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4a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20161104a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장을 번제라 해서 번제는 다 태우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다 태운다. 태울 걸 왜 드리라 했느냐는 그 문제가 생기죠. 불로 태워질 걸 왜 바치느냐 말이죠. 바쳤으니까 뭔가 있을 거잖아요. 태우면 없어지지요. 그러면 있는 것과,
오늘 레위기 2장하고 있는데 뭔가 있단 말이죠. 있는데 태우면 없어지거든요. 태워서 없어질 걸 왜 바치라 했느냐 말이죠. 그러면 있다, 없다에서 중간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있다가 없어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있는 것이 다 태워지는 겁니다. 있는 것이 연기가 되어 태워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연기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숯불갈비 종류.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뻐했다고 했으니까. 연기가 되는 재료가 사람이 바친 거란 말이죠. 그러면 있다가 없어지는 걸 좋아한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다. 네가 보기에 있어 보이나? 너, 없어져야 내가 기분 좋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존재라 하는데 있음은 하나님께서 안 좋아한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고 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뀔 때 좋아한다는 겁니다. 있는 걸 왜 싫어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기 있다고 보면 이건 있음과 있음 사이에 거래가 형성돼요.
“하나님, 저 있습니다. 하나님, 거기 계시지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에 잘 계십니까?” “있다. 어쩔래?” “그러면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나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저를 보시고 기쁘게 받으소서.”라는 거래가 형성되겠지요.
이런 제안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순종을 만약에 기쁘게 받는다면 그 기쁨의 전제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여기 있음이 되는 겁니다. 이걸 somebody, 거기 있다. 그런데 없음은 뭐냐 하면, nothing이 되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걸 ‘I have nothing.’이라 해요.
기어이 나를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표현할 언어적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도 I have nothing이니까 ‘I’가 있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제가 여기 있으니까 괜찮은 말을 드리는 겁니다, 라는 티를 내는 거예요. 차라리 욥기 마지막처럼 아무 소리 안 하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뭔가 거기 있더라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생각한 것은 지상에서 하나님이 만들어서 그걸 도로 회수하는 것이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만들어서 알아서 회수하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는 위에서 출발해서 나를 경유해서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원하고자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회수한다면, 우리가 제사하면서 따로 챙길 게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레위기를 보면서 “하나님, 번제를 시키는 대로 잘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번제를 내가 드리고 우리가 드렸으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은 우리가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오늘 레위기 2장 하는데,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유대인들이 이걸 보면서 “하나님 소제를 드릴 테니까 준비된 약속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사 드렸을 때 주실 복을 우리 것으로 주시옵소서.”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건 거래가 되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하나님 것을 우리한테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레위기에서 번제나 소제 드리면서 이미 제사 할 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까? 뭔가 노리고 드리게 되면, 제사가 노동이 돼요. 노동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이 땅에 와서, 창세기 2장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냥 공짜로 다 주신 거예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임의로 먹되,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 챙긴 거예요. 그러면 아담의 본성은 공짜로 얻어 챙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몸이 아담이에요.
그런데 쫓겨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냐 하면, 노동을 하지 아니하면 일하지 않으면 이마에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환경 덕입니다. 모든 게 갖추어진 환경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서 아담과 하와조차도 환경의 일부가 돼요. 이게 어렵습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환경의 일부란 것은 독자적인 가치는 없다는 겁니다. 독자적인 가치를 의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도 환경의 일부라면, 그 환경에 맞추어야 돼요. 나, 인간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을 환경의 일부로서 부응해야 될 임무와 책무가 있는 겁니다. 그래야 전체 에덴동산 환경이 돌아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뱀은 인간에게 찾아와서 독자적인 가치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에요. 악마가 우리 조상 아담에게 준 마음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유전요소dna에 실려서 온 게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죄악 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출생하다보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그걸 옳다고 당연한 것처럼 주어지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기대한 것은, 이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동산이기를 원했습니다. 따먹지만 않으면 죽음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따먹으면 죽음이 있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결국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창세기 3장에서는 선악과 따먹었는데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돼있고, 창세기 4장에 들어가면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죽어야 될 이유가, 그냥 늙어죽는 게 아니고 뭔가 이유가 있더란 말이죠.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는 관계가 형성돼있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저주받게 돼있어요. 가인은 이 땅에서 저주받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는 뭡니까? 우리에게 알려준 적 없잖아요. 알려줬지요. 동생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동생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인데 가인은 거기서 소외된 거예요. 동생과 하나님의 관계? 저 관계와 현재 나와의 관계는 다르네. 다른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인이 역할을 담당해야 되는 겁니다. 뱀의 후손이 이 땅에서 계속 구체화되어야 되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 의해서 맞아죽는 기어이 발꿈치를 물려야 돼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서 발꿈치를 물릴 때 비로소 뱀의 후손이 자기 정체를 노출하게 돼있어요. 여자의 후손은 항상 역사 속에 같이 등장해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의지 때문에 희생당하는 현장에서 비로소 뱀의 후손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도 그 순간 노출되게 돼있습니다.
