국은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어떤 누구도 다 떠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왜 사람들이 사리사욕을 갖고 있을 때에 예수님 말씀을 못 알아들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 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든 복음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제사와 관련되어 있어요. 제사. 제사와 관련된 말씀이 이게 복음으로 오는 거예요. 제사의 핵심은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도 죽일 이유가 없는, 흠이 없는 거예요. 흠이 없는. 죽일 필요도 없고 더 살아야 될 마땅한, 잘 들어보세요. 더 살아야 될 마땅한 그것을 난데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 제사의 하이라이트highlight입니다. 그럼 거기서 뭐가 나와요? 억울함. 분통함이 나오겠죠. 상당히 이질적이라니까요. 죽일 놈을 죽이는 것은, 그거는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에 타고 있다가 땅에 첫발을 내딛고 난 뒤에 그 새롭게 펼쳐진, 물에 잠겼던 땅위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제사였습니다. 그때 제사 드리는 제물을 부정한 제물을 바치지 않고 정결한 제물을 바쳤거든요. 우리 같으면 될 수 있으면 부정한 제물을 소비시켜가지고,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서 부정한 것은 번식을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게 장래를 생각해서 합당한 것 같지만, 정결한 것을 잡아버려요. 그럼 우리 생각은 정결한 것을 잡아버리면, 정결한 숫자가 더 줄어들게 되고, 그럼 악은 득세하고 깨끗한 것은 적어져서 이 세상이 또 엉망진창이 되면 어쩌나? 이런 걱정이 되겠죠. 자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정결한 것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펼쳤어요. 무지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곳은 없다. 무지개가 안 뜨는 곳이 없잖아요. 비오면 무지개 뜨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이 없어요. 북한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 모든 곳에 은혜가 있다. 하지만 무지개의 특징은 인위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이 만들지 못하는 거예요. 그 두 개를 합쳐보면 인간이 만들지 못한 것이 항상 있고 뜻만 있으면 나타날 수 있는 겁니다. 무지개가 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까. 늘 있는데 늘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정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소유해서 좌지우지 다룰 수 없다는 겁니다. 근데 그것은 어디와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더러운 인간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의 죽음, 희생과 관련되어서 이미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큰 텐트, 무지개라는 이름의 큰 텐트를 쳐버린 겁니다. 그럼 인간은 은혜 안에 갇힌 셈이 되죠. 인간은 은혜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계속해서 더러움과 더러움이 숙성돼야 되고 확장돼야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게 방금 이야기 한 제사의 본질에 해당되죠. 노아언약의 제사의 본질입니다. 그럼 제사의 본질과 관련되어서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온다면 우리 성도도 하나님이 벌이는 제사의 구조에 이미 일원으로서 합류가 됐겠어요? 안 됐겠어요? 합류가 됐겠죠. 그게 바로 복음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제사의 완성을 향하여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존재이유는 간단하죠. 주님의 제사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나는 안 바쳤어요.” 이거하기 위해서. “제가 착한 일 안 했어요. 저는 한 것도 없이 구원받았어요.” 이거 이야기하라고. “더러운 제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결한 주님이 알아서 다 했습니다.” 그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제사구조 안에 놓여있다는 그런 안목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비로소 눈을 열어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제사천지예요. 제사천지. 오늘 제목을 제사천지라고 적어놓아야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제사천지라고 하니까, 천도제 지내는 도를 아십니까?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자기는 어떻게 관여했느냐, 6절을 보겠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되어 있죠. 관제라는 것은 제사의 여러 가지 방법인데. 요제는 흔드는 것. 거제는 높이 쳐드는 것. 요제, 거제 이거는요, 주로 어떤 제사방법이냐 하면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있을 때 드리는 제사 때에 그런 폼을 내는 거예요. 