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0. 28) 2강
광주 강의(2016. 10. 28) 32-2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감옥에 갇혀서 세상 경쟁에 부닥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시니까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한 거예요. 이제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되셨고, 우리는 그 분의 제자들이고.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이 영광스런 자리에서 내칠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인식할 때 그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 자체가 메시아가 아닙니다. 존재에서 기능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멸시받고 죽임당하는 기능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베드로도 존재를 포기하고 기능으로 분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다.’라고 할 때는 ‘이상 자아’ 혹은 ‘자아 이상’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기능이 되면 ‘이상 자아’는 스쳐가는 하나의 풍경화 같은 거예요. 이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가면 풍경들이 지나가잖아요. 어떤 방향으로 달리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세상 풍경,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게 이끌림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이죠. 로마까지 끌려갔으니까.
예수님의 기능이 베드로에게 덮어씌워지면 복음의 전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증인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흔히 교회에서 보면 자기 존재를 들이밀면서 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예수님 알면 제 인생은 어떻게 바뀔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건 ‘이상 자아’입니다.
남들이 기대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내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이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거예요. 마가복음 9장 18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려고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못 고쳤지요. 그러니 이건 예수님의 기능과 제자들의 기능이 다른 노선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제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못 쫓아냅니다. 귀신과 한 통속이니까 나갈 리가 없지요. 귀신들도 알아요. 예수님이 자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자신들도 행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예수 믿는 것입니다. 복음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까. 운동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정치도 할 수 있는데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한 자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무능하다는 말은 복음의 기능이 나에게 도달되어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무능해야 주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복음에 대해 유능하다면 복음의 증인이 아닌 나의 증인이 됩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믿게 했습니다.” 이렇게 돼요.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병든 자를 고쳤는데 사전에 바울이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알았습니까? 상상도 못했어요. 따라서 복음의 행적에 대해서 바울은 무능한 자가 되는 거예요. 계속 무능한 자로 있어야 복음만 증거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한 자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주하게 설치면서 뭔가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존재를 기능으로 바꿉니다. 제자들에게 뽑아낼 것은 뭔가? 죄를 뽑아내요. 예수님에게서 뽑아내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 질 때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애굽 땅에 애굽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양의 죽임이 오니까 둘 사이가 나눠집니다.
지금도 세상과 성도가 갈라지는 것은 성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이 얼굴을 내밀면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나눠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말은 격리조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격리조치 당하면 친구, 친척, 가족, 이웃이 차츰 떠납니다.
떠난다는 말은 평소 그런 자들의 존재가 나의 ‘이상 자아’를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경쟁에 내몰리게 했어요. 항상 경쟁해야 하고, 그들의 요구에 도달해야 하는데 힘이 부족하니까 변명하게 되고 그런 식이 된단 말이지요.
오늘 강의 순서는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존재를 기능으로 바꾼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베드로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 여기가 좋사오니 --’ 이건 예수님의 존재만 본 거예요.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기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차 길 2개가 나란히 가다나 한 길은 광주로 가고, 한 길은 부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이 2개가 아니고 1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가려면 예수님이 마련하신 연결고리, 즉 선지자 노선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말라기에 보면 이 선지자 노선에 등장하는 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다리를 만들면 예수님의 자기 사람은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끝까지 붙들어요. 엘리야의 기능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와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이뤄지는데, 화목제물은 마지막 제사로 하나님께 바쳤던 그 제물을 하나님이 다시 백성에게 나눠줌으로 그것을 먹는 순간 하나님과 같은 양식을 먹는 것이 되어 하나님과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하나가 되는데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화목제물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화목제물의 떡을 나눠 먹음으로 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떡은 주님의 몸이고, 주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서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백성들이 먹지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선한 신, 악한 신, 즉 선악적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신은 수용하고 악한 신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약속하면서 선과 악은 하나님 아들 차원에서 해석하는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선악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악체계는 생명나무화 되게 하고 생명나무화 된 분이 오셔서 불쌍히 여김으로 영생 주는 방식을 아들이 이루시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님의 주 되게 하심이 아버지의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심어놓고 마귀로 하여금 걸려들게 만든 겁니다. 선악적 개념으로 바르게 산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해서 구원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합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이 일을 하는데 그가 누구지요?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멸시했지요.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기다렸습니까, 엘리야를 기다렸습니까? 엘리야를 기다렸지 세례 요한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 온다는 말은 없어요.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아닌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먼저 믿어야 돼요. 세례 요한의 존재가 아닌 그분의 기능을 봐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재벌이고 인물 잘 났고 이런 것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란 점에서 다 평등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는 기능이 작용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끝까지 사랑하는 기능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왔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엘리야를 임의로 대우했어요. 이 말은,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 둘로 나눠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이 두 노선으로 갈라져 있다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갈라졌습니까?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둘로 나눠지는 거예요. 복음이 전파되니까 광주 시민이 둘로 나눠지는 겁니다.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둘로 나누겠다는 거예요. 둘로 나누면 숫자가 0이 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0입니다. 세례 요한의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구원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 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주님은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낸 겁니다.
