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2b 울산강의-레위기 4장 : 산 제물
20161202b 울산강의-레위기 4장 : 산 제물
(강의:이근호 목사)
제물에 있어서 수컷이 많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제사장의 제물은 반드시 성소를 닿고 그 다음에 분향단 거쳐서 제단에 붓게 돼있어요. 하나님 계신 곳까지 갔다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중심이 제사장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교회에서 설교한 것처럼 제사장 중심은 제사 중심이에요. 제사 중심은 희생제물이 필요한 존재만 천국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 희생제물 앞에서 우리는 그 취지와 의미를 살리는 관계로서 우리는 죄인이 돼야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아는 선악의 죄는 잊어버리세요. 선과 악, 윤리, 도덕적 죄를 알아봐야 지옥 갑니다. 그러지 말고 새롭게 나타난 십자가 기준, 십자가 앞에서 진정 몰랐던 죄인, 그 죄는 성령세례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세례 받게 되면 한꺼번에 죄인 돼요. 죄 지은 것도 없이 그냥 죄고, 이걸 전라도 말로 기양 죄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죄인의 괴수에요. 단 번에 죄인이에요. 그냥 죄인이 되면, 그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폼 낼 이유가 없어요. 죄인이 폼 내 봤자 죄인이니까 자기를 꾸밀 필요도 없고, 안 꾸민다는 말은 자존심도 챙길 이유도 없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다듬을 이유도 없고. 그냥 주님의 용서, 주님이 날 구원해줬다는 사실을 그냥 보여주는 평생을 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에요. 착한 일 한 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웃으면서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툭 치면,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용서하면 안 돼요. 같은 형제니까 봐주는 것 없습니다. 돈 빌려줬으면 꼬박꼬박 이자 다 받으세요. 용서해주면 마치 용서할 자격이 되는 것처럼 구는데 용서는 주님한테 찾아야지 인간 대 인간으로 용서를 찾지 마세요. 우리는 남을 용서할 권리도 없고 더구나 남으로부터 용서받을 권리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날 내친다면 그건 내가 하는 짓거리에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만약에 누가 나를 돌보지 않고 굶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 빨리 떠나라는 하나님의 알람이에요. “갑니다, 예. 간다니까요.” 후딱 보따리 싸고 가면 돼요. 알아서 고려장 가면 돼요. 자식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그냥 산 속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찾든 말든.
이게 우리의 평소 삶이 된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배워라. 아버지 장례 치른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 죽은 자로 장례하라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 지고 나랑 같이 가자. 그러면 너한테 쉼이 있으리라.
어떤 분이 상담하는데 예수 믿었는데 왜 힘듭니까, 하니까 상담자가 하는 말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 부르짖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성경 마태복음 7장에서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구하라 할 때 뭘 주느냐 하면, 빨리 죽으라는 그런 명령을 받아요.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 주는데 그 좋은 게 뭐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 이 땅에서 사실 때 성령 받았잖아요. 자기 백성에게도 예수님에게 주었던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가신 그 인생에 합류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모든 성경을 하나로 뽑아내게 되면, 다시 말해서 콩을 갈아서 간수를 부으면 액체가 고체 형식이 되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액체 같은 사건, 사건들을 고체로 만든다면, 뭔가 형체로 뽑아져 나온다면 그게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 생애로 해석되어져야 돼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씀이 모아져서 구체화되면 예수님 형체가 되어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 과정을 우리한테 뽑히듯이 뽑혀 가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그 쪽으로 성경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시간은 어렵습니다. 첫째 시간에 문제 던져놓고 해결 안 된 게 있어요. 어떻게 제물로, 그냥 죄가 의 되진 않아요. 하나님을 경유하니까 의가 되느냐? 제물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의가 되는지 그 문제입니다. 그 힌트를 저는 암컷과 수컷으로 이야기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창세기 15장을 잠시 봅시다. 창세기 15장을 왜 같이 보자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거기에 아브라함이 나와요. 우리가 지금 하는 건 레위기잖아요. 레위기 4장 속죄제.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이야기로 레위기 400년 전에 이야기에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안테나 뽑아내면 안에서 뭉쳐 있다가 가늘게 뽑혀 나오잖아요. 아브라함언약에서 뽑아내면 이삭언약 나오고, 이삭언약에서 뽑아내면 야곱언약 나오고, 야곱언약에서 뽑아내면 모세언약 나오고, 모세언약에서 뽑아내면 다윗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안테나처럼. 그래서 처음부터 언약은 하나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미리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등이 뽑혀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으로 예수님 오시면 되는 왜 이삭언약이 또 필요 하느냐? 아브라함언약이 발전하는 겁니다. 왜 발전해야 하느냐? 아브라함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아브라함은 죄인의 존재, 육의 존재임도 불구하고 천국에 합류하는 인생을 사느냐?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남긴 역사를 통해서 보면 그 내막이 나와요. 속에 있는 내장이 바깥으로 나오듯이 내장들을 줄줄이 뽑아내면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마지막 뽑힌 내장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고대했다가 그 다음에 보고 기뻐했다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네가 나이 오십도 안 됐는데 네가 언제 아브라함을 봤느냐? 