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미쿡강의를 다시 정리함 !! - 2
20160921 [요한1서] 캘거리 강의6 (27)
강의 : 이근호, 정리 : 이미아
구원은 단절 !!
이제 시작합니다. 첫째시간 마지막에 '단절' 이라는 이야기를 했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제는 끝났어요. 다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고, 복음을 이 땅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백성을 전쟁을 통해서 전리품으로 만들어서, 그 전리품 안에, 그것을 성소라고 규정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17절에 나오죠. 그러니 하나님의 '성전' 이라는 의미는, 주님은 어디에 거하시는고 하니, 주님이 홀로 전쟁해서, 거기에서 나온 전리품, 즉 포로인데, 그 포로 안에 거하시는 것이 주님의 성전이라는 겁니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면서, 그러니 그 안에 있는 모든 벽돌들은, 주님 본인의 일방적인 공로로 인해서만 얻어진 결과물들인데, 바로 그 속에서 주님께서는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하는데, 즉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렇게 되면 구원이 단절인데, 그러면 "그 단절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라는 문제가 남겠죠. 그것이 뭐냐 하면, '잉태치 않은 자' 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그 잉태치 않은 자가 누구인고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이고, 그리고 야곱의 아내들 중에서 원래 본처가 누구인고 하면, 언니 레아가 본처가 아니고, 둘째인 라헬이 본처라는 말이죠.
언니는 세일할 때 '1+1'로 해서, 그렇게 세일로 같이 팔려온 겁니다. 진짜 본처를 얻기 위해서 덤으로 얻어걸린 것이 레아라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누구만 사랑하느냐 하면, 자기가 사랑해서 낳은 자식만을 사랑하는데,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라는 말이죠.
거기서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그만 10명의 자식들이 화가 나서, 그 형제들이 규합해서 누구를 팔아먹느냐 하면, 아버지의 엑기스와 같은,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독생자를 애굽에다가 넘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맏이가 말려서 죽이지는 못하고, 물론 죽은 것이나 팔린 것이나 같은 의미인데 말이죠.
그래서 팔아먹고 난 뒤에 아버지한테는 "아이쿠 아버지, 애석하게도 짐승에게 잡아먹혀서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 피를 보세요. 아버지께서 유독 요셉에게만 입히는 이 채색 옷에 짐승의 피가 묻어 있지 않습니까? 국립과학연구소에 맡겨서 조사를 해보세요" 라고 하는데, 물론 그때는 그게 없으니까 아버지는 요셉의 피인 줄 알았죠. 그것을 통해서 그만 야곱은 자식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좋아하는 자식은 에서일까요? 야곱일까요? 이삭이 두 아들 중에서 누구를 좋아했습니까? 에서를 좋아했죠. 그러나 축복은 누구한테 갔습니까? 야곱에게 갔지요. 그리고 또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했습니까? 제물로 바쳐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서 원하는 것은 결국 단절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육적인 사랑의 단절, 자기의 모든 사랑이 천국에서는 이게 버림받는 이유가 되고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1에서 시작해서, 즉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어떤 누구를 만나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것이 하늘나라에 살만한 여건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잖아요. 육으로 태어났으니까 나오는 모든 속성은 무엇 밖에 나오지를 않습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평소에 강의하면서, "제발 막살아주세요!" 라고 부탁을 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육은 육인데, 그런 육을 가지고, 감히 영을 추구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것은 육에 어울리지 않는데, 결국 그것은 전능하다는 예수를 자기 행복에 이용하려는 구실에 불과하고, 일종의 속임수인데, 그러니 백날 경건해봐야 반대급부를 노리는 하나의 수작이라는 말이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그런데 하늘나라는 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육에서 영으로 어떻게 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고,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드린 질문인데 말이죠.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까?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하면 볼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라고 하셨죠.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니고데모는 '거듭난다' 라는 단어의 의미에 집중을 했어요. 그래서 성령이라는 것은 그만 빼버리고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 라고 했는데, 즉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엄마 품속이 무엇인가요? 육이잖아요. 즉 "니가 사람으로 태어났어? 천사로 태어났어? - 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 그러면 끝났네!" 라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사람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하늘나라의 취지인데, 그게 하나님의 확정된 뜻이라는 말이죠.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다른 죽음을 죽어야 !!
