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61014a (심판)-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 161014a (심판)-이 근호 목사 자, 디모데후서 4장 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구약에서는 누가 심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외에 심판하죠. 구약에서 그것을 정리하기가 복잡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외에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근데 조건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조건하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모래 속에 있는 어떤 보물을 끄집어내다보면 거기에 덮여 있는 모래들이 치워져야 되겠죠. 우르르 쏟아져야 되겠죠. 건질 것을 건지다 보니까, 구원을 이렇게 하시다 보니까, 뭔가 다른 것, 더 특이한 것, 기존의 이방민족적인 그런 것들은 제거가 되면서 부각이 되어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고,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어제 제가 수요설교 할 때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때에 아브라함이 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체와 아브라함 민족에게 복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죠.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엑기스가 되어서 복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핫도그 안에 뭐가 들어 있죠? 프랑크소시지가 들어있죠. 소시지 안에 뭔가 둘렀습니다. 밀가루에다 튀김가루를 입혀서, 하여튼 생각만 해도 몸에 안 좋은 기름기가 붙어있겠지만. 그 핫도그 모양새는 프랑크소시지가 눈에 안 보입니다. 보이지를 않는데, 먹다 보면 소시지가 보이죠. 만약에 소시지가 없는 핫도그라면 그거는 고발해야 합니다. 사직당국에 고발하세요. 프랑크소지가 들어있지 않는 핫도그는 핫도그가 아닙니다. 이건 가짜죠. 근데 알 수가 없죠. 알 수가 없습니다. 안에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함으로써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있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구원한다 하시면서 계속 이스라엘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벗겨내는 겁니다. 진짜 구원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다?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는 것을 구원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민족과 자꾸 부딪히게 만들고 접촉을 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하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다른 민족은 멸망한다.” 방금 제가 그걸 오해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가 오해를 하는 것처럼 똑같이 오해해요. 오해를 하게 되면 이방민족이 져야 되는데 이겨버려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뭔가 정리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가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 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다시 부르짖게 됩니다. 그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는 장소가 뭐냐 하면 성막이고 언약궤고 그리고 성전이 되는 겁니다. 장소가.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뭘 건지고자 하느냐 하면 이것을 건지고자 해요. 언약(궤). 이것을 건지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므니다.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구원대상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언약, 언약궤를 건지는 겁니다. 이 언약(궤)을 범위를 넓혀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같은 이야기인데,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라는 말만 딱 해버리면 백이면 백 명이, 천이면 천명이 이 말씀을 딱 보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대처해야지. 대처해야지, 뭔가 대비해야지. 심판하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심판에서 건짐 받아야지.” 라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오해의 길로 접어드는 거예요. 대책 세워서 심판에서 면제되는 방법은 애당초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저의 역할이 뭐죠?” 이렇게 물어야죠. 제 역할이 뭐냐? 지나가는 행인2냐? 아니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이냐? 안 그러면 내시역할을 할까요? 이런 것.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이것은, 심판의 역할에서 제가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인데, 성도는, 성령 받아서 참여하게 될 것인데,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가담하게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 그렇게 묻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바로 구약에서는 거기에 대해서 다양한 직업군이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들이 있고,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었어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 방금 세리, 창기, 고아, 과부, 나그네들, 이런 사람들. 또 강도, 소경된 자, 거지, 거지나사로는 비유지만 하여튼 거지라고 치고. 또 더 놀라운 사실은 탕자,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바로 이런 분들의 직업이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심판을 하는데, 그들은 본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심판에서 구원될 겁니까? 