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8-미셸 푸코
201612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8-푸코
(강의:이근호 목사)
18세기에 들어와서 예방차원에서 새로운 법이 주어지는데 그걸 규율이라고 했지요. 규율은 미리 조작하고 인간을 조정하는 거예요. 조정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법과 의학을 플러스 시킵니다. 옛날에 광인이란 미친 사람이죠. 새로운 것을 말하는 사람을 광인이라 했어요. 그래서 광인에 대해선 그냥 방치했어요. 유명한 광인이 있지요.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잖아요. 풍차한테 덤벼들고 그러잖아요. 조수는 또 뭡니까? 같이 죽이 잘 맞아.
중세 때 신의 계시란 우연적, 우발적이에요.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을 통해서 주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겸손한 태도였어요. 그러나 근세에 들어오면 그게 없어요. 모든 것을 규율화 시켜서 내재화하면 광인은 감금해야 됩니다.
감금은 수도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감금하는 겁니다. 감금해서 의사가 법적인 권한으로 죄 지은 자도 아닌데 처벌 받을 자에게만 필요한 감금조치를 내립니다. “이 정신병, 3년 있어야 됩니다. 강제로 해야 됩니다.” 감금이 감옥, 병영, 학교 등으로 확대돼요. 그리고 공장. 이렇게 확대되면서 권력이 내재화, 보편화합니다.
순서가 첫째, 배분의 기술이에요. 이건 각자 각자에 폐쇄된 공간을 부여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결혼 안/못 하고 어디로 갑니까? 고시원 등으로 자진해서 폐쇄된 공간을 찾아가죠. 그 폐쇄된 공간에서 스마트폰 쓰고 인터넷 하고 있지요. 자기만의 새로운 폐쇄된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자발적이고 자율적입니까? 자율적 권력이 주체화되는 세계, 이게 바로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거죠. 악마가 다른 게 아니에요.
옛날에 죄진 사람들 가둔 것을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결정해놓고 이걸 내가 결정했다는 조그마한 어떤 자부심을 갖게 하는 거예요. 나는 알아서 취직 안 했어, 이런 식으로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거예요.
배분의 기술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두 번째, 활동의 통제. 활동을 통제할 때 여기게 동원되는 것이 시간표입니다. 학교, 병영, 병원, 감옥, 공장 이런 데에 시간표가 동원돼요. 학원은 몇 시까지 갔다 와야 되고, 철저하게 통제하게 되면 규격화돼요.
첫째와 두 번째의 차이점은, 배분의 기술은 곤충채집하는 것처럼 밀폐된 공간에 집어넣어 격리시키는 겁니다. 요즘은 자발적으로 감금되기를 원하지만. 얼마나 내재화돼있으면 감금되겠어요. 남과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 누가 찾아오는 것도 귀찮아.
활동의 통제, 그러니까 이건 학교, 군대, 감옥, 공장 어떤 곳이라도 예외 없이 전부 동일하게 돼가는 거예요. 옛날에 수도원은 자발적으로 했는데 모든 것이 규율화 돼있습니다. 누가 사회계약서 필요 없이 알아서 전부 다 스스로 시간표 따라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간표 없으면 하루 일 안 한 것 같아.
공장이나 회사에서 출근도장 찍지요. 이게 우리 20대만 해도 굉장히 인격모독이었어요. 감시 받는다는 느낌 드는 거였어요. 지금은 보편화 됐어요.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예요. 경찰공무원도 수당 더 받으려고 퇴근하고 난 뒤에 다시 경찰서로 가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수당 더 챙기고. 미셸 푸코는 이 정도면 몸이라 하지 않아요. 기계라 합니다. 이건 들뢰즈에서 나온 거죠.
세 번째는 발생과정의 조직화, 이것은 나중에 시험을 쳐요. 시험을 친다는 것은 서열을 매긴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등질화에요. 동일한 질로 모든 인간은 질적으로 동일해요. 시험 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맞는 시험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시험문제인데 몇 개 더 맞추느냐는 거잖아요.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네가 얼마나 맞추느냐는 겁니다. 10개 맞췄다, 5개 맞췄다는 것은 두 사람의 차이는 양의 차이지 똑같은 질을 요구받고 있는 그 사회에서 주체로 행세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주체로 보지 않아요.