흔든다, 높이 든다는 것은, 이것은 너희들이 다이렉트로, 직접 제사장에게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쳐서 이렇게 내려왔기에, 비록 너희들 눈에는 너희들이 준 걸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제사장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먹고 살라고 준 게 아니고. 제사 유지하라고. 제사를 계속하라고 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있어야 제사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제사장의 목숨과 그들의 가족의 목숨은 백성들이 제사의 가치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제사장의 목숨이 까딱까딱 걸려있는 겁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제가 물어볼게요. 백성들이 여유 있을 때 제사를 드렸게요? 아니면 여유 없을 때 제사 드렸겠습니까? 세 번째 둘 다 제사에 관심 없었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다 관심이 없어요. 제사를 이렇게 한다는 것은 우선은 여유 있을 때 드리죠. 일단 자기 것이 있으니까. 자기 것 챙겼으니까. “뭐 좀 줘라. 땅도 없이 불쌍하니까.” 이렇게 하면서 주는데, 만약에 여유가 없으면, “내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의 제사장 살림까지 챙기나?” 이래가지고 안 주고 말아요. 그래서 기근과 적신이 오고 어렵게 되면 그 이유가 있어요. 그동안 제사 드린 것이 건성으로 드렸다는 것으로 들통 나도록 하는, 그런 식으로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이야기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벌써 잊어버렸죠. 구약에 나오는 그 모든 내용이 이스라엘과 적들의 내용이라면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 내부의 이야기라 말이죠. 구약 이스라엘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키지만, 언약으로 지키지만, 저쪽 다른 사람은 선악가지고 언약을 버티는 거예요. 이쪽은 언약이고 저쪽은 선악체계고. 그럼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게요? 생명나무가 들어있는 거예요. 생명나무 열매와 선악과 열매와 다투는 겁니다. 근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했어요? 못 따먹게 했어요? 못 따먹게 했죠. 생명나무가 이미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어요?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이기기 마련이죠. 이스라엘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기는데, 이게 이스라엘의 이김이 아니에요. 생명나무의 이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약적으로 말하면 무엇의 이김이냐 하면 언약궤 자체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언약궤 자체가 블레셋 동네에 다 돌아다니면서 혼자서 다 조졌어요. 혼자서. 이스라엘 군사가 못 이기는 전쟁을 언약궤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다 했어요. 어벤져스에요. 어벤져스. 세상에, 이게 배트맨도 아니고 혼자해도 다 이겨요. 물론 언약궤 바퀴가 달려서 휠체어처럼 밀고 당기고 하듯이 한 게 아니고, 그들이 언약궤를 모시고 간 곳마다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전염병이 퍼지고 죽고 고통 받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는 말이 “도대체 이 상자를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다.” 하고 원주인한테 보내라고 해서 보냅니다. 그걸 인수인계 받으면서 잘못 받아가지고 이거 엉망진창이라. 최순실이 받았던 모양이라. 엉망진창이 되가지고 웃사 같은 경우에 죽고 이러죠. 궤를 붙들어가지고. 다윗이 겁이 나가지고 스톱시켰어요. 이스라엘 나라 다 죽이겠다. 그러니까 블레셋을 죽인 그 언약궤가 이제는 누굴 죽인다? 이스라엘을 죽이는 거예요. 그럼 누구의 승리입니까? 언약궤의 승리. 이 말은 결국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바로 생명나무가 들어있는 겁니다. 생명나무. 제사 드리는 그 중심지에 반드시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는 어디에 들어 있느냐, 지성소에 들어있습니다. 지정된 성스러운 장소에 언약궤가 있어요. 이 언약궤가 있는 곳에 어떤 사람이 상주해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에서 이게 참 어려워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도와주잖아? 아니에요. 말을 그렇게 예수님이 도와준다고 해서는 안 돼요.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해야 그게 복음입니다. 심지어 나도 나를 도울 수 없다. 그래야 예수님의 도우심이 강조되면서 확연하게 드러나죠. 예수님이 도와준다고 해버리면, 나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거든. 나, 아는 사이야. 뭘 박근혜하고 아는 사이라고?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에요? 나중에 그 예수님이 촛불집회로 물러나면 어떻게 할라고? 예수님은 누구하고 결탁하거나 거래하거나 동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면 안 돼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바디~노바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게 성도의 가는 길입니다. 아무도 안 도와줘요. 그래서 사람한테 기대하면 안 돼요. 그리고 나의 행함도 나를 안 도와줍니다. 나의 행함도 나를 안 도와줘요. 이유가 뭐냐고 묻거든, 우리는 제사의 일원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제사구조의 하나의 파편이기 때문에. 