심판 받을 겁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많이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똑같은 매직이 다섯 개가 있는데, 제가 혼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기 쌍둥이 매직 다섯 개 하고 한 번 놀아볼까?’ 이래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그러면 제가 가지고 놀까요?” 이렇게 나오면 “아니, 그냥 저 혼자 놀래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심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혼자 노는 게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혼자 노시는 게임이에요. ‘아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대. 심판하시면 안 되는데. 그럼 우리 가정은 다 구원받아야지. 열심히 기도하자.’ 이래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혼자 하는 게임인 것을 곡해해서 그래요. 근데 여기 매직 다섯 개가 동원됐잖아요. 여기 매직 다섯 개 동원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님께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증거자로서, 아까 말한 세리, 창기, 고아, 과부, 나그네...이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요. 그게 뭐냐 하면, 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될, 그냥 주님 혼자 하실 일이지. 우리가 협조하거나 도와줄 일이 아니고, 어떻게 심판에서 한 번 구원될까, 하고 애써서 거기에 끼어들 문제가 아닌 겁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면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것만 증거 하게 되고 소개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어떤 말씀? “주께서 홀로 심판 작업을 하신대~^^” 이 사실을 전파하라 이 말씀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굉장히 기쁜 얼굴로. ‘아이고, 나는 심판 없는 줄 알았지. 하기는 하시는구나.’ 이런 것. 예를 들면 어떤 서울 광진구에 빈터가 있는데, 빈터가 한 20년 동안 방치가 되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광진구에 빈터가 한 20년 동안 있었는데, 주민들에게는 거기에 불량배가 끊이지 않고 하니까 여러 가지 환경이 굉장히 안 좋잖아요. 그런데 광진구가 거기에다가 드디어 체육시설을 짓겠답니다. 이걸 전파하라 이 말입니다. 이걸 전파하라 이 말이죠. 마치 나와 전혀 상관없는 작업을 주께서 팔 걷어붙이고, 한 번 해봐! 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이 안 하시는 거예요. 누가 하느냐? 누가 해요? 본문에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왜냐하면 심판의 주체자, 심판의 자격자가 드디어 마지막 때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할 자가 어떤 누구도 없었는데, 드디어 마지막 때에 심판주가 확정되었다. 심판주가 확정됐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분 외에 제 3자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계시다면 예수님의 모든 활동 자체가 이미 심판으로 시작해서 그분이 마감하실 거예요. 그 마감을 가지고 여기에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그의 나라가 뭔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죠.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타나실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광진구의 체육시설. 그리고 지하에는 폐기물처리시설이 또 들어선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광진구 아파트들이 데모하고 난리가 났어요. “웬 폐기물이냐?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광진구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오래전부터 이미 계획한 바이다. 끝.” 너희들이 데모한다고 해서 안 할 것이 아니고 데모하든 말든 밀어붙이는 거예요. 심판은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심판주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 행위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마치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엄마가 식탁에 음식을 잘 차려놨습니다. 근데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배가 고프니까 맛있는 음식을 보고 이러는 거예요. “이야~! 엄마가 우리 저녁 맛있게 먹으라고 음식을 차려주셨군요?” 엄마가 하는 말이 “아니야. 이거는 아버지 혼자 잡수실 저녁식사야.” 아버지 혼자 잡수실 저녁식사야, 이걸 누가 알았느냐 하면 바로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그 여인네가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니까, 나는 개한테는 구원을 안 준다고 했습니다. 언약이 없는 개들한테, 개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언약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구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의 고집이고 누구 의견입니까? 그거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나버린 예수님의 소견이죠. 예수님의 소견이에요. 저 심판받으니까 구원해달라는 요청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없다? 권리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구원과 심판은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의소관이죠. 심판을 하던 구원을 하던 간에 우리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라니까요. 이게. 우리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어요. 호들갑은 신천지가 떨고 난리가 아니죠. 한국교회나 떨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식탁에 밥을 차려놓았으면 이거는 아버지가 먹을 거예요. 그러면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아, 이거는 아버지거구나. 우리 것이 아니구나.” 그러다 이제 아버지가 퇴근하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식사하는데 애들이 셋이 죽 전부 다 앉아 있어요. “이 식탁에 있는 음식은 내가 먹을 거야. 알겠어?” “예. 잘 압니다.” “어라! 알아? 그럼 너는 왜 아버지가 먹는 식탁에 숟가락 대면 안 되는데?” “우리는 개거든요.” “개? 