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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연루’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관조.’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바라보니까 이 안에 관계성이 없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저기 있으면 그 사이는 진공상태처럼, 그냥 주시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믿을까 말까는 내가 선택해야지.’ 이게 관조입니다. ‘그래, 결심했어. 예수님 믿어보자.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지.’ 백날 해봐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라캉은 바로 이게 너의 상상인데, 이 상상은 니가 이미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상상이라는 겁니다. 이 상상의 특징은, 부모가 길들일 때 어떻게 길들였느냐 하면, 채찍과 당근으로 길을 들여놓으니까, 여기서 선과 악이 성립돼요. 선과 악. 선은 뭐냐 하면 너한테 유리한 것이 선이고, 너한테 불리한 것이 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라고 할 때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이거는 뭐냐 하면 몸의 감각이겠죠. 맴매해서 아프면 이거는 악이 되고, 맛있는 초콜릿 사주면 선이 되고. 그래서 부모가 양육하고 훈계할 때에 불리한 것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게 하고 유리한 쪽으로 인도하겠죠. 그런데 이제 부모가 양육하면서 자식들에게 부모가 뭔가 한계에 이른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느 정도 가르치면 가르친 것은 잘해요. 그 안에서. 그런데 새로운 의외성이 계속 나올 때, 잔소리가 계속 늘어나는 거예요. 잔소리가 계속 늘어나요. 새로운 사태들이, 여러 가지 경우수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가르친 것 가지고는 더 이상 적용이 안 되는 것. 식사할 때, “숟가락 가지고는 밥을 먹고 젓가락 가지고는 반찬 먹어야 돼.” 그걸 해서 착한 사람으로 종결됩니까? 교도소에 가보세요. 전부 다 숟가락 가지고 밥 먹지. 안 되거든요. 새로운 상황이 들이닥칠 때, 사태가 왔을 때, 거기에 대한 또 선과 악을, 부모가 거기에 대한 양육과 훈계를 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새로운 사태가, 부모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부모가 여기서 무리수를 하든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죠. 스마트 폰 게임할 때 풍선을 열 개 이상 하지 말라는 그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로 게임에 정통한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풍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모르니까 그들은 누구한테 묻는가? 친구한테 묻겠죠. 그러면 대타자가 부모로부터 선악을 알던 것이, 부모의 한계를 딱 느껴버리면, 이제는 부모의 말이 그야말로 잔소리가 되어 버리죠. 바이 바이가 돼버려요. 더 새로운 정보는 친구한테 듣는 겁니다. 친구한테 그걸 더욱더 수집하게 되어 있죠. 추가적으로 모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친구가 가져온 정보에 의해서 선악이 돼버리면, 이거는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되느냐 하면 부모가 했던 선악의 기준과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서 했던 기준과 이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맞을 리가 없는 거예요. 맞지 않는다는 것은 대척관계가 있단 말이고, 이제는 어느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한쪽 기준을 완전히 철폐해야 할 입장인 거예요. ‘이제는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안 들어.’ 이래 돼버려요. 무조건 안 들어버려요. 왜냐하면 엄마 말을 대체할 새로운 그것이 내 몸을 기쁘게 만든 요소가 돼버려요. 어릴 때부터 이미 자기 몸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선이 되고, 자기 몸이 불편한 것은 악이 된다고 이미 몸 자체가 인식이 되어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이제는 담배 피우고 술 먹는 이것이 이상하게 자기 몸을 기쁘게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엄마가 잔소리하니까, 전에 있던 바른 기준도 이제는 내쳐버리고, 이제는 술, 담배 하는 친구와 더불어서 새로운 자아상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의 범위가 넓혀져 버리면, 뭐냐 하면 선배가 생기고 후배가 생기겠죠. 그러면 그 애가 나중에 사회에 나갈 때 누구 말 듣느냐 하면 부모 말 안 듣고, 학교 교사 말도 안 듣고, 교회 목사 말도 안 듣고, 선배 말을 듣는데, 그 선배가 조폭 오야붕이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이게 대타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폭 오야붕을 만나서 바다이야기라든지 게임하다가 체포가 되죠. 체포가 되는 그것을 가지고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상으로 자기를 뽐내다가,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고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이 뭐냐 하면, 상상계에 있다가 상징계라는 더 넓은 범위의, 상징계에서 주어지는 법, 사회적 질서법, 이게 상징계입니다. 사회적 질서법이니까, 자기의 상상계가 상징계에서 이렇게 깨어질 때,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현실을 느끼고 세상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겁니다. 