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29절(들림)161115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2장29절(들림)161115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의 끝에 제가 던진 질문이 뭐냐 하면, 어떻게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거죠. 죽음이. 근데 죽음이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광이 되는 죽음이 있고 영광이 안 되는 죽음이 있어요. 우리 인간이 죽는 것은 영광이 안 됩니다.이유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우리는 죽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놈 또 죽여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자에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으면 죽음이에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이 말은 어차피 900년 살아 봐야 창세기 5장에서 보여주듯이, 아담이 뭐 구백 몇 살 살아봐야 결국 끝은 뭐였습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끝에 나온다는 말은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위하여 질주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도 죽음의 힘은 못 이기더라. 이 이야기가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아담이 죄 지었음에 죄가 그야말로 죽음이 왕 노릇하여서, 왕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누구도 그 통치를 이겨낼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 안에 포로 잡혀있다는 뜻이에요. 왕이라는 개념이. 통치에 누수가 없는 것. 완벽하게 차있는 것. 근데 밖에 내놓으면 왕이 아니에요. 데모하고 이게 뭡니까? 데모하는 백 만 명 다 죽여 버리는데 이게 왕 시대가 아니라 그렇게 못하잖아요. 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그 권세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못 빠져나오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지금 못 빠져나오는 것이 걱정이 아니고 좋아서 난리라. 좋아서. 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어릴 때부터 우리의 주체의 내용이 되어 있어요. 사는 목적이 뭡니까? 출세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그걸로 인하여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내 손아귀에, 내 소유가 될 때까지 나는 달려가리라.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는 목표가 있는데 왜 이 세상을 떠나요? 왜 이 세상을 부정해? 긍정으로 바라봐야지. 이미 우리는 마귀가 심어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여기에 우리는 완전히 매료되어 있어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참, 힘이 없어서 못 얻지, 능력이 없어서 돈을 못 벌지, 돈 버는 것이 왜 그게 기분 나쁜 일이고, 돈 버는 게 왜 그렇게 울어야 될 일입니까? 히히 좋아서 어쩔 줄 모르죠. 비룡그룹 회장이 한 1억씩 던져 줘 보세요. 보너스 줘 보세요. 오늘도 저주받았다고 이렇게 할 사람 없습니다. 오늘도 복 받았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이미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어요. 잠재되어 있다는 말은 그걸 우리가 아무리 숨기고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본심이 되어 있어요. 그 본심을 들어주는 신이면 그게 예수가 됐든, 부처가 됐든, 알라가 됐든 상관없어요. 내 소원만 이루어준다면 아낌없이 순종하고 헌신할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나한테 이득이 되는 조건하에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손해나겠지만 하여튼 나한테 손해날 짓은 안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바로 죽음에 갇혀있다.”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이게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이유는 인간 세계를 목숨 붙은 사람과 일찍이 목숨 끊어진 사람과 둘로 이걸 구분하다보니까, 이쪽을 생존자, 생존자의 집합이고, 이쪽을 사자死者, 죽은 자의 집합이라고 우리는 늘 둘로 나누고 있는 거예요. 나누고 있으면서 이쪽 공동묘지는 저 멀리 두고,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으쌰으쌰 해보겠다는 이러한 두 개의 나누어진 의식가지고, 될 수 있는 대로 재수 없는 죽은 자의 집합, 공동묘지는 멀리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꿈에 죽은 귀신 보면 어디 기분이 상쾌합니까? 어디 기분이 좋아요? 귀신 보면? 기분 더럽죠. 왜 더러우냐 하면 끼어들지 않아야 될 장소에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죠. 찾아오지 않아 될 장소에. 갔으면 가는 거지, 왜 여기에 끼어드느냐 이 말이죠. 그러나 성경 시편에 보세요. 절대로 그런 구분은 잘못이에요. 모든 사람이 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라서 의미가 없어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살아도 살아나고 죽어도 살아나죠. 