사회는 인간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기계가 필요해요. 기계란 부품이거든요. 부품을 갈아 끼우기가 용이해야 돼요. 일 못하면 잘리고 그 자리에 적합한 다른 사람을 신속하게 집어넣어야 돼요. 철도공사 파업한다면, 월급 많이 받는 사람들 빨리 빼내고 신참들, 아르바이트, 계약직으로 시간표 따라서 해내면 결과물 나오잖아요. 그러면 됐지, 뭐. 그러면 회사 돌아가는 거지.
그게 진리는 아니고 지식이 되는 겁니다.
네 번째가 힘들의 합성, 이걸 연대로 해요. 이것은 이제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선 필요한 것을 하지만 그 일뿐만 아니고 내가 못하는 일, 예를 들어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컴퓨터 전문가 따로 있고, 판매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면 어떤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를 판매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짝을 이룰 때 기계와 기계끼리 부품을 조립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힘들의 연대에요.
여기에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그냥 힘의 덩어리에요. 할 수 있는 재주의 덩어리일 뿐이란 말이죠. 힘들의 연대로 이 사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어디에도 없어요. 전부 보편적으로, 눈이 오면 온 사방에 펴져있지요. 옛날엔 권력이 위에서 오는데 지금은 오는 게 아니에요. 퍼져있어요. 새로 출생한 아이는 기존에 퍼져있는 힘의 권력, 지식의 연대성에 부합되도록 새롭게 양육해야 되지요. 어떤 순서로? 빨리 네 방에서 공부 해. 벌써 감금이죠. 벌써 나와? 컴퓨터 하는지 볼 거야.
미셸 푸코는 이것을 가정에서 키우기 때문에 가정에서 성교육부터 해서 철저하게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성에 대해서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가정에서 산업역군, 산업예비군을 만들어야 돼요. 따라서 이에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 같은 것은 자제돼야 돼요.
가정교육이 심화된 것, 바로 19세기 영국문화가 철저한 청교도문화잖아요. 청교도문화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영국은 기독교문화가 되어 사람 사는 것처럼 윤리, 도덕이 있었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했는데 미셸 푸코는 그렇게 보지 않고 그 시대에 맞춤 산업역군을 옛날에는 국가에서 담당했는데 이제는 가정에서 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거예요. 정신분석이란 사실은 이런 미셸 푸코의 권력체계에 의하면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한 거예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머니와 라이벌 관계에 있지 않으면 인간은 독립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됐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는데 하나가 안 되느냐 말이죠.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내가 태어나는 이유가 뭐냐? 옛날 생물학에선 그거야 자연스런 이치 아니냐고 하잖아요. 자연스런 이치가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 인간의 이성이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의미를 투여해요. 그러면 언표 수준에서 담론 수준이 된다고. 담론 수준, 조직화 되면서 존재에서 주체가 나오고 주체의 모임이 현 사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우리가 조직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내부에 장착돼있어요. 알아서 긴다니까요.
권력이 내재화되어 돌아가는데 여기서 미셸 푸코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요. 거기서 더 나갑니다. 지금 이야기는 권력과 인민들 이야기죠. 백성 속에 내재돼있는 권력, 특히 18,9세기에 들어와서 이 세상이 이성적으로 규격화되지 아니하면, 규격화는 자본주의의 발달이죠. 규격화 되지 아니하면 이걸 광인으로 봤죠. 미친놈은 따로, 이건 처벌하는 게 아니고, 치료대상이에요. 치료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요. 노동을 한다든지. 네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 되려면 너는 노동해야 돼. 놀면서 밥 먹을 생각하지 마. 그래야 이 사회에 합당해. 치료를 빌미로 한 처벌이 되는 겁니다.