느낄 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바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겠죠.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불안, 이것이 몸의 증세로 나타나면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 또는 노이로제라고 합니다. 이런 몸의 증세로 드러나게 돼요. 이게 더 가면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죠. 왜 이런 병이 생기느냐 하면, 나는 아무리 상징계가 벽이 높더라도, 아무리 사회법이 무섭다 할지라도 나는 상상계를 못 버리겠어. 이렇게 고집을 세우니까 몸은 하나인데, 잡아당기는 세계는 몇 개입니까? 두 개죠. 여기서 몸은 자동적으로 몸에 익숙한 세계에 소속되는 것과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는 그 사이에서 몸이 어쩔 줄 모르는 행동이 바로 정신병이고 노이로제고 히스테리입니다. 그래서 보통 직장에서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하잖아요. 노처녀 히스테리! 얼마나 직장에서 대리가 히스테리가 많으면 이름도 히숙대리 라고 해요. 개콘에 나오는 히숙대리. 하여튼 히스테리가 많다는 뜻이에요. 교회 가면 그런 사람 있어요. 여전도사 히숙대리. 괜히 부부간에 정이 좋으면 질투를 해가지고 여전도사 노처녀 히숙대리가 있죠. 이거는 자동적으로 발사되는 거예요. 이거 치료방법으로 라캉은 이렇게 치료합니다. “니는 죄인이야!” 이거 한 마디로 다 된다는 겁니다. 니는 죄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히스테리의 증세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어요. 이거는 정신병에서 약물로 하는 것보다도 정신적 구조로 풀어야 되는 겁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 가지고 2016년도 노벨문학상 탄 사람이 있습니다.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밥 딜런의 시에 보면, 결국은 자연주의죠. 우리는 이 세상에 흩어져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 문화가 1960년대에 유행했었던 히피였습니다. 무정부주의에요. 무정부주의. 히피는 극단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마약과 이런 것을 해서,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한 뭐든지 용납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질서로부터 탈출하라. 젊은이들이여! 왜냐하면 이 기존의 질서는 상징법이거든요. 상징법은 우리가 어릴 때 갖고 있던, 동화 같은 상상의 세계를 계속 구박하고, 그걸 파괴시키고, 계속 부수니까, 몸은 이미 늙어서 어릴 때로 못 돌아가고, 인간이 다시 거듭날 수가 없잖아요. 몸은 늙었는데, 마음속의 순수한 꿈은 어릴 때 백설공주고, 신데렐라고, 백마 탄 왕자고. 그러니까 어릴 때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Beautiful한데, 왜 어른이 되고 나니까 실제로 이 세상사는 것이 왜 그렇게 만만치 않느냐, 왜 이렇게 힘드냐 이 말이죠.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 되느냐?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이 말이죠. 자유가 있으면 내 인생을 내 원대로 고를 수 있는 자유선택이 있다면, 의지가 있다면, 그 의지를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에 희생시키지 말고 그걸 마음껏 발휘하자.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빠라빠라빠라밤~♬ 오토바이 타고 돌아다니면서, 수염 기르고, 재킷입고, 극도의 쾌락을 맛보면서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이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상징계의 법인 이 국가를 공격하기 이전에 본인의 늙음이, 본인의 죽음의 능력이 본인을 힘들게 하고, 본인의 육신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나이 안 들어봤으니까 그걸 모르는 거예요. 젊은 애들은 마냥 계속해서 자기의 젊음이 안 아프고 가고자 하는 거예요. 이 몸 자체가 아무 이상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몸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몸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계획은 많아요. 그리고 내 몸은 절대로 피곤을 모르는 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어벤져스에요. 어벤져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특징이 뭐였던가요? 피로를 몰라요. 스파이더맨이 아이구, 힘 빠진다고 하면서 멈춰있던가요? 항상 쌩쌩해요. 원더우먼이나 이런 사람들. 늘 건강하잖아요. 늘 건강하고 건장하죠. 뭐 어떤 적들이 나타나도 빰빠라빰빠~♬시금치만 먹으면, 진짜 제가 어릴 때 시금치만 먹으면 힘이 생기는 줄 알았어요. 뽀빠이 살려줘요! 올리브가 이렇게 하면. 그 만화영화 보면서 불만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부루트스는 매주 그렇게 맞으면서 그렇게 까불고, 올리브는 그렇게 뽀빠이가 살려주게 되면 아예 뽀빠이하고 붙어 살든지, 왜 자꾸 살려달라고 하니, 도대체 몇 번째에요? 몇 번째? 그리고 뽀빠이도 불만이 많은 게, 뽀빠이도 평소에 시금치를 많이 먹고 있지, 꼭 일이 있을 때만 먹어요. 일이 있을 때만. 뭐 비타민도 아니고. 다 이게 어릴 때 꿈이 어른이 되니까 그게 그리운 거예요. 그만큼 죽음의 힘을 감당하기가 곤란하다 이 말이죠. 프로이드는 개인적인 정신병에서 했는데, 라캉은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까지 확대시킵니다. 이 원리를. 확대시켰는데, 상상계에서 알 수 없는 욕망(a)으로 인해 대타자(A)의 욕망으로 갑니다. 상징계로 가다가 상상계에 교란되어서 주체에 이르지 못해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상상계에 있다가, 어릴 때의 상상계에 있다가, 상상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릴 때만 상상계가 아니고, 뭔가 괜찮다 싶으면 그걸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상상계입니다. ‘그래, 저게 내 모습이야.’ ‘나는 기타리스트가 될래.’ 기타치고 싶다고 해서 애들한테 기타사주면 3개월도 안 돼서 그 다음에 피겨하려고 해요. 피겨. 피겨 하다가 그 다음에 골프한다고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돈만 갖다 다 줘보세요. 갖고 놀다가 재미없다고 또 딴 데 하고. 아휴! 참!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그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의 어릴 때, 이쁜 애로 잘 키웠다는 그 상상계를 양육 받아서 그래요. 그렇게 자기 엄마한테 양육 받아가지고, 자기 자식 잘 키우는 것이 자기 책무고, 나의 나됨. 그러니까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어떤 외부의 타인과 일치시키는 것이 있잖아요. 자식을 잘 키우는 그 엄마의 모습을 자기의 상상으로 늘 이걸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이 포기를 못하니까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만들고, 자식은 부모 따라하고. 이게 마마보이가 돼버리는 거예요. 심지어 시집가도, 대학가서 중간고사 볼 때도 교수 찾아가서 점수 똑바로 매기라고 엄마가 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드론처럼 위에서 주시하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소개팅 하는 데는 다 따라가고. 그러면 자식이 엄마를 이용해요. 그런데 그거 아니면 엄마는 지금껏 자신이 사는 의미가 없는데요? 뭐 오십대가 바다를 볼까요? 바다 많이 보라고 해요. 인천에 가면 바다 많이 있어요. 오십대가 되어서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보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자아를 찾았다. 자아를 찾는 것도요, 자아를 찾은 것이 아니에요. 결혼 전으로 돌아간 거예요. 몸은 늙었는데, 결혼 전 20대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혼하고 50대는 가능성이 없어요. 50이 넘었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서 주체 자체가 분열이 되는 거예요. 주체 자체가 찢어지는 겁니다. 늘 찌어지니까 여기서 뭐가 생긴다? 깊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정해져요. 인간이. 그럼 불안정하면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죠? 더 욕망을 찾겠죠. 더 짜릿한 것을 찾겠죠. 그 찾는 그 요구를 이제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욕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타인들에게 욕망을 물어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이걸 타인에게 묻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실재계에요. 실재계. 이렇게 타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국은 스스로 누구의 종이 된다? 타인의 종이 되는 거죠. 이렇게 묻는 이유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는 어떠한 것도 기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물이 먹고 싶어서 물을 마셨다. 마신 뒤에 콜라가 먹고 싶다. 아까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다음에 또 피자해보세요. 지겹다고 해요. 그러면 지겨우면 어떻게 하느냐, 무슨 음식이든지 또 찾아야 되겠죠. 물어야 되겠죠. 어느 것이 맛있는지. 맛집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누구의 종이에요? 내가 이미 타인의 욕망에 종이 되는 겁니다. 종이 되면서 인간은 상상계에 군림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 순간 나는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스스로 자기에게 억지를 부리면서 위로를 하는 거예요. 이 버릇이 성경 볼 때 그대로 나옵니다. ‘나는 신자 맞아. 나는 은혜 받은 거 맞아. 성령세례 받은 거 맞아.’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억지를 부리고 최면을 거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오늘 밤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자기 확신을 계속 다지고 다지는데, 그렇게 다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미 실재계에 빠져버린 거예요. 내가 나한테 종이 되는 것. 그것을 라캉은 타인한테 종이 되었다고 하는데, 라캉은 사실 알아요. 그 타인이 악마라는 것을 알아요. 악마. 인간은 이미 악마의 밥이 된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선악나무는 그냥 관조해야 해요. 그걸 자기 소유로 만들면 안 돼요. 선악나무의 뿌리가, 에덴동산에 물이 흐르죠. 중앙에 나무가 두 그루 있어요. 이 나무가 분명히 다른 종류의 나무다 이 말이죠. 하나, 둘이에요. 일이 아니고. 둘인데, 나중에 보니까 이 둘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느냐, 하나를 따먹으니까 남은 하나 역시 못 따먹는 나무가 돼버린 거예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천지창조를 할 때, 전부 다 따로 만든 것 같지만 사실 그 바닥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가 놓여있었던 겁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전부 다.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인간과. 모든 것이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다 통하게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 와서야 알지, 신약에 와서 알지, 그걸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죠. 