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32절(자기를 향한 거절)161206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2장32절(자기를 향한 거절)161206a-이 근호 목사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12:32)
자, 요한복음 12장 32절 한번 보겠습니다. 12장 32절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끈다는 쪽은, ‘수평적’으로 옆에 있는 것을 이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땅에서 들린다고 했으니까, ‘수직적’으로 주님은, 인간들이 사는 이쪽 차원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빠져 나가는 거예요. 사람 사는 동네에서 이제 빠져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사는 동네에서 못 빠져 나와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인간들 보기에 전부이기 때문에, 전부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거든요. 이 전부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냥 공동묘지에 그냥 죽지요. 조상들도 죽고, 그러니 이쪽 세계에서, 만약에 죽음을 통해서 만약 나간다고 하게 되면, 그쪽 세계도 사실은, 이미 사람들이 저승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다 생각해놓은 동네라는 것.
죽으면 저쪽 간다. 그리고 저쪽 가게 되면 다시 이쪽으로 못 온다. 그런데 이쪽으로 가끔 오는 길이 있는데, 그건 아마 귀신일 것이다. 그러면 귀신이 오게 되면, 흠칫 “당신 동네 아니에요. 저쪽으로 가세요. 빨리 죽은 자들의 모임에 가세요!” 보낸다. 이것이 인간들이 아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할 때에, 그 당시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우리는 똑같이 질문하는 겁니다. “우리를 떠나서 가기는 어디로 가!”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이 그겁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했거든요. 내가 저 세상에 간 게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이 참,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 그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그 어려운 이유가, 지금부터 이야기 할 테니까, 이거 뭐, 감당 안 되면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어떻게 더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옛 계약이 깨어진 상태에서 새 계약이 성사된다.’ 입니다. 옛 계약이 깨어진 상태에서, 옛 계약의 완성이 새 계약이 아니에요. 연속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연속 되는 게. 옛 계약이 깨어졌다 하는 것은, 여러분 어디서 생각해야 되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내려올 때 뭐를 깼습니까?
돌판을 깼지요? 그게 바로 계약이 깨지는 거예요. 그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 하나님의 내 구원도 이 계약으로 되는구나.’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알게 됩니다. 이게 계약으로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계약에, 그 계약을 할 때, 그 계약서를 누가 작성했습니까? 그게 사람이 끼어들어서 작성했습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했어요?
그래요. 하나님이 혼자 했지요. 여기서부터 어려운거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계약으로 되지요. 그런데 그 계약서를 누가 만들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만들었지요. 그러면 이 말은, 앞 뒤 말을 합쳐버리면 인간에게는 구원이 있다? 없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구원 받겠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너무 살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시고, 뭐 착한 사람은 천국에, 나쁜 사람은 지옥에, 이렇게 해주세요. 해주세요.” 라고 생각할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계약 속에 들어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계약서에 안 들어가요 그게. 계약서에 들어가지를 않는다고요.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계약 자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애가, 뭐 갑자기 어린애가 소아암에 걸려 죽어간다. 그러면 엄마가 뭐합니까?
“엄마! 나 죽으면, 나 어디에 가는데?” 엄마가 “죽으면 너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천사 같아서, 천사들이 모여 있는 하늘나라에 가는 거야. 거기 가면 먼저 죽었던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다 있는 거야. 나도 곧 따라갈게. 걱정 하지 마! 아빠, 엄마 뒤따라갈게. 저 하늘나라, 저 푸른 하늘, 저~ 뒤에 보면 천국이 있어. 거기에 가!”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그게 계약서에 나옵니까? 그게 계약에 안 나와요. 계약서에 그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약에 처음부터 들어가지를 않지요. 들어가지가 않기 때문에 뭐를 모르냐 하면은, 계약의 깨짐을 모릅니다. 계약의 깨짐을 몰라요. 이게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계약 깨짐을 염두에 두고, 항상 깨진 계약을 딛고, 새 계약으로 나아간다는 취지로 모든 멘트를 날립니다. 모든 말씀을 주시는데, 인간들은 계약서 자체부터 생각 못해. 계약서 자체. 계약서 자체를 생각 못해요.