오! 아네. 자 먹어라!” 하고 주는 겁니다. 아버지 식탁에 개한마리가 던져졌다는 말은, 이거는 예수님께서 의외의 인물에게 줬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원래 심판의 계획에 합당한 거예요? 심판의 계획에 합당한 거죠. 그 합당한 것이 뭐죠? 심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한다고 했죠. 누굴 주고, 누굴 안 주고는 누구 마음대로다? 예수님 마음대로죠. 그러면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떡을 하나님의 자녀한테 주지, 개 같은 이방인한테는 안 준다고 했거든요. 참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하도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적어봅시다. 그냥 말로 해서는 도저히 얼굴들이 납득이 안 되는 얼굴들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장 자체가 자녀한테는 영생을, 개한테는 뭐다? 그냥 지옥 간다는 이 말이거든요. 개한테는 지옥 간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가 누구라는 말이죠? 예수님 본인이 권한이 있는 자에요. 이거는 인간들의 의견을 개무시 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요구사항,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을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거는 일체 고려하지 않아요. 구원해주고 안 해주고는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자가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용서받았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간통하도록 시킨 거예요. 이 말이 참 이상하지만. 그것도 시키고 또 들키라고 유도를 했어요. 들키라고 유도를 했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소경되었다, 왜 소경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날 때부터 소경되도록.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뭘 생각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하거든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줄곧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해 오셨던 겁니다. 자녀한테는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지옥을 보내는 거예요. 그 이야기의 발언을 예수님 입에서 쏟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옳습니다.” 라고 했죠.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예. 옳습니다.” 이거는 예수님이 자녀한테는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영생을 안 주는 일은 참 잘하셔도 너무 잘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주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개한테도 뭘 준다? 자녀의 먹다 남은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니까, 이걸 누가 옳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그 여자보고 “니가 옳다.” 니가 옳다는 거예요. 그럼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자녀에게만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영생을 안 준다고 했을 때에, 이걸 보는 사람이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개로 여기겠습니까? 자녀로 여기겠습니까? 자녀로 여기겠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심판주 되는 것을 반대하는, 왜곡하는, 대드는, 진짜 지옥 가는 개 같은 인간들이에요. 그게 왜 그런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이 발언을 할 때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십자가 지고 난 후에요? 십자가 전이죠.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반대로 바뀌어져야 해요. 반대로. 모든 것이 반대로 바뀌어져야 예수님께서 살해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살해해야 모든 인간들은 결국 예수님의 주 되심을 통째로, 모든 것을 다 통합해서 반대했었다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 되지 못하게 하게 만드는 그 취지가 뭐냐, 왜, 어떤 의도로 예수님을 반대하도록 했는가, 그게 바로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죠. 유대인들은 이미 죽을 때에 심판받고 죽는다고 알고 있어요. 죽을 때에. 하나는 낙원에 가고 하는 지옥 불에 가고. 그게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죠. 십자가 전입니다. 나사로의 비유는 십자가 지기 전의 이야기에요. 거기에는 예수님이 안 나오고 아브라함의 품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자손이 누구 자손이냐 하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에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돼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죽어도 아브라함 품에 간다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다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뭘 받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아브라함 혈통 같으면 택하신 민족이라는 것이 이미 그걸로 그들의 진리로써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이 진리로써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특히 그걸 누가 가르쳤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거예요. 근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지켜보고 딱 겨냥해서 하는 겁니다.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기 전이니까 그들을 전복시켜야 되겠죠. 반대로 해야 되겠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자손이 부자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을 받게 되면 부자 되기 때문에. 