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7-들뢰즈
201611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7-들뢰즈
(강의:이근호 목사)
들뢰즈에 있어서 기존에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내 것, 네 것을 해체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인간을 인간으로 보면 자기 뜻의 설명이 곤란하니까 인간이란 것을 아예 없애버려요. 인간을 기계라고. 기계로 보면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스럽지요. 인간이 기계다? 인간이 어떻게 기계지? 인간을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로 봐요. 들뢰즈가 이런 단어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기존에 네 것, 내 것이란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체하는 방법에 있어서 기존의 개념으론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간 자체를 욕망의 기계로 만들면 힘들의 반복적인 차이라 했잖아요. 그렇다면 욕망의 기계가 어떻게 현재 보고 있는 인간으로 될 수 있느냐?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반복해보면, 우연에 의해서 힘들이 연결되겠지요. 연결되다가 그게 계열이 되고, 이쪽 계열과 다른 계열이 되는 것을 연접이라 하고, 엉뚱한 것이 치고 들어와서 연결되는 것을 이접이라 해요. 인간이란 해체해보면 이질적인 계열이 보여주는 공명현상이라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만나서 공명현상을 보여주다가 그것이 어제라면, 또 오늘 되면 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서 새로운 공명현상을 나타내면 오늘의 인간이고 또 내일 되면 도 이질적인 계열이 모여서 공명현상을 보이게 되면 내일의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 현재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항상 현재로 왔다하면 다시 과거로 가버리고 미래를 예상하게 되고 또 내일 되면 현재를 미끄러지고 과거, 미래로 갈라지는 현재 자체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그러한 시간관을 갖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있고 난 뒤에 인간이 목적을 추구하니까 여기에 시간적인 간격을 생각하겠지요. 그 간격은 우리에게 결핍을 낳고 결핍은 우리에게 초조와 불안을 유발하고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로 연결되는 거예요.
내 님은 누굴까? 초조하게 기다리면 계속 내가 힘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진짜 내 님을 만났다. 그러면 기쁘지요. 기쁘면서도 아까 그걸 대입해보면, 기쁨은 현재잖아요.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나눠진다 했지요. 내가 이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게 다야? 이 여자와 평생을 살아야 돼? 이보다 분명히 더 예쁜 여자가 있을 텐데 그 여자를 내가 정녕 포기해야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또 드는 거예요. 이러면 비윤리적이야.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해. 이러면 안 돼, 라고 하면 아버지의 이름의 윤리도덕이 또 작동하게 돼요. 너는 절대로 그런 인간되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짐승이야, 라는 어릴 때부터 날아온 윤리도덕이 또 나를 힘들게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것도 미래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자는 거예요. 그걸 아이온이라 하는데 시작과 끝을 임의로 내가 정하면 여기서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 의미는 내가 의미를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내 밑을 받치고 있는 차이의 힘들에 의해서 나오는 의미기 때문에 의미의 효과, 또는 효과로서의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의미는 그때그때마다 내가 여기에 처해 있는 힘들의 마주침에 의해서 내가 저항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의미를 내가 잠시 누리고 있을 뿐이다. 내일 되면 그 의미는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의미에 대해서 이걸 표현 층이라 해요. 표현 층에서 의미가 나오는데 의미가 기호의 세계에요. 기호, 단어, 말, 문장에 의해서 계속 표현되는 층이 따로 있어요. 그 밑에 이걸 유지하는 물질적인 내용 층이 따로 있어요. 물질적인 내용 층은 의미를 보여주기 전에 기반이 되는 기초가 되는 근원이 되는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서 머리와 얼굴의 차이점이 뭘까요? 머리는 몸통에서 솟구쳐 나오는 이 부분이죠. 머리는 내용 층에서 머리지만 표현 층에선 머리라 하지 않습니다. 사진 찍을 때 머리 찍을 때 머리 찍습니까, 얼굴 찍습니까? 머리를 찍는 것은 개, 돼지한테나 하는 소리죠. 사람한테는 머리를 찍는 게 아니고 얼굴을 찍습니다. 표정을 찍어요. 그런데 이 표정은 바로 표현 층에서 이 세상 상징세계에서 많은 사회적인 경험과 부딪침 이런 것이 얼굴 안에 다 표현돼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몸을 두고 이야기하지 말고 그건 내용 층에서 하는 것이고, 표현 층은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고 보고 있어요.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그림을 설명하면서 들뢰즈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얼굴이 인간의 표현이라면 그 속에 내용 층이 있고, 내용 층은 각종 여러 가지의 힘들이 부딪치고 만나고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정확하게 얼굴을 통해서 사람이라 하지 않고 들뢰즈는 이걸 ‘사람 되기’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되기가 달라요. 사람이라 하면 한 번 사람은 영원한 사람이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 되기란 그때그때마다 사람이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하고, 소가 되기도 하고. 한 순간은 사람이지만 다른 순간은 개가 될 수 있지요. 술 처먹을 때. 또 나쁜 짓하면 귀신 되지요. 만약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사람이란 말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따로 있고 사람이 맞추려고 하는데 나라는 자체가 기호, 하여튼 효과에 불과한 건데 효과는 원인이 아니고 결과에요. 어떻게 결과에 불과한 것을 주어 자리에 놓을 수 있느냐 말이죠. 마치 예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어떻게 가짜로 행세할 수 있느냐 말이죠.
