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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2장20절(결정이란 부정이다)161101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2장20절(결정이란 부정이다)161101b-이 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언서에 보면, 이미 이스라엘 유대 나라가 멸망당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건, 언약이, 언약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이, “구체적인 역사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느냐?” 당연히 있어야 되겠죠.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그 역사가 뭐냐?” 할 때에 그게 문제에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 그 증거가, 증거를 우리가 보고 싶어 할 때에, 제가 아까 주의 했지요? 우리가 관광이나 관람하면 안 된다고요. 하나님의 그 증거를 “내가 보고자하나이다.” 할 때, 본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돼버리잖아요. 나는 보는 자리를 따로 마련해 있고, 따로 이거는 손도 못되는 나의 관찰의 자리가 따로 있고, 내가 눈으로 봐가지고 “으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귀찮게 하는 거 맞네. 그래서 나는 믿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거는 관찰하는 거잖아요. ‘관찰’ 관찰은 무엇의 원리냐 하면 과학의 원리에요. 과학의 원리는 새로운 기구를 계속 만들어요. ‘새로운 기구’ 기구를 만들 때 마다 그 관점이 바뀌어야, 아까 관점이 바뀐다 했지요. 뭐냐 하면 기구가 바뀌면 관점이 바뀌어요.

한 가지 예를 들게 되면 열네 살, 열다섯 살 때 사춘기, 사춘기 뭐 고등학생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여자 친구가 있는데, 자기는 여자 친구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학생 마음속에는 어떤 관점이 자리하게 되면, “하나님이여, 나에게 여자 친구를 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저는 일체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자꾸 그 관점의 범위가, 어른들 보기에는 어때요? 굉장히 좁지요? 굉장히 좁은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점점 나이 들면 어떻게 되는가?

점점 더 그 관점이, 욕망이 더 확산되지요. 그게 아까 질문하신 ‘상징계’입니다. 내가 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상상만, 그 상징만, 상상으로 내 것으로 만들고, 계속 그것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다음에, 그 다음의 것 도전하고, 또 넓히고, 욕망이라는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넓혀 가는데, 그 넓혀 가는 그 원 동기는 뭐냐 하면은, 우리는 악마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우리가 요구하게 되죠.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곧 신이다.”는 것 “날 건드리지 마라.” 인간으로서의 가장 솔직한, 그 가훈 또 액자 ‘날 건드리지 마’ 아무리 예수 믿고 뭐, 몇 년을 믿었고, 목사, 장로 되도 가장 깊숙한 곳에 이것을 갖고 있어요. ‘날 건드리지 마라.’ 그래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이거와 다 대비가 됩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이겁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네가 뭔데?” 그것을 더, 한 자로 줄이면 “뭐?” “뭐 어쩌라고?” “누가 너를 만들어놨느냐?” 이 말이에요. “누굴 위해서 널 만들었냐?” 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 놨는데 그들은 그걸 모르고, 나는 자족적으로 자기가 되고 싶은 내가 되고 싶은데, 그것은 아무리 상상해 봐도, 계속 이게 흘러가니까 표류하듯이, 그냥 떠도는, 흘러가는 물이 계속 놀듯이,

기름처럼 계속 오늘도 이 욕망, 저 욕망, 저 게임, 저 자극, 저 감각,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서 계속 해보는 거. 계속해서. 이제는 축구하다가 뭐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돈 벌으라고 할지. 꽃꽂이 한다고 하다가, 또, 개 키운다고 개도 잡고, 뭘 해야, 계속해서 뭘 할 것이에요. 계속 뭘 할거 에요. 손주 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뭐 하여튼 뭘 해야 돼. 해야 돼.

그러니 그 역사의 증거가 뭐냐? 역사의 확실한 그 증거가 뭐냐? 그 증거의, 증거가 뭐냐. “제가 보고 믿겠나이다.” 할 때 그 사람을, 그 증거 안에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 언약을 완성시키는 증거다.” 왜 그래야 되냐 하면, 그래야 우리가 언제 내 자신을 알겠습니까?

바깥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탐구하려고 독자적인 나의 관람의 자리를 전망대를 만드는 이 못된 성품을 주님께서 좀, 직접 딱 집어가지고, 죄 속에 갇힌 많은 자들이 갇힌 곳에 집어 넣어줄 때, 그때가 바로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구원의 자리에요. 거기가 천국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다른 자리는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끼리는 구원 받는다고 이야기 했던 그 역사적인 해석에서, 드디어 명절날 이방인들이 누굴 찾아옵니까?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어요. 20절입니다. “헬라인 몇이 찾아오는지라” “누굴 교섭하고 누굴 면담하게 되면 예수님과 나중에 최종적으로 독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찾아 온 거예요.