제사는 그래야 돼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도움을 받고, 우리가 은혜를 받고 있어요. 언약궤는 상자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일 년에 한 차례씩 제사장이 들어갈 뿐이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약궤가 힘이 없어서 불 탄 것이 아니에요. 언약궤가 불 탄 경우에는 언약궤의 본질이 인격화되기 때문에, 더 이상 상징으로, 나무궤로 있을 그런 표상은 부셔버려야 되고 깨져야 돼요. 필요치 않아요. 그림자는 없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실체니까.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형상은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날아간 그 실체를 진짜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언약궤가 우리에게 승리하게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마땅히 그거는 패배해야 하죠.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언약궤 가지고 나와! 뭐 언약궤에 기관단총이 열대가 포진되어 있는 것처럼. 언약궤 가지고 나와! 아무리 블레셋이라도 언약궤 가면 우리가 승리한다고. 언약궤 덕분에 누가 승리한다고요? 본인들이 승리하죠. 그런 언약궤는 없습니다. 언약궤만이 승리해야 되지, 언약궤 덕분에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영광 받아야지,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우리는 대상해체가 되지 아니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그런 발상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잖아? 우리가 건강한 게 아니고 주님 게 건강해요. 말 똑바로 합시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 게 건강한 거예요. 내가 아프잖아? 주님 것이 아파요. 왜? 죽으라고. 이제 고만 살지? 고집부리지 말고? 주리를 틀어라! 주리를 틀어서 아파요.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할 것 없어. 니는 그냥 주리 틀어서 죽어야 돼! 주리를 트니까 아파서 온 몸에 파스 다 붙이잖아요. 아이고! 죽어 마땅합니다. 드디어 이실직고했네. 풀어줘라! 이제 죄인인 것을 오랜만에 고백했네. 풀어줘라! 아이고! 한숨 쉬게 되었다. 우리는 진짜 매일같이 주리를 틀어야 합니다. 뭐 주리 트는 방법이 막대기하고 발 묶어가지고 양쪽에서 하는 방법도 있지만, 개가 밥을 안 먹는 것도 주리 트는 거예요. 밥 안 먹어서 미치겠다. 이것도 주리를 트는 거예요. 본인 개 아닙니다. 주님의 개입니다. 언약궤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모든 것을 가진 것의 싸움이겠죠. 왜냐하면 선악과 의식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죠. 인간 다 덤벼! 이게 십자가 싸움입니다. 십자가 전쟁은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인간 다 덤비고 아무것도 없는 것 하고 싸움이어야지, 뭐 붉은 십자가 수 놓아가지고 덤빈다고 십자가운동 아니에요. 십자가 전쟁은 아무것도 없는 전쟁이에요. 심지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승리하는 싸움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사무엘이 죽기 전에, 사울은 이미 물 건너갔고. 죽기 전에 이새의 집에 와 가지고 왕을 간택을 하죠. 이새의 아들들을 죽 보는데, 사무엘 본인도 몰라요. 그런데 이새의 집안에서는 이 사무엘이 사리사욕으로, 개인적인 의견에 의해서 왕을 간택한다고 자꾸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무엘이 물어요. “애들이 다냐?” 사무엘도 그런 생각이 들죠. 본 중에서 막내가 괜찮았어요. 하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말립니다. 사무엘아! 그 애가 아니다. 그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꾸 우리보고 실수케 하지 말고 주님이 제대로 알게 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다 아니거든.” 이렇게 하면 얼마나 일이 간단합니까? 꼭 인간을 앞장세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실수를 하게 만들고 난 뒤에, “걔 아니다.” 그럼 없는데? 일곱 명 밖에 없는데요? 일곱 명 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물었죠. “여기 있는 애들이 답니까?” 하니까, 그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중요해요. “걔 하나 있는데 걔는 치지 마세요. 걔는 누가 봐도 걔는 아니에요. 누가 봐도 걔는 아니고 여기 있는 애들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재목을 이야기해주세요. 걔는 아니에요.” 사무엘이 그 애를 한 번 데려오라고 합니다. 참, 일이 되려고 하니까 되지. 양치고 있는 애를 딱 불러가지고 보여주니까 사무엘이 하는 소리가 “걔다!” 딱 기름부음을 줘서 왕이 되고 말았어요. 왕은 왕이 되기 전까지는 다 고만고만한 평범한 보통 인간이에요. 근데 왕이 되면 이미 차원이 달라요. 격리조치 됩니다. 완전 다릅니다.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버려요.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내일 또 촛불집회 한다고 난리인데,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 바탕이 뭐냐 하면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평등하게 가자는 것이 민주주의에요. 근데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개인의 생명이고 재산이고 아예 없는데. 