우리 집은 부자다, 하고 나는 지금 벤츠란 차를 가졌다는 말이 같은 말이 아니에요. 나는 부자란 말은 옛날부터 부자기 때문에 벤츠를 가질 자격이 나한테 있단 뜻으로 벤츠를 자랑한 게 아니고 나를 자랑한 게 돼요. 나는 벤츠를 샀다는 말은, 나 같은 인간이 벤츠 같은 차를 탈 자격이 돼? 나는 벤츠를 타다가 망가져도 할 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런 뉘앙스가 강해요.
여러분, 어느 쪽이 자본주의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다. 이게 자본주의에서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아니면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거지. 어느 쪽이 행복하겠어요? 돈이란 돌고 도는 거지. 만약에 내가 돈을 붙잡으려고 하면 돈의 노예가 되잖아요. 돈을 손님처럼 지나가는 과객처럼 느끼며 살아야지요. 때로는 내 팔자에 부자가 되다니 이건 염치없는 짓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나마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소 숨 쉴 만한 행복이잖아요.
결혼 앞두고 있는 사람한테 이런 소리하면 안 되지만. 왔다가도 헤어지만 할 수 없지 나 같은 팔자에 무슨 결혼이고. 이런 생각으로 결혼하시란 말입니다. 너는 내가 점령했으니까 내 거야. 이렇게 마치 소유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단 말이죠. 내가 그녀의 소유물 돼서도 안 되죠. 왜? 들뢰즈의 철학에 의하면 모든 것은 그때 만남에 대한 의미효과, 효과로서의 의미에 불과한 거예요.
여기 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가 처음 가질 때 기쁨과 지금 몇 년 지난 후와 같을까요? 다르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욕망하는 기계거든요. 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표현 층에서 뿜어낼지 우린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걸 장담할 수 없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자기 이론으로 모든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체계에 대해서 여지없이 공격에 나섭니다. 벗어나라. 노마디즘이라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유목주의. 유목주의의 특징이 뭐예요?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늘 쉴 새 없이 떠나는 겁니다. 기존의 권력체가 어떤 영토를 갖고 있다면 유목주의는 영토를 떠나는 겁니다. 그러면 탈영토화 되겠지요. 탈영토화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자기 고유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 때 재영토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자놀이거든요. 처음에 자본주의가 발생할 때 금융권에서 시작했고 금융권의 이자놀이에서 자본주의가 생겼어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건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어요. 돈 빌려주시면 한 달 뒤에 이자 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건 자본주의 아니에요. 자본주의는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줘서 이자 받는 겁니다. 돈이 없는데 빌려줄 돈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돈 줍니까? 남의 돈 빌려서 하지요. 그게 금융기관이잖아요. 자기 돈 빌려주는 게 아니고 남의 돈 빌려서 그 돈을 주고 시간차 공격하는 거예요. 이쪽 이자는 한 달 뒤에 갚고 갚은 것은 두 달 후에 갚는다면 한 달 동안은 돈이 거저 생기는 거잖아요. 그게 자본주의에요.