그러면 엘리야는 천국에 왜 갔고, 모세는 왜 가있고, 아브라함은 왜 가있냐 하면, 그들은 죽었거든요. 그러면 늙어죽어야 됩니까? 늙어죽어도 육인데, 그러니 다른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죽음을 말이죠. 늙어서 죽는 죽음 말고, 살아서 죽는 죽음이 있는데, 살아서 말이죠.
살아서 이미 죽었다고 통보를 받는, 그런 통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살을 할까요? 약을 먹을까요? 제가 캘거리에 와서 보니까 죽을 데도 마땅치 않아요. 그러고 보니 있는데, 그게 로키산맥인데 말이죠. 거기에 올라가면 되지 싶은데, 그러면 올라가서 자살할까요? 죽을까요? 그렇게 죽으면 천당에 가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죽음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죽는 죽음은, 그렇게 자기가 죽는 죽음은, 백번을 해도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육에서 육으로 간 죽음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이름이 흙이고, 그 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복음이 적용되는 인간이 되어야 !!
따라서 육이면서도, 영에서 영으로 오신 분이 스스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아서, 인간이 되셔서, 그래서 그분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는 자들만이, 그 사람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미 죽은 자로서 간주되고, 그래서 뭐냐 하면,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는 말은 일체 나올 필요가 없고, "복음을 저한테 적용시켜주세요" 라는 말만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적용된다는 것은, 그 복음이 구원될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해서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단절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잉태치 못한 자인데, 이제 이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라가 임신을 못하는데, 리브가도 임신을 못하죠. 라헬도 임신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뒤늦게 나온 아이 이름이 요셉인데, 그러면 야곱의 아들들이 왜 그렇게 많으냐 하면, 육으로 난 아이들과, 영으로 난 아이, 그때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약속으로 난 자' 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
그러면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2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라고 하는데, 이삭을 무엇으로 표현합니까? 이삭이라고 하지 않고 이삭에게 의미를 두죠. "니가 보기에는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아니야. 약속이 먼저 있고,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하는 자다" 라는 겁니다.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면 이삭의 일대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죠. 없던 자인데 생겼고, 임신하지 못한 자인데,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잉태가 되었고, 그 잉태가 된 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는 모습이고, 희생제물인데 어린양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이삭의 일대기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약속으로 왔고, 사람들은 그분이 약속인 줄을 몰랐고, 그분이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그 모습을 바로 이삭이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두 그 사람에 존재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이 그 사람 속에 내용물이 되어있는 존재를 두고 약속의 자녀, 혹은 약속의 존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강도가 되었든 말이죠.
겉으로 보면 강도지만, '탁' 깨트려보면 !!
그 사람들의 모습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리고, 창기고, 강도인데, 그러면 '탁' 하고 깨트려보면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면, 그 안에 약속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창세 이전부터, 즉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언약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어제 초콜릿을 드셨죠? 초콜릿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가요? 아몬드가 들어있죠. 그러니 "너희 눈에는 초콜릿으로 보이냐? 아몬드가 들어있다" 라는 겁니다. 한때는 킨더 서프라이즈가 금지조치를 당했죠. 아이들이 초콜릿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장난감을 노리고 마구 구매를 하니까 말이죠.
그 킨더 서프라이즈보다 더 적절한 것이 뭐냐 하면, 한국에서는 '고래밥' 이라는 과자가 있어요. 고래밥이 뭐냐 하면, 물론 고래가 먹는 밥은 아니고(ㅋㅋ), 밀가루로 만든 과자인데, 고래도 있고, 토끼도 있고, 별도 있고, 상어도 있고, 여러 모양이 있지만, 먹어보면 과자라는 겁니다.
모양만 그렇지 실제로는 뭐냐 하면, 그냥 밀가루를 가지고 만든 과자라는 말이죠. 즉 "니가 보기에는 창녀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세리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강도로 보이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약속의 자녀다" 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한 자라는 것이죠.
잉태가 되어버리면 아버지와 엄마를 닮은 사람만 안에 내용물이 되고 마는데, 그 안에 아버지와 엄마의 DNA가 그대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잉태치 못한, 약속이 된 자가 오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세포를 갖고 있든지 전혀 관계없이, 그 사람은 약속된 곳으로 합치해야 될 운명을 지닌, 그렇게 그 사람의 미래는 하늘나라가 되는 사람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
껍데기는 인간인데 그 안은 약속, 즉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사람, 약속이 들어있는 사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인데,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니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영이, 그 성령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라는 겁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렇게 해서 살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자기가 살고자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모독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논리가 좀 이상한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그것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면서 말이죠. 살며시 웃으면서, 여유롭게,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나는 성경말씀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빼는 것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어느 구절도 안 됩니다" 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이게 고래로 보입니까? 이게 고래밥인가요? 전혀 아니죠. 약속의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나를 주관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약속이 내 인생을 이미 결정짓고 말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지옥을 보고 싶어도, 이제 지옥은 다 보고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흑흑흑, 하하하 !!
