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1111a히12장23절(언약의 위력)-이 근호 목사
안양20161111a히12장23절(언약의 위력)-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2장22절해봅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 내용을 보게 되면 앞에 어떻다. 어떻다. 하는 앞에 붙는 형용사가 수식어가 많이 붙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어떤 지명이 나오고 어떤 명사가 나올 때는 그러한 지명과 명사는 그냥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사건들이 계속 발생되고, 그 발생된 사건들이 집약되어서 어떤 특정 지명과 공간을 형성해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에 어떤 지명과 공간을 보려면 여기 현재 누가 있는가만 보면 안 되고 과거에 이 장소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누적되고 쌓였는가를 다 끄집어내줘야 돼요. 이만큼 쌓여있는 그 사건들을 하나, 하나 벗겨내어서 설명이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쉽게 하겠어요. 천국이라 하잖아요. 사람들은 천국을 오해하기를 내가 여기 있고 천국 생각한다면, 대부분 이렇게 해요. 내가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해요. 이건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요. 내가 죽으면 가는 곳. 죽으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저 세계지요. 저 세상이지 천국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고 천국이 되기까지 구약이라는 게 있습니다. 천국까지 구약이 있고, 천국이라는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신약에 나와요. 그러면 구약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요. 그러면 신약도 하나님의 나라 나와요.
언제 나오느냐 하면, 구약과 예수님의 공생애, 마태복음, 마가, 누가 복음하고 그다음 요한복음 및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요 중간을 과도기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신약과 겹치는 부분.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많이 나와요. 특히 마태복음 같은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또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런데 여기 신약에 오게 되면 과도기 천국을 거쳐서 오게 되면, 이 나라가 아들의 나라로 바뀌면서 무엇으로 되느냐 하면 그냥 하늘로 되어버립니다. 하늘로. 그렇게 되면 구약의 처음에 시작할 때는 그냥 하늘로 시작해요. 하늘로 시작해서 하나님나라 갔다가 이게 비슷한 말로 천국 갔다가 그 다음에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영생의 나라 이리 이야기하고 하늘로 있거든요. 요한복음 같은 경우, 나는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그러면 개념이 이렇게 변화될 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변할 때마다 뭐가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에서 받았던 인식이 있지요. 선입감. 선입감이 사건 없이는 안 바꿔집니다. 꼭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알았던, 죽으면 저 생 간다고 하는, 저 생이라는 개념 자체의 내용을 계속해서 바뀌되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 또는 천국, 하나님 나라 또는 아들의 나라 또는 영생의 나라 합치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일어나는 고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되풀이 되어야, 우리가 가는 곳이 저 생이 아니고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아까 본문에 보면 그렇게 뒤에 수식어가 많이 붙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볼까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몇 가지에요?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제가 지금 요 이야기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여기에 포함 안 시켰습니다.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와, 이 요한계시록 앞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은, 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같은 내용을 사용하는데, 내용은 달라요.
같은 단어라도 내용이 최종 완성된 채 다시 회상하는 식으로. 단어는 옛날 단어고 보는 모습은 이미 완성된 입장에서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서 보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40~5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그러면 이름이 생각나던가요? 별명이 생각나던가요? 별명이 생각나지요. 아이고~ 코찔질이 오래만이구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나이 60돼가지고 지금은 코 안 흘린다. 이렇게 되거든요. 지금은 코 안 흘려요. 하지만, 부르는 용어가 옛날 그 때 용어 쓰잖아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이 전부다 거의 다 엉터리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완성단계에서 봐야 될 것을 가지고 그 용어가 있는 옛날식에 내용을 끄집어내다 보니까 666 맞으면 지옥 간다. 666피해야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용어는 옛날 용어인데 의미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봐야 될 것을 가지고, 억지를 해가지고 그 내용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지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야! 말씀대로 풀이한다고. 뭘 말씀대로 풀이해요? 요한계시록은 말씀대로 풀이하면 안돼요. 완성된 입장에서 풀어야 돼요. 완성된 입장에서.