기업가들이 물건 팔아서 이윤 얻는 것보다 기업이 갖고 있던 부동산이나 그것의 이자로 얻는 이익이 더 커요. 수출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기업가가 번 돈을 부동산이라든지 채권 같은 것을 사는 거예요. 그 이자가 기업을 더 키운다니까요. 대재벌의 오너가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2~3% 갖고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주주 돈이죠. 그 돈을 오너가 쓰는 거예요. 마치 내 돈처럼 쓰는 거예요. 오너는 그 주주에게 은행이자보다 더 벌게 해주면 되잖아, 딱 그 한 마디로 계속 돈을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동해서 대가 얻는다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은 날아가 버리고 돈이 돈을 버는 거예요.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자본주의가 분출하는 욕망의 화신이라고 보는데 자본주의 자체가 숱한 욕망, 힘들의 모음입니다. 따라서 들뢰즈가 이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난다고 본 거예요. 못 벗어난다는 것이 해결책이 되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기존의 생각은 자본주의 자체가 그 안에 들어가면 내 것, 네 것이 들어 있잖아요. 자본주의를 벗어나느냐, 못 벗어나느냐, 라고 질문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관건이에요.
그런데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벗어나라고 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이 생각이 바로 자본주의에 말리지 않는 사고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자본주의가 테두리라면 여기서 못 벗어나면 어떻게 하느냐? 돌아다니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힘들이 나를 몰아넣는 대로 가면 돼요. 전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내 것이 있잖아요. 내 것이 손해나면 나는 실패로 보고 내 것이 내 돈이 증가하면 성공으로 봤지요. 이게 기존의 자본주의 아닙니까.
그런데 들뢰즈는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나요. 자본주의를 힘들의 욕망의 차이들의 반복으로 보기 때문에 벗어날 순 없지만 돌아다닐 순 있잖아요. 옛날엔 돌아다니면 실패로 봤다니까. 고정된 내 자리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을 버리면 우리는 인생 조졌다, 실패했다, 자살한다고 나왔잖아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돌아다니면 성공, 실패란 게 아예 없는 거예요. 마음껏 자본주의를 누리면 되는 겁니다. 돈을 모으란 게 아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괜찮고 있으면 쓰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거예요.
도대체 자본주의에 속한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자본주의 하에서 힘들어 못 살겠다, 불행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누구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안 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살다 보면 내 것일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내 것이라도 내 것 없다고 여기고 내가 변신, 변신, 변신을 거듭하면 되거든요. 그게 차이들의 반복이니까. 그게 존재가 아니고 생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에요. 생성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늘 새로운 사건들이 오게 돼있어요. 사건들이 내용 층에서 오게 되면 표현 층에서 효과로써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인간 세계가 이처럼 돼버리면 나를 들뢰즈는 유기체라 하는데 유기체를 없애버립니다. 나를 유기체라 하지 말고 기관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아요. 늘 부단하게 움직입니다. 마치 세포가 마주쳐서 정자와 난자가 마주쳐서 배가 되죠. 배에서 귀도 코도 나오잖아요. 배가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요.
그처럼 유기체를 나라고 하지 말고 나를 그 안에 녹여버리잔 말이죠. 그 배도 움직이는 그 자체를 나라는 의미를 만들면 되는 거예요. 아까 스피노자에서 어떻게 하든 신의 양태다. 신의 모습으로 보자.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누리게 되면, 새로운 의미를 맛보는 일종에 떠돌이 되죠. 떠돌이 되고 재영토화. 재영토화 될 때는 재코드화란 말을 하는데 코드 알지요. 법칙. 그것이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해체되면 또 새로운 삶을 하면 돼요.
결국 들뢰즈의 철학의 특징은 그냥 인생을 즐길 때까지 계속해서 즐기는 겁니다. 자극에 의해서 즐기는 게 아니고 즐기는 걸 쟁취해서 즐기는 게 아니고 지금 형편 자체를 나한테 적합한 즐거움으로 인식을 해버리는 거예요. 기존의 즐거움은 결핍에서 온 즐거움이에요. 배가 고픈데 밥 먹어야 되는데, 밥 먹으면 얼마나 즐겁겠나. 하지만 들뢰즈는 밥이 없으면 안 먹는 것도 즐거움이야. 그 자체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란 말입니다. 그게 생성이니까.
그런 나는 지금 이러한 힘들, 기관 없는 신체죠. 힘들이 서로 약간의 강도를 이뤄서 지금의 내 모습을 이뤘고 내일 되면 다른 힘들을 만나게 되면 강도가 옅어지던 강하게 되던 그때 가서 보고. 항상 강도가 제로가 된 상태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예요. 물의 온도가 0일 때는 얼음이 될지 물로 그대로 있을지 모호하잖아요. 모호한 경계선상에 있잖아요. 늘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사람 되기. 사람 되기란 사람으로 언제 갈지 몰라요.
