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2장20절(결정이란 부정이다)161101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2장20절(결정이란 부정이다)161101a-이 근호 목사
(요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자, 요한복음 이번에는 12장 20절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사로가 살아나온 뒤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살해하고자 생각했던, 예수님을 살해하고자 생각한 많은 유대 지도자들이 계획이 차질이 났다 하고 걱정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예수님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하고 나사로까지 제거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최순실만 죽으면 되는데 박근혜 까지 같이 죽여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 한 겁니다. 왜 죽여야 될까요? 자, 여기서 어려운 게, 왜 예수님과 그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났던 나사로를 왜 죽여야 되는가요? 무엇을 위해서 죽여야 됩니까? 죽이려고 하는 목적이 있잖아요. 이것은 기존의 질서 체제를 유지하려고 죽여야 된다 이 말이죠.
기존의 질서 체제와 안 맞으니까. 그러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들과 인간들이 연속성을 주장하는 질서와 다른 질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른 질서. 두 가지 질서.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있는데, 인간들이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여기에 어떤 질서체가 있는 거예요. ‘질서체’ 이 질서체의 특징이, 특징을,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면, 처음부터 어렵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집단 주체라고 합니다. ‘집단 주체’ 감이 오지요? 집단 주체. 여러 명인데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움직이는 거.
저 서해안에 철새들이 올 때, 움직일 때 어떻게 옵니까? 막 이렇게 하늘에서 춤을 추지요? 무리 지어서 그룹댄싱을 하잖아요, 그룹댄싱. 그리고 바다 밑에 있는 멸치 떼들은, 멸치 떼든 갈치. 멸치 떼를 이렇게 보면 바다 속에서 완전히 하나같이 움직이지요? 인간도 마찬가지인거에요. 인간도 마찬가지. 하나의 질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과 그 다음에 또 누구를 죽이려고 했다? 나사로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그들 속에 그냥 편입하고 말고가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과 더불어 나사로. 이 사이에서, 이쪽 인간들이 유지하고 연속하려는 그 질서체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새로운 결속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 거에요.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유지하고 싶은 질서 체제에서는 죽은 사람은 그냥 죽어야 되지 살아나면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이 질서 체제에서는 이쪽 인간들 질서 체제하고 안 맞는 다른 질서 체제가 새롭게 이질적인, 이것을 ‘이질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디까지 그어야 모르겠다마는, 카메라 때문에.
이질적이다. ‘질’이 달라요. 질이. ‘양’이 다른 게 아니고 ‘질’이 다른 거예요. 인간 세계에서는 ‘질’은 이미 확고해야 되고 다만 양적으로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때에 늘어나면 웃고 줄어들면 울고, 그렇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웃고 우는 인생이잖아요.
늘어나면 행복이고 줄어들면 불행이라고 보잖아요. 하지만 항상 뭐는 유지된다? 껌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고무줄처럼 해도, 고무줄은 고무줄 본질은, 계속 있음에 대해서는 ‘질’이 그대로 있으면 사람은 뭘 갖고 있느냐면 희망과 기대와 포부를 가질 여력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이것은, 이게 가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존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양적으로 더 오래 살고, 멋있게 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갈치를 하나 잡았다 합시다. 갈치 가지고 여러 가지 조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갈치에다가 지질수도 있고, 볶을 수도 있고, 거기서 뭐,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그런데, 갈치를 들고 손님한테 “혹시 갈치조림 주문했지요?” 라고 내놓으니까 손님이 하는 말이 “저, 짜장면 주문했는데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갈치조림이 맛있는 건 맞는데, 다른 거잖아요, 다른 거.
그렇게 예수님이 오셨다 할 때,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말은 기존의 우리가 하고 있는 질서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 믿으면, 이거는 다른 예수에요. 이거는 예수가 아니고 전혀 다른 예수라니까요. 진짜 예수님은 인간이, 내가 요청하고, 내가 원하고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과 다른 성질의 것을 가지고 온 그 예수님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게 바로 이 질서판, 예수님이 몰고 온 나사로 질서판과 기존의 인간판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성질이,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여기서 “죽지 아니하면” 되어있죠. 여기 밀알이 하나 있다 이 말이죠.