엘리야의 기능이 뭐라고 했죠?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죠. 그러면 자녀가 몇 명입니까? 없어요. 세례 요한을 배척했으니까 자녀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의 기능을 예수님이 인수 받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 세례요한’이냐, 아니면 ‘엘리야 = 예수님’이냐?
엘리야는 누구와 일치됩니까? 세례 요한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한 일까지 예수님이 다 담당하십니다. 9장 12절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반드시 말리기의 예언대로 성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지요.
구약 전체를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겁니다. 예수님이 엘리야가 되고, 메시야가 되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엘리야 안에 메시야가 내포되어 있어요. 겉은 엘리야지만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엘리야가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 800년 사람입니다. 그런데 또 엘리야가 온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봐서 옛날의 그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또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다윗이 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온 분은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후손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로 볼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봐야 합니다. 과거 다윗이 했던 기능을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한다는 것이지요. 다윗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활동하도록 설계한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기도 하고, 또 다윗의 주가 됩니다.
엘리야가 왔을 때 백성들이 거부했다. 그러면 엘리야가 와서 실패로 끝났는데, 예수님은 실패로 보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는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린다고 했으니까, 자녀 만들기를 누가 실시하는가? 예수님이 실시하십니다.
없는 자녀를 만드는 거예요. 없는데 이것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한 없음입니다.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이 땅의 천국 모습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복된 자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이 땅에 없는 것을 있음으로 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보이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을 볼 때 땅에 속한 것은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바울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존재로 만난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만났습니다. 내가 핍박한 예수를 만나면, 장차 본인이 당해야 할 심판을 앞당겨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사울은 심판 받은 자리가 됩니다. 즉 사울이 지옥의 자리가 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말이 맞아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곧 지옥이에요. 본인이 지옥으로 심판을 받았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필요한 요소가 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사울이 있는 죄의 자리가 없음으로 표현된 완성의 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니까, 즉 자기 존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국 가려고 하니까 안 됩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해서 천국이 감당 되겠습니까? 그러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천국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어떤 사람은 ‘성령 받으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도 있는데 목사님은 왜 자꾸 못 한다고 합니까?’라고 해요.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보다 더 지키기 힘든 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염려하는 것은 지옥 갈 이방인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염려하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눈만 뜨면 염려합니다. 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우리가 길들여져서 그래요. 어릴 때부터 남들이 요구하는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만 남들에게 인정받는 세상 속에서 살아왔기에 늘 새로운 명령과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이번 겨울수련회 교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물리학의 진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공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양자물리학에서는 진공 속에 무엇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힉스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왔을 때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은, 엘리야가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예수님 노선이기 때문이고, 그 외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과 다른 노선입니다. 따라서 이쪽 노선과 저쪽 노선 사이는 끊어져 있어요. 임의로 대우했기에 끊어졌어요. 그런데 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누가 하는가?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지진이 일어나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을 ‘성령의 인 치심’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했지요. 약속이 먼저 있고, 다음에 성령이 도장을 찍어요. 약속이 뭡니까? 북쪽은 이스라엘 되게 하고, 남쪽은 유다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확정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하시는 일의 재료가 될 뿐입니다.