그래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좋아서 슬퍼하는 흉내를 내면서 평생을 보낸다는 말이죠. "이번 운송계약은 끝났어. 나는 부도가 났어!" 라고 하면서, "흑흑흑, 하하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도가 나게 하신 것은, "약속이 부도보다 더 세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그런 존재야. 남들은 부도가 나면 자살하지만, 너는 부도가 나면 축복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 정도로 약속이 육적인 모든 본능을 이기고 있어" 라는 것인데, 그것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을 아직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잉태치 못한 자라는 말이죠.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인데요?
'친구' 라는 영화에 보면 성질이 더러운 선생이 학생한테 뭐라고 합니까? "너거 아버지는 뭐하시노?" 라고 하는데, 볼때기를 마구 잡아당기면서 말이죠. 그러자 학생이 "우리 아버지는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요?" 라고 하니, 선생이 "아니, 이게?" 라고 하면서 시계를 풀면서 한 바탕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인데요?" 라고 하면 우리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분인데요? 그분이 우리 아버지인데요? 같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됐는데요?" 라고 하는, 이게 여기 갈라디아서 4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고 말이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 어머니다" 라고 하는데, 즉 "너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 찾지 마라. 아버지 장례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를 하도록 하고, 너는 나를 따라라.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 니 속에는 약속이 작렬하고 있는데, 약속이라는 엔진이 발동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은 무엇이라고요? 약속은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통보하는 쪽에서, 그렇게 성령께서 오신다는 말이죠. 따라서 인간의 모든 구원론은 다 헛것이고, 소용이 없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 넘치는 자비와 사랑 앞에, 우리는 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보탤 것이 전혀 없는데, 헌금, 기도, 전도, 봉사, 교회충성, 목사 섬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으면, 안 하면 됩니까? 물론 그렇지요. 안 하면 되는데, 어떤 식으로 말이죠? 아무 것도 안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엄청나게 바쁘다는 겁니다.
'나' 라는 형식에, '성령'이 내용으로 !!
이제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이 뭐냐 하면, 지금 요한일서 4장과 5장을 넘어가고 있어요. 진도를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닌데, 이미 진도가 다 끝나가고 있어요. '이곳' 이라고 하면, 이곳이라는 것은 장소개념이죠. 즉 "이곳에 누가 있는가?" 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곳에 지금 내가 서있다" 라는 것인데,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곳은 성령님이 지정한 곳이고, 그 성령과 사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령과 사귀는 자는 그곳에 자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뭐냐 하면, 하나의 형식이 되고, 그 내용은 무엇이 됩니까? 성령님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이 되니까, 그 성령이 날마다 무엇을 내리겠어요?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의 무엇을 가지면 안 되냐 하면, 목적이나 목표를 절대로 가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스트레스는 여기서 나오는데 말이죠.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스트레스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이것은 하고야 말리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를 망칩니다. 자기를 파멸시켜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을 해서 남한테 꿇리지 않고 과시해야지!"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에게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이란 말이죠. 즉 자기에 대한 자기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
그 예가 뭐냐 하면, 사법고시에 7번 떨어졌을 때, 그렇게 판사가 된 아들을 보고 싶어하던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뒤에 8번째 합격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격증을 들고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봉투에 넣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아버지 무덤에 가서 엉엉 운다는 말이죠. "아버지, 저의 성공을 미처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이 자식이 성공한 것을 제발 좀 보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본인만 혼자 엎드려서 울고 있지요? 그러나 그 자식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죽은 아버지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육의 아버지인데, 그게 모든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버지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 약속의 이름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죽었어도 자기 행동을 절제하고 조정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나를 착하다고 할까? 나쁘다고 할까?" 라고, 그래서 그게 교육이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아이덴티티'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체성' 인데 말이죠.