누구 겁니까? 주님 거잖아요. 주님은 한 분이죠. 그 분은 만유의 주요, 만유의 왕이잖아요. 전부 다 왕 되신 예수님 거예요. 왜? 그 분만이 희생자이시니까. 이 제사제도에서. 제사구조에서. 무슨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어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순교하자! 우리 지옥가자! 하고 똑같은 거예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횃불을 들자! 지옥가기 위해서 횃불을 들든지, 촛불을 들든지. 민주주의 자체가 복음적이 아닌데 무슨 거리에서 데모를 합니까? 그 자체가 복음이 아닌데. 존 로크가 이야기한 민주주의, 경제주의의 시작은 내가 한 노동의 대가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노동하라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참새를 누가 키운다고 했어요? 주님이죠. 그러면 참새가 민주주의입니까? 아니잖아요. 참새가 천년만년 삽니까? 그것도 아니죠. 참새가 죽을 때 되면 주의 뜻이 있어서 죽게 될 거고,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주의 뜻이면 팔릴 거예요. 모든 것이 왕의 소유고, 왕의 소유기 때문에 왕 자기 맘대로 처분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하는데 하나님도 관여하지 말라는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내 인생인데 하나님 니가 뭐냐고, 왜 관여 하냐고, 이런 마음이 막 드는 거예요. 그래놓고 교회 와서는 주여! 하고 있다고요. 나의 왕이시여! 도대체 니가 하는 말을 니가 알지 못하도다.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용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예수를 믿으려면 다 믿어야지, 반쯤 발 담그고 이게 뭐에요? “이거까지는 주님 것 하시고 이것은 손대시면 안 되심니더.” 참, 애들 11개월쯤 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잖아요. 애도 돌 다 돼가죠? 그렇죠? 엄마가 길을 그렇게 들여요. 엄마가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를 먹어요. 엄마가 바나나를 방금 먹으라고 해놓고, 그냥 먹게 하면 되는데, “엄마 좀 줘!” 자기 먹을 거 있으면서도. 그럼 애가 줍니까? 싫다는 말을 못하니까 몸을 돌려서 안 주죠. “거봐! 욕심쟁이!” 그게 존 로크의 소유권 이론입니다. 엄마가 애한테 바나나를 줄 때, 애가 손에 압력을 넣어서 바나나를 쥔 자체가 노동이기 때문에, 그 순간 이게 자기 소유가 되어서 이제는 엄마도 함부로 못 뺏고 내 허락 맡아야 준다는 거예요. 이것이 커서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이것. 이게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 바벨탑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겁니다. 이거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고 율법에 대한 공격이에요. 민주주의 자체가. 천국은 왕국이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자, 이제 제사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제사에 있어서 핵심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뭐 양 바쳤니, 양에 안수 했니, 제물 제단에 바쳤니, 그런 인간의 노동은 그런다고 해서 언약궤 더 기뻐하고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언약궤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고속도로 가다 보면 휴게소에 만남의 장소가 많잖아요. 만남의 장소에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은, 이거는 언약궤가 정하지 인간이 자진해서 손들고 나온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가 정해요. 그럼 언약궤가 어떻게 정하느냐 하면, 언약궤 자체는 아카시아 나무 박스, 상자거든요. 이 박스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돼요. 긴 그림자. 그렇다면 언약궤가 자체적으로 자기가 만날 인간을 정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뭔가 전쟁을 벌인다는 거예요. 전쟁.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제가 아까 처음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만이 아니고 무슨 근원? 저주의 근원이죠. 그럼 창세기 15장 1절을 한 번 봅시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했죠. 방패라고 하는 것은 전쟁할 때 쓰는 무기고, 상급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하고 난 뒤에 주어진, 승리자가 자기와 함께 전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제공하는 은사 같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복의 근원과 저주의 근원이 이 땅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전쟁이에요. 이거는 다음 주 수요일에 할 건데, 바로 아브라함이 롯 때문에 소돔과 전쟁을 해야 해요. 전쟁하지 않는 복의 근원은 없습니다. 전쟁하는 가운데 복의 근원이 내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바로 전쟁의 승리자가 된다는데, 그 분이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분이에요. 