그렇게 찾아왔을 때, “이때다! 이때 내가 죽을 때다.” 이렇게 된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제야 내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나중에, 이해를 못하지만 요한복음 20장에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니까, 예수님 다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돌아가시고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잖아요?

주시게 되면 뭐가 되냐 하면, ‘죽은 자만이 살아 돌아오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냥 오는 거 아니고 죽은 자만이 살아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죽은 자만이. 죽은 자만이 살아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죽음이 뭐냐가 살아 돌아온 사람 때문에 비로소 파악이 돼요. 유대인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언약대로 하면 역사, 언약이 전부 우리 유대인들에,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이 언약의 증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을 주셔서 우리를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게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구분이 생겼느냐 하면, 이스라엘 되는 사람과 이방인이 구분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성경 구약 전체를 문자적으로 아무리 봐도,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개 같은 이방인들은 저주 받는다.”

딱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시편 봐도 그렇고,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가 구원 받은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놓친 게 있어요. 뭐를 놓쳤냐? 그렇게 구원 받은 그들이 성경 말씀을, 그렇게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성경 말씀을 전부 다, 선지자의 하는 말이 납득이 돼야 하는데, 선지자는, 특히 문서 선지자들은 왜 자신들이 그 당시에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해버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 나라는 망해야 된다.”

그리고 “나는 천상회의에 참석했다. 너는 회의에 참석했어? 회의 참석했어?” 이렇게 한 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이스라엘 기존의 주류 세력들이 그 선지자를 그냥 뒀겠습니까? 죽여 버렸겠습니까? 죽여 버렸죠. 예레미야 같은 것은 구덩이에 집어넣은 거죠. 이사야 같은 경우는 전승에 의하면 톱으로 켰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은 진짜로 죽었어요. 실제로도 많이 죽었어요. 왜 죽였을까요? 자기의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를 모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 교회에 똑같이 일어납니다. “이, 우리 교회는 역사가 80년 교회인데, 80년 전에 장로님 두 분이 기도 가운데 응답 받았다.” 이거는 뭐 최순실도 아니고 박근혜도 아니고 또 응답받았다는 거예요.

주님의 모든 응답은 죽으라고 주는 응답이에요. 이렇게 하면 산다가 아니라, 어차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이 땅에는 저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것 해보고, “이 땅에서 한번 출세해볼까? 성공해볼까?” 그거 하라고 준 세상이 아니라니깐요! 손 털고 빠져나오라고 준 세상이란 말이죠.

그런데 모든 그 점괘를, 이젠 아예 점괘라고 해야, 점괘. 응답이라 하지 말고. 그 모든 점괘가 내가 요구하는 대로 점괘가 나왔다는 말은, 결국 그 사람은 누구 아바타에요? 악마의, 마귀의 아바타가 된 거에요. 기도 응답은 딱 하나로 확정 되었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지난 낮 설교에, 믿음의 내용이 뭐라고 했다? 하나밖에 없다.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 밖에 없다 했지요. 그게 믿음의 내용이에요. 그게 믿음의 내용이라면 그 믿음 아닌 게 뭡니까? 마태복음 6장에 나오죠. 믿음 아닌 구제, 믿음 아닌 기도, 믿음이 아닌 금식에 대해서 주님께서 잘 이야기 했지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경우에만 믿음의 구제에요.

그런데 이 땅의 모든 구제, 연말 되면 많이 하는 거 있잖아요. 뭐 불우이웃 돕기 하고 뭐 빨간 거, 뭐 이렇게 딸기인지, 체리인지 붙여놓고 모금운동 하는 거, 단체에서 하지요. 옛날 우리할 때 고등학교 때는, 크리스마스 씰을 사가지고, 반드시 결핵 하는 사람들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그렇게 했어요. 그거 구제 아닙니다.

그거 구제 아니에요. 그것은 기존의 질서의 연속성이에요. “여러분, 크리스마스 씰을 사고 이거 구제하고 또 헌혈운동 해서 다 죽읍시다.” 이렇게 하지 않아요. “이거 해서 삽시다.” 이렇게 나오죠. 지금 아이들이 적게 낳아져서, 아이들이 헌혈할 10대와 20대가 점점 줄어들어서 지금 무려 작년보다 15% 줄어들었다고 하죠.

어른들은 완전히 10대, 20대 아이들이 헌혈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숫자가 적어지니까 걱정한다는 거예요. 뭐 주께서 그렇게 해서 뭐 말라면 마는 거지요 뭐. 그리고 기도는, 믿음 없는 기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중언부언. 달라고 하는 기도가 믿음 없는 기도에요. 그럼 진짜 믿음은 뭡니까? 우리가 기도하기 이전에 주께서 이미 주실 것을 알고 하는 기도죠.