인간 세계는, 밀알은, 그 자체가 밀알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의 밀이니깐, 알도 하나의 밀이에요. 그래서 이게 밀이다 하면 되지, 밀이 죽는다는 의미는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성질의 나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 알의 밀이 그대로 있으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죽지 아니하면, 이렇게 해서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는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 하면,
바로 지금 유대인들이 유지하고자, 붙들고자, 유지시키고자, 또 연속시키고자 하는 이것이, 뭔가 죽음을 뺀 상태다 이 말이에요. 죽는다고 하는 것은 늙어죽을 때나 죽지, 땅에 있을 때는 죽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일찍 죽으려고 교회에 옵니까? 안 그렇죠? 일찍 죽으려고 오는 게 아니죠? 더 살려고 오지요? 그러니깐 교회가 이단인거에요. 강건 하려고, 그래서 교회가 이단인거에요.
나사로가 교회 가서 죽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교회 관계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죽은 거예요? 나사로는 예수님 때문에 죽은 거예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어야 됐다 이 말이죠. 물론 그 한 알이 예수님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아바타’가 바로 나사로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다만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주님의 아바타가 돼요. 그러면 우리의 아바타는 본인의 가치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항상 이거에요. “제가 무가치한 것을 제가 늘 유지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내가 되려고 기도해 버리면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 본인이 존재하는 게 되기 때문에, 기존의 나, 인간의 질서 안에 일부로서의, 집단 주체 중 일부가 내가 될 뿐이고, 여기 예수님하고 질서가 달라요. 지금 큰 그림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기존의 질서와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질서를 동반해서 왔다는 그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홀로 “짠” 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동반 한 거예요. 어떤 “너희들이 모르는 새로운 질서 체제를 동반하고 왔다.” 이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기존의 자기 질서와 맞지 아니함으로 이것은 퇴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경우가, 이유도 없이 미운 사람은 시킨 대로 한 것 때문에 미운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시킨 대로 했는데 굉장히 미운 거예요. 민주당이 먼저 중립내각 만들자고 했거든요. 하니깐 새누리당이 고심하다가 “그래 내각 만들자.” 이랬다 구요. 민주당이 안 한다 그랬어요. 왜? “왜? 우리말 왜 듣냐? 너희들은 무조건, 너희들은 차기 정권에서 나가야 되는데, 왜 우리말 듣냐?” 들어도 문제고, 안 들어도 문제가 되는 거예요.
미운 자식은 이래도 밉고 저래도 미운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평이 그런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 시비를 걸때는 예수님과 협의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퇴출할 적절한 빌미와 구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예수님한테 다가가는 거예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세례 요한은 먼저 선수를 쳤잖아요.
“이것들이 어디서, 어디로 와? 이 독사의 새끼들이 왜 여기와!” 대화하기 전에 욕부터 먼저 나왔어요. “뱀의 새끼들이 여기 왜 오지? 아! 이게 마지막 때가 되어가지고 이게, 마지막 때 티내는 것으로 오는구나. 그래! 너희들은 도끼로 다 잘렸어! 너희들이 구원 안 받게 하기 위한 마지막 때야. 너희들이 만약에 구원 받는다면, 이 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 돼.”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양쪽 다 어떤 합의점을 보겠다는 게 아니에요. 합의를 보겠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볼 때,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성경은 우리를, 우리와 합의하기 위해서 성경이 오는 게 아니에요. 성경말씀을 주신 것은 네가 이 말 듣고 순종해서 구원 받으라고 이 말씀 주는 게 아닙니다. 순종하라고 준 게 아니고 순종을 변경하라고 준거에요.
순종하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너희들이 순종할 수 있으려면 너라는 인간부터 바뀌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라는 인간부터.” 네가 귀하여진, 네가 그 인간 가지고는 절대로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을 주님께서 들이 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가지고 흥정과 거래에 나서는 겁니다.
“순종하겠나이다.” “어, 순종하지마!” “순종 하겠나이다!” “어, 순종하지마!” “왜요?” “너는 순종해도 소용없어.” “그럼 이 말씀 왜 주셨습니까?” “이 말씀 순종은 나 예수님 외에는 순종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내게 주신 거예요. 성경 말씀을. 그게 2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결국 예수님이 모든 행위와 모든 사역과 기적과 말씀은 누구 좋으라고 하신 거예요? 인자라는 본인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영광의 필요한 조연급들, 거기에 필요한 조연급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을 살해해야 될 사람들이고, 그리고 열두제자는 예수님께 붙어 다니다가 “엄마야 나 살려라” 도망치는 그런 역할을 해 줘야 돼요. 그런 역할을 또 해야 되고.