군대를 왜 싫어합니까? 독자적인 자아상을 인정 안 해줘요. 그러면 내가 날아가 벌여요. 그동안 내가 공들여서 영어 배우려고 학원 다니고 뭘 하는 것은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한 거잖아요. 그동안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하고 계획을 세웠는데 내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맨날 있던 곳이 집이죠. 엄마와 나, 그러니까 이 관계
그래서 미셸 푸코가 말하기를 언어란 지시대상도 아니고 지시되는 관계까지 표시한다고 했는데, 이 관계, 아까 이야기한 <시녀들>에서 보이지 않는 관계, 미셸 푸코가 얼마나 예리한지 보세요. “물을 주세요.” 할 때 물 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먹던 그 물을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공들인 그 물을 주세요.” 물을 먹고 싶은 게 아니에요. 물이 오기까지 긴긴 계보학적 과정을 묻고 싶은 거예요. 목이 마른 게 아니고 목이 마른 내가 말라. 그때 그 물. 이 물을 볼 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남녀가 사귀면서 아무 카페나 가지 않습니다. 푸른 의자 있던 카페에 가보자. 거기 가면 바이러스가 적고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인간은 나와 관련되었던 얽혔던 걸 끊어버리면 외로워서 자살합니다. 사람이 밥 못 먹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외로워서 자살하거든요. 왜 외롭습니까?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아서 그래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살았으면 외롭지 않아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정 주고 정 받았거든요. 1인2역. 그는 나를 주시하고 그 주시에 맞추어서 나를 변경시켰고 변형시켜 왔어요. 그들이 요구하는 내가 됐는데 나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던 그가 죽었다. 난 못 산다. 세포는 단백질, 지방이면 살아요. 그런데 자기는 못 산다는 거예요. 자살하기 직전에 밥 먹어요. 희한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 볼 때 과학은 바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과학과 아무 상관없어요. 뭔가 덮어쓴 귀신 있잖아요. 푸코는 이걸 권력이라 하는데 자아라고 형성된 얽히고설킨 권력에 놀아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 중요한 게 남았어요. 권력이 내재화되어 알아서 했는데 여기에 20세기에 와서 경제가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경제는 정치와 라이벌이에요. 전에는 정치 밑에 경제가 있었어요. 정치는 권력게임이거든요. 정치란 내 주체의 대리행위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대신 보여주는 게 정치에요. 내 주체의 열망, 또는 소망을 대신 보여주는 것을 정치가 해야 될 겁니다. 눈 내리는 게 바로 실재입니다. 실재는 인간들끼리 합니다. 인간은 실재로 사는 게 아니에요. 추상으로 관념으로 산단 말이죠. 이것을 통합할 수 있는 관념을 정치라는 것으로 반영해 줄 때 인간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집안 아버지는 팔십 넘어서 아무 일도 하는 게 없어요. 왠지 아버지 계시고 어머니 계시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면 고향 가고 싶습니까? 형제고 친척이고 끝났어요. 제사가 왜 있습니까? 상징적인 안정감을 제공해요. 제삿밥 먹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왠지 나의 원천을 다시 경험한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 옛날 이야기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해요.
그런데 기본적인 추상적인 단일화, 다음 시간엔 알랭 바디우를 하겠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이걸 일자라고 했는데 일종의 신이죠. 추상적인 돌출에 의해서 구상된, 상상해서 생긴단 말이죠. 정치란 대리행위인데 정치가 흔들리면 대중들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동안 이걸 옳다고 했는데 미셸 푸코는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경제가 차고 들어왔어요. 정치 위에 경제가 있어서 정치는 추상적이지만 경제는 실재적이에요. 이번 대통령 바뀌고 내 수입이 얼마나 늘어났는가? 이게 실질적이에요.
그렇다면 정치는 경제에 밀리게 되었어요. 여기서 나온 경제논리가 신자유주의입니다. 로직이란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가 주장한 거죠. 모든 관세장벽을 철폐해버리고 전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것에 도움 준 게 인터넷이에요. 지금 미셸 푸코는 현재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면 모든 장벽을 없애버려요. 그러면 국가와 국가는 경제적 칸막이가 아니고 정치적 칸막이죠.
나라가 못 사는데 미쳤다고 그 나라에 삽니까? 특히 부모들은 자식을 생각할 때 이런 나라를 자식한테 보여주기 싫단 말이죠. 그럼 어디로 가야 돼요?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 호주로 그것도 잘사는 나라로 가든지 해야지요. 빼돌리는 겁니다. 그 나가 가거든 오지 마라. 올 필요 없어. 왜? 경제는 실재적이고 정치는 추상적이잖아요. 정말 이상적인 큰 바위 얼굴 같은 훌륭한 사람이 대통령 되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텐데 이놈이 되던 저놈이 되던 맨날 싸울 것 같으면 그런 것 쳐다보면서 행복을 느낄 이유가 없어요. 그저 수입만 늘면 되지요.