그들이 복 받아 잘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해서 그러냐 하면 신명기 28장에 근거해서, 그게 말씀을 지켜서 복 받았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 되었으니까 분명히 말씀을 지켰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도 마찬가지죠. 어떤 부자청년이 왔는데, 부자청년의 논리가 뭡니까? 내가 부자 된 것은 그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그 성과급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 모든 것을 한 번 비워봐라. 그 모든 것을 한 번 제거시켜봐라.” 이래 나와요. 모든 것을 제거시켜보라고 한다면, 이거는 돈을 없애보라는 정도가 아니고 뭐도 없애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그것 자체를 전부 다 게워내야 되고 그걸 전부 다 없애라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의 의는 전혀 없다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를 따를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한테 묻는 것하고 똑같아요. 뭐 30년 믿었습니다. 40년 믿었습니다. 하는데, 30년 믿고 40년 믿은 것 다 죄라고 간주하고 나를 따를 용의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근데 부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근심해서 그냥 유턴했죠. 그냥 돌아갔죠. 근심해서 돌아갔죠.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자기 자리로 그냥 돌아갔죠. 어떤 자리입니까? 자기의 부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자기 의도 그냥 붙들고 있겠다는, 나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 앞에서는 나의 의를 생색내면 안 돼!’ 라는 그런 관계로써 예수님을 바라볼 줄 몰랐었어요. 잘못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 심판주가 아니고 왜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느냐, 예수님은 이미 죽었거든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이 허물어졌어요. 죽은 자도 살았고 산 자도 살아있어요. 조건이 있어요. 심판받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심판받기 위해서. 왜냐하면 심판이라는 것은 누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심판 작업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미 죽은 자는 심판이 없어요. 이미 죽어서 낙원에 갈 사람은 낙원에 분류되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누가복음 16장 20절에 거지나사로 있죠.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분류가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심판이 없는 거예요. 근데 주님은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되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의 도피처가 되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이. 죽게 되면 더 이상 나의 죄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까짓 것 뭐 순교하지.’ 내가 주님을 위해 결정적인 일을 했다는 그 순간에 죽어버리면, 순교했다는 그 성과로 천국 가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있죠.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잘못됐는지, 여러분들이 못 알아듣는지, 제 취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인간에게 심판한다는 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죠. 그래서 인간은 심판에 대해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요. 식탁에 반찬이 있는데, 남편이 “여보! 오늘 계란말이가 왜 이렇게 맛이 없어?” 하고 남편이 자기 밥상이니까 남편이 아내한테 물었는데, 둘째 아들이 나서서 “저는 맛있는데요?” 이러면 이거는 맞아야 돼요. 니가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니가 왜 끼어들어?” “하나님 아버지. 쟤는 천국 보내고 쟤는 지옥 보내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거기에 해당되는 인간이 들었다 칩시다. 어떻게? 반발할거에요? 대들 거예요? 아니면 대법원에 고소할거예요?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맞습니다. 저, 개니까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런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왜? 그런 발언을 한 그 속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심판은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라는 것이 포함이 되어 있는 고백을 내놓잖아요. 그게 포함이 되어 있는 고백을. 그러니까 우리가 심판에 대해서 전혀 주눅 들거나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대책을 세우지 마세요. “주님이 심판주로서 주님 마음대로 심판한대.” 라는 소식만 전하면 돼요. 협박이나 공갈을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회개하라! 예수를 믿어라! 이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요. 누굴 위해서? 본인을 위해서. 그럼 본인은 자기를 산 자로 보겠어요? 죽은 자로 보겠어요? 살아있을 때 야무지게 구원받아놓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거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경계선이 없는 셈이 돼버려요. 예수님은 산 자나 죽은 자의 주가 돼버렸어요. 산 자, 죽은 자, 구분이 없습니다. 죽었다고 해서 어드밴티지advantage를, 유리함을 얻는 것이 아니에요. 살았다고 해서 더 유리한 것이 아니에요. 죽어도 살아있고, 살아도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도 살아있고 살아도 살아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고,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고, 죽었다고 여겼는데 살아있는 그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에요. 세종대왕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세종대왕이? 세종대왕은 분명히 죽은 자죠? 하지만 지옥에서는 살아있어요. 