그러면 그것을 구원에다가 대입시켜보세요. 우리의 구원은 구원해달라고 구해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미리 다 구원이 정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아는 사람이에요. 또 제가 이렇게 하면 “저는 모르는데요?” 그것을 나한테 물어보십니까? “제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뭘 시도해도, 그거는 결국 백날 시도해봤자, 그것을 감추는 짓밖에 안돼요.

나는 구원이라 했을 때 현재 모르겠다를 뭔가 “챙” 하고 나오면 아는 게 돼요? 마찬가지에요. 세 번째, 금식 할 때는 어떻게 금식하라고 했습니까? 믿음으로 금식하라는 것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남들한테, “금식했습니까? 아니면 다이어트, 뭔 보약을 잡수셨습니까?” 전혀 표시가 안 나는 금식. 이 세 번째를 할 때는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데가 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 할 거 같으면, 이미 천국의 상은 없다고 전제를 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뭐하고 대결하고 싸우고 있습니까? “이 세상 속엔 네가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천국, 내가 메시야인지, 천국이 온지를 관찰할 입장이 못 된다. 너는 같은 한 통속이다. 너는 결국은 한통속이다.”

심지어 열두제자도 한통속인데, 그러면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한통속이 아닌, 그 한통속 바깥에서 누가 찾아왔어요? 이방인 둘이? 이방이 몇이? 이방인 몇이 주님을 찾아왔으니까! 이제야 언약의 완성이 이 땅에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드디어 확실하게 보여줄 그 때가 된 거에요. 그 때가 뭐냐? 죽음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죽음이에요. 죽음.

이 죽음인데, 이 죽음의 아방가르드. 선봉대, 선봉자는 누구냐? 예수님이 죽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무슨 관계를 유발하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너희들이 생각했던 아버지 관계, 아들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할 때, 종자를 생각하거든요. ‘아버지가 계시면 아들이 계시겠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주님이 계시고, 주 계시고’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관계가 아니고, ‘존재의 관계’가 아니고 ‘기능적 관계’에요. “나는 너를 버리고, 너는 나에게 버림을 받아서” 그냥 버림 받은 것도 아니고 저주 받아야 돼요. 저주 받아야 돼요. 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정리해 봅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떤 관계다? 여기서 어떤 관계다? 저주의 관계다.

저주의 관계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면은 창세기 2장에 가보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이, 그 죽으리라는 죽음의 의미는 이렇게 마지막, 예수님이 오신 마지막이거든요. 마지막까지 ‘유보’됐다가 마지막 때, 그 죽음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죽음의 의미. 왜 죽음의 의미냐? 최초의 언약이, 최초의 약속이, 계명이, 그거거든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계명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어요. 앞으로 나오는 모든 율법과 계명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안에 뭐가 들어있냐? 생명나무의 의미까지, 취지까지, 본질까지 들어있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것은 그 전에는 몰랐지요. 따먹어보니깐 못 따먹는지 알았지. 따먹기 전에는 따로 따로 되어 있는 나무인줄 알았지요.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면서 그 죽음을 통해서 드디어 마귀의 본색까지, 뱀의 후손까지 드디어 점차 드러나면서 아담이 뭐냐?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니라.

드디어 인간은 인간자체로서는 아무리 훑어봐도, 아무리 CT 촬영을 해봐도 인간은 몰라요. 현대 정신 분석학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을 가지고 아무리 풀어내고, 쪼개고 해봐도 그거는 ‘입자’ 입자의 덩어리 쿼크 입자의 덩어리에 불과 한 거예요.

쪼개고, 쪼개고 하면 나중에 뭐가 남으면 ‘단백질’ 쪼개고 ‘아미노산’ 되겠죠. 아미노산 쪼개면 거기에 여러 가지 ‘탄수화물’이 나와요. 유기체니까. 탄수화물. 탄소로 돼서 구성된 화물 나오잖아요. 그거 쪼개면 뭡니까? 탄소, 수소, 인, 그렇게 희석 되죠. 그리고 ‘분자’ 쪼개면 ‘원자’ 되고 그 원자 쪼개면 그 ‘원자핵’과 ‘전자’가 나오겠죠. 그거 쪼개면 또 나오겠죠?

그 마지막에 나오는 에너지장이 돼요. ‘에너지장’ 에너지필드가 나와요. 에너지필드를 더 분석해 보면, ‘힉스장’ 힉스필드, 아무것도 없는데서 뭐가 나왔다는, 힉스 필드, 힉스 장이 요동치면 뭐가 나와요. 그것은 유럽에서 만든 입자 가속기를 정리해서 2012년도 노벨 물리학상 거기서 받았어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질량이 처음으로 나온 다는 거예요. 질량은 입자, 어떤 입자가 갖고 있는 게 질량이 아니고 그 입자 바깥에 흐르는 힘에 의해서 저항이 곧 그의 힉스장이 된다는 것을 거기서 이야기 한 겁니다. 그것을 알려면 11월 8일 날 제가 올리게 될 교재. 이번에 교재에 보면 앞에 초반에 그게 나와요. ‘힉스장’ 그게 나옵니다.