멜기세덱의 특징이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땅에서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땅에서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니니까, 땅에는 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마치 노아의 무지개 같은 존재입니다. 분명히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이 땅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백날 찾아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여러분, 엘리야의 시체를 며칠 만에 찾았습니까? 못 찾았죠. 다음 중 엘리야의 시체를 며칠 만에 찾았는가? ① 40일. ② 2개월. ③ 3개월. 이거는 출제위반이에요. 출제가 잘못된 거예요. 정답은 엘리야의 시체가 없는 거예요. 엘리야가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엘리야의 기능이 이 땅에 없는 사람의 기능을 엘리야가 덧입은 겁니다. 엘리야에게 결합된 겁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엘리야는 결합되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시체는 없고 불수레 타고 올라갔지만, 엘리사는 본인의 기능은 없고 엘리야에게 주어진 기능의 연장선으로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 연장선의 끝은 뭐냐 하면 엘리사가 죽게 되는데, 엘리사의 뼈에 다른 동기생의 시체가 닿으니까 그 사람이 살아났어요. 십자가와 부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이거는 뭡니까? 바로 선악체제의 극복을, 선악체제가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는, 그 극복되지 못한 사실이 엘리사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그게 극복이 되어서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겁니다. 선악체제에 있는 인간도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차원으로 이게 들어올 수 있음을, 하나님의 어떤 기능가지고 하는데, 그 기능은 이 지상에 없는 존재의 기능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제사가 무엇이냐, 제사라 하는 것은 각종 제물을 가지고, 이런 것은 제가 울산에서 강의했기 때문에 다시 하지 않습니다만,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죽 여기에 동원된 사람이 많죠. 백날 제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동원되면서, ‘아이고, 우리 제사장님 참 잘해. 우리 제사장님 참 훌륭해.’ 라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들의 움직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했으면 인간들의 개인적인 기능인데, 언약궤에서 만날 사람들의 기능은, 이거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기능이 제사장이 부여받고 있는 겁니다. 레위인들이나. 그냥 부여받고 있는 거예요. 좀 더 쉽게 합시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 기능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성도도 사리사욕이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있죠. 인간인데. 그런 인간은 하나님이 안 받아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는 자기가 원해서 만드시지, “저 받아주세요.” 한다고 해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언약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죠. 십자가의 능력이 자기 원하는 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사리사욕 하는 인간에게 오되, 여기에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기능이 주어지죠. 그 기능은 보이지 않는 분의 기능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지금 우리가 함께 예수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계시는데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예수님을 부른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부르셨습니까? 하고 쪼르르 와가지고 어서옵쇼!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것 없다 이 말이죠. 호텔보이도 아니고. 사진 찍습니까? 어데? 뒤에 예수 이름 붙이고 주문 외우면 다 오는 거예요? 첫 번째 강의할 때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리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출발이 어디서부터에요? 인간 쪽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했죠. 개인으로 출발해버리면 개인구원이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 개인구원은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해도 이 개인구원의 욕심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 빼놓고 다 죽어라. 이렇게 돼요. 나 빼놓고 다 죽어라. 나는 구원받고 남은 구원 못 받고. 그런 심사가 잠복되어 있어가지고 어떤 경우라도 이게 툭툭 안 튀어나올 때가 없어요. 하나님이여,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도 뒤에는 차마 말 못한 게, 그래서 나만 구원해주시옵소서. 이게 딱 뒤에 추임새처럼 깔려있어요. 어? 내가 교회 제일 일찍 나왔네. 이 말은 뒤에 추임새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지. 