산자나 죽은 자나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내가 죽었다 살았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은 죽어도 살아있다는 사실. 죽은 자는 돌아오리라.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돌아온다는 겁니다. 죽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어설픈 인간이 죽었다고 단정을 내리는 그 판단이 잘못된 판단이기 때문에. 그 잘못된 판단을 잘못된 판단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실수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에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이야기에요. 심판을 초래한다. 심판을 초래할 때,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죠. 그 심판은 개인 심판이 아니고, 너는 소속이 어디냐를 묻는 겁니다. 개인에게 “똑바로 해라! 똑바로!” 이게 아니고, “소속이 어디지? 니가 어린양의 소속이냐?” 그럼 무조건 천국이에요. 니가 어린양의 소속이 안 되어 있으면 이거는 행함 책 속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지옥 갑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조건하에 선하면 천국 보내고 악하면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고, 선악을 안다는 그것 자체가 곧 너는 저주받을 자가 된다고 창세기 3장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그 따먹은 것 때문에, 그걸 근거로 해서 뭘 못 따먹어요? 생명나무 못 따먹으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은 입장에서는 착해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착하나, 안 착하나, 교도소 왔다 갔다 한 것이나, 교도소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테레사 수녀같이 사나, 어차피 생명나무 못 따먹는 것은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 따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안 된다는 데 뭐. 선악과를 안 이상은 생명나무는 못 따먹도록 이렇게 치워놨어요. 금고에 넣어놓은 것하고 똑같아요. 아무리해도 도저히 비밀번호가 열리지 않는, 절대 손 못 타는 곳에 넣어놨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지? 안 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지를 않아요. 왜? 우리가 받을 사람들이 못 되기 때문에. 그럼 천국 간 사람들은 어떻게 갔느냐? 받을 사람을 새로 만들어요. 주님이 영생을 감당 할 사람을 새로 만들어요. 새로 만든 사람은,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없고, 주께서 십자가에 죽여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만들어버려요. 없애버리고 십자가에서 새로 만든 사람이 생명나무를 새롭게 받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복을 입은 자라고해요. 예복을 입은 자. 아무나 데려와도 되는데, 아무나 데려온다고 해서 잔치에 참석 못해요. 아무나 데려오되, 아무나 데려오면서 뭘 하느냐하면 유니폼을 입어야 해요. 주최 측에서 마련한 예복을 입은 자가 아니면 그들은 임금에 의해서 아주 혼이 나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 보게 되면. 그러니까 온 사람들은, 예복을 못 입어서 쫓겨난 사람들은, 그냥 길거리에서 놀던 때가 좋았어요. 괜히 와가지고 나중에 혼쭐이 나니까. 누가 오려고 했나? 본인이 강제로 끌어당겨놓고 나중에 예복이 없다고 하니까, 결국은 끌려가는 것도 수동적이고 쫓겨난 것도 수동적이고. 근데 그러한 인간들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뭔가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사실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준비한, 주최 측에서 준비한 예복 없이는 누구도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그 낯선, 새로운 정보가 갔다가 나오면서 새롭게 발견됩니다. 그 새 예복이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의미하죠. 성령세례. 요한복음의 성령세례는 뒤에 나오니까, 계속 진행하면 그때 나올 거고. 여기서 먼저 하겠습니다. 30절,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절,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했는데요, 여기서 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임금이 쫓겨나면, 그러면 임금에 속한 백성들은 괜찮네. 왜? 임금만 쫓겨나면 되니까. 대통령만 쫓겨나면 되니까 우리는 관계없네. 이럴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자꾸 본인들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에 보면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바다에서 온 짐승의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 땅의 짐승의 혼합물입니다. 바다에서 온 짐승이. 제가 어떤 강의에서 했잖아요. 키메라. 키메라가 머리는 사자고, 몸통은 양이고, 꼬리는 뱀이고. 여러분 키메라 아십니까? 조수미 나오기 전에 우리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소프라노라고 해서 랄랄랄라~♬ 그 노래 부른 사람이 있어요. 눈매를 고양이처럼 그려가지고. 