그렇게 해서 쌓이고 쌓인, 훈계를 받은 그 훈계가, 그것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고, 그것이 자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참 비극이라는 말이죠.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는데,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자기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될 때, 그 아버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르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엄마가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그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러면 그 남자가 찾는 여자의 이미지는 누구를 닮았겠어요? "어디 내 엄마와 같은 여자가 없을까?" 라고 하면서, 그 결핍된 사랑을 마저 채워줄 여자를 찾는다는 겁니다. "어디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윤복희가 위로를 해준다고 하면서, '여러분!' 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될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누가 나를 ( ) 채워줄까?
한 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누가 나를 ( ) 채워줄까?" 라는 것인데, 여기에 빈칸이 있죠. 이렇게 빈칸이 있다는 것이, 그동안 두려움과 공포를 잊은 겁니다. 이 빈칸이 결핍인데, 결핍의 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말이죠. 이 결핍, 즉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실패하게 되면 결국 스스로 무엇을 끊느냐 하면, 자아를 담은 이 그릇, 자아는 이미지이고, 그릇은 육체인데 말이죠. 그래서 자아가 괴로우면, 너무 괴로우면 그릇을 깨트리겠지요. 이것을 두 글자로 '자살'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 채 자살한다는 말이죠.
여기 캘거리를 보세요. 온도 18도, 습도 20도, 누가 와도 최적의 컨디션을 줄 수 있는 환경이잖아요. 천국 바로 밑에 있는 999단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천국 밑에 분당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물론 부동산에서 집 값을 올리려고 퍼트린 소문이라는 겁니다(ㅋㅋ).
그렇다면 여기 캘거리에서는 자살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렇게 좋은 환경이라고 해서 과연 자살을 하지 않을까요? 자살은 누적된 자기의 결핍을 자기가 견디다가 견디다가 결국 못 견뎌서, 자기가 마저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없을 때, 그 괴로움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에구, 이런 예쁜 것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없던 자였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낸, 주님 자신의 노리개감이고 장난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기뻐하심을 입은 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기뻐하심을 입은 자,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굴러도 "에구, 이런 예쁜 것!",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곧 사귐인데, 도둑질을 한 것도 예쁘다고 하고, 창녀짓을 한 것도 예쁘다고 한다는 말이죠. 창녀짓을 그만두는 것이 예쁜 게 아니고, 어떤 짓을 해도 그렇게 예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있는 그 장소에 누가 있어요? 주님의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창녀짓을 한다는 겁니다.
이근호 목사는 지카 바이러스구만 !!
하다하다가 이제는 진짜 완전히 막 가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지금 강의가 그야말로 막 가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지 모르는데, 죄를 유발시키는 발언을 지금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도 그대로 유튜브에 올라가는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죠. "그래, 잘 한다. 목사가 되어서, 여기 캘거리에 와서 난데없이 죄를 유포하고, 자기가 무슨 지카 바이러스도 아니고 왜 죄를 유포하느냐?" 라고 하면서, 씹어대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죄가 유포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죄가 무엇인지, 죄가 유포된다는 것을 말이죠. 죄는 배가 고파서 짓는 게 아닌데, 기쁨이 없어서 죄를 짓는다는 겁니다. 기쁨이 없어서, 사랑이 없어서 말이죠. 그래서 사랑을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그렇게 자기 소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1에서 와서 다시 1로 돌아가는 모든 것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게 이미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된다는 말이죠.
따라서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죄를 더욱 더 죄로 드러나게 함으로서 기쁨이 넘치게 되는데, 자기가 지었던 죄에서, 그런데 바로 그러한 죄 값을 치렀던 약속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기분 좋게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법에서 나온 죄이기에 !!
그렇다면 "죄를 더욱 더 증가한다"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더 늘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신의 죄가 아니고, 그것은 성령의 법에서 나온 죄기 때문에, 그 끝은 이미 해결된, 즉 십자가로 연결된 죄라는 겁니다.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옛날 같으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면, 옛날에는 이런 핑계를 대고 넘어갔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지키지 우리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넘어갔던 것인데,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것도, 이것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의 리스트에 포함이 되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설교라는 것은?
이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런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죄까지 다 지불을 해줬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지요? 따라서 설교시간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이 속으로 "아니 저 양반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렇게 나오지?"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ㅋㅋ).