아벨이 있어야 가인이 왜 나쁜지 등장하지요. 아벨의 제사가 없는 한 가인의 제사는 그 자체로 왜 나쁜지 몰라요. 가인이 드린 제사가 오늘 레위기 2장에서 하는 제사입니다. 곡물로 드리는 것, 소제라고 해요. 작다고 소제가 아니고 이런 뜻입니다. 소제素祭, 이 ‘소’자가 흴 소, 하얗다. 하얀 제사. 영어로 시리얼, 곡물이란 뜻이에요. 곡물로 드리는데 갈아버리면 하얗게 나오잖아요. 가루로 해서 하얗게 드린다.
2장 1절,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제사 드렸잖아요. 내놓으세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시키는 대로 짜장면 말고 소면. 하나님이 원하는 곡물제사를 시키는 대로 갈아서 했단 말이에요. 꿀 넣지 말라고 해서 안 넣었어요. 그리고 누룩 넣지 말라고 해서 안 넣었어요. 소금 치라 해서 소금 쳤어요. 뒤에 다 나옵니다. “이제 복 주실 일만 남았네요, 하나님.” 이게 바로 성경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레위기에서 시키는 것은 우리가 제사 드렸다는 그 인간을 nothing,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요. 일종에 유령 같은 인간. 제사를 드리는 와중에 우리 자신이 제사 드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그 시키는 취지 안에 포함돼있어요. 누구든지 제사를 드리거든 제사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게 바로 제사 드린 효과가 되도록 제사를 드리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간이 제사 드리고 난 뒤에 많은 민족 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 앞에 제사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민족밖에 없으니 우리는 특별한 선택된 구원의 백성이라고 그때부터 우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못 됐어요. 그게 탈이 난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런 해석들이 있어요. 여기서 곡물을 드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의미하고, 가루가 됐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자극적이고 탐욕적인 것을 금하라는 주의 뜻이고, 소금을 치라는 것은 부패하지 말라는 뜻이니까 우리가 소제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이 부패하지 말고 세상 탐욕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아서 우리가 헌신합시다.
그렇게 해서 지옥 갑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고 저주받은 천국은 너희 것이 아니고 지옥이 너희 것이다. 차라리 백부장, 이방인들이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취지 때문에 그들을 지옥 보낸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취지는 시작을 우리부터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이 땅의 인간을 상대로 하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서 그걸 회수한다 했지요. 가져가는 거예요. 우리를 이용해먹은 거예요. 제사 드리는 자를 이용해먹고 하나님 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우리는 탈락시키고. 뭘 드렸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떼버리는 겁니다.
소제, 번제 드려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 필요 없네요. 사도 바울이, “여러분, 레위기가 폼으로 있는 줄 알아요? 레위기대로 제사 드립시다.” 이렇게 해야지.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곡물 가져오세요. 옛날에는 가루로 했지만 지금은 현찰로 바꿔서 내면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5대 제사인데 달랑 십일조만 내고 말 겁니까? 다 갖다 바쳐야지. 수시로. 빈손으로 오지 말고. 없음이 노출되지 않는 것은 백날 헌금 교회에 갖다 바쳐도 이단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제사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없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가? 어떻게 없다는 것이 생산되게 하는가? 그걸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봐야 돼요. 지금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인데 하여튼 할 수 없어요. 해야 되니까.
번제, 오늘은 소제, 레위지 3장에서는 화목제, 그 다음에 4장에 들어가면 속죄제, 속건제가 있는데 둘 다 죄 값을 치러야 된다는 제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는 죄를 치렀으니까 홀라당 다 가져가고, 속건제는 피해 입은 사람에게 +20% 배상하는 겁니다. 백만 원짜리 티비를 부셨으면 백만 원 주면 안 되고 백이십만 원 줘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해야 속건제가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가 일상적인 삶까지 연결되는 거예요.