유명한 억만장자 레바논사람 나카시안하고 결혼해서 결혼 잘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키메라인데, 한국 최초의 팝페라 가수에요. 그 가수 키메라가 기억이 나요. 키메라가 이게 혼합체입니다. 짐승이에요. 근데 그 짐승이 혼합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개개인의 의미나 가치를 하나님이 따로 두지 아니하고 전부 다 통합해서 이야기한다는 것. 통합해서. 너 잘났다. 너 못났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는, 인자 빼놓고는 똑같아. 짐승한테 굴복당하기는 똑같아. 혹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이냐, 이렇게 보면 돼요. 여기(위)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여기(아래)에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슨 층이 있느냐 하면 심판 층이죠. 오늘 제목을 심판 층이라고 적어놔야지. 심판 층을 대동해서 심판 층을 미리 깔아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심판 층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심판이 일어나죠. 아까 심판을 누구하고 상대한다고 했습니까? 여자의 후손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이 반드시 뭘 해야 해요? 선제공격을 해야 해요. 뱀의 후손이 반드시 여자의 후손의 뭘 물어야 한다? 발꿈치를 물어야 해요. 발꿈치를 물어야 한다는 말은 분명히 상처는 줬는데, 치명적인 상처는 아닌 것. 다만 뭐만 보여준다? 땅의 속성을 대변해서 보여줄 어떤 상처. 그러니까 십자가에 있는 상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입으신 그 상처나 그 죽음 자체는 단순히 유대인에게 맞았다 이게 아니라, 땅에 모든 편재하고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힘의 실체를 대변해서 보여주는 그 상처를 가지고 주께서는 그대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도마에게 나타나죠. “나는 안 보이는 것은 안 믿는다. 나는 보고 믿는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 봐라!” 근데 여기서 이게 어려워요. 우리 같으면 주님이 “봐라!” 이렇게 하면 “어? 창 자국이네? 못 자국이네? 그래서 뭐? 주님 뭐 어쨌단 말입니까?” 이렇게 할 건데. 도마가 하는 말이, 그냥 육체적인 어떤 상처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마가 하는 말이 주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자,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과 관련시켜야 해요? 예수님의 것을 하나님으로 하되, 아니 그것도 안 돼요. 그것도 하나님 존재를 믿어버리는 것이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 믿는다고 다 그렇게 해요. 조물주를 믿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실제로 성취되고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속한 이 세상의 그 어두운 면이 발각당하는 계기로써 그 접합되는 증거물을 갖고 있어야 돼요. 문장이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앞에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그 앞에서 자기가 뭘 해도 소용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당할 때, 그게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 거예요. 근데 그 발각당할 때 마음이 어떠냐 하면 내 딴에는 지혜롭고, 내 딴에는 똑똑하고, 내 딴에는 나한테 유용하고 쓸데 있는 종교적인 행위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하는, 그냥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하는 그 모든 것을 어리석고, 지혜 없는 것처럼, 바보짓 한 것처럼, 몰아세운 결과를 낳게 한 셈이 됐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십자가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죠. 그게 이사야 53장인데, 후딱 누가 한 번 찾아보세요. 이사야 53장을 번역한 것을 하나 올린 건데요. 먼저 찾아보신 분이 중간쯤을 한 번 읽어보세요. 뭐라고 되어있는지. 물론 성경에서 이사야 53장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번역이 여러분에게 좀 새로울 거예요. 이사야 53장 3절부터.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짜를 받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긴 거예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천벌을 받은 줄로 알았죠. 이미 우리 안에 뭐가 심겨져 있다? 내가 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이미 선점되어 있는, 이미 우리는 갖고 있죠. 이런 게 아니면 믿음이 아니고, 이런 게 아니면 소망이 아니고, 이런 게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미 딱 내놓은 것이 있죠. 이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퇴짜를 받은 거예요. 퇴짜를. 나는 내가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양심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총동원해서 기어이 나를 구원시키겠다는 것이, 우리한테 이미 선점되어 있는 믿음으로 있는 거예요. 성경이 시키는 대로 하고 다 지켜서, 거룩하게 되어서, 주의 형상을 본받겠다는 선점한 그게 있단 말이죠. 