"세상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제가 그만 알아버렸습니다. 이런 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 아니, 저게 미쳤나? 당신이 그 따위로 이야기하면 우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겠네. - 맞습니다. 그게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제가 주의 종으로서 증거하는 겁니다" 라고, 이게 바로 설교시간에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하는데, 이 설교가 바로 죄입니다. - 목사님께서 설교준비를 하느라고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도 죄입니까? - 예, 죄입니다. - 그러면 목사님은 지옥에 가지 않나요? - 지옥에 가지요. 그런데 지옥에 가는 그 육을 가지고, 약속이 그 안을 절개해서 약속을 담아버리니까, 세상에 나 같은 무가치한 인간도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희망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게 바로 복음이죠. 이게 기쁨이고, 이게 사랑의 나눔이라는 겁니다.
핵심은 '장소' !!
오늘 마지막 강의의 핵심은 '장소' 라는 것인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일서 4장과 5장의 핵심은 장소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4장 4절을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게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죠. 여기에 '하나님 안' 이라고 표현했는데, 즉 하나님께 속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비되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이'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세상은 자체적으로 무엇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적' 이라는 말이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 안에 살고 있지요. 그러면 세상 안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또 다른 세상과 단절된, 그렇게 또 하나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 즉 세상 안에 이미 성령께서 형성해놓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 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안은 조금 있다가 설명해드리고 말이죠. 어쨌든 지금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안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세상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안, 즉 천국은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세상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디만 바라봅니까? 하늘만 쳐다본다는 겁니다. 하늘만 말이죠. 세상 안, 즉 이미 성령 안에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라는 겁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이게 로마서 14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죠.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목적과 목표가 없는 기쁨 !!
그러니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성령 안에 있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주님이 있고 사귐이 있으면, 그러면 자기가 갑이 아니고 을이 되는 기쁨, 자기가 그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는 기쁨, 즉 "내가 알아서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은, 그것은 목적과 목표가 없다는 겁니다.
목표라는 것은 모든 지향성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경향을 두고서 목적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갑니까? 나름대로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달성이 됩니까? 안 되는데, 즉 결핍이라는 말이죠. 실패하면 자살이고, 성공하면 새로운 목표를 세우죠. 그게 기업활동인데, 자본시장의 활동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회사에서 그래프를 그리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시카고의 어떤 집에 가보니까, 벽에다 딱 이 한마디를 써놨어요. 저는 그것을 보고 "아하, 저렇게 일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고맙게도 제가 아는 영어라는 겁니다. 그것이 "Well!" 이라고, 이 글자를 얼마나 크게 적어놓았는지, 여러분도 이것을 해석할 줄 알죠? 즉 "잘 해라!" 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느 선까지 한 것이 잘한 것입니까? 그게 나와있을까요? 끝도 없다는 겁니다. "잘! - 이케요? - 아니! - 요케요? -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먹듯이 더더더더! - 이제 힘들어요. - 더 나올 것 없어요? 그러면 나가세요. 수고했어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욕망의 노예들 !!
그리고 그 다음에도 또 다시 "더더더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게 바로 '목표(aim)' 라는 겁니다. 그것이 골인할 때의 그 '골(goal)'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목적의, 마귀의 노예들이라는 겁니다. 육의 노예들인데, 욕망의 노예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기쁨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에게는 마약과 술로 잠시 대체될 수 있는 기쁨뿐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노래방에 가서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데, 저는 노래방에 가는 것을 싫어해요. 왜냐하면, 너무 갑갑하고 어두워서 말이죠. 그리고 갇혀있다는 겁니다.
노래를 부를 것 같으면 차라리 로키산맥의 알프스에 가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와 같이 부르고 싶어요. 그러다가 마리아는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리니까 후딱 모자를 쓰고 내려가죠. 그러고 보니 알프스의 마리아도 종교에 매여있는데 말이죠(ㅋㅋ).
너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잖아 !!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맬 수 없는데, 이미 합격된 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뭐냐 하면, 4장과 5장이 그래서 어려운데 말이죠. 바로 이것입니다. "봐라, 옛날에 니가 저렇게 살았단다" 라는 겁니다. 어디 안에서 말이죠? 세상 안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너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잖아"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은,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는 것인데, 저는 요새 이것을 두 글자로서 표현을 합니다. 여기 적어놓은 'well'은 지웁시다. 'well'은 없는데, 하나님 나라에 잘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잘 순종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순종은 자비를 모독하는 것인데,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게 드론과 같은 인생인데, 드론을 알죠? 붕 떠서 날아다니는 것인데, 마치 이 세상을 독수리처럼 위에서 붕 떠서 바라본다는 것이죠. 비록 지금 꼬라지는 이렇지만 말이죠. 이것이 아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즉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자유니라" 라는 것인데, 육에 있으면서도 다른 장소, 즉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말이죠. 실패를 즐겨라 !!