그래서 예수님의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누구도 인자의 영광보다 자기를 덜 취급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코 인자의 영광을 우선시 하지 않는 존재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자의 영광을 보다 먼저 챙기는 것이 누구의 영광이겠습니까? 바로 각자 본인들의 영광이죠.
각자 본인들의 영광이란 말은, 그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에 각자 세상을 보는 관점들이, 각자 갖고 있어요. 본인들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집단 주체라 하지만, 집단 주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악마적 입장에선 집단 주체가 되지만, 개인으로서는 자기중심으로 그 현실을, 현실관을 각자 따로 갖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거.
한국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 북한대로 관점이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있고, 미국은 미국대로 있고, 다 있듯이 각자 돌아가는 관점이 다 따로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영광을 기어이 포기할 수가 없는 입장에 있다. 인간은 자기 영광을.
사람이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의 변천입니까?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보는데,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이것은 기둥처럼 박혀있고 어떻게 하게 되면 내가 좀 더 잘되는가의 관점이 변천되는 것이 자기 인생의 변천입니다.
20대 때 보는 세상관 다르고, 30대 때 보는 세상관 다 다르고, 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관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자기 관점이 없지요. 그런데 조금만 크면 드디어 그때부터 걸음마지만 조금씩 자기 관점이 생깁니다. 그 자기 관점이 생기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문장인데, 여러분들이 수준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문장을 제가 과감하게 저질러 버립니다. “결정은 부정이다.”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일방적입니다. 어떤 결정이든, 어떤 내가 내리는 어떤 결정도 주님 앞에서는 ‘음으으음~’ 하고 고개 저을 결론입니다.
어린 아이가 쓴 것 먹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귤 준 것을 가지고 엄마가 뺏을 때, 곱게 빼앗기면 아직도 자기 관점이 없는 아이고, 이것을 성질부리면 이미 자기 관점이 생긴 아이에요. ‘내가 귤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왜 그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느냐?’ 이것은 내 관점에서 봐서는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죠?
그러면 귤을 빼앗는 것은 결정이지요? 귤을 빼앗는 결정은 어떻습니까? 이건 나한테는 옳은 일이지만, 엄마 보기에는 “그것은 네 생각이고.” 엄마 입장에서는 그것이 동의 됩니까? 동의 안 됩니까? 동의가 안 되지요. 그러니까 부정적 견해를 둘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부정적 견해를. 왜 부정적 견해를 둘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것은 엄마의 관점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여튼 내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은 다 부정적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고.
부부싸움 할 때에, 부부싸움이 점점 더 차원이 높아지면 이런 싸움이 됩니다. “거, 여보 물 좀 줘.” 라고 물 좀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가 물을 떠왔어요. “당신은 왜 내가 물 달라고 하는데 물들고 와. 그래서 당신이 싫은 거야.” 아주 고차원 적인 부부싸움. “네가 뭔데 내 결정에 마치 동의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유가 뭔데? 그래서 나는 네가 싫은 거야!” 이거 싸이코도 아니고 이거 이거 뭐.
그런데 원래 부부가 발달되면 이렇게 돼요. 점점 더 발달되게 되면. 자기 엄마가 왔을 때 자기 마누라 험담하면서 “우리 집사람은 정말 친정 때부터 교육을 잘 못 받아서 어른 섬길 줄 모르고 지 밖에 모릅니다.” 라고 많은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데, 자기 아내가 “어머니 오셨는데 맛있는 거 제가 요리해 드릴게요.” 하고 귤하고 마트 가서 음식 사왔을 때, 남편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왜 너는 사사건건 내 관점에 합치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뭔데? 내가 너를, 네가 나쁜 여자라고 하는 것 같으면 네가 나쁜 여자 역할을 해 줘야지, 왜 항상 나쁜 여자라고 부러워한다고 했는데 왜 네가 효도티를 내 버리면 나는 뭐가 되냐?” 이 말이죠. “나는 뭐가 돼? 하여튼 일생의 도움이 안 돼, 나한테!”
이런 남편들이 노골적으로 나오면 싸이코잖아요. 분명히 미친놈이죠.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솔직하게 하는 게 더 속 편한지 몰라요. 모든 인간은 이게 다 잠재적이고 내부적으로 잠재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다 그런다고. 그런데 자꾸 어떻게 합니까? 싸움이 나니까 맞춰주려고 하지요. 맞춰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과잉’이거든요. 과잉. 과잉은 나중에 이게 암세포가 될 가능성이.