살아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세종대왕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세종대왕 하니까 확 들어오죠. 그러니까 세종대왕을 왜 구원 안 시킵니까? 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를 세종대왕은 착하니까 살려달라고 건의할 인간도 없어요. 건의할 자격이 있는 인간도 없어요. 어떤 누구도. 목사님. 복음이 그때에는 안 전해졌으니까,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인데, 그 전에 있는 사람은 복음도 못 듣고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복음 말고 다른 걸로 어떻게 구원시켜줄 수 있는 혜택을, 기회를 부여해줘야 자기 잘못한 책임으로 지옥 갈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발언을 하는 그것이 바로 연옥설이에요. 연옥설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죽은 사람은 복음을 못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시험을 친 적이 없기 때문에 채점이 안 되는 사람들, 시험을 친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 문제가 완성되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채점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복음 들어오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뭐 파피뉴기니아에,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오기 전에 죽었던 사람도 해당되고, 그 다음에 이 아기가 몇 개월 되었어요? 9개월 15일이 되기 전에 죽었던 아기들도 해당되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러한 애들한테는 그냥 특별히 기회를 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 말이에요. 왜? 자기 의지로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그런 훌륭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때까지 복음이 안 들어왔잖아요. 그런 사람들. 소크라테스 같은 훌륭한 성자 같은 사람들한테는 패자부활전 주어서, 일단 연옥가가지고, 연옥의 온도가 뜨겁다 싶으면 착한 일 할 거고, 좀 괜찮다 싶어서 살만하네 하면 지옥 보낼 거고. 그때서 다시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그 천주교가 이단인데요, 천주교만 이단이겠어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근데 뭘 모르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미 모든 인간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모두 저주받은 자고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그래, 아리스토텔레스 니는 죄가 없기 때문에 니를 위해서 대신 지지 않고, 너는 괜찮고, 니는 니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니 말고 다른 죄진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는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면 언약을 이룬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해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상은 누굽니까? 아담이죠. 아담이 뭘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그 죽음을 예수님이 자기 죽음으로 가져온 거예요. 그 죽음을. 그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가져와버리면, 아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가져왔다는 말은 무슨 취지로, 무슨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 모든 일어나는 일은 심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과 상관있어서 벌어져야 될 일들이라는 말이죠. 이게. 북한의 김정은, 북한의 김정은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에 꼭 필요한 존재라서 지금도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게 된 거예요. 꼭 필요한 존재라서. 어떤 인간도 주님의 심판주 되심과 무관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산 자와 죽은 자를 뭐한다? 주께서 심판주시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를 향하여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나는 너를 지옥 보냄으로써, 심판주 되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을 내가 만들었다. 니 입장에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니 입장이고, 내 입장에서는 가룟 유다 너는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지나사로나 세리, 너는 천국 가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어야 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심판이 결정됐기 때문에 이 땅에 어떤 존재도 예수님의 심판주 이심을 증거 하지 않는 증거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죠. 왜? 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저 사시면 되는 거예요. 사시면서 가는 길이 갈라지면 돼요. 각도가 벌어지면 되는 겁니다. 갈 길이 달랐다~♬ 이 갈 길이 점점 더 달라지는 거예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갈 길이 달라요. 점점 더 벌어져요. 한쪽은 뭐냐,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에 아주 신이 났어요. 기분이 좋아요. “주여, 이 땅에서 개같이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거지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세리가 되어도 상관없고 창기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희희낙락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근데 지옥 가는 사람은, ‘이러다 지옥가지... 이러다 지옥가지...’ 이러는 거예요. 이러다가 지옥가지...그게 지옥 가는 표시입니다. 심판에 대해서 염려를 하지 말아야 되는데, 심판에 대해서 염려하겠다는 말은 대처하겠다는 말이에요. 뭔가 심판 앞에서 나름 대책을 세우겠다는 겁니다. 대책을. 제가 미국 가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캘거리강의인가? 하도 많이 해서 어디인지 모르겠다만. 대학 합격했는데 수학정석을 왜 봅니까?