그래서 만약에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개념대로 해버리면, 버텨야 구원받아요. 구원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그것도 미확정돼가지고 버텨야 되는데, 버티기 위해서는 죽도록 버텨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공부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불안, 불안해요. 구원은 못 받았지, 앞으로 지가 어떻게 대처할지 그건 암담하지, 3차 대전이 일어난다니까 3차 대전 피할 지하 벙커 만들어야지, 666 피해야 되지, 거기다가 짐승 피해야 되지, 국가도 주의해라. 교황도 주의해야 된다. 적그리스도 삼위일체를 주의해야 된다. 주의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마귀도 주의해야 되고. 마귀한테 이겨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를 못 이겨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잘못 푸는 사람은 마귀 피한다고 난리라. 마귀의 힘을 우리가 피할 수 있습니까? 마귀 안에 있는데 무슨 마귀를 피합니까? 안되지요. 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입장에서 ‘아! 옛날 그랬지.’ ‘옛날 코찔질 흘렸지.’ ‘옛날 구원 못 받아서 저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지. 구원 받으려고 저렇게 애를 썼지. 다 헛짓인 것을.’ 그런 느긋한 마음으로 회상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은 얼마나 여유만만 했겠어요?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귀향 살이 하면서도 세상에 대해서 연연해하는 사람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멸망 받을 도성인데.그걸 아직까지 미련 있고 애착 두느냐 말이지요.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바로 이미 구원받은 사도요한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보는 그 마음이.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제일 마지막에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자, 제가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 특히 천국개념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 많은 사건들이 그 안에 접혀져있다. 부채 접으면 접히잖아요. 펼치면 활짝 펴지지요. 펼쳐있는 개념이 오늘 본문에서는 중첩하듯이 단어를 붙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리려합니다. 어떤, 어떤 사건들이 있었기에 사건 터질 때마다 하나, 하나씩 적당한 개념들을 천국을 묘사할 때 그런 식으로 묘사했는가를 제가 설명 드리는 겁니다. 설명 드리는 방법은 원리는 간단합니다.
언약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약사건+언약사건+언약사건 이리 되지요. 이걸 영어로 하면, a and b 그리고 앤드지요. 우리말로 하면 또. 또. 또. 자꾸 플러스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길에서 동창생을 만났다 칩시다. 제일 먼저 묻는 게 “요새 니 뭐하노?” “건축 일한다.” 그리고 끝났습니까? 또 “애들은 몇이고?” “아는 둘이고.” 또 묻지요. “몸은 아픈데 없고?” “몸은 건강해.” 또 “마누라 살아있나?” “그래 잘 있어. 잘 안 죽네.” 또. 또. 자꾸 오래 간만에 만난 사람을 규명을 하고 한 덩어리로 규정을 하려면 들어가는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 때는 또, 또 이렇게 하지요. 자꾸 이렇게 들어가게 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확고한 개념을 형성할 때에 이걸 하나의 틀이라 합시다. 빈 틀인데, 틀에다가 진흙을 부어버리면 진흙은 요 틀 모양대로 그대로 딱 뒤집어보면 그 모양대로 나오지요.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감에 맞추기 위해서 묻는 거예요. 그래서? 또. 그래서? 또. 그래서 10분 만에 헤어졌습니다. 누구한테 오늘 길에서 여보 누굴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방금 또. 또. 또. 더한 걸 다 합쳐서 그걸 하나로 죽 연결해서 이어보는 거죠.
옥경이의 가사 나오잖아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남자가 이렇게 물으니까 여자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뚝 뚝 눈물만 흘리지요. 그것만 봐도 고생 많이 했구나. 나 싫다고 가고 난 뒤에 팔자 고치려고 했더니만 그래 내가 가고 난 뒤에 어떤 남자 만나가지고 신세 조저났구나. 그게 옥경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거죠. 인간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과거가 겹쳐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한 것 같은데 최근에.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입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그 잘못된 선입감을 뚫고 기어이 우리를 생명나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 또. 또. 또. 오늘 강의 제목을 또라고 할까. 또. 또.