앞뒤로 그렇게 깔려있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기뻐했다니까. 아브라함보다 예수님이 먼저 있다는 말이거든요. 먼저 있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아브라함은 나를 위해서 먼저 시종처럼 ‘물렀어라!’하는 것처럼 나보다 먼저 역사 속에 출현해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앞서 가는 전령이라 할까요, 가이드라 할까요, 그런 입장이란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은 없어요. 예수님을 보여주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이 죽어요. 죽었다는 말은 이삭 낳는데 쓸데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립니다.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 본인이 구원받는데 본인이 아무 역할을 못해요. 그러나 천사가 와서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아브라함에 덮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일을 저지르려고 하시는구나.
아브라함은 그냥 장기판이나 바둑판이라 보면 되고 그 위에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브라함 소관이 아니고 그 위에서 졸을 어떻게 하고 차를 움직이고 포를 움직이거나 돌을 어떻게 놓고 하는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여러 가지 일거리가 미리 앞당겨서 얼룩덜룩 무늬를 놓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기 전에 얼룩무늬가 있는 인생을 살았고, 울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오시고 난 뒤에 십자가의 얼룩무늬가 현재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러니까 둘 다 그리스도의 형제이긴 마찬가지에요. 둘 다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 얼룩무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안 죽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자꾸 되바라진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 “그 입 다물라! 내가 너를 저주받으라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했는데 추방된 주제에 감히 어디를 넘봐. 그 입 다물라.” 군홧발로 우리의 입을 밟아버리죠.
그게 우리 인생에서 내가 뭔가 은근히 기대했다하면 일이 안 돼. 뭔가 목적과 기대를 걸고 한다면 안 된다고 봐야 됩니다. 혹시 여러분 목적대로 된다면 마귀가 한 거예요. 내가 은근히 노린 것은 다 안 돼요. 스토리 전개가 내 뜻대로 시나리오가 안 짜져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 인생 소설에 주인공이고 싶어 하거든요. 이건 죽을 때까지 이 자의식이 없어지지 않거든요. 주께서 간여하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는 말이 욥기에 두 번 나오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말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키가 한 자나 자랄 수 없다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주님께서 자기 사람은 눈을 뗀 적이 없어요. cctv도 그런 cctv가 없습니다. 밥 먹다가 숟가락 놓는 것까지 다 찍혀있어요. 우리가 한 모든 짓거리를 다 알고 있어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짓을 내가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으로 여러분이 움찔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움찔한다는 것은, 지금 죄 따로, 의 따로, 중립지역 따로 있고 지가 아예 전을 펴놨어.
누가 창세기 15장 9절을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됐습니다.
암소와 암염소와 암양, 전부 암컷이지요. 아브라함언약의 성취에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브라함은 나이가 백 살이라도 아기를 낳을 능력이 있어요. 육이 안 죽었어요. 아브라함이 죽었다는 티는 암컷 되는 아브라함 부인 사래가 사라로 바뀌면서 아기 낳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여자의 태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자궁이 살아서 아들을 낳습니다. 죽은데서 아들, 수컷이 나왔어요. 그 토대, 원천이 뭐냐? 누구 죽음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게 아니고 부인, 여자에요. 여자의 후손이라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요.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선악과 후로 저주받게 한 이유가, 저주로 끝내는 게 아닙니다. 저주 안에서 죄 안에서 의가 나오는 생산 공장을 천국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는 세상 따라와서 그 안에서 뱀과의 전쟁에서 승자의 이름으로 뱀을 치는 모양새로 하나님의 의가 생산됩니다. 죄를 이기지 않으면 의가 없어요.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실력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담은 안 돼요.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만 가능하지 어떤 누구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으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복음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되지요.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소유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어야 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되지 내가 믿고 붙들고 의지하고 백날 해도 이건 지 수작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내가 나를 이끌어서 구원시키는 그런 작동을 계속해서 실패로 끝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재료로 해서 죽은 자가 팔팔하게 천국 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구현하는 일종에 공작시간, 예수님의 자기 그림그리기 미술시간이에요. 또는 예수님이 작곡해서 작품화시키는 그 시간이 우리의 한 평생입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이렇게 돼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기로 작정한 계획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대로 이렇게 괜찮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나는 이미 죽고 죽은 내 안에서 이게 세워집니다.