그래서 미셸 푸코는 말합니다. 현대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이익이 얼마인지로 모든 이성이 그쪽으로 예민하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 아니고 시민사회의 등장이죠. 이 변화에 대해서 미셸 푸코는, 옛날에는 폴리스란 말이 정치적인 전반을 가리켰는데 그런데 19, 20세기에 들어오면 폴리스란 말이 제한적, 국소적으로 쓰입니다. 경찰에게만 쓰죠. 단어가 바뀐다는 말은 정치권력에 대한 관심의 성격이 바뀐 거예요. 무엇 때문에? 신자유주의 경제논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되게 되면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전에는 내 몸이 있고 몸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잖아요. 그런데 시민사회가 되면 바뀌어요. 이익을 위해서 몸이 희생하더라도 내가 소원하는 이익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벌써 우리의 질이 정치적인 권력 질이 아니고 경제적인 아이템으로 우리 성질이 바뀐 거예요.
재벌한테 “밥 먹고 사는데 왜 일하십니까?” 하면, 돈 벌기 위해서 일한다는 거예요. 돈 벌면 뭐 합니까? 돈 버는 그걸 위해서 일해요. 돈 버는 행위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는 거예요. 부자들 특징이에요. 가정주부는 어떻습니까? 보통 가정에 충실한 것
아까 [성의 역사]에서 빠진 게 있는데 18,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구분됩니다.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되지만 여자는 가정에 충실함으로써 그 시대는 가정주부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거예요. 말 잘 들어야 돼요. 여자는 바람을 피우면 안 돼요. 왜? 여자는 욕구를 자제할 수 없는 자연친화적이기 때문에 주체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거예요.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적당하게 서너 명 정도, 능력 되면 일곱 명도 할 수 있는데 여자는 단 한 명이라도 빠지기 때문에 절대로 바람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 쪽에서 손해 아니냐고 나올 거죠. 그런데 그 시대 권력의 지식이 뭐냐 하면, 살림을 잘 하는 여자를 바람피우는 여자보다 더 위대한 명예를 줘버렸어요. 세상에 자식 교육 잘 시키고 한 남편 잘 섬기니 최고야. 아주 덕스러운 여자라고 해서 바람피움으로 말미암아 남성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했던 그 남자도 정숙하고 살림만 사는 여자 앞에서 명예에 있어서 기가 죽을 정도로 그만큼 사회가 정숙한 여자를 옹호했던 시대에요. 그래서 성의 질서가 그나마 유지가 됐던 겁니다.
그러면 결국 가정이 단단해야 된다는 거예요. 권력의 네 가지를 위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여자가 자식을 단단히 잡아줘야 국가발전과 정치발전과 진보에 필요한 인재들이 나온다. 그것 때문에 가정에서 교육을 심하게 시킨 거예요. 거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나오고, 그게 오늘날 현대인의 자의식이 된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요.
그런데 지금은 경제논리가 들어오지요. 경제논리는 그야말로 미친 것 중에서 더 미쳤어. 사람은 경제가 없을 때는 가정 행복, 나의 행복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돈의 세계, 자본의 세계는 돈에 끌려 다니는 그 자체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아요. 20대나 30대 초반이 남자들이 새로운 차에 로망이 있지요. 그러면 어느 정도면 만족합니까? 그런데 만족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게 정치라면 어느 정도 만족이 되는데 경제는 새로운 이익을 계속 창출하잖아요.
옛날 경제는 필요한 걸 생산하고 소비하면 그만이잖아요. 지금은 소비욕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생산하는 거예요. 광고를 해서 없는 소비를 만들어서 그들이 새 차 내라고 요구하게 만들어요. 경쟁적으로. 이것은 고정된 이익이 아니고 움직이는 이익,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익, 그 변화에 동승하지 아니하면 한 순간도 우리는 새로운 자극적인 쾌감, 희열과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늘 드는 예지만 촌에서 동네 순이가 예뻤다. 교회에서 낡은 오르간 치는 그 순이가 제일 예뻤고 동네 총각들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잖아요. 갑돌이 갑순이 노래가 그 내용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 압구정에 취직했다. 그러다 명절에 촌에 가서 순이 보니까 이건 여자도 아니죠. “내가 미쳤지. 저런 인물을 좋아했어. 참 내가 우물 안에 개구리였구나.”라고 하죠. 이게 뭐예요? 그 동네에 있을 때는 자기에게 내재된 권력체제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바뀌니까 똑같은 눈을 가졌는데 주위 환경이 바뀌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장소가 주체를 생산합니다. 다른 말로 장소가 주체를 또는 권력을 생산합니다. 정치라면 니 나라, 내 나라가 있지만 지금은 칸막이 없어졌어요. 장소가 뭐냐 하면, 돈이 흐르는 장소에요. 자본의 시장이라니까요. 월급 더 주는 회사로 스카우트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돈 더 주면 대번에 옮겨버려요. 장소 자체가 머물지 않아요. 장소가 주체를 만드니까 주체도 고정적이 아닙니다. “당신만 있으면 족해.” 신혼 땐 다 그래.