계속해서 우리가 죄지은 것을 다 낫게 희생하시고 우리한테 핍박받고 구박받는 그런 선지자를 보낸 그런 아픔과 희생이 눌리고, 눌리고 중첩이 된 그것이 신약의 천국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천국 말할 때 앞에 한 단어가 붙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심판의 나라다.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면 가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다. 그러나 스톱!
자기의 죄를 알고 바로 천국 못가고 자기 죄, 천국 그 사이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 24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뭐라고 합니까? 뿌린 피. 죄와 천국 사이에 뭐가 있다? 피가 있는 거예요. 피.
우리는 죽으면 저생 가잖아요. 아니야! 그 선입감이 바뀌어져야 돼요. 그건 불교에요.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 간다. 아니라니까요. 교회 나왔다고 천국 가는 거 아니에요. 교회 나왔으면 뭘 알아야 돼요? 내가 원초적으로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피 복음을 증거 할 때 ‘아!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지금 이런 잘난 체하고 나도 인간답게 산다고 남한테 내세울 만한, 그런 것에서 뭔가 달라져야 돼요.
나도 이 정도야! 니한테 밑지지 않아! 니 날 무시하지 마! 니 내거 건드리면 안 돼! 나도 과거사 있어. 자꾸 이렇게 자기 것을 가질 생각을 말고 무슨 과거사든 이게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몽땅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러면 목사가 어디까지 이야기하게 돼요? “여러분, 오늘 교회 나왔습니까? 그것도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한 30년 동안 봉사했지요? 그래서 장로 되었지요? 장로 그것도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목사가 강단에서.
왜냐 하면, 그들은 자기가 이 교회에 나온 것부터 해서 누적된 선행이 있잖아요. 그 선행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행인 줄 알고 그 선행가지고 감히 저생을 가려는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엉터리인데. 그동안 스님, 목사들이 그렇게 많이 이용 해쳐먹었지만, 격려해서 돈이나 빼먹었지만, 복음 아는 목사가 왔다면 절대로 그런 소리하면 안 되지요. 이 교회 지을 때 14억 바친 장로보고 그거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목사가 과연 후임자로 올 수 있을까요? 오라 하겠습니까? 보따리 풀지도 못하고 굿바이해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교회, 이 지역사회에서 제일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 이 교회를 니가 뭔데 젊은 니가 무시해! 이러면 이거 뭐 보따리 풀자마자 싸고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요령껏 전해야 되지요. 그런다고 복음 안전하면 구원도 통째로 되지를 않아요.
교회 갖다 바쳐서 천당가려고 하는 교인들이 그걸 삐! 하고 그건 이 길이 아니네. 그건 길이 아니거든요. 언약의 피가 보이는 길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의 잘남이 예배당 벽에 자기 잘남의 나르시시즘하지요. 벽을 볼 때마다 자기의 과거의 수고한 것이 그냥 보이면 그건 자기 전당이지, 자기를 모시는 신전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붙어있는 벽돌이 아니잖아요. 교회의 당회장실에 보세요. 전임자의 사진이 죽 걸려있는 것 보면 나는 이게 검찰청인지 행정기관인지 분간도 못하겠어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내가 이야기했어요. 친구 목사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 듣나. 이 사진 다 떼어야 돼요.
어떤 사업체도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교회 예배당 사업체도 안 받습니다. 교회라는 사업체를 주께서 받은 적이 없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는, 23절에서 말하는 총회와 교회라는 말은 총회를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들을 말한 게 아니에요. 지상에 여러 군데 흩어져있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4장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라는 말을 왜 쓸까요?