‘진공에 주목하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주욱 나와요. 이번에 수련회 교재에. 교재하면서 이참에 과학도 좀 알고, 물리학의 기초가 돼야 그다음에 화학. 화학도 돼야 그다음에 생물. 생물도 돼야 인간으로 번집니다. 그 입자에서 인간이 나오는 방법은 비개인적 인칭 사건으로 올라와요. ‘비개인적 인칭사건’ 개인이 아니고 물컹한 죽 같은데 거기서 인칭이라는 게 나와요 인칭이.

그게 창세기 2장입니다. “난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내면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인칭대명사 it에서 you가 나와요(it -> you). 그것에서 you가 나오죠. 그런데 그것은 뭐냐 하면 흙에서 만든, 흙에서 만든 you지요. 산영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뭐냐? 표상이라고 했어요. 표상. 상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아버지 엄마는 맨날 “우리 가문의 영광을 빛내라. 네가 어떤 집안인데?” 맨날 이것만 따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집안 때문에 살았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어떤 집안 때문에 사는 겁니까?” 요새 삶은 집안도 없어요. 재미도 없고, 지 마음대로 사는 거지만. 내가 누구냐를 도대체 이야기해주는, 심지어 교회 가도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성령이 임해야 알아요. 내가 누군지는.

예수님.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를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관계는 먼저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에요. 여기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어요. 그럼 누가 따먹었습니까? 아담이 따먹었지요. 이브가 따먹었지요. 이, 따먹은 자가 누구냐 하면 오실자의 표상이 따먹었잖아요. 결국은 누가 따먹게 하신 거예요?

아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먹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거예요. 누구까지 동원시켜서? 뱀까지 동원시켜서, 사탄까지 동원시켜서, 이것이 무슨 차원이냐 하면은, 이게 아까, 결정은 뭐라고 했습니까? ‘결정은 부정이다.’ 내가 결정한 것은 남들은 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 네 생각이고.” 하지만 본인은 결정 내렸어. 남들은 동의 안돼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고, 내가 결정한 것은 동의 구하지 말로 나는 나대로 사는 거예요 그냥. 살다보니 그렇죠? 각자 너무 건드리지 않고 사는 거지요. 기본이 뭐냐? 날 먼저 건드리지 말라는 거니까. 오늘 좋은 거 배웠습니다. 날 건드리지 마.

너무 많이 알든지, 너무 많이 건드리면 안 돼. 적당히 알고, 적당히 건드리는데, 이제는 아기 까지 낳았으니까, 관심사가 아기에게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 직접 다툴 일은 없어요. 성질나면 “너 아빠 같이 닮지 마라.” 이러면 되니까.

아니요. ‘아니요’의 세계가 역사 세계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면 ‘예’의 세계에요. 모든 게 물컹한 죽 같이 구분되지 않는 ‘예’의 세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예’가 되기 위해서 ‘아니요’가 먼저 있어야 돼요.

아니요. 각 각 자기주장만 있는 아니요들의 그 부딪힘과 마찰, 충돌. 거기에서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먼저 선악과를 심어놓고, 이제 선악과 심은 이유가 나타나요. 예수님을 위해서 선악과를 심어 놓은 거예요. 심어놓고, 그것을 심어놓은 후에 죽음이 나오고, 그 죽음은, 죄 원천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예수님이 뭘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죠. 그게 바로 죽음의 본래고, 본래 뜻이에요.

무엇 때문에 죽어 예수님 저주 받았죠? 죄 때문에. 죄 때문에 저주받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부활되시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홀로 이루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그 기능. 십자가 지시고 부활되는 그 기능을 완수하심으로서 전 세계 모든 피조세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예정 된 겁니다. 창세전부터 예정 된 거예요.

모든 것이 십자가를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인생 살다보면 매일같이 우리는 “아이고, 또 실수했어, 또 실패했어. 왜 기억이 안나. 왜 자꾸 나에게 기억이 안나.” 하고 자꾸 자기 탓을 하지만, 정상입니다. 네. 처음부터 우리는 ‘예’가 아니고 ‘아니요’로의 파편들, 모자이크 조각조각들로 할 수밖에 없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자, 그거 하기 전에 여기에 민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26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26절,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7)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두 가지의 코스를 다 이야기하죠. 저주 받는 곳과 그 다음에 저주가 없는 아버지의 뜻을 이룸은 없다는 것. 저주 받는 것과 즐거운 부활되는 것 이야기 다하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이것이 내가 십자가에 죽는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이며, 이 관계를 그대로 누구한테 대입 시키냐 하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이 세상에 택한 자들이 따로 있어요.