‘죄악으로 구원’ 받는 생각 못하고, 우리 품성, 우리 심성, 우리가 갖고 있던 양심. 이것을 어떻게 주물럭주물럭 해가지고 양심스럽게 하게 되면, 아무래도 저쪽으로, 죽고 난 뒤에는 좋은 나라에 가고, 양심이 더러우면 아무래도 나쁜 나라에 갈 가능성이 많다. 기존의 계약서 없이,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렇게 나서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복음 12장 32절은 결국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까? 이것은 “들리고, 내가 내 백성을 이끌겠다.”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에만 있는 거예요? 계약서에만 있는 겁니다. 어느 계약서? 그것도 새 계약서에만 있는 거예요. 새 계약서에 있어요. 그런데 그, 새 계약서의 원판은, 그게 옛 계약의 원판이 있어요. 있는데, 그 그림자는, 그 실제적으로 보는 것은 새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은, 순서상 옛 계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에 예수님이 새 계약을 맺었으니까, 옛 계약을 근거로 해서 새 계약이 오는 것처럼 여러분들 생각하시겠지요. 순서상 그러니, 역사적 순서가 그러니까, 구약이 먼저고 신약이 나중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그게 아니에요. 신약이 먼저 있고, 신약을 역사 속에 맛배기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그림자라 하는데, 신약의 내용을 역사 속에서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게 뭐냐 하면은, 구약, 옛 계약입니다. 옛 계약이 원본이고, 신약이 완성이 아니라, 원본은 새 계약이 원본이고, 구약은 일종의 ‘사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본. 그래서 사본에서 나오는 것은 ‘성령’이 안 나오고, 뭐냐 하면은 ‘성신’이 나와요.
성신은 온전한 구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구원을 안줘요. 성신 받았어도 구원 되지를 않습니다. 성신 받아도 악신 받을 수가 있어요. 그중에 누군지, 대표적인 사람 누굽니까? 다윗 오기 전에 사울 왕이죠? 왕 될 때, 성신이 임해가지고 사무엘처럼 막 예언 했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 하니까 갑자기 악신이 걸려서, 창을 만들어 기타 치는 다윗을 향하여 벽에 박으니까, 다윗이 피하고, 살고.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윗에게 뭐가 임하냐 하면은, 성신이 임하게 되지요. 다윗이 성신이 임하는데, 그 성신이 임하니깐 그 다음은, 다윗은 어떻게 완벽했습니까? 메시야 다웠어요?
아니지요. 성신이 임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고의가 아닌 척 하면서 살인해 버렸어요. 완전 범죄를 시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신이라 하는 것은 기능적이라니까요. 다윗이 보여줘야 될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저주를 보여줘야, 저주를. 저주를 보여줘야 돼요. 저주를 먼저 보여주고, 그 다음에 다윗이 보여줘야 하는 게 뭐냐 하면은, 저주 속에서 구원 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순서가.
그러면 저주라 하는 것은, 무엇에 해당하는 사본이다? 구원에 대한 긴 그림자가 이 땅의 저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떤 취지로 달렸어요? 아버지한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한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아버지한테 어떻게 되었어요? 네? 저주 받았잖아요. 저주 받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 받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천국은 절대로 올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이제 확실하게, 확실하게 보여줬어요. 십자가를 믿는 다는 말은 뭔 뜻입니다? “아! 이 저주 받을 인간이, 구원을 내가 탐냈군요!” 그걸 자백 하는 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 받겠다는 이 지식이, 이 생각이, 딱! 저주에 합당한, 저주 받을 짓거리다 하는 것을 십자가를 들어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 믿고 구원 받겠다는 선교단체나 그리고 이런 개혁주의 신학은, 몰라도 이거는 완전히 엉터리에요. 거짓말입니다. 본인이 십자가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저주를 보여주는 겁니다. 기능이, 성신 받은 사람으로서, 저주. 내가 왜 저주 받아야 되는 존재인 것을, 간음과 살인에 의해서, 그리고 또 뭐냐 하면은, 인구조사에 의해서, 원래 인구조사가 20세 이상부터는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20세 이하 까지, 그렇게 인구조사하면 안돼요. 20세 이하까지. 어린 아이까지 미리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했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지요. 사흘 동안에 삼만 명을 작살내셨어요.
이제부터는 목사가, 자기 교회가, 얼마나 자기가 와서 부흥됐는지, 인구조사를 해가지고, 한 50명 교인인데 한 100명쯤 되가지고 “아이고, 목사님 100명이나 됐습니다.” “이렇게 부흥됐구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전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고 팍팍 이렇게 사업을 밀어 주는구나.” 좋다 했는데, 그 교인들 버스타고 놀러가 버스 뒤집어져 버려서 70명이 죽어버렸어.