지상에서는 절대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서로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심지어 부부도 하나가 안 돼요. 부부는 하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니가 나누지 못한다는 말은 나누지 못한 부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부부라 하는 것은 영원한 부부에 대한 표상입니다. 아담 자체가 두 번째 아담에 대한 표상이잖아요. 그 말은 뭐냐, 진짜 예수님이 모든 마지막 최종적인 의미는 예수님에게 갖고 있고 거기서 미리 파생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예수님으로 하나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성으로 흩어져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다양성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하나가 되지 그냥 둘이 붙어가지고 맞춘다고 부부가 아니에요. 부부가 되는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부부가 정말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려면 둘 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면 돼요. 그러면 둘 다 예수 안에 있으면 둘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마치 여기에 음료가 있는데 재수 없지만 여기에 암컷 파리와 수컷 파리가 빠졌다면, 둘이 떨어져 붕붕 떠다니지만 같은 컵 안에서 하나가 되지요.
제가 지난 울산강의 할 때, 예수님 안을 가지고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걸 쉽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파우치라고 했지요. 파우치가 뭐예요? 지갑이지요. 여러분들이 지갑 한 번 보세요. 지갑 안에 보면 칸막이가 있잖아요. 카드 넣는 곳, 동전 넣는 곳 있다 말이죠. 칸막이는 달라도 한 지갑 안에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역할은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간 대 인간이 역할마저 하나가 되려고 강요를 하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의 역할 따로 있고 여자의 역할 따로 있어요.
남자는 돈 버는 일, 여자는 돈 쓰는 일. 주례할 때마다 말해요. 여자는 지가 벌지 않고 남편이 벌어다 준 쓰는 재미 느끼라고 여자가 있고, 남자는 지가 애써서 벌은 돈을 지가 쓰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쓰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라고 부부가 있다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 역할하고 우리 교회는 아내 역할해가지고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어떤 행동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남편이 했던 그 언약의 피. 아버지와 유일하게 의견이 합일이 된 이미 합의를 봤던 그 내용을 아내가 되는 우리 교회에게 몽땅 그걸 넘겨줌으로서 아무 한 것도 없이 남편하나 잘 만나서 공짜로 가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이게 구원이거든요. 그러니 구원파라 하는 것은 왜 이단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다.”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그것은 행함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했지요. 주여, 예수 믿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하라고 했지요. “믿어지게 하옵소서. 내가 예수 믿지 않게 하옵소서.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는가, 내가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낯선 일을 발생시켜가지고 경쟁시켜 버려요. 내가 해결 하고자 하는 일을 사건으로 들이닥치게 되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막상 사건 나면 내가 해결하려고 해요. “주여, 내가 예수 잘 믿었는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까? 너무합니다.” 너무하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그동안 너는 나를 믿는다며. 니가 믿는 내가 이런 사건 일으켰어. 왜 갑자기 믿는다. 믿습니다. 해놓고 왜 나한테 원망 퍼붓지? 평소에 안 믿은 거 아니야? 너? 들통 났네. 본색 드러났어.” “그게 아니고요. 너무 해결하기 힘든 일을 주니까 제가 짜증 좀 부렸잖아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니가 하나님 믿어서 구원 받는 일은 없고, 예수님에 의해서 네가 믿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세상 그것보다 더 큰 일은 없어요.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어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덜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경쟁을 붙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귀합니다.” 라고 한 5초. 한 10초 동안은 이렇게 고백하는가 하는데 갑자기 일 터져버렸다 말이죠. 아이고~ 이 가스 불 안 껐네. 그만 주의 감사를 찬양하다가 가스 불이 안 꺼진 걸 생각할 때, 가스 불 안 껐다. 어제 나왔는데. 그러면 집이 타면 내 집 타면 괜찮은데 남의 집까지 타면 다 물어줘야 되는데... 이런 걱정이 슬슬 들지요. “주여, 이러면 안 됩니다.”
평소에 옆집하고 잘 친해놔야 돼요. “아이고! 순이네 엄마! 부탁이 있는데 부엌에 한 번 둘러보세요. 냄비 타는가.” “아무 일 없어요.” “아이고~ 주여, 감사합니다.” 이리 되지요. 우리의 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도대체 무엇의 기준에 의해서 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연세가 안 들어서 정신 바짝 차리자! 이것 가지고 버티는 거예요? 나중에 70, 80 돼가지고 정신도 못 차리고 휴대폰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온 집안 찾아다니고 치매 현상오고 아들이름은 영철이 벽에 붙여놓고 그 때쯤 돼야 정신 차리렵니까?