도자기 만들 때 진흙으로 만들잖아요. 창세기 2장에. 우리를 늘 매일같이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빗어내는 거예요. 뒤에서 여자가 붙드는 것은 데미 무어가 나오는 영화고.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한 장면이죠. 도자기 만들 듯 주께서 부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제대로 만들었는데 쟤는 좋은 그릇 만들고 나는 투박한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니까 로마서 9장에 나오지요. 토기장이가 뭘 만들든지 지옥 가라고 만들든지 그건 오야 마음대로지. 똥 피를 주던, 팔월 공단을 주던 이건 화투 가진 오야 마음대로라니까. 사랑하기로 한 자는 사랑하고 미워하기로 작정한 자는 미워하고. 이건 주님 마음대로란 말이죠.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거예요.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거래하듯이 갚음이 되겠느냐. 먼저 바쳐서 복 받는 건 없어요. 로마서에 나오죠. 이건 욥기에 나온 것을 로마서에서 성취한 건데, 바쳐서 복 받는 게 없어요. 안 받습니다. 만들어낸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 낸다는데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게 문제에요. 계산기 두드려서 십분의 일을 계산은 돼요. 그런데 누구한테 줍니까? 공중으로 던집니까? 하나님, 받으소서. 받을 사람이 없어요. 예물을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십일조라는 게 없는 이유가,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줘요? 그럼 지가 써야지. 감사합니다하고. 왜? 우리는 하나님 작품이니까 내가 써도 주의 일을 쓰는 주의 일인데. 맛있는 것 사먹는 것도 주의 일이고, 탁구 치고 당구 치는 것도 주의 일이고.
아브라함언약은 암컷입니다. 암컷에서 수컷이 생산됩니다. 이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수컷이 없는 상태에서 암컷만 있는 제사에서 드디어 레위기 4장에 보면 수컷이 되는 겁니다. 수컷의 대표자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거룩의 구체적인 인물이에요.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제사장 자체가 구약시대라는 장기판에 얼룩덜룩한 장차오실 예수님의 무늬에요. 여자 원피스나 치마에 무늬가 있잖아요.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무늬라면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도 무늬가 되는 겁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주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처음에는 어긴 줄 몰랐는데 나중에 말씀을 다시 보니까 어긴 것을 알 경우에는 어겼으니까 반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반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반성해서 새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경유를 해야 돼요. 자기 혼자 반성해서 잘못됐습니다. 이래서 되는 게 아니고 법을 어겼단 말이죠.