번제는 소제와 같이 들어가요. 소제는 식물성이고 번제는 동물성. 다 태운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가루 드린다고 주께서 가루 마시는 게 아니고 가루를 불로 태워요. 그 다음에 속죄제 따로 드리고 화목제를 마지막에 드리는데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받고 난 뒤에 남은 음식을 백성들이 먹을 때 우리가 드린 것을 나눠먹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단 받으시고 내려올 때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배급받듯이 먹기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동일한 음식을 평등하게 다 같이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먹는 음식을 우리도 먹었으니까 하나님과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겁니다. 가족이란 소풍 가서 같은 김밥 먹는 게 가족이에요. 하나님이 먹는 음식을 백성이 함께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내용이 유출되어 요한복음 17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유출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연설문이 유출됐어요. 거기에 보면,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저희들과 나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 하나가 된다면 몸만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강의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되지만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저는 그냥 갑니다.
지금 제가 무슨 뜻으로 자꾸 뜸을 드리느냐 하면, 왜 번제와 소제가 구분되느냐, 이걸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려면 제사 드리라 하면 되는데 왜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무슨 의도로 구분 짓느냐는 겁니다. 구분 짓는다는 말은 경계선으로 나눴다는 말이죠. 나눴다는 것은 경계선 너머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섯으로 구분됐는데 신약에 오면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제사가 하나가 돼버려요.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이 채찍을 맞음은 너희가 나음을 입고하는 그때는 속건제물이 등장하죠. 그런데 로마서 3장에는 화목제물이 등장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준비했으니 하나님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었느니라. 요한일서 4장에 보면, 하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이 됐다고 했어요.
그러면 화목제물로 마감이 된다면 처음부터 화목제물 하나만 드리면 되지 번제, 소제 왜 드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우리가 따질 이유가 있어요. 왜 구분했는지 경계선을 지어놓고 나중에 화목제물로 통합시켰으니까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그 경과를 그 과정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지요. 제사에서.
제가 이런 걸 따지는 이유가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알기 쉽게 고기 잡으라 하면 고기 잡고, 곡물 갈라 해서 곡물 드렸으면 그냥 갑시다. 이렇게 되면 행함으로는 지옥 갑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시켜만 주이소.” 이 말은 뭐냐? 시킨 대로 할 테니까 시킨 대로 한 근거로 천국 넣어주세요. 세상에 그런 천국 없습니다. 이건 흥정이고 거래라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다할지라도 그건 인간들이 지어낸 천국인데, 사실은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회수할 때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의 소나 곡물을 받는 게 아니에요. 마지막에 받는 것은 인간이 드릴 수 없는 것을 받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곧 제물이고 예수님이 번제요, 소제요, 속죄제요, 속건제요, 화목제니까. 인간은 nothing이니까. somebody, 거기에 누가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경유하는 거예요. 이걸 언약의 대상자라 해요.
원래 출애굽기 4장에서 언약이란? 이것부터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기 위해 인간을 상대로 기준점으로 삼은 것이 아브라함언약의 시작이에요. 아브라함에서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같은 인간끼리 맞대어서 우리가 이렇게 해서 축복 받자. 그러면 저주받아.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아무리 끄집어내야 하나님께서 그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아요.
학생이 문제내고 학생이 다 풀면 그건 시험 치나마나 아닙니까. 출제자는 따로 있어요. 천국의 시험문제는 따로 있다니까요. 시험문제가 이 땅에서 유출되어도 비밀이에요. 숨어있어도 비밀이고 유출돼도 비밀이에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비밀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구분이 안 돼요.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고 정답인 것을 아는 거예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 지옥 기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용어야 유통하고 있지요. 예수, 삼위일체, 십자가, 언약, 유통되는 단어, 개념들이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하늘나라 날아다닌다고 하나 잡아서 십자가 괜찮네. 예수 괜찮네. 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쇼핑하듯이 쇼핑바구니에 담아서 내밀면 그게 기준입니까? 발길로 차버려요.
인간세상은 언어의 세계에요. 괜찮은 언어 잡으면 괜찮은 인간된다고 그렇게들 협의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정치판에선 욕을 하더라도 교회에서 그렇게 안 하잖아요. 교회는 자칭 고상하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집단으로 여기니까. 그렇게 모으면 하나님이 받습니까? 어디서 쓰레기를 모아서, 천국이 쓰레기장인줄 아나. 이 쓰레기 왜 들고 왔는데? 하나님 보세요. 이게 예수, 언약, 십자가, 성령, 삼위일체 있잖아요. 네 자체가 쓰레기야. 왜 들고 왔느냐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출제하신 내용에 접촉이 된 사람은, I am nothing.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가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구분도 의미가 없다니까. 이건 선악적인 의미거든요. 주님께서는 선악으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은 생명나무다움을 훼손한 적이 없어요.