70명 죽으면, 숫자가 100명이었는데 70명 나가면 도로 마이너스 20명 되는 거예요. 이유는 목사가 교인숫자를 헤아려서, 그런 식이죠. 원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구약 자체가 사본이기 때문에, 신약의 사본이기 때문에, 원본은 신약이고 구약은 사본으로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그 원본에 갖고 있던, 그 완료된, 완성된 그 의미를 역사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모자이크처럼, 모자이크 처리하는 거 알지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윤곽은 희미하게 나타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 윤곽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은, 그 윤곽이라는 것 자체가, 구약 자체가 윤곽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되는 구원 방식이에요. ‘행함으로 구원방식’
구약에서 괜찮은 평을 받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자기 진짜 자기 모습을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그게 한계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사본입니다. 인간자체가. 원본은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모양새도 사람 아닙니까?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삐-’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누구의 영을 받았는가? 거짓말하는 악마의 영을 받아서, 입만 끄집어내면 다 거짓말이에요. 입에서 끄집어내면 다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쓰는 모든 글자와 문자, 행동도 거짓이고. 어디서 원어 성경, 원어를 연구한다는 것도 그것도 거짓이에요. 거짓이 아닌 문자는 없습니다. 어떤 단어도 거기에 지시되는 물체와 합치되는 단어가 없어요. 이게 귤이라 하는, 이게 귤이냐? 귤이 하나밖에 없다면 합치되는 것 같은데, 이것과 다른 모양새에 약간 더 동글동글한 이런 게 있으면, 어느 게 귤이냐 말이에요.
“아이고, 비슷무리하면 다 귤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유적 존재’라 하는 겁니다. 유적 존재. 개념이 실재를 떠나서 추상 개념화 시키는 새로운 부류가 윗층이, 다락방이 하나 생기는 거예요. 다락방이. 그만큼 어떻게 실재를 떠나서 추상이 된 겁니다. 이런 게 뭐에요? 이런걸 뭐라고 합니까? 삼각형이죠? 그중에 어느 게 삼각형입니까? 뭐 각도가 180도, 내각이 어떻게 변이 세 개, 삼각형이라 하잖아요.
진짜 삼각형은 어느 것 가지고도 삼각형이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삼각형이 이 세상에 네 개밖에 없다면, 네 개를 가지고 이런 형태를 가진 것을 삼각형이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삼각형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 머리에, 머리 안에 들어있지요. 머리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이걸 참고로 해서 우리 머리 안에 들어있어요.
이걸 영원한 신의 세계에 들어 있다는 사람이 플라톤이었습니다. “진짜 형상은 이데아 세계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모방이다. 사본이다.” 그렇게 이야기 한 겁니다. 플라톤이. 그리고 결정적인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신은 영원하지요? 안 죽지요? 불사의 존재이지요? 그러면 신이 어떤 형상으로,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분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인간도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받는다 해놓고 이게 불사의 존재가 아니고, 죽음이 왔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 안 죽는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옛날부터 안 죽는 인간을 이렇게 했어요. ‘영혼’이라 해요.
인간은 육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또는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는데, 영혼만은, 육은 없어져도 영혼만은 불멸하다. 이게 동양철학도 그렇고, 그리스 철학도 그렇고, 플라톤, 뭐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심지어 저, 아프리카 토속 종교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성경에도 나와 있지요.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런 식으로.
전도서에도 나와 있지요. 동물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흙은 아래로 간다. 그래서 그게 인간들의 뭐냐 하면은, 기본적인 종교가 되고 말았어요. 기독교는 뭐냐? 예수 믿고 우리의 영혼은, 죄 용서 받는 영혼은 하늘나라 가고, 땅은, 몸은 지상에 흙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우리 흙에 속한 형상이 하늘 속에 들어간다.
