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4b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20161104b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릴 때 어차피 제사가, 예수님 한 몸이 제물이 된다면 번제면 번제, 화목제면 화목제 처음부터 하나의 제사만 드리면 될 텐데 왜 다섯 가지로 벌려놓고 신약시대는 그것을 하나로 하느냐 말이죠. 윷이 네 개인데 하나로 모아지잖아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관계가 지상에 구체화되는데 그걸 지상에 아들다움을 표현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들 맞아요. 어떤 아들인지 지상에 마음껏 발산하는 조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고 율법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주님이 같이 개입하신 거예요. 피조세계 자체가 주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건 수천 번 이야기해도 취지를 알아야 돼요. 피조물 본인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 환경이라 했지요. 그리고 인간은 환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 환경의 일부가 돼요. 환경을 즐기는 분은 하나님이고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지 아담이 에덴동산을 즐기면 안 됩니다. 에덴동산을 아담이 즐길 것이라면 위험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고 없어져야 돼요. 그러면 선악과라고 위험한 요소는 처음부터 중앙에 없어야 돼요. 그 위험한 폭탄을 왜 중앙에 심어놓습니까? 한 가운데에 죽음이라는 걸 왜 심어놨겠어요?
환경의 일부라는 거예요. 환경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어떤 분이냐? 그것은 그분이 지상에 내려오면 알겠지요. 언약 따라서, 율법 따라서, 말씀 따라서 오시면 알겠지요. 그냥 왔다 가시면 되는데 이 땅에 뭘 생산하려고 하느냐?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창조는 아무리 마귀가 설쳐도 절대로 취소되면 안 돼요. 천지창조는 완성을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완성시켜 버려요.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아들다움을 이 범죄 한 인간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 이 문제와 관련돼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하는 것이 하나하나가 영토에요. 영토는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구분된 영역이에요. 제가 영토란 말을 쓰는 이유가 그냥 땅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땅은 주인이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땅, 대지가 인간이 개입하든지 동물이 개입하면 영토가 돼요. 새들이 짹짹거리면 노래하지요. 여기에 반드시 반복구가 들어가요. 이것은 내 영토다. 오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개들이 오줌 누는 것도 내 영토라는 겁니다. 그러면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느냐? 인간의 입장에서는 땅이 있고 영토가 있지요. 땅은 넓고 영토는 각자 본인이 처해있는 환경 따라 제한적으로 동그라미 친 영토가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는 게 아니고 천지창조가 전부 다 하나님의 아들, 주님의 영토가 되는 목적으로 천지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는 점령할 정복할 땅이 있고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된다. 여기서 내 가치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토마스 홉스란 철학자가 모든 인간들은 이기주의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대들기를 왜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느냐고 하니까 홉스가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밤에 잘 때 문 잠그고 자느냐, 열고 자느냐? 문을 왜 잠급니까? 내 것 안 다치고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잠그지요. 그게 이기주의지요. 밤에 이기주의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지요. 이래도 인간이 이타적입니까? 어디 밤에 문 열어놓고 자 보지.
영토란 땅+권력.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은 노숙자 됩니다. 영토를 마련하려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되죠.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전쟁은 자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남아있는 땅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아직 정복 되지 않은 땅이 따로 있고, 그리고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영토가 따로 있어요. 독도는 누구 땅이에요? 다케시마? 독도는 우리 땅, 한국의 영토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는 지구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지요. 주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악마의 종들이 각자 영토를 내 것이라고 해놓고 기도는 얼마나 한다고. “주여, 내 영토 다치지 않게 해주시고, 밤에 문 잠그고 자면서 내 재산 지켜주시고, 내 노동으로 아파트 샀는데 물새지 않게 해주시고.” 도대체 여긴 영토 관리가 안 돼.
주님께서는 이것을 자기 아들 됨을 드러내는 영토로 바꾸는 조치를 5대 제사를 동원해서 실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영토들의 영토가 돼요. 그러니까 인간적 안목으론 땅이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는 한 곳도 빈 땅도 의미 없는 게 아니고 다 필요해서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했지요. 네가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텃밭이 아닌데 시금치, 호박, 고구마 안 심었는데 비 왜 옵니까? 이 말은 인간들이 영토개념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자기 생존에 필요한 것, 자기한테 유용가치가 있는 것, 자기한테 의미 있기 때문에 이 땅은 나에게 영토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소유화시키는 거죠.