나중에 참다 참다 못하면 폭발해버려요. “내가 이것까지 양보했는데.” 그러면 저쪽은 퉁명스럽게 “누가 양보하라고 했나?” “내가 이것까지 양보했는데, 난 너 같은 남자 만나서 내가 이혼하고 싶어도, 내가 자식 보고 이혼 안하고 내가 이것까지 양보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누가 양보하라고 했어?” “그래도 딸 시집가는데 아버지가 손잡고 가야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서 내가 참았는데 더는 못 참는다.” “어, 진작 헤어지지 왜?” 그렇게 나오죠.
지금 무슨 이야기 하다 여기까지? 모든 인간의 결정은 부정하다는 말은, 이것은 다른 말로, 인간 자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은 합당치 않은 거예요. 합당치 않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합당한 인간은 이런 분이라고 보여주는 게 뭐냐? 인자라고 오신 예수님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믿을 수가 없어요. 주님을 사랑도 못하고 믿을 수가 없는 이유가, 이미 우리가 속해있는 질서 자체가 예수님을 믿음이 불가능한 질서 체제에 집단 주체로서 일부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관점이 있거든요.
예수 믿을 때 그냥 믿습니까? 뭔가 노리고 믿고,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분 믿으면 오늘 죽어도 천당 가겠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으니까, 아이고 멋진, 이런 복음이 없다. 보험 미리 들어놓자. 낙원에 가야지. 인간은 안 바뀌고 갈 수 있어. 무슨 천국이 인간이 바뀌어야 돼?”
그럼 주님께서 “네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너도 한번 강도짓 해볼래?” “아~ 아니에요. 그거는 안 됩니다.” 강도가 되어 이 땅에서 오늘 밤 낙원에 있어야 되지, 지금 뭔가 자기 가치, 자기 의미가 아직도 그렇게, 얼마나 인간이 자기 가치 있다고 하면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면, 이렇게 의의 없겠다. 다 전제하고, 꼼수 다 노리고 계산해가지고 예수 믿겠다면, 그런 예수 믿는 것은 그건 믿음일 수가 없지요.
여러분 잘 아는 ‘흥부전’을 보세요. 놀부가 하는 행세가 누구 모방하는 거예요? 흥부를 그대로 모방 했지요. 흥부가 뭘 하느냐 하면 참새 다리를 고쳐줘 가지고 (제비) 아참! 참새가 아니라 제비다. 이거 완전히 버전이 다른 게 돼버리네.
제비 다리를 고쳐가지고 박을 얻었잖아요. 그러니까 제비 다리를 고쳐주면 되잖아요. 그럼 방법은 뭡니까?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분질러 놓고 고치면 되잖아요. 이게 놀부잖아요. 이게 바로 주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에요. 구원하는 방법이에요. 어떤 인간도 흥부로서는 구원 받을 자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냐? 예수님 자신이 놀부가 되가지고 멀쩡하던 인간을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만들어 놓고, 이제는 자기 관점이 어디에 있어요? 내 관점이? 내 관점이 이렇게 나를 지옥에 보냈는데? 아직도 그래도 자기 관점을 우길 랍니까? 내 관점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하는 것을, 이것을 알게 만들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구원이 먼저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그 질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아바타로서, 나사로에요. 예수님과 아바타 관계를 우리 관계로서 그대로 대입을 시켜버립니다. 대입을 시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새로움이 동원된 천국에 속한 질서가 돼버리면서 요한복음 12장 1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복음 12장 10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0)
대제사장이 나사로를 왜 죽이려고 합니까? 나사로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사로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를 끊어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사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사로 외에 모든 사람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전부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렇게 산 것은 주님의, 사나 죽으나 주의 은혜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게 사는 방식이나 질서가, 이쪽 인간 집단 주체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예수를 죽였던 그 심보가 같은 한패인 나사로까지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보면 나오는데,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결국은 뭐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을 믿게 한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랑 받으라는 말입니까, 미움 받으라는 말입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미움을 받으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미움 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제 이야기는.
“아~ 소원이 있는데~” “소원이 뭔데? 대통령, 국무총리?” “아니, 미움 받고 싶어.” 그건 최순실처럼 살면 미움 받아요. 신발까지, 얼마나 미웠으면 신발까지 미움 받겠어요. 신발까지. 아니, 곰탕 먹는 것도 미움 받아요. 곰탕 먹는 것 까지. 미움 받기 참 쉬워요. 아니다. 안 쉽겠다. 참 어렵겠다.