그래서 "니가 육에서 하는 그 죄를, 바로 옛날에 니가 한, 이미 합격되기 이전에, 수능을 치기 이전에, 수학정석을 보고, 성문종합영어를 보고, 학원을 다니면서 밤샘을 했던 그 모습, 그러한 실패를 즐겨라" 라는 겁니다. 즉 "저는 저렇게 실패했고, 나는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라고, 그래서 우리는 한 평생을 살면서 실패할거리만 계속 행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자성어로 '신앙생활'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실패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실패했습니다. 지금 근무 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전부가 다 이번 성경공부 때문에 실패를 했어요. 돈벌이에 지장이 많은데, 실패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유롭게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 마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죠. 마귀는 성공가지고 협박과 공갈을 칩니다. "니가 헌금을 안 하고 십일조를 안 하면 저주를 받아!" 라고 할 때, 이렇게 하세요. "그 저주를 저한테 좀 주세요. 제가 저주를 받아 마땅함을 좀 알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이 땅에서 변함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었죠? 사람들에게 실패자였어요? 성공자였어요? 실패자였죠. 그러니 실패자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저 누구를 믿습니까? 스티브 잡스를 믿지, 예수는 안 믿는다는 겁니다. 빌게이츠를 믿지, 예수는 안 믿는다는 말이죠. 누가 예수를 좋아합니까? 심지어 바라바라는 강도보다 더 못하게 취급받은 분이 예수님인데, 빌라도의 재판에서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은 예수가 가지고 있다는 전능하다는 능력을 이용해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성공해서, 자기 목적과 목표를 하나님의 힘까지 동원시켜가면서 기어이 달성하겠다고 하는, 그런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마귀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또한 교회에서 긍정하니까, 교회가 마귀의 성전인지 누구의 성전인지 구분도 안 된다는 말이죠.
이제 제일 마지막 장인 5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혜택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앞에 있는 것은 다 장소문제니까 이미 이야기한 겁니다. 5장 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요일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물과 피와 성령 !!
여기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생뚱맞게 갑자기 왜 물과 피가 나옵니까? 곤충은 머리와 가슴과 배로 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생물에서 말하는 곤충 분류법인데, 그러면 예수는 무엇으로 되어있습니까? 이게 2,000년 신학계에서 주장한 바로는, "예수는 인간과 신으로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다" 라는 것이 아다나시우스 교리인데, 그게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면서 내민 하나의 시국선언과도 같은 것인데 말이죠. 그러면 제가 삼위일체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온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나온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 삼위일체 자체가 성경에 없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물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삼위일체라는 것은, '위(位)'와 '체(體)' 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구절은 없어요. 어디에 위가 있고, 어디에 체가 있습니까? '삼위일체' 라고 했을 때, 위와 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경에서 쓰지도 않는 단어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이것은 누구를 위함이라는 겁니까? 복음을 위함이 아니고, 무엇을 위함입니까? 구원을 위함인데, 구원을 위함이라는 말이죠. 생로병사로 고생이 많은 이 세상에서 희망이라는 것, 목적을 찾다가 찾다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으면 그때는 천당이나 가자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욕구를 이용해서 교회들이 삼위일체를 만들어낸 것이죠.
역시 '단절됨' !!
그러면 여기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에서 바깥으로 뛰어나갈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전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단절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분해할 때, 인간과 하나님이 아니라 무엇으로 분해했어요? 물과 피와 성령인데, 그런데 이 3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단절됨' 이라는 말이죠.
(요일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
그러면 제가 물어봅시다. 세례요한의 기능은 독자적이었어요? 그것이 아니라면 오실 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까?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세례요한의 기능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모든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세례요한의 개인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말이죠.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은 어디로 이전이 되고 통합이 되느냐 하면, 뒤에 후발자가 되신 예수님의 기능 안에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물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겠습니다. 학급에서 수학시험을 쳤는데, 아이들이 신이 났어요. "너는 몇 점이고? 나는 95점. - 니는 - 나는 97점. 그러면 니는? - 나는 99점" 라는 겁니다.