가인이 아벨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죽여 보니까, 동생을 죽이고 난 뒤에 이게 알려진 거예요. 쉽게 갑시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을 여자, 여자, 남자, 남자라고 해도 괜찮고, 여자, 남자라고 해도 괜찮은데, 상대를 볼 때에 우리는 저 사람이 내 맘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성도는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이걸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성도를 볼 때는, 여자고, 남자다 했을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그 남자를 봐야 해요. 근데 이론은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저 남자를 좋다고 했을 때, 저 남자의 반응이 뭘까? 별로라고 한다면 내 위신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는데, 나는 그 꼴을 못 보겠다고 혼자서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저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안 받아주게 되면, 첫 번째 안 받아주며? 두 번째 받아주면? 세 번째 나의 대처는? 이걸 또 생각한다고요. 만약에 둘이 청춘남녀라면 얼마나 축하해주겠어요? 근데 청춘남녀가 아니고 기혼자라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기혼자라면. 이게 전부 다 어디서 나온 거예요? 전부 다 선악을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후유증이라고요.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게 되면 뭡니까? 1번을 하든, 2번을 하든, 3번을 하든, 그것은 필히 니 속에서 나와야 될 죄가 돼요. 나와야 될. 여기 ‘나와 될’ 이라는 말을 꼭 붙입니다. 그냥 죄라고 하면 “안 할게요.” 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필히 나와야 될 죄가 되는 겁니다. 필히 나와야 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발시킴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예수님의 생명나무가 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생명나무는 뭡니까?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고려한다? 안 한다? 일체 고려 안 해요. 그게 복음입니다. 일체 고려 안 합니다. 왜? 고려하지 않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일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나의 원수 되었으나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원수 된 너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거든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해요?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님하고 상대하죠.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위인이 없었으나 주님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있어서, 로마서 3장인데. 21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가 없나니” 이 네모가 뭐죠? “육체” “육체는 없나니” 그럼 끝났죠. 지옥가야 되죠. 율법으로는 없는데, 그 다음에 뭐냐, 22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의가 나타나가지고 우리에게 폼만 잡고 구경만 시켜주고 바이바이 합니까?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의 한 의가 실제로 실적을 남기고 열매를 맺겠죠. 그러면 성도는 무엇의 열매입니까? 성도 본인의 행함의 열매가 아니고 누구 열매입니까? 우리는 접어두고, 아예 상종도 안 하고 나타난 화목제물의 의미, 가치, 그 취지를 그냥 고스란히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그 덩어리가 뭐다?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성도. 성도를 딱 깨버리면 화목제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화목제물은 모든 다섯 가지 제사 가운데 마지막 제사, 완료된 제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 사실을 미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니까,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죠. 아직도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행함은 이미 접었다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우리는 시간상 현재 밖을 못 벗어나는데, 현재 이후의 미래의 일을 우리한테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이거는 못 알아듣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주제가 바로 캘거리강의에서 한 겁니다. 캘거리강의 1강을 하고 난 뒤에 김을수 집사님은 목사님 강의하는데 힘든 것을 보고 내가 다 기운이 빠졌다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려고 아주 용을 썼는데, 위로 아닌 덕담을 그렇게 해주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호산나 했죠. 호산나를 누가 알고 있었느냐,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 그들에게 호산나를 누가 시켰습니까? 그들이 자발적으로 했죠.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거예요. 근데, 오해했는데 예수님은 그 오해한 것을, 너희들 쪽에서 분명히 오해했는데, 너희들은 현재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되지만, 미래를 알고 미래를 몰고 오셔서 현재에다 덮쳐버린 입장에서 너희들의 그 오해가 주님한테는 합치된 거예요. 