그들에게만 이 관계를 그냥 성령으로 대입을 해버려요. 여기 미리한번 보면, 요한복음 17장에 17장에 보면 제가 읽어 볼게요. 자꾸 읽어보시라고 하니 숙제 내는 것 같으니 미안해서. 17장9절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9)

돼있죠. 여기에서 세상에 있는 범주와 세상 가운데 ‘저희’라는 범주가 같아요? 달라요? 다르지요. 그런데 저희는 어디 안에 있습니까? 지금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서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습니까? 못나옵니까? 못 나와요. 왜 못나오는가? 죄 값을 치러야 나오는데, 자기가 무슨 수로 죄 값을 치룹니까? SF영화에 보세요. SF영화는 죄 값을 치루고 나오지 않아요. 치유와 용기로 나와요.

마법의 성 노래의 가사 한번 보세요. 가사 내용이 있죠.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나오지요. “죄를 씻을 수 없어서” 안 나오지요? 그런데 종교라는 것은, 이 마귀의 종교는 이게 교묘해요. 마귀의 종교는 뭐가 있느냐? 희생함으로 구원된다는 게 반드시 들어가 있습니다. 마귀의 종교. 구원되기 위해서 내가 자진해서 매를 맞아야 되는 게 여기서 나와요.

모든 민족들의 신화에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굉장히 거룩해 보입니다. 네, “내 탓이요”도 나오지요. 천주교라는 그쪽에서 하는. 그래,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선 희생될 자를 주셨다는 거예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주’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했지, 인간을 구원하기 아닌데, 그럼 구원된 자는 뭐냐 하면은, 인간이라 하지 않고 아까 읽었던 요한복음 14장에서 이것을 뭐라 하느냐 “저희, 저희” 이 저희는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특정 사람을 말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을 말합니다. ‘저희가’ 그래서 이 ‘저희’가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저희’지 나부터 출발하는 ‘저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짜들을 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건 위조지폐에요. 정교하게 자기가 그려가지고, 입장은 그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안받아줍니다. 극장에서 안받아주지요. 자기가 정교하게 돈 그리면 그 거 돈 됩니까? 아니지요.

한국일보에서 위조가 되지요 위조. 그런데 인간은 위조밖에 할 게 없어요.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위조를 합니까? 위조를 안 합니까? 위조를 안 하지요. 그래서 막 살아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막 살아요. 왜? 더 이상 자기를 위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그런 짓 안합니다.

아까 동영상 할 때, 첫 번째 강의가 제목이 뭐였죠? ‘탐내지 말라’ 였죠. 탐내지 말라 할 때, 탐내지 말라의 의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탐내라고 이야기 했죠. 그게 탐내란 이야기에요 “네 주제 파악을 알라는 거예요.” 그게 네가 탐 안낼 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만약에 탐을 안내버리면 뭐가 안 된다 했습니까? 애굽에서 구원이 안돼요.

왜, 그 당시에는 전체가 애굽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되려면 다 같이 애굽사람 이어야 되고, 그럴 때 내가 탐 안냄으로써 구원 된 게 아니고, 다른 제3의 요소가 개입되는데, 그게 뭐냐면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들어 간 거죠. 희생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탐을 낼 수 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이제는 구원 받은 상태에서 소급해서 다시 그것을,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왜 있는지,

왜 이 땅에, 왜 더러운 세상에 같이, 같이 더러워서 먹고 마시는지, 이유를 아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가짜부터 먼저 이야기 합니다. 가짜는 뭐냐 하면요. 가짜들은 두 가지의 심리적인 현상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마조희즘’ 하나는 ‘사디즘’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사디즘. 이 말을 설명하는데 복잡할 것이, 간단하게 설명하겠어요.

사디즘. 전두환, 김정은, 최순실. 패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인생의 즐거움이 없는 거예요. 조패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겁니다. 마조히즘은 마조히즘. 얻어맞는데서, 얻어맞는데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 대표적인 것이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참아야하느니라 또는 은장도. 참아야하느니라, 참아야하느니라, 참아야하느니라.