그러면 "야, 우리 담임선생님이 참 좋아하겠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점수를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선생님이 '애들아, 수고했어. 내가 단팥빵을 줄게' 라고 하겠지?"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여기 캘거리에도 단팥빵이 있습니까? 팔고 있어요? 세계 어디를 가도 단팥빵만큼 제가 좋아하는 빵은 없는데 말이죠(ㅋㅋ).
그것은 그렇고,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그만 회초리를 이만큼 들고서 인상을 찌그리고 왔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나는 98점. 나는 99점" 라고 하면서, 지금 캘거리 학생들의 평균이 95점 이상이 되었는데, 그런데 학생들이 갑자가 무엇을 봤습니까? 선생님이 들고 있는 회초리를 보았다는 말이죠.
물세례는,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유발시키는 사인 !!
그러면 거기서 그 회초리를 봤다는 말은, 그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구나" 라는 것을 유발시키죠. 그러니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유발시키는 징표이고 사인이라는 겁니다. "죄를 씻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죄가 있음을, 죄가 잠복되어 있음을 바깥으로 드러내라" 라는 겁니다.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심사하러 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칭 무엇입니까? 죄인이 아니고 자칭 의인으로 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이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이때에 너희들은 무엇을 보려고, 무엇을 심사하려고 나타났더냐?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이 돌멩이가 구원받을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는 겁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아까 예를 든 담임선생님은 무엇을 들고 왔지요? 회초리인데, 그런데 세례요한은 실제로 무엇을 들고 왔습니까? 도끼를 들고서 "물에 빠질 사람은 빠져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물에 빠졌다는 말은, "맞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물에 빠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빠지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 누가 빠지느냐 하면, 난데없이 수영복도 안 입고 예수님이 그만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이것들이 말이야!" 라고 하는데, 세례요한의 모든 엄포는 사실이지만,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기 기능이 아니고 누구의 기능이냐 하면, 세례요한의 뒤에 오실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거든요. 그러니 모든 세상은, 아까 이야기한, 세상 안에 있는 자체는 무엇이란 겁니까? 그것은 육이고, 그게 죄가 되고 단절이 되고,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따라서 세례요한은 폼을 잡고 있고, 예수님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한테 그런 기능을 먼저 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그만 물에 뛰어들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헐!'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학체제를 어떻게 구성을 해야될지, 이런 신학체제를 말이죠.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
그것을 요한복음 1장 30절에서는 "먼저 온 자가 나중이 된다" 라고 했는데, 개념상 절대로 섞일 수가 없고 연결될 수 없는 단어 두 개가 나옵니다.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된 자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불교에 가져다주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심지어 교회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세례요한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잖아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가 장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창녀질을 하고, 세리질을 하고,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이게 자기의 뜻이 아니고 누구의 뜻이었다는 겁니까? '나보다 먼저 계신 분', 그분의 속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어떤 속성인가요? 어떤 죄도 용서를 받는다는 속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과도한 자비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죄의 일부를 우리 담당으로 하고 살도록, 그렇게 평생을 살도록 조치를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사귐인데, 요한일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귐'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흑흑흑, 큭큭큭!" 라고 하면서 울다가 웃어야 한다는 말이죠. 처음에 울 때는 "나 같은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어?" 라고 하다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이래야만 한다는 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웃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그게 심해지면 조울증이 되는데 말이죠(ㅋㅋ).
복음을 위해서 저주도 필요하기에 !!
그래야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 그 관계성 안에서 이미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 주님께서 에덴동산을 막아놓고 넘어온 것은, 막을 때는 언제고 넘어올 때는 언제냐 하면, 막을 때는 구원을 못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고, 그리고 넘어올 때는 복음을 위해서 저주도 필요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저주가, 즉 죄가 재료가 되어야지 주님의 주되심과 복음이 성립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죄를 얻기 위해서 죄 많은 이 세상에 뛰어들었는데, 그 뛰어든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죄인들만 받아야 될 그 물세례에 누가 뛰어들었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뛰어들었다는 말이죠.
첫 번째로, 예수님은 물이다 !!