그러면 결국은 다 그 이야기를 해보면 뭐냐 하면은, 철학하고 전혀 별 차이 안 나지요? 그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죽을 때 떨어지고 나중에 다시 합쳐진다? 합쳐지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하여튼 뭐든지 사람이 되니까 안 합쳐져도 괜찮아요. 천사처럼 살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 하는 거예요. 거기에 거울을 근거로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흙에서 ‘후~’하고 숨을 쉬니까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까 인간의 흙에다가 ‘후~’ 숨을 쉬니까, 숨을 ‘루아흐’ 숨을 쉬는 영이 있다. 그러니까 영하고 몸하고 맞으면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까? 선악과를 알고 있으면 더 이상 인간은 끝났어요. 선악과를 알고 있으면. 불멸의 존재가, 영혼이 불멸할 존재라 할 때, 그 영혼이 불멸의 존재라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은, 인간은 영혼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게 아니에요. 아닌데,
우리가 몸은 떨어져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산다 하는, 그 아이디어 자체도 이미 인간이 아닌, 범죄 한 인간으로서 나오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겁니다. 이건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하면은, 이것은 악마의 아이디어에요. 악마는 뭐만 피하면 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그 새 언약이 원본이지요? 원본만 피하면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빼고, 빼고, 모든 것은 다 악마가 용납을 하고 허용을 하는 겁니다. 사는 것이,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나온 생각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때부터 나온 게 ‘자의식’입니다. 자의식. ‘나는’ 이렇게 나오죠. 그런 ‘나는’이 성립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누구냐, 두 번째는 ‘나’ 1인칭이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너는’ 세 번째 ‘그는’ 나오지만 그는 ‘너는’에 포함시키면 되요.
‘나’ 빼놓고 ‘너’거든요. ‘나’와 ‘너’가 이렇게 분류가 된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는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본에 나온 거고, 그럼 원본은 뭐냐? 원본은 딱 이것밖에 없어. ‘나’ ‘너’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이미 범죄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요.
지금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오잖아요, 이번 수련회에서 할 건데 미리. 하나님의 형상을 독점했다. 독점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수리 하는 게 아니고, 어디 카센터에 가서, 이게 드라이브 하고 해서, 죽어 있는 형상을 ‘삐빅 삐빅’ 해가지고 이렇게 생기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아예 형상이 없어요.
있다면 마귀의 형상밖에 없지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었고, 아담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말은 키가 몇 센치냐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만이 창세전에 안고 있는 그 관계를, 관계성으로 아담을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보여주는 관계는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원본 되는 십자가 이전에 구약의 사본에는 어떤 식이냐? 사본에는 바로 뭐가 왔느냐 하면은, 이렇게 왔어요. ‘언약’ 제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언약 말은 안했죠? 뭐라 했습니까? ‘계약’
계약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시기 때문에 아무도 계약에 대해서 아는바 없습니다. 그 계약으로만 비로소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아는바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 계약서가 덮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이렇게 휩싸이게 되죠. 구원 작업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이, 계약이 아닌 것들은 어디에 의해서 다 폐지 돼야 됩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새 계약에 의해서, 계약서의 내용이 없는 것들은 다 폐기 돼야 되겠죠? 그래서 제가 문장을 하나 적어 보겠습니다. ‘진리는 모든 결과를 해체시킨다.’
사도바울이 늘 평소에 이야기 했던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 당신이 이만큼 살아온 것에 당신이 얼마나 기여했습니까?”라고 누가 물으면 사도 바울의 답변은 뭡니까? “내가 나 됨은 귀한 게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열심히 뭐 했고, 로마에 갔고, 편지 썼고, 고생, 옥에 갇힌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그 계약에 의해서 내가 했다는 것은 전부 다, 모든 결과는 해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체 될 때, 죽을 때 해체 됩니까? 평소에 늘 해체 되는 겁니까? 평소에 늘 해체되는 거예요. 평소에 늘 해체돼요. 그러면 해체 될 때는 해체되는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해체되는 이유가 뭡니까? 계약서에 내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는 게, 계약서 내용이 그런 게 없는 거예요. 내가 전도해서 복 받는 다는 게 계약서 내용에 없습니다.
그 없는 것을 뭐라고 하냐면,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강의를 들으면 결론 나왔지요? 뭐냐 하면은, 죄냐, 의냐, 구원이냐, 천국이냐, 율법이냐, 뭐냐, 모든 개념은 어디서 도출되어야 된다 말입니까? 계약서에서 나와요 계약서에서. 그것도 사본이 아니고, 원본 되는 원본 계약서에. 그 원본 계약서는 무엇으로 맺었습니까?
이제는 내 살과 내 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살과 피로,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다 이야기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에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그 계약서의 내용과 계약서에 내용이 없는 것들은, 죄라고 변형이 되면서 거부당해야 되겠죠. 그래서 성도의 특징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오늘 제목을 이것으로 할까 생각하는데 ‘자기를 향한 거절’입니다. 누가? 내가, 나를 향한 거절. 누가 나를 이렇게 얼굴 돌리게 만드냐? 내가. 너는 아니고, 너는 빠지고 라고 내가 나에 대해서 거절 해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엘리야고, 모세고,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잖아요.