그런데 원래 주인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그 영토를 가져가게 되면 그냥 빼앗긴 게 돼요? 소유자한테 회수당한 게 되죠. 맏아들은 주님인데 아들들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 나와요. 예수님 혼자만 천국 차지합니까? 천국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지요. 백성들이 있을 때 그냥 있으면 안 되지요. 이들은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로 만들어서 구원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도 제가 이야기하면 처음 듣는 것처럼.
그냥 구원 못 받아요. 아들 아닌 자가 아들 되어서 들어가야 돼요. 인간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아들이 되려면 아들의 영을 받아야 돼요. 그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 행위가 아들 되게 하는 성령에 대해서 대립되는 성질을 드러냄을 노출시키는 현상을 동반해서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만들려는데 우리는 그 아들 되는 것보다도 내 영토를 소유하는 것을 자기 행복인양 여기고 기어이 주께서 주의 것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붙들려고 하는 겁니다. 너는 죄인이니까 가질 자격 없어, 하면 우리는 안 들을란다. 이건 울산에서 노동해서 적금 부어서 산 내 아파트인데 하고 붙들고 있어요. 왜냐? 그것은 자기 노동이 자기 주체성이기 때문에.
인간 속에는 자기 과거사가 들어있다고. 그야말로 쓰레기봉투 그냥 내놓으려니까 아까워서 쓰레기봉투 발로 밟고. 그저 내 것이라고 꽉꽉 담아서, 거기에 찬란했던 과거사가 꽉 담겨있습니다. 목사들 같으면 이 교회 와서 교인 몇 명 늘었고, 선교사 몇 명 보냈고, 예배당 지을 때 돈 되는 사람들 협박하려고 부흥사 불러서 예배당 지었다. 따라서 감히 니가 날 쫓아내. 자기 과거사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 없으면 아들 아닙니다. 내가 아들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소제 드리고 번제 드려서 아들 된 게 아니라는 과정이 나와야 돼요. 그것 하기 전에 영토부터 먼저 관계합니다. 우리 생각은 땅이 있고 영토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땅은 하나님 것이지만 지금 영토된 것은 내가 고생해서 얻은 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영토가 있는 한 I am nothing이 아니죠. 나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는 뭐냐?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영토들의 영토. 앞의 영토들, 죄인들의 영토, 죄인들의 구주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 속에 자기 백성 있지만. 요한복음 17장에 겟세마네 기도에 세상 중에 내 백성만 사랑한다고 나와요. 요한복음 3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 전체를 사랑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 중에 내 백성만 사랑해요.
영토들의 영토란 너희들의 영토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 현실, 이런 것들은 일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고 영토들의 영토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영토들은, “주님이십니까? 가져가, 가져가.” 우리가 주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헌금을 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시편 50편에 나오지요. 사슴을 바치고 소를 바친다 할지라도 바친다는 게 성립 안 된다는 겁니다. 소가 그 자리에 있어도 내 것이고 사슴이 그 자리에 있어도 내 것인데 네가 바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바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긴 상한 심령만 받아요. 시편 51편에. 주여, 주께서는 번제도 원하지 않으시고 속죄제도 원하지 않으시고. 다윗 그런 이야기할 때 레위기 1장, 2장을 몰랐어요? 알아도 너무 알아요.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이 법을 보고 우리의 감출 수 없는 영토개념이 반응을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고 백성 된다. 이렇게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한 심령이 되게 하는 능력이 율법 안에 이미 포함돼있거든요. I am nothing.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데 이게 무슨 취지냐 하면, 선악을 이것은 나쁜 거니까 죄고, 이것은 의라는 판단을 내가 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판단은 선악체제 안에 갇혀있는 꼴이기 때문에 그 인식이 있는 한 주께서 천국에 안 받아줍니다. 그렇다면 선악의 인식을 마귀가 심어놨기 때문에 성경은 천 독, 만 독을 해도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고,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는 좋은 분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바리새인 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돼야지. 이런 생각이 나겠지요.