정신 차려서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정신을 안 차리던, 치매에 걸리든 관계없이 평소에 우리가 소중한 주의 피로 인하여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서 오늘도 이 다리를 가지고 걸었다는 사실. 아파서 다리를 못 걸어보세요. 이 다리 걷는 것도 내 힘인 줄 알아요? 주께서 발걸음 인도한다고 시편에 나와 있어요.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잠언도 마찬가지고.
우리 앞길은 이미 주께서 다 정해놓은 거예요. 소중한 성경 자체에 있어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은 성경이 이리 있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의 필요한 것을 찾아서 가져온다고. 이런 것은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우리는 성경 밖의 인물이 아니에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요? 그러면 성경 안에 들어가세요. 성경 안에 들어가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죽는 것이 그렇게 비극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죽는 것은 잠자는 일입니다.
야이로의 회당장의 딸은 죽어서 사람들은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아이고~ 예수님 일찍 좀 오시지... 울고불고 난리 났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하십니다. “잠 잘 자고 있는 아 왜 이리 말썽이냐?” “아이고, 예수님 잠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의사가 말하기를 얘가 완전히 죽었어요. 그래서 장례 치르고 있습니다.” “니 눈에는 그리 보이지. 내 보기에는 얘는 자고 있다. 소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 얘는 “아이고, 잘 잤다.” 이미 주 안에 있는 자가 주님에 의해서 성령이 와서 믿어지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 안에서 쉼을 얻고 있어요.
이 땅에서 사는 게 쉬는 게 쉬는 것처럼 안 보이지요. 왜, 날씨 춥고, 허리 아프고, 몸이 찌뿌둥하고 문제지만, 어쨌든 주 안에서는 쉼을 얻습니다. 자, 제가 방금 인용한 것이 신약들이거든요. 왜, 구약이 먼저 있고 신약이 나중 올까요? 구약은 현재 우리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성령을 선물로 줘서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하는 행세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하는 행세를 구약에 있는 우리 대표자들, 이스라엘이 꼭 오늘날 우리 모습으로 그 짓을 다했습니다.
그걸 4자성어로 종교놀이를 다했어요. 성전 짓지요. 십일조 했지요. 다윗은 찬양대 만들었지요. 온천지에 선교사 보내고 선교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율법대로 십계명 가르쳤지요. 어릴 때부터 이마에다가 온 옷깃에다가 말씀을 도배해서 재봉틀로 박아서 말씀으로 애들을 가르쳤지요. 어릴 때부터 시편 다 외우게 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달달달 외우게 하는 거예요. 온갖 것 다 했는데 망했습니다.
그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예레미야도 나오고 에스겔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딱 우리 앞에서 스톱이 됐어요. 문자가. 스톱이 딱 되니까 멀지않게 우리 코앞에 있으니까 우리의 양심과 선한 행동을 의지를 발휘해서 요거 딱 잡아서 당기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함 팔 때, 함 사세요! 온 아파트 다 들리게 떠드는 게 있잖아요. 오징어 구워가지고 함 사세요! 하고 버티면 10만원 깔고 그러면 5미터 오고 또 깔고. 5미터 앞에 오면 확 당겨버리지요. 주님께서 함 팔러왔습니까? 십계명 사세요! 하면 간절히 기도해가지고 아이고, 그만 하시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세요. 잡아 당겨서 구원받았어요? 침례교회에서 그러지요. 십자가 사세요! 십자가 사게요. 믿음으로 구원받으세요. 하니까 불교는 행함이고 자기는 믿음이니까 “그래, 눈앞의 십자가를 이제 내가 믿으면 되는 기라. 아이고, 이제 그만 약 올리시고” 십자가 확 잡아당겨놓고 진짜 예수 믿으니까 착한 일 시작하고 그러면 구원되는 겁니까?