주님한테 합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 모습이 왜 있느냐 하면, 십자가 이전의 모습이 있잖아요? 십자가 이후에도 우리는 이 모습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맨날 상상계하면서 내가 신자 맞다, 나는 기도에 대해서 안다, 나는 복음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그걸, 조금만 되면, 내일되고 모레가 되기만 하면 오해임을 계속 깨우쳐주는 거예요. 그럼 오해임을 깨우쳐주면, 그럼 오해했으면 구원 못 받았네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로마서 3장에서. 우리의 어떤 행동도 차단한다고 했죠. 오해를 하든, 육해를 하든, 육회? 육회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칠해를 하든, 팔해를 하든 간에, 구원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화목제물. 예수님이 예수님의 자기 성과의 열매로써 구원하는 건데, 우리가 오해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나는 매일 오해한다. 나는 매일 착각한다.’ 이런 고백이 두 글자로 줄이면 ‘아멘’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 지금도 주께서 해내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진실로 그러합니다. 아멘.” 이게 사도바울이 누렸던, 성령 안에서의 마음껏 자유입니다. 마음껏 자유죠. 구약사람들은 빠져나온 것만 생각했어요. 자기의 고통과 아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거는 구원 아니에요. 구원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느냐, 사도바울 정도가 되어야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즐기는 거예요. 뭘 즐긴다? 내가 벌이는 나의 오해를 보고 즐기고, 나의 죄를 보고 즐기는 거고, 나의 실수와 실수라고 할 것도 없이 본심이죠. 뭐. 실수를 보고 마음껏 호탕한 웃음을 띠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그거 해봐야 현재거든요. 현재에 있는 우리를 미래가 그렇게 다루어준다는 것이 바로 수직적으로 세운, 아까 지명을 펼쳐놓지 말고 수직적으로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그래서 뽀빠이 만화는 옳은 이야기에요. 올리브는 부루트스한테 매일 당하고 뽀빠이는 매일 시금치 먹고 도와줘야 하고. 그래서 매일, 매일 십자가 지신 은혜가 주어져야 돼요. 우리는 매일같이 “뽀빠이 살려줘요!” 라고 매일같이 이렇게 해야 해요. 그러니까 그 올리브가 그렇게 도와줬으면 누구 편이 되어야 합니까? 이제는 뽀빠이 편 되어야 하는데, 또 본성이 뭐냐, 이제 상상계를 아니까, 하다가 상징계를 통해서 당해놓고 그 상징계에서 찢어진 주체는 뭐로 한다? 나름대로 물어요. “내가 어떤 인간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죠. 해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해답이 없어요. 이걸 딜레마라고 합니다. 딜레마. 인간은 영원한 딜레마. 찢어진 주체인데, 그냥 주책바가지죠. 찢어진 주체는 항상 이게 미끄러진다고 했어요. 미끄러진다는 말이 왜 적당하느냐 하면, 보통 이걸 이동한다고 하게 되면 좀 뻣뻣하게 이동할 수 있잖아요. 이거는 내가 이동 안 하려고 버티면 되잖아요. 근데 여기다가 참기름을 발라놓으세요. 참기름을 발라놓으면 본의 아니게 미끄러지게 되어 있어요. 주체는 상상계에서 자아가 돼버려요. 현재에서. 주체는 자아가 되는데, 자아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분열되고 난 뒤에 그건 자아가 아니고, 일시적 주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우리가 알게 됩니다. 상징계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내가 아는 현실이 내 뜻대로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나는 기타리스트여서 기타를 한 20년 쳤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떤 악단에서 기타리스트 한 명 뽑는데, 보통 한 50명이 오거든요. 연줄해가지고, 빽 써가지고, “나는 김 세황한테 배웠습니다.” “나는 함 춘호한테 배웠습니다.” 전부 다 온다고요. 전부 다 오게 되면 다들 귀신들이죠.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기타를 열심히 했는지. “나는 적재한테 배웠습니다.” 적재 알아요? 적재라는 사람이 있어요. 기타 잘 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왜 그렇게 많은가 하면 공부는 하기 싫지, 김태원이 기타 잘 쳐서 저렇게 밥 먹고 산다고 하니까, 부활이 하나밖에 없어요. 부활 팀이 두 팀이 아니거든요. 밥 먹고 사는 팀이 몇 안 돼요. 어디 보컬 홍대 앞에서 해봐야 하현우 복면가왕이나 몇 개 뜨죠. 다 뜨지도 않는다고요. 그런데 개나 소나 다 공부는 못하지만 기타는 잘 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잘 치는 애들이 너무 많은데? 밥 못 먹고 살아요. 이걸 가지고 어떻다? 자기도 모르게 미끄러지는 거예요. 미끄러져요. 이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설교 잘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설교 잘한다고. “우리 교인들이 뻑 간다.” “주의 사자입니다.” “살아계신 누구입니다.” 막 이렇게 해요. 그래서 “목사님. 이 설교 좀 한 번 들어보세요.” 해요. 들어본다고요. 들어봐야 평을 하죠. 찾는 것은 딱 한 개 찾아요. “나는 설교하는 자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가를 찾아봐요. 아무도 없어요. 설교한다는 자체가 이게 죄라고 아는 사람, 없습니다. 사기꾼입니다. 설교해서 유명인사 되어서 교인들 모아서 노후대책 삼겠다는 겁니다. 직업 삼겠다는 겁니다.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마귀의 종들입니다. “여러분, 설교 하는 것조차, 설교 듣는 것조차 죄인입니다.” 해줘야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돼요. 자기 집단이나 공동체가 그게 의미 없게 돼요. 