야곱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은 누구 때문에, ‘아브람’이 구원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되는 거예요. ‘야곱’이 구원되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구원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일 때는 이스라엘을 생각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생각 한 적이 없지요. 아브람 때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요. 아브람의 뜻은 뭐냐 하면은 ‘나는 존경받을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뜻은 뭐냐 하면은 ‘만인의 아버지’에요. 만인. 그러니까 아브람은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아버지다’에 초점이 있고, 아브라함을 초점은 ‘내 자식이 수타게 많다’는데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출중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데 왜 자식이 이렇게 많아?” 라는 그것을 근거로 했을 때 자식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나 아브람이 기여한 적이 없다는 그 고백. 그리고 자기를 향한 거절, 또는 다른 말로 자기를 향한 포기. 다 포기하지 마. 자기를 향한 포기.
그것을 어디에 담는다고요? 자기 이름에다가, 그것을 내용물로 담아버려요. “나는 내가 구원되었어도, 내가 복 받는데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가 그게 안에 그게 내용물을 살릴 때 들어 가야돼요. 이 언약이 되려면 그렇게 실패하고 죄짓고 폐기 처분되는 게 그 내용물에 들어가야 된다고요. 갖다 버리는 게 아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 깨졌잖아요.
그 깨진 돌판 어떻게 합니까? 그 깨진 돌판의 취지가 “에이, 뭐 한번 실수 한 거니까, 넘어가자.”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니면 끝까지 깨진 걸 계속 가져갑니까? 그 깨진 돌판을 지상에서 다시 만들어요. 단 뭐는 빼고? 글자만 빼고. 그 깨진 글자 없는 돌판을 만들고, 그 깨진 돌판을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 다시 모세가 들고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손에 뭘 들고 있어요? “전에 주님 주신 돌판이 깨진 거, 다 사람 탓입니다.” 하는 증거물이 되겠지요. 이게 오늘 본문에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나오는, 바로 인자의 들림이, 예수님의 몸무게가 가벼워서 들리는 게 아니에요. 인자의 들림이, 밑에서 죄가 이렇게 역도기 들 듯이 그냥 밀어 올리는 거예요. 그 들림이.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떠난다.” 이게 아니라, 들릴 때에, 예수님이 들림으로 말미암아 정말 이 세상은 일말의 구원 받을 권리나, 자격이나, 가치가 없음을, 유일한 증거물로서 주님이 들립니다. 그 들림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어차피 십자가에 죽었다가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리고 40일후에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부활했다, 승천했다는 그 다음의 스케줄은, 십자가 안에 다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그게 차곡차곡 채워서 다 들어있어요.
십자가 믿고, 부활 믿고, 이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믿게 되게 되면, 십자가의 취지를 무산시키고 부활 취지로 넘어 오는 게 아니고, 부활 안에 그리고 승천 안에, 십자가의 의미를 그대로 그 유일한 내용으로 담아서 부활되고, 십자가, 승천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그 의미를 모르면 부활도 안 되고, 그 의미가 안담기면 부활도 안 되고, 이게 승천도 못 하는 거예요.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난 뒤에 “한 두 시간 됐으니까, 건지자!” 해서 건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룰루랄라~’ 노래 부르고 왔습니다. 부인이 “고기 몇 마리 잡아왔노?” “난 고기는 잡은 적 없고 그물만 잡았다.” 이게 되겠습니까? 뭔가 그물을 들고 왔다는 것은, 그 안에 그물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어떤 의미가 함유된 채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들렸다는 말은, 과연 이 세상은 악마의 세계이며, 그 악마의 세계에서 구원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그것을 분명히, 분명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할 정당성이, 분명히 다 확실하게, 공의롭게, 정의의 확립이 되어 있어야 돼요. 자, 한번 질문을 해볼게요. 다윗이 인구조사 했지요. 인구 조사할 때 20세 이하까지 다 인구조사해서 벌 받습니다.