요새로 하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교회 두 번 나와선 몰라요. 디모데가 누군지도 몰라요. 몇 년 다녀야 안다고요. 강제로 성경 읽어보니까 이런 말이 나온단 말이죠. 내가 전에 얘 성적 내려간 것도 돈 사랑해서 벌 받아서 그런 거구나. 돈을 사랑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알잖아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해놓고 막상 성경 보니까 사람을 옭아매서 숨이 막히게 만들어버려요. 안 족하면 뭐가 돼요? 죄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예. 잘못됐습니다.”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이고, 진짜 더러워라.” 잘못됐다하면 구원이 취소된다. 또 히브리서 6장 나오죠. 한 번 비췸을 얻고 다시는 구원하지 못한다. 베드로전서에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잘못됐다고 해서 선악으로 퉁 쳐야지요. 그날은 헌금 이만 원 더 넣고. 이걸로 퉁 칩시다. 갑자기 봉사하고 청소하고. 11시 10분에 오던 사람이 10시 50분에 오고.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일부러 말씀을 보도록 주께서 몰아세운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말씀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나는 예수 믿고 착하다고 룰루랄라 하다가 내가 구원받은 걸로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걸 청교도라고 해요. 청교도가 이단입니다. 자기 구원론에 빠진 거예요. 청교도가 이단이면 그 밑으로 다 이단이죠, 뭐. 구원받았으니까 구원을 잘 유지해야 된다는. 구원을 무슨 수로 유지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원수가 다섯 명 있었습니다. 다 사랑해버렸어요. 원수가 친구 됐어요. 그 다음부터 구원됐어요? 주께서 여섯 번째 원수 만들어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사람은, 에이 씨. 스물일곱 살까지 착했는데 서른두 살에 걸리네. 또 찾아가서 형제여, 하면서 갖다 바치고. 무슨 이런 짓이 다 있어요.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는데 거긴 여자도 없어. 간음하려 싶어도 할 수 없어. 육십에 퇴직해서 촌에 오니까 세상에 촌 다방에 사십 대 마담들이 앉아서 쌍화차 팔면서 하니까 마음이 동하는 거예요. 노래도 최백호의 <낭만을 대하여> 나오고. 갑자기 육십 넘어서 간음자가 되는데.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재림하시면 지옥 가. 재림 안 하시니까 천만다행이다, 빨리 처리해야 돼. 이게 바로 이단 아닙니까.
주께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것마저 처리했다는 것을 나는 이만큼 아는 걸 점점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많이 알게 하시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차라리 기다려야 돼요. “주님이여, 아무리 생각해서 죄 지은 게 없는데 내일 되면 나오겠지요?” 기다려 돼요.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게 되면 정말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요. 그냥 거저주시는 용서의 힘에 밀려서 살아가요. 이걸 지난 수요일에 센 물살에 떠내려간다고 했는데 용서라는 물결에 우리가 떠내려가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될 텐데 잠깐 보고 난 뒤에는 남들은 어떻게 돈 벌었는지 거기에 빠져서 자기 딴에 빡세게 기도해서 새로운 감사거리를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보란 듯이 취직하고 보란 듯이 장가가고 보란 듯이 성공해서 주님께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아서 번듯하게 성공했다. 이건 자기 자랑이지 십자가 자랑 아닙니다. 그걸 주께서 성도라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시는 그것만큼 좋은 사랑이 없어요.
여러분,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재벌 됐습니까? 끝까지 거지였지요. 드라마라면 벌써 재벌 돼서 회장 되어 죽었을 거예요. 기생 라합이 끝까지 기생으로 죽었어요. 탈출하고 난 뒤에도 기생인지 모르겠다만 하여튼 구원될 때까지 기생이었습니다.
암컷에서 출발한 것이 수컷으로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죽음의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려요. 십자가에 죽었음으로 너희는 나와 함께 죽었고, 죽은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평소에 우리가 직장생활하고 가정에서 주부로 살아가는 이게 죽은 모습이에요. 목사 하는 것도 죽음 목숨으로 하는 거예요. 죽은 목숨이 될 때 안 죽었다면 주의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뭘 하든지 간에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고 용서받은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그 말이에요. 죽은 자인데 봐줘서 주의 일하라고 계속 살려두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소원을 죽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너희들 때문에 주께서 안 죽이고 계속 일하게 하신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신약에서 이렇게 합니다. 오늘 제목입니다. 산 제물. 산 제물이 있는 장소가 성전입니다. 너희는 거룩한 성전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 조성된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령이 자기 집으로 스스로 만들었어요. 해비타트운동, 가난한 사람에게 집 지어주는 것처럼 주께서 집을 만들었어요. 만들어놓고 우리 안에 거주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뭐냐?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것처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천국이 그런 거예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이미 성령세례 받아서 꼬락서니는 이래도 주의 사람으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행함이 아니죠. 그 상태를 믿음, 소망, 사랑,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자체가.