술 먹으면 개가 될 수 있고 착하면 천사될 수 있고 언제든지 유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유목, 떠나는 생활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는 철학이라고 들뢰즈는 말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은 늘 가변적이고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또 구성되고. 거기서 내가 무엇을 할까, 라고 말하지 마라. 무엇을 할까를 말하는 순간 또 결핍을 낳고 모자람 때문에 자기 스스로 탓 할 수가 있어요.
이제부터 남은 시간에 제가 할 것은 들뢰즈 철학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지 근원적인 의도가 있어요. 공무원 승진할 때 주위 사람들이 옛날에는 난을 주잖아요. 난을 주는 것과 부케를 주는 것과 차이점이 뭘까요? 난은 한 종류에요. 대장이 있고 수직적인 체계를 이루지요. 부케는 한 종류의 꽃이 아니죠. 여러 종류의 꽃을 꺾어서 하죠. 그걸 리좀이라고 하는데 이건 풀처럼 옆으로 퍼지는 우연히 마주침, 우연한 만남이죠. 우연히 사건의 다발로서 살아가는 것.
들뢰즈가 왜 이런 철학을 주장하느냐 하면, 그동안 모든 것이 신 밑으로 서열화, 계급화 된 이 사회가 인간의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고 신보다 못한 건 천사고 천사 밑에 인간 있고 인간 나름대로 서열이 있었는데 그 서열이 결국 수직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설치해놓은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착하게 산다는 목표가 있지요. 신처럼, 천사처럼 신의 형상을 본받아서 점점 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체로 결핍이 되잖아요. 자기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결핍, 욕망만 더 강렬해지죠. 타인과의 차이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돈 있어도 교양 없으면 열등감을 느끼잖아요. 어떤 중국 사람이 돈은 많이 가졌는데 교양은 모자라서 영국의 신사도를 배우기 위해서 월 이천만 원을 소비한다는 거예요. 스테이크 써는 법, 숙녀에게 자리를 내미는 법 등을 배워요. 교양까지 겸비하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세상에서 돈만 알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천국 가야 되잖아요. 자기 생각에 천국은 천사 같은 착한 사람만 간다고 생각하니까 막판에 육십 넘어서 교회 와서 성화론으로 말씀대로 살아서 천당 가겠다는 사고방식과 똑같은 거예요.
들뢰즈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있다는 거예요. 신의 심판. 그래서 들뢰즈 철학은 신의 심판에 대들어라, 반발하라, 반항하라. 이게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의도적으로 신의 심판에 대해서 빗나가라, 어긋난 짓을 해봐라. 그래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신에게 불복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은 그동안 어떤 짓을 했는가? 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 변화 중에서 신은 율법을 줘서 많은 변화 중에서 율법에 합치 된 것만 따로 골라서 서열화 시킨 거예요. 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신의 법에 의해서 임의로 구분지은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천국과 지옥이잖아요. 왜 고만고만한 똑같은 인간인데 인간의 갈 길은 서로 다른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무슨 말이에요? 부활은 다 되는데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부활로 나오지요. 같은 인간인데 마지막엔 두 종류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두 종류가 됐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미리 온 신의 법을 보니까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있으리라. 신의 심판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게 말이 아니란 말이죠. 힘들어 죽겠단 말이죠. 뭔가 하고 싶어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어떤 아가씨와 사귀는데 그 아가씨가 내게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닐까?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이쯤해서 헤어지자고 말할까, 말까? 이런 것. 왜 자꾸 주춤주춤하느냐 말이죠. 그냥 사태가 몰아가는 대로 일을 해치우면 되는데 누가 너로 인생을 주저하게 만드느냐 말이죠. 그게 따지고 보면 전부 다 신의 법이란 거예요. 하나님의 법은 법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심판으로 이어지니까 그 심판에 불복하는 반항의 모습을 보이자. 그게 들뢰즈에 깔려있는 본모습이에요.
그게 일리가 있는 것이 서양의 모든 철학의 근거가 선한 것은 신의 법이 요약돼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선한 것이 신의 법이 요약된 게 아니고 신의 법에 의해서 탈락되고 배제되고 구분되어진 쓰레기라고 여기진 그 속에서 얼마든지 선한 것이 있다. 왜? 우리는 그 쓰레기 출신이니까. 우리는 쓰레기들의 조합이니까. 그 쓰레기에 의해서 통합된 존재니까.