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정철종합영어 볼 필요 없죠? 물론 제가 이야기하는 참고서 구경도 못한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니, 대학 합격했는데 또 대입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학원 다닐 필요가 있어요? 대학 합격했는데? 없죠. 그러면 만약에 원하는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만약에 고3학생 자율학습하는 학원 앞에 지날 갈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 좋죠. 이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에 노량진 학원 앞에 걸어가 보세요. 합격하고 난 뒤에. 합격한 그 다음날에. 이거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 열심히 하라고!” 한번 걸어가 보라고요.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성도입니다. 성도에요. 꼴에 돈도 없어서 거지꼴로 살고, 개같이 살아도 혼자 신났어. 혼자 기분 좋아. 이게 말씀 전하는 중입니다. 이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는 중이에요. 만약에 남편이 복음을 모르고 여자가 복음을 아는데, 남편이 걸핏하면 행패를 부린다고 할 때, “그런 식으로 할라카거든 우리 갈라서자!” 그러면 복음을 아는 아내가 “니 그걸 나한테 무기라고 던지나? 니 그걸 지금 나한테 협박한다고 던지는 무기냐? 그게? 좀 더 센 거 없어? 센 거?” “그러면 니 청부살인해서 죽인다?” “아니, 죽인다는 것 보다 더 센 거 없어?” 여기서 죽으나 필리핀에 가서 죽으나. 톨게이트에서 불타서 죽으나.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어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래서 오해한 거예요. 자기 오빠 죽인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진작 오지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리아와 마르다는 아직도 뭘 구분해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이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그거 의미가 없어요. 살아있어도 역시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고, 죽어있어도 역시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면 되지. 내가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것은 심판주 됨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세상에! 이거보다 더 기쁜 복음이 있겠어요? 얼마나 기뻐요.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톱에 켜는 것과 그리고 광야에 유리하고, 뭐 헤매고 있어도, 그것마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절묘한 해프닝이고 이벤트거든요. 뭐 이벤트 치고는 좀 아프고 배고프다마는. 진짜 공무원 합격해가지고, 그것도 3차까지 합격해가지고, 2차 합격했다가 3차에 떨어지지 말고, 3차 딱 합격해가지고 출근하라는 소식 딱 듣고 노량진에 가가지고 약 올리기 한번 좀 해보라는 말이죠. “고생 더 해! 수고하라고!”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뭐 믿고?” 딩동! 그게 정답이에요. 니가 뭐 믿고? 그게 아까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됨.”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인정하는 구원된 자의 이 세상의 삶의 양식이고 모습입니다. 늘 미련하고 늘 어리석어서, 미련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미련하고도 어리석을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들은 불합격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아주 심판을 면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모든 똑똑이는 다 동원해요. 모든 똑똑한 것, 신학하고, 성경공부하고, 막 이성적으로 따지고, 자기 기도한 것 막 적고, 오늘은 30분 기도했고, 내일은 35분 돌파하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그 돌파하면 뭐해요? 기도하면 할수록 이게 점점 더 현명해지고 똑똑해지는데. 왜냐? 지가 한 것이 있거든요. 기도한 것이 있기 때문에. 헌금했다는 것을 다 인식하잖아요. 분명히 성경에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들어요. 세상에! 오십년 지난 일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이건 자칭 똑똑한 거잖아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나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한 번 붙어보자고 하잖아요. 배틀battle, 싸워보자는 거예요. 누가, 누가 믿음이 좋은지. 구원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소유가 되어야 돼요. 구원 작업에 소유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가지고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사로잡혀야 삶 자체가 전파하는 삶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2절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걸 세 글자로 이야기하면 무시로. 무시로에요. 때가 없이. 때가 없다는 것은 항상 할 때냐, 안 할 때냐 하는 결정을 본인이 내릴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아니, 개가 개같이 살면 되지, 지가 주인처럼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개가 주인입니까? 개는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면 되지. 그게 바로 자유잖아요. 자유. 그 자유를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시 한 번 이 시간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 차려라. 깨어 기도하면 구원해줄게. 니가 회개하면 구원해줄게.” 그런 것 없어요. 회개하는 것조차도 결과적입니다. 회개라는 것도 돌아보니까 회개가 된 상태에요. 회개해가지고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했으니까 주세요!” 라고 하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그럴 권리가 박탈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발생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안 죽은 상태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 그들은 뭘 하겠습니까? 