근데 그걸로 인하여 누가 퇴짜 맞았어요? 예수님이 퇴짜 맞았어요. 이게 과거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그게 아까 도마이야기하고 마찬가지에요. 예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에요. 도마가 뭘 봤습니까? 창 자국 보고 못 자국 봤죠. 그래놓고 “아, 예수님이네.” 하지 않았어요. 누구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니까요.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있던, 창세기부터 있던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 포위 안에 있다? 악마한테 휩싸여서, 악마의 대리인으로서, 악마의 분신으로서, 계속해서 악마적인 발상으로 구원을 해대겠다고 시도하고 또 시도했던 거기에 우리가 갇혀있었던 거예요. 그 종교라는 것에. 그 기독교라는 것에. 그 교회라는 것에. 우리가 스스로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걸. 납득이 되니까. 그게 납득이 되거든요. 그 성당에. 그 교회에. 그 파이프오르간에. 그게 우리에게 납득이 된다니까요. 그 찬송가에. 유행가 아니고 찬송가에. 우리는 선악과 중심이이서 뭐가 거룩한 것인지, 뭐가 비 거룩한 것인지, 그런 것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고 본 겁니다. 왜? 우리는 교양이 있으니까. 우리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니까. 그러나 바로 배웠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자꾸만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얼마나 미련한지. 잘나가는 우리하고 왜 거래를 안 하십니까? 우리한테 조금만 이렇게 착하다고 격려해주면 우리가 얼마나 나대가지고 파키스탄 선교하고, 나이지리아 선교가고, 선교비 내놓을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고, 그만큼 마음을 낮춘 사람인데. 괜찮은 우리하고 거래를 왜 안 해요? 그런 거래는 저 복음학교에서 많이 해요. 김용의 선교사, 그쪽이 전공이에요. 마음 낮춰서 주께 거래하라고. 주께서 쓰신다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사단의 농단이라는 글을 올렸잖아요. 농간이 아니라 농단. 국정농단이 아니라 사단의 농단이라. 거기에 보면 남을 씹을 줄 알면서 지는 왜 안 씹느냐 말이죠. 패자인척 하면서 승자로, 강자로 군림하고. 피해자인척 하면서 가해자 노릇을 하는 이 멋진 게임을 언제까지 미친 자들이 하겠느냐 말이죠. 계속해서 가상의 적을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씹는 재미가 최고의 재미거든요. 못된 마귀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씹는 거예요. 장희빈이가 살을 누구한테 쏘았습니까? 장희빈이 짚으로 인현왕후 만들었죠. 화살을 탁 쏘죠. 옥중화에 나오는 윤형원의 첩 종금이가 정난정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로 쑤시는 대목이 나오죠. 그걸 흑마술이라고 해요. 흑마술. 저주를 퍼부으면 그렇게 아프다는 거예요. 그 저주를 퍼부어서 아픈 사람이 누군 줄 알아요? 그게 바로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필요 없어! 저리가! 필요 없어! 그 당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는 말이 이건 악마의 대장이라고 했어요.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보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 율법의 해석을 잘못하는 자라고 했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악체제를 안고 있는 자체가 악마가 사주한 거예요. 악마의 마음 외에는, 악마의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 죄는 간음죄나 살인죄가 아니고, 딴 것이 죄가 아니고, 뭐냐 하면 뭔가 목적을 갖는, 뭔가 기대하는 것, 목적 갖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뭔가 기대를 한다는 것. 우리 애는 나중에 군에 갔다 오면 잘 될 거라는 기대. 생선가스 개발해서 현대에 납품할 거라는 기대. 그게 바로 죄에요. 딴 게 죄가 아니고. 간음죄, 살인죄가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거 하기 위해서 간음죄도 안 저지르고, 남한테 욕도 안 해요. 왜? 뭘 얻기 위해서? 기대한 이 성과를 빨리 이루기 위해서. 그래가지고 우리는 주님하고 거래하고 있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복 주실 거죠?” 이러고 있다고요. 신명기에 나오잖아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거 괜히 있는 것이 아니죠. 대심방할 때, 이 구절보고 괜히 은혜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에게 제가 물어요. 복음을 아십니까? 하면 뭐, 십자가부터 해가지고 언약이 어떻고, 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하면서 힘을 주는데, 복음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해야 돼요. 이런 게 이단이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이런 게 이단이라고. 그게 바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면 복음을 아십니까? 하면 이게 바로 다른 예수고, 이게 바로 다른 복음이고, 이게 바로 다른 성령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쳐내는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 기준을 사람들은 말을 안 해요. 왜 말을 하지 않느냐 하면, 쳐내는 기준에 본인도 거기에 걸려들까 싶어서. 