내가 그걸 통합한 게 아니고 그 쓰레기들이 우연히 만나고 흩어지는 가운데서 만나고 연결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탈영토화 됐다가 재영토화 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내가 나라고 종잡을 수 없는 새로운 나로 창조되는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사는 기쁨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그걸 희열로 봐요. 어떤 희열? 새로움이 주는 희열, 매일 창조될 수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신의 법에 주눅이 들어 사느냐 말이죠. 율법에 주눅 들어 살 필요가 뭐 있느냐 말이죠.
심판 겁내지 마라. 어차피 우리는 심판의 대상으로 굳어지지 않고 우린 매일같이 해체된다. 뭔가 굳어져야 이놈, 이렇게 되는데 이놈이 없네. 내일 되면 이놈이 딴 놈이 돼요. 다른 사건에 이접, 서로 접합했으니까. 이 사건, 저 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이놈 할 대상, 주체가 없어요. 그냥 매일같이 내가 생산될 뿐이니까. 욕망하는 기계들의 우연한 접합에 의해서 생산된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들이니까.
신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고정됐을 때만 신을 믿어요. 내가 고정되지 않는다면 신은 없지요. 없는 게 아니고 신은 재영토화 되겠지요. 그래서 이런 공식이 나와요. 들뢰즈에 의하면, ‘나의 변화=하나님의 변화’에요. 내가 달라지면 내가 믿는 하나님도 병행해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겁니다. 20대 하나님과 30대 하나님이 다르지요. 용어야 성경에 나오는 용어지요. 여호와가 어떻고,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그 예수를 보는 인식이 20대, 30대, 40대, 50대에 달라요.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잃을 때 다르고.
부자 됐을 때 하나님과 가난할 때 하나님이 달라요. 가난할 때는 박근혜 하야하라, 하지만 갑자기 재벌 되면 최순실이 문제지 박근혜가 뭐가 문제야. 다르지요. 여유 있는 자와 생존이 간당산당한 자는 달라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요. 에이, 더러운 세상 같이 망하자. 한 달에 연금 천만 원씩 받아 크루즈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과 세상 보는 눈이 달라요. 한쪽은 지옥 같은 세상, 한쪽은 Oh, beautiful world! 완전히 다르다니까요.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같이 달라지고 세상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달라져요.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도 달라질 것 같으면, 그걸 객관적으로 볼 때 결국 어차피 달라질 것, 뭘 고민하느냐 말이죠.
이 들뢰즈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에서 나옵니다. 니체의 철학은 움직이는 철학이에요. 하나로 고정할 수 없고 계속 움직여 나가는 겁니다. 그 움직임을 니체는 권력의 의지다.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를 빼세요. 강물 같이 흐르는 권력 자체의 의지가 되는 겁니다. 니체에서 바라볼 때 현대사 모든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5.16쿠데타, 그래야만 했었어. 6.25전쟁 그래야만 했었어요. 그때 그 농밀한 밀도 있던 이슈화 된 사건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어버릴 거예요.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들뢰즈는 공명의 효과,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데 공명하게 되고 공명한 것이 모이고 그 다음에 그것이 운동을 낳는다. 강요된 운동이라 했는데 강요된 운동이니까 우리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냥 떠밀려가는 나란 것은 없고 떠밀린 채 그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에 들뢰즈 철학을 복음의 입장에서 제가 평을 해드리겠습니다. 들뢰즈 철학의 문제점이 뭐냐? 동일성이 자아를 낳거든요. 자아란 동일성을 깨버리고 차이, 어떤 차이? 이질적인 힘들의 다발로 보는 차이, 이 차이가 반복되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이 일어난다고 봤는데 복음으로 봤을 때 이질적이라는 게 문제에요. 들뢰즈 철학을 복음으로 꼬집을 수 있는 것은, 들뢰즈는 이질적인 것이 뭔지 몰라요.
들뢰즈 철학이 한계는 어제와 오늘 내가 동일하다는 동일성을 근거로 해서 그게 아니라고 한 거예요.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에 동일성이 이미 전제돼있지요. 그런데 성경에서의 이질성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죄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죄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은 선을 알아요. 나름대로, 온전한 선은 아니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라고 했지요. 그들이 선을 아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를 안다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아는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돼야 될 이유였습니다. 선악과를 안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런데 그들은 이미 선과 악을 알아버렸지요.
여기서 좀 생각해봅시다. 선과 악을 아는 것 외에 다른 윤리적 길이 있을까요? 중간 과정은 없어요. 선과 악을 알면 전부를 알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전부를 알기 때문에 전부 아는 그 바깥을 자연적으로 모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전부를 알기 때문에 추가적인 전부가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이 한 마디 하게 되면 이렇게 이해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저건 예수님의 선한 말이다. 예수님의 말이 선한 말이 아니에요. 이질적인 말이지 낯선 말이지 선한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부자 청년은 말하기를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한 태도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는 태도와 마찬가지잖아요. “주님이여, 말씀 주셨는데 이 말씀 지키면 선한 사람 되겠지요?”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됐지요.