미움 받을 목적으로 교회 나오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그런 교회 같으면 교회 간판을 이렇게 붙여야 돼요. ‘미움 받고 싶으면 이 교회로 오세요.’ 그런 교회를 봤습니까? ‘미움 받기 위해서 오세요.’ 라는 그런 교회 없어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교회 안다닌 사람보다 교회 다닌 사람들을 전도하기가 더 힘들어요.
자기의 관점을 안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덤벅이로, 성경 말씀으로 막 덤벅이를 해 놓으니까, 그 덤벅이 된 모짜렐라 치즈 다 벗겨내고 전부다, 토핑 한 거 다 벗겨내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웠던 그 허위와 위선을 다 긁어내고, “아이고, 이거 뭐, 예수 나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얼마나 힘들겠어요.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떤 중국에 있는 목사님이 저한테 메일을 하나 보냈어요. 뭐였냐 하면 ‘박용기’쪽이라고 ‘김기욱’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주장했던 신학 체제를 저한테 보내왔어요,
“신학 체제가 뭐냐 하면은 성경 신학으로 성경 언약적으로 보자.” 이래서 성경이 뭐, 예수님은 삼중직이고, 뭐 어떻고, 어떻고, 5대 제사가 어떠니 이렇게 성경을 전부다 짜 맞춰 가지고 틀을 짜가지고 그래서 “이것이 올바른 성경 신학이다. 구속사의 한계를 벗어난 올바른 신학이다.”
이렇게 주장 한 거예요. 그래서 메일을 보내왔다는 말은, 저보고 평을 해보라는 이야기니까, 제 평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이겁니다. 그 사람은 지금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인가? 십자가를 관광하고 있느냐, 십자가를 관광하고 있는지 십자가 안에 있는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죠.
성경이 있으면 성경 안에 들어가서 성경을 보는 거 하고, 십자가 안 이죠. 자기가 여기 있고 ‘성경을 어떻게 체계를 이루면 될까? 이것을 그대로 해서 교인들에게 알려줘야지. 가르쳐야지.’ 학원처럼. 그렇게 해서 ‘성경이 이렇게 뚫렸습니다. 라는 거 알려주게 되면 구원 받겠지?’ “그러면 너의 자리는?” 그래서 제가 두 번째 메일 답변을 보내기를 이렇게 했어요.
“어떤 신학이든, 자기가 이 신학 자체가 죄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 신학은 100% 사기꾼이다.” 사기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리가 어디에 있어? 자기 자리가? 네? 십자가 안에 딱 들어가게 되면, 십자가 바깥에서 성경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것마저도, 이게 바로 나의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관점으로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 하고자 하는 행함의 일종이거든요. 그게.
그래서 그걸 저는 메일을 보내면서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목사들이 주로 하는 ‘사색 놀이’다. 게임을 하고 있는, 장난치는 거예요. 장난치는 거. 장난감하면 나오는 노래가 있어요. “7080 나는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요” 서유석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다 얼싸안고 기어이” 어떻게 좋아하다가 나중에 재미없어서 집어 던지는, “돌보지 않는 나의 사람” 그런 노래가 있어요.
가사 보면 너무, 가사가 ‘시’거든요. 유명한 시에요. 시인데, 어린 아이가 장난감 갖고 놀다가 재미없으면 갖다 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않아서 십자가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공부하고 성경 공부를 하고 하면, 결국은 이런 이론 가지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가 뭐 저런 이론도 있고, 이런 이론도 갖고, 그러다 던져 버려요. 그러면 남는 건 뭘까요? 남는 것은 ‘자기 절대성’이 남겠죠.
나는 내가 잘되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살겠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 마을’ ‘우리 교회’ ‘많은 여러분의 교회’ 들락날락 했겠습니까? 그들은 평생을 노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에요. 노는 재미로. 그건 자기만 즐겁게 하면 되는 거예요. 자기는 절대로 성경, 십자가 속으로 안 들어가요. 이것도 구경하고, 저것도 구경하고.