신데렐라 동화를 본 어린아이가, 나는 신데렐라 구박한 언니가 되겠다는 어린아이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성도라면 제가 언니라고 손들고 나올 때 그게 바로 신데렐라 동화를 주신 취지에 맞습니다. 영토들의 영토에요. 하나님께서 영토라고 인정한 것은 선악과 자체가 죄라는 걸 알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에 부합되는 거예요. 합당한 거예요. 이 영토들의 영토의 주인께서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십자가, 죽음으로 빠져나왔어요.
이 말은 어떤 누구도 주님 뒤따라 나올 위인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죽음으로 빠져나온 주님의 세계, 주님께서 영토들의 영토의 주가 되실 때 완성 단계로 나갈 때 관계가 십자가라면, 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못 따라 나왔다는 말도 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영토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아들 나라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했던 십자가의 능력을 입지 않고서는 마귀 세계에서 빠져나올 위인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 능력을 예수도 아닌 우리가 무슨 수로 만들어내겠습니까? 접근력? 조금씩 능력 키우면 나중에 큰 능력 되는 겁니까?
그래서 여기 갔던 예수님께서 도로 우리에게 십자가 능력을 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영, 성령세례지요. 성령 안에는 십자가 능력이 포함돼있습니다. 그건 이미 합격통지서가 돼요. 옛날 국민학교 입학식하면 손수건 달지요. 그게 성령입니다. 합격통지서를 바깥에 달면 까불다가 떨어져요. 아예 마음속에 집어넣어요. 집어넣고 못 빠져나오도록 해버립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혹시 천주교 마리아 초상화에 심장 부분이 바깥으로 크게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마리아가 왜 백인인지 도대체. 원래 황인종인데. 하여튼 심장에 칼 꽂은 것 봤지요. 원래 심장은 안에 들어 있잖아요. 만약에 심장이 마음이라면 헤집고 해도 우리 안에 박혀있는 성령은 빼낼 수 없습니다. 수술해도 안 빠집니다. 참 희한한 팔자 된 거예요.
팔자 타령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팔자입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달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어떤 팔자?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게 아들 되는 팔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길로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갈 수 없으면 못 가는 거죠. 못 가는데 엘리야와 모세는 왜 천국 가 있느냐? 죽었잖아요. 그럼 우리도 늙어 죽으면? 늙어죽어도 안 돼요. 늙어죽는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관계에서 죽임을 당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들관계에서 죽음은 예수님만 홀로 갖고 있는 능력이지 다른 사람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로 죽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어요. 참 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가슴 아픕니다. 이천 년 동안 기독교가 이걸 몰라요. 그냥 장렬하게 순교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 것 없어요. 예수님의 순교의 능력만이 우릴 구원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결혼식장에서 잔치국수 먹고 뷔페 먹는 그것도 순교에요. 그것도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물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충성하는 거예요. 왜? 가슴 자체가 성령의 엔진 부분에 있기 때문에. 너는 오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다가 죽어라, 하면 노래 부르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이 될 수밖에 없는 기구한 팔자가 그거에요. 파마를 하든지 단발을 하든지 그게 순교에요. 단발 순교입니다. 이번엔 파마할까? 파마 순교에요. 파마 했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할 게 뭐가 있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라고 범위를 넓혀놨는데 뭘 따로 합니까? 무슨 영광 되는 행동이 따로 있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습니다. 망하고 나면 찬양이 가장 잘 된다고. 집안 망하고 이혼하고 난 뒤에 찬양하면 가장 잘 되지 노래 연습해서 하면 찬양이 아니에요.
오늘 강의대로 하면 영토에 대한 포기가 되면, 이것이 전에는 영토가 우리의 환경이 됐는데 예수 믿는 팔자가 되면 영토들의 영토가 우리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사나죽으나 파마를 하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나 모든 것이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의 것이 되면서 그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의 증인이 되거든요. 주의 증인 노릇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치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다시 공생애 사는 것처럼 어린 소자 우리한테 사명을 부여한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예수님 공생애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반복이 돼버리면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물세례 받을 때 인간의 죄 속에 뛰어든 것처럼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로써 육을 입고 죄 속에 뛰어든 게 되는 거죠. 그러면 아까 순서가 맞는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 죽음이 유일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거룩이고 의기 때문에 우리는 성숙했다는 착각을 한 죄를 범했고 그동안 50, 60 살아온 것도 생존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자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살기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한 자체가 죄였고 출생한 것도 이 땅에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 짓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기에 육 개월부터 이기주의로 살아가요. 안 주면 울고. 동생 생기면 동생한테 시기질투하고. 가인, 아벨이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가인이죠. 질투의 화신. 공효진이 따로 있어요? 전부 다 공효진인데.