만약에, “성경을 안 지키는 것이 이단입니다.” 라고 자기가 생각지도 안했는데 무심코 툭 나왔다면 그 다음 나온 말은 빤하죠. “그럼 당신은 성경 지켰습니까?” 그럼 이게 큰일 나는 거예요. 큰일 나는 거죠. 그래서 조용히 이단에 대해서 말을 안 해요. “나는 십자가도 알고 언약도 압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지가 괜찮아 보이는 것을, 그렇게 비난 안 받는 것을 자꾸 내세우는데, 이거 끌어 모으는데, 정보를 바구니에 담듯이 담는데, 그걸 끌어 모으면, 그걸 끌어 모으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본인이죠. 그런 정보를 왜 끌어 모읍니까? 누구 좋으라고? 그거 끌어 모아서 자기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무슨 구원? 개인구원. 도를 아십니까? 하고 똑같은 거예요. 뭐를 안 챙기면 구원받습니까? 그걸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얼마나 이단적입니까? 이미 주님께서는, 인간에게는 구원이 있다? 없다? 이미 구원이 없는 거예요. 아니, 목사님 어느 구절에 나옵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12장 40절에 나오잖아요.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주의 뜻이라니까요. 그럼 내가 구원 못 받으면 나는 지옥 가잖아요? 또 이렇게 나온다고요. 근데 당신은 죽어야 되고, 당신 말고 새롭게 당신을 만들어내는 그것이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게 바꿔치기 해야 돼요. 흙에 속한 자하고 하늘에 속한 자하고 이게 교체가 돼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교체되면 되느냐, 그 교체되는 방법을 시범하신 분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시범 자에요. 예수님 본인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했습니까? 누구처럼 넥타이로 목매어가지고 자살했어요? 뭐, 글씨 하나 써놓고, 뭐, 그렇게? 주님 자살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주님 가신 코스가 우리의 구원의 코스에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누굴 따라 오너라?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이 말은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서 가니까 너는 그걸 따라오너라. 이 말이잖아요. 따라오라고 한다고 해서 따라갈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근데 우리의 십자가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누가 대신 시범조가 돼줬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누가 옆에 있었느냐 하면 강도가 있었어요. 강도 하나는 십자가에 달렸을 때, 강도가 싫어! 싫어! 하고 이렇게 버틴 강도가 있었죠. 그런데 곱게 십자가에 죽은 강도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아니면 오늘 밤에 주와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까? 뭡니까? 함께 있기를 원했죠. 주님, 저를 생각해달라고 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니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천국에 있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 십자가는 누구 십자가에요? 바로 그 십자가는 강도의 십자가인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죽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에 그 강도가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누가 산다고 했어요?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좀 물어보면 대답을 하세요. 틀릴까 싶어서 겁을 내고 대답을 안 해요. 내 안에 누가 산다고 했어요?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죠. 이 그리스도가 우리가 통용하는, 통용된 그리스도입니까? 저는 거부합니다. 누가 사느냐 하면 타인이 살아요. 우리의 타인. 남이 살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에 들어가야 우리가 삽니다. 그걸 가지고 대리죽음이라고 하고, 그걸 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값을 치렀다고 이야기합니다. 니가 스스로 치르지 못한 값을 내가 치르는데, 다만 조건이 뭐냐 하면 값을 치를 때 너는 눈만 깜빡깜빡 거리며 멀쩡히 서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값을 치르고 난 뒤에 능력이 우리한테 도달해요. 도달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육신까지 납치를 해가지고 주님께서 자기 죽음에다 그걸 집어넣어서 그걸 없애버립니다. 언제 없앴는데? 죽어가면서 없앱니다. 그러면 우리의 남은 인생은 영생 얻는 길이에요. 동시에 주께서 잡아 제치는 길이고. 치매 걸려도 괜찮아요. 정신이상해도 괜찮아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서, 내가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희미한 정신이라도 관계없이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는 이 행운을, 이 컨베이어시스템 자체가, 천국 가는 시스템에 우리는 지금 실려서 기쁘게 지금 쉬러 갑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얼마나 기쁜지! 사도바울의 소원은 뭐냐, 하늘나라 확장도 아니었고 교회 부흥도 아니었어요. 