요새는 침례뿐만 아니고 장로교회도 마찬가지고. 교리 상 5대 교리 하지만, 이게 침례교회인지 장로교회인지 분간도 안 되고 칼빈주의인지 분간도 없고 손님만 끌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 것 다 실패로 끝났어요.고 칸막이에 율법이 우리 마음에 스톱이 된 것은 율법과 우리 마음 사이에 24절의 말씀처럼 새 언약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피 없이는 말씀이 우리 안에 못 들어와요. 피 없이는.
그런데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성신이 들어오잖아요. 성신은요, 직접 오는 게 아니에요. 성신은 누구를 경유해서 와요. 누구냐, 예수님을 경유해서 성신 옵니다. 성령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경유하면 성도다. 예수님 존재를 경유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다 이루심을 경유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성령이 와요. 그래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고발하기 위해서 온 거죠. 그 죄가 우리 바깥에서 고발하다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우리 안의 내부를 고발하는 거예요. 그 고발할 때 고발한 증거가 뭐냐, 바깥에 피로 나타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지닌 우리도 유대인이 하는 행세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속성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십자가 피가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십자가 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우당탕탕 우리의 내부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사도의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변명으로 일관합니까? 좀 형편이 좋고 살기 편할 때는 “주님이여, 사랑합니다.” 하다가 갑자기 가정이 우환이 있으면 대번 입에서 뭐가 나와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말 대신에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이런 소리가 막 나오지요. 내가 이러려고 목사 됐습니까? 이러려고 집사 됐습니까? 이런 소리 막 나오지요.
평소에 사실은 그런 것이 많이 깔려있었는데 꾹 참았지. “참, 내가 인간성 좋아서 참았습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원망했는데, 워낙 내가 기도 많이 하고 평소에 내가 한 성화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그 참는 거 어디까지 참는가 보자.” “더는 못 참는다!” 이리 되지요. 더는 못 참는다. 이게 얼마나 아까운대 이것마저 가져가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삽니까? 무슨 낙으로? 그 사건을 3자로 ‘세월호’ 그동안 갔다 바친 돈이 얼만데? 왜 이 금덩어리 같은 내 아들을 차가운 바닷물에 집어넣었냐고. 시신도 못 찾게. 세월호 유족한테 4억으로 하자. 하면 머리 다 뜯겨집니다. 그러면 4억 줄게 니 아들 죽어봐라.
바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세월호를 미리 보게 합니다. 이것은 남이 죽인 게 아니에요. 누가 죽였느냐, 유병언이가 죽인 게 아니고 박근혜대통령이 죽인 게 아니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지가 바치게 하면서 “자, 어느 것이 믿음인가 보자.” 이리 나왔어요.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에요. 조상이 그 정도 같으면 후손도 그 정도 되어야지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그런 믿음을. 내가 다듬어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교회 가서 철야해도 그런 믿음 안 나옵니다. 그럼 믿음 없으면 안 믿으면 돼요.
주께서 아예 쳐들어 와가지고 우당탕탕 우리의 내부를 성경 속에 있는 나의 내부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다 이루었다! 하는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변모시켜버립니다. 변모시킨 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 내부도 성경 안에 있는 처음부터 그 현실이었지요. 우리는 내 현실 따로 성경 현실 따로 괜찮은 것만 골라서 QT해서 나한테 복이나 건지려고 낚시 대를 놨지, 내 시커먼 모습이 사실은 성경 안에 벌써부터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그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안 들으려고 했지요.
목사가 설교해도 애써 안 들으려고 해요. 목사님 왜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만 합니까? 애써 안 들으려고 했어요. 저는 설교해요. 애구, 가려면 가던지 어차피 가지도 않을 사람이 와서 점심만 축내지 마시고. 어차피 천국 못 갈 거 내가 붙들 이유가 없다 말이죠. 성경이 풀장이라면 풀장 바깥에서 폼만 잡지 말고 근육자랑하지 말고 풍덩 잠기자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수영장 물이 색깔이 시커매요. 시커먼스. 들어가면 완전 잉크 물 돼요. 완전히 죄인 되어버립니다. 풀장에서 나와 서면 말끔한 고상한 교양 있는 신자가 돼요. 오늘도 교회 나왔다. 오른 쪽에 성경 책 끼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러면서 그게 교양인데.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이러한 마네킹 짓은 못한다니까요.
