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1. 25) 2강
광주 강의(2016. 11. 25) 3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과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은 달라요. 아버지와 귀신들린 자식, 그리고 12제자와 예수님이 나오는데, 먼저 아버지와 12제자가 만나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당신이 들어줄 때 당신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내가 요구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그물망으로 뒤집어 씌워놓았어요. 그러니까 그물 코 하나하나에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것이 전류가 흐르듯이 전달되겠지요. 그리고 매일의 삶이 내가 만든 그물과 주님이 만든 그물 사이에 늘 다툼이 일어납니다. 내가 만든 그물은 나의 위신과 체면과 행복을 위해서 내가 애쓰는데, 이 과정에서 주님의 그물은 가려지겠지요. 그 때 주님은 내 그물을 찢어버립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납니다.
내가 시작한 모든 목적을 좌절시킴으로 주님이 우리를 이미 점령한 것으로 알면 됩니다. 좌절을 통해서 우리는 기쁨과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감사가 나오지요. 나의 목적과 기대가 예수님의 복음을 요청한다고 해도 이것이 주님이 던진 그물망이 아니에요.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날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해도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어요.
‘이 정도로 완벽하게 포장을 잘 했으니까 주님이 내 노력을 가상히 여겨 조그마한 것이라도 들어 주시겠지.’ 이런 기대는 접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저는 목적 없이 그냥 삽니다.”라고 하는데, 목적 없이 그냥 사는 사람은 없어요. 목적 없이 산다는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일을 기억해서 그래요.
원래 지속 자체는 예수님의 희생과 피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속되는 예수님의 희생을 우리가 외면할 수가 없어요. 다만 내가 이만큼 잘 났고 믿음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뽑아서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뽑을 때 다 목적이 있어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삽니다.’ 이런 멘트를 날리는 것도 그 때 기억이 나서 그런 거예요.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이 세대 속에서 만든 관계망 속에 주님의 관계망을 투입시킵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린 아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 제자들과 아버지의 만남, 이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은 이 세대가 악하고 음란하며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을 폭로시킵니다. 9장 18절을 봅시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할 때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닙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는 이런 요청 자체를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본인도 믿음이 없으면서 제자들이 귀신 못 쫓아내니까 믿음 없다고 예수님께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대목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요.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제자들은 절대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있고, 기도를 하고, 권능을 받아도 제자 이름으로 절대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귀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제자들 능력으로 귀신이 물러간다면 그것은 귀신이 아닙니다. 귀신은 악한 세대를 지배하고 있어요. 지배자가 민중들이 대모한다고 물러갈까요?
이 세상 자체가 악마의 관계망이에요. 즉 인간들은 뱀의 후손의 관계망 속에 갇혀 있어요.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싸움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단에 장악된 인간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니 제자들을 찾아간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잘못 된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니까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관계망을 적용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것이라고 여기기에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없는 거예요.
19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너희’를 예수님 제자들로 봐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귀신 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 12제자, 그리고 귀신까지 포함해서 몽땅 믿음 없는 자로 봅니다.
21-22절에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귀신이 아들을 물과 불에 자주 던지지요. 그러면 아버지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자신은 멀쩡하다고 생각하지요. 왜냐? 자신은 불에도 물에도 안 들어가니까. 즉 자신이 있는 세상 전체 는 문제가 없는데 일부가 귀신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데 귀신이 나타나서 날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 도움 받아서 귀신 없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면 만사가 형통한 것이고 그것이 행복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했지요. 전체를 아울러서 귀신들린 아버지도 믿음 없음에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나는 교회 안 가고 절에 간다.’고 할 때, ‘불쌍한 인간아!’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 다니니까 절에 가는 저 사람과는 달리 천국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을 안 떠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신이, 단이는 취직도 해야 하고, 결혼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오 목사님과 사모님은 지금 세상 떠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지금 죽으면 내 손녀 자라는 것을 못 보잖아요. 내가 관계된 이 세상, 내가 중심이 된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귀신 들린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애착이 있다는 것이 마귀에 사로잡힌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가 사는 세상, 나의 관계망 속에서 예수님은 배척하고 천시하겠지요. ‘주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 이렇게 되지요. ‘예수님이 당장은 필요치 않습니다.’ 라는 우리 마음을 당시 유대인들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해서 저쪽에서 용서가 날아오면 다른 것은 더 필요 없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날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셨다면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지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세상을 떠날 때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아쉬워 한 것은 엘리야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엘리야를 찾겠다고 3일을 뒤졌지만 결국 못 찾았어요.
엘리야나 엘리사나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용서와 함께 천국의 그물망이 그들에게 덮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것은 너무나 강한 기존의 그물망 때문에 주님의 복음이 질식되어 있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합니다. 성장한 자식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살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니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가 합당치 않다.”는 성경 말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내 자식, 내 가족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은 포괄적으로 전체 다를 치십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자의 아버지는 제자 탓을 하고 있어요. ‘당신 제자의 무능함을 당신이 책임 지셔야지요.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이런 투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귀신 들린 아들 둔 것이 자랑도 아닌데 당당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빼놓고 ‘나와 상대하자.’고 하십니다.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너의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의 반대말은 ‘못 할 수 있다’가 아닌 ‘해야만 한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의 그물망에 걸리면 자식이 귀신 들리는 것은 필히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귀신 안 들린 아들’을 상정합니다.