20세 이상은 정치적으로 행정관리 하려면, 헤아리고 군대 조직도 해야 되고 해야 되니까 했는데, 그 세 가지 벌 중에서 제일 짧은 것을 했지요. 사흘 만에 전염병 퍼지는 거 했잖아요. 온역 퍼지는 거. 그런데 거기서 7만명이 죽었잖아요. “벌 받았으니까, 벌 받았으면 그러면 끝났네?” 아, 이게 문제에요. 여러분,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십자가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죽었으면, 해결해 줬으면, 더 이상 우리가 십자가에 더 이상 구애될 필요가 없네요?” 십자가라는 게 죄 용서하기 위해서 처리하는, 그 뭡니까? ‘가습기’ “세균 없애는 살균 가습기 해가지고, 세균 날라 갔으니까 그냥 뭐 사용하면 되겠네요.” 만약 우리가 세균이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우리가 세균이라면. “십자가, 죄, 나는 중요한데 죄가 있어서 골치 아프구나. 예수님! 뽀빠이! 살려줘~” 했더니만, 예수님께서 ‘짠짜잔~’ “십자가 준비 됐느니라”
“그러면 십자가가 와서 내 죄를 씻어주게 되면, 죄 없는 상태의 내가 되니까, 나는 구원 받는다.” 이거 맞아요? 틀려요? 뭐가 문제 입니까? 지금 내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라는 가습기, 살균 가습기를 이용 한 거잖아요. 그러면 나는 처음부터 구원 받는 자가 돼버려요. 구원 받는데 그놈의 죄 때문에 구원 못 받은 거예요. 발목을 잡은 거예요.
그래서 죄만 떨어내면 이 몸은 그대로 구원 받겠다 하는 이 자의식의 심보가, 이게 바로 마귀가 앞장세운, 정확하게 마귀의 마음이에요 이게. 정확한 마귀의 마음이에요. 마귀, 그게 마귀의 구원법이에요! 마귀의 구원 방식이고.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마귀의 구원 방식 외에는 납득이 안 돼. 그것만 이해가 돼요. 아이고, 직원들 다 갔나? 이렇게 고함질러도 되는가?
그런 쪽으로, 이게 교회 뭐 바르게 하고 목사가 돈 밝히고 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뭐, 목사가 너무 돈 밝히고, 여자 밝히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지금요. 사람은 거 참! 복음은 모르는데 사람은 참 점잖다. 예수님이 점잖은 분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복음을 외치는 분이지, 점잖은 분이 아니에요. 뭐, 윤리, 유교, 유교 서당, 지리산 서당을 모셔 놓지.
아니면 성철 스님이나, 법륜 스님이나 그런 사람 모셔놓지. 그 인기 많던데, 아니면 봉은사 주지나, 할 거 뭐가 있어 그렇게 되면. 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는가를 내놓는 곳이에요 그게. 교회가 뭐냐? “우리가 이래서 구원 못 받는 겁니다.” 라는 것을 전부다 그 증거들을 ‘주욱~’ 이렇게 내놓는 거예요 내놓는 거.
교회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 트리에 선물 걸듯이 걸으세요. “나, 이것 때문에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것 때문에, 어제 철야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십일조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걸 달아놔야 돼요. 주렁주렁.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죄를 씻어주는 그러한 기계적 장치가 아닙니다. 장치가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느냐? 인간 자체가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은, 옛 사본에 갇혀있어요. 왜냐하면 옛 사본이, 사본인줄 모르고 그게 전부 인줄로, 원본인지 알고 있어요.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옛 사본에 이게 있어요. 갑자기 또 제목이 바뀌나? 할 때마다 바뀌네. 옛 사본에 법이 있습니다.
앞에 한 자가 붙인다면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이 있어요. 율법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라’ 아니면 ‘하지 마라’ 하라, 하지마라. 율법 자체가 뭘 유인합니까? 행동을 보여라. 이것을 유인해줘요. 행동을 보여라. 그런데 그 법이 우리 바깥에서 법이 오는 것 정도가 아니고, 바깥의 법이 내 안에 있는 법과 같이 마주쳐요.
왜? 악마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선악 체제가 있어요. 선악 체제적인 입장. 생명나무 못 따먹는 조건 있잖아요. 나는 생명나무를 절대 주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선언하게 만드는 그 장치. 그 장치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그 장치를 향하여 법이 날아오니까, 우리는 뭘 동원시킬 수밖에 없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선악, 그 메카니즘. 선악 기재라 하는데, 메카니즘. 선악장치를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잘만하면 선이 되고, 못하면 악이 된다. 벌써 이 목적 자체가, 의도 자체가 같고, 그것을 가지고 율법을 마중을 나와요. 마중을 나오면 여기서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은, Baby One More Time 손가락과 손가락이 만나는 거. 글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손가락.