그거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산나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밝혀드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떤 누구도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이 합체가 돼요. 집단이에요. 집단을 가지고 주님이 처음부터 이야기해요. 권세입니다. 권력층. 대구강의에서 이걸 비계 덩어리 라고 했죠. 여러분 비계가 어떻습니까? 그 섬유조직이, 세포조직이 빡빡하죠. 뚫을 수가 없어요. 그냥 칼로는 이 비계를 잘라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죠. 우리는 백날 손톱으로 그 권력층을 뚫으려고 해도 못 뚫습니다. 호산나라는 단체의, 이 집단적인 힘에 합류가 돼버려요. 이 권력층에. 합류가 되면서 내 구원이 좋다고 하다가 내가 다니는 교회가 괜찮다는 것으로 변해버려요. 내 믿음이 좋다. 십자가마을 괜찮다. 이래 돼버린다니까요. 무슨 천국에 십자가마을이 있습니까? 구원해줍니까? 안 해줘요. 왜 십자가마을이 구원해줍니까? 인간은 반드시 권력층을 통과해서 그 안에서 자기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리고자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호산나 하는 이러한 권력은, 더 센 권력에 의해서 결국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더 환호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백날 날 따라오면서 좋다고 해봐야 너희들 배후에 너희들보다 더 센 권력으로 짓누르고 있는 비계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너희는 군소리도 못하고, 끽소리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층을, 너희들이 뚫을 수 없는 그 권력층을 그 앞까지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깊숙이 들어가 버리면,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한테 어떤 능력이 되느냐 하면, 주님이 뚫었던 그 능력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진짜 니가 성령 받은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떠는 진짜 권력으로 우리에게 테스트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종교권력입니다. 쉽게 말해서 두 글자로 하면 교회입니다. “니가 복음을 알아? 그러면 교회에서 안면 무시당하고 교회에서 군소리하지 말라고 할 때 이겨낼 수 있겠어?”이래 돼버려요. “다 니한테 정주는 사람이고, 다 니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지옥가고 자기는 구원받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행여나 있을 수 있겠다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뭐냐 하면 권력에 대한 미련, 혼자 하니까, 너무 외로우니까, 더불어 믿으면 낫지 않겠느냐 그러한 통박 굴리고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떻게 소속에 합류되어 정신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겠다는 이 말은, 결국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이 무슨 대상이 되느냐 하면, 이게 연루가 아니고 관조가 돼버려요. “주님. 제 모습이 괜찮죠? 주님께서 평가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그럼 결국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 앞에서 우리는 초상화가 돼버리고,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뭐가 돼요? 초상화가 돼버려요. 그리스도 정교처럼. 그리스도 정교 보면 이게 무당인지, 기독교인지 이게 분간이 안 돼요. 아이구, 그 삼위일체도 얼마나 이쁘게 그려놨다고요. 이쁘게. 꼭 무당집에서 그려놓은 것처럼 하나님 세분을 쏙 그려놨어요. 그리스는 안 가봤지만, 걸어서 세계 속으로 라는 프로에 보면 많이 나와요. 보게 되면 그리스나, 발칸반도나 하여튼 그 위에 크로아티아도 있잖아요. 그 나라가 전부 그리스도정교 바닥이 아닙니까? 보면 전부 다 촛불 켜놓고, 촛불은 왜 켜는지 몰라요. 근데 향 안 피워놔서 천만다행이에요. 거기서 전부 다 빌고. 그리고 스페인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거는 관광산업이에요. 성자들이 갔던 코스대고 가게 되면, 중간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다 있어요. 거기에 보면 배낭여행 겸, 살 빼기운동 겸, 그것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20대에 돈 벌어서 배낭여행가고, 혼담은 안 들어오고 짜증나니까 개나 소나 다 배낭여행하면서, 행여나 또 괜찮은 외국남자 만날까 싶어서 잔뜩 기대를 걸고 배낭여행한다고 쭉 돌아보잖아요. 그 코스마다 이미 관광 상품이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어릴 적 동화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동원하는 이것을 주님이 어떻게 보시겠느냐? 주님은 하나의 관조가 되고 주님은 우리한테 초상화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우리한테 왔다면, 이건 아까 이야기한 율법 외에 한 의가 왔죠. 그 율법의 의는 미래적인 것으로 왔죠. 미래적인 것 앞에서 우리는 뭘 해도, 우리의 행위나 모든 것은 저주받을 짓이다. 선교, 전도, 설교, 강의해도, 뭘 해도 저주받을 짓이에요. 이걸 확정시키고,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의 빗금 친 몸이 우리에게 오는 것, 이 바닥을 예수님의 피로 적시게 되면, 우리는 이 자체로서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분류하는 작업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특명을 내려줬어요. 마치 욥에게 하라고 사탄에게 특명을 내리듯이. 사탄으로 하여금 전 세계 모든 기독교를 점령해라. 단체냐, 아니면 사건이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단체나 개인이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소유가 돼요. 