그 다음에 레위기 4장 13절에 그릇 행한다는 것은, 나중 문제에요. 나중에 보니까 내가 몰라서 했구나. 그러면 알고 한 건 뭐냐? 이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알고 행하면 일단 해치우고 뇌물 내는 식으로 제사 드리면 될 것 아니에요. 욱하는 성질에 해치우고 하나님 잘못됐습니다, 라고 나중에 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딸을 시집보내는데 혼처가 두 군데 나왔어요. 한쪽은 의사고 또 한쪽은 공무원이고. 9급 공무원은 복음을 알고 의사는 복음을 몰라. 그런데 딸은 공무원을 좋아하는데 엄마가 우겨서 의사를 잡으라 하고. 마음속으로 평소에 믿음으로 하는 건 아는데 일단 결혼시키고 난 뒤에 잘 구슬려서 복음 믿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그걸 용서할 제사가 없어요. 이미 그 죄도 용서받았어요. 지가 괜히 제 발 저린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화목제물이거든요. 이미 모든 제사를 마무리 지은 거예요. 제 말을 잘 들으셔야 돼요. 아무리 의사고 내가 돈 좋아하지만 복음을 아는 가난한 공무원한테 보냈다 해도 그게 죄에요. 무슨 죄냐? 하나님께서 너 왜 네 성질대로 안 했는데? 그렇게 믿음대로 하면 의롭다고 봐줄 줄 알았어? 니 성질대로 해.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끝났어. 우리는 성질대로 살아야 할 것을 지가 통박 굴려서 이렇게 하면 믿음이라고. 뭘 해도 죄에요.
그럼 죄 아닌 게 없는 게 뭡니까? 안 믿는 의사와 결혼한 것을 감사하면 돼요. 복음이 얼마나 편리한지. 자기 행동 정당화하는데 얼마나 편리한지. 뭘 해도 감사하면 돼요. “주여, 이런 횡재를 감사합니다.” 주께서 의사가 의료법에 걸려서 의사면허 취소됐다면, “봐라. 니 뜻대로 안 되지?” 그러니까 의사와 결혼하길 잘했다. 왜? 네 목적 부셔버릴 거야.
순간순간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그런 의사 되든 말던 지금 감사하면 돼요. 미래에 대해서 내 미래 아니니까 내가 나서서 주제넘게 걱정하는 것은, 내 인생이 마치 자기 인생이라고 착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내 인생일 수밖에 없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지만 주님께 감사하라는 인생이라고 돌리기 때문에 늘 밀당, 우리 몸은 하나인데 대부분 이리 갔다가, 또 한 순간 저리 갔다가. 어떻게 하든지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하는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게 죄 지은 아담다워요.
그래서 주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고난 주일에 밥 굶으며 금식해봤자 금식한 우리를 칩니다. “누구십니까?” “나, 주님인데 밥 먹으러 온나.”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금식할 때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하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왜요?”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잔치다. 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네가 스스로 도사되려고 도 닦지 말고 나와 함께 있는 이게 혼인잔치, 축복의 잔치, 하늘나라에요.
성령이 임하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희락은 기쁨이에요. 그 기쁨은 어디서 나오는가? 기쁨을 예상하면 절대로 안 나와요. 슬픔의 현장에서 비로소 기쁨이 나와요. 따라서 슬펐다가 기쁨으로. 이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모든 걸 가진 자고, 네가 보기에 내가 죽은 자 같지만 나는 살은 자고 내가 너희들 보기에 가난한 자 같지만 부요한 자고 또 남을 부요케 하는 자다.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바로 날마다 주님께서 나를 죽는 자리에 집어넣는 것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살아나게 함이라.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못한다는 게 없다. 왜?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일으킨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탁구치고 머리 안 나면 내게 능력 주시면 머릴 바꿀 수 있나요? 염색하고. 돈 들여 염색하지 마세요. 염색하는 것도 주님의 십일조입니다.
그걸 아까 산 제물이라 했지요. 베드로전서에선 이걸 제사장이라 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어두운 세계에 다른 법칙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법칙으로 제사장이 살아가는데 그 제사장이 하는 모습이 그냥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아니죠.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지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본인은 알아요. 주님 마음대로.
그러니까 남들한테 반성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회개는 주님 앞에서만 하지 남 앞에서는 할 필요 없어요. 물론 미안하다고 인간적으로 할 순 있지요. 하지만 눈물 줄줄 흘리면서 그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이런 짓하지 마세요. 자칫하면 그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어요. 주님의 종이 돼야지 사람의 종이 되면 안 돼요.