자기의 소원은 죽여주옵소서가 소원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은 다 너희들이 못나서 그렇다는 겁니다. 너희들에게 봉사하라고 주께서 아직 안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봉사하라고. 이 더러운 세상에서 뭘 보려고 삽니까? 촛불집회 보려고 삽니까? 뭐 볼라고? 뭐 보고 살아요? 살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별 볼 일 없습니다. 볼 일 끝났어요. 이제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죽으면 돼요. 근데 자살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도 죽어요. 가만히 있어도 죽는데 왜 자살해요? 그것도 지 자존심인가? 그럴 필요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처참하게 죽여주십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하게 죽여주십니다. 왜? 우리의 자존심과 우리의 위신과 우리의 명예는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일말이라도 남아있는 그 체면마저 주께서 아주 자근자근 밟아주시는 이 축복. 심방 가서 이런 축복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자, 아까 한 이야기입니다.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합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으로 보였다고 했죠. 그 시범을 보이는 것을 오늘 본문에 보면 들린다는 이야기가 32절에 나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땅에서 들리면” 이라는 말은 마치 안 죽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말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 나와요. 3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들린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여기 오래 안 있을래.” 그런 뜻이잖아요. “나 원래 있던 곳으로 갈래.” 그런 뜻이란 말이죠. 지금 이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께 속한 자녀도, 빛에 속한 자녀도 같은 코스로 해서 들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 들린다는 말은 마술사가 마술하듯이, 아무것도 없죠? 해놓고 사람들에게 하는 그런 들림이 아니고, 이 들린다는 것은 앞서 있던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어떤 사건의 완성태로서 들린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이래 되어 있거든요. 모세가 뱀을 든 게 아니에요. 모세가 든 것은 놋으로 만든 놋뱀이죠. 놋뱀을 들었잖아요. 자, 여기서 뱀을 들었다고 하면서 놋뱀의 의미가 밝혀지는 겁니다. 심판에 대한 취소가 아니고, 심판의 주체자를 높이 들어버린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뱀에 물려도 싸다. 그리고 뱀은 누가 보냈다? 뱀이 알아서 기어온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뱀을 보내서 물리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뱀에게 물려도 마땅하다는 사람은 뭐겠어요? 놋뱀을 보면서 자기와 일치시켰겠죠. 그런데 이거는 하나님의 잘못된 처사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을 본인이 안 저지르고 저쪽에서 잘못했다고 한다면, 내가 잘못했다고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죠.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해봅시다. 이거는 중요한 대목이니까. 엘리사가 마지막에 죽을 때는, 엘리야가 죽을 때는 그냥 불 수레 타고 올라갔다고 했죠. 그런데 엘리사가 죽을 때는 그냥 죽었죠. 그냥 죽어서 게임 끝났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죽듯이 그냥 죽었어요. 그래서 뭐 능력은 행하더니만 죽는 것은 우리하고 똑같네. 이렇게 했는데, 엘리사가 죽고 난 뒤에 어떤 사람의 시체를 같이 묻었는데, 그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산 사람이 살려 준 게 아니고, 죽은 엘리사 시체가 죽은 사람을 살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살아있는 예수가 우리를 살리는 겁니까? 죽은 예수가 살리는 겁니까? 죽은 예수가 살리죠. 그러면 죽은 예수가 우리를 살린다는 말을 우리가 믿으려면,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내가 장착해야 돼요. 내가 탑재해야 돼요. 매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됩니까? 이 잘난 나를 위해서 왜 죽어야 돼요? 뭐, 성경한다고 돌아다니고 하는 내가 왜 죽어야 해요? 뭐가 잘못인데? 그다지 뭐 내가 절에 간다고 하는 그런 소리 안 했는데, 부처 믿는다고 안 했는데, 왜 죽어야 되죠?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여러분 자신이 왜 죽어야 되죠? 자꾸 잘못을 찾아내지 마세요. 우리가 잘못해서 뱀의 자손이 된 것이 아니거든요. 자꾸 버릇이 선악과 버릇이 되어가지고, 우리가 이런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영원한 저주와 공포심과 두려움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아요. 여러분이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거예요. 왜 죽어야 하는가? 죽으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죽으라고 했기 때문에 태어났는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되는 거예요. 