마치 인생을 뷔페 음식 고르듯이, ‘쟁반에다가 이것 한번 골라볼까?’ 오늘은 ‘김성수’ 한번 골라보고, 오늘은 ‘박용기’ 한번 골라보고, 오늘은 ‘박영선 목사’ 한번 골라보고 이렇게 기웃기웃 하면서 자기가 자기로 인하여 즐거운 재미. 그래서 괜찮은 관점 있으면, ‘주께서 또 이건 괜찮은 관점이니까, 고려해서 천국에 넣어주겠지?’
이것은 결국 오늘 본문에 의하면 자기 영광입니다. 자기 영광이에요. 제3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것. 이거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항상 인간은 제3의 자리를 항상 따로 간직해요. 그러나 십자가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때는 지난 주일 낮에 설교 한 것처럼 존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거기는 모든 것이 해체 돼버리고 ‘기능’으로 나오죠.
주께서 나를 죽여도 되는데, 계속해서 햇빛, 공기주시고 살도록 해주신 것은, 이 모든 이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복음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게 아니면, 만약에 바깥에 있으면 내가 어떤 신학 체계를 다듬는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살아버려요. 내가.
내가 신학 체계를 잔뜩 다듬고 철학을 많이 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내가 산다. 이렇게 돼요. 내가 성화 많이 하고 내가 성경 말씀 많은 부분을 퍼센트를 더욱 더 지켜 퍼센트를 넓혀 감으로써 내가 점점 더 상급 받고 거룩해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사는 게 되어 버리죠. 이게 바로 이단 아니면, 이게 바로 이단인 거예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 한다는 거예요. 방금 이 멘트를 끝까지 들어야 돼요. 내가 뭘 해도 죄다 하고 끝이면 안 되고, 그것이 나의 뭐냐? 그렇게 기쁘고 즐거워야 돼요. 그게.
내가 막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워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이야기 했더니만, 막 살아서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저로서는 어떤 대책이? “아니 목사님, 막 살면 구원 받습니까? 막 살면 주께서 성령을 주십니까?” 아니라니깐요! 그럼 막 사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돼버려요.
“나는 이제는 헌금도 안하고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닌다.” 누가 뭐랬어요? 그동안 교회 다니고 헌금내고, 거기다가 의미를 뒀잖아요. 그럼 그것을 하나 안 하나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게 즐거워야 된다니까요. ‘진작 막 살 걸.’ 이렇게. 이게 즐거워야 돼요.
즐겁다는 말은 내가 앞으로, 지금까지, 앞으로도 어떤 방식과 어떤 방법을 내가 채택한다 할지라도 ‘의미 없다.’ 라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된 그 즐거움. 지금까지 막 살아서 즐겁다. 앞으로도 막 살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 왜? 환난이나 곤고나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 쪽에서 나한테 내민 사랑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겁니다. 이게, 이렇게 알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 정말 차이 나도 보통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대로 이야기를 못하게 되면 “그거 다 우리가 이야기 했던 건데 뭐, 십자가 복음 우리 교회에서도 다 이야기해.” ‘분명히 나, 복음 전했는데 차이가 안 나네?’
십자가 복음과 더불어서 십자가 복음 아는 것 까지 라도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것도 죄라고 이야기 하세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에 이렇게 했죠.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했잖아요. “제가 예수 믿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예수 믿지 않게 하옵소서. 믿어지게 하옵소서. 주님이 출발해야지, 내 쪽에서 내가 예수 믿고, 내가 예수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다음부터 써먹으세요. “너는 네가 예수 안 믿겠다고 해봤어?” 그렇게 물으면 ‘그건 다른 질서인데?’ 속으로 할거 예요. ‘그건 우리가 만든 질서가 아니라 다른 질서인데?’ 이렇게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 경계선, 바깥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그게 20절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요12:20-21)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명절날 헬라인이 와서 명절이나 지내고 가지,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바로 호세아나 아모스에 나오는 예언. 구약의 예언에 나오는 예언된 것으로 본 겁니다. 다윗의 장막이 무너지게 되면 이방인의, 이방인 쪽에서 다윗의 장막이 새롭게 세워진다는 예언.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선지자 이야기 나오면 여러분들이 또 다 까먹겠지요.