회개한다고 나름대로 회개에 애쓰겠죠. 나를 사랑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열심히 사랑하겠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계획이, 아예 그런 계획이 없다면 결국은 누가 구원받아요? 바리새인만 구원받아요. 왜? 가장 최선의 노력을 가장 많이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했죠. 근데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버렸단 말이죠. 십자가 진 상태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도 믿어야 하고 사랑도 해야, 그래야 구원받습니까? 두 가지 다 해야 해요? 두 가지가 있으면 안 되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까(딤전6:10), 거기에 한 가지 더 붙여서 세 가지만 하면 거기서 끝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롬15:5), 이거 네 가지네. 들추면 들출수록 점점 더 많네요.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거 지켜야 할 조항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여기에 대책이 있어요? 이거는 여러분 보고 물어볼 이야기가 아니고 기존교회한테 물어볼 이야기에요. “저기, 권사님. 지금 몇 단계까지 뗐습니까?”하고 한 번 물어보세요. “성경 중에서 몇 퍼센트 지키고 몇 퍼센트 못 지켰습니까?”하고 한 번 물어보세요. 꼭 뒤에 남겨두는 것이 있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이런 것은 꼭 뒤에 남겨둬요. 왜냐하면 수능이 며칠 안 남았기 때문에. 아들 장가보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안 졌다면, 그런 게 의미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를 진 능력이 안 왔다면, 우리는 십자가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거예요. 십자가를 열심히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십자가 능력이 온다면 뭐도 죄가 돼요? 내가 십자가 믿는 것도 뭐가 됩니까? 죄가 돼요. 왜? 십자가를 믿는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그것이 내가 하나의 공로가 되어가지고 그걸 근거로 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은 자가 되어 버려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죄인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졌으면 우리가 죄인 되어야 하는데, 자꾸 죄인이라고 생각 안 하고, 뭐냐 하면 중립적인 지역에 있으면서 나의 잘못된 선택이 나를 죄인 만들고, 옳은 선택은 나를 의인 만든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립적인 지역에 있으면서 예수님 십자가 졌고 성령이 왔다고 한다면,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고 십자가 믿겠다고 나선다면, 이건 자기 스스로 뭐 하는 겁니까? 이거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중립에서 의로 바꿀 수 있는, 자기 스스로 이행과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나는 중립에 있었는데 이제는 십자가 믿고 성령 받아서 충만했기 때문에 나는 의인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찾아오게 되면,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자체가 우리가 사전에 뭘 생각했든 그것마저 뭐가 된다? 그게 몽땅 사망이 되고, 죄가 되고, 죽음이 되는 거예요. 안 믿어져요? 안 믿어지면 답변해보세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오늘도 예수 믿는 30명을 잡아 죽였다. 35명 마저 채우게 되면 주님이 나를 만나러 올걸? 그걸 사전에 예상했습니까? 예상 안 했죠.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본인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착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예수님은 죽일 이단인데 예수님을 왜 생각했겠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 일을 했죠.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왔죠. 그럼 사도바울은 뭘 느낍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자기 쪽에서 공로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럼 사도바울은 부끄러운 구원 받나요? 아무 상급도 없이? 나쁜 짓해서 구원받았는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 지금 가면 부끄러운 구원받으니까 업적을 많이 이루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니면 “주여, 어서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어요?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어서 죽여 달라고 했죠. 그럼 옆에 상급 주장하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지금 가면 천국 가도 상급, 보너스 하나도 없는데, 저 사람 왜 카지?” 하면서 오히려 걱정하겠죠. 기존교회에서 예수만 믿으면 안 되고, 천국 가기 전에 많은 성과급을 거둬야 높은 자리에 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빗대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는 거예요. 다시 묻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한 적이 없죠. 도리어 지금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지난 모든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것이 도리어 뭐였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은혜였다. 여러분, 이게 납득이 됩니까?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그 유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울산 언양에서 고속버스 기사가 과속해서 열 명 죽이고 잡히고 난 뒤에 성령을 받았어요. “당신은 왜 과속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과속했습니다.” 한다면 이게 말이 통합니까? “당신이 열 명 죽였다.” “열 명 죽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죽였다.” 이렇게 하면 이게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난 시간 내내 제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