바깥에 있는 율법과 내 안에 있는 법이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기다렸다는 거예요. “목사님! 하라, 하지 마라. 나 그 설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왜? 하라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마라 하면, 안하면 되거든요. 교회에 11시까지 오라 하면, 오면 되고, 남아서 오늘 청소 하라면, 청소하면 되고, 김장 하시라 하면, 김장 담으면 되는 거예요.
김장 담고 난 뒤에 아무 느낌이 없다. 그거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반드시 하게 되면 뿌듯함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십일조하고 나 아무 감동 없다. 절대로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쟤는 안했는데 그 어렵다는 십일조를 제가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합니다. 조금 돈을 벌면 안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푼돈 버는, 아르바이트 하는 이 정도는 합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이거.
목돈, 나중에 전세금 올리고 이런다면 곤란 합니다 만은, 이거 푼돈은 합니다. 버틸 수 있어요. 하라, 하지마라가 마음 준비되어 있다니까, 빨리, 빨리 좀 이야기 해달라고 빨리. 그러면 빨리 이야기 하라, 하지 마라를 빨리 누가 지시하겠어요? 이것은 지도자가 있어야 돼. 지도자. 그럼 지도자 없는 교회는 교회입니까? 아닙니까?
‘삐-’ 교회가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지도자가 없는, 그런데 로마서 8장이나 요한일서 2장 28절에서 누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했어요. 누가? 누가 우리를 가르치지요? 성령이 가르치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누가 가르치지요? 지도자가 가르치지요. 지도자가. 네? 지도자가 있는 곳에 모이는 거예요. 지도자가. 왜 모이지요?
하라, 하지마라를 지시받기 위해서. 왜 지시받아야 되지요? 지시에 따를 경우에는 내가 선한 쪽에 속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희열과 기쁨을, 내가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렇게 양육 받아왔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때는 우리의 지도자였고 부모는 “밥 흘리면 안 돼. 똑바로 앉아.
아이고, 춤출 때 그래 춤춰야지, 아이고 잘한다. 박수해봐 박수? 짝짝짝! 옳지, 박수 잘한다.” 우리는 이렇게 당근과 채찍으로, 요새는 채찍도 없어. 순 당근, 끝까지 당근이지만. 정유라 보세요. 끝까지 당근이에요 당근. 말이나 타고 다니니, 말 타니까 당근 좋아하지. 당근으로 계속 해서 “우리 내 새끼 최고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지요,
이제는 결혼을, 4월 달에 결혼을 하지만, 계속해서 자식을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어이구, 내 새끼, 내 자식 최고다.” 과연 최고일까요? 네? 계약서도 없는데. 저 계약서에, 옛날 계약서에는 그렇게 보이지요. 사실은, 그 안에 사실은 새 언약이 녹아져 있는데, 우리 눈에 보이는 법으로 오니까, “이게 옳구나, 이게 주의 뜻이구나. 쉐마, 쉐마. 들으라, 들으라. 주의 말씀 잘 듣고 있습니다. 네, 잘 듣고 있습니다. 잘 듣고 있습니다.
십계명 지금 지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나이다. 예수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부자청년이 마태복음 19장에서 했던 거. 그 짓을 우리는 계속해서 유대인이 아니라도, 부자청년이 아니라도, 어릴 때부터 이거는 주눅들 정도로 계속해서, 지금도 반복해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목사님한테 칭찬받으면 이번 한주는, 무슨 행운이라도 찾아올 줄 알고, 백날 기다려 봐요. 행운 오는지. 여러분, 돌발적인 차 사고나, 이런 사고나, 죽은 사람이 미리 알고 기도한적 있어요? 뭐, 비행기는 모르겠다. “비행기 추락합니다.” 하면 10초정도는 기도할지 모르겠지만, 놀러가서 춤추다가 진부령 그 코너 올라가는데, 넘어가는데 춤추다가 갑자기 이게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전에 미리 교회 가서, 놀러가는 것이 이번에 나쁘다 싶거든요. 놀러가는 것은 나쁜 일이니까, 나쁜 일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선행을 많이 쌓아놓는 거예요. 조금 이렇게 상세히, 내용이 남도록. 그래서 수능 앞두고는 바짝 안 나가던 새벽기도 나오고, 뭐 이렇게 해서 선을 이만큼 쌓아놓아요.