심지어 사도 바울은 엄청난 말까지 했어요. 요새 같으면 돌 맞아 죽었을 거예요. 남편들아, 절대로 아내 좋은 쪽으로 행동하지 마라. 어떻게 네가 여자의 종이 되느냐. 여자한테도 남편의 종 되지 마라. 주님의 종이 돼야지 되도 않는 남자 시키는 대로 하느냐 말이죠. 주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둘 다 서로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이 된다면 그건 가정이라 하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교회 같은 가정, 최고의 가정이에요. 서로가 어떤 행동을 해도 당신이 그 일을 했지? 주의 일인지 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심오한 진리를. 둘 다 다 하는 짓거리가 주께서 시킨 일로 존중할 줄 알아야 돼요.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존중으로 하는 것이지. 사랑은 욕정이지. 사랑이란 말을 인간의 욕정에다 붙이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거짓말입니다. 갖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에게 존경할 게 없으면 사실은 부부생활하기 힘들어요. 뭔가 늘 새록새록 새로운 존경할만한 것들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일부러 못 만들어냅니다. 주께서 유발시켜줘야 되고 유발시켜줘도 상대방이 못 알아 봐요. 그런데 주의 종이면 알아봐요. 머리 하나 바꿨을 뿐인데 오버하듯이 반응을 보일 때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거죠.
이처럼 성도의 삶 전체가 이스라엘 같은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삶으로 살자가 아니라 살도록 조치를 해주십니다. 그래서 항상 뒤돌아보면서 감사하지요. 사실은 이만큼 우리 가정이 살아온 것도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늘 서로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무릇 잘못 행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죄인 되었구나. 제사 드리고 반성할 필요 없어요. 확인만 하면 되니까, 십자가에 이것 때문에 죽었구나. 주여, 참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짓을 또 했어. 똑같은 짓을 똑같이 했어요. 그러면 삼 세 판이라고 또 할까요? 그렇게 백 번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너는 가만 보니 내 십자가를 이용하는구나. 한 번만 더하면 지옥 보낸다.” 이랬습니까? 주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그게 바로 베드로가 질문한 거예요. “주님이여, 나한테 죄 지은 자를 일곱이라도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고 용서해주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되 아무리 반복해서 천 번, 만 번을 해도 이미 주어진 용서기 때문에 그리고 용서받을 인간, 천 번을 해도 용서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든 자기 인형이기 때문에 천 번, 만 번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그 고마움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걸 이용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우리가 기억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똑같은 죄를 평생 살아있을 동안에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하는가? 성경을 들여다보면 어떤 구절은 마음에 와 닿을 때도 있고 어떤 구절을 그냥 놓치고 이년 뒤에 다시 볼 때 이런 구절이 있었어, 라고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는 주님께서 그때그때 몰아넣어요. 그 말씀과 마주치도록.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세상과 짝하는 여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거든요. 처음 교회에 나온 아가씨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넘어가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세상과 짝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짜릿하게 느끼는 어떤 순간이 올 거예요. 어떤 남자와 사귀다가 헤어져서 질질 짜고 울 때 이때를 위함이라고 올 거예요. 물론 그때뿐이겠지만.
결국 우리가 있으면 껍데기고 사실은 십자가 중심으로 파견 나온 말씀들이 우리를 치고 침처럼 쑤셔 넣고 쑤셔서 얻어진 생산된 죄를 다시 십자가로 모아서 십자가 영광만 드러내는 도구로써 우리를 충실하게 사용한다 말이죠. 어떤 때는 이 말씀, 어떤 때는 저 말씀. 어떤 찬송가는 은혜 되다가 두 달 뒤에는 4절까지 있고 왜 이렇게 길어, 하고 넘어가고. 이건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믿고 그냥 막 사세요. 그냥 막 살아도 다 주께서 막 사는 그걸 아주 존재의 가벼움을 주시면서 하루하루가 내가 놓친 은혜를 구석구석에서 찾게 되는 경우들을 우리한테 할당하십니다. 살면서 가끔은 늘 만나는 아내와 남편 사이라도 우리끼리 사십 년 산 것도 웬 은혜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런 소리도 두 번 되풀이하면 식상하지만 어떤 때는 그게 나올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같은 소리인데 아내가 감격해서 “여보, 당신 같은 남자는 없을 거야.” 하고 잡채 막 해주고. 그 순간순간이 감사할 거리
그래서 결론은 뭐냐? 성도의 특징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감사와 기쁨이 늘 주어지도록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실패할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마음껏 안심 푹 놓고 실패했다고 치고 이왕 실패한 것 막 실패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없는 데서 새로 수컷으로 만들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산 제물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유성처럼 날마다 주의 말씀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