우리를 죽이든 살리든 주님의 완성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12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능이 펼쳐집니다. 마가복음 9장 9절에 보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님의 기능은 죽었다가 살아나지요. 이 기능이 성령에 의해 반복됩니다. 우리는 그냥 늙어가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과연 죽었다가 살아났는가? 존재가 아니고 죽었다가 사는 기능을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평생을 살아요. 그럼 예수님은 왜 죽었습니까? 말씀에 입각해서 죽었지요. 즉 죄 때문에 저주 받아 죽었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저주 받아야 하는데 긍휼을 입어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우리의 남은 인생에서 반복됩니다. 그럼 우리가 할 것은 뭐냐? 내가 저주 받는 이유와 구원 받는 이유를 양쪽 다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저주 받는 이유는 뭡니까?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주 받는 것이 마땅하지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몰라야 하는데 그게 안 됩니다. 기도해놓고 응답을 생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은 응답을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대 없는 기도는 없어요. 모든 기도 속에는 기대를 품고 합니다. 기도는 기대와 같은 의미입니다.
땅의 노선에서 주님의 노선으로 갈아타려고 합니다. 언약이 요동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능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멕시코 감옥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 바깥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감옥 안의 세계가 전부입니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멕시코 감옥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감옥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의 전부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그곳에 갇혀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고 소망입니다. 아는 것이 이 세상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했는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내가 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조금 짓고 많이 짓고의 문제가 아니고 죄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이 자체가 저주고 지옥이에요. 따로 지옥에 갈 것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 죽는 그 자체가 지옥이에요.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지옥을 보는 거예요. 정치판이 전부 지옥입니다.
세례 요한이 왔다가 튕겨나갔지요. 왜 세례 요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대속의 죽음이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대속의 죽음이 없으면 하늘나라 못 갑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구원 못 받습니다. 누가 대신 죄 값을 치러야 구원 받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주었지요. 세상은 예수님 노선을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한 세례 요한을 죽였어요.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 자체가 죄에 갇혀 있고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들어오셨고, 또 탈출하셨습니다. 이런 능력이 성도에게 장착되어 성도의 기능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멕시코 감옥도 보여주고 예수님의 영광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복음의 광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괴롭게 했던 마귀가 이제 성도에게 달려들어 성도를 괴롭힙니다. 천국의 광체 앞에 이 세상은 감옥이란 사실을 폭로하고 감옥의 담을 허물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노선과 유일하게 통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죠. 복음이죠. 그래서 사단은 이 복음을 가로막습니다. 즉 ‘죄인이란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선악체계에 의해서 ‘헌금하는 것은 착하고 헌금 안 하면 나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헌금하는 것도 죄고 안 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제게 시비를 걸었어요. ‘왜 목사님 설교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십니까?’ 이 사람은 ‘자아 이상’에 빠져 있어요.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는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제 설교를 들어보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나에게 맞춰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서 제가 이해될 수 있게 설명했습니다. ‘나이 25세 때와 55세 때의 세상 보는 눈이 다릅니다. 젊은 시절에는 필요한 것만 알면 된다고 하다가 나이가 들면 세상이 이런 면도 있구나를 아는 것처럼 설교도 처음부터 다 이해할 수는 없고 자꾸 듣다보면 점점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젊은 시절 이해하는 복음과 나이 들어 이해하는 복음이 달라요.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것이 다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 아무 필요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주께서 매일 살려 주시는데 내 노력이 주님의 공로를 가린다는 점에서는 젊으나 늙으나 똑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희망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어떤 희망을 갖습니까? ‘저 녀석들이 성공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저주 받아야 하는데 매일 용서 받음으로 내 안에서 예수님의 기능이 발휘되어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먼저 보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엘리야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모든 기능을 예수님이 하심으로 자녀가 생깁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없던 자녀가 발생되는데, 이 자녀의 특징은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임을 고백하고, 본인이 그 증거물인 것을 알지요. 이 사람은 천국 가기 전에 이미 천국에 입성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이기에 복음만 전하면 멸시당하고 미움 받는 기이한 현상을 당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11. 23. 08:12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