왜? 지금 곧, 큰 나쁜 짓을 할 계획이 있기 때문에, 큰 나쁜 짓을, 3일 후에는 스페인에 놀러 가서 거기 교회도 멀겠다. 뭐, 하나님도 멀겠다. 그래서 술 먹고 띵가띵가 놀 생각하니까, 나쁜 짓을 막 하는, 미리 당겨서 하는 거예요. 이 구조가 선악 구조입니다. 여기에 법이 주어질 때, 그 법이 주어질 때는 법은 뭐냐?
그 선악에서, 너는 마음은 선인데, 내 속에 괴물이 있는 걸 몰랐어요. 법이 와야 알아요. 법이 오니까 탐 안내고 싶어도, 갑자기 “탐내지 마라”는 그 말씀이 내 안에 잠자는 괴물의 콧털을 건드렸거든요. 그때부터는 평소에 “귤 내건데요?” 이것도 탐심이라. 뭐, 탐심 아닌 게 없어요. 가만 보니까 모든 게, 눈에 들어온다는 뭔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 내 욕망을 자극했어요.
차라리 안 봤으면, 그 가방, 그 옷, 그 명품을 탐내지 않을 건데, 내가 본 것 때문에, 내가 본 것 때문에, 거기서 탐욕이 발작을 일으킨 거예요. 그냥 안양 촌구석에, 안양 그 무슨 동인가? 안양 또 후진 동네 뭐지? 뭐, 충훈부? 충훈부 살다가, 따박따박 붙어있는 곳에, 곧 무너질 것 같은 그런데서 살다가, 그 사는 사람들 옷 모습 보세요.
전부다 뭐 고만고만하고 이렇게 입었는데, 갑자기 로또 당첨 돼서, 서초동 강남에, 청담동으로 이사를 왔다 해봅시다. 이사 와서 뭐, 마트나 가려고 하면 ‘쉭-’ 피하고, “어디서 저 촌놈이, 촌 같이 옷을 저렇게 입고 왔나” 이럴 경우에 갑자기 어떻게 됩니까? “아, 이래서 안 되겠다.” 이렇게 되죠. 그럼 그 순간에 뭐가 이렇게, 갑자기 양이 늘어나는 거예요?
내 욕심이, 욕심의 양이 조금 늘어난 거예요. 저 양반이 25명 중에서 20등 하다가 15등 할 때는 아, 이거 맨날 감사헌금해요. 그런데 갑자기 5등 하게 되면 15등 했던 시절이 원망스러운 거예요. 복음을 알아서 기뻐하는 것도, 사실은 탐심이라니까요. 그때 진작 알았을 걸, 아니에요.
복음을 알아서 나는 성공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그 과거를 원망할 쨉도 안 되는, 그 옛날보다 더욱 더 저질인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순간순간이에요. 발견하는 순간. 그때 옛날에 내가 교회 만들었던 것을, 얼마나 나 잘났고, 남의 지시에 따랐고 그래서 내가 말 들어서 “나 완벽해 이정도야 시키는 대로 다했어.
뭐, 뭐 또 이야기해봐 또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자기 잘난 자기 의를 포기를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거든요.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런 짓거리를 이제는 필요 없을 정도로, 필요 없을 정도로, 그런 생각을 안 할 정도로, 내가 모르는 계약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에요. 내가 본 계약서에. 그 계약은, 나를 제끼고 하는 계약이에요. 나를 제치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였습니까? 자기에 대한, 자기를 향한 거절. 자기를 향한 거절이에요.
주께서 내 피를 안 받아요. 주께서 내 몸을, 내 살을 안 받습니다. 그 뜻이 뭐냐? 내 살과 내 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네 살에 잉크 찍지 말아라”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들릴 때에, 그 들리는 밑을 한번 보세요.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 마땅함을, 저주를 끌고 들리는 거예요.
저주를 끌고 들리면, 그 주님이 내려올 때는, 저주에 대한 합당한 징벌을 가지고 내려오기 때문에, 이 세상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왜, 이 괜찮은 세상이, 대통령이 나쁘다고 하야할 정도로 이렇게 민주화와 정의가 넘치는 이 세상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돔과 고모라 이상으로, 하늘의 유황불을 얻어맞아야 될 그 짓을, 촛불정도가 아니라 유황불. 유황불 다 맞아야 될, 왜 그 세상인 것은 바로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그게 또 세질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