점점 더, 오십 좀 넘었다고 뭐, 다 잊어버리고 축구 한 골만 넣은 것만 기억하고 다 잊어버리고, 한 골 넣은 것만 기억하네. 자기 관점이 거기에. 한번 봅시다. 구약의 예언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릴게요. 뭐냐 하면은, 예언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전제로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전제를 해버리면, 이스라엘 나라가 만약에 멸망 안 해 버리면 뭐가 유지 되냐 하면은 이스라엘 역사가 유지 되는 거예요. 역사가 계속 의미 있게 유지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메시야는 어디로 오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역사 따라 뒤끝에 와야 돼요. 이렇게 돼버리면 의미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한테는 메시야가 역사와 매치되는 것이 아니고 묵시와 매치가 돼요. 묵시라 하는 것은 어려운 말인데, 그냥 ‘미래가 앞당겨서 현재에 침범했다. 침입했다.’ 시간적인 침범. 이것을 ‘카이로스의 때’라고 하는데 지금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나타날 그때가 앞당겨서 현재에 사건으로 터져 버린 거예요. 사건으로 터져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은, 이쪽의 미래의 나라가 이렇게 덮친 게 되죠. 이쪽을 그냥 덮치게 된 거죠. 덮치게 되니까, 이스라엘 나라에서 관점이 두 개의 상반된 관점이 벌어집니다.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은 혈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혈통은 반드시 뭐 중심이냐 하면은, 바로 왕 혈통 중심이에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계속 왕 혈통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모르고 다윗의 자손이 있는 한, 이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라고 단정적으로, 단편적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다윗의 언약의 내용은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것은 분명히 묵시적이에요. 사무엘하 22장 한번 봅시다.
구약을 하려고 하니까 제가 조금 겁이나요. 왜냐하면 구약까지 하게 되면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게 되면, 다 기억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지만, 하오나 저는 주께 맡기고, 사무엘하 22장 8절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삼하22:8-11)
이게 누가 예언 한 건가 하면은 이게 바로 다윗이 예언 한 거예요. 다윗이 예언 한 거예요. 다윗이 예언했단 말은 다윗의 언약 안에 이 내용이 포함이 돼있고, 이 내용은 장차 이 땅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인자’라고 명칭을 붙인 그 분이 이것을 다 완성을 시키는 그 숙제가 되는 겁니다. 숙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이것을 다 이루어도 되지만 오시기 전부터 이런 낌새. 다윗의 예언의 낌새를 이미,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조금씩 삐라 뿌리듯이, 삐라 알아요? 삐라. 비행기에서 뿌리는 거. 삐라 뿌리듯이 조금씩 뿌리고 온 거 예요. 묵시에서 역사라는 지평에다가 이렇게 뿌린 겁니다. 그래서 뿌림을 당한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하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면, 그것을 문서 선지자라고 해요. 문서 선지자.
선지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기적 선지자가 있는데, 엘리사와 엘리야가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엘리사, 엘리야는 자기 말의 그 효험이 적극적으로, 그 당시 역사적으로 효과를 봤어요. 갑자기 제단에 불이 떨어지고 사르밧 과부가 계속해서 참기름이 차오르고, 밀가루가 계속 있고, 옷 벗어가지고 휘 저으니까 강이 갈라졌고,
또 엘리야의 시체가, 엘리야의 시체는 찾지 못하는데, 엘리야의 시체는 그냥 “이얍!”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로 “빰빠바바” 말 타고, 갑자기 승마 생각나니까 또, 또 정유라 생각나네. 그냥 말 타고 들어가는, 그런 불수레 타고 올라가는 그런 모습을 보인 거예요. 즉각적으로. 그러나 문서 선지자는 그런 기적이 없어요.
오히려 기적은커녕 있는 것도 까먹고 있어요. 마누라 죽어도 울지 않아야 하고, 이건 맨날 허리끈 풀고, 맨날은 아니지만 허리끈 풀고 강물에 담궈야 되고, 그러니까 이 문서 선지자가 하는 모습은 뭐냐 하면은, 썩는 거, 망하는 거, 불타는 거, 뭔가 더욱 더 강렬하게 묵시가 다가오니까 땅의 것은, 소위 인간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전부다 썩어 문들어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들의 관점은, 이 선지자 말고 일반인들의 관점은 어디서 다 주워 모은 겁니까? 하늘에게서? 땅에서요? 땅이죠. 그런데 선지자가 보기에는 너희들이 주워 모아서 “나, 이렇게 하면 행복할 거야!” 하는 것들이 사실은 저주 받아야 될 것들이었습니다.