요번 겨울수련회 교재 끝에 보면 ‘마분지 도시’ 단어가 있어요. 마분지 도시가 뭐냐 하면, 마분지가 어떻습니까? 마분지 종이가 별로 안 좋지요. 거칠고 더덕, 더덕 붙어있지요. 마분지 도시라는 말은 굉장히 살벌하고 냉혹하다 이 말입니다. 정이 없는 도시. 오늘날 현대인을 두고 저는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마분지 도시라고. 현대인의 냉혹성을.
그리고 너덜, 너덜 하잖아요. 정 둘 데가 없어요. 이 도시가. 어디가도 정이 있다 해도 자기 정을 들고 가서 사적인 정을 가져가지고 정을 풀어줘야 저쪽에서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가지고 우리 모임 괜찮지 그치? 모임이 너무 즐겁다 그치? 이리 되는 거예요. 자기 정을 도시락으로 해가지고 한껏 남을 배려해서 드러내줘야 되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정도 없어요. 따스함도 없고. 거친 도시를 마분지 도시라고 표현한 겁니다.
마분지 도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에 살아있는 생물체가 없다는 거예요. 윤곽만 틀만 보이지, 이 말은 살아있는 인간은 왜 없는가, 인간은 무슨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이거 하나 배우세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잠정적인 존재’입니다. 있다가도 없고 잠정적으로 언제까지 이 도시에 살지 않습니다. 나이 90되면 다 죽어야 돼요. 이 도시는 잠시 나타났다가 살아가는 거죠. 그것도 한 도시에 규정되어 사는 사람 없고, “어디서 살다 떠돌아다니다 여기 안양까지 기어들어왔나.” 이러지요. 안양까지 기어들어온 그 인생, 5년 있으면 또 어디로 기어갈지 몰라요. 수원으로 빠질지, 다른 데로 빠질지 몰라요. 갈 데 없어서 죽치고 있는 거지. 어디 또 신도시 생기면 아파트 분양받아 이사 갈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게 뭐냐, 잠정적 존재입니다. 잠정적 존재가 영원한 성경 말씀을 지킨다? 말이 돼요? 그게? 골라! 골라! 골라! 골라 지켜봤자 다 지킵니까? 이게? 다 안 지켰는데 천국을 넣어줘요? 성경말씀 100개 가운데 5개지키면 수고했다고 넣어줍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의 말씀을 다 지킬 수가 없어요.
아이구, 목사님 십계명 10개밖에 안되지요.” 십계명은 10개밖에 안돼요. 잠언서 한 번 보셨습니까? 잠언서 잔소리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시지요? 잠언서 폈다하면 잔소리, 잔소리, 그런 잔소리가 없어요. 어디 가거든 너무 욕심내서 많이 먹지 말라. 토할까 두려우니라. 개미를 본받아라.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신 거니까 귀히 다루어라. 동감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눈감고 잠언서 아무데나 펼치겠습니다. 잠언서16장 무릇 지혜로운 자는 입술을 스스로 보호하되, 말조심하라 이 말입니다. 말조심 안하면 지옥 가는 거죠.
잠언서 누가 줬습니까? 하늘에서 줬잖아요. 왜 줬습니까? 지키면 축복, 못 지키면 저주. 누가 지킵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잠정적 존재의 생각이에요. 자, 잠정적 존재를 했는데 이 잠정적 존재의 정반대말은 뭐냐, 3자입니다. 성육신이죠. 성육신.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23절에 나옵니다. 하늘에 기록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이 세상은 장자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장자 되려고 했는데 실패했잖아요. 장자들의 총회. 그러면 어떤 변화해야 돼요? 장자 아닌 자가 장자 되어 버린, 장자된 자의 총집합체가 그게 뭐다? 천국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한 것과 얼마나 달라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떤 장소개념인 줄 아는데, 장소개념이 아니고 인간들의 덩어리 개념. 다발개념. 더미개념. 집합개념. 이게 천국입니다.