제가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주례하면 이렇게 한다고 했는데. 당신을 사랑하면 안 돼요. 상대방 속에 있는 새로운 면을 사랑해야 돼요. 너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날마다 새로운 면이 나올 때만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 또 기대가 되니까. 당신에게 이런 면이, 놀라워라. 3년 전이나 5년 전이나 맨 그 모양 그대로라면 지겨워. 지겨우면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으면 내 욕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어. 내 욕구는 경제적인 흐르는 주체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유머와 아이템을 개발해야 되고 계속해서 웃겨야 되고 새로운 면을 계속 보일 때 상대방은, “우리 부부는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르겠어?”
지금은 새로운 면이 없어도 왜 좋으냐? 아직까지 다 안 더듬었거든. 구석구석 다 수색을 안 했어. 상대방의 영토를 다 조사를 못했어. 그것 끝나고 나면,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것 내놔라. 그래서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하는 이야기가, 신혼 때는 절대로 그런 소리 안 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새로운 면을 기대했는데 유머도 옛날 아재 개그고 이제는 새로운 게 안 나오니까 시시해요.
여러분, 집에 가구를 왜 바꿉니까? 가구를 바꾸면 분위기가 쇄신 되지요. 그 바람에 한 달은 신선하지요. 남자들이 왜 자구 바람피우려고 들썩거리느냐 하면, 바로 새로운 걸 찾고자 하는 남자의 근성이라 하는데 근성이 아니고 19세기에 형성된 권력의 지식입니다. 역사가 아니고 계보에요. 그리고 남자는 그것에서 못 벗어납니다. 내재화돼있기 때문에.
우리 모임이 뭐예요? 미셸 푸코 연구회입니까? 복음 전하는 장소지요. 미셸 푸코는 알아요. 나는 악마를 보았다. 인간은 모두가 갇혀있다. 백날 뛰어봐야 못 벗어난다. 돈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러면 한 1억? 1억만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같은 말이에요. “돈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와 같은 말이, “1억으로 난 족해?” 이럴 사람 아무도 없어요. 1억을 종자돈으로 해서 1억5천. 1억5천에 만족할 사람 없어요. 2억, 3억, 10억, 조 단위까지.
조희팔이 십만 원, 이십만 원 모으려고 사기 쳤습니까? 어떤 영화에 보니까 조 단위가 아니면 푼돈이라 해요. 조 단위가 아니면 사기가 아니다. 최순실이 몇 조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그것 때문에 그렇잖아요. 최순실이 박근혜랑 해서 세상에 오백만원이나 횡령했대. 데모 안 합니다. 옛날이면 깜짝 놀라겠지만. 눈이 그만큼 높아졌어.
갇혀있는 권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이제는 복음으로 대비해야죠. 항상 철학 강의하면서 마지막에는 복음과 대비해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철학으로 또는 과학으로 해결점이 없다는 걸 말씀 드렸지요. 복음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인간 자체가 성경에 보면 오염됐어요. 오염은 더럽다는 겁니다.
길에 휴지가 있습니다. 내가 줍자. 처음에 도로포장 공사할 때는 휴지가 없었어요. 한 두 시간만 지나면 휴지, 담배꽁초 떨어져있지요. 그러면 휴지를 줍고 담배꽁초를 주우면 처음 상태로 돌아가지요. 오염된 것만 제거하면 깨끗하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돌아갈 원천이 없어요. 원 상태가 없어요.