아담이 이 땅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와 이 땅에서 땀 흘려 일했지요? 땀 흘려 일했습니다. 자, 물어보겠어요. 그것은 살려는 아담입니까? 살고자 이렇게 일했습니까? 죽고자 하며 일했습니까? 살고자 한 아담이지요. 아담의 두 종류가 있어요. 살고자 하는 아담은 으레히 몸이 살고자 한 아담이에요. 그런데 다른 아담이 있어요.
두 번째 아담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데, 그분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고자 오신 아담이에요. 그럼 아담의 두 종류란 말은 이브가 두 종류란 말이에요. 이브가. 원래 아담의 마누라, 여자는 자식을 낳는 여자지요. 그런데 두 번째 아담의 색시는 누굽니까? 교회를 말하는 겁니다. 성도. 예수님의 신부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수의 신부는 이미 죽었다가, 같이 죽겠다는 사람은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같이 죽겠다가 아니라, 예수를 위해 죽겠다가 아니라, 이제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는 거죠. 막 살아도, 막 살아도 죄인된 것이 그게 즐거워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 받았기에, 내 관점 말고 주님의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이 내 관점보다 우세를 하니까, 더 세고 더 위층에 있으니까, 더 위에 있는 관점으로 날 볼 때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죄가 되고,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결국 죽도록 되어 있다는 거예요.
죽도록 되어 있다는 말은, 죽도록 되어 있는 이 원칙을 수용해서 기쁘다는 말인데, 이것은 살고자 한다는 의욕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복음전파였어요? 자기가 죽는 거였습니까? 복음 전파는 누구의 소원이냐 하면, 예수님의 소원이에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빨리 좀 데려가 주시옵소서” 하겠어요. 그건 자기 마음대로 안 되지요? 자기가 살고 죽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안돼요. 주님 마음대로 돼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어차피 세상은 나를 살리는 세상이 아니고, 나를 죽이기 위해서 나한테 주어진 세상인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요. 창세기 3장에서 우리를 고생하라고 준 세상이에요. 그런데 왜 행복을 요구합니까? 이거는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겠다는 자체가 세상도 모르고, 자기 본인도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은 물론 모르고 아는 건 하나도 없어요. 전혀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꿈꿀 때 자기 엄마가 나타난 것은, 자기 엄마가 나타났을 때, 그것은 한 관점에서 뭐냐 하면은, “그거 죽는 거 너무 슬퍼하지 마. 너도 언젠가 죽어”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될 텐데. 최태민이 뭐라고 했냐하면, “네가 대통령이 된다.” 이렇게 해석 했거든요. 관점 자체가 최태민 영생교 목사가 그렇게 하더라도, 무당이 그렇게 하더라도, “아니요” 성령 받은 박근혜 같으면, “아니요, 나는 그게 의미 없어요.” 이렇게 돼야 되는데,
“그래, 나 대통령 이라고 해준 사람은 내 편이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정이라면 오늘날 그 유사한 일이 얼마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나잖아요. 아까도 동영상 두 개 할 때도 이야기 했지만, 누가 나한테 “잘한다. 아이고, 용기를 내세요!” 이러면 좋아하고 예? 잔소리하면 싫어하고, 그 주님은 뭐한다 했습니까? 그 동영상. 주님은 우리를 격려한 적이 없어요. 성경 어디에도.
잔소리만 해요. 잔소리만. 잔소리만 했다고요. 네? 심지어 스데반한테도 그랬고, 사도 바울에게도 “두려워 말라. 네가 로마에 선다.” 주님은 자기의 계획만 이야기 했지, 절대로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우리의 행복이 있는 이 세상의 질서를, 연속적으로 유지하고 붙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참, 우리가 따져보면, 성경 보게 되면 성경 자체가 잔소리에요. “네가 언제 날 사랑하고, 언제 믿었어? 안 믿었어.” 하지만 너는 (나는) 믿은 적이 없습니다가 그게 바로 이미 구원 받았다는 새로운 관점을, 성령을 통해서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그런 관점이 나오는 거예요.
이 특이한 관점을. 거지 나사로가 아니고, 마르다 오빠가 또 살겠습니까? 또 살고 싶겠어요, 이 세상에? 군대 갔다 왔는데, 또 군대 가라고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이고 오빠~” “아이고, 아이들아 잘 있었나? 그래 행복하게 살자.” “오빠 누가 죽였어요?” “주님이 죽였어.” “주님, 미워!” 이렇게 나오겠어요? “참, 주님 아니면 우리가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아니군요. 주님 덕분에 하루하루 사는군요.” 그거 증거 하다가 밉상 받은 거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