들뢰즈가 공격한 건 다 맞아요. 기존에 중세부터 내려온 서양의 모든 기독교 역사가 하나님 말씀을 보는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선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플라톤 철학이니까. 플라톤 철학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같은 것으로 사라지고 진짜배기는 천국 가면 있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면 거기에 진리의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거예요. 이데아 세계, 관념의 세계 정도가 아니라 진짜 세계. 참된 형상이고 이 지상은 다 질료, 물질적인 재료가 되고, 그런 세계를 들뢰즈가 잘 공격했어요. 맞아요. 현대양자물리학이나 현대생물학으로 봐서 다 맞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얼굴이란 내가 노동한 얼굴이 아니라 만나고 헤어지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지나가고 그러한 경험들이 누적되어 인간의 얼굴을 구성합니다. 얼굴도 하나의 기계고 기계에서 나온 표현 층이니까. 그래서 얼굴은 그 사람의 얼굴 되기에요. 지금은 이 얼굴이지만 내일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얼굴 표정이 달라질 수 있어요. 그 사람 얼굴 안에 평생의 경험과 모든 여정이 다 담겨있어요. 그래서 태진아가 불렀던 <옥경이>란 노래에 보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얼굴을 못 들잖아요.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 여자는 얼굴을 못 들고 눈물만 뚝뚝 흘리지요.
그래서 동창생 만나서 얼굴 삭았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살아온 과거가 힘들었구나. 참 아슬아슬하게 왔구나. 등산복은 등산할 때 입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등산복 입으면 문제 있는 거죠. 그 사람 얼굴이 돼버려요. 얼마나 옷이 없으면 평소에 등산복 입고 돌아다닙니까. 그래서 좋은 옷 입고 신발도 70만 원짜리 프라다로 신고. 그게 자기 얼굴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부자고 권력 있다는 자기 얼굴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교도소란 새로운 이벤트, 새로운 사건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다른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어요.
그게 들뢰즈 철학의 공헌입니다. 들뢰즈 철학은 내 것이라고 동질성을 유지 마라. 모든 것은 상황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 그걸 들뢰즈는 동질성 주장하지 마라. 이 땅에는 하나님의 신의 율법에 의해서 제거된 이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진정한 이질성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이질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 죄에 갇혀있던 이 세상에 의인이 침투하거든요. 침투할 때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에 의해서 말씀대로 침투합니다. 이것이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죠. 이 비밀을 복음의 비밀이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이 사람들 눈에 띠었지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전부 보고 있잖아요. 본다고 해서 비밀이 비밀로 노출되겠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못 본다고 하니까 네가 눈을 떴구나.
진정한 이질성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선악으로 이미 현실 자체를 틈새 없이 내부를 선악으로 완전히 페인트칠을 해버렸거든요. 막힘이 없이 막아버렸어요. 니체는 이 답답함을 이렇게 합니다. 니체 책에 [선악을 넘어서]라고 있어요. 선악을 넘으면 뭐가 있느냐? 선악 너머에 신들의 자유분방함이 있어요. 거기는 감각이에요. 감각이 이성보다 더 우선돼야 된다.
그걸 따랐던 사람이 이번에 노벨문학상 받은 밥 딜런. 히피족이에요. 히피족의 우상입니다. 국가가 행하는 모든 수직적인 절차, 명령을 벗어나서 탈영토화 해서 유목처럼 떠나는 거예요. 젊은 사람끼리 갖고 있는 숨 막힌 이성에 억눌린 디오니소스적인 니체가 이야기한 충동에 따라서 살아보자. 그걸 주장한 사람이 밥 딜런이에요.
그것을 지금 들뢰즈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라. 다른 대안이 없다. 그것이 날마다 오는 새로운 창조지요. 들뢰즈는 라캉이나 프로이트를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란 책을 냈어요. 아버지 이름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욕망들의 기계의 마주침으로써 이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가 복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 들뢰즈한테 맞아죽어요.
이러한 현상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됐는데 그 심판의 양상 중에 하나를 우리가 들뢰즈를 통해서 오늘 배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다녀간 세상, 하지만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설계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그러한 마귀적인 모습을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편승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이킬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