고택관리 하는 11대 증손 분이, 열녀문. 이런 거, 네, 열녀문. 마조히즘, “보랏빛처럼~” 불렀던 강수지. 강수지 타입. 은하철도 999의 메텔. 그런 타입. 사디즘은 내가 차마 말을 못하겠어요. 두 가지 성향을 보이는데, 두 가지 다 성향을 보인다는 게 이것을 프로이드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면은, 사디즘을 가지고 ‘에로스’라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생존 본능’이라 했고 이거 마조히즘을 가지고 뭐라 했느냐 하면 이걸 ‘죽은 본능’이다. 다나토스의 죽은 본능. 인간의 두 가지의, 두 가지 본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두 가지 본능을. 이게 왜 두 가지 본능이냐 하면은, 세상이 잘될 때, 아까 처음에 관점 이야기 했지요. 내 관점이 잘되면 막 살고 싶어요. 그런데 내 관점이 뭔가 막히고 부딪힐 때는 그만 살고 싶어요. 죽고 싶어.

이걸 프로이드는 뭐라 하면은, 죽는다는 것이 본래적인 거라는 거예요. 무(無) 죽는다는 것이 내가 없어지지요. 내가 없어지니까 ‘죽’처럼 멀건 어떤 죽처럼 내가 없으니까 뭐도 없어져요? 내 걱정 근심도 없어지겠죠. 그래서 항상 죽음의 본능을 깔고, 한 사업 한번 벌리다가 “안 되면 죽으면 되지 뭐.” 올케, 처형 돈 다 빌려가지고 아버지 재산까지 다~ 담보 잡혀가지고,

“아버님, 이번에 아들인데, 내 아들 대학도 안보내주고, 고등학교 보내줬으니까 대가로 돈 내놓으세요.” 하여튼 고등학교 보내면 돈 내놓으래. “형은 대학 보내주고, 난 안 보냈으니 돈 내놓으세요.” 돈 받아서, 그 돈 가지고 “친구가 좋은 아이템이 있다고 하는데 직장 생활해서 푼돈도 안 되니까, 내 인생, 내가 대박 한번 일으키겠습니다. 인생은 뭡니까? 인생은 한방 부르스 인데, 한방만 터뜨리면 호강하는데, 이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고, 또는 월계수 양복점 내용처럼, 가수한다고 돈 날리고, 너무 이야기 하는 건 아니지만, 돈 해서 사기당해가지고, 사기당해가지고 그것을 한다고 하는 그거나, 모든 드라마, 인생이란 전부다 다 한방이에요. 한방. 에로스적이죠. 한방 해보고 안 되면 죽으면 되잖아. 그런데 그 죽는 시늉이 뭐냐? 이게 포차. ‘포장마차’ 포차에 가서 술 먹는 거예요.

술 먹고, 여자 친구가 데리고 오고 그런 거 깩! 토하면서 깩 깩 거리면서 가는 거. 모든 인생이 잘되면 골프치고, 못 되면 포차가고, 포장마차 가서 술 먹고. 그것의 반복이에요. 그것의 반복. 그것의 반복. 과장 되고 월급 받아서, 이게 자기 집안의 목돈 나가니까, 자기 근무 시간에 주식하다가, 주식 다 날리고, 부장은 주식 하나 안하나 감시하고.

남의 회사가 아니나 싶어, 혹시나 해서 이 회사도 주식해서 월급 말고 해 입는, 감시하고. 모든 게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반짝 빛나고자 하는, 그 에로스 욕망. 욕망에 대해서, 욕망이 그렇게 물결치는 죽음이에요. 모든 것이 죽음인데, 죽음의 세계에서, 무의 세계죠. 무의 세계에서 반짝, 그 고기 있잖아요. 파닥파닥 튀어나오는 거. 중국사람 또 어선, 고기가 파닥파닥 이거, 이거를 건지기 위해서, 이거를 건져서 서울 가는 거예요.

건질 때 잘 안되잖아요. 안될 때는 뭐합니까? 교회 가서 기도하면 되지요. 교회 가서 “이거, 이거 조금만 도와주시면 십일조 내겠습니다. 십일조 내겠습니다.” 갈라먹기 하겠다는 거죠. “40배 60은 33. 30배 60은 3. 3배를 십일조 드릴 수 있습니다.” 나누기 30과 나누기 10하면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거 올리는 거. 그러면 기복신앙은 뭡니까 이거 거는 거예요.

이것을 잡고 싶은데, 그냥 노골적으로 하니까, 너무 티 나잖아요. 욕심이. 순교라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이걸 잡으려 하는 거. 순교를 근거로 해서. 아낌없이, 아낌없이 바치리라. 해놓고, 이거, 이거 진짜 노리는 것은 이걸 노리는 거예요 다. 한 대박. 대박을 노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겠다 이거 에로스입니다.