‘내 아이는 남들처럼 귀신 안 들리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 가정은 귀신 들려야 할 만큼 나쁜 가정이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자폐증 아이를 둔 부모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수많은 아이들 중 하필이면 내 아이에게 자폐증이 있다니?’ 이것은 자기 아이를 의외로 보는 거예요. 안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주님은 “너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대가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 저는 아직 50도 되지 않았는데 흰머리가 이렇게 많습니까?” “그 몸은 너의 것이 아니다.” 결국 이것입니다. 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여깁니다.
대전에 김 권사님이 머리가 많이 하얗게 되었어요. 염색을 안 해서 희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하얗게 될 때가 되어서 흰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김 권사님이 이걸 아시고 염색을 안 하시는 것인지, 귀찮아서 염색을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상인은 없는 거예요. 우리도 정상인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뭔가? 자꾸 정상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는 반듯해야 돼. 나는 착해야 돼.’ 들뢰즈는 신의 심판에 반항했습니다. 왜냐? 신의 심판은 법이기 때문에 이것이 도덕이 됩니다.
들뢰즈가 내린 결론은, ‘네가 즐거운 것이 진리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네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라.”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의식이 딱 맞습니다. 현대인은 시간을 포기하고 역사를 취했는데, 이제 역사도 포기했어요. 그러면 점(點)이 됩니다. 점이 되어가는 인간이 현대인입니다.
점은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이쪽 점과 저쪽 점을 제 마음대로 낚시를 던져 연결하려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결혼입니다. 내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식을 진행하면서도 ‘내가 남자를 제대로 골랐을까?’ 의심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들은 ‘내가 꼭 결혼을 해야 되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합니다.
이것이 점과 점의 만남이에요. 이 관계는 성경구절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해도 점과 점일 뿐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내가 필요할 때까지만 찾지 필요 없으면 즉시 떠납니다. 점은 제 편한대로 살겠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은 둔 아버지가 정말 정직한 말을 했어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 말의 의미는, ‘내 생각에는 어려운데 그래도 주님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니까 잘 하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너는 믿음이 없으면서 제자들을 탓했다. 물론 너도 믿음 없고, 제자들도 믿음 없다.’ 즉 전체 다 믿음 없는 세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믿음 없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이 세상(모의고사)에서 무탈하게 살면 나중(본고사)에 좋은 점수를 받아 천국 갈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 무탈하게 살았다는 것은 주님이 날 괜찮게 보셨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중에도 천국에 넣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의고사에서 0점이라고 우리를 공격하십니다. 믿음 없다는 티를 어떻게 내면 됩니까? 어릴 때부터 귀신 들린 자식을 만들면 되지요. 그 역할은 이 세상에 있는 귀신이 해야 되지요. 그 귀신 들린 인간은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지요. 이것은 인간이 막지 못하지요. 즉 인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아저씨와 12제자는 자신들은 마치 귀신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해서 어떤 수단을 강구하면 귀신이 나갈 것이라고 여겼어요. 귀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본인이 귀신에게 붙잡혀 있으면서 무슨 귀신을 쫓아낸단 말입니까. 이 세상을 악하다고 보신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주님 그물에 걸리면 구원 받는 것이고, 아니면 귀신과 함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과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 구세주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25-2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기도 안 하고 쫓아냈습니까? 기도 안 하고 쫓아냈지요.
28-29절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기도하고 쫓아 낸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왜 기도하면 안 됩니까? 그 아버지가 왔을 때 예수님이 ‘기도하면 쫓아낼 수 있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와 귀신들린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렸다가 나았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배우가 악역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냥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한 것뿐이지요.
제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절대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거죠. 그럼 우리 힘으로 안 된다면 예수님 혼자 다 하시면 되는데 제자들은 왜 뽑아 놓았어요? 12제자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예수님만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부른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12제자를 보내시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지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착각합니까? 마치 제자들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처럼 착각하지요. 하지만 본인들은 알아요. 절대로 자신들의 능력으로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니고 자신들은 우편배달부 역할만 했다는 것을.
이런 장면은 사도행전에서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도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자신들의 능력으로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 이름이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름으로 바꾸면 될 것 아닌가 라고 하는데, 바꾸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행했던 모든 것을 실패하게 하고, 그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내 기도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내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이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기도해도 안 되면 기도할 필요 없네.’라고 해요. 기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답답한데. 사람이 편하게 살면 행복을 느낍니다. 이 땅에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에 우리는 잘 적응되어 있어요. 그러나 택한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주님은 사건을 일으켜요.
주님이 일으키는 사건은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노력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인데 내가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마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인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경계선 저쪽에서 넘어온 주님의 것으로 잠시 이 땅에 살다 가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젖어서 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도에게는 주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 주신 것은 주님의 몸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사태와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주님의 관계망 속에서 정리하라고 주신 말씀인줄 압니다. 이 믿음이 없는 세대로 동참되어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죄 된 모습을 다시 돌아보면서 이 죄를 일찌감치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신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하게 하시고 그것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12. 8. 19:3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