상상계가 성립되지만, 우발적인 사건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째고 들어오니까. 자아든 주체든 이걸 개무시 하고 들어오니까요.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요. 예상 밖의 사태가. 전에 수요일에 설교 했는가,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손수건 가지고 사람들에게서 귀신 나오고 병 나았죠. 근데 자기 손수건이나 앞치마가지고 병 낫게 했을 때에 사도바울이 그걸 미리 예상했습니까? 몰랐습니까? 자기 손수건이고 자기앞치마지만 예상을 못했어요. 자, 그다음 질문, 그 손수건으로 했으니까 20장에서 그 손수건을 써먹었겠습니까? 안 써먹었겠습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써먹을까요? 안 써먹을까요? 써먹을 리가 있습니까? 왜? 나아봤자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고, 쓰시는 그 순간에 동시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거 한 3초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때문에 뭔가 상상계가 발휘되어서 그러니까 내가 신자 맞지? 하면서 하나님의 성도로 합치된다고 또 혼자 착각하고 상상을 해요. 그래서 무슨 사건 터지고 하면, “주여! 어찌 저에게 이런 일을?” 하고 까불다가, ‘아하, 그게 아니구나.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러니까 이 호산나 찬양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로 가는 이 코스를, 거꾸로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한테 이걸 재현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상이라고 합니다. 현상은 뭐가 아니다? 실체가 결코 아닙니다. 실체는 하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숨어있으니까, 숨어있다는 말은, 드러낸다는 것하고 같은 말이에요. 말은 반대인데, 연결되어 있어요. 숨어있다는 말은 숨어있는 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현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특징은 뭐냐 하면 다양합니다. 다양하니까 이건 뭘 부수느냐 하면 실재계를 부수는 거예요. 누구 따라하거나 누구 모방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현상, 이거는 우발적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거나 사도바울의 손수건이나, 이 모든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결코 사도바울에게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왜 자꾸 내가 했다고 하느냐? 세상에 사도바울이 무슨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계산해보면 39☓5=195, 평소에 사도바울이 195대 맞고 사도되려고 애를 썼습니까? 아니죠. 195대를 누가 때렸습니까? 맞는 것도 주님이 맞아야 돼요, 주님이 실체고 자기는 맞아야 될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도바울 때린 것은 사도바울을 때린 것이 아니고 주님을 때린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물주고 사도바울에게 옷 입혀준 것은 누구한테 한 겁니까? 주님한테 한 거예요. 바로 그런 관점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완료죠. 이미 완료된 관점에서 더 이상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변경이 성립이 안 돼요. 이미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를 어떻게 봐야 됩니까? 이미 끝난 상태기 때문에 변경이 안 됩니다. 그럼 합격했잖아요? 합격했는데 성경을 왜 봅니까? 바로 사건자체가, 십자가사건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돔위에다가 애굽 얹고, 애굽 위에다가 갈보리언덕 얹고, 두 증인 한꺼번에 시체 만들고, 거기다가 경주에 지진 일어나고, 부활이 일어나고, 온갖 요한계시록에 있던 것은 층층이 다 쌓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쌓이면 두꺼울 것이 아니냐? 사건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두꺼운 것이 없어요.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살아있으면 증거자로 우리가 있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성령이 하신 일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장로님께서 그런 질문했어요. “성령으로 구원받아야 되는데, 왜 십자가로 구원받습니까?” 우리교회 최근에 오신 장로님이신데, 그런 질문하신 것도 상당히 고마웠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왜,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야 하는데, 목사님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자꾸 이야기합니까?” 좀 우스워요? 질문이? 우스우면 답변해보시든지요? 요한복음 16장을 이야기해드렸습니다. 16장에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세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왔으니까 내가 성령을 소유해야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연루시키는 관계성을 맺을 때, 성령을 앞장세울 때는, 놀랍게도 성령이 성령을 앞장세우지 않아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성령은 배후에 역사하는 거예요. 이 모든 과정을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 성령을 내가 소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뭐가 급하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천당 가야 되겠다. 