아까 처음의 강의, 첫 번 강의 했지요. 잘 갖고 있던 본질을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 아니고, 너희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에 나타났다는 말은, 개 같은 이방인들이 왔다는 것은, 비로소 십자가, 인자의 죽음의 의미가, 의의가, 너희들 땅, 언약의 땅, 이스라엘의 땅에서 제대로 보일 때가 되었다. 해서 한 알의 밀알이 죽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는 일은 뭐냐? 죽이는 일이죠. 너희의 아비는 마귀니라. 그 역할 하면 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너희가 할 일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제자들은 도망치는 일을 하면 되고, 그 일을 이방인에게 맡기지 않고, 유대인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보다 확실하게 다가와야 돼요. 이게.

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온 게 아니고, 우리 말고 우리가 표상이고 우리가 표상으로 삼은 어떤 실체 되시는 분을, 우리 안에서 구원되게 하는 바탕을 형성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마련 된 겁니다. 그래서 27절은 “민망하니” 자, 그 다음에 25절 한번 볼게요.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5)

이게 뭐를 의미하냐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저주 받고, 저주 받았기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부활로 이끌지요. 그 관계가, 그 관계가 예수님께 일어났던 관계라면 그것을 이 땅에서 반복을 시켜버립니다. 반복을 시킬 때마다, 한 명씩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됩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들이 창조 되면서, 그 피조물 안에 있는 그들이 살게 되는 원리가 뭐냐 하면은,

자기 생명을 미워했다는 원리, 원칙이 그 안에 내장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는 “내가 나를, 미움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하려고 하면 “나는 밉다. 나는 밉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왔다는 말은, 십자가의 능력이 온 거에요.

“내가 밉다.” 백날 해봐야,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백날 해봐야 그건 부흥사밖에 안되고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그건 부흥사밖에 안되고, 나는 내가, 그거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이 ‘교체’가 되어야 돼요. 부족한 것이 근거가 돼서 구원받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한 알의 밀알인 예수님께로 구원 받아야지, 내가, 부족한 내가, 부족하다는 그것 때문에, 구원받으면 안 되잖아요.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 했는데, 부족하다고 해서 건져낸 생명을 내가 어떻게 해요. 내가 미워하려면 모순되잖아요. 실컷 부인해가지고, 그 귀한 영생을 얻고, 또 미워해야 됩니까? 그거 안 미워져요 영생은. 결국 거짓말인 셈이 되지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옵니다. 26절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6)

지금 이방인들이, 일단은 유대인이 되어야 되고, 유대인이 되고 난 뒤에, 그러면 아버지가 있는 곳에 내가 있게 된다. 이렇게 순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들이 도로 유대인이 된다는 말은, 유대인은 뭐, 안식일 받고, 세례를 받았고, 그런 말이 아니고, 너희 이방인들, 너희들이 구원될 자리는, 유대인들이 죄를 지었던, 마귀 짓을 했던, 그 자리가 바로, 너희들 자리인 것을, 이방인 너희들도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님을 살해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한테는 어떻게 하느냐? 이미 구원을 시켜놓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 됐는가를, 우리에게 평생을, 계속 녹록하게, 그것을 느끼도록 하는, 남은 인생인데, 우리를 계속 이끌어 갈 거예요. 계속해서 평생 동안.

“아! 이래서 내가 바리새인이고, 이래서 내가 못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늘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깐, 뭐 남들이 아이고, 칭찬하고, 격려해도, 우리는 그런 유혹에 넘어갈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잘해서 살고 있는 게 아니고, 못했다는 것을, 못했음을, 내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라는 조건하에 살려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럼, 대부분 월급은 다 받고, 우리가 할 일은, 못한 놈, 못난 놈. 그것만 하면 되는 거지요. 이런 취직이 어딨어? 이런 직장이 어딨어? 희한한 직장이에요. “월급 줄 테니까, 개판 쳐라!” “아멘!” 이렇게 살아가는 것. 최고의 직장이지요. 최고의 직장. 그렇게 될 때,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절’을 우리를 통해서 계속 세상에 알릴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없다.” 자 그다음에 봅시다. 28절 봅시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게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앞에 글자 한 자를 이해해야 돼요 글자 한자가 뭐냐 하면은 ‘때’입니다. 때. 강의하면서 강의 제목을 뭐라 할까? 지금 계속 고심 중인데, 때는 많이 했고, 그거 말고요. 좀 멋있는 거요.

여기에, 앞에 ‘때’라는 게 있지요. 어디에 나옵니까? 27절에 나오죠. 이, ‘때’가 시간을 쪼개버립니다. 이것은 시간에서는요. 완료와 미완료가 성립되어 있어요. 원래 히브리어 자체는 동사가 두 개밖에 없어요. 완료되었음. 미완료되었음. 그거 밖에 없어요.