구원은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한테 필요한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필요해서 자기 구원을 우리한테 심어준 겁니다. 어떤 역할을 하라고. 어떤 기능을 하라고. 무슨 기능? 죄인 기능하라고.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뱀이 와서 물고, 악마가 와서 우리를 종으로 삼아도 그거는 합당한 조치인 것을. 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마저도 황송하다는 그런 고백을, 그런 마음으로 놋뱀을 쳐다보는 것과 십자가를 보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민수기에 내렸던 그겁니다. 들려야 한다는 뜻은 바로 층을 두 개로 나누어야 해요. 들린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이곳에서 빠져나온다. 그것도 홀로. 홀로 빠져나오는 거예요. 심판이 왔는데 들렸다는 말은 심판 받는 중에서 유일하게 심판을 이겨내시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래 있던 장소가 심판이 감행되는 그 장소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고가는 그 경과 속에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예상 밖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심판이라는 것을 새롭게 부각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겁니다. 바로 내가 이단이라는 사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단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주는 거예요. 그러한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잘 나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을 비교하죠.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던데, 어떤 분이 어떤 분한테 우리교회에 오라고 소개를 했나 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못 오겠다고 하는 분의 이유가 뭐냐 하면 그렇게 우리교회에 복음이 있고 진리가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수 천 명이 모이도록 커지게 해서, ‘아, 역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니까 교회가 커졌구나.’ 이렇게 만들지 않고, 교인 그거 몇 명 되지도 않게 만들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작기 때문에, 분명히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작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는 들어 볼 것도 없이 무조건 그거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니까, 나는 그냥 대다수가 찾는 큰 교회에 가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뭐 설득력이 있습니까? 지금 그렇게 이야기한 그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그렇습니다. 구원받으라고 우리교회에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당신 교회에서 받고, 근데 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왜 지옥 가는 일인지를 우리교회에서 들으라는 그 이야기라니까요. 구원받으라고 오라고 한 게 아니고, 그 구원받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한 번 들어보라 이 말이죠. 그리고 내가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뭐, 착각들을 하고 계시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마리의 돌아온 양이 있잖아요. 그 양이 오면서 자랑질 했습니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향해서? 그 양이 어떤 양이에요? 똑똑한 양이고, 아이큐 150이 되고, 멘사 협회 회원이고, 뭐 그런 거예요? 착한 일 많이 한 거예요? 말도 지독하게도 안 듣는, 그 뒤에 나오는 대목이 탕자 나오잖아요. 탕자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돌아온 한 마리의 양은 그냥 얼굴도 못 들고, 참 우사스러워서, 부끄러워서 오는데, 근데 목자의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가마타고 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주께서는 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한 마리의 양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잔치가 일어나는데, 아흔 아홉 마리의 양한테는 하늘에서 잔치가 일어날 이유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주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그 대상에서 이미 제외된 거예요. 잘난 너희끼리 잘 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찾아가지 아니하면 도저히 천국 못 간다는 그런 요소가 없는 동네는 지옥입니다. 대한예수교 지옥교회에요. 그 큰 교회들. 뭔가 땡기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 큰 교회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은 뭔가 사람들을 유인하고 매료시키는 뭔가의 요소가 있어요. 