이게 딱 있다고요. 항상 그래요. 그렇게 되면 그 제사의 중심은 없는 존재가 아니고, 나 중심, 여기 있는 나, 나 중심의 제사로 돌아가 버려요. 나 중심이죠. 내가 나한테 행동하고 내가 나한테 노동을 해서 그 덕분으로 제사가 원활하게 되어가지고 어디에 간다? 천국 간다. 이런 아이디어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오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보고 어디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출발점을 누구부터 해요? 예배드리는 주체가 누구에요? 본인이 예배드려야 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교회가 엉망이라도 예배는 드려야지. 아까 식사하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예배는 드려야지. 누가 드리는데? 내가. 근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는데, 출발점이 성령이에요. 그렇게 이야기 하면 또 성령 받은 내가 드리면 안 되느냐? 라고 하죠. 성령의 예배는 내가 드리는 예배를 거부합니다. 성령의 예배가 따로 있어요. 그리고 성도는 거기에 참여할 뿐이지. 지가 계획 잡아서 지가 성만찬 준비하고, 이러는 예배는 없습니다. 그거는 자기가 어릴 때 했던 소꿉놀이를 그렇게 종교적으로 꾸며놓은 거예요. 아기자기하게 강대상에 꽃 놓고. 소꿉놀이라고 하면 천주교에 그게 잘 돼있어요. 성당 마당에 마리아상象이 있잖아요. 세 번 절하고. 왜 하필 세 번이냐, 두 번 하면 뭔가 모자란 것 같고. 삼위일체 세 번하죠. 처음에 기도회 할 때도 주여! 주여! 주여! 삼위일체 세 번 받으라고. 하여튼 삼위일체 가지고 싸우게 만들어요. 성부하고 싸우고 성자하고 싸우고 성령하고 싸우고, 거저 내 건데. 니가 가져가노? 하면서 싸울 판이에요. 모든 예배를 자기한테 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자기가 대상이 되어서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대상보호. 자기 보호, 대상 집중이죠. 그렇게 해서 만든 공간이 개별 공간. 내가 드린 것은 내 개별 공간 만들고. 그래가지고 어디 가느냐? 그렇게 해서 와글와글 모인 곳이 바로 지옥.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면 누구 자랑하겠어요? 니 교회 노동이 세냐? 내 교회 노동이 세냐? 싸움 벌이고 난리죠. 여기서 싸움 벌였는데 거기서 싸움 안 벌이겠어요? 내가 최고야! 네가 최고야! 하면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벌였던 싸움을 똑같이 하고 있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고. 실컷 주님 따라다니고 예배드린 결과가 그거에요. 결국은. 열한시 예배는 괜찮고, 오후 2시 예배는 시시하고. 지가 지 맘대로 정했어요. 진정한 예배는 이것뿐입니다. 제사 안에 편입된 동시에 내가 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게 바로 곧 이때라.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가 곧 이때니 바로 이때다. 그 이때가 뭐냐, 그 이때의 흔적이 메시아를 만났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대상해체에요. 내가 왜 여기 물동이를 들고 왔는지를 그걸 놓쳐버리는 겁니다. ‘참, 물 길러 왔지? 예수님 만났다고 내가 미쳤지?’ 이게 아니고 그 까짓 것 물동이는 버려두고 메시아 만난 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아까도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메시아께서 먼저 다가와서 만났다는 것이 이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자꾸 경쟁적으로 붙여가지고 그것들이 깨지게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독단적으로 어떤 개별공간을 마련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개별공간을 갖출 필요도 없이, 주님의 거대한 제사구조 안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기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교회는 자기가 행동할 때 자기 자신을 늘 생각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예를 들면 스데반집사나 사도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뭐냐 하면 보이든 안 보이든 예수님을 소개해야 돼요. 그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앉은뱅이를 낫게 해놓고, 왜 당신은 나를 주목해요? 당신들 지금 번지수가 잘못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주목하지 마세요. 주목하려거든 저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보세요. 저 사람이 지금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이 말이에요. 여기 계신데 안 보일 뿐이지 여기 계신 거예요. 안 보일 뿐이지 기능으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던 자를 살리게 해준 겁니다. 그것이 지금도 주께서 복음 전하는 현장에는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럼 됐지 뭐. 그 사람들이 살아나고 한다면 그 사람도 똑같이 자기를 구원해준, 집사나 권사를 쪼르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기능을 유지 받기 때문에, 그 사람도 우리와 같이 거대한 제사를 하게 됩니다. 하게 되면 우리도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6절의 고백을 같이 해야 됩니다. 같이 한다는 의미에서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부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장례가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떠나야 되겠다. 