그야말로 “아! 너도 여기 왔나?” 할 정도로 깜짝 놀라지요. “아, 왠일이고? 니가 여기 왔어. 니가 어떻게 왔는데.” “주님의 피를 믿게 되었어. 피가.” “아, 나도 그런데.” 그러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24절에 공통점이 있어요. 새 언약에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 예수님의 피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아주더라 이 말이죠. 합격! 하고 받아주더라 말이죠. 그것을 이 히브리서12장에 쓴 이유가 뭡니까? 그걸 죽어서 할 게 아니고, 죽어서 하게 되면 변화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이미 그건 탈락이에요.
히브리서12장 고백을 살아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장자들의 총회를 살아있으면서 미리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지금.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교회들이 아니고 교회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합니다.
자, 이제까지 교회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 안 드리고 결과만 했는데, 미리 말씀드리면 교회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그것을 계속 우당당탕 되풀이하면서 결과적으로 삐져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만 바깥으로 계속 고백되어지는 단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러면 그래요. “목사님, 우리 그런 교회 한 번 해봅시다.” 이러는데 그런 교회 해봅시다. 해서 생긴 교회는 없어요. 왜, 우리가 못하는 이유가 우리는 다양성인데, 해봅시다! 라고 해버리면 그런 고백을 했다고 했는데 5개월 뒤에, 1년 뒤에 “그래도 어떻게 그것 가지고 천국을 가. 착해야지.” 이리 나오거든요.
“그러면 당신이 착한 것은 당신처럼 한다는 것이 착한 겁니까?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 착한 겁니까?” 한다면 “나처럼 해야 착하지.” 이 말은 왜 하느냐 하면, 본인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해서 그래요. 당신도 나처럼 되면 우리 한 교회라고 쳐줄게. 이리 나오게 마련이거든요. 니는 왜 나처럼 못 착해. 그러니까 니는 지옥가지. 라고 판단기준을 본인이 행함 가지고, 형평가지고 판단기준을 내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왜, 구약에서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10명 모여가지고 나중에 오야봉처럼 안되면 5명 떨어지고 나중에 지만 남고. 안되지요.
그러니까 진짜 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남보고 부인하라 해요. 남보고. 자기도 부인 안하고 “니 그렇게 살면 안 돼! 니 지옥 가.” “니 걱정이나 하세요.” 지난 수요일인가 주일 오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최순실 자꾸 욕하는데 만약 여러분 이모가 최순실이고 여러분 친척이 최순실이라면 욕하겠습니까? 안하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집안 누가 욕해?” 하잖아요. “이것들이 돈이 없으니까 욕하지, 돈 있어봐 욕하겠어?” 이러면서 싸고 돌지요.
안 그래도 경제가 안 좋으니까 화딱지 나는데 어디 씹을 거 없나 싶었는데 잘됐다. 해가지고 데모하고 촛불하고. 초 공장 대목도 이럴 때 대목을 보는구나. 수십만 개 만들어냈을 거 아니에요. 평소에는 절에만 팔리다가 이제는 데모 때도 팔리니 업자는 얼마나 좋겠어요. 최 순실이건 간에 유 병언이가 어떻고 하든 간에 그거 내 사람 아니기 때문에 욕하는 거예요. 내 사람 같으면 숨겨주고 변호해주고.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지 능력이 있어봐라. 나 같아도 이대 넣겠다. 능력 없어 이대 못 들어가 고 아직은. 나 같으면 돈 있으면 넣겠다. 사립대학이 뭡니까? 기부금 있잖아요. 기부금 줘서 넣으면 되지.
그렇게 남한테 해놓고 자기는 정의 실천 구현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정의 실천 구현 못합니다. 그냥 잠정적 존재일 뿐이에요. 그냥 못 가진 시기, 질투라 생각하시고, 나도 저런 환경이라면 독일이라도 어디라도 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고 옹호하는 말이 아니고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왜? 다 같은 잠정적 존재니까.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