어떤 목사가 레위기를 이렇게 가르쳐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천사들이 불 칼 들고 지키는 것을 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불 칼 든 천사를 몇을 빼돌려서 길은 내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참 하나님께서 줏대도 없다. 가는 길 막을 때는 언제고 길을 트는 건 뭡니까?
저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이렇게 질문했을까? “목사님, 그 길이 차로 가도 돼요? 차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이 열려있습니까?” 세상에 천국 가는 길이 안 열려요. 지금까지 열린 적이 없어요. 참 어쩌면 좋아요. 모든 신학교 교수와 목사들이 최태민입니다. 무당이에요. 그저 사람을 좋게 하는 거예요. 너무 고생했으니 죽어서는 호화호식하려고. 죽어서라도 보상 받아야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지. 누구 마음대로 구원받아요. 어디서 예수라는 쓰레기 들고 와서 구원받는다고? 그것 쓰레기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주님, 제가 믿었습니다.”가 돼버리면 나의 있음이 계속 예수란 것에 붙어있어요. 내가 믿습니다. 내가 십자가 믿었습니다. 내가라는 쓰레기가 늘 붙어있어요. 쓰레기가 원한 그 예수, 그 십자가는 같은 쓰레기입니다. 전혀 살아있는 예수님도 십자가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지금 제 질문이 뭐였습니까? 왜 하나님은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에 내려올 때는 다섯 가지로 구분 짓느냐? 구분 지었다는 것은, 각각의 칸막이 안의 내용이기 때문에 구분 지은 거예요. 그럼 다르게 했으면 계속 다르게 가야지 왜 신약시대에서는 화목제물로 통합이 돼버리고, 통합될 때 취지가 무엇이며, 통합되더라도 화목제물 드린 사람만 들어온다고 하면 되는데 화목제물 드린 사람도 지옥 보내면 어떻게 돼요?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시내 산에서 제사 드리라 해놓고 누가 중간에 가로채는 분이 있지요. 구약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가로채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다섯 개로 나눠놓고 통합했다는 말은, 그 일을 주의 이름이 진행시켜서 마지막에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제물이고 그분이 제사장이 그분이 성전이 되셔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 이뤄놓고 그 다음에 다 이룬 효과로써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니까 성령 받은 사람만, 이미 끝났네. 심판 끝나버렸네. 일이 벌써 마무리됐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릴 때 그런 경우 있을 거예요. 옛날에 딸로 태어나면 공부보다도 집안일 많이 시키잖아요. 여자는 공부 할 필요 없어. 살림 배워서 남자 잘 만나면 팔자 고친다. 남자 잘 만날 조건을 갖춰줘야 되는데 무조건 시집 잘 가면 팔자 고친다는 거예요. 어쨌든 손님이 왔을 때 부엌 일 시키는 거예요. 집안에 잔치 같은 것이 있어서 올케들이 오게 되면 제일 꼬맹이 소녀는 도망칩니다. 불러서 일 시킬까봐. 다 끝나고 난 뒤에 와보면 손님은 다 가고 설거지하고 있어요. 그때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이미 일 끝났어. 소제 드린 적도 없고 번제 드린 적도 없고 화목제 드린 것도 없어요. 누가 내 대신 다 해버렸어요. 이제는 음식 남은 것 먹으면 돼요. 너는 한 것도 없으면서, 하는 타박 듣더라도 잡채든 뭐든 먹기만 하면 돼요. 고생은 자기 말고 올케들이 다 했겠지요.
이걸 하나님이 시작한 일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흡족해하셔요. 사람은 일체 못했다는 자체를 하나님은 유일한 기쁨으로 생각하고 하시는 거예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대상이에요.
언약의 대상은 이름이 바뀌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으로 바뀌어요. 아브람은 아버지란 뜻이에요. 동네 어르신, 땅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버지에 해당되지 않는 아버지 범주 바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약속의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출애굽기 4장에서 어떤 아버지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낳아요. 아들이 되지요.