그러니까 옛날 말이 참 재미있지요. 중국에 이런 일화가 있잖아요. 원숭이한테 밤을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줄까, 하면 화를 막 내는 거예요.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줄까, 하면 좋다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질투의 화신이에요. 아무리 가져도 아버지가 유산 나누면서 집은 막내아들, 감사합니다. 밭은 맏딸, 감사해요. 나머지 모든 것은 장자한테. 방금 좋다했는데 가만 보니까 저쪽은 40억 받고 자기는 2억 받으니까 감사한 게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질투의 화신이 아니고 뭡니까? 이만큼 하면 더는 소용없다. 바라는 것도 죄니라? 당신만 있으면 더는 소원 없다 해놓고 그 당신이 방구 뀌고 그러면 짜증나고 그러죠.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인간의 영토를 그냥 뺏기만 하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뺏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자가 아들 되는 변화를 겪어야 되겠지요. 그 겪는 방법을 다섯 차례로 나눠서 다섯 개의 제사로 소개한 겁니다.
번제의 취지는 다 드리는 거예요. 그것도 불에 태워다 다 드리죠. 있음에서 결국 없음으로 끝나지요. 그런데 중간에 하나님께서 연기를 받지요. 연기는 지상에서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결국은 있음을 위하여 없음이 돼버리면 이 모습은 있음에 예수님을 일치시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가 주님께서는 있는 존재로 출현했다가 나중에 사라지지요. 그 과정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게 만족스런 거예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지? 주님께서 하나님의 번제가 되셔서 몽땅 없어진 거예요.
사실은 유일한 제사의 시작이 번제에요. 화목제는 나중에 생겼지만 처음부터 있던 제사는 번제입니다. 제일 먼저 번제한 사람이 노아지요. 몽땅 다 태우는 거예요. 지상에 있는 것은 그냥 없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뻐하심을 위한 있음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없어져도 안 기뻐하는 있음이 있는 거예요. 있음 가운데서 있음을 구분시키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이 없어질 때 다 태울 때 하는 겁니다. 어차피 태워지는 것은 모든 인간이 속한 운명이고 그냥 운명의 사람은 지옥이 되니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위한 이 세상의 천지창조는 주님의 영토 되기 위한 취지는 여전히 완성이 돼야 되고 살아남아야 됩니다. 주님이 개입해야 그것이 윤곽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번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략적인 포괄적인 그림이, 제사란 결국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라질 것이 지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세상인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걸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러면 소제가 뭐겠어요? 불로 태움에 부속적으로 포함된 거예요.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장 1절에 나오지요. 가루로 만들어요. 가루에 뭘 섞습니까? 기름을 붓고 향기를 붓지요. 이렇게 여러분이 강의를 들었으니까 이 특수한 임무는 우리가 할 게 아니고 007이 할 거에요. 뭔가 특수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어떤 인물이라야 감당할 수 있겠지요.
말씀 보면서 우리가 이것 해야지 하지 마시고 어떤 분이 살아있어야 돼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말씀의 바탕에는 주님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그게 해석이 됩니다. 주님의 아픔과 고통과 신음 소리를 느낄 때 성경은 움직이는 살아 역동하는 말씀이 돼요. 우리가 지키는 규칙이 아닙니다. 우리 빼놓고 주님이 이 말씀을 가로채서 이룬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생생하게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기름 부은 자지요. 그 다음에 향기니까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신 분이죠. 그런데 그분이 가루라는 말은 곧 없어질 중간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곧 사라질. 이것을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내가 이 땅에서 들려야 하리니. 주께서 이 땅을 떠나버리는 겁니다. 임무 완성하고 마감되는 거예요.