그래서 여기서 어떤 공식이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물이다" 라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밤늦게 힘들게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 라고 했는데, 즉 두 번째로 태어나야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첫 번째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게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물세례를 의미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규정되었는데, 무엇으로 규정이 됩니까? 죄인이라고 규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인으로 규정되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죄인으로 규정이 되어도 구원을 못 받고, 죄인으로 규정이 안 되도 구원을 못 받고, 그러니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즉 예수님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만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에게 담긴 취지를 펼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렇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예수님을 알리기 위한 절차로서, 그렇게 우리를 카펫으로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둘둘 말면 주님 쪽으로 모두 감기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라는 말이죠.
두 번째로, 예수님은 피다
그 다음에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실 분은 불의 세례를 준다" 라고 했죠. 그 불의 세례가 뭐냐 하면, 자기가 받을 세례가 남아있다고 해서,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피다" 라는 것인데, 이 사실을 예수님이 확정하고 성공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오신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성령이다 !!
"이미 다 이루었다" 라고 해서, 그렇게 다 이루시고 나서 그 다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으로, 여기서 부활의 영이라는 말은, 어떤 마귀도, 어떤 율법도, 어떤 죄도, 이미 거기서 빠져나온 힘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발목을 잡을 수 없는 힘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성령이고 부활의 힘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이미 빠져나왔기 때문에, 출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이제는 탈출이 가능한데, 이미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니, 예수님께서 탈출한 그 능력으로 우리를 뒤집어 씌워버리면, 그 안에 있으면 우리도 어떤 저주나, 율법이나, 마귀나, 그 어떤 죽음도, 더 이상 막을 자가 없음을 확정짓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요, 피요,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령이란 말이죠. 이 세 개를 합치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단절된 것을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다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다는 말이죠.
제가 아까 50분해야 되는데 55분을 했거든요. 이번에 5분 깝니다(ㅋㅋ).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책입니다. 그 셋이 뭐냐 하면,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귐을 통해서, 기쁨을 통해서, 그 사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성경인 아가서 2장에서 말이죠.
지금 요한일서 4장과 5장을 다 했는데, 이게 장소문제니까 말이죠. 아가서 2장 6절에 보면,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시추에이션이죠? 여자는 남자 품안에 꼭 안겨있는 모습인데, 이게 바로 사랑의 관계라는 말이죠.
(아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그래, 라온이구나 !!
그러면 갑이 되는 남자가 을이 되는 여자를 어떻게 합니까?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내가 지켜줄게!" 라고 하는데, 이것이 영화 '별들의 고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인데 말이죠. "니 이름이 무엇이냐? - 라온입니다. - 그래, 니 이름이 라온이구나. 내가 구름으로 달빛을 그려줄게!" 라고 하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겁니다.
'몬스터' 라는 드라마에 보면, 도도그룹의 총수인 도충이가 회개하고 난 뒤에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게 해주옵시고, 넘치는 사랑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게 마지막 50회에 나와요. 어제 한국에서 했는데, 여기는 캘거리라서 감이 오지 않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 드라마에서 개인구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것은 없어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여호수아의 경우에,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죄인이 되는 경우에, 어느 정도로 말이죠? "주여, 저 같은 것은 구원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육입니다. 그냥 방치해도 상관이 없어요" 라고 말이죠.
주여, 저를 구원시켜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다시 말해서, "주님이여, 저의 구원을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저에게 찾아오신 것을 저는 압니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사귐이고, 이게 복음이고, 요한일서의 주제라는 겁니다.
이미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마귀의 협박과 공갈에서, 달리 말하면 행함에서 오는 협박과 공갈에 더 이상은 속아넘어가지 말자는 겁니다. 우리 약속할 수 있죠? 그것은 다른 누가 행함으로 공갈을 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자책하고, 벌을 세우고, 손을 들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꽃으로도 자기를 때리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자책하고 때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시되, 현재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놓은 것인데, 그것이 하늘나라의 지시사항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꿈같은 세상을 꿈인 줄도 모르고, 현실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니까, 이 현실이 나를 위한, 나의 생존을 위한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깔아놓은 카펫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장소에 살아가면서 괴로워하면서도, 고생하면서도, 실패와 낭패를 거듭하면서도, 이미 우리의 영생은 전혀 지장이 없음을, 그래서 날마다 미소와 기쁨으로 고백하는 사랑의 관계가 되게만 하옵소서. 주님의 오른손과 왼손이 저희를 꼭 껴안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6,11,29 다시 정리함. - 녹취 '구'
강의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그리고 정리하신다고 수고한 녹취폐인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특히 이미아 폐인님, 수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