하나님의 뜻은 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냐, 그리고 내 백성이 내 백성에 머물지 않고 아들이냐?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미 아브라함언약부터 이 땅에서 구체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돼있어요. 레위기 2장 14절,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여기 첫 이삭이죠. 어려우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해서 아들 됨을 성취시키는 그것을 주께선 회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들 말고 죄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겠는가? 등장하는 방법은 아들의 원형이 있어요. 아들의 원형은 선악적인 체제가 아닙니다. 생명나무 체제에요. 생명나무 체제는 선악체제와 완전히 칸막이 쳐져 있습니다. 선악체제에 있으면 어떤 자도 생명나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화염검 들고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목사처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는데 이제는 길을 냈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선악과가 절대로 생명나무에 침입해서도 안 되고 침입하면 천국이 안 돼요. 지옥이에요. 선악을 아는 자가 절대로 생명나무로 갈 수 없습니다. 그 입장은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어요. 천국 백성은 다른 말로 아들 되기는 아들과 아버지 관계에서 아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던지 하여튼 이 땅에 와서 아들 만들기를 시작해서 그것이 성취될 때 비로소 아들이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아들 되는 법은 없어요.
정말 누구든지 이걸 알아야 돼요. 이것 모르면 최태민한테 다 속아 넘어갑니다. 구원받고 싶지요? 예수 믿으세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를 누가 믿는데? 본인이 믿는다고 우기는데요. 그 예수가 열 명이면 열 다 달라요. 백 명이면 백 다 달라요. 세상에 그런 구원은 없어요.
성경을 안 봐서 그런 게 아니고 성경을 만 독을 해도 소용없어요. 소제 드리라. 여러분, 소재 드립시다. 드릴 때 어떻게 드립니까? 빻았으니까 죄악 된 마음을 다 빻아서 깨끗한 마음으로 드립시다. 깨끗한 마음으로 천국 간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 안 받아요. 생명나무 미안해서 율법 줬습니까? 너무 고생한다고. 내 조치가 너무 과했지? 무슨 장난도 아니고.
사람들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납득이 되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납득이 되었습니까? 왜 납득이 돼야 되는데. 당신이 뭔데 설득해야 돼. 설득이 안 되도록 해야지. 그래야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티가 날 것 아닙니까? 돈 갖다 바친다고 구원돼요? 돈은 최태민한테 다 갖다 바쳐놓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가졌어요. 그런데 그것 아들이 아니란 겁니다. 나란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둔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육에서 난 아들을 둔 적이 없어요. 육은 끝까지 생명나무에 가면 안 돼요. 왜? 선악체제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선악과 아는 인간, 그냥 인간은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은 인간 속에 주어진 말씀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때 거기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할 때 하나님의 백성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해요. 참된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지 인간과 거래하거나 흥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실수해야 되고 반드시 오류를 나타내야 돼요.
인간인 이상 이렇습니다. 출생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그 다음에 죽습니다. 인간이 태어났다. 갓난아이가 육체적으로 성장한다. 정신적으로 점점 어른이 되면서 성숙하지요. 그런데 죽습니다. 주님께서 이 전체를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운명으로 본다면, 주님께서는 번제나 제사를 통해서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요. 그러면 질문이 이렇게 돼요.
어차피 죽을 것을 왜 나는 성숙했다고 착각했지? 왜 자부했지? 어차피 하나님이 나를 죽일 건데 나는 이렇게 성화됐습니다. 그렇게 경건하다고 자부한 이유가 뭐지? 그 이유를 알려면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지요. 내가 어차피 죽을 것, 한평생 살고 있다고 무슨 마음으로 그런 착각을 했지, 라고 돌아보게 합니다. 20대, 30대에 야구방망이로 맞아가면서도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그런 착각이란 잘못을 왜 했지? 어차피 주께서 나를 죽일 걸. 그 다음에 더 나갑니다. 어차피 죽을 것을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착각을 왜 했지?
이게 바로 욥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럴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태중에서 죽이지 않고 왜 태어나서 고생하게 합니까? 욥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서를 출생, 성장, 성숙, 죽음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죽음부터 거꾸로 가게 하는 거예요. 이 죽음에 누가 합류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미리 당겨서 죽은 게 돼요. 그 죽음 속에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뛰어들게 되면 지상에서 아들 만들기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 죽음 입장에서 아들이 된 사람은, 출생부터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고 죽음부터 질문을 던져요. 십자가 진 내가 경건도, 성숙도 그것이 바로 죽어 마땅한 죄였군요. 내가 하루하루 살았다, 은혜라고 하지만 사실은 살고 싶은 죄의 발로군요. 죄의 고백에 불과하군요. 살고 싶어서 감사했던 것은 죽음을 잊어버린 착각, 이게 바로 죄군요. 그리고 나는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도 십자가 앞에서 어차피 죽을 입장에서는 해선 안 될 생각이었군요. 주여, 이런 인간 선악과체제로 죽여주신 것,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원칙을 고수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그 원칙을 변함없이 저에게 퍼부어주신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저는 찬송합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