그러면 동물에서는 그냥 다 태우지만 식물로는 뭘 묘사할 수 있습니까? 향기롭다, 가루로 만든다는 그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불에 태워져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죠. 없어짐이에요. 제사의 특징은 우리는 이 땅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거죠.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구원해달라고 손들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 보내 달라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제사가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서 앞으로 더 진도를 나가야 되겠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신약에 있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구약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되고, 예수님도 하나님 아들 되게 한다면 예수님의 몸인 개체, 우리 몸도 갖고 있으니까 몸과 몸의 결합으로 한 몸이 되는 거냐고 물을 수가 있지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바로 개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우리가 정성을 다하고 신경을 다 쓴다 해도 내 사정을 남한테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없어요. 왜냐하면 언어는 항상 의미가 합치되지 않아요. 어떤 표현을 해도 그 의미가 글자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뭔가 미끄러지고 빠져나오고 남아있는 구석이 있어요. “당신 참 예쁘다.” 할 때 내가 예쁘다는 말을 해도 말로써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어요. “남자한테 참 좋은데 말을 할 수 없네.” 산수유가.
나도 내 표현할 때 마음에 안 들고 내 표현을 전달 받는 그 사람들도 네 뜻이 기껏 이게 다야? 말을 해. 말로 표현할 길이 없네. 사랑한다, 사랑한다, 곱하기 100배. 그러면 사랑입니까? 어떤 여자 친구가 남자한테 너, 나 사랑하나? 사랑한다. 네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봐. 그 구멍 빼놓고 나머지 하늘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여자가 고맙다고 해놓고 그 구멍에 다른 여자 있지?
전부 다 사랑한다는 것보다도 뭐 하나 빼놓고 사랑한다는 게 강조점이거든요. 언어에서 강조할 때는 뭔가 실제적으로 어긋나는 이야기를 해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고 할 때 이 말이 어폐가 있거든요. 바늘 떨어지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큼 시끄럽잖아요. 그런데 말을 할 때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만큼 그 정도로 고요했어. 바늘은 왜 떨어졌는데, 바늘 안 떨어지면 더 고요할 텐데. 그런 뜻이 아니라 강조하는 뜻이거든요.
사람은 표현할 수 없어요. 개체로 전달이 안 됩니다. 백날 주님을 찬양한다 해도 그것은 내 뜻도 안 담기고 말 자체에 의미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결합이 되느냐? 어떻게 예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느냐? 한 몸 된다고 에베소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번 겨울수련회 골로새서 할 때도 한 몸이 나옵니다.
개체의 결합이 아니에요. 위치의 결합, 자리의 결합이에요. 주님께서 제사를 드리고 속죄제 드리는 인간을 세워놓고 자리를 만들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 드리면서 어떤 생각을 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제가 드렸어요. 우리 민족이 드렸어요. 저쪽 민족은 제사 몰라요. 하나님 우리 지켜주시고 저 나라 망하게 하옵소서. 그게 죄가 되지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은 nothing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통해서 해야 되는데 분명히 제사 드린 당사자가 살아있는 한 아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죄를 위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희생물이 개입되게 되면 이제는 적들과의 싸움이 아니고 제사 드렸다고 우기는 이스라엘 백성 내부에 희생적인 사건이 일어나요. 제물을 불에 태우잖아요. 그것이 제단 위해서 일어난 사건을 주께서는 제단 밖으로 성막 밖으로 온 사회 일상 속에 번지게 만들어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이웃에게 돌아 맞아죽는 희생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과정 중에 하나의 실례가 열왕기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5절에,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저와 함께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성전 건축하고 제사를 드렸는데 제물을 많이 바쳤습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제사를 누가 드립니까? 솔로몬 왕.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 그러면 솔로몬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솔로몬은 주님 오시기 전 중간과정에 있지요. 솔로몬이 이런 제사 드리니까 나중에 하나님 영광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제사, 일천 번제 받았잖아요. 그러면 성공한 거네요.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바친 솔로몬이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 이방민족의 공주와 혼인해서 왕이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우상천지로 만들었잖아요. 개체의 결합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는 개체를 사용은 합니다. 솔로몬을 사용하면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제사 드리는 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죄로 바뀌게 만드는 자리를 만듭니다. 솔로몬이 제사 드리고 영광 받으니까 자기가 의인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라가 부강하고 재물이 많고 적들이 굴복해서 남방여인이 와서 뇌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그 가운데 누가 우쭐 되겠습니까?