천당 가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십자가 믿을까? 성령 받을까? 내가 십자가 믿어도 성령이 안 오면 아니라고 했으니까, 애초부터 성령부터 받아버리면 십자가는 덤으로 오니까 구원받겠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하신 거예요. 근데 성령은, 사건은 사건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고, 다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실 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에서는. 그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미련하고 어리석게 오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지혜를 박살내는 방식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의 똑똑함과 지혜와 이성을 갖추었다는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태와 다양성 있게 연루되어 있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마음껏 부자는 부자 되게 하고, 갤럭시7인가, 갤럭시8인가 막 만들어내라 이 말입니다. 전부 다. 삼성이고 JP모건이고 하여튼 투자회사고 마음껏 자본주의 하세요. 그것이 다 무엇과 연루되어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연루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유지되는 세상이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다양성 있게. 따라서 우리는 그 가운데 뭐만 즐기면 돼요? 복음으로 마음껏, 희희낙락, 자유만 즐기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유를 할 때, 어디까지 자유를 해야 됩니까? 라고 또 자기의 상상계를 동원해요. 주체에 합당한, 첫째 시간에 상징계하니까, 어디까지가 아니고, 바람은 지나가고 난 뒤에 바람이 왔다는 것을 알잖아요. 전에 이야기했죠. 사랑이라는 것은 이별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안다고. 왜냐하면 이별 안 하면 사랑이 당연한 줄 알아요. 아내가 날 좋아하면 남편은 당연히 자기를 좋아해야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내하고 이혼하고 난 뒤에는 ‘아, 이게 많이 참았었구나. 억지로 해줬구나.’ 꼴 보기 싫은데도 밥해줬다는 것을 알듯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라고 하는 것은 항상 사후적이에요. 사건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사건의 의미를 붙일 수밖에 없는, 뒷북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고마운 것은 주께서 뒷북을 치시지 않고 앞북을 쳐주셔서 고맙죠. 오늘 제목을 앞북이라고 할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미리아시고, 창세전부터 우리의 일거수를 다 아시는 주님.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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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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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8 자유게시판 가락-요한복음12장12절(거주)1610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10-24
15,807 자유게시판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안내 - 최고관리자 1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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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5 묻고답하기 [2016.10.23. 성경모임-히브리서 10장] 뒤로 물러나지 말라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10-23
15,804 묻고답하기 믿음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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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2 묻고답하기 복음적 구원론 - 최고관리자 16-10-21
15,801 자유게시판 58강-창 12장 5-9절(제단쌓는 아브람)161019-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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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9 자유게시판 166강-YouTube강의(복음의 보호막)161018-이 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6-10-19
15,798 자유게시판 안양20161014a히12장22절(의도와 우연)-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10-19
15,797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9. 30)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10-19
15,796 강의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4 - 결탁관계 - 최고관리자 16-10-18
15,795 자유게시판 208강-고후 1장 18-19(예와 아니요)161009-이 근호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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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3 묻고답하기 성령과 약속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6-10-1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