왜? 보이는 인생이 지겹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에 인생사는 것이 힘들어요. 뭐 단발머리 했니, 안 했니, 그게 힘들어요. 다음에는 파마를 해버릴까? 하여튼 뭔가 남들한테 외향적으로 보인다는 자체가, 그걸 의식한다는 자체가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힘들어요. 그만 내가 안 보였으면 좋겠어. 사실은 우리 기능은 안 보이는 기능을 해요. 안 보이는 기능을 하면서도 남들 보기에는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니가 뭐 구원받으려고 그 짓 했지? 오해를 하는 겁니다. 구원 안 받으려고 교회 안 나오고 교회 나온다고 구원 받습니까? 교회 안 나오려고 헌금합니까? 그럴 것 같으면 나는 헌금 안 하겠다. 뭘 안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 안 하나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할 게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다른 사람은 마치 신앙생활 개판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들에게 설득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귀찮고 짜증날 때는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오해할 것 같으면. 그래서 노래방에 가는 것도 순교라는 말을 울산에서 했거든요. 노래방순교라고. 왜 그런 발언을 써야 하느냐 하면, 하도 저 기능들이 아니니까. 노래방에 부르게 했다면 보이지 않는 주께서 노래 부르라고 허락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할 뿐이에요. 노래방 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이죠. 노래방에 가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우리 전부 다 여기 있지 말고 노래방이나 갑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주의 영광이 되도록 그런 기능을 해요. 어떻게? 완벽하게 착해서? 아니에요. 그 노래방에 가서 죄인인 것을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제사는 그 언약궤의 피 외에는 모든 것이 죄에요. 제사장이 제사 하는 행위도 죄가 됩니다. 히브리서에 나와요. 양을 잡는 것도 죄고, 안수하는 것도 죄에요. 모든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사장들이 어설프지만, 어설픔 자체에서 어설프지 않는 주님의 완전한, 예수님의 홀로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어설퍼야 해요. 김어설퍼. 박어설퍼. 최어설퍼. 어설퍼야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어설픈 인간이 더 살겠다는 것은, 그것은 탐욕이고 욕심이에요. 뭐 잘났다고 더 살까요? 우리가 뭐 잘났다고. 뭐 한 2년 더 산다고 하늘에 별 따올까요? 한 3년 더 살면 대통령 될까요? 트럼프도 됐는데. 나도 하겠다. 국회의원 다 없애고 나 혼자 한다면. 우리도 핵폭탄 만든다고 하면 혹시 압니까? 우리도 장벽 세워서 북한 사람들 못 내려오게 하자. 뭐 이런 것. 세금 하나도 내지 말자. 이러면 찍어줄지 어떻게 알겠어요. 안 된다, 안 된다 했지만 됐잖아요. 트럼프가. 물론 거기는 돈이나 많지만. 반장선거 하는 것도 아니고 돈도 없이 안 되죠. 요새는 반장선거도 돈이 있어야 하죠. 자, 그 다음에 7절에 봅시다. 그러니까 이 관제라 하는 것은 제사 끝에 붓는 거예요. 제사 끝! 하면서 주르륵 붓는 것이 관제라고 하는 겁니다. 겉에는 알록달록 입었지만 속에는 장례에 관한 옷, 내가 시체라고 생각하고, 시체기 때문에 입는 베옷 있잖아요. 그 베옷을 늘 착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입장입니다. 그게 이미 나는 죽었고,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 또 죽는 것은, 그거는 잠자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능이 기능으로 할 때, 그게 제대로 고난이고, 디모데야! 너도 나처럼 그렇게 가도록 하실 거야. 왜? 니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성도는 다 같이 이런 길로 가요. 비록 모습은 다 다르더라도.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니라” 자, 여기서 핵심은 뭐냐 하면, 그냥 보면 받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 보실 때 똑같은 본문 보시면서 누군 받고, 누군 안 받느냐, 관심사가 거기에 간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사리사욕에 빠져있는가를 알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뭐냐 하면 주께서 주신다. 시작을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마감도 누가 하신다? 주께서 하십니다. 주께서 주시는데, 주께서 주시는 것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한 번 떼 내버리자 이 말이죠. 떼 내버리면 나머지기는 뭡니까? 바로 사도바울은 본인이 해서 본인이 받는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겠죠. 이걸 소개하는 겁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 정답은 이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달려가도록 하셨다. 그 이야기는 이미 다른 구절에서 많이 했어요. 근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로 복음을 이야기할 때,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것도 이야기를 해요.