본인이 우쭐대겠지요. 다시 말해서 I am nothing이 아닙니다. 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바로 이 자리에 미리 와있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솔로몬과의 관계를 보세요. 모든 솔로몬의 행위가 죄로 드러나게 하지요. 죄로 드러났으니까 솔로몬은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지요. 죄로 드러나게 한 주님의 십자가 자리가 그리스도와 솔로몬을 하나로 통합시킵니다. 네가 드린 제물을 받는 것이 아니고 너를 깔고 있는,
솔로몬은 제사 드릴 때 자기 죄를 몰랐어요. 나중에 죄를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 죄를 알게 하는데 투입되는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는 솔로몬이 아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들이고 예수님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예수님만의 자리가 아니고 솔로몬과 함께 할 자리를 만들어서 솔로몬으로 왕 되게 했고 제사 드리게 한 겁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느니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 위주로 자기 영통 위주로 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와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우리 자신에 자아성을 심어준 겁니다. 그때 부끄러움도 없고 하나가 됐다고 하다가 갑자기 죄 짓고 난 뒤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따로 독자성을 유지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독자성을 유지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게 됩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절대로 나는 무의미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이 헌금은 내가 했고, 기도는 내가 했고, 전도도 내가 했고, 내가 했고, 내가 했고. 내가 한 것이 나를 구원되게 했다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그것을 우리도 마찬가지로 되풀이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속성은 우리 힘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과 합일하고 하나 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 되겠습니까, 저렇게 헌신하면 하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내 마음을 낮추면 하나 되겠습니까? 백날 마음을 낮춰봐야 낮춘 당사자가 나라는 것을 우리는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미 성령이 왔다는 것은 합격이 된 상태지요. 합격이 된 상태에서 우리의 모습은 뭡니까?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그냥 죽으면 노선이 달라요. 우리는 십자가 노선에 속한 사람이어야 되지 그냥 죽으면, “죽는 것도 팔잔데 죽고 말지.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든지 그때 알겠지.” 이건 노선이 달라요. 엉뚱한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죽을 때도 주님의 십자가 있는 노선은 그 죽음부터 시작하게 되면 일어난 모든 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이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그런 실수하면 안 돼, 해도 그런 실수해야 돼요. 남의 인생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재산이 한 45억 쯤 됩니까? 그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할 수 없어요. 45억 가지고 고생해도 그것도 팔자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누구처럼 재산이 70만원밖에 없는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가야 돼요.
그렇게 살아간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란 같은 자리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이란 용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 용어를 바꾸겠습니다. 예수님의 파우치. 우리가 예수님의 지갑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사우디에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에요. 캐나다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고, 울산에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에요. 까마귀 나는 태화강에 살아도 우린 예수님의 지갑, 울산에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갑, 파우치 안에 살아요. 예수 안에 들었어요.
그것으로 우리가 레위기를 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네. 꿀을 넣지 마라. 네가 맛을 낼 의미 없어. 맛있는 빵 먹으려고 이스트 넣지 마라. 네가 먹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치려면 소금을 치라. 소금은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 소금은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짠맛이라면 신라면 수프 넣으면 되겠다. 소금 자체가 그냥 있는 자체로 영원해요. 뭔가 부패를 방지할 요소가 없어요. 소금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꿀과 누룩은 뭔가 변화가 유발되지만 소금은 그냥 소금이에요. 주께서 소금으로 쓰시면 그 자리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따라서 새로운 영토로 바뀌면, 시공간으로 바뀐다는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못하고,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나의 영토 속에서 주님께서 일찍이 자리를 펴셔서 그 자리에 합류한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그냥 구원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던 십자가 관계가 이제는 우리의 영원한 영토, 주님이 함께 하는 영토가 되었다는 게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주님의 제사가 반복되게 하옵소서. 다 드려야 되고 없어져야 되고 그리고 죄는 또 지워져야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결국 하나가 되는 이런 과정을 주께서 다 이룬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