히브리어 자체가 완료, 미완료 밖에 없다는 말은, 비동사도 마찬가지고 그것밖에 없다는 말은, 그 ‘가운데’ 완료, 미완료를 가르는 그 ‘중간’이, 중간이 찝어낼 수 없는 정도로 그냥 간격이 선이죠 선. 선은 따로 면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구분하는 것뿐이죠.

항상 그, 어떤, 어떤 현재라 하는 것은요. 항상 ‘들레즈’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현재라 하는 것은, ‘들레즈’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현재는 없고, 올라가면 이 과거와 미래로 항상 이렇게 주욱 내려가는 거예요. 바짝 해가지고 올라서다 싶으면 곧장 과거로 가고, 또 미래도, ‘예기’ ‘예기’라 하는데, 미리 기대하게 되어 있고, 현존은 항상 손에 쥘 수 없는, 이게 바로 인간세계에서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뭐냐 하면은,

이 전체가 ‘때’ 안에 들어있는 내용 때문에, 필히,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완료와 미완료로. 그렇다면 영화롭게 되었고. 완료지요?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미완료에요. 이 말은 기다리면 구원 받는다는 게 아니라, 이미 시간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무엇으로 되는가 하면, 관계로 구원이에요 관계로 구원이에요. 관계로.

아까 제목 방금 정해졌습니다. 제목이 이겁니다. ‘결정은 부정이다.’ 할 수 없지요. 제목이 갈수록, 제목은 ‘결정은 부정이다.’ 궁금해? 궁금하면 봐! 결정은 곧 내가하는 결정은 다 죄다 이 말입니다. 아까 여기에, 관계. 관계로 구원받은, 관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구원 받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모든 증거는 뭐냐 하면은,

이미 관계가 돼있고. 완료, 관계가 정립되었기 때문에, “이게 완료고, 이게 미완료야.”를 보여주는 세상. 그러기에 이 세상은 완료된 것도 보여주고, 미완료도 보여주고 다 보여 주는 거예요. 미완료만 있는 게 아니고 완료, 미완료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속에 이것을 뒤섞어 버려요. 섞어버리면 32절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12:32-33)

이 문장 자체가 이해가 잘 안되지요. 왜냐하면 보통 사람이 죽으면, 죽으면 홀로 죽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끼어들 그게 없어요. 보통 인간의 죽음은 혼자 죽지, 나 죽는다고 더불어 죽는 것은, ‘순장’ 같은, 옛날에 임금 죽으면, 있던 종, 여자, 부인하고 전부 다 집어넣고, 따라 죽으라 하는 겁니다. 옛날에 참 잔인하지요. 옛날엔 그 이유가 있어요.

왕은 사람이 아니고, ‘지위’고 ‘자리’에요. 만약에 왕이 떠났는데 부인이 있으면, 나라가 질서가, 나라가 꼴이 안돼요. 대비가 생기고 왕후가 살아있으면 안돼요. 다 죽이고 새로운 질서,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같이 죽어야 돼요. 그래서 왕하고 결혼한다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최순실 꼴 나요. 좋아하면 안돼요. 사람들은 질서를 원해요.

‘연속된 질서’ 아까 첫 번째 강의 했듯이, 연속된 질서를 원하지 하늘나라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목사가 원하는 것은, 이 교회가 안 무너지는 거 원하지, 하늘나라를 원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어요. 그게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교회 간다고 하늘나라 가는 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거기는 일종의 유대인, 사탄의 세계이기 때문에, 거기 가서 “이게 사탄이구나. 알면 돼요.”

“영화롭게 하시리라” 해놨어요. 그렇다면, 이 영화롭게 했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의 그게 이 땅의 증명이라면, 뭐가 영화로운지, 뭐가 영화롭게 되는 것인지 그 다음부터 시작해야 될 거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데리고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거예요. 왜? 그들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할 자기의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만 ‘주’가 되시는데, 그 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피조물들도 같이 생존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죽을 때 혼자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구원 받을 자를, 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거예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로마서 6장, “함께 연합해서 나와 죽는 자는 살리라” 있잖아요. 십자가에서, 십자가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영광을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사람도, 그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건져 내는 거예요.

갑자기 여기서 오늘 강의 제목을 바꿀 마음이 생겼네요. 그건 뭐냐 하면은, 국수 만들 때 처음에, 오늘 제목을 ‘다시물’로 할까? 국수, 멸치를 넣잖아요, 냄비에다가 국수 먹어야 되면, 이렇게 빨리 끓이잖아요. 한 7분내지 8분하고 난 뒤에, 국수 끓어본 사람은 알아요. 7분 내지 8분하고 난 뒤에, 여기 건더기를 건져내게 되면, 맛있는 아미노산이 풍부한 다시물이 되지요. 이 ‘다시물’ 성도입니다.

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 이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신 예수님을 주라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주님의 일을 하실 때,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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