설교를 잘한다든지, 시설이 잘되어있다든지, 노인네들이 편하다든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앞자리의 장립집사, 장로들이 돈을 많이 내도, 뒷자리의 청년들은 돈 천원만 내도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뭐 그런 것이 있어요. 그냥 슬쩍 갔다 슬쩍 빠져나와도 눈치 채지 않는, 그런 게 뭐 있을 거예요. 또 청년회 모인다고 하면 얼른 가서 공짜로 필리핀에 놀러가고, 뭐 그런 요소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많이들 해보셨죠? 나한테 이익이 되고 내 구미에 맞는 요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회개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날마다 회개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건 주께서 버린 자식이든지, 아마 그럴 걸요. 그럼 뭘 가지고 회개해야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뭐 간음했다, 살인했다, 간통했다, 남을 욕했다, 과속했다, 뭐 그런 것 하지 마시고. “주여! 오늘도 제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삽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이런 것. 목적이 이끄는 삶, 인간치고 이런 것 없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누구나 눈만 뜨면,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에 눈만 뜨면 생기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뭔가 조신하면서, 행동을 가다듬으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 좀 해야죠? 아침인데. 성경 좀 봐야죠? 혹시 압니까? 과속했는데 걸려도 좀 봐줄지. 오늘도 하루의 행운을 위해서, 오늘도 뭔가 책략을 먼저 시작해야죠. 아부를 좀 해놔야 해요. 약발을 좀 먹여야 해요. 그거 왜 그렇습니까? 노리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목적은 아무리 없애고 없애도 안 돼요. 계속해서 있습니다. 그 목적에서 높여주는 것은 뭐냐, 놋뱀이 아니고, 바로 뱀하고 관계없는, 나의 잘난 내 모습이 작대기에 달려가지고 높이 쳐들리는 것을 미리 땡겨서 상상하죠. 우리 애가 군에서 제대해가지고, “엄마! 나 취직했어.” 라고 하는 그 모습을 작대기에 미리 달아놓는, 그것만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흐뭇한지. 또 총각 같으면 이쁜 아가씨가 와서, “나랑 결혼해주세요. 나는 교사인데 집에서 살림만 하시고 나는 돈 벌게요.” 이런 것을 생각만 해도 얼마나 흐뭇한지. 복음 안다고 돈 좀 쓰라고 해서 한 이천 억 정도 주고, 빌딩 주고, 사무실 주고, 이러면 가락강의 여기서 안 해도 돼요. 십자가마을 회관지어가지고.....,생각만 해도 뿌듯하죠. 그거는 숨길 수 없어요. 왜? 우리가 망가질 몸이니까. 마음껏 망가지게 하세요. 오늘 핵심인데, 마귀가 우리한테 꿈과 비전과 희망을 마음껏 들추어내도록 우리는 마음껏 허락합시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마음껏 허락하세요. 박수쳐야 돼요. 남들이 나의 신앙을 알아주고, 내가 이만큼 주의 종인 것을 마음껏 알아주고,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고, 내가 가면 마치 모세 기적처럼 쫙 비키고, 여기 완전히 비룡그룹이잖아요. 이 꿈은 말려도, 말려도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도 벌써 잊어버리고. 아침 열시 반만 되면 다 잊어버렸어요. 회개하는 것은 열한시 이십분만 되도 다 잊어버리고 없어요. 오늘도 착하게 살았으니까 뭔가 내 꿈은 이루어질 거야. 뭐 이런 것. 꿈은★이루어진다.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 이런 것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냥 사는 겁니다.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놋뱀은 평생 우리를 지켜줄 테니까. 그 놋뱀이. 놋뱀의 긴 그림자로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먼저 놋뱀처럼 들렸던 그 예수님. 근데 예수님이 들렸다 하지만 사실은 지상에 늘어트린 긴 그림자는 우리를 심판하는 긴 놋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우리를 무는 뱀 같은 역할로 우리를 찾아온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니까 그걸 읽고 마치겠습니다. 34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게 바로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권면을 가지고, 우리를 칼로 찌릅니다. 그게 우리가 당하는 십자가입니다. 살인, 간음, 뭐 이런 게 죄가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쇼부를 걸고, 이 세상에서 위대한 영웅이 되고, 그 목적은 한시도 우리 뇌리에서 떠나가 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본은 뭐냐, “날 건드리지 마라! 나는 너에게 무시당할 존재가 아니다.” 근데 그것을 건드리는 그 타자, 그 타인, 오늘도 우리를 건드리실 그 타인이, 손에 못 자국과 배에 창 자국을 가지고 오시는 그 타인이 구세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들리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아 들렸다는 것은 주께서 평소에 우리를 얼마나 찔러댔는지를 저희들이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두고 가야 될 이 몸에 애착을 느끼고, 이것을 붙잡으려고, 이게 내 소유다 하면서 그저 쥐려고 하는 우리의 부질없는 헛된 야심을 매일같이 주께서 찔러주시고, 그것 없이 주의 몸으로 구원받음을 저희들이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