그러면 해결방법은 뭐냐?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오염된 것을 가림 막을 칩니다. 이게 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히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깨끗하다. 나는 건전하다고 나와요. 그러면 오늘 강의에 복음적 해결은 간단한 거예요. 이 가림 막을 제거하면 됩니다. 제거하게 되면 우린 죄인 되잖아요. 부끄럽잖아요. 오염됐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오염된 것, 비거룩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복음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이에요. 주님 앞에서 자기 의, 자기 잘난 체를 제거해버립니다. 제거할 능력이 스스로는 없어요. 그게 불교거든요. 나는 욕심이 많다. 이 욕심은 어디서 나올까? 불교는 오온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다섯 가지의 추상적인 물질체로 돼있다고 봐요. 내가 욕심이 있어서 생로병사 괴로움이 많으니까 욕심만 끊으면 된다는 거예요. 아까 아스팔트에 휴지 주우면 깨끗해진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건 동양철학이고 불교도 유교도 이건데,
성경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이면 아담의 자손답게 오염된 모습으로 사람 앞이 아니고 그대로 주님 앞에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노출시키는 분은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장로도 아니고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럼 예수님은 깨끗하게 오시는가? 예수님이 깨끗하게 와서 노출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지저분하게 십자가에 피 흘린 모습으로 와요.
피 흘린 모습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깨끗하고 우리는 더럽다는 게 아니라 네가 더러워봤자 네가 아버지 앞에 저주받을 만큼 더러워봤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저주받은 십자가거거든요. 저주받았다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의 죄에 대해서 아버지가 심판한 거예요. 그 심판의 자리로 우리는 갈 수 없어요. 왜? 우리는 뜯어내봐야 불교식이 되니까.
나는 부족하다. 머리 깎고 절에 가야지. 나는 수녀원에 가야지. 나는 기도원에 살 거야. 기껏 인간들이 하는 것이 내려놔봐야 내려놓은 그것을 보고 대견해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고 부인해도 부인한 그 행위는 고상하게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착해 보여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전적으로 죄인 될 수 없어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새벽기도 40일 동안 연속해도 안 돼요. 성경 보고 기도해도 안 돼요. 전 재산 바쳐도 안 돼요. 절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항상 미화하고 옹호하고 변호하는 무화과 나뭇잎 치마의 속성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나와 하나님 상대를 끊어야 돼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예쁨 받고 귀여움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나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럼 뭘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 달린 그 모습에 본인이 합체하는 겁니다. 합체하는 방법은 우리 쪽에선 안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아 버려요.
그러면 그다지 내가 잘난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아요. 그러면 여기서 감사가 나오는데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가 나오는데 내가 무조건 죄인인 것을 가볍게 기쁨으로 아주 부담 없이 그냥 수용하게 되면 거기서 감사가 나오죠. 감사가 나오면서 겸하여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렇게 나오는 게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우리를 십자가 못 박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교회에서 도 닦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육의 열매에요. 육의 열매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나오죠. 저 사람은 몇 시간 기도했고, 헌금 얼마 했고, 나는 일주일 교회 한 번 갔는데 저 사람은 세 번 가고. 이런 식으로 항상 비교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감사가 나오도록 노력이 나와요. 위선이죠. 감사는 할 이유가 없어요. 감사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결과적으로 나와야지 감사하기가 돼버리면 안 돼요. 온유하기, 이런 것 하지 마세요. 화평하기는 또 하나의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고맙게도 마귀가 도와줘요. 마귀가 우리로 철저하게 이 세상 사람으로 살게 만들어요. 네가 어떻게 그렇게 된지 알아? 네가 그 사람들 생각해서 그런 행동하면 안 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행동을 해.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횐데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해?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
마귀가 눈처럼 깔려있는 모든 권세 안에 우리가 잠기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생각나는 것이 남들이 내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지, 특히 여자들 화장할 때 코스가 24개나 나와 있잖아요. 혼자 살면 화장 필요 없지요. 이 사회에 살려면 남들 의식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지요. 그 모습을 그대로 받는 거예요. 받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 같이 합세해서 같이 웃고, 같이 떠들고 같이 동조한 내 모습을 그대로 이 세상에 던지는 거예요. 던지게 되면 그 모습과 동시에 이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보게 되면 이러한 지극히 세속적인 생활을 하는 내 모습 속에서 감사가 나오지요. 이런 죄인을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따라서 도 닦겠다고 산 속에 들어가거나 기도원에 가거나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주어진 환경이 주께서 죄인 되라고 주신 환경이에요. 그 환경 속에서 평소에 하던 대로 마음껏 자기 성질내시게 되면 그것과 하나님에 의해서 노출된 나의 세속적 모습과 죄악 된 모습과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십자가, 유월절 양의 피와 만남 속에서 우리가 성도라는 감사가 이런 존재도 구원되었다는 감사가 나올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적인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나 일부러 십자가 피를 가지고 찾아오신 용서를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감사케 해주시고 그 감사하는 자들의 모임이 천국인 것을 늘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