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걸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싶은 자들이 있겠죠. 그들이 걸려든 거예요. 그 가짜들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니만 갈 길 있나? 나도 갈 길 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도 내 갈 길 간다. 그렇게 하겠죠. 그럼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니가 복음을 알아?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아? 이래 나오게 돼버리면, 나의 갈 길 다가면서도, 복음을 모르게 되면서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많죠. 마이웨이 부른 사람이 누구죠? 프랭크 시나트라가 있죠. 그 가사가 뭡니까? My Way 아닙니까? 나의 길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방식. 지금껏 내 방식대로. 또는 나의 길. 마지막 커튼이 드리워지면 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는 식으로 나의 길을 후회 없이 간다 이 말이거든요. 근데 그게 복음이냐 이 말이죠. 복음이냐? 그건 복음이 아니고 나 잘났다는 겁니다. 자기를 신전으로 모시는 거예요. 자기를 숭배대상으로 모시고, 자기가 최후에 남을 신도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넙죽 절하면서 자기가 지나온 길에 경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던 나에게 나는 찬양을 드리옵나이다.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리고 거기다가 면류관까지 걸쳤으니까. 지가 나무로 만들어서 머리에 얹어버리게 되면 완전히 돈키호테처럼 돼요. 네로황제처럼 지가 지한테 도취되어가지고,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죠. 자기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뭐, 그것도 사는 재미가 있죠. 만날 자기 얼굴 거울로 들여다보고. 어디 놀러가게 되면 남편들은 화딱지 나서 죽습니다. 준비는 다 했는데 나오지를 않아. 그래서 보면 맨 거울보고 있다니까요. 입술 색깔 괜찮아? 대충 좀 찍어 바르고 나온나! 대충 못 찍어 바르고 나오는 거예요. 문밖에 나가면 자기 갈 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항상 뒤돌아봅니다. 나의 갈 길은 주께서 죽음으로 죽도록 가게 하신 길. 그러니까 아예 나의 갈 길 자체가 사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죽어라! 하지만 주께서 시킨 죽음은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고, 니가 살다가 살다가 죽는 것은 저주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어요. 나중에 그 면류관을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그걸 도로 반납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 애가 안 울고 두 시간 동안 버티네. 웃으면서. 아이고, 참, 니 갈 길을 주께서 인도해가시기를 축복하노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예요. 끝이 생명으로 몰고 갔으면 과거사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인생 실수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이구, 이 남자만 안 만났으면....., 그러지 마세요. 그때 되면 그 남자 외에 또 다른 남자가 눈에 안 보이는 법이에요. 백 명이 거쳐 가도 그 남자뿐이에요. 살 수밖에 없어요. 산 낙지처럼 서로 얽혀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 사이도 갈라놓고, 기어이 유방암 걸려서 애 못 낳아도 마지막 때는 공효진하고 결혼하잖아요. 질투의 화신 마지막 회. 처음부터 그렇게 결혼해야 할 인생이라면, 결혼뿐만 아니고 끝도 결국은 주께서 시작한 인생이라면, 그걸 중간에 알게 된다면, 생명의 면류관은 열심히 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의 면류관을 안 받는 경우는 없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던 간에 반드시 생명을 맞닥뜨리도록, 생명의 면류관은 잘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거저 주는 거예요. 거저 주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거저 내놓는 거예요. 거저 주기 때문에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거저 산 인생이에요. 거저 산 인생. 온갖 우여곡절 다 거치고,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를 탄 인생이지만, 앞으로 얼마 남아 있는 인생인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죽고 싶어서 한강 다리에 올라갔다가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쫓겨나는 경우도 여러 번 될 수도 있겠지만, 사사건건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기능이에요. 어떤 기능? 예수님이 다녀간 기능. 예수님이 이 땅을 거쳐서 느꼈던 그 낯선 기능이, 나의 사리사욕을 이겨낸 결과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도 생명의 면류관 받기 위한 코스로 가는데, 우리는 불평불만이 왜 그리 많은지, 세상 것, 내 것 잃어버렸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었습니까? 희생으로 거저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을 진대, 다른 보물은 보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